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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칼럼



군산 3.5만세운동과 기독교

전병호 by  조회 수:36 2019.03.10 15:08

100주년을 맞이한 군산 3.5만세운동과 기독교

전병호목사

 

 

 

이미 1919년 3.1독립만세 운동이나 우리 군산의 3.5 만세운동에 대해 여러 메스컴이나 인터넷을 통해 많이들 보고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잘 알고 있다고 해도, 우리가 알고 기억하고 또 들어도, 다시 알아야 하고 기억해야 하고 들어야하고 후세에 전해야 할, 1919년 그해 봄 진달래처럼 피었다가 일제의 총칼에 붉은 꽃잎처럼 짓밟혔던 그 천추에 맺힌 민족적 한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당시 구암교회목사 불선교사는 전주에서 모임에 참석한 후 급히 군산으로 돌아와 군산의 무저항 독립만세운동과 일본경찰들의 무자비한 폭력을 보고 조용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리라는 생각을 하고 미국선교 본부에 상세하게 보고서를 작성하여 보내었습니다. 당시 이 보고서 일부를 소개하겠습니다.

 

< 3월 6일은 군산의 장날이었으며 그로부터 며칠 전 남자성경학교 소년들과 선생님들이 장날 시장에서 있을 대규모 시위 준비에 대비하여 대한민국 국기와 독립선언서 수백 부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독일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일본인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곳에 세간의 풍문을 들을 간첩들을 두었다. 사건이 일어나기 2일 전 일본경찰은 나와서 약한 병원도우미 중 한 명을 데리고 밤새 가두어 두고 압박을 행사하여 그가 굴복하여 모든 것, 연루된 사람들의 이름들과 그들이 정확히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어디에서 그런 준비를 하는지, 지금까지 해온 모든 준비사항들이 무엇인지 등을 실토하도록 하였다. 다음 날(시위가 발발하기 전날) 경찰 10명이 나와 학교 교사들을 체포하고 건물들을 수색하였으며 그들이 찾을 수 있었던 모든 혁명적인 문헌을 압수하였다. 교사들을 수갑 채워 학교 소년들을 감옥으로 끌고 갈 때 모여든 사람들은 모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당신이 그들을 데려 간다면 우리도 데려 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도 그들과 똑같이 이 일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경찰들은 사람들의 하는 말을 무시하고 선동지도자들만 데려 가기를 원했으며 60명 중 10명만을 체포하였다. 그들은 선생님들을 데리고 (우리 학교는 마을에서 약 2 1/2 마일 떨어진 곳에 있다) 한국 국기를 흔들면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모든 학생들을 뒤로 하고 군산으로 향했다. 오후에 병원에서 진료소가 운영 중에 선생님들이 체포를 당했다는 소식이 들었을 때 병원에서 도우미들은 가운과 모자를 벗어 던지고 경찰이 교사들을 수사하고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만약 당신이 그들을 데려 간다면 우리도 데려 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도 그들과 똑같이 이 일에 가담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그들이 그곳으로 가던 중에 많은 수의 아주 어린 소년들도 함께했다. 경찰관은 "돌아가라, 너희처럼 조그마한 것들이 무엇 때문에 왔나?"라고 말했다. 소년들은 대답했다. "당신이 그들을 데려가면 우리도 한국 국민이기 때문에 우리도 데려 가야 할 것이다." 그들이 선생님들을 조사하는 동안, 학교 소년이 모두 몰려왔기 때문에 경찰관이 총을 뽑아 들고 총격을 하겠다고 협박했고, 그곳에서 소년들은 어깨를 뒤로 젖히고 가슴을 내밀면서 “쏴, 쏴라”고 말했다. 경찰관 한 명이 칼을 선생님 중에 한 명에 대면서 위협했다. 선생님이 머리를 내밀고 “원하면 쳐라, 이것이 내가 10년 동안 일해 온 것이다.”라고 말했다.

 

행렬이 마을에 들어서면서 그들은 여러 그룹으로 나뉘어 거리 모퉁이나 광장의 전략적인 위치를 선정하고, 사람들이 국가의 독립을 위해 일어설 것을 을 요구하는 연설을 시작했다. 곧 많은 수의 경찰관과 소방서가 군중을 해산시키기 위해 소집되었다. 이 이야기는 내가 군산에 도착했을 당시 일어났던 사건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이다. 이는 전국에서 일어난 사건 중 하나 일뿐이다. 시위는 당초 예정했던 날보다 하루 일찍 일어났으며, 장날에 나와 시위에 가담할 수천 명의 사람들을 대신하여 이 지역 사람들이 목격하였고, 그 누구도 아닌 미션스쿨 학생들과 선생님들, 병원 도우미 그리고 군산 지역 기독교인들의 일부가 참여한 사건이다.

