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3일 주일아침 예배 설교 성경 빌 4:8.9 라온코이노니아의 이미지(信仰狀態)
오래전에 그러닌까 아마도 꼭 50년전 제가 좋아하던 미국 여자영화배우가 있었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어여쁜 얼굴 아마도 1950-60년대 당시 인기 있던 여자 영화배우 중에 마리린 몬로. 그레이스 케리, 오드리 헵번,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어린나이에 좋아한 여배우는 도리스 데이(Doris Day, 본명 Doris Mary Ann Kappelhoff, 1922 - )라는 가수 겸 여배우였습니다. 영화 속에서 항상 밝은 미소와 건강함을 자랑하였던 도리스 데이는 원래 무용수를 꿈꾸던 소녀였습니다. 하지만 교통사고로 인한 다리 부상으로 인하여 무용을 포기하고 가수로 목표를 바꾸었고 영화배우가 되었습니다. 도리스 데이를 모른다면 이 노래는 기억하실 것입니다. “Que sera, sera, Whatever will be, will be...” 제가 고등학생 때 18번 노래가 이 ‘케세라 세라’였습니다. 케세라 세라라는 뜻은 스페인어로 직역하면 '되는 것이 되어라'라는 의미지만 '될 대로 되어라,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의미로 많이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뒤에서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만 나중에 알고 보니 이런 해석엔 오해가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4.19혁명이 있었고, 3학년 때 박정희 5.16 군사쿠데타가 있었습니다. 나라는 어수선하고 사회는 매우 뒤숭숭하고 미래가 불안한 당시 고등학생인 저는 “케세라 세라”“될 대로 대라”를 주제가처럼 부르며 다녔습니다. 이 노래의 가사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When I was just a little girl,
내 나이 아주 어릴 때
I asked my mother,
어머니에 물었어요.
What will I be
난 커서 뭐가 될까요
Will I be pretty
내가 예뻐질수 있을까요
Will I be rich
부자가 될까요
Here's what she said to me.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어요.
Que sera, sera,
케세라 세라 모든것은 될대로 되는 거란다
Whatever will be,will be
무엇이 되든지 간에
The furture's not ours to see.
미래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란다.
Que sera, sera,
케세라 세라
Whatever will be,will be
무엇이 되든지 간에
When I was just a child in school,
내가 학교에 다니게 되었을때
I asked my teacher,
선생님에게 물었어요.
What will I try
뭘 해볼까요
Should I paint pictures
그림을 그릴까요
Should I sing songs
노래를 할까요
This was her wise reply.
선생님의 대답은 이랬어요.
Que sera, sera,
케세라 세라
Whatever will be,will be
무엇이 되든지 간에
The furture's not ours to see.
미래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란다.
Que sera, sera,
케세라 세라
Whatever will be,will be
무엇이 되든지 간에
When I grew up and fell in love.
내가 자라서 사랑에 빠졌을때
I asked my sweetheart.
난 내 연인에게 물었어요.
What lies ahead
우리앞에 무엇이 있을까
Will we have rainbows
무지개가 있을까
Day after day
날마다?
Here's what my sweetheart said.
내 연인은 이렇게 말했어요.
Que sera, sera,
케세라 세라
Whatever will be,will be
무엇이 되든지 간에
The furture's not ours to see.
미래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란다.
Que sera, sera,
케세라 세라
Whatever will be,will be
무엇이 되든지 간에
미국 뉴욕에 제인이라는 여 검사가 있습니다. 제인은 군인인 홀아버지 밑에서 자라 세상의 모든 가치를 군대식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34살에 최고의 승소율을 자랑하는 뉴욕 지방검사보이지만, 이렇게 자기 직업에 철두철미하고 독립심이 강한 제인에게도 어려움이 있었으니 인간관계는 빵점이었습니다. 검은 정장에 흰 셔츠, 잠수부 시계에 화장도 하지 않고 제인은 냉철하고 흐트러짐 없는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였습니다. 이러한 제인의 태도는 사람들을 질리게 하여 호감을 주지 못해 제대로 친구 한사람 없었습니다.
