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25일 주일아침예배 딤전 1:1-2 슈톨퍼스타인Stolperstein(걸림돌)앞에서
tvN이란 티비에서 <알쓸신잡3>이란 프로를 매주 보여주고 있는데 매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습니다. 알쓸신잡이란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이란 말을 줄여서 한 말이라고 합니다. 여기 작곡가유희열, 작가유시민, 소설가김영하, 도시공학교수김진애, 천체물리학자김상욱박사가 출연하여 쓸데없지만 들으면 신비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시끄럽게 떠들어데는 그들의 이야기 속에 각가지 지식을 배우게 되는 그런 프로입니다.
지난 2018년 10월 26일에 이분들이 독일의 생태도시 프라이부르크라는 도시에 방문한 이야기들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분들이 프라이부르크 도시의 길을 가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도로를 포장한 작은 돌들 사이에 황동으로 다른 블록보다 약간 높게 사각형으로 솟아난 것들이 있었습니다. 독일사람들은 이것을 ‘슈톨퍼스타인Stolperstein’ ‘걸림돌’이락 하였습니다. 무심코 걷다가 자칫 이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거나 다리가 삐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누구도 여기에 걸리지 않고 잘도 길을 다니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기하게 여겨 이게 뭐지?하며 자세히 보니 이 걸림돌은 제2차 세계 대전 때, 유태인이 그 자리에서 나치 독일군에게 체포되어 끌려간 자리로 그분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바로 유태인 누구가 독일군에게 끌려가 gmltdehls 것을 기념하는 흔적이었습니다.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선조들이 저지른 만행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그 황동걸림돌을 길에다 박아놓고 다시는 이런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자는 무언의 다짐이었습니다. 나치 독일이 저지른 만행이 독일 사람들에게 마음에 걸림돌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걸림돌은 다시는 역사의 걸림돌에 넘어지지 말고 올바르게 살아가자는 다짐이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들의 인생에 수많은 걸림돌이 있어 왔습니다. 때로는 그 걸림돌을 피하기도 하였지만 걸려 넘어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우리는 우리 앞에 그 어떤 걸림돌이 있다 하더라도 그 걸림돌은 걸림돌이 아니라 넘어지거나 다치지 않도록 주의를 주는 주목돌(注目石notestone)이라고 하겠습니다.
탈무드에는 사람을 평가하는 세 가지 기준을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는 ‘키이소오’(돈 주머니)입니다. 사람에게 돈을 맡겨서 어떻게 쓰고 어떻게 처리하는가를 보면 그 삶을 금방 평가할 수 있습니다. 돈주머니는 인간 평가기준으로 제일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돈주머니를 ‘유니버설 패스포트’라고 합니다. 둘째는 ‘코오소오’(술잔)입니다. 술잔은 인격을 흔드는 요소입니다. 사람이 모인 곳 가운데 술자리처럼 인심이 후한 곳이 없습니다. 술잔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제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합니다. 셋째는 ‘카아소오’(노여움)입니다. 노여움은 작은 것이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미친 사람처럼 되게 만드는 마력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자신이 평가 받는데 걸림돌이 되어 넘어지게 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이 걸림돌을 주목돌로 삼아 자신의 인생에 보탬이 되도록 합니다.
우리들의 인생길에 놓여 있는 걸리돌이 많지만 크게 3가지로 나누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당시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나, 동역자로 삼았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1차 전도여행 때 복음을 듣고 회심한 것으로 추정되며, 바울은 디모데를 믿음의 아들(고전 4 : 17), 동역자, 동료 등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바울은 3차 전도여행 중 3년간 에베소에 머물며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후에 마게도냐로 떠날 때, 디모데를 남겨 에베소 교회를 목양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7년후 바울이 62-63년 1차 로마 감옥 생활을 마치고 계속해서 전도 여행을 시작하면서 다시 에베소를 방문하고자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자, 목회에 필요한 내용들을 기록하여 디모데에게 편지를 전합니다. 이 때 편지가 디모데 전서입니다.
사도 바울이 쓴 편지를 살펴보면 거의 모든 편지에는 이 '은혜와 평강(카리스 카이 에이레네)' 이란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1:7절 말씀에 보면,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고린도전서 1:3절에서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랬습니다.
