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30일 주일아침 예배 삼상 31:1-13 라온코이노니아의 비창
가을이 깊어가는 이 맘 때가 되면 어쩐지 마음이 우울해 지며 살아 온 지난날을 뒤 돌아 보게 됩니다, 지금까지 내가 무었을 하며 살아 왔는가 전도서의 말씀처럼 허되고 헛된 바람잡는 인생을 살아왔다는 자괴감(自愧感)과 비참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가을이 깊어가는 요즈음 조용히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6번인 비창(悲愴 Pathetique) 을 듣곤 합니다. 이 비창 곡은 차이코프스키의 마지막 작품으로 이곡을 1893년 10월 30일 초연한 그는 11월1일 음식점에서 물을 마신 것이 원인이 되어 당시 유행하던 콜레라에 걸려 닷새 뒤에 그만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때 그의 나이는 53세였습니다.
차이코프스키의 장례 행렬 당시 수십만 사랑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습니다.
모두 4악장으로 되어 있는데 1악장은 신음하듯 조용하게 연주되다가 힘차게 마치 군대가 전쟁에서 돌격하듯 그러나 어딘가 애수가 깃들어 있는듯합니다. 제 2악장에서는 익살스럽기도 하고 경쾌한 템포로 진행합니다. 3악장에서는 마치 행진곡처럼 연주가 질풍노도같이 웅장하게 펼쳐지면서 심볼즈가 쾅쾅거리고 팀파니 북이 요란스럽게 두두립니다. 보통 다른 음악가의 곡들은 여기서 화려하게 음악이 끝나게 되는데 차이코프스키는 4악장에서 탄식과 흐느낌이 들려옵니다. 그야말로 낙담 절망 체념으로 비통한 슬픔이 가슴에 진하게 지나갑니다. 마지막 언제 끝나는지도 모르듯 스르르 곡이 끝나버립니다. 4악장을 듣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리게 됩니다. 인생이 한때는 세상을 내노라 하며 살아가다가 나이 들어 낙엽지어 떨어져 도로에 뒹구는 나뭇잎 그렇게 시들어가는 인생이 아니겠는가 참으로 인생의 비참한 말로를 느끼게 됩니다. 가을은 슬픈 가을이고 슬픈 인생을 말해 줍니다.
가을이면 생각나는 불후의 명곡 차중락의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
찬바람이 싸늘하게 얼굴을 스치면
따스하던 너의 두 뺨이 몹시도 그리웁구나
푸르던 잎 단풍으로 곱게곱게 물들어
그 잎새에 사랑의 꿈 고이 간직하렸더니
아~ 그 옛날이 너무도 그리워라
낙엽이 지면 꿈도 따라 가는 줄 왜 몰랐던가
사랑하는 이 마음을 어찌 하오 어찌 하오
너와 나의 사랑의 꿈 낙엽따라 가버렸으니
아~ 그 옛날이 너무도 그리워라
낙엽이 지면 꿈도 따라 가는 줄 왜 몰랐던가
사랑하는 이 마음을 어찌 하오 어찌 하오
너와 나의 사랑의 꿈 낙엽따라 가버렸으니
아~ 그 옛날이 너무도 그리워라
낙엽이 지면 꿈도 따라 가는 줄 왜 몰랐던가
어찌 인생이 낙엽처럼 쓸쓸히 떠나간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낙엽따라 가버리는 인생인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최근 최순실이란 한 여인으로 인하여 아니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이 두여인으로 인하여 지금 이 나라 백성들은 한마디로 멘붕(멘탈 붕괴 mental collapsing) 정신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고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뒤에 최순실과 그녀의 추종자들이 우리나라의 국정을 좌지우지하였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우상호 더불어 민주당 원내 대표가 “비참한 심정”이라고 말하였는데 그 소식을 들은 제 마음도 비참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습니다. 비참(悲慘)이란 말은 더할 수 없이 슬프고 끔찍하다는 뜻입니다. 조금 어려운 말을 쓰자면, 우울할 땐 허무주의자인 니체를 생각하고, 무력할 땐 아리스토텔레스를 생각하고, 비참할 땐 스피노자를 생각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 스피노자를 생각하라고 하는가? 네델란드 철학자인 스피노자는 에티카라는 책에서 사랑의 최고의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인간 행복이라는 근본적인 질문은, 최고의 선(善)인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왜 비참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하는가? 이 말씀에 대해 오늘의 말씀의 결론 부분에서 말씀하겠습니다.