어느 눈이 펄펄 내리는 날, 경찰관 라일리의 살인 재판을 앞두고 집에서 자료를 조사하던 제인은 우연히 ‘도리스 데이’가 출연하는 영화를 보게 되고 순식간에 그녀의 매력에 빠져들었습니다. 제인은 그날 이후부터 도리스 데이가 되기로 결심하고 그녀와 똑같은 복장, 말투, 행동, 사고방식 등 하나에서 열까지 철저히 도리스 데이로 변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검정색 일색이었던 정장을 벗어던지고, 도리스 데이처럼 핑크색 러블리한 드레스를 즐겨 입습니다. 머리도 웨이브진 숏 보브로 바꾸었습니다.
도리스 데이의 웨이브 숏 보브 머리스타일
남자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도리스 데이를 보며 제인은 그녀와 같이 행동하면 자신도 남자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딱딱하고 깐깐한 여검사가 하루아침에 부드럽고 상냥하고 아름다운 도리스 데이로 변한 모습을 두고 주위 사람들은 제인이 아마도 재판장(배심원)을 ‘미인계’로서 재판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전략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제인은 중대한 재판에 승소하게 됩니다. 어이없게도 사람들은 사랑스러운 도리스 데이에게는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인은 이런 도리스 데이식 태도를 계속 취할지 말지에 대해서 갈등을 겪다가 앞으로도 도리스 데이로 살아가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단순히 사람들의 호감을 얻기 위해 시작한 도리스 데이의 변신이 어느새 외모 뿐 아니라 제인의 사고방식과 마음가짐까지 닮게 되고 마침내 제인에게 참된 사랑이 찾아들었습니다. 샤론 클럼이란 분이 쓴 장편소설 <제인 스프링 다이어리>라는 소설의 내용입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어쩌면 제인의 도리스데이 닮기가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더 타인의 사랑을 쉽게 받을 수 있는 길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곤 합니다. 특히 소설 안에서 제인의 도리스 데이 코스프레(연예인 따라하기)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저 여자가 외로움에 지치더니 드디어 미쳤나?'라고 여기는 부분에서, 결국은 제인의 노력은 실패할거라 생각들 할 것입니다.
이 작품이 말하려는 것은, 직설적이고, 깐깐하고, 바늘 한 치의 틈도 허용치 않을 만큼 완벽을 추구하던 제인이 도리스 데이로 변하고 난 뒤 바라본 세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에 관해입니다.
비록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이지만 도리스 데이의 이미지는 부드럽고 상냥하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여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꽃다운 고등학생 제 어린 마음에도 도리스 데이는 이상형 여인으로 비쳐졌습니다.
제인 스프링 다이어리
저자샤론 크럼 | 임정희 옮김 출판노블마인 펴냄 | 2006.08.24. 발간
영어로 이미지란 말이 있습니다. 내가 보는 내 모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보는 내 모습이 어떤한가를 뜻하는 말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꽃 들이 각각 다른 모습으로 다른 색갈로 다른 냄새로 피고 있습니다. 세상에 미운 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꽃이 상징하는 이미지들은 각각입니다. 예를 들면 매화꽃은 고결한 마음의 청결한 이미지를 나타냅니다. 진달래 꽃은 애틋한 사랑의 이미지를 나타냅니다. 김소월의 시중에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아쉬움을 진잘래라는 이미지를 통해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장미꽃을 보고 어떤 이미지를 느낍니까?
일본 유행가에 ‘꽃의 이미지’(花のイマージュ 카시부치 테츠로 작사작곡)란 노래가 있는데 그 가사에 “아아 아이시아이타이 바라니나리타이(ああ 愛しあいたい バラになりたい) 아아 사랑이 하고 싶다 장미가 되고싶다........코이와 하나노 이마-쥬(恋は花のイマージュ) 사랑은 꽃의 이미지” 장미꽃은 사랑의 이미지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장미꽃 한 송이를 선물합니다.
