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노래를 아실 것입니다.
인생은 미완성~
쓰~다가 마는 편지~
그래도 우리는 곱게 써가야 해!~
사랑은 미완성~
부르다 멎는 노래~
그래도 우~리는
아름답게 불러야 해!~
1980년대 감성 발라드로 큰 인기를 모았던 군산 출신 이진관이란 가수의 ‘인생은 미완성’이라는 노래입니다. 그는 가수로서 뿐만 아니라 ‘어퍼메이커(Affirmaker)’로 이색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어퍼메이커는 긍정이라는 뜻의 어퍼메이션(Affirmation)과 만드는 사람의 뜻을 갖고 있는 메이커(maker)의 합성어로서 사전에 없는 신조어 입니다. 이진관은 이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을 긍정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말히기를 “지금까지 제가 살아오면서 깨달은 바가 있다면, 바로 긍정이야말로 모든 길로 통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너무나 어렵고 힘들어 하지 않습니까. 노래와 함께 이 분들에게 뭔가 위로와 용기를 주고 싶다는 마음에 시작하게 됐습니다.”
비록 미완성 인생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인생은 살맛나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접속사接續詞 ‘그래도’라는 말은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어 주는 때로는 한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놓는 참으로 마법같이 신기한 말입니다. “나는 가난하고 약하지만 그래도 슬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아” “나는 그가 보기 싫어 그래도 미워하지는 않아” “나는 믿음이 부족해 그래도 주일 예배만은 삐지지 않아” “나는 사업에 망했어 다 잃었어 그래도 나에게 남아 있는 하나 있는데 바로 하나님을 향한 나의 믿음이야” 이 ‘그래도’라는 말만 붙이면 모든 부정어가 긍정어로 바꾸어 집니다. 망할 인생이 흥할 인생으로 바꾸어집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는 것 아십니까? 우리나라에 섬이 몇 개나 이는지 아십니까? 3358개 섬이 있습니다. 제주도 울릉도 거제도 선유도 독도 이어도 그런데 아무리 지도를 샅샅히 흝어 봐도 그래도 섬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인이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고 시를 썼습니다. 이런 시를 썼습니다.
“그래도"란 섬을 아시나요?
그래도란 섬이 있습니다.
우리들 마음속에만 있는
"이어도" 만큼 신비한 섬입니다.
미칠듯이 괴로울 때,
한 없이 슬플 때,
증오와 좌절이 온몸을 휘감을 때,
비로소 마음 한 구석에서
조용히 빛을 내며 나타나는 섬.
그게 "그래도"입니다.
섬 곳곳에는,
"그래도 너는 멋진 사람이야"
"그래도 너는 건강하잖니?"
"그래도 너에겐 가족과 친구들이 있잖아"
"그래도 세상은 살만 하단다"
와 같은 격문들이 나붙어 있습니다
“그래도“ 는
다시 자신을 돌아 볼 수 있게 하는
용서와 위로의 섬입니다.
당신의 "그래도" 는 잘 있습니까?
그래도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그래도 시에 이어령선 생님이 이어서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짧은 이야기
긴 생각 중에서)
어느 시인이 한국에는
"그래도"
라는 섬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섬 3.358개 중에
울릉도와 독도는 있어도
"그래도"라는
섬은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시인은 말 합니다
불행한 일이 생길 때
삶이 힘 들때
절망을 할 때...
