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슐츠(Charles Monroe Schulz1922.11.26.-2000.2.12)라는 미국 만화가가 1950년 10월 2일부터 세상을 떠날 때 까지 50년동안 발표한 “피너츠(Peanuts)”라는 만화가 있습니다. 오늘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이 피너츠 만화를 보면서 자라 왔습니다. 저도 어린 시절부터 이 만화를 즐겨 보았습니다. 이 만화의 주인공은 촬리 브라운이란 어린 소년인데 이 어린 소년이 키우고 있는 스누피라는 강아지 그리고 루시라는 소녀와 여러 친구들과의 이야기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가끔 루시의 동생 라이너스 반 벨트라는 4살 난 아이가 등장합니다.
오늘의 관심은 바로 이 라이너스입니다. 라이너스는 항상 담요 한 장을 들고 다니며 목에다 두르기도 하고 얼굴에 문지르기도 하고 합니다, 라이너스가 이렇듯 늘 담요를 가지고 다니는 이유는 담요가 라이너스에게 심리적인 안정감을 제공해주는 물건이기 때문입니다. 라이너스는 만화에서 담요가 없으면 불안한 모습을 보이며 손가락을 빠는 행동을 보여줍니다. 이런 현상을 라이너스 고착현상(Linus Fixation)이라고 합니다. 과거의 유치한 습관, 부정적인 습관을 계속 유지함으로 안정감을 느끼는 현상(security symbol)을 말합니다. 담배가 인체에 해로운 것임을 알고 담배를 피우면서도 "끊어야겠다, 끊어야겠다" 하지만 끊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새해를 맞으면서 다시금 결단하고 담배를 멀리합니다. 계속 멀리해야 하는데 결단력이 부족하다보니 담배를 다시 피우게 되고 '고착상태'에 빠져듭니다. 이런 현상은 담배뿐이 아닙니다. 술도 그렇고, 도박도 그렇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신체의 특정 부위를 계속 만진다든지, 먹을 것을 주면 삼키거나 뱉어내지 않고 입 안 가득히 물고 있다든지, 발을 덜덜 떤다든지, 또는 손가락을 빤다든지 하는 행위는 모두 이런 현상에 속합니다. 이런 고착 상태는 어떤 계기가 주어져 자신의 유치하고 부정적인 습관에 대하여 자각하고, 고치려 결단하고, 노력하여 고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못하고 다시금 옛 습관으로 돌아가 버리는 더 깊은 고착상태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기독교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세상적인 습관이나 삶의 방식을 버리지 못하고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더 있게 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이 먼저이고 돈이 먼저이고 가정이 먼저이고 자기 이기심이 먼저입니다. 언제나 믿음이 다음이고 예수님이 다음이고 교회가 다음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간절히 바라면서 정작 축복을 받을 그 first chance 먼저의 기회 때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을 기회는 그 첫 번째 기회이고 이 첫 번째 기회는 다시없는 유일한 기회 only chance입니다. 그 기회가 지나가면 다시 기회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축복의 기회를 번번히 놓치고 있고 또 다시 하나님의 축복을 기도하다가 또 다시 그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항상 생각의 먼저는 예수님이어야 하는데 어떤 판단을 내릴 때는 예수님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라이너스 고착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한편 믿음 생활 중에 생긴 고착상태가 있습니다. 그것을 영적 고착상태라고 합니다. 신앙은 계속 성장하여야 하는데 처음 믿을 때나 지금이나 그냥 한 가지 멈추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성장호르몬 소마토메딘이 결핍되어 왜소증에 걸린 사람처럼 전혀 신앙심이 자라지 않고 있습니다. 어느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히려 신앙심이 자랄까 겁이 나고 신앙이 깊어지면 큰일이 날것 같이 일부러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흔히 적당히 믿어라 더 깊어지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전혀 다른 믿음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기독교의 신앙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 돌리는 것을 목적으로 믿는 신앙입니다. 둘째로 기독교 신앙은 사탄의 역사와 계속적인 투쟁의 믿음입니다. 셋째로 기독교의 신앙은 영생과 영원한 나라를 향하여 달려가는 신앙입니다. 넷째로 기독교 신앙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다섯 번째로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날마다 누리며 사는 신앙입니다. 여섯 번째로 기독교신앙은 주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네 후손들이 구원받고 복 받는 다는 것을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일곱 번째로 기독교신앙은 정의와 공평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지향하는 신앙입니다. 여덟 번째로 기독교 신앙은 고난 중에도 즐거워하며 범사 감사하며 죽어도 산다는 것을 믿는 십자가와 부활의 신앙입니다. 아홉 번째로 기독교의 신앙은 성령의 능력으로 능치 못함이 없다는 것을 날마다 확신하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인생관을 가진 신앙입니다. 