 

이곳의 시위는 일본인이 적당히 어렵지 않게 대응했을 정도로 가장 먼저 일어났던 시위 중 하나이다. 우리 자매 선교사 중 한 사람이 목격한 시위에 대한 이야기를 나에게 해주었다. 그녀는 3월 4일에 정오 무렵에 그녀가 살고 있는 지역의 시장에서 계속 고함지르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해주었다. 그녀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소리 나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녀가 근처에 다가갔을 때, 일본 소방서가 군중을 단단한 나무로 만들어진 곤봉과 손잡이가 길다란 곡괭이를 좌우로 휘두르면서 돌진하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어떤 사람이 부서진 두개골에서 뇌가 돌출된 상태로 감옥으로 끌려갔으며, 일본인 여성이 그 모습을 뒤에서 그를 조롱하는 것을 보았다. 또 다른 사례에서 어떤 무고한 노인은 무거운 클럽으로 머리 뒤쪽을 강타 당했고 그가 앞으로 쓰러질 때 다른 클럽으로 그를 얼굴을 맞았다. 이러한 시위자들은 절대적으로 비 무장한 상태였다. 어떤 사람은 턱이 한쪽으로 돌아간 상태로 묶여서 감옥에 끌려갔다. 이들 중 일부는 결백한 구경꾼이거나 또는 평상시와 같이 장사를 하러 시장에 나왔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막대기나 돌도, 손이나 발도 폭력을 제공하기 위해 들어 올리지 않았고, 그들을 개처럼 머리를 두들겨 패는 자들을 반대하는 어떠한 발언도 하지 않았다. 이 운동 지도자들은 국민들에게 폭력을 사용하지 말고 단지 그들이 주장하고자 하는 말을 할 것을 촉구하였고, 수동적 저항만을 할 것을 제안했다. 이 근처의 시장 마을에서는 군중들이 일본 군인들에게 총격을 당했고, 머리에 물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돌아오는 한 여성이 목에 총을 맞아 돌아오는 길에 죽임을 당했다.

 

또 들은 이야기 중에 다른 선교사가 시위 중 한 곳에 참석했고 군인이 해를 끼치지 않고 서있는 노인에게 덤벼들었고 그 노인이 도망가기 위해 길을 벗어나려고 할 때 일본 장교가 그의 뒤쪽으로 검을 휘둘렀고 칼을 뽑자 피가 솟구쳐 나왔다. 이 친구는 노인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기 전에 마을을 떠났다.

 

이러한 운동은 결코 기독교인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기독교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결과적으로 교회에 일본인의 분노를 가져오게 되었다. 일본 신문들은 국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도록 선동하는 선교사들을 고발하는 통렬한 기사들로 가득했다. 물론 선교사들은 어떤 식으로 던지 정치적으로 연루되는 것, 특히 한국인들이 그들의 권위에 반항하도록 격려하도록 해석될 수 있는 것은 애써 피해왔지만, 만약 문제가 생겼을 경우 선교사들이 그 사건의 기저에 있었다고 생각할 것은 명확했다. 대부분의 경우 전국에서 반란을 진압하려는 시도는 교회 자체의 박해로 끝났다.

 

일본 공무원이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에게 다음의 질문에 긍정적인 답변을 받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당신은 기독교인 인가?” 그 사람은 폭행을 당하고 감옥에 수감되어 유죄로 판명될 어떠한 증거가 없더라도 단순히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인정했다는 자체만으로 며칠 동안 그곳에 억류되었다. 어떤 지역에서는 교회가 파손됐고 일부는 묻혔으며 성경은 찢어졌고 기독교인임을 멈추라고 말했다. 군산 지역에서는 일본 공무원들이 한 목사와 여러 장로들을 데리고 가서 그들의 신앙을 포기하라고 말했고 그들은 당연히 일분도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여기에서 대략 15 마일 떨어진 곳에 큰 시장 마을이 있는데 주변의 사람들은 독립 시위를 하기 위하여 얼마동안 기다렸었으나, 조직과 지도력이 결여되어, 몇 주 동안이나 시골 전체가 그들 주변에 있는 우리 교회들 중 한 교회에서 독립 시위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구성원들을 바라보았다.

 

어느 장날, 그들은 우리 소년 학교에서 빌려간(몰래) 등사기로 찍은 독립선언서 수백 부와 질 좋은 한국 국기를 짊어지고 장터로 나갔다. 시장에 군중이 가장 많았던 정오 경에 지도자들은 수많은 군중들 사이를 들락날락하며 선언문을 배포하였고, 그들에게 국기를 들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 "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했다. 질서유지를 위해 시장 근처에는 주둔하는 일본 군인들이 있었다. 비록 그들이 군대에 의해 진압당할 것임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이 시위를 계획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손에 무엇 하나 든 것이 없었으며 폭력을 위해 손에 막대기 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정해진 시간에 그들은 깃발을 흔들고 나라의 독립을 외쳤다. 군인들은 외치는 소리를 듣고 군중을 위협하기 위해 공중으로 총을 발사하면서 돌진했지만 어떤 것도 그들을 위축시킬 수 없었다. 군인들은 군중에게 일제히 총을 발사하여 여러 명의 군중을 죽이고 사람들에게 상해를 입혔다. 동시에 소방대는 시장에서 군중들에게 공격을 퍼부었고, 그들은 어디로든 달려가서 무거운 클럽으로 사람들 머리를 두들겨 패고 곡괭이로 끔찍한 상해를 입혔다.