자신의 꿈과 소망이
산산조각이 나도
새로운 긍정을 만드는
섬이 있다고 말했지요
그것이 바로
""그래도""
라는 섬 입니다
한국에만 있다는
"그래도"
라는 섬 몇 천 년을 두고
"그래도 내 사랑♡
"그래도 내 고향♡
"그래도 내 식구라고 말하며
살아온 한국인
어렵고
가난하고
험한 역사 속에서도
"그래도"라는
섬 덕택에 시련을 이겨온 한국인
절망이 앞을 가리고
외로움이 나를 가두어도
거센 폭풍이 불어와도 말하세요
"그래도" 나는 살아있다
예수님의 제자중에 수제자는 베드로입니다. 본래 이름은 시몬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때 예수님은 그에게 교회의 반석이 되라는 의미로 그를 이제부터 시몬이라 부르지 아니하고 베드로라고 이름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갈리릴 호수에서 어부생활 하던 베드로를 향해 ‘나를 따르라 이제부터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라“라고 말씀하실 때부터 베드로는 예수님을 열심히 따랐습니다. 예수님이 어디를 가시던지 베드로는 예수님 옆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실 때에도 베드로는 데리고 가셨습니다. 또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올라가실 때에도 다른 사람은 멀리서 기도하였지만 베드로는 예수님 가까이에서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죽으러 가신다면 자기도 같이 가리라고 장담하였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열심히 주님을 좇았지만 예수께서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심문을 받자 그는 세 번씩이나 사람들에게 자기는 예수를 모른다고 말하였습니다. 마 26:74에 베드로가 ”저주하여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고 말하였습니다. 저주의 말이 어떤 말이었는지 성경은 기록하지 않았습니다만 아무튼 심한 욕설을 하면서 “만일 내가 그의 제자라면 날벼락을 맞아 죽을 것이다. 나는 저 사람 오늘 처음 본 사람이야, 나는 그를 모른다 말이야 ’욱크 오이다 아우톤‘, 생사람 잡지 말라”고 말하였을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습니다. 한없이 좋아하다가도 한 순간에 획 바뀌어 원수가 되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입으로는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리라. 모든 것 다 버리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고 말 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고난이 닥치면 그 믿음을 내던져 버리고 아이구 죽겠네 이 사람 찾아가고 저 사람에게 매달리고 예수님 앞에 나오는 발걸음은 아예 스톱되고 예수님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 믿어봐야 별거 없다 예수님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왜 예수님을 배신하였습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가 세상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자신의 육신의 욕심을 얻고자 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허망하게 병졸들에게 붙잡혀 끌려가 심문을 받는 것을 보니 한 순간에 자신의 욕망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지난 3년 반 동안 헛고생 했다는 억울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은 예수님에 대한 실망과 불평과 두려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는 소리쳤습니다. ‘욱크 오이다 아우톤’ 나는 그를 모른다고. 바로 그때에 예수님이 뒤를 돌아 베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베드로의 눈과 예수님의 눈이 마주 쳤습니다. 그 때 어디선가 ‘꼭기오’ 닭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바로 전날 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내일 새벽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하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사랑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얼만 큼 사랑하셨습니까? 하늘만큼 땅만큼 아니요 우주의 열배 100배 보다 더 많이 사랑하시니 바로 십자가의 사랑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예수님의 독생자, 아니 하나님이 세상에 오시어 사람으로 사시어 예수님이 죽기까지 사랑하시니 이는 천만 배 보다 더 크게 더 넓게 더 높게 사랑하심입니다.(엡3:19)
예수님은 우리를 이처럼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랑하시는데 베드로는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베드로의 믿음은 사랑 없는 믿음이라 쉽게 그의 입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위해 희생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자식을 위해 고생도 참고 일하며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습니다. 역시 부모님께 효도하는 자녀는 부모를 희생적으로 사랑하는 자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희생도 해야 하고 고난도 참아야 합니다. 우리가 참지 못하고 희생을 하지 않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내도 성령의 은사입니다. 예수를 따르기 위해 우리는 부단히 세상과 싸우고 죄와 싸우고 마귀와 싸우는 일이니 어찌 순탄하길 바랄 것입니까? 비록 가시밭길이요 엉겅퀴가 널려 있는 길이라 할지라도 사나운 풍파가 불어오고 깊은 골자기 높은 산악이 앞을 가로 막는다 할지라도 나는 주님을 따르리라 주님 말씀에 순종하리라 내가 죽기까지 주님을 사랑하리라는 믿음이 기독교의 믿음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요 16:33에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고 말씀하였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에게는 이 믿음이 없었습니다. 이 예수님 사랑 없는 것이 죄입니다. 수많은 죄는 예수님 사랑 없음으로 인한 죄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만큼 죄를 짓게 됩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만일 80% 사랑하다고 하면 나머지 20%는 죄 짓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회개하며 예수님 사랑합니다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랐지만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음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신하였습니다. 엡6:24에 말씀하시기를 “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배신자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뵐 면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갈릴리호수 어부로 돌아갔습니다. 그렇게 베드로는 어부로 살다가 죽고 말 것입니다. 누가 베드로의 이름을 기억할 것입니까? 지난 2005년 4월 8일 로마 카토릭의 교황이었던 요한 바오로2세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100만 명 이상이 바티칸 베드로 성당 장례식장에 모였습니다. 세계 각국의 왕과 대통령과 총리 등 수많은 인사들이 조문을 하였습니다. 카토릭 교회에서는 1대 교황을 베드로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하셨던 것처럼 베드로는 교회의 반석이 되어 그로부터 교회의 시작을 말합니다. 만일 베드로가 어부로 늙어 죽었다면 어찌 교회의 반석이 되었겠습니까?