사람들에게도 보여주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제가 보는 이미지입니다. 김무성 하면 옥새를 쥔 무대포, 문재인하면 얌전한 부뚜막 고양이, 안철수 하면 새정치 노래패 , 박근혜대통령은 슬픈 미소의 백설공주. 저는 한 번도 박근혜 대통령의 웃고 있는 사진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살짝 이를 들어 낸 미소 띤 모습만 보았는데 어쩐지 슬퍼 보입니다. 저는 박 대통령을 TV에서 볼 때마다 왜 대통령은 저런 이미지를 보여 주는가하는 의문을 가지곤 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어떤 이미지로 보여 지는지 궁금합니다. 아마도 늙고 못생긴 목사로 이미지 각인되지나 않았는가 염려 됩니다.
모든 사람들의 행동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좋은 믿을만한 활동적인 사람이라고 보여 진 사람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지금 나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이미지로 보여 지고 있는가 그것이 나의 앞으로의 인생을 결정지을 것입니다. 좋은 이미지를 보여주는 사람은 주위의 신뢰를 얻고 성공도 빠르지만 이미지가 나쁘면 될 일도 안 됩니다. 따라서 내 생긴 대로 내 마음대로 살겠다고 하는 사람은 행복하게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이미지 관리가 인생승리와 행복을 위한 필수적인 일입니다. 어떤 경우 속은 나쁜데 겉포장이 그럴듯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숨길 수 없는 것은 그것이 들통날 때는 더 나쁜 좋지 못한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줄 뿐입니다. 특히 정치인들은 이미지를 먹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 아마도 당선되는 후보들은 유권자들에게 더 좋은 이미지를 보여 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미지는 그대로 방치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관리하고 메이킹 해야 하는 시대이다. 누구나 사람들의 속에 좋은 마음 아름다운 성품들이 숨어 있는데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좋은 성품들을 마음 깊숙이 집어였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쁜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 잘한 일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 과격한 말이나 행동을 합니다. 앞에서 소개한 재인이란 여 검사는 사실 속마음에는 부드럽고 여성적인 아름다움이 있는데 검사는 남성스러워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으로 그동안 실제의 자기 아닌 다른 모습을 보여 주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스 데이의 영향으로 본래의 자기의 이미지를 되찾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지란 본래 자신의 아름다운 마음 선한 자기를 비로소 찾아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짓는다는 것은 본래 자기의 모습이 아닌 다른 나쁜 이미지를 보여 주는 일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는데 아담과 이브가 범죄함으로 죄가 유전적으로 이어와 하나님의 이미지가 아니라 마귀의 이미지를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너의 아비 마귀에게 났으니 너희 아비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8:44)라고 말씀하신바 있습니다.
그러면 믿음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있는 마귀의 이미지를 벗고 예수의 이미지를 갖는 일입니다. 언제 까지 마귀의 이미지로 온갖 죄를 지으며 살 것입니까? 그래서 인생이 고달프고 지옥인생을 살며 세상이 이처럼 지옥 같은 세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거듭난 자들마다 이미지가 달라졌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너무 향상되고 변화된 자신의 이미지에 스스로 놀라기도 했습니다. 죄인의 이미지가 의인의 이미지로, 무식하게 생각했던 이미지가 유식하고 수준 높은 이미지로 변화되고 갱신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활동하시던 김익두 목사님은 평양에서 울던 아기가 호랑이 온다고 해도 그치지 않던 울음을 김익두 온다하면, 그 이름만 들어도 울음을 뚝 그치는 호랑이 보다 더 무서운 조폭 두목 이였습니다. 그런 김익두가 예수를 믿고 목사가 되고 우리나라 성자 목사님으로 거듭났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미지 메이킹 마치 화장하듯 단정하게 옷을 입듯이 머리손질을 하듯이 그렇게 신앙인의 이미지를 가꾸는데 힘써야 합니다. 뭐든지 아니야 싫어 못해 라고 말하는 부정적인 이미지, 자기 욕심만 차리고 남을 배려 할 줄 모르는 인색한 이미지, 항상 자기 맘에 안 든다고 자기 뜻에 맞지 않는다고 불평만 일삼는 이미지,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 고집만 앞세우는 교만한 이미지, 유행첨단을 걷는 사치스런 이미지 등등 이런 비 신앙적인 이미지를 바꾸어야 합니다.