고린도후서 1:2절에서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갈라디아 1:3절 말씀에서도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에베소서 1:2절에서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디도서 1:4절에서도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빌레몬서 1:3절 말씀에서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은 이렇게 '은혜와 평강' 을 항상 함께 묶어 놓았습니다.
왜 바울은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하였습니까? 당시 사람들의 인사말로 카리스!, 에이레네하며 서로 인사말을 주고 받아씁니다. 그냥 바울은 지나가는 인사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사람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없이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이 은혜와 평강을 합쳐서 말을 하였을까요? 그냥 은혜 받으세요, 평안하세요? 라고 말하지 않고 이 두 말을 합쳐 인사말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것은 은혜라고 하는 것은 평강의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씨앗이고 평강은 씨앗이 자란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은혜가 없이 평강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은혜가 있는 곳에 반드시 평강의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은혜를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은혜를 한때 받았다가 잊어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은혜 없이 사니 평강도 없습니다. 왜 오늘의 사람들은 고난과 역경속에 원망과 불평 갈등과 다툼으로 살아가는 것입니까? 악착(齷齪)같이 살아도 언제나 한숨과 탄식뿐입니까? 평강이 없기 때문이고 은혜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역경 원망과 불평 갈등과 다툼이 여러분의 인생길에 걸림돌처럼 놓여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아! 지금은 은혜 받을 때요 평강을 누릴 때로구나! 라고 바로 바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 생각 못하면 그 걸림돌에 걸려 넘어질 것입니다. 인생 파탄이 납니다. 어떤 사람은 뇌물로 어떤사람은 성추행으로, 어떤 사람은 음주운전으로, 어떤 사람은 한순간의 분노로, 어떤 사람은 강도살인으로 등등 요즈음 인생파탄(bankruptcy人生破綻) 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TV뉴스 볼 때 마다 들려오는 소식이 대부분 그런 소식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특히 이런 파탄 난 사람들의 소식을 들을 때면 가슴이 아프고 슬프고 괴로워서 가능한 한 안 보고 안 들을려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러므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를 못 받으면 인생의 걸림돌에 넘어지게 됩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은혜라는 말을 잘 알지 못하면서도 "은혜, 은혜...." 합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에 기쁘고 즐거우면 "은혜 받았습니다!" 그럽니다. 그리고 별 감동이 없고 무덤덤하면 은혜를 못 받은 줄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은혜의 뜻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더 큰 감사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더 뜨거워지고 더욱 평강을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골로새서 1:6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그랬습니다.
골로새 교인들은 복음을 듣고 그리고 은혜를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말씀에 깨달을 때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지금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주시는 '카리스(은혜)' 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충격적이고 예상치 못했던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로우신 일을 행하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기만 해도 은혜가 되어 기쁘고 감사가 넘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은혜 받은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며 항상 기뻐하며 평가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를 둘러싼 환경이 아무리 그를 힘들게 한다해도 그는 그 속에서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평안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 어떤 걸림돌이 내 인생 앞에 있다 해도 그 걸림돌을 보는 순간 이거 큰일 났네! 야단났네! 이를 어쩌나하고 호들갑 떨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 하십시오 그러면 평강을 가지게 됩니다.