 

한 청년은 시위의 지도자였고 군인은 그를 잡아 감옥에 갈 것을 명령했다. 그 청년은 대답했다. "나는 체포될 만한 범죄를 전혀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에 감옥에 가기를 거절하겠다." 군인은 말했다. "당신이 감옥을 가지 않겠다면 나는 이 자리에서 당신을 죽일 것이다." 그 젊은 남자는 그의 머리를 세우고 가슴을 내밀며 말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당신은 나를 죽일 수 있지만, 당신은 나의 나라를 위한 나의 응원을 멈출 수 없다." 일본 병사가 그의 가슴에 칼을 꽂고 뽑아내자 피가 콸콸 흘러나왔고 청년은 바닥에 쓰러졌다. 군인이 그의 칼을 뽑아낼 때 청년은 말했다: "너는 나를 죽였지만, 이 참된 하나님은 너의 나라를 기억하실 것이다.“ 바닥으로 쓰러질 때 그는 마지막 숨과 힘을 다하여 "한국 독립 만세"이라고 외쳤다.

 

이 사건에서 6명의 살인사건이 있었는데 그들 모두 그리스도인이었다. 13살의 한 어린 소년은 팔에 총을 맞아 우리 병원으로 들어왔다. 나는 그를 만나러 내려가서 네가 "만세" 소리를 지르면 군인들에게 총에 맞을지 몰랐는지를 물었다. 그는 말했다: “알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나는 만세를 물러야만 했어요." 그로부터 2주일 후, 매일 옷을 입어야 하고, 총알 조각을 꺼내면서 팔에 오는 극도의 고통을 겪고 난 후에 나는 그에게 물었다. “당신이 겪었던 고통을 보면서 시위에 참여했다는 것을 후회하지 않나요?" 그가 말했다:"아니요, 전혀 후회하지 않습니다. “>

 

불선교사는 그때까지 19년간을 한국인과 함께 살아 왔는데 어떻게 사람들이 이 모든 것을 실행하고 계획하였었는지 매우 놀라워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무자비하게 살인행위를 저지르고 폭행하였으며 얼마나 극심하게 고문하였는지를... 일본인들이 무저항의 한국인들에게 야만적인 행사를 하였으면서도 세계에는 자신들이 매우 문명인답게 한국인들을 대하였다고 주장하였음을 자세하게 그의 보고서에 기록하였습니다. 불선교사는 보고서 말미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권세도 힘도 기뻐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과거 여러 차례 하나님의 때와 방법으로 감옥을 여시고 갇힌 자를 풀어주셨으며 하나님이 모욕 받은 사람들을 엄청난 명예와 영광을 하나님께 가져다 드리기 위하여 능히 사용하실 것이다.”>(이야기 전킨 157-162쪽)

 

보통 3.1운동을 천도교계 기독교계 불교계가 힘이 합쳐서 일구어 낸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3.1운동의 추진과정에서 우리가 주목할 세력은 학생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박희도와 이갑성 이 분은 엄밀히 말하면 기독교계 대표라기보다는 학생단의 대표라고 보는 것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실제로 이갑성은 세브란스 병원 제약 주임으로 있으면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었습니다. 박희도는 연희전문학교 기숙사 사감을 거처 중앙YMCA 회우부 간사로 있으면서 YMCA 학생사업에 관계하고 있었습니다.

 

