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7일 주일아침예배 눅6:27-38 爾之大賞
세계에서 가장 큰 상 노벨상 상금이 12억 6천만원으로 지난 10월 1일부터 의학상 물리학상 화학상 평화상이 주어졌고 그리고 8일 경제학상이 주어집니다. 상을 받은 사람들을 종교별로 나누면 기독교개신교가 63% 이고 카토릭이 23%입니다. 유태교가 22% 물교가 0.9% 흰두교가 0.8% 그 밖의 종교와 무종교입니다. 노벨상을 받은 사람들 대부분이 종교를 가지고 있고 그중에 개신교기독교가 월등하게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몇 사람이 노벨상을 받았을까요? 한사람? 지난 2000년 김대중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노벨상 명단에 한국사람이 또 한사람이 있습니다. 1987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찰스 피더슨박사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노르웨이사람이고 어머니는 일본사람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한국 사람으로 기록된 것입니까? 피터슨박사가 1904년 부산에서 활동하던 중에 태어났습니다. 노벨상위원회는 지금은 아니지만 1990년 이전에는 태어난 곳 즉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느냐를 국적으로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피더슨박사가 부산에서 태어나 8살까지 살았기 때문에 노벨상명단에는 한국인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일 년 하구 많은 날에 노벨상을 어째서 10월초에 수여를 합니까? 우리 서기 달력에 1582년 10월 4일부터 10월 14일까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닌까? 만일 1582년 10월 7일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생일이 없습니다. 그날은 없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1582년 10월 3일 다음날은 10월 15일입니다. 노벨상위원회는 이 없어진 날을 기념하여 10월 초순에 상을 수여하도록 결정한 것입니다. 이번에 문재인대통령이 혹시 노벨평화상을 받지 않을까하고 기대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만 아마도 우리나라와 북한 간에 종전이 선언되고 평화조약을 맺게 된다면 내년에는 노벨평화상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의학상 물리학상 화학상등 여로분야에 노벨상 받는 사람들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노벨상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상이 더욱 귀하다고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상을 받아 본 적이 있습니까? 무슨 상이던지 받으면 기쁩니다. 저는 지금까지 학교 다니면서 개근상외에 다른 상은 받아본 적도 없습니다. 학교에서 개근상 받는 것도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대학 다닐 때에 학교에서 축제가 이었습니다. 축제 때 팔씨름대회가 있었는데 제가 한사람을 이겼습니다. 그 상이 볼펜 한자루였습니다. 그 당시 모나미볼펜이 나온지 얼마 안 되었던 때입니다. 그 볼펜 한 자루 받고 얼마나 기뻐하였는지 모릅니다. 또 길을 가다가 서울 명동에서 MBC라디오가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퀴즈를 내어 마치면 상을 주었는데 저도 문제 하나를 맞쳤습니다. 그 상이 양은 냄비 하나였습니다. 그 상을 바도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는 다면 이것은 너무너무 기쁜 일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봉독한 말씀에서 35절에 “너의 상이 크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상도 큰상 대상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누가 대상을 받을 것입니까?를 말하기 전에 누가 대상을 주는가를 먼저 알고 믿어야 대상을 받게 됩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을 알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는 것을 알면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왜 못 믿습니까?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믿는 자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전지 전능 무소 부재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믿으십니까?. 그 하나님을 우리가 믿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상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히 11:6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님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 지니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 '그가 계신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믿음은 사단에게도 있기 때문입니다.
약2:19절을 보면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드니라” 그랬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존재는 구약 시대 선지자들을 통해 알려지고 마지막 때에 아들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알게되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 없이 아는 하나님은 우리가 아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유대교인도 알고 마호멭교인들도 아는 그런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주신 그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빌립이 하나님 아버지를 보았으면 좋겠다고 할 때에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 계신 하나님! 이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 오늘 이 예배당에 오실 때에 어떤 마음으로 오셨습니까? 오늘 예배당에 가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오셨습니까?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여기에 모인 우리 주의 은총 받은 자여라 주께서 이 자리에 함께 계심을 믿노라....” 이 믿음으로 오셨습니까? 아니면 주일이기 때문에 그저 습관적으로 예배당에 오시지는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오늘도 살아계시고 우리를 만나주신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예배드리러 오실 때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일상생활 순간순간들마다에서 하나님께서 살아 계셔서 지금 나와 동행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믿고 살아가는 삶과,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 상 받는 인생이냐 아니면 벌 받는 인생이냐입니다. 지금 나의 인생이 상 받는 인생이라면 천국에서 상이 더 클 것이고 벌 받는 인생이라면 지옥에서 더 큰 벌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믿는자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은 상 받는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시43:4절을 보면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여기서 큰 기쁨을 전에 개역 성경에서는 극락의 기쁨이라고 하였습니다. 극락이 무엇입니까? 불교도인들은 자기들이 불교를 열심히 믿으면 죽어서 극락세계에 간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므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극락 세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눈동자같이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상입니다. 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 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 볼찌라.”
