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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5726일 주일아침 예배 설교 고린도 전서 13:1-7 라온코이노니아의 사랑

 

 

사람들이 한평생 살아가면서, 외롭고 흐뭇하고 슬프고 행복하고 씁쓸하고 달콤하고 차겁고 따뜻하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하고 하는 그 이유는 사랑이란 두 글자 때문입니다. 각종 TV드라마를 보고나 대중가요를 듣거나 소설이나 시를 보면 사람들이 서로 좋아하고 미워하고 그리워하고 가슴아파하는 등 온갖 갈등과 다툼의 인간사를 나타내고 있는 데 이는 모두 사랑이란 두 글자 때문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 다면 무엇이라고 말할 것입니까? 1960-70년대의 국민가수였던 나훈아는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노래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진정한 사랑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나훈아의 라이벌인 국민오빠라고 불렸던 남진은 가슴 아프게를 노래하며 사랑의 이별을 슬퍼하였습니다.

 

인터넷에 어떤 이름 없는 시인의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 꽃들에게 물었더니 / 겨우내 깊은 어둠에서도

아름다운 외출을 준비하는 / 의 욕망 이란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 바람에게 물었더니 / 빈 몸으로 걸림 없이 나아가

나무가 되고 풀잎이 되고 / 종내 흔적을 남기지 않는

집착 없는 마음 이란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 흐르는 강물에게 물었더니 /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

그리운 이의 가슴 속에 / 머무르되 머물지 않는 / 물이 되라 한다

 

시린 겨울 이기고 / 꽃을 피울 의 욕망이 없으면

인연 줄 부여안고 싶은 / 집착을 버릴 수 없다면

그리운 이름 속 에 / 고이지 않는 물이 될 수 없다면

말아라, 사랑한다고 / 말을 말아라

 

사랑은 가지려 하지 않을 때 / 아름다운 것을

내 안에만 담고 싶을 때 / 차라리 독()이 되는 것을...

 

 

사랑은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 그리운 이의 가슴속에 머무르되 머물지 않는 물이 되라한다.” 대분 사람들이 사랑 때문에 아파하고 인생을 슬퍼하는 것은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입니다.

 

혹 나이 드신 분들 가운데 1950년대 명국환이 부른 공주의 비련이란 노래를 기억하십니까?

 

< 공주의 비련

사랑을 위하여 왕실도 버리고

그대 따라 가리라 기약했더니

이다지도 세상은 말이 많은가

아 공주 몸이 원망스럽소 >

 

현재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동생으로 세계의 연인으로 불려진 마가레트(The Princess Margaret Rose, 1930821- 200229) 공주가 있습니다. 마가레트공주는 왕실경비대의 평민인 타운센트대령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나 왕실의 법도가 공주는 평민과 결혼 할 수 없다하여 강제로 귀족출신 스노우든 백작(Antony Armstrong-Jones)과 결혼한 사건이 세계에 알려지자 우리나라에서도 대중가요로 불려 지게 된 것입니다(1978년 이혼). 그러나 가사 중에 왕실도 버리고에는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의 숙부로 에드워드 8세라는 왕이 있었는데 미국의 평민여성으로 2번이나 이혼한 심프슨 부인을 사랑하여 왕위를 325일 만에 버리고 결혼한 이야기입니다. 참으로 사랑은 왕위보다 더 큰 가치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사랑에 관련된 음악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음악들 중에 제가 좋아하는 곡이 사랑의 인사 쌀뤼 다무르 Salut d'Amour”라는 곡입니다. 20세기 초 영국의 위대한 작곡가인 에드워드 엘가(Sir Edward Elgar)가 아내인 앨리스(Caroline Alice Roberts)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을 표한한 곡입니다(1888년 작곡). 앨리스는 평범하였던 음악인이었던 남편 엘가를 세계적인 작곡가로 내조한 훌륭한 여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랑의 인사란 이 곡은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와인(Wine) 클래식" 이라는 평과 함께 부부나 연인이 저녁한때 휴식을 취하며 듣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달콤한 음악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결혼식 때에 축하곡으로 많이 연주되고 있는데 흔히 결혼의 들뜬 분위기와는 다르게 차분하고 따뜻한 분위기로 미래의 인생에 아름다운 사랑의 설계를 나누는 그런 사랑의 음악입니다. 이 음악을 연주할 때 때때로 오스트리아의 시인인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2.4.-1926.12.29)사랑의 노래라는 시를 함께 읽기도 합니다. 사랑의 노래일부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바라만 보아도 좋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느낄 수만 있어도 행복한 이가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어떠한 고통이나 절망이 가슴을 어지럽혀도

언제나 따뜻이 불 밝혀주는

가슴 속의 사람 하나

간직해 둔 마음이 있다는 것은 소중합니다.