일명 학생단의 독립운동은 1919년 1월 27일 경성 중국음식점 대곤원에서 시내 전문학생 대표들이 만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2월 12일 세브란스병원 구내에 있는 이갑성의 집에서 김원벽 한위건 김형기 윤자영 이용설 김문진 배동석 등 세브란스 의전 YMCA학생회 만남으로 독립 학생단 조직이 구체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학생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천도교 대표와 기독교 대표들이 삼일운동 거사 계획이 있음을 알게 되어 학생단은 이 계획에 합류하므로 자체적이 계획은 포기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세브란스의전 YMCA학생회와 이갑성과 함태영의 지도하에 삼남지방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일을 의론하게 되었습니다. 이갑성이 삼남지방을 맡기로 하고 자신이 먼저 대구 등 경상도 지역을 다녀온 뒤, 김문진을 대구로 배동석을 마산으로 김병수를 군산과 전주로 파견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2월 28일 밤 김성국과 김문진이 독립선언서 1,500매와 1,000매를 각기 이갑성에게서 건네받아 승동교회와 정동교회에 모인 학생대표들에게 전달하고, 김병수는 100매를, 이용상은 대구 이만집과 마산의 임학진에게 400매를 각기 전달하도록 하였습니다. 학생단은 독립선언서 배포와 학생동원의 책임을 맡아 3월 1일의 거사를 준비하고 이어 3월 5일에도 제 2차 독립만세운동을 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주관하기로 한 민족 대표들이 갑자기 태화관으로 장소를 옮기게 되자 학생들 주도하에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세브란스 의잔 학생인 김병수가 군산에 내려와 자신의 영명학교 선생인 박연세(朴淵世)선생에게 서울의 소식을 알리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경성에서는 (고종) 국장일을 기하여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아무 일도 없는지요?”(박연세에 대한 광주지방법원 군산분청 신문 조서) 김병수는 박연세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다짐받듯 이렇게 물은 뒤 독립선언서 95장을 전달하였습니다. 박연세 선생은 동료 교사인 이두열(李斗悅)과 김수영(金洙榮)선생과 논의를 하고 다시 같은 영명학교의 교사인 고석주(高錫柱)와 개복동교회 교인인 김성은(金聖思)·유희순(兪熙淳), 예수교 병원 사무원 양기준(梁基俊) 유한종(劉漢鍾) 양성도(楊成道) 등과 의논을 하였습니다.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 운동에 참여하였던 학생 조옥초(超玉肖)를 서울에 보내어 군산의 소식을 알리게 하고 3월 6일(음 2월 5일)의 군산 장날을 기해서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두열, 이준명, 김성은 등은 학생 김영후(金永厚), 송기옥(宋基玉) 등으로 학교 기숙사 2층 다락방에서 선언서 3,500매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들게 하며, 각 방면으로 연락하여 당일 집합 거사하도록 빠르게 진행시켜 나갔습니다.

 

그런데 거사계획 전날인 3월 5일, 영명중학교에서 오전 수업이 끝났을 때, 군산 경찰서의 순사 수명이 나타나서 이두열, 김수영, 박연세 등 교사를 연행하여 갔습니다. 군산경찰서의 일본 순사들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자가 군산에 나타났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반일감정의 온상’으로 지목해온 영명학교를 주시하던 중 앞에서 불선교사의 보고에 의하면 구암병원의 직원 한사람이 잡혀가 고문을 하므로 마침내 거사 계획을 불어 계획이 발각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거사계획이 좌절 일보 직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때 까지 표면에 나서지 않던 교사 김윤실(金潤實)과 학생들은 곧 긴급회의를 가졌습니다. 지금 당장 운동을 일으키지 않으면 만사 수포(水泡)로 돌아간다는 데 의견이 합치되었습니다.

 

학생 양기철(梁基哲), 전세종(田世鍾), 김영후, 송기옥, 이도준(李道俊), 홍천경(洪天敬), 고준명(高俊明), 유복섭(劉複燮), 오한길(吳漢吉), 강규언(姜圭彦), 강인성(姜仁聲)등이 앞장을 서고 멜본디 여학교 학생들도 함께 나섰습니다.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구암 동산에서 내려와 군산 시내로 들어갔습니다. 도중 구암교회 교인들과 개복교회 교인들이 가담하였습니다. 부근 주민들도 함께 나섰습니다. 보통학교 어린 학생들도 행렬로 뛰어들었습니다. 평화동(平和洞), 영동(榮洞)을 거쳐 본정 큰 거리에 이르는 동안 처음에는 100여명의 만세대열은 더욱 증가하여 5백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시민 정문선(鄭文善), 김영상(金永祥), 전종식(田鍾植), 문재봉(文在鳳), 홍종억(洪鍾億), 전봉신(田奉信), 박동근(朴東根), 임종우(林種祐), 이병관(李炳寬) 등이 학생들과 함께 앞장섰습니다. 학생들에 의하여 태극기가 나누어지고, 선언서가 배포되었습니다. 일부는 경찰서로 밀려가서 구속된 교사들을 석방하라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어린 학생들도 일본 순경 앞에서 소리쳤습니다. 위협을 느낀 일본 순사들은 총을 뽑아 공포탄을 쏘며 물러서라고 위협했습니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쏴 봐, 쏴 봐”하며 가슴을 풀어헤치는 등 대항하였습니다. 순경은 아이들에게도 가라고 소리치지만 아이들은 계속 외쳤습니다.

 

의외의 사태에 당황한 일본 경찰은 긴급 출동하고 이리(裡里) 주재 헌병대의 응원을 얻어 주동 인물들을 강제 검속하고 폭력으로 군중을 해산하기에 진력하였습니다.