1984년 라일리는 살인죄로 감옥에서 복역을 하던중 탈옥하여 3일째 도망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굶주리고 지쳐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른 아침 한집을 선택해서 침입하여 부부를 인질로 잡았습니다. 그 집은 루이스 부인의 집이었습니다. 그는 권총으로 부부를 위협했습니다. 그런데 루이스 부인은 범인을 한번 쳐다보고는, 그가 들고 있는 권총을 내려다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봐요. 젊은이 그 총을 내려놓게, 이 집에서는 폭력이 허용되지 않는다네. 이 집은 하나님의 집이야" 그리고는 범인에게 아침밥을 차려주었습니다. 범인 라일리는 집에서 만든 음식을 4년 만에 먹어보는 순간이었습니다. 그가 식사를 하는 동안 루이스 부인은 그를 위하여 기도해주었습니다. 특별한 말은 없었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그를 보호해 주시고 그가 평강과 용서를 찾을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눈물이 그녀의 뺨위로 흘려내렸습니다. 두려움의 눈물이 아니라 연민과 사랑의 눈물이었습니다. 범인 라일리는 식탁에서 사랑을 느끼게 되었고, 그의 가슴속에 그 사랑의 씨앗이 심겨지게 되었습니다. 부인은 범인에게 자수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리고 대기 중이던 경찰에게 손을 잡고 함께 나아가서, 범인이 자신을 해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루이스 부인은 범인 라일리에게 편지와 만남으로 위로해주며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심을 믿게해 주었습니다. 10년후 라일리는 출소하게 되었고, 그 이후 재소자들이 출옥 이후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상담소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루이스 부인이 보여주었던 사랑과 용기를 간증하고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녀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평안이 있었습니다. 마음이 평안한 사람이 진정한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마음이 불안하면 용기를 낼 수 없습니다. 골리앗 앞에 선 어린 다윗도 마음이 평안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용기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루이스 부인은 루이스에게 용기를 냄것이 아니라 평안한 마음을 보인 것입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용기라고 보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의 집에 도둑이 들었다고 가정한다면 여러분의 태도가 어찌 보여 질 것인가? 도둑을 맞아본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도둑이 어지럽히고 나간 흔적만 보아도 소름이 끼친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그 도둑이 찾아올까봐 불안감에 싸여서 한동안 심리적인 불안감에 휩싸여 고생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앞에 도둑이 총이나 칼을 들고 나타났다면, 아마도 몇 분은 기절하거나 병원에 실려 갈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루이스 부인은 놀랍도록 침착했습니다. 그녀는 참으로 충격적인 상황 속에서도 평안함을 유지했습니다. 총을 든 탈옥수를 위해서 기도해주고 사랑이 담긴 아침식사를 차려줄 정도로 평안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탈옥수의 마음을 변화시킬만한 놀라운 용기가 그녀에게 있었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그 비결은 그녀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범인 라일리도 후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편안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우리들의 인생의 가장 큰 걸림돌은 불안입니다. 이 불안 걸림돌은 우리에게 평강을 빼앗아 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거나 받지 못하면 나타난 가장 큰 증세가 불안감입니다.
정신과적인 용어 가운데 '불안장애' 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앵자이어티 디스오더스(Anxiety Disorders) 라고 하는 것입니다. '장애'라는 말과 '병'이라는 말은 다릅니다. Disorders, Disease 그건 개념이 다릅니다. 다같은 병이지만은 병은 지금 진행 중이지만 잘만 치료하며 좋아지게 됩니다. 감기는 병입니다. 치료하면 고침받게 됩니다. 그런데 장애는 하번 장애가 되면 고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팔에 장애가 왔다. 그 팔이, 없던 팔이 생기지 않습니다. 시각에 장애가 왔다. 다시 시력이 회복될 가능성이 없습니다. 이게 바로 장애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말한 불안도 장애라는 것입니다. 물론 '불안' 이라고 하는 것은 정상적인 사람에게도 있습니다. 걱정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고,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도 하고. 이 많은 정신적 고통과 우리는 정면대결하면서 싸워나가는 것이 한평생 사는 보통 사람들의 생활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에 그만 이 상황이 뒤집히면서 불안에 압도되고 맙니다. 그러면 이 불안을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이 다 소실되어 버린 상태 가 되어 버립니다. 이러면 헤어나지 못합니다. 불안의 노예가 되고, 불안에 완전히 사로잡힌 채로 살아갑니다. 이 불안장애,Anxiety Disorders 걸림돌에 넘어져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빌 4:7에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평강의 하나님,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결론부터 말씀하면 우리 마음은 우리 마음대로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강을 주셔야 평안할 수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다스려 주셔야 됩니다. 그가 우리를 다스리실 때 내가 평안할 수 있는 것이지 내 스스로 평안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평강은 빼앗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벌 수 있어도 평안을 벌수는 없습니다. 출세를 얻어낼 수도 있지만은 평안한 잠을 잘 수 있는 것은 이건 은혜입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발견하기까지는 그 어디서도 참 평안을 얻을 수 없었노라. 하나님을 만나기까지는 절대로 평안은 없습니다. 불안이 환경과 물질과 관계없는 것처럼 평안도 무조건적입니다. 