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29일 주일아침 예배 설교 고전 1:18-24 라온코이노니아의 십자가
요한복음 1:1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엔 아르케 엔 호 로고스)“고 합니다. 이 ‘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성경 로스 역譯에“처음에 도가 이ᄉᆞ되...”(1887년발행)로 번역하였고, 1925년에 출판된 게일 역譯에도 “太初에 道가잇서...”로 번역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道는 길 道자라하여 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마땅히 행하여야할 道理를 말씀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주의 원인을 말합니다. 옛날 중국의 노자는 태초에 道가 있었는데 道가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道可道非常道). 이 말은 道는 무슨 말로서 설명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라고 번역한 ‘로고스’를 헬라철학에서 만물의 원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BC6세기 헤라크레이토스, 스토아철학드이 주장하는 개념으로 특히 1세기 유대인 철학자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은 로고스가 신과 우주를 매개하고 창조를 수행하며 인간정신이 신의 존재를 믿고 신의 뜻을 따르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가르쳤다. 필론과 중세 플라톤주의자-- BC 4세기 그리스의 대표적인 철학자 플라톤의 가르침을 종교용어로 해석한 사람들--에 따르면, 로고스는 세계에 내재하며 동시에 초월적인 신적 정신이라고 말합니다. ).
요한복음에서 이 만물의 시초가 되는 로고스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육신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주의 원리이며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바울 선생님이 고전 1:18의 “십자가의 도(로고스 호 투 스타우루)”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바로 여기서 ‘도’라고 한 말은 헬라어로 ‘로고스’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십자가(스타우로스)를 지신 예수님을 로고스라는 말씀입니다. 기독교에서 십자가를 말할 때는 단순히 나무 기둥으로가 아니라 그 위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함께 생각합니다. 바울의 모든 말씀은 바로 이 십자가에서 출발하고 십자가를 말하며 십자가에서 끝납니다.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바울의 신앙 중심이 십자가라면 기독교의 신앙 중심도 십자가입니다.
이슬람교는 612년 마호메트가 세운 종교입니다. 이슬람교의 경전은 코란이라고 하는데 이 코란에 “예수를 믿으라”는 말이 나옵니다(43:63). 그리고 코란에서 참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예수에 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실상 아슬람교는 초대교회에서 예수를 믿었던 마호메트가 세운 일종의 기독교 이단변종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과 그 복음을 믿어야 한다고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코란 2:87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서를 주었고 그를 이어 예언자들을 오게 하였으며 마리아의 아들 예수에게 권능을 주어 성령으로 그를 보호케 하였노라”고 하였고 코란 2:136에서도 “말하라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우리에게 계시된 것과 아브라함과 이스마엘과 이삭과 야곱과 그리고 그 자손들에게 계시된 것 과 모세와 예수가 계시 받은 것과 선지자들이 그들의 주님으로부터 계시 받은 것을 믿나이다. 우리는 그들 어느 누구도 선별치 아니하며 오직 그분에게만 순종할 따름 이라 ”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놀라운 기적을 베푸신 것도 사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것과 다시 재림하실 것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아주 다릅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3:55) 십자가에서 죽음을 모면한 후 샘이 흐르는 곳으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23:50) 그래서 이슬람교는 예수를 구세주가 아니라 알라가 보낸 위대한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메시야는 오직 마호메트이라고 가르칩니다.