 

한번도 드러내지 못한다 해도

사랑은 말하지 않아 더 빛나는 느낌

바라볼 수 있는 사람 있어 행복합니다.

생각하면 언제나 정다운 사람 있어 행복합니다. ”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대부분 과거의 사랑을 그리워하거나 현재의 사랑을 애타게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은 배고플 때 먹는 음식 같은 것도 아니고 목마를 때 마시고 싶은 물도 아닙니다.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 입니디. 즉 사랑은 인간 존재의 원리입니다. 사랑은 나의 영혼 속에 담겨 있는 영의 본질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가장 위대한 열 글자의 말씀(Ten Word)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호 데오스 아가페 에스틴)”입니다. 그래서 요일 4:16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죄로 인하여 그의 영혼이 매말은 사람들은 아무리 사랑을 말하지만 사랑을 담을 그릇이 없으니 밑 없는 항아리에 물 붓듯 아무리 사랑을 부어 보았자 다 새어나가고 그의 안에 아무리 사랑 사랑 노래해 보았자 빈 독 인생이라 사랑의 항아리는 여전히 텅 비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안에 거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니 자연히 그의 사람은 사랑이 샘솟는 삶이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 3서에서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2)”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하신 말씀입니까? “사랑하는 자여(아가페테), ...”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라고 축복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은 어떤 사랑이어야 합니까? 봉독한 말씀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고전 13장을 사랑의 장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고린도 13장의 말씀으로 작곡한 복음성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영국에 엘가가 있다면 우리나라에 정두영 작곡가가 있습니다. 정두영 작곡가는 오래 동안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의 종신 음악교수로 작곡가와 지휘활동을 하며 침례교회 목사로 사역을 하시였습니다. 귀국하여 대전 침례교신학대학교에서 음악교수로 그리고 대전과 수원의 시립교향악단의 지휘자로 활동하였습니다. 아직 그가 교회생활을 등한히 할 때에 큰 아들이 골수염을 앓고 있었습니다. 인근 교회 부흥회에 참석하여 아들이 목사님으로부터 안수를 받을 때에 강사는 정 교수에게 예수를 영접하라는 말씀을 벼락같이 말하였습니다. 정교수는 깜작 놀라 하고 무심결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성경을 펼치니 고린도전서 13장이였습니다. 이 말씀을 읽는 중에 성령이 그의 마음을 주장하니 그의 얼굴이 달아오르면서 음악노트를 펴치고 작곡을 15분 만에 하였는데 바로 우리가 잘 부르는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였습니다. 이 작곡하던 때가 1976년이었고 1981년 최안순 최성욱 부부노래로 세상에 처음 불려 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 사랑 안에 거한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사랑을 하라고 명령하십니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나를 사랑하는 자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이웃을 사랑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일4:20-21) 그러므로 이 명령은 지켜도 좋고 안 지켜도 그만인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이대로 사랑하고 이대로 사랑해야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아가페테, 사랑하는 자여...”라고 부르시면서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라고 축복하십니다.

 

열 다섯가지 사랑을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아멘으로 화답하시기 바랍니다. 싫으면 노멘이라고 말하세요.

1. 사랑은 오래 참아라. 2. 온유하라. 3. 시기하지 말아라. 4. 자랑하지 말아라. 5. 교만하지 말아라. 6. 무례한 행동을 하지 말아라. 7.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아라. 8. 성내지 말라. 9. 악한 것을 생각지 말아라. 10. 불의를 기뻐하지 말라. 11. 진리와 함께 기뻐하라. 12. 모든 것을 참아라. 13. 모든 것을 믿어라. 14. 모든 것을 바라라. 15. 모든 것을 견디어라.

오늘 아침 이 열다섯 가지 명령가운데 한 가지 12번째 모든 것을 참아라는 말씀에 대해 그 의미를 깨달아 알고자 합니다.

4절에 오래 참고라는 말씀이 있고, 7절에도 모든 것을 참으며라는 말씀과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모두 같은 의미로 보여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헬라어 원어로 읽으면 다 다릅니다. 1절의 오래 참으며마크로드메오라는 말로 힘들고 어려운 일을 참아 견디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7절의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휘포메노라는 말로 시간을 기다린다 버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참으며는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스테고라는 말로 덮다. 감싸다. 막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 표준새번역 현대어 성경 새번역 성경에는 모든 것을 덮어주고라고 하였습니다. 정두영목사님이 작곡한 사랑은 오래참고라는 복음 성가에는 모든 것 감싸주고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전서 13장의 7 절 말씀을 다시 읽으면 모든 것 덮어주고(판타 스테게이) 모든 것을 믿으며(판타 피스튜에이) 모든 것을 바라며(판타 엘피제이)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판타 휘포메네이)”고 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준다란 무슨 의미입니까?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얼굴도, 몸매도 나무랄 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약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머리숱이 너무 적었고 언젠가부터 눈썹이 빠지더니 아예 눈썹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눈썹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던 그녀는 항상 눈썹을 짙게 그리고 다녔습니다. 그러다 그 여자에게도 애인이 생겼고 마침내 결혼에 이르렀습니다. 그녀의 눈썹 콤플렉스는 대단해서 남편에게도 이 사실을 숨겼고, 머리를 감거나 샤워한 후에는 혹시 들킬까봐 매번 눈썹을 다시 그려 넣고는 했습니다.