성경 상에 인생의 마지막을 비참하게 끝낸 사람이 바로 사울 왕입니다.
오늘 말씀은 사울 왕이 전쟁에서 죽은 이야기입니다. 블레셋 사람이 쳐들어 와서 전쟁을 하게 되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밀려서 도망을 쳤습니다. 길보아 산까지 도망치다가 거기서 수많은 사람들이 엎드러져 죽었고, 사울 왕과 그의 세 아들들도 쫓기다가 그 아들들은 죽임을 당하고 사울 왕은 적군이 쏜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 때, 사울은 자기의 병기 든 자에게 칼을 빼어 자기를 찌르라고 했습니다. 생포되어 당하게 될 말할 수 없는 모욕과 고통을 생각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병기 든 자는 심히 두려워하여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살을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의 병기 든 자도 따라서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죽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날에 사울과 그 세 아들 그리고 그의 병기 든 자가 다 함께 죽었습니다.
그들이 죽은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다음 7절을 보십시오.
삼상 31:7 “골짜기 저편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과 요단 건너편에 있는 자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도망한 것과 사울과 그 아들들의 죽었음을 보고 성읍들을 버리고 도망하매 블레셋 사람들이 이르러 거기 거하니라”
그 다음 어떻게 되었습니까? 8절에 보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삼상 31:8-10 “그 이튿날 블레셋 사람들이 죽은 자를 벗기러 왔다가 사울과 그 세 아들이 길보아 산에서 죽은 것을 보고 사울의 머리를 베고 그 갑옷을 벗기고 자기들의 신당과 백성에게 전파하기 위하여 그것을 블레셋 사람의 땅 사방에 보내고 그 갑옷은 아스다롯의 집에 두고 그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 박으매”
사울의 시체는 목 베임을 받고 온 블레셋 땅에 조롱거리가 되었으며, 그의 갑옷은 그들의 신당에 전시되었고 그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 박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받아 사무엘이 기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된 사울 왕의 최후가 어찌 이리 비참할 수 있습니까?
본래 사울왕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우선 외모로 볼 때 사람이 준수하고, 키가 컸습니다.
삼상9:2절 “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컸더라.”
그 뿐만 아니라 사무엘이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했을 때 그는 이렇게 고백할 정도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삼상 9:21절 “사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하니”
이 말은 나는 가정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너무 부족하여 감히 왕이 될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울은 매우 겸손한 사람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왕이 된 이후 그는 변하였습니다. 그는 교만하고 시기심이 많고 불순종한 왕이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사울왕이 변하였습니까? 사울 왕은 하나님을 멀리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상 그의 마음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사울이 왕이 된지 2년 되었을 때에 블레셋 사람과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사울은 사무엘 선지자가 와서 기도해 주기를 원했는데, 사무엘이 늦자 자기 손으로 번제와 화목제물을 취하고 제사를 드린 일이 있었습니다. 제사를 다 마친 후 도착한 사무엘은 그런 그의 행동을 보고 망령되이 행했다고 책망했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일은 제사장이 드려야 하는 일인데,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왕이 마음대로 행동을 하였으니 하나님이 왕의 나라를 길게 하지 않고 그 마음에 맞는 자를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다고 했습니다.(삼상 13:13-14) 이 때 사울이 취한 행동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아니한 행동이요, 그 행동의 근저에는 이미 마음이 높아지고 교만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 후부터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나중에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을 때에도 사울은 그 명령을 겉으로만 지키는 척 하고 실제로는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 때 사무엘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는 말을 전했습니다.(삼상 15:22-23)
사울 왕은 다윗이 백성들에게 환호성을 받을 때에 시기와 질투심이 발동하여 자기 사위임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다윗이 도망을 하니 다윗을 찾아다니며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는 신경쇄약에 걸려 마치 다윗이 자기를 해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생각은 털끝만큼도 하지를 않았습니다. 충분히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도 있었지만 사울왕의 옷깃만 베었을 뿐입니다. 그의 신경쇠약은 마침내 무당을 부르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대상 10:13,14에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 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신 18“11.12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
레 20:6 “접신한 자와 박수무당을 음란하게 따르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의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
레 20:27 “남자나 여자가 접신하거나 박수무당이 되거든 반드시 죽일지니 곧 돌로 그를 치라 그들의 피가 자기들에게로 돌아가리라”
왜 사울 왕의 인생에 비차한 종말이 온 것입니까?
