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높고 푸르며 바람이 한들거리며 불어오는 것이 이제는 가을 인가봅니다. 흔히 가을하면 천고마비의 계절이요 독서의 계절이요 수확의 계절이라고 말합니다.
김수경 작시 나운영 작곡의 아! 가을인가를 불러봅니다.
아 가을 인가
아 가을 인가
아~~~~~~
가을 인가봐
물동에 떨어진 버들잎 보고
물 긷는 아가씨 고개 숙이지
아 가을 인가
아 가을 인가
아~~~~~~가을 인가봐
둥근달이 고요히 창에 비치면
살며시 가을이 찾아 오나봐
살며시 가을이 찾아오는 길에 코스모스가 마중 나가 있습니다. 코스모스가 피어있는 길하면 생각나는 노래가 있습니다.
원성기 작가 : 가을로 가는 길(2008) 97x66cm
하중희작사 김강섭작곡 김상희의 "코스모스 한들 한들 피어 있는 길"을 노래한 “코스모스 피어있는 길”이란 노래를 혹 기억나십니까?
이 가을에 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을 걸어 보면 반갑게 인사하는 가을을 만나게 됩니다. 인생의 길이 길고 긴 어두운 터널이 아니라 하얗고 발갛고 노란 아름답게 핀 코스모스 길 같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옛날부터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꽃을 창조하실 때 가장 먼저 창조한 꽃이 코스모스라고 합니다. 코스모스를 그려 색을 칠하는데 분홍색도 칠해보고 노랑색도 칠해 보고 자주색도 칠해보고 그대로 되라하시니 온갖 색깔의 코스모스 꽃이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꽃들의 색깔을 코스모스 꽃 색깔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꽃 중에 마지막으로 창조하신 꽃이 국화 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장래식장 꽃이 국화꽃인가 봅니다.
본래 코스모스의 원산지는 멕시코인데 17세기 스페인 사람들이 멕시코를 점령하고 가져와서 심었습니다. 이 꽃 이름을 모르던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 식물원장 카마니레스가 우주를 닮았다고 “코스모스”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코스모스가 그리스어로 우주라는 뜻입니다. 코스모스의 무었이 우주를 닮았습니까? 코스모스 꽃을 가만히 들여다보세요. 꽃 속에 수술이 있는데 수술 모양이 별처럼 되어 가득 모여 있습니다. 마치 코스모스 꽃 한송이 속에 우주의 별들이 다 들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코스모스 씨앗을 1910년 경 선교사들이 선교하러 다니며 복음과 함께 길가에 뿌려 심은 것이 오늘날 지천에 코스모스 꽃들이 피어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말로 코스모스를 가을바람에 살살 나부낀다하여 ‘살사리 꽃’이라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시대 때 시인인 윤동주 시인의 코스모스라는 짧은 시가 있습니다.
청초한 코스모스는
오직 하나인 나의 아가씨
달빛이 싸늘히 추운 밤이면
옛 소녀가 못 견디게 그리워
코스모스 핀 정원으로 찾아간다.
코스모스는
귀또리 울음에도 수집어지고
코스모스 앞에 선 나는
어렸을 적처럼 부끄러워지나니
내 마음은 코스모스의 마음이요
코스모스의 마음은 내 마음이다.
윤동주 시인은 “코스모스 마음은 내 마음이다”라고 하였는데, 코스모스 마음이 무엇일까요. 코스모스 꽃말이 있습니다. 백색 꽃 꽃말은 순결이고, 분홍색 꽃의 꽃말은 순애입니다. 그야말로 티 없이 맑고 깨끗한 가을 하늘을 닮은 마음입니다. 바로 거룩한 아름다움입니다. 성경에서 거룩하다는 말이 헬라어로 ‘하기오스’라고 하는데 순결, 정결 이라고도 번역합니다. 예수님이 “너희는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고 말씀하셨습니다.