이렇게 삼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그만 남편의 사업이 부도가 나는 바람에 먹고 살기 위해 연탄배달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리어카 한 대를 사서 남편은 앞에서 끌고 아내는 뒤에서 밀며 열심히 연탄을 날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리어카를 몰고 가는데 바람이 확 불어 뒤에서 밀던 아내의 얼굴에 연탄 가루가 덮이고 말았습니다. 이 모습을 본 남편이 수건을 꺼내어 아내의 얼굴을 닦아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남편은 아내의 눈썹 부분은 건드리지 않고 나머지 얼굴만 깨끗이 닦아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남편도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아내가 마음 상해할까봐 모른 채 한 것일 뿐입니다.

 

사랑 없는 사람은 이웃의 허물을 들쑤시고 있는 말은 부풀리고 없는 말은 지어 떠들어 댑니다. 그러나 사랑은 이웃의 허물을 덮어주는 일입니다. 바로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 덮어주는 사랑이 사랑의 근본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 에덴동산에서 쫒겨 나갈 때 다만 무화과 입사귀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아담과 이브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그들의 부끄러움을 덮어주셨습니다. 이때부터 하나님의 인간의 죄의 역사에 덮어주시는 은혜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46-8절에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7절의 죄가 가리워지다에서 가리워지다덮다라는 뜻의 에피캅립토란 단어입니다. 바울은 그 사람을 행복자라고 말합니다. 허물을 덮다란 말이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는 아주 중요한 코드라고 할 것입니다.

 

9장에 홍수의 대 심판에서 구원함을 받은 노아가 어느 날 포도주에 취하여 장막 안에서 발가벗은 채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둘째 아들 함이 장막에 들어오다가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형제들에게 가서 아버지가 발가벗고 잠을 잔다고 흉을 보았습니다. 이 말을 들은 첫째 셈과 셋째 야벳이 홑이불을 가져 뒷걸음쳐 들어가 아버지의 발가벗은 몸을 보지 않고 덮어 드렸습니다. 아버지가 잠이 깨어 이 사실을 알고 셈과 야벳은 창대할 것이고 함은 그 형제들의 종이 되리라고 하였다는 기록을 보게 됩니다.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드린 셈과 야벳에게는 축복을, 허물을 들쳐 내고 흉보는 함에게는 저주가 임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한 간음한 여인이 사람들에게 잡혀와 예수님에게 끌려 왔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이 여인을 돌로 쳐 죽여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하고 묻습니다. 당시 율법에 의하면 음행한 여인은 사람들에 의해 돌로 쳐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죽이지 말라하면 율법을 어기는 사람이고, 죽이라하면 예수님은 평소에 사랑을 말하였는데 사랑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만일 먼저 돌을 들었다면 자기는 죄없다하는 말이니 이 또한 거짓말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만일 거짓말 한다면 이는 율법을 부인하는 죄로 그도 돌에 죽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돌을 던지지 못하고 흩어져 가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을 것이니 다시는 그런 죄를 범하지 말라고 그 여인에게 말씀하였습니다.(8:11) 예수님은 음행한 여인의 죄를 덮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나가 허랑방탕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온 둘째 아들을 아버지가 그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큰 잔치를 벌렸습니다. 아버지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첫째 아들에게 아버지는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 왔으니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있겠느냐고 말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잘못을 덮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사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런 마음으로 우리의 허물을 덮어주시고 제일 좋은 구원의 옷을 입혀 주십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회개하고 나오면 하나님께서는 제일 좋은 의의 옷을 입혀주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이 무고하게 재판을 받으실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못된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다만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씩이나 물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덮어주시는 사랑을 깨달은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48절에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하는 일이란 허다한 죄를 짓는 일밖에 없습니다. 그 모든 죄를 탓하고 벌한다면 누가 그 많은 징벌을 다 담당할 수 있을 것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총은 바로 십자가의 사랑으로 그 모든 죄를 덮어 주시는 일입니다.

5: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라틴어로 사랑을 아모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모르는 죽음을 말하고 는 부정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모르는 죽음이 아니다란 말입니다. 죄의 끝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의 허다한 죄를 덮으심으로 우리는 죄 가운데서 죽지 않고 살아난 것입니다.