왜 바꾸어야 합니까? 우리는 사람들에게 좋게 보이려고 일부러 꾸미는 이미지가 아니라 우리의 속을 살피시고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아시며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는 하나님 앞에 보다 더 좋은 모습으로 나를 보여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왕 앞에 나간다면 겉모습만 아니라 말하는 것 행동하나하나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은 영이시니 우리의 영적 이미지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만일 우리 안에 하나님이 얼굴을 찌푸리실 그런 죄가 있다면 어찌 할 것인가 그러므로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선다는 자세로 우리의 심령을 가다듬고 우리의 자세를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실 만한 이미지로 보여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좋은 이미지로 나를 보여 드린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좋은 이미지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거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땅에서 캐내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자신의 선한 이미지를 위한 결단과 부단한 노력이 요구됩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들어간다(마11:12)고 하였습니다. 가만히 일등석에 앉으면 저절로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매일매일 십자가 지는 아픔도 마다하지 않고 노력하는 자(cf.딤전4:7)가 들어갑니다.
영국의 에드워드 모토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가 37세 때 캐비닛을 만드는 공장을 다녔습니다. 그는 가난하였고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장래성 없는 삶에 비관적하면서 직업에 불만을 가지고 원망과 불평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런던 거리를 배회하는데 어느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심코 그 교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말이 무심코 이지 사실은 그 배후에 성령님의 인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존 하야트 목사가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거듭나는 도리”에 대해서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설교를 듣는 순간 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순간적으로 “나도 거듭나야 해”한다는 강렬한 서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성령이 그의 마음 안에 임하셨습니다. 그러자 내면이 순간적으로 완전히 일신되고 성령체험을 하게 되고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인생에 변화가 주어졌고 일신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생활이 바뀌고 일터가 새로워지고 일에 행복함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하였습니다. “이제 내 망치소리는 비로서 노래하기 시작했다, 내 망치소리는 이제 춤을 춘다, 내 눈동자에는 생기가 돌았고 마음속에서는 생수가 솟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내 마음에 우리 주님이 오셨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비로소 내 삶이 풍요로워졌다.” 이 에드워드 모토라는 사람은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상황은 변하지 않았는데 내 마음이 변화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를 썼습니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 뿐 일세.” 사람에게 진정한 행복은 예수 안에 들어와 살 때 주어집니다. 예수 없는 인생은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예수 안에 깊숙이 들어가 살아갈 때 발견하게 되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오늘 봉독한 빌립보 말씀에 '무엇에든지'라는 말이 무려 여섯 번이나 나옵니다. '무엇에든지' 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호사'라 하는데 무슨 일을 만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하는 말입니다. 곧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대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환경이 아무리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우리 기독인들의 이미지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기독교인의 이미지는 어떤 경우에라도 참(알레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당히 진실 되고, 적당히 거짓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100% 참되어야합니다. 디모데후서 1:5절에 디모데를‘거짓이 없는(안누포크리토스)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꾸미거나 가식적이거나 위선적인 데가 전혀 없고 말이나 행동이 성실한 믿음 그대로의 뜻입니다. 이것이 디모데의 신앙 이미지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볼 때 무엇이든지 참 믿음의 사람입니다. 참 믿음이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꾸밈이 없는 투명한 믿음입니다. 거짓은 꾸미는 것입니다. 아닌 것을 긴 것으로 만듭니다. 별로 믿음도 없으면서 굉장히 믿음있는 척 꾸미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의 속을 하나님은 아시니 하나님 앞에 그의 믿음의 이미지는 아니올시다 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위선도 가식도 꾸밈도 필요 없습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있는 그 모습 그대로 투명한대로 주님 앞에 나가는 것입니다. 투명한 사람은 사람 앞에서도 가식이 없습니다. 그 사람은 속이지 않습니다. 진실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무엇이나 그의 이미지는 참입니다.