환경이 나쁘다고 평안하던가요? 환경이 좋다고 평안해지던가요? 돈이 있다고 평안하고 없다고 불안하던가요? 그러면 돈이 없으면 다 괴롭던가요? 이 모든 것들이 관계있는 것 같이 보이는데 관계가 없어요. 그런고로 평안도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불안이란 걸림돌에 걸리게 되면 걸려 넘어질 것이 아니라 즉시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은혜받기를 기도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조그만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데 풍랑이 일어나가지고 배가 뒤집어 질듯 제멋대로 흔들리니 본디 갈릴리 바다에서 어부로 잔뼈가 굳었던 제자들마저 불안과 공포에 소리를 지릅니다. '아이고,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라고 이렇게 소란을 떨지만 예수님은 고물에 누워서 평안하게 주무셨습니다. 풍랑속의 고요함. 죽겠다고 떠드는 데도 예수님은 편안했습니다. 이 평안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앞에 놓고도, 십자가를 앞에 놓고 말씀하십니다. "내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주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 이 절대적 평강,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 없으면 평강도 없습니다. 불안장애로부터 고침 받는 유일한 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평강을 얻게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바울사도께서는 당신의 여러 서신에서 ‘은혜와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말씀하였는데 오늘 봉독한 디모데 전서에서는 하나 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 지어다(카리스, 엘레오스, 에이레네)’를 말씀하였습니다. 디모데 후서에도 똑같은 기원이 있습니다. 왜 디모데에게는 은혜와 평강과 함께 긍휼이 있기를 기원한 것입니까?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은혜가 뿌리라고 하면 평강은 열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열매가 있으려면 꽃이 피어야 합니다. 그 꽃이 긍휼입니다. 평강을 오래 누리려 하면 우리들의 인생에 긍휼이 있어야 합니다. 긍휼은 성경에 인애 자비로도 번역이 됩니다. 긍휼은 사랑의 구체적 표현을 말합니다. 그것은 베푸는 사랑입니다. 은혜를 거저 받았으니 또한 우리도 거저 남에게 긍휼을 ㅂ풀어야 합니다. 마 5:7에 팔복중에 긍휼이 여기는 자는 긍휼이 여김을 받는 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마 9:13과 12:7에서 호6:6을 인용하시면서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독일사람들이 길바닥에 걸림돌을 놓고 유대인들의 희생을 생각하면서 다시는 그런 어리석고 패역한 짓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지금의 독일사람들의 마음엔 억울하게 죽은 유태인들에대한 긍휼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왜 일본 당국자가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 여인들을 위안부로 끌어간 일에 사과 한마디를 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 마음에 이 긍휼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평강도 없으며 그러므로 긍휼함도 없습니다. 그러니 일본당국자는 위안부라는 걸림돌에 넘어저 일어서지 못하고 세계인들에게 조롱을 받고 있습니다.
기독교인 생활의 기본은 긍휼한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남을 배려하고 불쌍히 여기고 인자한 마음으로 안아주고 보살피고 베푸는 풍성한 마음을 가지는 생활입니다. 그런 사람은 날마다 평강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신시아커지 김석희옮김 걸림돌을 디딤돌로 삼아라 이레출판 2006.5.22.에서)
레그손 카이라는 흑인 소년이 있었습니다. 이 소년은 5일치 식량과 자신의 두 보물인 성경책과 천로역정 그리고 방어용 손도끼와 담요만 가지고 인생을 건 여행길에 나섰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남동부의 니아살랜드(1964년 말라위로 독립) 부족 마을을 출발해, 걸어서 북쪽으로 동아프리카의 황야를 가로질러 카이로로 간 다음, 그곳에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갈 생각이었습니다. 때는 1958년 10월이었는데, 어머니가 레그손이 태어난 날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으므로, 당시 레그손은 열여섯 혹은 열일곱 살이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둘 다 문맹이었고, 미국이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먼 곳인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부모는 레그손의 결심을 달가워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아들의 여행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레그손의 여행은 교육을 받아야겠다는 결심에 불을 지핀 그만의 꿈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레그손은 자신의 영웅들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가난한 환경을 떨치고 일어나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고, 다시 쉼 없이 싸워 노예들을 해방시킨 에이브러햄링컨. 그리고 노예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위대한 개혁가이자 교육자가 되어 자신과 자신의 동족에게 희망과 존엄성을 선사한 부커T. 워싱턴. 이런 훌륭한 역할모델들처럼 레그손은 인류에 봉사하고 싶었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희망과 목표를 실현하려면 최고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 했습니다. 레그손은 그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최선의 장소가 미국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레그손은 무일푼에 뱃삯을 치를 어떤 방도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어느 대학을 갈지, 또 그 대학이 과연 그를 받아줄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집트 카이로는 레그손이 살던 마을로부터 무려 약 4천800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며, 그곳으로 가려면 50개 이상의 언어를 사용하는 수백 개의 부족이 살고 있는 마을들을 지나야 하는데, 레그손은 그중 어떤 말도 할 줄 몰랐습니다.당시 레그손을 둘러싸고 있던 온갖 부정적인 조건들일랑 어느 한 가지도 준비된바 없었습니다.