 

뒤이어서는 영명학교 및 예배당을 수색하여 증거 물품을 수색하고 관계 인사들을 검속하였는데 영명학교에서는 등사한 선언서 2천여 장이 발견되었으며, 5일~8일간에 교사 고석주, 송정헌(宋正憲)과 병원 직원 양성도(楊成道), 안경태(安敬泰), 홍원경(洪元敬), 임병률(林秉律) 이진규(李眞圭), 김준실(金俊實), 송기주(宋基周), 이재근(李在根) 등을 위시하여 90여 명이 검속당하여 저의 비인도적인 고문과 학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운동으로 하여 주동 인물로 인정받은 영명학교 교사 이두열은 3년, 김수영와 박연세는 2년 반의 옥고(獄苦)를 치렀으며, 고석주, 김성은, 양기준, 유한종, 임종우, 김영상, 문재송 및 학생 유복섭, 고준상, 홍천경 등 30여명은 6개월 내지 1년 반 동안의 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번 켜진 만세운동의 불씨는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일한병합기념비(日韓倂合記念碑)에 쇠똥을 바르고 길바닥에 독립만세를 대문짝만하게 쓰는 등 일제에 대한 반감을 감추지 않는 이들이 속출했습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군산 거주 일본인들이 대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재향군인회 소속 일본인 200여 명은 매일 밤 3교대로 순찰을 돌고, 화재진화용 쇠갈고리로 무장한 소방대원들은 일본인 주택과 상점에 대한 경비를 섰습니다. 대농장주들은 치안 유지 경비에 보태라고 거액을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일경도 검문검색을 강화하며 공포 분위기 조성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군산의 3.5만세 운동이 이렇게 여기서 끝나날 수는 없었습니다. 당시 잡화상을 하던 청년 권재길은 3월 8일 “우리 일반 청년 및 노동자들은 궐기하고 있는데 학생들은 어찌하여 궐기하지 않는가”라는 문서를 작성한 뒤 군산지역 학교에 뿌렸습니다. ‘구암리에서 온 편지’라는 제목의 이 글을 받아본 군산공립보통학교(군산초등학교 전신) 학생들이 이에 호응하기 시작하였습니다(‘권재길 등 판결문’). 군산공립보통학교 생도들 중 18~19세의 상급생들이 비밀히 회합을 가지고 연락을 취하며, 영명 중학교 학생들의 뒤를 이어 만세운동에 나설 것을 계획하였던 것입니다. 그 중에도 문종묵(文鍾黙), 김학구(金學求), 김종련(金鍾鍊), 나명조(羅明祚), 신형식(申亨植) 등과 권재길(權在吉), 정미소 종업원인 이남률(李南律), 김수남(金壽男)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여 만세운동 계획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영명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이 배후에서 비밀히 지도하고 격려함으로 계획하는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군산공립보통학교는 이름 그대로 당시 일본인들에 의하여 운영되던 학교이며 교직원 중에도 일본인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생도들의 동향을 엄중히 감시 사찰 하고 있기 때문에 계획을 실행하는 일이 용이하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은 울분을 머금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문종묵, 김종련 등 생도들이 학교 밖 친구들인 권재길, 이남률 등과 연락을 취하여 선언서와 격문 등을 복사해서 군산시내와 옥구군 내에 산포하였고, 또 부두(埠頭)의 일터를 찾아가서 일하는 청년들을 붙들고 독립운동에 나설 것을 권하였습니다. 또 영명중학교의 남아 있는 학생들을 찾아서 위로하고 재 궐기를 촉구하기도 하였습니다.

 

3월 14일에는 김학구, 나명조, 신형식이 같은 보통학교 생도들과 협의하고 70여 명이 동맹(同盟)하여 퇴학원을 제출해서 학교 당국을 당황하게 하였습니다. 이 퇴학원서는 일본인 교장이 생도들을 간곡히 설유하며 돌려주어서 별일 없이 끝나기는 하였지만 이를 계기로 저들의 학교의 감시는 종전보다도 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생도들은 그럴수록 더 독립만세 시위에대한 의지를 불태우며 연락하여 거사를 계획하며 나명조, 신형식 등은 옥구군 미면(米面) 둔율리(屯栗里)에 있는 김학구의 집에 모여서 태극기를 제조하고 과격한 내용의 격문을 작성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무렵에는 또 심상치 않은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즉 3월 12일에는 군산경찰서 창고에 불이 일어나서 경찰과 소방서원이 비상출동하여 진화하는 등 일대 소란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경찰서 유치장에는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던 인사들이 수감되어 있었으며, 또 일본 경찰서는 애국 동포들의 원한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저들은 이것이 만세운동과 일맥의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여 더욱 삼엄한 경계를 펴고 혈안(血眼)이 되어 날뛰니 만세운동을 크게 일으킬 기회가 너무나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이 때에 이남률, 김수남이 나섰습니다. 교장 이하 일본인 교직원 또는 친일 교직원들이 주도권을 잡고, “조선 독립을 위해서는 식민지 교육의 온상인 보통학교를 불태워 버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며 군산공립보통학교를 불태워 버리기로 작정하였던 것입니다. 3월 23일 밤에 2사람은 전주가도(全州街道)변에 있는 신림약국(神林藥局)에서 알콜 1폰드와 장재동(藏財洞) 어느 상점에서 솜 1장을 사서 준비해 가지고, 밤 11시경에 군산 공립보통학교 구내로 들어가 동남쪽 승강구(昇降口)에서 솜에 알콜을 붓고 성냥으로 불을 그어대니 일어나는 화염(火焰)과 함께 교실은 잿더미가 되고 말았습니다. 삽시간에 이루어진 일이지만 일본인들에게 준 충격과 군산의 주민들에게 미친 영향은 매우 컸었습니다.