우리나라 선교초기에 미국에서 한국에 온 선교사님이 미국선교부에 선교 보고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 내용이 참 한국 교인들의 모습을 한 마디로 이야기해줍니다. “한국교인들은 믿음생활은 참 열심히 합니다. 새벽예배 저녁예배 수요예배 산기도 금식기도 이렇게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한국교인들은 거짓말을 잘 합니다.” 이 보고가 바로 우리 한국의 기독교인의 신앙 모습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 앞에 참 믿음입니까? 투명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두 번째 신앙인의 이미지는 무엇에든지 경건(셈나)해야 합니다. 여기서 경건을 셈나라고 하였는데 바울 서신에만 나오는 말입니다.(딤전3:8,11 딛2:2) 이 경건은 누구보다도 교회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이미지입니다.
약1:27에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 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약자를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강자에는 약하고 비굴하다가도 나보다 약한 사람을 보면 강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구 대하고 반말 지껄이고 우습게 여기고 대접할 줄 모르고 세상 사람들이나 하는 욕설이 그 입에서 튀어 나옵니다. 이런 모습은 신앙인의 이미지가 아닙니다. 마귀의 이미지입니다. 경건한 마음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향해 삼가며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습니다. 조심성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경건한 사람일수록 약한 사람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경건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 경건이라고 했습니다.
전에 서울에서 전철을 타보니 경로석에 한 학생이 앉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학생을 바라보며 노인이 앞에 서 있는데 경로석에 앉아 일어설 줄 모른다는 듯 눈총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 학생은 그 눈총을 의식한 듯 일어서 저에게 자리를 양보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학생에게 그냥 자리에 앉으라고 하였습니다. 그 학생이 경로석이 앉은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몸이 아프거나 매우 피곤한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그 학생은 매우 미안한 듯 그대로 자리에 앉았습니다. 제가 물어 보았습니다. 학생은 어디 아픈가? 예 방금 병원을 다녀오는 길입니다. 그 학생은 경로석에 앉을 자격이 충분하였습니다. 경로석은 노인만 아니라 임산부나 병약자도 앉을 수 있습니다. 노인이 되면 좀 너그러워져야 합니다. 너무 야박한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딛2:3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모함하지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아니하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그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신중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신중하도록 권면하되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경건은 이론이 아닙니다. 옛날 양반처럼 젊 잔 피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은 명예가 아닙니다. 경건은 신앙의 텃세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은 성경지식을 자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경건은 행동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신앙인의 이미지로서 경건은 섬기고 희생하고 십자가 지는 것이 진정한 경건의 행동, 살아있는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세 번째 신앙인의 이미지는 무엇에든지 옳아야(디카이아)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아야한다는 말입니다. 분명한 것은 세상에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사람은 없다 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고 하였습니다. 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가 없다‘(롬3:10)고 말씀하였습니다.
옳으신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무엇에든지 옳으며`라고 할 때에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무엇이든지 옳을 수 있겠습니까? 내 생각이 옳은 것 같고 내 판단이 옳은 것 같고 내가 아는 것이 옳은 것 같은데 그러나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는 옳지 않다는 것을. 나의 생각과 판단과 지식이 결코 옳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때 그 때부터 믿음이 시작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콩 심은데 콩 나듯 의인이 아닌 죄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서 나온 것은 결국 죄 된 것 뿐 입니다. 깨진 독을 갖고 거기에 아무리 물을 갖다 부어도 그 깨진 독은 샐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깨진 독을 새 독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깨진 인생들이 어떻게 온전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 백부장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보면서 그의 입에서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세상에 참 의인은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참 의인 되신 예수님과 연관될 때 비로소 우리는 의에 참여하게 됩니다(히3:14).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는 옳게 되어 집니다. 그래서 “의인은 믿음으로만 살리라”(롬 1:17)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과 판단과 지식이 주안에서 이루어 질 때 무엇이든지 올바르게 되어 집니다.