열 번째로 기독교 신앙은 세상 끝날 심판과 예수님의 재림과 신천신지의 새로운 세상이 도래할 것을 믿는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신앙은 미지근하게 믿어서는 안 되며 적당하게 믿어서도 안 되고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에는 다음기회 second chance는 없는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거듭나고 날마다 새로워지고 날마다 변화되어야 하는 믿음입니다. 빌 3:12이하에 바울 사도께서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向標準直趨 欲得其賞)”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분명한 믿음의 목적이 있고 목표가 있기에 나의 달려 갈길 다 가도록 오직 달려 갈 뿐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주저앉아서도 안 됩니다. 머뭇거려서도 안 됩니다. 고착이란 말은 떨쳐 버려야 합니다. 영적 고착은 마귀역사이고 저주의 역사이고 망하는 역사입니다. 이 영적 고착상태에서 벗어나야 삽니다. 생명을 얻습니다. 병아리가 한 번 알을 깨뜨리고 나오면 다시는 껍질 속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습관, 옛 사람으로 다시 돌아가 버리는 영적 고착상태에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여 신앙의 진전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고착 상태의 심령에서 벗어나기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내 아무리 라이너스고착상태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돌아서면 여전히 세상 중에 방황하고 있고 하나님의 뜻 보다는 나의 생각을 우선으로 하고 있으니 아마도 세상 떠나기 전까지 이 굳어진 고착된 마음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실상 모든 종교는 이 문제로부터 출발합니다. 참선을 하고 주문을 외우고 고행을 하지만 아무런 해답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롬 12:2 “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
본문에서 “변화를 받아” 이 말은 원어로 ‘메타모르푸스데’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다른 사람에 의해서 계속적으로 변화되어가는 과정을 말합니다.
엡 3:16에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라는 말씀에 비추어 보면 우리들의 변화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바꾸어지는데, 어떤 경우에는 갑자기 확 바꾸어지기도 하지만 그러나 점차적으로 지속적으로 마치 몸의 떼가 벗겨지듯이 우리의 심령에서 굳어져 있던 고착상태로 있던 세상적인 습관과 부정적이고 형식적인 믿음들이 서서히 벗겨지는 체험을 가지도록 할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중심적인 인생목표가 하나님 중심적인 삶의 목적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물질욕심 중심의 목표에서 자족하는 믿음 중심으로 변합니다. 이기적인 삶에서 이웃 사랑의 삶으로 변합니다. 세상적인 욕망에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됩니다. 무엇이 옳은 일인지 무엇이 선한 생활인지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 진실의 선후를 분별하고 거짓의 안팎을 분별하게 됩니다.
이런 변화는 무슨 엄청난 경험으로부터 깨달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사소한 작은 변화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2도라고 하였습니다. 2도란 아주 작은 각도입니다. 이 작은 각도만큼만 변화를 체험하면 됩니다. 2도만 변화합시다. 지금까지의 나의 고착된 신앙상태에서 2도 만큼만 변화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가는 방향에서 너무나 많이 치우친 상태에서 믿음생활 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나의 고착된 믿음 상태로 丙申年 2016년을 살아간다면 信仰 病身의 해가 되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심령의 집에 창문 하나가 깨져 있다면 창문 깨진 채 내버려 두지 말고 곧 깨진 창문을 수리하는 것입니다. 어느 집에 창문하나 깨져 있지만 수리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또 다른 창문이 깨졌습니다. 또 얼마후 또 다른 창문이 깨졌습니다. 어느만큼 시간이 지나니 그 집은 폐가가 되었습니다. 같은 동리 다른 집에서는 유리 창문 하나가 깨지니 곧 새 유리창으로 갈아 끼었습니다. 다시 깨끗한 집이 되었습니다. 범죄 심리학자들의 유명한 ‘깨진 창문 이론’Broken Window Theory 입니다. 미국 뉴욕과 샌프란시스코등 대도시 경찰국에서 작은 경범죄를 계속 단속했는데, 점점 도시 전체의 범죄율이 떨어졌습니다. 반복되는 작은 일의 결과로 나빠지기도 하고 좋아지기도 합니다. 나쁜 습관등 우리의 신앙생활을 잘못되게 하는 작은일을 소홀히 하면 나중에는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쉽게 변화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바로 바꾸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큰 역사가 일어납니다. 2도는 겨자씨 같이 작은 씨앗입니다. 그러나 이 작은 씨앗이 자라면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실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2도를 변화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새사람으로 축복의 성도로 바꾸어 주십니다.