다만 레그손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땅에 가겠다는 목표 외에는 아무것도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레그손이 처음부터 그렇게 의지가 강했던 것은 아닙니다. 어릴 적 그는 가난을 핑계 삼아 열심히 공부를 하지 않았고, 해야 할 일도 미뤄두기 일쑤였습니다.
“나는 가난한 아이야.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당시 마을 아이들 대부분이 그랬듯, 니아살랜드 지방 카롱가 출신의 가난한 소년 레그손에게 공부는 시간낭비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레그손은 선교사들이 가져온 책 더미를 구경하다가 에이브러햄 링컨과 부커T. 워싱턴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레그손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 더 많은 꿈을 꿀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카이로까지 4천800킬로미터를 걸어가겠다는, 보통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가당치도 않은 계획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험한 아프리카 땅을 꼬박 5일 동안 맨발로 걸었지만, 겨우 40킬로미터 정도밖에 걷지 못했습니다. 준비한 식량은 벌써 떨어지고 물도 거의 바닥났으며 돈도 없었습니다. 이런 상태로 남은 4천760킬로미터를 계속 걸어간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레그손은 고개를떨구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돌아서는 것은 자신의 꿈을 포기한다는 뜻이었고, 가난과 무지의 삶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과 약속했습니다.
“나는 미국에 갈 때까지, 아니면 노력하다 죽는 순간까지 멈추지 않을 거야.”
그는 계속 전진했습니다. 때로는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걸었지만, 대부분은 혼자였습니다. 가다가 마을을 만나도 그곳 원주민들이 자신에게 적대적일지 우호적일지 몰라 조심스럽게 들어서야 했습니다. 어떤 때는 마을에서 일과 잠자리를 얻을 수 있었지만, 수많은 밤을 별을 보며 길거리에서 잠을 잤고, 야생 과일 등 먹을 수 있는 식물들을 찾아 연명해야 했습니다.
그는 점점 야위어갔습니다. 열병에 걸려 심하게 앓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친절한 낯선 이들이 약초로 치료해 주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지치고 의기소침해진 레그손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수백 수천번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어리석어 보이는 여행에 목숨을 거느니, 집으로 돌아가는 편이 자신의 미래를 위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유혹했습니다.
하지만 그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대신 레그손은 자신이 늘 가지고 다니는 두 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이미 익숙한 글을 다시 읽으며, 자신의 목표에 대한 믿음을 새로이 다졌습니다. 그리고 계속 전진했습니다.
1960년 1월 19일, 불확실한 여행길에 오른지 15개월 만에 레그손 카이라는 이집트 카이로까지 총거리의 3분의 1인 1천600킬로미터를 걸어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에 도착했습니다.
그동안 레그손은 더 튼튼해졌고 생존기술도 더 많이 익힌 상태였습니다. 그는 6개월 동안 캄팔라에 머물면서 돈을 벌기 위해 이런저런 일을 닥치는 대로했고, 틈만 나면 도서관으로 달려가 주린 듯 책을 읽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서관에서 사진이 실린 미국 대학 안내책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한 대학의 사진이 레그손의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아래 분수와 잔디밭이 아름답고, 주변으로는 고향 니아살랜드의 웅장한 봉우리들을 연상시키는 장대한 산들이 펼쳐져 있는, 위풍당당하면서도 친근한 느낌의 건물이었습니다. 워싱턴주 마운트버넌에 있는 스캐짓밸리대학은 레그손의 막연해 보이는 모험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 첫 이미지였습니다.