 

이 학교의 화재사건으로 하여 당사자인 김수남, 이남률은 물론, 뜻을 같이 하여 활동하던 권재길, 문종묵, 김학구, 나명조, 김종련, 신형식 등이 붙잡혀 김수남은 10년, 이남률은 7년형을 당하고, 권재길 등 6명은 모두 1년씩의 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군산공립보통학교 교실이 불탄 지 1주일이 되는 3월 30일이었습니다. 군산시에서 또 일대 만세시위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다음 날에 있은 제1차 만세운동 관계자들의 공판을 앞두고, 군산 주민들의 의지와 기개를 다시 한 번 과시하는 운동이었습니다. 밤 9시경이 되어 수백 명의 군중이 등불을 들어 길을 밝히고 태극기를 휘날리면서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나와 경찰서 앞과 재판소 앞으로 모였습니다. 어느 사이엔가 수천 명으로 헤아리게 되는 군중들은 대열을 지어 행진하며, “독립운동을 하려는 것은 빼앗긴 국권(國權)을 도로 찾으려는 것인데 이것이 무슨 죄가 된다고 구속하고 형을 언도한다는 것이냐?”고 하면서 만세를 소리소리 외쳤습니다. 놀라고 당황한 일본경찰은 총을 쏘며 제지하고, 태극기를 빼앗았습니다. 흥분한 군중들은 만세 소리를 더욱 힘차게 외치며 대들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나라의 독립이 될 것을 확실히 믿고 있다. 독립을 축하하기 위하여 만세를 부르는데 무슨 상관이 있어 우리 국기를 빼앗느냐? 이것은 우리나라 국기를 모욕하는 것이다.”

 

한참 동안의 승강이가 여기저기서 벌어졌습니다. 밤이 깊어서도 이곳저곳에서 만세성이 들려왔습니다. 사태 확산을 두려워한 일경은 무자비한 탄압을 벌렸습니다. 헌병대 군인과 경찰이 총을 쐈고 칼을 휘둘렀습니다. 여기에 일본인 재향군인회와 민간인들도 가세해 목총과 칼로 비무장이었던 한국인들을 무차별로 살상했습니다. 군산시내가 피로 물들었습니다.

 

이튿날은 재판이 있는 날입니다. 군산에는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이 있기 때문에 3월 5일에 있은 군산만세운동 관계 인사들이 이 군산 지청에서 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일본 법관에 의하여 형의 언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만세운동이 계속되는 정황에서였던 만큼 재판소 주위의 경계도 삼엄하였습니다. 영명중학교의 교사외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30여 명의 애국시민들이 죄인 아닌 죄인의 몸으로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간수에게 끌려 1사람 1사람 재판정으로 들어올 때마다 군중들의 시선은 그리로 쏠렸습니다. 관계자들이 모두 자리를 정할 무렵, 방청석에서는 별안간 대한 독립만세의 고함소리가 일어났습니다. 청년 한 사람이 일어나서 모자를 휘두르며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사람들도 모두 호응하여 일어나서 만세를 불렀습니다. 소위 공판정은 만세장으로 되고 만 것입니다. 일본 경찰의 삼엄한 경계로도 군산인의 마음속에서 울어 나오는 만세소리를 막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맨 먼저 일어서서 만세를 부른 사람은 영명학교가 있는 옥구군 개정면(開井面) 구암리(龜岩里)에 사는 강문호(康文昊) 청년이었습니다. 마음속으로 존경하고 믿던 그 씩씩하고 활발한 선생과 학생들이 초라한 죄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울분을 참지 못하여 만세의 함성을 올린 것이었습니다. 그는 법정에서 곧바로 구속되었습니다.

 

한편, 4월 1일부터는 옥구군 내의 여러 부락 산상에서 밤이면 불을 피워 놓고, 혹은 봉화를 들어 신호하며 만세를 불렀다. 4월 5일, 그날은 음력으로 3월 5일이었습니다. 양력 3.5만세운동을 음력 3.5만세운동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군산 시장에서 1천여 명이 동원된 만세시위가 있었는데, 이때에는 이리(裡里)에 주둔한 일본 보병부대의 일부까지 동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옥구군 내에서는 이유상(李有祥), 노춘만(盧春滿), 강성원(姜聖源) 등이 진작부터 지경(地境), 회현(澮縣), 대야(大野)면 등 여러 곳에서 선언서를 배포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면서 활동하였습니다.

 

또 옥구군 출신의 유학생 진장권(陳壯權)은 3월 1일 이후 서울에서 독립운동에 활약하다가 귀향하여 다시 채만식(蔡萬植)·김석종(金錫宗)·최한풍(崔漢豊)·김홍렬(金洪烈)·황봉규(黃鳳奎) 등과 함께 일대 시위운동을 계획하다가 일경에 붙잡혀 1년 또는 7개월의 옥살이를 하였는데, 그 중에도 진장권은 다시 상해로 나가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습니다.