그런데 하나님이 대상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이 대상입니까. ?
오늘의 봉독한 말씀 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안겨 주심이 대상입니다. 누구에게 이 큰 대상을 주십니까? “주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주라는 말이 헬라어 언어로 “디도미”라고합니다. 이 말은 요3:16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에도 사용되었습니다. 행20:35에 예수께서 친히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서슴없이 베푼 모든 사람들에게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영광으로 갚아 주시기 때문이다.
후히 되어...주리라 - '후히 되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트론 칼론'은 '분량', '척도'(메트론)라는 말과 '좋은'(칼로스)이라는 말의 합성어로서 '좋은 분량으로 주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충분히 주십니까? 이렇듯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열배 삼배 60배 100배 1000배 만배로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여 그 이상으로 주시는 대상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행복은 움켜쥘 때 오지 않고 나눌 때 옵니다. 유엔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으로 활동했던 사회학자 장 지글러는 탐욕의 시대라는 책에서, 매년 천 만 명이 넘는 5세 미만의 어린이들이 가난으로 인한 영양 결핍과 질병으로 목숨을 잃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들이 죽어가는 것이 지구상에 식량이 부족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 세계 인구가 먹을 수 있을 만큼 이 지상에 양식은 해마다 남아돌아가는데 굶어 죽는다는 것은 바로 탐욕 때문에, 나누지 않기 때문에 그런 비극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꼭 돈이 많아야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골목골목 다니며 폐휴지를 모아서 기부하는 할아버지도 있고, 구두를 닦아주고 받은 돈 중, 동전을 따로 모았다가 기부하는 구두미화원도 있습니다. 또 어떤 유치원에서는 아이들이 고사리 손으로 매달 얼마씩 내어 꾸준히 모았는데, 그 돈으로 아프리카에 우물을 설치하여 많은 사람이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힘들고 각박한 세상이지만 이처럼 작은 것이라도 나누고 베푸는 마음이 있어서 세상이 따뜻해지고 살 맛 나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먹을 것도 없는데 남과 나눌 것이 어디 있냐? 나눌 것 없어 못 나눈다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아마도 평생 나누지 못하는 그론 인생을 살 것입니다. 없다고 말하는 부정적인 생각은 더 큰 부정의 결과를 낳고, 있다고 긍정적인 생각은 더 큰 긍정의 결과를 얻게 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10대는 철이 없다. 20대는 답이 없다. 30대는 집이 없다. 40대는 돈이 없다. 50대는 일이 없다. 60대는 낙이 없다. 70대는 이가 없다. 80대는 처가 없다. 90대는 시간이 없다. 100대는 다 필요 없다.’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보면 이렇게 다 없는 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없다고 생각하면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십자가에 죽어서 피를 흘리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음을 갖고 언제나 긍적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기독교인의 사전에는 없다라는 말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하나님이 은혜로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없다고 생각하면 패배의식에 잡히게 되어 모든 것을 없는 방향으로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모세가 열두 명의 정탐꾼을 택하여 가나안땅을 탐지했을 때, 열 명은 할 수 없다는 생각의 안경을 끼고 출발했습니다. 그들 생각이 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에 40주 40야를 정탐한 곳에 할 수 없는 것만 바라보았었습니다. 민수기 13장 31절로 33절에 보면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말할 수 없는 부정적인 관찰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 중에는 조금만 잘못하면 부정적인 마음의 생각을 가지고 모든 환경에 부정적인 환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해야 될까요? 우리들은 우리와 함께 동행 하시는 전지전능하시고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항상 바라봐야 합니다.