십자가를 믿는냐 아니 믿느냐 이것이 참기독교와 아닌 것과 구분되는 기준입니다. 아무리 예수의 기적을 믿고, 예수의 말씀을 따르고,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승천까지 믿는다고 해도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가 빠지면 그것은 헛된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의 십자가를 부인한다면 아무리 예수를 치켜세우고 심지어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해도 그들은 적그리스도입니다. 만일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십자가를 다만 신화적인 이야기 꾸면낸 이야기 환상적인 이야기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존재의 의미요 기독교인의 실존의 자각입니다
1947년 봄 이스라엘 여리고 남쪽 쿰란 광야에서 일어 난 일입니다. 양치기하며 살던 베두인족(아랍계 유목민) 무하마드 아드드립이라는 목동이 있었습니다. 양 한 마리를 잃어 버려 이곳 저곳을 찾아 헤매다가 반쯤 허물어진 절벽 중간 동굴에 도착하여 혹시 양이 맞아 소리를 내면 구해오려고 돌을 집어 던졌습니다. 그러나 양 소리는 나지 않고 항아리 깨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튿날 사촌 형제와 함께 동굴로 기어 올라가 보니 항아리 파편과 안쪽에는 뚜껑이 덮인 8개 항아리가 있었습니다. 일곱 개는 비어있고 나머지 한 개에 두루마리 책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나와 베들레헴 한 고물상에 넘겼습니다. 어느 날 고물상에 들린 학자들이 이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 시대 광야에서 세상을 등지고 경건하게 살던 에세네파 사람들이 읽던 성경이었습니다. 보통 물건이 아니라 구약 필사본이었습니다. 대대적인 탐사가 시작되었고 쿰란종파 동굴과 사해문서가 상당히 많이 발견되어 세계가 흥분하였습니다. 이것은 2000년 기독교계 최고의 발견 이였던 것입니다.
목동의 눈에는 단지 깨진 항아리였고 낡은 종이조각이었습니다. 고물상에 엿 바꿔 먹는 물건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는 상상키 어려운 소중한 물건이었습니다. 가격으로 따지면 수천억 원의 가치가 있는 그 가치를 아는 사람의 눈에는 세계 최고최대의 보물이었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를 알지 못합니다. 다만 교회장식품으로 기독교인들의 장식품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그 가치와 그 의미와 그 능력을 알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때, 세상 사람들은 "미련한 짓이다. 어떻게 구원할 수 있겠느냐?"고 조롱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도 "지금 뛰어 내려라" "너나 구원하라" 소리치며 조롱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지금도 예수님을 조롱하고 업신여깁니다. 지금도 십자가를 미련한 것으로 여깁니다. 조롱하는 사람은 조롱당할 것이고 업신여기는 사람은 업신여김을 당할 것입니다. 미련하게 여기는 사람은 미련한 삶을 살고 결국은 후회할 것입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세운 영국인들이 처음 그 땅을 밟았을 때에 원주민 아이들이 주먹만 한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소 세 마리를 주고 다이아몬드를 바꿨다고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땅이요 세계 정치 경제의 중심이라는 미국 누욕 땅을 원주민들에게 모포 몇 장, 담배, 그릇, 성냥, 그리고 24불을 주고 아메리카 인디언들로부터 사들였습니다. 한반도의 7배로 온갖 자원의 보고인 알라스카는 미국이 러시아로부터 133년 전 720만 불을 주고 샀습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구원 능력이 나타나 있지만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 가치가 전혀 가려져 있습니다. 능력이라는 말은 '뒤나미스'인데 여기서 다이너마이트가 나왔습니다. 다이너마이트의 힘이 다이너마이트를 감싸고 있는 둥근 상자 안에 감추어 저 있어 그 다이너마이트가 얼마나 강한 힘을 가졌는지 사람들은 모릅니다. 불 붙여 봐야 알게 됩니다.