흔히 각 종교의 이미지를 말할 때 불교는 자비慈悲, 유교는 어질 인仁을 말한다면 기독교는 무엇인가? 사람들은 사랑을 말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거룩할 성聖(하기오스)”입니다. 신약성경 전체에 ‘하기오스 거룩함’이 229회 나옵니다. ‘하기오스 거룩함’은 구별되다란 뜻입니다. 더럽고 추하고 그릇되고 사악한 세속과 다른 천진무구天眞無垢한 상태를 말합니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거룩한 순결純潔 곧 성결聖潔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성결한 백성입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신14:2).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성결하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더럽고 추하고 그릇되고 사악합니다. 세상의 주관자는 마귀가 주장하는 타락한 세상입니다. 요 17:16에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세상에 속할 수 없습니다. 속해서도 않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하기오이 에세스데 호티 에고 하기오스 에이미 벧전1:16 / 위흐이뎀 케도쉼 키 카도쉬 아니 레11:44, 19:2,20:36) 그래서 고후 7:1에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6:16-18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는)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경외)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여기서 온갖 더러운 것(몰뤼스무)은 갈 5:19-21에서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고 말씀하시면서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고전 6:11에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아폴루사스데. 동 직 1과 중 2복)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아야 합니다. 여기서 ‘씻다’란 말은 ‘아폴루오’란 말로 ‘몸 전체를 씨다. 목욕하다’란 뜻으로 우리는 주님의 피로 얼굴만 아니라 팔 다리만 아니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씻어야 합니다. 몸 어느 구석 몸에 난 털 하나에도 묻은 죄의 티끌 하나까지 모조리 남김없이 예수의 피로 씻어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벧전 1:19에서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서 된 것이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또 요일 1:7하-10에서도 말씀하시기를,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 하니라”
만일 죄 없다고 말하면 이는 세상의 온갖 더러움에 찌들어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죄악도, 죄악이 철판같이 그의 심령을 둘러쌌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녹여 버리고 뚫어 제거하여 깨끗게 하시니 이로서 성결한 심령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쓰레기는 결국 제거됩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깨끗이 도말되어 버립니다. 마치 태풍이 쓸어가 버리듯 무서운 하나님의 징계가 더럽고 추악한 죄악들에게 임할 것입니다. 따라서 육체의 일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온갖 재앙이 임할 것이며 이로서 아픔과 비참과 실패와 궁핍이 지옥의 불처럼 그를 태워버릴 것입니다. 누가 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까? 이미 그 심판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성결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우리를 타락키는 죄악과 싸워야 합니다. 이는 사단의 역사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훼방하고 더럽히려 하는 세상의 온갖 죄의 유혹과 이를 조장하는 사단의 권세를 대항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대항하지 못 합니까? 왜 세상에 끌려 다니며 사단의 미혹의 낚시 밥에 코가 꾀이는 것입니까?
히 12:4,5에서 이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그러므로 12,13에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
우리가 반드시 감당할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곧은 길을 가야 합니다. 두 번째는 곧은 길을 가기 위해서는 다리가 어그러지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곧은 길(트로키아스 오르다스)이란 육상경기 트랙을 말합니다. 육상선수가 100미터를 달리는데 자기가 달려야 할 트랙이 있습니다. 아무리 잘 달려도 그 트랙을 벗어나면 반칙이고 실격됩니다. 우리 인생에 달려가야 할 트랙이 있습니다. 그것을 벗어나면 악한 길이요 망할 길입니다. 우리 앞에 달려갈 그 길 곧 하나님 앞에 성결의 길입니다. 성결의 길에서 단 한 걸음만 벗어나도 죄요 더러움이요 실격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의 다리가 ‘어그러지지(에크트라페)’ 말아야 합니다. 이 말은 좀 의역된 말입니다. 여기서 어그러지다란 말은 트랙으로부터 ‘방향을 전환하다, 빗나가다, 거절하다 빠지다’란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따라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데 “아니요, 싫어요, 나 그렇게 안할래요, 내 마음대로 할 래요, 나에게 강요하지 마세요, 나는 빠질래요” 이러면 어떻게 됩니까? 어그러지는 것입니다.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성결의 길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죄를 짓고 실격처리됩니다. 그러나 “아멘, 나는 온전히 순종하며 이 인생의 길을 열심히 달려 가겠습니다”라고 “달려라 하니 이 세상 끝까지 달려라 하니”처럼 그렇게 인생의 길을 달려간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성결한 삶을 살게 됩니다. 발을 딛어 달려가는 그 길 걸음걸음마다 새로운 은혜가 햇빛 쏟아지는 축복의 삶이 전개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변화와 생명의 능력이 있습니다. 개개인의 인격과 삶에 변화가 나타납니다. 말씀을 통해 진리를 깨달으면 죄악의 더러움을 보게 됩니다. 죄악의 더러움을 보게 되면 마귀로부터 해방이 됩니다. 죽음의 권세에서 자유함을 얻습니다. 거듭남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 크신 은혜를 박게 됩니다. 노예 장사꾼이였던 뉴톤이 거듭나서 부른 찬송이 305장 찬송인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의 인생은 병화되어 목사님이 되고 성결한 삶을 살았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게 되면 이미 변화가 시작됩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이전과 이후가 다릅니다. 사울이 바울로 변화되는 것과 같이 달라집니다. 한 마디로 B.C.와 A.D.의 변화입니다. 역사가 바뀝니다. 그러므로 엡4:21~24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성결한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기독교인입니다.