여호수아 1장 5절로 6절에 보면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주님이 같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용감한 마음을 가지고 나가면 주님께서 책임지고 같이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열 두 정탐꾼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할 수 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라’는 확실한 생각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그들은 그런 안경을 끼었기 때문에 그들이 본 모든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셨다는 신념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정탐한 땅마다 “아, 이거 이미 하나님이 주신 땅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땅으로 주셨다.” 그러므로 이미 받은 마음을 가지고 보기 때문에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았습니다. “모두다 우리 밥이다. 우리 밥이다.”
그러므로 민수기 13장 30절에 보면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그렇게 했으나 백성들이 돌을 들어서 갈렙을 쳐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열두 정탐꾼 중에 열 명처럼 부정적인 생각으로 사물을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오면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고, 못하고 안 되는 것만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신다는 것을 마음속에 늘 생각하고 “주께서 나와 같이 계신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리고 의지하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볼지어다 세상 끝 날까지 내가 항상 너와 같이 있으리라’ 이 말씀을 의지하고 같이 계신 하나님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뜨겁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늘 훨씬 뜨겁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8절로 39절에 보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 일방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이처럼 사랑하니까 이 사랑의 줄을 누가 끊을 수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7장 11절에도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리고 하나님이 능치 못하심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능치 못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 생각으로 하나님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 좋다는 것도 하나님 보시기는 좋기 때문에 그것을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것은 좋아서 좋고, 나쁜 것은 좋게 만들어 줄 것이니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하나님을 따라 가니까 모든 일이 좋게 되고,
스바냐서 3장 17절에 보면 ‘너의 하나님 야훼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한 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나님이 우리를 기쁨으로 말미암아 이기지 못합니다. 마음에. 그리고 우리를 보고 즐거이 부르짖으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 박아 피를 흘리고 몸을 찢고 피를 부어서 우리에게 주어서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이든지 믿음으로 살려고 해야지, 인간적인 생각으로 “할 수 없다. 못한다. 안 된다.”고 하면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라’는 주님의 명령은 절대적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넘치도록 주시력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알고 계시는 예수님이 “주라”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6절에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서로 나누어 준다. 나누어 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더 여러분에게 맡겨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미워하시는 것은 탐욕입니다. 탐욕이란 나누지 않으려는 부정적인 마음을 말합니다. 이런 부정적인 마음이(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 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탐욕을 버리고 나누어 주는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아끼지 아니하고 여러분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를 어렵게 살도록 하나님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내려와서 우리를 책임지십니다. 성령이 보혜사가 되어서 우리 가운데 계신 것입니다. 보혜사란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우리를 돕기 위해서 항상 우리와 같이 계신 이’를 보혜사라고 그럽니다. 그러므로 보혜사는 항상 우리와 같이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같이 지금 계십니다.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기쁘고 즐겁게 여러분의 손을 잡고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에게 불안을 주지 않습니다. 공포를 주지 않습니다. 불신앙을 주시지 않습니다. 마귀가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하는 것으로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공포심에 붙잡히게 하고 불신앙하게 만드는 것입니
복음교회 선교부에서 옛 북한교회 찾기운동을 하려고 하여 저에게 자문을 구해 1945년전 북한 명천 영흥 청진 고성 금강산등에 복음교회가 있었는데, 우선 가까운 고성이나 금강산지역을 추천하였습니다. 앞으로 그 지역주민들을 돕는 일이 무엇인가를 기도하며 계획하여야 할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앞으로 북한과 관계가 정상화된다면 북한 주민들을 돕는 일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통일과 평화를 앞당기는 기독교선교가 필요합니다. 북한의 가난한 주민들에게 "주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귀가 있어야 합니다.
한가지 기억할 것은 ‘주라’라고 말씀하심은 다만 동정하라 구제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대접하는 일입니다. 귀한사람을 대접하듯이 손님을 영접하듯이 깍듯이 공손히 대접하는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하는 일이 곧 나를 대접하는 일이라고 예수님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대접하듯이 어려운 이웃들에게,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심징 원수라 할지라도 나의 것을 나누어 대접하는 일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시고 노벨상은 저리가라 하나님의 대상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라온코이노니아 성도들은 다 하나님의 대상을 받으시길 축원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