그는 즉시 그 학교의 학장에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입학 허가와 장학금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레그손은 스캐짓 밸리대학에 입학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자신의 빈약한 예산이 허락하는 선에서 최대한 많은 대학에 편지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습니다. 스캐짓밸리대학의 학장이 레그손의 용기와 결의에 깊은 감동을 받아 그에게 입학을 허락했을 뿐만 아니라, 장학금은 물론 숙식을 해결해 줄 일자리까지 제공해 준 것입니다. 꿈의 또 다른 한 조각이 제자리를 찾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레그손의 앞길에는 아직도 많은 장애물이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그는 여권과 비자를 받아야 했는데, 여권을 받으려면 정부에 확증된 출생일자를 제출해야 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비자를 받으려면 적어도 미국 왕복 항공요금 만큼의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그는 펜을 들어 어릴 적부터 자신을 지도해 준 선교사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 선교사들은 정부기관에 영향력을 행사해 레그손이 여권을 받을 수 있게끔 도와주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비자를 신청하는 데 필요한 항공요금은 마련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레그손은 이에 굴하지 않고 어떻게든 돈을 구할 수 있으리라 굳게 믿으며, 카이로를 향해 계속 걸었습니다. 그는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 남은 돈으로 신발 한 켤레를 샀습니다. 스캐짓 밸리대학의 교문을 맨발로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시 몇 개월이 지나면서 레그손의 용감한 여행에 대한 소문이 곳곳으로 퍼져갔습니다. 그가 무일푼에 지친 몸을 이끌고 아프리카 수단의 수도 하르툼에 도착했을 때에는, 레그손 카이라의 전설이 아프리카 대륙에서 대서양을 건너 워싱턴주의 마운트버넌에까지 전해져 있었습니다. 스캐짓밸리대학의 학생들은 주민들의 협조를 얻어 레그손의 항공요금으로 650달러를 모금해 보내 주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레그손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털석 주저앉아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문제가 해결됐다는 기쁨과 도와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과 극도의 피로가 몰려왔던 것입니다.
1960년 12월 레그손은 마침내 스캐짓밸리대학에 도착했습니다. 길고 긴 여행을 시작한 지 2년도 더 지난 후였습니다. 그동안 소중히 간직해 온 두 권의 책, 성경과 천로역정을 가슴에 품은 채 레그손은 높이 솟은 이 대학의 교문을 자랑스럽게 통과했습니다.
레그손 카이라의 도전은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학문적 여정을 계속 밟은 그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정치학 교수이자 존경받는 작가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레이손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굽힐 줄 모르는 확고부동한 의지만이 아니라 그에게 보낸 수많은 사람들의 긍휼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긍휼함이 없었다면 그의 인생은 넘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레이손의 인생길에 수많은 걸림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걸림돌을 만날 때 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였고 궁핍과 고통 속에서도 평안을 얻었습니다. 이제 교수가 된 그는 아프리카 가난한 아이들을 향한 받은바 은혜에 감사해서 긍휼을 베풀고 있습니다.
바울사도께서는 에베소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긍휼의 목회를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에베소는 우상의 도시요 환락의 도시입니다. 저도 그 곳을 가보았습니다. 물론 지금은 폐허이지만 그 옛날의 화려하였던 에베소 도시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사도 또한 이곳에서 3년 동안 교회를 개척하였기 때문에 디모데에게 다만 은혜와 평강만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이 있기를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의 기본은 긍휼함입니다. 긍휼 없는 사람에게 은혜의 뿌리는 말라버리고 평강의 열매는 병들어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긍휼이란 꽃을 피울 때에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로 늘 평강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 라온코이노니아는 은혜를 심고 긍휼의 꽃을 피워 평강을 누리는 성도들의 신앙공동체입니다. 우리 앞에 인생의 걸림돌이 없을 수 없으나 있게 될 때에 걸림돌을 주목돌로 보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금년 마지막 한 달 12월 달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대강절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주일입니다. 한해를 마감하는 성탄절기에 아기 예수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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