조용필이 부른 <꿈>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그 가사를 소개합니다.
“화려한 도시를 그리며 찾아 왔네 / 그 곳은 춥고도 험한 곳 여기저기 헤매다 / 초라한 문턱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
머나먼 길을 찾아 여기에 꿈을 찾아 여기에 / 괴롭고도 험한 길 이 길을 왔는데 /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 그 누구도 말을 않네 /
사람들은 저마다 고향을 찾아가네 / 나는 지금 홀로 남아서 / 빌딩 속을 헤메이다 초라한 골목에서 /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
저기 저 별은 나의 마음 알까 나의 꿈을 알까 / 괴로울 땐 슬픈 노래를 부른다 /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 그 누구도 말을 않네 /
슬퍼질 땐 차라리 나 홀로 눈을 감고 싶어 /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춥고도 험한 인생길 여기 저기 헤매다가 어느덧 초라한 인생의 끝 문턱에서 눈물 흘리며, 한 평생 꿈 찾아 괴롭고 험한 길 달려 왔건만 숲인지 늪인지 알지 못한 채 하늘의 별 처다 보며 슬픈 노래를 부른다는 조용필의 노래입니다. 아니 어쩌면 거룩한 성결한 삶을 잃어버리고 도시의 뒷골목 어둠속에서 방황하던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에 나오는 탕자의 노래인지도 그리고 타락한 죄의 길에 살고 있는 오늘 현대인의 노래라고도 하겠습니다.
우리도 비슷한 복음성가를 부릅니다. 다같이 함께 부르겠습니다.
<멀고 험한 이 세상길 소망없는 나그네길
방황하고 해매이며 정처없이 사레왔네
의지할 것 없는 이 몸 위로 받고 살고파서
세상 유혹 따라가다 모든 것을 다 잃었네>
우리가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그렇게 살아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생존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숨 쉬는 것이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살아 있는 자의 생존 본능입니다. 성결함은 기독교인의 생존 본능입니다. 물고기 보고 물 밖으로 나오라 하면 어떻게 됩니까? 물속은 물고기가 결코 떠날 수 없는 생존의 자리입니다. 성결함은 기독교인이 버릴 수 없는 생존의 바탕입니다. 옛날 제사장의 관에 “여호와의 성결(코데쉬 라야훼)”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영적 이마에 코데쉬 라야훼 여호와의 성결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믿습니다.(슥14:20)
성결은 외적으로 얼굴을 깨끗이 닦고 옷을 깨끗한 옷을 입고 진흙 길을 피해가는 일이 아닙니다. 죄와 세상과 구별되게 살려면 성결한 생활 곧 죄를 멀리하고 진실하고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진정 세상가운데서 믿음의 본을 보이며 사랑을 실천하며 온유하고 겸손하며 용서와 관용을 베풀고 가난한자들의 친구가 되고 어려움을 당한 자들을 돌보며 거짓되고 불의한 일은 모양이라도 버리며 살아야 합니다.
약 1:27 “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약 2:14-20 “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
우리 건물 앞에 담배 꽁초가 수북히 싸혀 있고 술병이 나뒹굴어져 있고 과자 부스러기들이 널려져 있습니다. 누군가 지난 밤에 이곳에 와서 술마시고 담배피고 한 모양입니다. 그러면 쓰레기는 치우고 가야죠. 누구보고 치우라고 그렇게 쓰레기를 어지럽힌 것입니까? 한마디로 양심에 총구멍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미 양심이 그의 마음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양심 없는 사람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이 성결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백성이기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성결은 삶이요 행함이 없는 성결은 죽은 성결입니다.
