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15일 주일아침 예배 설교 삼상 16장 1-절 – 13절 라온코이노니아의 의식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은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보통 사람들보다 어깨 하나가 더 클 정도로 키가 크고 사나이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왕이 될 만한 인격자 였고 하나님을 잘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과 비교해 볼 때 인간적으로 못할 결점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그는 시기 질투심이 강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기심과 질투를 구분해서 설명하였습니다. 질투는 이웃이 가진 걸 자신이 갖지 못해 슬퍼하는 것이고, 시기심은 자기가 갖지 못한 걸 이웃이 가지고 있어서 슬픈 감정입니다. 질투의 초점이 본인에게 있다면, 시기심의 초점은 타인에게 있습니다. 시기심은 언제나 밖을 향하여 있습니다.(함규정의 “서른 살 감정공부”중에서) 문제는 자기만 슬퍼하면 그뿐인데 여기에 마귀가 역사하여 이웃을 미워하고 죽이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울왕이 바로 이런 성격의 사람이라 골리앗을 죽이고 자기의 사위가 된 다윗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하였으니 하나님으로부터 싫어버림을 받게 됩니다.
삼상15장 3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이제 하나님은 사무엘선지자로 하여금 사울왕을 대신할 새로운 왕을 선택 하시고자 합니다. 본문은 사무엘 선지자가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가서 마치 미스코리아 진을 뽑듯이 다윗을 간택하는 장면입니다. 사무엘은 베들레헴에 사는 이새의 아들들을 불러 모아 한 사람씩 돌아가며 선을 봅니다.
제일 먼저 맏아들인 엘리압이 나왔습니다. 우람한 체격에다 다부진 생김새가 단연 왕의 풍채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립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6절).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무엘에게 하나님이 즉각적으로 경고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7절).
미스코리아를 뽑는 심사를 보면 먼저 용모와 키를 봅니다. 적어도 키는 172cm는 넘어야하고 몸무게는 50kg 서구적인 V라인 얼굴에 눈코입이 크고 웃을 때 눈꼬리가 살짝 내려오는 반달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심사위원일 경우는 전혀 그런 외모를(원어:아인,눈으로, at the eyes) 보지 않으십니다. 잠언 31:30에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의 선택 기준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아들 엘리압은 나이로 보나 외모로 보나 왕의 풍모가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 중심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후보 자격은 다음 아들에게로 넘어갑니다. 이제 하나님의 기준을 알게 된 사무엘은 둘째 아들 아비나답, 셋째 아들 삼마도 이새의 일곱 아들들이 차례로 지나갔으나 그 누구도 하나님이 선택하신 후보감은 아니었습니다.
사무엘은 어찌 된일인가 분명히 이새의 아들들 가운데 한 사람을 왕으로 세우라고 했는데 일곱 명 중에 하나도 없다니…. 그래서 이새에게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당신 아들들이 다 여기 모인 것입니까?“ 이새가 말합니다. ”아닙니다. 아직 막내가 있는데 그 앙는 양을 지키고 있습니다.” “왜 그 아이는 여기 없는 것입니까?” “막내는 아직 어리고 몸집도 작고 들에 나가 지금 양들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막내의 이름도 말하지 않고 그냥 막내라고만 말합니다. 막내란 마지막 아들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원어에서 막내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원어로 ‘학카톤’이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하찮은 자, 대수롭지 않은 자” 그다지 볼 것도 없는 아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왕이 될 사람을 간택하는데 그 아이는 택도 안 되는 낄만한 아이가 못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아이는 양을 지키고 있습니다.”에서 ‘지키다(로에)’란 말도 “양에게 풀을 먹이고 있다”란 말입니다. 이 말도 그저 들판에 나가 양에게 풀이나 뜯게나 할 별 볼일 없는 아이라는 것입니다. 이 아이가 바로 다윗입니다. 사무엘은 빨리 다윗을 불러오라고 합니다. 사무엘이 그렇게 해서 불려온 다윗을 보니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이 말씀을 직역하면 “그의 머리털 색깔이 붉고(아드모니), 눈이 초롱초롱(야페)한 것이 그의 전체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토브 로이)”입니다. ‘얼굴이 아름답다’고 하였는데 ‘ 원어 성경에는 얼굴이란 말이 없고 그냥 전체적인 느낌이 아이에게서 ’착한 아이 이구나!‘하는 선한 이미지를 풍기는 것이 좋았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름답다‘란 말도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눈에 보시기에 “좋았다”란 말과 같은 ’토브‘란 말입니다. 한마디로 사무엘 선지자의 눈에 꼭 들었다 아니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고 말씀하시였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구절이 ” 이가 그니(제 후)“란 말입니다. 하나님도 ”내가 그 중심을 보니 이 아이가 왕이 될 내 마음에 합한 자이다!“라고 아마도 기뻐하시어 소리치시듯 사무엘게 말씀하시였습니다.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가서 말씀을 하면서 사도행전 13:22에 하나님께서“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사무엘은 즉시 다윗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장차 이스라엘 왕이 될 자격을 주었습니다. (다윗은 세 번 기름부음을 받았다. 삼상 16:13과 헤브론에서 유다의 왕으로 오를 때 삼하 2:3,4. 그리고 통합 이스라엘 왕을 등극할 때 삼하 5:3)