여기에 그래도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래도 사랑이 있었습니다. 비록 베드로가 예수님을 저주까지 하면서 모른다고 하였지만 그래도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랑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며 고기를 잡으려 하였지만 한 마리도 없었습니다. 그 곳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오른 쪽에 그물을 던지라 하시니 그렇게 하니 그물이 찢어질 듯 고기가 잡혔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인 줄 알고 물로 뛰어 들어 헤엄쳐 예수님에 달려 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숯불에 물고기를 굽고 계셨습니다. 배고프지 자 이 생선 맛좀 보라 생선 한 점을 떼어 베드로의 입에 먹여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감히 말도 못하고 자신의 지은 죄가 너무 커 눈물만 흘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기를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셨습니다. 그때마다 베드로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자신이 예수님께 지은 죄가 크지만 그래도 이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한 베드로의 입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이 나옵니다. 전에는 대 제사장 앞 뜰 모닥불 곁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예수님이 피우신 모닥불 앞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어린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듣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배신한 베드로를 그래도 사랑하십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배신자 베드로를 찾아오시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배신자 베드로에게 사명을 맡기십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그래도의 사랑은 바울에게도 이어졌습니다. 바울이 사울 이였을 때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 죽이는 사람 이였습니다. 그날도 다메섹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여 잡으러 가다가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사울을 그래도 사랑하셨습니다. 사울의 인생이 바울로 바뀌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세계를 다니면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십니다.
고린도 전서 1: 28, 29에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아무 자랑 거리가 없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도 우리 주님은 천하고 멸시 받고 아무것도 없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허다한 죄로 하나님 앞에 머리를 들을 가치도 없는 벌레만도 못한 존재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의 허다한 죄를 덮어주시고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외에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은 결코 없습니다. 엄청난 죄 가운데 있다 해도 그래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면 용서함을 받게 됩니다. 용서만 받을 뿐 아니라 자기 인생의 굴레로부터 운명의 옥죄임으로부터 해방되어 인생의 보람과 행복의 길이 무엇인가를 예수님으로 부터 새로운 인생의 사명을 받게 됩니다.
송명희 작사 신상우작곡인 복음성가 “그래도”라는 곡이 있습니다. 강미경 집사님이 이 곡을 불려 주시겠습니다.
로마 시대에 노예로 산다는 것은 운명 이였습니다. 엄청난 로마 법 안에 자신의 노예라는 운명을 벗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그래도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타고난 운명은 없다’ 입니다.
‘운명(運命)’ 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인간을 지배하는 필연적이고 초월적인 힘, 또는 그 힘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길흉화복(吉凶禍福)’입니다. 또는 ‘타고난 운수나 수명’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이 결정되어졌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들의 근거는 바로 ‘사주팔자(四柱八字)’입니다. 문자적으로 말하면 ‘8글자로 이루어진 4개의 기둥’이란 뜻입니다. 이것은 음양오행설에 근거한 것으로 팔자는 ‘생년 생월 생일 생시’입니다. 그래서 사주팔자를 볼 때 몇 년 몇 월 몇 일 몇 시에 태어났는가가 중요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예수님을 믿기 전에 사주팔자를 본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 세조는 사주를 쉽게 풀어 책으로 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당대의 문장가인 서거정에게 명했습니다. 서거정은 상당히 논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사주팔자와 12간지를 조합한 결과 인간의 운명의 총수는 51만 8천4백수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당시 근세조선 인구가 1,500만 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조선 땅에 사주가 같은 사람이 29명이 생김으로 사주팔자는 원천적 모순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참고로 지금 우리나라 인구가 약 5천만 명이라면 약 100명 정도는 사주가 같다는 결론입니다. 현재 세계에 똑같은 사주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만 명도 더 됩니다. 어찌 운명이 똑같은 만 명 쌍둥이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성종 임금은 자기와 사주가 똑같은 과부가 성안에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녀에게 살아온 여정을 물어보니 성종이 세자 책봉 때 이 여인은 어머니와 사별하였습니다. 성종이 임금으로 등극 할 때 이 여인은 남편과 사별하여 과부가 되었습니다. 임금의 경사스런 일이 있던 해마다 이 여인에게는 불행이 겹쳐 밥을 빌어먹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성종은 세상에 못 믿을 건 사주라고 개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사주팔자에 매여서 살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샤머니즘적인 방법으로 이 운명을 바꾸어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점집을 찾아가서 사주팔자를 봅니다. 그리고 무당을 불러다가 굿을 합니다. 자신의 운명을 극복하지 못하고, 운명의 노예로 불쌍하게 살아가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팔자소관은 없습니다. 지금은 어렵고 힘든 상황이라 해도 그래도 운명은 극복 할 수 있으며 새로운 길이 열려 있습니다.