천 년 전 대서양을 무대로 해적질이나 하고 산 도적질을 하던 바이킹족 앵글 색슨족 게르만족에게 예수를 믿는 믿음의 불이 붙데 되자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나 스웨덴 영국 독일이라는 세계 1등 국가가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미련한자에게는 미련하게 보이지만 구원 받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십자가의 도를 깨달으면 십자가가 우주의 중심축이요 우리 인생의 구심점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파스칼(프랑스수학물리학자 1623-1662)은 “인간은 동산에서 멸망하고 동산에서 구원받았다. 에덴동산의 완벽함은 폐허로 끝났고 겟세마네 동산의 구원은 쓰라린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의 실패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 동산 한 가운데의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하였는데 그걸 믿지 않았습니다. 뱀은 안 죽는다고 말해줍니다. 사람은 뱀의 말을 들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로고스 도인데 이 말씀이 미련하게 보인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미련한 짓을 하였습니다. 에덴에서 추방되고 죄를 가지고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멸망은 인간자신의 미련함 때문에 발생된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통하여 멸망을 예고하셨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동안 사람들은 노아의 일을 비웃었습니다. 해가 쨍쨍한 날에 홍수를 대비한다고 그것도 산꼭대기에서 배를 만드는 것이 미련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천사가 와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것을 예고하자 사위가 될 사람들에게 불의 심판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위들은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과 저주’를 그 앞에 두었지만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백성들이 뱀에 물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구리로 만든 뱀을 장대 높이 달아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들은 낫게 하고 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살지 못한 사람들은 한번 쳐다보기만 하면 될 구리 뱀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뭐 그 까짓것을 본다고 뱀에 물린 것이 낫겠어?” 그들은 구리 뱀을 쳐다보는 것이 미련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언자들을 통하여 앗수르와 바벨론의 침공으로 이스라엘과 유다가 멸망할 것을 경고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예언을 미련한 소리로 여겼습니다.
마가복음 13:14에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 할지어다”고 합니다. 성경말씀 이 구절에 (호 아나기노스콘 보에이토)쳐서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이니까? “읽는 자는 깨달을 진저” 그런데 사람들은 멸망의 경고를 귓전으로 흘려보냈습니다. 경고의 말씀을 듣는 것이 미련한 일입니까? 말씀을 들었으면 깨달아야 하는데 미련한 자들은 하나님의 경고의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이것이 미련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순히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신다는 일 뿐만 아니라 태초에 아담이 지은 죄의 역사가 종지부를 찍고 마귀를 이기어 죄의 권세를 깨트리신 사건입니다.
골 2:14.15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단과 귀신의 권세에 눌려 살고 있습니다.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번번이 무릎 꿇고 삽니다. 온갖 간난고초에 시달리며 신음하고 온갖 저주스런 환경에 시달리며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이런 아귀다툼 아수라장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가득한 세상 한복판에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살아갈 것입니까? 그러나 이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아무리 노동광풍이 넘실거리는 바다한복판에 살고 있다 해도 우리주님과 함께 탄 배는 안심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바다를 잔잔케 하며 바다를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붙들고 있는 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승리할 줄 믿습니다. 내 의지만 가지고 세상을 이기려 하면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내 힘만 가지고 마귀를 이기려하면 말려 들어갑니다. 내 경험만 가지고 죄를 벗어나려면 더 옥죄어집니다. 오래 버티지 못하고 굴복하고 맙니다. 내 지혜로 내 지식으로 감당하려고 할 때 우리는 악한 세력들과 싸워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연약한 능력과 한계만을 확인할 뿐입니다. 십자가로 싸워야만 이길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의지한다는 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을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 대신 싸워 승리하셨음을 믿고 선포해야 이길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자랑하며 십자가의 도를 믿을 때, 그리고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고 십자가를 앞세우며 나갈 때 우리 앞에는 당해낼 대적이 없습니다.
여러분 영적인 싸움에서 패배의 쓰디 쓴 기억이 있습니까?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를 앞세우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힘입어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가 십자가로 무엇을 이길 수 있습니까? 승리 후에 무엇을 가져다줍니까?
첫째, 십자가는 죄를 이기고 구원과 평안을 줍니다.
둘째, 십자가는 패배와 죽음과 지옥권세를 이기고 승리와 영생을 줍니다.
셋째, 십자가는 마귀와 귀신의 영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진리와 자유를 얻게 합니다.