어떤 사람은 평생 시기와 질투로 그 마음을 채웁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억지와 고집으로 그 마음을 채웁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원망과 불평으로 그 마음을 채웁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교만과 자만심으로 그 마음을 채웁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불통과 의심으로 그 마음을 채웁니다.
그래서 그는 오직 자기만 알고 자기중심적으로 이기심에 집착하여 이웃도 안보이고 친구도 안보이고 가족도 안보이고 오로지 자기 유익만을 찾다보니 언제나 다툼과 분쟁을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그의 가슴엔 근심과 불안과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그가 찾는 것은 귀신의 위로뿐이니 무당을 찾아가고 점쟁이를 찾아가고 권력에 집착하게 됩니다. 사울 왕이 그렇습니다. 북쪽에 김정은이도 그렇고 남쪽에 또 박 근혜 대통령도 그런 분이 아닌가? 최근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박대통령은 최태민을 의지 하였고 그의 딸 최신실을 의지 하였습니다. 그런 박대통령을 많은 나라 사람들이 그녀를 환호하였고 그의 권력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러나 믿기지 아니하는 그런 소식 앞에 사람들은 경악과 분노와 배신감에 떨고 있으면 그리고 박대통령의 말로에 비참한 모습을 볼까 또 두려워합니다. 저는 그 소식을 들으며 제 귀를 의심하였고 정말 일까? 손석희 아나운서가 잘못 말하는 것은 아닌가 어떻게 대통령이 그럴 수 있는가? 저는 비참한 마음이 아니라 비창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비창(悲愴)이란 낱말의 뜻은 참담하도록 슬프고 서러움을 말합니다. 최신실에 의해 국정이 농단되었다는 것에 참담한 마음이요 그런 최신실을 의지하며 그동안 행세한 이가 우리나라 대통령이었다는데 슬프고 이런 소식을 듣도자 TV 앞에 넋 놓고 앉아 있는 나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니 서럽다고 하겠습니다. ‘울어라 열풍아 밤이 새도록’ 과연 이런 비창한 사실 앞에 어찌하면 좋을까?
오늘 아침 감나무 낙엽을 쓸던 중에 예수님은 이런 소식을 들으시면 어찌 하실 것인가? 문뜩 예수님의 참담하셨던 마음을 묵상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화들짝 놀랐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음행한 여인을 돌로 치려하던 사람들에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하시며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하시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요 8:1) 예수님의 자비로운 말씀이 제 가슴에 화살처럼 꽂혔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에 오른 때에 예수님의 심정은 얼마나 비참하고 비창하셨을 것인가 분노가 하늘끝 까지 닿고도 남으셨을 터인데, 아니요,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저들의 죄를 용서 하옵소서“ 하나님께 하소연 하시던 그 음성이 제 귀에 들려오는 듯하였습니다. 몇 년 전 로마 바티칸 성당에서 미케란제로가 조각한 ”피에타“라 부르는 조각상을 보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시신과 그 시신을 무릎 위에 앉히고 내려다보는 성모 마리아를 조각한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미케란제로의 최고의 조각품이라 하겠습니다. 저는 그 조각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제 눈에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피에타“란 말은 ”자비를 베푸소서“ 란 말이라고 합니다.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에 비창이 가득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비탄한 심정을 극복할 수 있음은 십자가에 죽으신 아들 예수로부터 품어져 나오는 자비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셨으나 그 자비하심이 온 세계를 구원하식 된 것입니다.