사람들은 외모를 모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한마디로 코드 인사를 하시는 분입니다.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 세상적인 기준은 전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제자들을 어부가 아니면 세리 아니면 열심당출신들을 제자로 삼으셨습니까? 예수님도 중심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보잘 것 없는 ‘학카톤 양치기’이였지만 하나님이 다윗의 중심을, 다윗에게서 미래와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비록 때때로 하나님의 뜻에 미치지 못하였지만 일평생 그 중심은 죽기까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 ‘중심’이란 말은 무엇을 가리키는 말입니까? 성경에 ‘중심’이라고 번역한 말은 원어로 ‘레브’라고 하는데 이 말은 주로 ‘마음’이라고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디 사람의 ‘내장’을 가리키는 말로 ‘심장’(삼하18:14)으로 번역을 하는데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람의 마음이 심장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지금도 마음이 떨리면 가슴에 선을 얹고 ‘심장’이 떨린다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관념(삼상4:20), 심중(신29:19) 지혜(잠7:7) 명철(전7:7)으로도 번역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은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고 하신 말씀을 마음을 보신다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을 의식(意識awareness)이라는 말로 번역을 하려 합니다. 마음하면 추상적인 의미이지만 의식은 깨어 있는 상태(awakening)에서 자기 자신이나 사물에 대하여 인식(cognizance)하는 작용을 말합니다. ‘교통사고로 의식을 잃었다가 의식을 다시 찾았다’라는 말을 합니다. 사람이 의식을 잃으면 죽은 것이나 마찬 가지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언제부터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인간의 뇌세포(뉴런) 수는 약 150억 개인데 이것은 태아기에 전부 만들어집니다. 태어나서는,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거나 수가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원인으로 뇌세포가 죽어 버려도 그 위에 대체할 수 있는 것이 다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매일매일 신경 세포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임신중이 얼마나 태아에게 중요한 시기인지 알 수 있습니다. 모체에 있는 동안에는 뱃속의 아기가 태어나서 성숙하기 위한 중요한 준비 기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체 속에서는 아기에게 앞으로 말을 하고 듣고, 그 의미를 이해하고 생각하는 지적 활동의 기반이 됩니다. 이른바 '지능의 토대'가 만들어지는 시기입니다. 임신 14주 무렵부터 지능의 토대가 되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의 오감을 인식하는 능력이생겨납니다. 이 무렵의 태아는 욕구가 만족되면 쾌감을 기억하고 만족되지 않으면 불쾌감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1955년 全 세계의 산부인과학회에 깜짝 놀랄 대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프레드릭 르봐이예(Frederick Leboyer 저서’평화로운 탄생‘Pour Naissance Sans Violence 우리나라 2001년 동원산부인과 김상현박사가 소개)박사의 인권분만 보고서가 발표되었습니다. 태아와 신생아의 시각에서 본 분만법이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의 존엄성에 대해 일깨워 주게 된 것입니다. 신생아가 모태에서 출산할 때 으앙 하고 우는 이유가 지금까지의 생각은 탯줄을 통해서 호흡하다가 처음으로 폐를 통해서 호흡하기 위해 운다라는 생각이 틀린 생각이란 것입니다. 이기가 우는 것은 공포를 느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기에게 탄생이란 기쁨이 아니라 지옥과도 같은 고통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생아가 태어나면서 하는 첫 생각...."엄마는 죽었다!". 탄생은 적어도 태아에겐 결코 즐거운 사건이 될 수 없습니다. 자궁수축이 시작되면 태아는 너무나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보호해주던 자궁이 갑자가 조아 오고 밀어내고 하기 때문입니다. 탈출해야 겠다고 생각하고 죽을힘을 다해 도망쳐 보지만 갑자기 앞이 막히기도 하고 뒤로 밀리기도 합니다. 공포와 좌절의 시간동안 태아는 자신의 보호자, 즉 엄마가 사라졌다고 믿게 되는 순간입니다. 오직 극심한 공포만이 태아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공포의 클라이막스에서 탄생은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이곳에선 또 다른 공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분만실의 환경이 그것입니다. 자궁 안은 조명이 어둑컴컴한 30룩스인데 분만실은 10만 룩스 입니다.(밝은 태양 빛이 10만룩스) 자궁 안에서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천둥 같은 소리들이 들려옵니다. 양수 속에서 사느라 한 번도 못 느껴 본 공기의 중압(400kg중)을 감당하는 것도 힘이 듭니다.