시편 32:1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고 말씀하였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이와 같이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허물을 덮는 이 사랑을 받고 새 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이제 주님은 우리가 세상에 나아가 우리가 받았던 사랑을 그대로 세상에 베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잠언서 1012절에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콜 페사임 테카세 아하바)”고 말씀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아마도 세계에 남의 허물을 들쳐 내는데 1등 국가라 하겠습니다. 가정에서는 부부간에 서로 허물을 들쳐 내어 다투고, 학교에서는 선생과 제자 간에 서로 허믈을 들쳐 내고, 정치가들은 서로들의 허물을 매일같이 폭로하는데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요즈음 국정원 사건의 진상은 바로 국정원이 국민들의 허물을 들쳐 내려하였고, 정치권에서는 국정원의 허물을 들쳐 내려고 공박을 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을 보면 악성 댓글로 남의 허물을 끊임없이 들추어내고 할큅니다. 인터넷에 손연재란에 들어가면 우리나라 세계적인 자랑 체조선수 손연재를 온갖 말로 비난한 글들을 보게 됩니다. 지금 미국에서 야구선수로 활략하고 있는 강정호 선수까지도 비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과연 그런 악풀을 다는 자기는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요. 박근혜대통령을 할퀴는 악풀 또한 대단합니다. 전에 노무현대통령 때에도 악담을 퍼붓듯 인터넷에 말로다 할 수 없는 욕설을 써대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기독교와 교회에 대한 비난은 그야말로 극에 달하여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까지 비난하는 악풀로 입에 거품을 물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이런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어 찢어 발리고 씹어대고 팍팍 발로 밟아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대한민국은 한마디로 죄악백성들의 죄악 공화국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남의 눈에 티는 보면서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나라가 혼란스런 것은 죄 때문입니다. 나라가 망하는 것은 이런 죄로 망합니다.

 

야고보서 314절로 16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남의 허물을 들쳐 내고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히는 일을 하는 데는 시기와 질투와 분노에 모든 악독 죄악 귀신들이 드글 거린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태초에 아담이 하와의 허물을 덮어 주지 못함으로 마귀의 시험에 넘어가고 최초의 죄가 생겨난 것입니다. 당시 아담이 하나님, 모든 것이 제 잘못입니다. 저를 벌해 주십시오라고 하와의 허물을 덮어 말하였다면, 원죄는,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의 죄를 덮어 주셨을 것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덮어주시는 사랑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의 사랑에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아담 범죄 이후 늘 불안과 염려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래서 마음 약한 사람들은 고민을 하고 때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허물을 말할 때 마귀가 달라붙고 귀신이 쫒아갑니다. 그러나 허물을 덮어줄 때 마귀는 도망가고 귀신은 꼬리를 감추며 천사가 그를 보호해 주십니다.

 

부부 관계가 위태로운 남편과 아내는 서로 지적하기에 바쁩니다. 무너지기 직전인 공동체는 서로 수군거리고 지적하여 들쳐 내려 하고 고발하는데 자신의 인생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허물을 덮어주는 부부가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서로의 잘못됨을 덮어주는 공동체가 성숙한 공동체가 됩니다.

 

우리가 어찌 죄가 없다 할 것이며 잘 못이 없다고 말할 것입니까? 예수님 십자가 앞에 우리의 허물과 죄를 고백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허다한 죄를 주님의 십자가 구속의 사랑으로 덮어주시고 용서해 주십니다.

라온 코이노니아는 그래서 허다한 죄가 덮어지는 사랑의 공동체인줄 믿습니다. 누구든지 이곳에 머무는 사람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허물을 덮어주시는 사랑의 자리에 있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어떤 무명의 시인이 이런 시를 이터넷에 올려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작은 가슴하나

덮어주지 못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가슴에 열린 창 틈으로 스미는

바람하나 막아주지 못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가슴에 생긴 조그만 생채기 하나

감싸주지 못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작은 실수를 나무라며

등 다독여 주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장점보다 단점을 꼬집어 아픔 주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대 곁에 있어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곁에 있어 주기만 해도

고맙다고 든든하다고 말해 주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따스한 손길로

보듬고 어루만져 주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부드러운 말 한마디로

작은 가슴 하나 덮어 주지 못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작은 가슴 하나 덮어 주지 못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의 장 15가지 사랑에 대한 명령 중 이 한 가지 덮어주는 사랑을 행한다면 그 모든 사랑의 명령들을 더불어 지켜지게 됩니다.

 

사랑이란 알지만 덮어 주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아프지만 참아 주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힘들지만 견뎌 주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어렵지만 눈감아 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말입니다.“

우리 라온 코이노니아는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그것은 우리 라온코이노니아의 사랑은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에 대한 모든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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