저는 오랜 만에 존경할 만한 불교의 스님한분을 보았습니다. 속초 신흥사의 83세 되신 오현스님 입니다. 지난 2월 28일일 절기상 무슨 날인 줄 아십니까? 백중이란 절기입니다. 백가지 채소와 곡식으로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동안 고생한 머슴에게 하루 휴가를 줘 쉬게 하며 여름내 습기로 집안에 곰팡이들을 씻어내는 날입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스님들이 다 절에 모여 90일 동안 참선 불사를 하다가 이를 하안거라고 하는데 백중날이 하안거가 끝나는 날입니다. 신흥사 백담사 낙산사등 강원도 일원의 스님들 수백 명이 운집한 가운데 이 오현 스님이 소위 해제법문을 말하였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천주교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에 와서 빡빡한 일정에서 세월호 추모리본을 달고 네차례나 세월호 유족들을 만나고 로마로 돌아가서도 한국 주교를 만나 자리에서 세월호 유족들의 안보를 물었다고 소개하면서 문제는 옛날 불경만 외우는 것만이 불사가 아니라 오늘의 중생들의 고달픈 삶을 돌보지 않는다면 부처가 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꾸짖으며 죽은 불교가 아닌 산 불교를 외쳤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부활하시고 오늘도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성결한 신앙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얼마나 성결하게 믿음생활 하고 있는냐가 그의 영이 살았는가 죽었는가가 결정된다고 하겠습니다.
어제 8월 29일이 미국의 유명한 가수 였던 마이클 잭슨 (Michael Jackson 1958년 8월 29일 - 2009년 6월 25일)이 태어난 날이였습니다. 그는 20세기 후반기 세계 대중음악계에 가장 뛰어난 가수 였습니다. 수많은 가수들이 우리나라 가수들도 그의 노래와 춤을 따라하였습니다.
그는 총 앨범 판매 : 10억 5천만 장, 가장 많이 팔린 앨범 ; 스릴러 1억 4백만 장
최연소 빌보드 차트 1 위 : 11세 때 ‘I want you back' ,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뮤직 비디오 : The making of Thriller' 100만개, 최연소 리드 보컬 : 5 세, 빌보드 싱글 챠드 1 위곡 : 13 곡, 통산 그레미상 수상 횟수 : 19회
이만한 재능과 성공과 부를 이루었으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고 인류와 사회를 위해 공헌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짧은 인생은 오히려 불행했습니다. 그의 연 수입은 이천만 달러 가까이 됩니다만 초호화판 생활로 인해 4억~5억 달러(약 5130억~6420억 원)의 빚을 남긴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마이클 잭슨의 사망원인이 급성 심장마비로 알려진 가운데, ‘약물과다 복용’이 그 원인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가족들은 마이클 잭슨이 2005년 아동 성추행으로 재판받을 때부터 약물중독 증세가 심각했다고 말하고 있고, 이런 약물중독이 심장마비의 원인이 되지 않았나 추정하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의 학대로 아버지가 싫었는데 커가면서 아버지를 닮아가는 자신의 모습 속에서 아버지를 지우려고 성형수술을 많이 해서 각종 부작용에 시달리며 피부암마저 앓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만일 그런 세계적인 스타이며 재벌이며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성결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면 가장 위대한 한 사람으로 큰 공헌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본래 여호와증인 신도였고 후에 이스람교로 개종을 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가장 비참한 불행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기독교인 신앙생활은 성결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도 거룩해야 합니다. 거룩함을 잃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끊어집니다. 끊어진 그 순간부터 우리 인생은 사단의 세력 하에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거룩한 관계 속에 인생의 기쁨이 있고 보람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이 가을에 들에 나가 그리고 길가에 핀 코스모스를 바라보십시오. 그 코스모스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담아놓으신 순결함을 볼 것입니다.
정연복 시인(한국기독교연구소편집위원)이 이런 시를 썼습니다.
<코스모스처럼 명랑하게
코스모스처럼 단순하게
코스모스처럼 다정다감하게
코스모스처럼 단아하게
코스모스처럼 가볍게
세월에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코스모스처럼 꺽일 듯 꺽이지 않으며....>
그래서 순결하고 성결한 기독교인 답게...
라온코이노니아 성도들은 코스모스처럼 그렇게 하늘의 순결을 닮은 성결한 신앙생활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속의 바람에 꺽이지 않고 세상의 흐름에도 따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그리고 이웃을 향한 아름다운 신앙의 진실한 모습을 보여 주어 하나님의 놀랍고 큰 은혜와 축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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