이 시간 십자가를 바라보며 여러분 안에 있는 패배주의적 생각이 다 사라지기를 축원합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믿고 승리의 확신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주님과 연합되었고 또 그의 부활을 통해 새 생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이제 그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의 죽음에 동참하게 되었고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중심은 십자가를 통해 바뀌어졌습니다. 이제 우리의 새로운 중심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력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도를 우리 안에 계시 하실 때 단순한 지식적인 이해를 시키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당하시고 죽으심으로 십자가의 능력을 사실적으로 똑똑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능력은 오직 우리의 실제적인 경험으로 깨닫게 되는 능력으로 도입니다.
18절 하반 절에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상반절의 ‘미련한 것’의 반대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든, 하나님의 능력이든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 둘의 차이는 멸망과 구원의 차이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능력 ‘뒤나미스’는 총체적 난국(omnishambles)을 단번에 해결 시키는 총체적 능력(Integral Power)을 의미합니다. 우주의 원리로서의 생명력을 말할 때 ‘뒤나미스’ 이 단어를 씁니다. 신약성경에서 ‘뒤나미스’란 단어는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이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뒤나미스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수치스럽고 험한 나무 기둥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는 하나님의 총체적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은 단순히 십자가 형틀을 짊어지신 것이 아닙니다. 그 십자가는 온 인류의 죄를 다 짊어지신,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가시기에 너무나 무거운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온 인류의 죄를 당신의 보혈로 다 녹여버리시고 씻어내시기 위해 지금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힘은 십자가의 자체의 힘이 아니라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보혈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채찍에 맞아 만신창滿身瘡이 되시니 온 몸이 피범벅이셨고, 가시관을 쓰신 머리에서부터 피가 흘러내려 눈에 들어가니 피 눈물을 흘리셨고 양손과 두발의 못이 박힌 자리에 피가 흘러 뜨거운 뙤약볕에 꺼먹게 딱지가 굳어버렸고 돌아가시기 전에 무지막지하게 로마병정 롱기누스가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을 때에 피와 물이 샘솟듯 나왔습니다. 이 예수님의 피는 만민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피였고 그 능력에 인류는 죄에서 마귀에게서 죽음에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되었으니 예수님의 흘리신 보혈은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의 피가 없었으면 능력도 없고 십자가는 다만 나무 기둥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해주신 능력은 예수님이 등에 지시고 골고다로 올라가시어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보혈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힘차게 찬송합니다.
268장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로마서 1:16에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합니다. 복음 곧 십자가도는 그래서 폭발하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폭발하게 하여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이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까?
2011년 2월25일 금요일에 인천에서 LA로 가는 아시아나 OZ 204 비행기 안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느 자리에선가 어린아이의 찢어질 듯한 울음소리가 계속 들렸습니다. 미국인 젊은 부부가 한국 어린아이를 입양해 가는 중이였습니다. 아마도 아기가 잠에서 깨어나 보니 낮선 사람이 자기를 안구 있는 것을 보고 울기 시작하였던 것 같습니다. 미국인 부부가 얼려보고 달려보고 해도 아기는 계속 울었습니다. 그때 한 스튜어디스가 아이를 품에 안고 도닥거려 주었습니다 정성스레 돌보아 주었습니다. 너무 더워하는 것 같아 옷도 벗겨 주었습니다. 급기야 아이를 등에 업었습니다. 두 명의 스튜어디스가 번갈아 그렇게 업어주니 아이는 편히 잡을 잤습니다. 10시간이나 그렇게 정성으로 아기를 돌보았습니다. 젊은 미국인 부부는 너무나 감사하고 앞으로 한국인 친구를 많이 사귀었다고 하였습니다. 습니다. 당황한 미국인 부부는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이 때 두 승무원 아가씨가 아기의 옷을 벗겨주고 번갈아 가며 아기를 안아주었습니다. 미국인 부부가 몇 시간 후 잠이 곤히 들었지만 승무원은 아기를 업고 있었습니다. 아기에게 자신의 등을 내어준다는 것은 쉽지 않았겠지만 선뜻 자신의 등을 내어준 것입니다. 승무원의 등에서 아기도 곤히 잠이 들었습니다. 한국인 승객들은 승무원들을 칭찬하며 격려하였는데 승무원은 아마 아기가 미국인 부부를 보고 낯가림 심해 울었던 것 같다고 하며 오히려 당연한 일을 하였다고 했답니다. 한국 아기를 입양한 미국인 부부도 우리 승무원들에게 감사를 표했다고 합니다.