1876년 워필드 교수(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 1851. 11. 5.- 1921. 2. 16.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와 함께 세계 3대 칼빈주의 신학자 중 한 사람으로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1887년부터 1921년까지 교수로 재직한 신학자이다.)가 25살 때 일입니다. 결혼해서 신혼여행을 갔습니다. 그곳에서 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배를 탔는데, 그의 아내 피어스 킨 애드가 그만 풍랑 속에서 번개를 받아 영구적인 불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아내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아니고는 생명을 연장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병에 걸렸습니다. 워필드는 그런 아내를 죽을 때까지 39년 동안이나 간호했습니다. 간호는 했지만 그 아내는 회복되지 않았고, 그 상태로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기적은 없었습니다. 낫지도 못했습니다. 남은 것은 남편의 인내와 성실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워필드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원망도 불평도 하지 않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고통으로 괴로움은 있었지만 그는 항상 로마서 8장28-29절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였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워필드 교수는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할(히12:1) 무엇이든지 옳은 의인된 이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네 번째로 신앙인의 이미지는 무엇이든지 정결(하그나)해야 합니다. 이말은 도덕적인 정숙함을 강조하며 엄격한 의미의 순결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사람은 탐욕으로 인해서 더러워지고, 증오로 인해서 더러워지고, 특별히 시기와 질투로 인해서 더러워지기 쉽습니다. 시기, 질투를 완전히 빼 버릴 수 있어야 신앙인의 이미지로 마음의 정결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정결(히.타헤르)입니다. 정결해야 하나님 앞에 설수 있기 때문입니다.(레16:30)
다섯째로 신앙인의 이미지는 무엇이든지 사랑할 만하여야(프로스필레)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할 만하다는 것을 '매력적(attractive)' 이라는 말로 번역합니다. 사무엘상 16장에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 따라 베들레헴에서 목장을 경영하는 이새의 집을 찾아가서 막내아들 다윗을 만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다윗을 보니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사무상 16:12)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매력적인 사람 이였습니다. 다윗이란 이름의 뜻이 매력적인 남자라는 말입니다. 요즈음 중국 여성들을 들뜨게 하는 송중기 같은 사람입니다.(제8회 스타일 아이콘 아시아 10대 스타일 아이콘으로 선정: 리이펑, 송중기, 소녀시대, 박보검, 송승헌, 유아인, 이정재, 이하늬, 하지원, G-Dragon) 하나님은 다윗의 매력에 그에게 기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야말로 전 세계 인류 최고의 스타일 아이콘 매력 남 이십니다. 유명한 아인슈타인 박사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유대인이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의 빛나는 모습에 내 마음이 끌린다. 예수님은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사람들도 다 묘사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분이시다. 그들에게 아무리 뛰어난 기교가 있다 할지라도 말이다. 누구라도 복음서를 읽게 되면 그 속에서 실제로 예수님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 한 마디 한 마디 속에 그분의 인격이 고동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말할 수 없는 매력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매력에 녹아 예수님을 죽도록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어디서나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받을만하며 기쁨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사람들에게 무슨 매력을 보여 주고 있습니까? 바로 그 매력이 그를 사랑할 만한 이미지입니다.
여섯 번째로 신앙인의 이미지는 "칭찬할 만하며(유페마)"입니다. 이 유페마란 단어는 성경에서 오직 이곳에서만 나오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좋은 소문’ ‘평판이 좋은’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그야말로 널리 좋은 소문이 나야 합니다. 칭찬을 받고 칭찬을 하여야 합니다.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대통령으로 티토라는 사람과 카토릭 교회에 유명한 훌턴 쉰 주교(Bishop Fulton Sheen)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티토가 어린 소년 시절 성당에서 성찬그릇을 들고 있는 일을 하였습니다. 어느날 실수로 그만 성찬 그릇을 떨어 트려 깨트리게 되었습니다. 그 때 신부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너 같은 놈은 필요 없으니, 당장 교회에서 떠나라." 이 소년은 교회를 떠났고 성장하여 공산당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역시 훌턴 쉰 주교도 어린 시절 성당에서 성찬그릇을 수발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어느 날 실수로 그만 성찬 그릇을 떨어트려 깨트렸습니다. 그때에 신부가 이 두려워하고 울고 있는 이 소년을 품에 안고 "괜찮다. 너는 나중에 훌륭한 신부가 되겠구나."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소년은 성장하여 유명한 신부님이 되었던 것입니다. 칭찬과 비난이 엄청난 차이를 가져오게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다 부족합니다. 완벽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못해도 잘한다고 격려하고 좋은 점을 발전시켜 주는 것이 사람을 살리는 길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집 아이가 물 컵을 깨뜨렸을 때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야, 그 컵이 얼마나 비싼 건데 깨트려. 보기 싫으니 당장 나가!” “유리에 다치지 않았니? 다음부터는 조심 하거라. 그러나 염려 말아라. 하나님이 더 좋은 것 주시려나 보다." 여러분은 어떤 말을 할 것입니까?