넛지효과(nudge effect)란말이 있습니다. 넛지란 ‘옆구리를 슬쩍 찌른다’는 뜻으로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있을 때 누구의 강요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작은 변화를 시도하는 것을 말합니다.(미국의 행동경제학자인 리쳐드 탈러 시카고대 교수와 카스 선스타인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가 2009년에 제시한 이론입니다.) 예를 들으면, 지저분한 작은 골목길을 예쁜 꽃이나 아이들이 놀고있는 그림을 담장이나 벽에 그려 골목이 환하게 바꾸어 사람들이 일부러 구경 오게끔 한다는 것입니다. 군산 경암동 지저분하던 철길마을도 지금은 군산의 명물거리가 되었습니다. 지금 나의 인생의 골목 길을 그냥 이대로 둘 것인가? 괜찮아 이대로 살아도 염려 없어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지금 나의 골목길로는 예수님이 오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오실 길 2016년 우리의 인생길이 되도록 나의 고착된 잘못된 믿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더러운 골목길에 너저분하게 늘어 붙어있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오늘 봉독한 말씀에서 보면,
- 엡4:25-32 봉독 -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말씀 중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26절)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분을 내어도”라는 말씀이 흥미롭습니다. 사람은 감정을 가지고 있어 분을 낼 수 있습니다. 속이 상하고 신경질 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을 내어도 죄는 짓지 말라 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2도의 원리가 있습니다. 조금은 참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가지기 전에 화를 풀라는 것입니다. 평생을 잘 살아오신 어느 노부부가 있습니다. 물론 다투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둘이 화가 나서 말을 안 하다가도 할아버지가 “여보, 해가 지네”라고 말하면 할머니가 “알았어요”하며 해가 지기 전에 화를 해결하라는 말씀을 잘 실천했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해가 지기 전에 “해가 지네!”라고 말씀하시고 분을 풀어가면서 변화를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분을 풀지 못해 1년 열두달 계속 무슨 보물인냥 가슴에 품고 삽니다. 분을 품으면 나에게 큰 손해가 옵니다. 몇일 전에 김용섭집사에게도 말했습니다만, 예를 들어 누가 나에게 비싼 선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비싼 선물을 받을 수 없다하여 받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 선물은 줄려던 사람이 도로 가져 갈 것입니다. 누가 나를 비난 합니다. 그러나 내가 그 비난을 받지 않는 다면 나를 비난한 사람이 그 비난을 도로 가져가야 할 것입니다. 그 비난이 자기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승자박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의 비난 때문에 내가 괴로워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나는 받지 않았으닌깐요. 그렇습니다. 비난에 2도만 비켜 갑시다. 분이 나면 마음을 2도 비켜버리며 그 분은 지나갈 것입니다.
나쁜 말을 하지 않도록 변화하는 것입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29절) 들어서 불편하고 속상하고 평화를 깨는 말, 남의 인격을 손상시키고 기분 나쁘게 만들고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더러운 말들은 아예 입에 올리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됩니다. 나쁜 말을 자꾸 입에 올려 평생 연습을 해왔는데 그것이 금방 고쳐지지 않습니다.
2도만 바꾸어 옆을 보면 거기에 예수님이 슬픈 얼굴로 나를 보고 계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내가 한 나쁜말로 듣는 사람이 가슴아파하기 전에 성령님께서 먼저 아파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께서 내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30절) ‘근심’은 걱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슬퍼한다는 말입니다. 성령께서 나와 동행하시면서 나의 모든 것을 다 보시고 아십니다. 여러분의 나쁜 습관으로 인해 여러분도 불편하고 가족과 친구들이 불편한데 여러분 속에 계시는 성령님은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내 안에 있는 성령님, 내 마음을 정결케 하여주옵소서. 나를 변화시켜주옵소서.” 2도만 바꾸어 생각하면 성령께서 잘했다고 하실 것입니다.
또“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31절) 이런 나쁜 습관들을 조금씩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32절) ‘불쌍히 여기다’는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2도만 친절하고 2도만큼만 부드러워 집시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잘못도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2도의 변화는 2016년 마지막 날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옛 습관과 옛 사고를 2도 만큼 바꾸면 주님께서 새로운 사람, 새로운 습관, 새로운 사고, 새로운 언어, 새로운 감정으로 우리를 180도 새롭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영국에서 37세까지 캐비닛 제조공으로 일하고 있던 에드워드 모트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공장에서 일하면서 열등의식과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의 삶은 전혀 의미가 없었고 소망이 없었습니다.어느 겨울 그는 런던 거리를 배회하다가 한 교회를 보고 예배당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존 하야트 목사가 요한복음 3장으로 ‘거듭나는 도리’에 대한 설교를 하고 있었는데 그 말씀을 듣는 순간 ‘그래, 나도 거듭나야 한다’는 강렬한 소원을 가지게 됐습니다. 성령께서 그의 마음의 문을 여셔서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이후 모트는 “내 망치 소리는 이제 노래하기 시작했다. 내 망치는 이제 춤을 춘다. 그리고 내 눈동자에는 생기가 돌고 마음속에는 생수가 솟는다. 예수께서 내 마음에 오셨기 때문이다. 나는 거듭났다”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찼습니다.