노예 운명으로 타고난 오네시모란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골로새라는 도시에 살고 있는 빌레몬이란 상인의 집의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이 빌레몬은 골로새 교회를 잘 섬기는 사람 이였습니다. 어느 날 오네시모가 돈을 훔쳐 도망을 쳤습니다. 그 오네시모가 도망을 치다가 또 다른 죄를 져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감옥에는 이미 바울선생님이 갇혀 있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오네시모는 자기의 죄를 깨닫고 회개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알고 보니 바울이 잘 아는 골로새에 살고 있는 빌레몬의 노예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로마 법정에서는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노예 신분이라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낸다는 판결을 하였습니다. 당시 도망친 그것도 돈을 훔친 노예에 대해서 주인이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빌레몬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편지한 통을 써서 제자 두기고편에 편지를 보내는데, 그 편지가 바로 빌레몬서입니다.
그는 편지에서 오네시모를 자신이 감옥에서 낳은 아들이라고 소개하면서 전에는 그가 무익한 노예였지만 지금 나에게 유익한 심복이라고 말합니다. 전에는 무익한(아크레스톤)노예였지만 그래도 지금은 사랑받는 형제로 받아주고 내게 하듯 네게 유익한(유크레스톤) 동역자로 알아달라고 혹 그가 손해 끼친 것이 있으면 자기 앞으로 계산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빌레몬은 바울의 편지를 받고 오네시모가 죽을죄를 저지른 노예였지만 그래도 바울의 편지를 받고 그를 용서하고 자유인이 되게 하고 동역자로 인정하였습니다. 오네시모란 뜻은 유익한 사람이란 의미입니다. 그 후 오네시모는 에베소교회의 감독 목사가 되어 초대교회의 유익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세상에서 온갖 죄 가운데 살았다하더라도 그래도 우리에게는 용서 받을 길이 있습니다. 어떤 죄의 사슬에 묶여있다 하더라도 그래도 예수님의 사랑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환난 가운데 절망을 외친다하더라도 그래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살 길이 환하게 보여 지는 것입니다.
미국 존스홉킨스 병원의 재활의학과 권위자로 이승복 박사(1965-)가 있습니다. 그는 휠체어를 의지하여 사는 장애인 이였습니다. 그는 본래 체조 선수였으나 운동연습 중에 사고를 당하여 사지마비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다 잃었다고 생각하고 자살을 하려고 하는데 그 순간 눈앞에 흰 구름이 하나님(G.O.D)이란 글자로 보였습니다. 그는 나는 세상에서 쓸모없는 자이다. 그래도 하나님은 나를 당신의 영광을 위해 쓰려하신다 이런 믿음이 생겼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제 체조선수로 무익한(아크레스톤) 그를 하나님은 그에게 새로운 유익한(유크레스톤) 인생의 사명을 주시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공부하여 뉴욕대학, 컬럼비아대학, 다트머스의대, 하바드의대를 거쳐 세계적인 재활의학의 정상에 올라 세상 사람들을 위한 유익한 사람오네시모가 되었습니다.
빌2:13에 “너희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라온코이노니아는 작은 신앙공동체입니다. 그래도 이곳이 하늘보다 높은 우주보다 넓은 에수님의 사랑이 가득한 줄 믿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죄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그래도 우리가 기뻐하는 것은 주님은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족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감사하는 것은 예수님이 넉넉하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그래도 우리가 염려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세상이 우리를 절망케 하나 그래도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희망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세상을 살아야 할 사명을 주셨고 보람과 기쁨과 행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진관가수가 노래 불렀듯이 인생은 미완성이라고 낙심할 것이아니라 완성을 향해 오늘도 곱게 써가는 부정적인 인생을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긍정적인 인생으로 바꾸어 살아가는 어퍼메이커 입니다.
그러므로 라오코이노니아는 우리에게 ‘그래도 섬’입니다. 언제나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의 그래도 축복이 항상 함께하여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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