옛날부터 한국 어머니들은 아기를 업어서 키웠습니다. 요즘 젊은 엄마들은 업어 키우지를 않습니다. 대신 아버지가 업는데 무슨 철제 기구 안에 넣어 짊어집니다. 업어 키운다는 것은 소위 모체 접촉을 위해서입니다. 모체접촉은 모태 안에 있었을 때처럼 엄마의 생명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아기의 정서가 안정되고 이럴게 키운 아기가 잘 자라며 지능도 더 발달이 잘됩니다. 뿐만 아니라 모체접촉이 많으면 질병 발생률이 낮아지고, 병의 치유률이 그렇지 않은 아이보다 훨씬 높다고 합니다.
하나님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강하게 하고, 평안하게 하시기 위하여 업어주셨습니다. 출애굽기 19:4에는 “내가 애급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이 스스로 걸어간 것 같지만 알고 보니 하나님께 업혀서 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업어서 옮겨놓아 주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60 만 명도 넘습니다. 한 사람 한사람 그렇게 하나님이 엎어서 가셨습니다.
지금도 임마누엘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적으로 엎어서 돌보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우리를 업으시고 골고다로 올라가시어 보혈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어주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우리를 업어 돌보시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업으시어 구원하시고 성령께서 오늘도 우리를 업어 일하고 계시는데 아무나 이쁘다고 그렇게 업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에 업혀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등에 누가 업혀 있습니까? 예수님은 누구를 업어 주실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짊어진 사람을 업어주십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구레네 시몬입니다.
339장 1절에 “내 주님 지신 십자가 우리는 안질까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이 가사는 1693년 토마스 셰퍼드(Thomas Shepherd1665-1739)가 작사한 것으로‘구레네 시몬만 십자가를 져야하고 성도들은 안 져도 되는가?'라는 반문을 하고 ‘저마다 제 몫의 십자가가 있나니 내 십자가도 거기에 있네’라고 가사를 썼습니다.
본래 1절 가사는 이렇습니다. “시몬만 혼자만 십자가 져야 하고 / 다른 성도는 안질까?/ 각각 다른 성도의 십자가가 있을 것이니/ 내 몫의 십자가도 있도다.”
(Shall Simon bear the Cross alone/ And other Saints be free? / Each Saint of thine shall find his own/ And there is one for me .)
예수님께서 마16:24에“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아라토 톤 스타우론 아우투 카이 아코루세이토 모스)고 하였습니다. 마태 10:38에는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십자가」는 무엇을 말합니까? 대부분 목사님들은 설교하시기를 각기 자기가 평생 가지고 가는 각가지 고민거리 괴로움 병고 인간관계 세상 살면서 겪는 문제거리들을 자기 십자가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이것도 평생 우리가 짊어지고 갈 인생의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은 내 몸에 박힌 가시 같아서 믿음으로 인내하며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기를 바라는 기도의 제목들입니다. 그런 정도가 내 몫에 태인 십자가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고민덩어리를 해결해 주시려고 십자가 지긴 것이 아닙니다. 그런 고민덩어리는 예수 믿으면 다 축복의 선물로 다 해결해 주십니다. “주님 가신 길 십자가의 길 외롭고 무거웠던 길” 그 골고다 언덕길로 내 괴로움 안고 따라갈 것입니까? 구레네 시몬은 무엇을 짊어지고 따라갔습니까? 자기의 십자가입니까? 예수님 십자가 짊어지고 갔습니다. 그러면 내 몫에 태인 십자가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앞서 예수님이 시자가위에 우리를 업고 가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업고가시는 우리는 누구입니까? 구원받은 백성들의 모임으로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였습니다. 왜 교회마다 십자가를 달고 있습니까? 다만 교회표시가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왜 십자가 목걸이를 합니까? 예수 믿는다는 장식품이 아닙니다. 나도 예수님 십자가 지고 가는 사람 입니다란 표입니다.