 

군산의 3.5만세운동은 4.4 솜리(익산)만세운동으로 이어갔습니다. 4월 4일 이리 만세 사건에서 있었던 군산영명중학교 문용기 교사의 활동은 독립운동사에 찬란히 빛나는 별이었습니다. 문용기 선생은 당시 전라도 군산항 영명 중학교 교사로서 남전교회의 진실한 신앙인 이였습니다. 마침 4월 초순 이리 역에는 문용기 선생의 주도로 남전교회 교인들과 1만여 남녀 군중들이 모여 독립시위운동을 벌렸습니다. 이에 놀란 일본의 헌병들과 경찰들이 급히 출동하여 이들에게 검을 휘두르며 총을 쏘았습니다. 그러나 문용기 선생은 앞장서서 시위대를 지위하며 시위대들에게 연설을 계속하였습니다. 이에 화가 난 일경은 국기를 잡고 있는 문용기 선생의 오른 팔을 칼로 내리 쳤습니다. 그러나 문용기 열사는 굴하지 않고 다시 왼손으로 국기를 붙들고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하고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그러자 일경은 문용기 선생의 왼쪽 팔을 내리쳤다. 두 팔을 내리 찍힌 문용기 열사는 그래도 용기를 내 몸으로써 국기를 받치고 서서 군중들에게 만세를 부르라고 재촉을 하였습니다. 무자비한 왜병들은 칼을 들어 문용기 선생의 심장을 핏빛으로 물들여 놓고 말았으니 문용기 선생은 쓰러지면서도 “여러분이여! 여러분들이여! 나는 죽어 지하에서라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돕겠습니다.” 라고 외치면서 숨을 거두었습니다.(박은식 저 『한국독립운동 지혈사』)

 

3월 5일에서 5월 까지 산발적으로 군산 시내 여기저기서 만세 운동이 계속 되었으니 21회에 걸쳐 25, 800명이 참가하고 일제의 만행으로 21명이 죽고, 37명 부상당했으며, 145명이 투옥되었습니다. 주모자로 지목된 박연세 선생님은 2년 6개월, 이두열 선생님은 2년의 형을 받아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붙잡혀 고문을 당하고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3.5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이해서 100년 전 무저항으로 일본의 포악한 총칼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우리 군산의 선열들을 우리가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분들의 애국애족의 마음을 어찌 우리가 닮아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분들이 피 흘려 외치면 지켜야 하였던 우리의 소중한 조국을 그리고 우리 군산을 어찌 우리가 지키기 위해 다시 분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에게 이처럼 훌륭한 선조들이 계셨었는데 어찌 우리의 후손들에게 어리석고 못나고 겁쟁이 선조들이라고 기억되게 할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도 선열들의 정신을 이어 받아 우리 후손들에게 아름다운 나라를 물려줄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욱 물려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믿었던 복음에대한 믿음을, 그리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믿음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꼭 다시 되돌아 생각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125년 전 군산은 70여 가구가 듬성듬성 펼쳐 있는 작은 어촌 마을 이었습니다. 이곳 군산 인들이 그 후 25년이 지나 나라도 일본제국주의를 막지 못해 망하였는데 무자비한 일본의 총칼 앞에 무저항으로 태극기를 휘날리고 길거리에 피를 뿌리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게 될 수 있게 된 그 배후에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하게 하였는가 입니다.

 

바로 25년 전 전킨선교사와 드루선교사 이 두 선교사가 군산 수덕산에 초가집 두 채를 마련하고 기독교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였습니다. 처음 사람들은 멀리서 지켜보았지만 이들의 진정성 있는 태도와 복음의 진리에 그들의 싸락문을 열고 마음의 장막을 벋어버리고 군산교회로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전킨선교사와 드루선교사는 다만 복음만 전한 것이 아닙니다. 군산예수병원을 세워 병들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려냈습니다. 영명학교와 멜본딘여학교를 세워 세계적인 학식과 문물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민주주의가 무엇이고 자유와 평등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였습니다. 한글을 가르쳐 문맹의 눈을 뜨게 하고 여인들에게 가정에서의 여성의 위치와 머슴들에게 인권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일본의 악랄한 수탈이 얼마나 잘못되었고 망해가는 나라를 어떻게 바로 세워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많은 애국의 젊은이들이 모여들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후에 한국의 유명한 애국지사들이 학교 선생님으로 봉직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 나갈 길과 애국의 신념을 심어주었습니다. 이리하여 군산, 익산 그리고 호남 여러 곳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의 주역들은 대부분 영명학교 멜본딘학교 출신들이고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만일 영명학교와 멜본딘 학교가 없었다면, 그리고 군산예수병원, 구암교회 개복교회가 없었다면 군산에서 이런 삼오만세운동과 그 후 일어난 옥구농민항쟁운동들이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삼일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 군산에 와서 초가지 작은 방에 긴 다리도 제대로 피지 못한 채 자면서 복음을 전하고, 근대화의 물결을 전해주었으며 애국의 정신을 일깨워준 전킨 선교사와 드루선교사의 행적 또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전킨선교사와 드루선교사가 전해준 그 복음에 대한 분명한 자유에 대한 믿음 특히 출애굽 신앙이 삼오 만세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삼일독립선언서 처음에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로 시작합니다. 순수 한글로 읽으면 “우리는 여기에 우리 조선이 독립된 나라인 것과 조선사람이 자유인임을 선언하노라”로부터 시작합니다.