사무엘 하 1:17을 보면 사울왕의 죽음을 듣고 다윗은 심히 애통해 하면 조가를 지어 애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울왕의 손자 므비보셋을 데려다 왕궁에 살게하면 항상 함께 식사를 하였습니다. 다윗의 가슴에 자비와 용서가 가득하였던 것입니다.
앞에서 비참할 때 스피노자를 생각하라는 말씀을 하였습니다. 스피노자는 최고의 선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으로 비참함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자비와 용서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황당함 이 어처구니없는 국정을 농단한 한 여인과 그 여인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방치한 박근혜 대통령에게 국민적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가 온 땅에 가득한 죄악을 쓸어버릴 절호의 기회라고 하겠습니다. 태풍이 산과 강에 가득한 쓰레기들을 치워버리듯 오늘 이 땅에 불어 온 정치적 쓰나미로 여야를 막론하고 우리 사회에 만연한 사악한 죄악들을 정화시키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누가 돌을 먼저 들것입니까? 그동안 박대통령의 뒷배를 믿고 호의 호식한 많은 정치인들 경제인들 대학교수들 심지어 최태민에게 목사안수를 주고 최태민의 집회에 참석하여 박대통령의 만세를 부르고 대통령에게 축복을 내려 달라고 기도하며 각가지 혜택을 누렸던 많은 목사들, 그 어떤 비난에도 불구하고 박근혜라면 무조건 지지하던 수많은 경상남북도 지지자들 60%이상의 노인들 어버이 단체들 이 모든 사람들을 어찌할 것입니까? 자비와 용서는 죄를 묻어 둔다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모른척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진상은 규명되어야 하고 죄는 묻고 악은 퇴출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분노의 함성으로는 새로운 역사를 세워나갈 수 없습니다. 분노는 정의를 말하지 못합니다. 분노 가운데는 하나님이 계실 자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분노를 타고 마귀가 역사합니다. 4.19혁명 후에 박정희 군사독제가 있었고 5,18광주항쟁 후에 전두환 군사독제가 있었고 6.10항쟁 이후엔 노태우정권이 들어섰습니다. 그 당시 저는 분노와 정의 이름을 내 걸고 최루탄 가스를 뒤집어 쓰면서 거리를 질주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의는 곧 사라지고 더 큰 불의가 세상을 지배하였고 곧 사람들은 불의에 익숙해 졌습니다. 정의를 위한다고 불의한 행동이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폭력은 폭력으로 이어지고 불의는 다시 불의를 잉태합니다. 그것이 이나라 정치역사입니다. 북한 김정은은 우리나라 역사의 최악의 정권입니다. 김정은의 폭력정치와 핵무기 위협에 한국 정부는 겁을 먹고 개성공단을 철수하고 모든 북한 지원을 중단하였습니다. 많은 북한 주민들이 헐벗고 굶어 죽어가는 데 나몰라라하고 있습니다. 사드를 배치하고 더 강력한 무력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불의를 불의로 막겠다면 더 큰 불의가 생겨납니디. 마귀역사를 마귀역사로 막는다면 더 큰 마귀역사가 나타날 뿐입니다. 그 불의가 박대통령을 불의한 대통령으로 그래서 오늘 사람들은 분노와 비참한 심정으로 촛불 집회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비창한 눈으로 박근혜 대통령 과 최순실과 그와 함께 국정을 농단한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그들의 말로를 슬픈 눈으로 바라봅니다. 그들의 인생의 종말을 가슴아파하며 바라봅니다. 아직도 자신들의 잘못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애써 외면하면 온갖 변명과 핑계로 빠져나가려는 그 부끄러운 모습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바라보는 우리들의 가슴에 자비와 용서가 있어야 함은 그래야 비로소 하나님이 이 나라를 새롭게 하시는 일을 시작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울 왕은 죽었고 자비와 용서의 다윗은 이스라엘 왕이 되었습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손에 의해 새로워지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마치 강물이 흐르듯 자비와 용서를 타고 흐릅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시는 새로운 정치 새로운 나라를 세우시도록 하나님께 맡기는 마음이 곧 우리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시121:1-2 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이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이것이 자비와 용서의 마음을 가진 사람의 믿음의 소리입니다.
라온코이노니아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비창한 마음에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가 가득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