탯줄로 호흡하다가 갑자기 폐로 호흡해야 합니다. 불길이 들어오듯 공포가 밀려옵니다. 거꾸로 들리는 것은 또 다른 공포를 자아냅니다. 인간에게 두려움의 중추는 척추입니다. 그래서 등골이 오싹 하다는 말은 두려움의 상징적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아기는 극도의 두려움과 현기증을 느낍니다. 이 모든 것이 신생아에게는 오직 공포의 대상뿐이며, 바로 그 공포 때문에 울게 되는 것입니다. "엄마! 엄마! 저 살려주세요. 도대체 어디로 갔나요?" 신생아가 느끼는 첫 번째 의식은 공포였습니다.
그런데 조명을 줄이고, 탯줄을 천천히 자르고, 아기가 태어나는 즉시 엄마의 심박 소리를 들려주고, 체온과 같은 물속에서 아기를 넣어줌으로써 중력에 대한 공포를 줄여 주고, 엄마 곁에 안겨서 4시간 동안 모자애착의 관계를 쌓게 하는 등 아이를 위한 행복한 환경 만들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참으로 감동적인 것이었습니다. 울기는커녕 태어난 지 10분도 안 된 신생아가 웃기 시작합니다. 물론 눈을 뜨고서 말입니다. 그리고 눈을 뜨고 있을 때는 마치 생글거리듯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세상 탐험을 시작합니다. 성장속도가 빠르고 지능도 훨씬 더 빨리 발달됩니다. 아기인권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왜 어린아이 출생을 길게 소개하느냐 하면 사람의 의식은 이미 모태 안에 있을 때부터 형성이 되고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아이가 가지는 의식은 공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공포가 아니라 기쁨으로 인생을 출발하도록 산모나 의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울면서 태어나는 아이와 웃으면서 태어나는 아이의 인생은 인생의 출발부터 다른 것입니다. 공포 의식으로 시작하는 인생은 불안과 고통의 인생이요, 기쁨 의식으로 시작하는 인생은 평안과 즐거운 인생으로 살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인생은 평안과 즐거운 인생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 선생님은 항상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씀하였던 것입니다.
지능(IQ)지수가 있듯이 의식 지수가 있습니다. 이 의식지수에서 199이하의 사람은 개인이든 사회이든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인생을 살게 됩니다. (데이비드 호킨스 “의식 혁명” —Applied Kinesiology의학) 이때 지수를 빛의 밝기를 말하는 Lux로 표시합니다. 1룩스는 촛불 한 개의 밝기입니다. 그러므로 의식지수가 100이라면 100룩스라고 합니다. 그러닌까 200룩스 이상이 되어야 어느 정도 세상을 밝게할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 사회가 혼란스럽고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어두운 사회가 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사람들의 의식 지수가 낮고, 낮은 의식에서 나오는 룩스 빛이 없으니 세상이 어둡고 정치가 좌충우돌, 경제가 우왕좌왕, 사람들은 갈바를 몰라 갈팡질팡 하고 있습니다.
지난번 미국에서 아르헨티나에 살다가 온 한인 교포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아르헨티나는 비옥한 땅도 많고 석유도 나오고 지하자원이 많은데 저렇게 못사는 이유는 진실성과 정직함이 없고 부정과 부패가 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나라는 천주교 때문에 망한다는 것입니다. 사기횡령, 별짓을 다하고도 와서 신부 앞에 고해성사만 하면 된다고 믿기 때문에 서슴없이 온갖 죄를 다 짓는다는 것입니다.