쿼바디스 도미네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영화제목입니다. 로마의 네로황제가 기독교 박해를 심하게 하자 베드로가 도망을 갑니다. 어느 산길로 접어드니 그곳에 예수님이 오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쿼바디스 도미네”라고 외쳤습니다. 이 말은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나는 네가 짊어지기 싫어하는 십자가를 다시 지기 위해서 로마로 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깜짝 놀라서 ”주여 제가 잘못 생각하였습니다. 어찌 주님이 두 번 십자가를 지실 수 있으십니까? 제가 돌아가서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베드로는 다시 로마로 돌아가 잡혀 십자가형을 받게 되는데 베드로는 예수님처럼 어찌 이 죄인이 그렇게 죽을 것입니까? 나는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순교 하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도 곧 십자가를 나도 짊어지고 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몸 된 교회는 바로 내가 짊어지고 갈 십자가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 6:14에서“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교회를 나의 십자가로 삼을 때에 십자가의 능력을 받게 됩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십자가 자체의 능력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시어 보혈을 흘리신 주 예수그리스도의 능력이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십자가는 부적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도 곧 십자가상에서 보혈을 흘리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나의 십자가를 지고 갈 때에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받게 됩니다.“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십자가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무 막대기, 나무 기둥에 불과합니다.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의 주인,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주님이 우리에게 능력이 되십니다.
이제 예수 믿는 일은 편하게 믿을 생각한다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통하여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받은 사람은 편해 질 수 없습니다. 세상가운데 그 능력을 행사하여 부단히 죄악과 싸워 죄악을 이기고 마귀와 싸워 마귀를 이기고 세상과 싸워 세상을 이길 능력자여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질 때 예수님으로부터 나는 마귀를 이길 능력을 체 받게 됩니다. 십자가 지지 않으면 마귀를 이길 능력을 얻지 못합니다. 십자가를 짊어지므로 나는 예수님의 능력을 공유하게 되니 세상을 이기며 죄악을 이기며 어두운 권세를 깨트리는 다이나마이트 기독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요즈음 기독교 교회들이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전도도 잘 안되고 교회의 역할이나 교인으로서의 사명을 등한히 하고 있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의 도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십자가가 없습니다. 교인들이 십자가를 멀리합니다. 그러니 온 세상에 마귀가 들끓고 있습니다. 교회는 다만 사람들이 모이는 강당일 뿐 입니다. 이것은 잘 못된 일입니다. 그러니 온 나라에 마귀가 들끓고 있습니다. 강원도에서 비가 오지 않는다고 도지사가 앞장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합니다. Tv에서 무당이나 점쟁이들이 무슨 유명 인사라고 소개받고 운명이니 전생이니 하면서 말들 합니다. 이런 귀신의 역사가 판치고 있는 나라는 다시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나라를 다시 일으키고 부강한 나라 되도록 하려면 십자가의 도를 다시 깨닫고 십자가를 지고 가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의 가정과 직장과 나라를 바로 인도해 나가야 합니다.
오늘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2000년 전 예루살렘 사람들은 나귀타고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환영하였지만, 오늘 우리 라온 코이노니아 성도들은 십자가 지고 골고다로 오르시는 예수님을 뒤따르며 그리고 구레네 시몬처럼 바울처럼 십자가의 도를 짊어지고 십자가의 능력으로 날마다 승리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우리 모두에게 항상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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