오늘날 우리 가정이 혼란하고, 사회가 어지러운 것은 왜 그렇습니까? 칭찬은 없고, 비난과 정죄만 판을 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일 박근혜대통령이 유승민 의원을 칭찬하고 격려 하였다면 아마 유승민 의원은 목숨 걸고 박근혜대통령을 위해 열심을 다할 것입니다. 오늘날 정치 풍토가 비난과 정죄로 일삼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움을 금할 길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 못 배운 사람, 뚱뚱한 사람, 못 생긴 사람, 살기 힘든 세상입니다. 가난한 게 죄입니까? 못 생긴게 죄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가난한 사람, 못 배운 사람을 무시합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들이 마음에 많이 상처받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비난에 마음 상합니다. 작은 칭찬을 받아도 마음이 즐겁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오직 칭찬하고 격려하라고 하였지 비난하고 정죄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비난에 약하고 칭찬에도 약합니다. 잠언17장9절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허물을 덮어주는 것은 사랑이지만, 그것을 자꾸 말하는 것은 친한 벗도 이간시킨다는 것입니다. 비난해서 안 됩니다. 칭찬해야 합니다. 격려해야 합니다. 그리고 칭찬 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기독교인의 이미지는 칭찬하고 받는 사람입니다.
처음 말씀에서 도리스 데이의 노래 ‘케세라 세라’를 소개하였습니다. 바로 오늘이 도리스데이의 92번째 생일입니다. 별걸 다 기억합니다. 그 노래의 첫 가사는 이렇습니다. “아이가 어머니에게 묻기를 나는 커서 무엇이 될까요? 예뻐질 수 있을 까요? 부자가 될 수 있을 까요? 어머니가 대답합니다. 그럼 네가 무엇을 바라던지 모든 것이 그렇게 될 거야.” “Que sera, sera, Whatever will be,will be” 이 말은 ‘될 대로 될 거야 무엇이 되든지 간에’라는 의미입니다. 케세라 세라가 스페인 말로 “될 대로 되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말에 오해가 있습니다. 될 대로 되라고 하니 마음대로 되라는 비관적이고 소극적인 의미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케세라 세라는 ‘우리가 마음에 먹은 대로 그렇게 될 것이다’라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기독교 신앙인으로서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 어떤 이미지로 하나님 앞에 설 것이고 세상 앞에 설 것인가? 오늘 빌립보서의 말씀처럼 “Que sera, sera, Whatever is true 무엇에든지 참되며” 그렇게 바라면 그렇게 참된 신앙인의 이미지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Que sera, sera, Whatever is noble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신앙이미지를 경건하게 가지게 될 것입니다. “Que sera, sera, Whatever is right 무엇에든지 옳으며” 올바른 신앙인이 되기를 소망한다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Que sera, sera, Whatever is pure 무엇에든지 정결하며”를 나의 이미지로 삼는다면 그렇게 정결한 신앙인의 이미지를 나타 낼 것입니다. “Que sera, sera, Whatever is lovely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만하며”를 나의 이미지로 삼고 싶다면 나는 사랑받을 만한 사람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Que sera, sera, Whatever is admirable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만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칭찬 받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원하고 그렇게 되기를 힘써 노력하는 것이 또한 신앙인의 신앙 이미지입니다.
우리 라온코이노니아 성도 여러분은 어떤 신앙인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과 세상 사람들 앞에 서야 할 것입니까? 어떤 일이 있던지 어디서나 이것을 생각하며, 9절에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오늘 들은 말씀대로 행하면(프랏소 실천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호 데오스 테스 에이레네스 에스틴 메스‘ 휘민)이라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아름다운 성도의 이미지를 나타내기를 원하시는 우리 라온 성도 여러분위에 항상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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