 

3.1독립운동의 정신을 한마디로 말하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유입니다. 자유가 없는 사람은 노예이며 자유가 없는 나라는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입니다. 우리나라는 1910년부터 45년 까지 35년 동안 일본의 식민지로 자유를 억압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자유를 되찾는 일이 나라가 독립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삼일독립선언서에 “조선인은 자유인이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유로운 사람으로 창조하시였습니다. 즉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자유롭게 산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자유로운 동산 에덴동산을 떠난 이래로 인간은 자유를 상실하게 됩니다. 죄는 곧 인간에게서 자유를 잃어버리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역사 이래 원죄로 말미암아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를 잃어버린 상태로 태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본래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자유를 위한 투쟁을 하게 됩니다. 그 어느 누구도 억압받기를 싫어합니다. 그 누구나 자신의 자유를 뺏앗기지 않으려고 싸우게 됩니다.

 

성경역사는 바로 자유를 향한 대 장정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의 노예생활을 하고 있을 때에 그들의 억압자들에 의한 고통을 보시고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자유롭게 하시는 역사가 바로 출애굽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이 출애굽의 역사는 희년의 정신으로 발전하였는데 레위기 25:10에 “ 너희는 오십년 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케라뎀 떼로르)”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장차 메시야가 오심으로 이사야 61:1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4:18이하에서 예수님께서 이 이사야의 글을 읽으시며 “이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8:32에“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헤 알레데이아 엘류데로세이 휘마스)” 말씀하셨고. 바울사도께서 갈라디아 5:1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은 곧 “너희는 자유이다”라로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억압과 굴레로부터 자유인이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는 수많은 유태인들을 수용소에 가두고 가스실에 집어넣어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당시 수용소에 갇혀 있던 유대인들이 <아니마민=나는 믿는다.>이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노래 가사는 간단합니다. “나는 믿는다. 나의 메시야가 나를 돕기 위하여 반드시 나를 찾아오리라는 사실을, 나는 믿는다." 는 노래입니다. 이렇게 간절한 소원이 담긴 노래를 부르건만 사람들은 여전히 가스실로 끌려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한 구절을 덧 붙여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때때로 메시아는 너무 늦게 오신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가스실로 죽음행렬을 이루며 가는 유대인들이 이 노래를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빅터 프랭클이란 젊은 의사가 있었는데 그는 그렇게 노래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나의 삶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기에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확신은 물론“메시아가 나를 구원하러 오시리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에 그 마지막 가사의 노래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불렀습니다. “나는 믿는다. 나의 메시야가 나를 돕기 위해 반드시 나를 찾아오리라는 사실을,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 서두른다. 사람들은 너무 서둘러 믿음을 포기한다.”

 

1919년 3월 5일 군산에서 만세를 불렀던 당시 우리의 선조 군산의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이 우리를 일제의 억압가운데서 해방시켜 주신다고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 일본 헌병의 총칼의 위협 앞에서도 만세를 불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며 믿음은 의인을 자유롭게 살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믿는다 하나님이 나를 죄에서 자유롭게 해 주셨음을 그러므로 나는 믿는다 나는 자유인임을 공포하는 것이 또한 10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믿음의 주제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월 1일 되면 전 국민들의 집 앞에 태극기를 달고, 기념식에 3.1절 노래를 제창합니다. 우리 군산 시민들은 3월 5일에도 집 앞에 태극기를 달고, 3.5절 기념노래를 부를 수 있으면 합니다. 아직 3.5절 기념 노래가 없습니다. 그리고 3.5일만 아니라 그 이후 한 달 여 동안 계속된 군산의 독립만세운동 특히 3월31일, 4월 5일에 있었던 군산 만세운동 등도 기억되어야 합니다. 그 당시 만세를 부르다가 순국과 고문과 감옥에 갇혔던 사람들 그리고 이름도 없이 쓸러져 간 애국 군산 사람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순국 애국 유족들을 모시고 함께 역사의 뜻을 되새길 수 있었으면 합니다. 3.5절 기념식이 구암교회 중심으로 진행되어 오고 있는데, 앞으로 전 시민적인 행사로 군산기독교 연합회를 위시한 종교계와 공무원, 시의원, 학교 등이 참여함으로 호남 최초로 일어난 독립과 자유의 정신을 되새기는 기회가 되도록 해야 하리라 생각됩니다.

 

 

2019년 3월 1일 오전 6시 군산세광교회 남전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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