모트는 전에 하던 일을 계속했지만 행복한 목공으로 완전히 변화됐습니다. 삶도 점점 풍요로워졌습니다. 자기가 일하던 목공소가 그의 소유가 됐고 점점 커졌습니다. 결국 에드워드 모트는 성공적인 사업가가 됐고 예수님의 첫사랑을 기억하면서 감사의 찬송시를 기록했습니다. 그 찬송이 우리가 잘 부르는 “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주 예수 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이 아주 없도다” 찬송가 488장입니다.
젊은 나이에 벌써 성공의 길에 들어선 영국의 한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영국 의사당 앞에서 비중 높은 변호를 하기로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에 대해 많은 긴장과 부담감을 가진 나머지 지나친 스트레스로 인하여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 출세 가도를 달리던 그의 인생은 점차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정신착란 증세로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급기야 그는 자신이 더럽고 추한 무가치한 존재라고 자학함으로써 자살까지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변에 그를 불쌍히 여기며 관심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복음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존재를 쓸모없다고 여기며 자살하려 했던 그가 죽음의 쇠사슬로부터 풀려 나오는 데는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자신의 죄를 담당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더럽고 추한 자신의 삶이 새로운 삶으로 변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서서히 자신의 믿음을 예수님 중심 신앙으로 변화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자신의 인생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날 때 나의 모습이 어떠하여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기도와 말씀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씩 정결하게 씻어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변화 된 삶의 모습과 그 사랑의 감격을 시로 고백하여 찬송이 되었습니다.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 피로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저 도적 회개하고서 이 샘에 씻었네
저 도적 같은 이 몸도 죄 씻기 원하네
속함을 얻은 백성은 영생을 얻겠네
샘솟듯 하는 피 권세 한없이 있도다
찬송가 258장이 바로 그의 간증의 노래입니다.
그는 바로 윌리엄 카우퍼(William Cowper)로서 영국 문학사에 있어서 고전 문학가로 손꼽힐 만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스가랴서 13장 1절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라는 구절을 읽다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는 세상의 고착된 죄의 굴레로부터 영원히 해방된 자유의 몸이 되어 이렇게 찬양합니다.
날 정케 하신 피 보니 그 사랑 한없네
살 동안 받는 사랑을 늘 찬송하겠네
이처럼 예수님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변화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변화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아주 놀랍게 변화시켜 주십니다. 여러분은 20016년 얼마나 변활 할 것입니까? 2도만 변화합시다. 어떻게 변화 할 것입니까? 저는 이 시간 여러분의 옆구리를 살짝 꼬집으며 조금만 변화해야죠?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변화하리라 다짐하고 변화를 이루어 나간다면 2016년은 확실히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으실 것입니다. 2도 변화에 넘치는 축복을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여 주십니다.
2016년도 라온코이노니아 성도의 믿음이 2도만큼 변화되어 영적 고착상태에서 해방되는 한해로 삼고, 언제나 우선법칙으로 하나님의 첫 번째 주시는 상급 받을 기회를 놓치지 말고 매일 매일의 삶이 즐겁고 기쁨이 넘치는 날들로 하나님 축복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오 아름다운 날 즐거운 날
(1). 오 아름다운 날 즐거운 날 내 어이 잊으리오
어두움 속에서 헤매던 나 주 예주님 만났네
다정하고 따뜻한 내 친구 내 마음 채우셨네
어두움 물리친 구주 예수님을 기쁨으로 증거해
(2). 성령이 내 맘을 주장하사 내 생활 변화되고
갈보리 십자가 그 사랑이 내 죄를 사하셨네
이 전에 죄악 된 내 생활은 모두 다 물러가고
놀라운 주 은혜 넘치게 주시니 주 이름 찬양하세
(3). 세월은 흘러도 내 맘속엔 희망은 변함없고
하늘의 확실한 참 소망은 나 항상 갖고 있네
놀라운 그 축복받은 날은 내 주님 알게 된 날
영원한 하늘의 고귀한 축복은 내 주님 알게 된 날
(후렴). 하늘 영광 내 맘에 임했네(임했네)
주 십자가로 나를 구했네(구했네)
나 죄사함 받고 밤이 밝은 낮 되었네
하늘 영광 내 맘에 임했네(임했네)
하늘 영광 내 맘에 임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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