가령 국회의원이 50명이라 한다면 봉급 받는 운전사가 200명이나 되고, 석유 회사가 고용인이 150명인데 이름 걸고 봉급 타먹는 사람은 500여명이나 되기 때문에 언제나 적자라고 합니다. 미국이 300억불을 빌려 주면 밑에까지 한 푼도 가지 않고 중간에서 다 해먹는다는 것입니다. 포클랜드 전쟁 때에도 결코 영국한테 질 수가 없는 전쟁인데 졌다는 것입니다. 영국에서 그 섬까지는 15,000km인데 아르헨티나에서는 500km밖에 안되는 거리라고 합니다. 패배한 이유는 무기나 군수품도 중간에서 다 떼먹고 제대로 보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병사는 총 쏠 줄도 모르고 총을 잡아 보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부정부패가 그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부정과 부패는 나라를 패망케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위정자들로부터 온 백성이 정직한 의식 지수가 바닥을 치고 있으니 겨우 앞가림 할 정도의 빛이 있을 뿐입니다.( 한국 부패지수가 10점 만점에 4.2점, 세계 92개 조사국 가운데 42위로 나왔다. 같은 아시아권의 싱가포르(9.2점, 4위), 홍콩(7.9점, 14위), 일본(7.1점, 21위)에 한참 뒤처진다. 가장 깨끗한 국가군인 핀란드(9.9점, 1위), 덴마크, 뉴질랜드, 아이슬란드, 스웨덴과 비교할 때는 턱없이 초라하다.)
최근 김영란 법이 국회에 통과 되었는데 이제 겨우 등불을 등경위에 올려놓으려는 일입니다. 최근 초대형 軍 무기 납품 비리사건으로 군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습니다. 일광공영 이규태 회장의 방위사업비리로 세상이 떠들썩합니다. 남재준(南在俊) 육군 참모총장이 군의 도덕적 해이를 질타해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부패하고 부정한 군대가 전투에서 승리한 사례는 없다" 면서 "부정과 부패가 총칼을 든 적보다 무서운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습니다. 북한의 핵무기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군 지도층 인사들의 의식의 부패가 나라를 망치고 있습니다. 만일 전쟁이 나면 이런 군 지도자들을 믿고 어찌 숭리를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대통령 이하 모든 공직자들의 의식수준이 낮은 것이 문제요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깜박깜박하고 있으니 나라의 흥망을 걱정할 지경입니다.
데이비드 호킨스(David Ramon Hawkins, 1927년 6월 3일 ~ 2012년 9월 19일)의박사가 ‘의식혁명’이란 책에서 의식지수 레벨을 설명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의식지수 20룩스는 수치심입니다. 의식지수 30룩스는 죄의식입니다. 의식지수 50은 무기력입니다. 의식지수 75는 슬픔입니다. 의식지수 100은 두려움입니다. 의시지수 125는 욕망 집착입니다. 의식지수 150은 분노입니다. 의식지수 175는 자존심입니다. 의식지수 200은 용기입니다. 의식지수 250은 중용입니다. 의식지수 310은 자발성입니다. 의식지수 350은 포용입니다. 이 350에 이르면 행복의 근원이 자기자신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의식지수 400룩스 이성입니다. 의식지수 500룩스는 사랑입니다. 이 수준에 이르면 사물의 본질을 분별할 수 있는 역량이 증대하여 문제의 핵심을 꿰뚫을 수 있게 됩니다. 문제를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납니다. 이성은 문제를 일일이 따지는 경향이 있지만 사랑의 능력은 따지지 않아도 다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진정한 행복의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기독교만 아니라 모든 종교에서 사랑을 외치지만 이 수준에 이른 사람은 0.4%정도입니다. 의식지수 540룩스는 기쁨입니다. 이 수준에서는 치유가 시작되며 순교자 성인의 영역입니다. 이 수준의 특징은 계속되는 역경 속에서도 인내하고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 수준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이들에게는 사랑과 평화를 전파하는 능력이 있게 됩니다. 의식지수 600룩스 평화입니다. 이 수준에 이른 사람은 천만 명 중의 한 명꼴입니다. 이 상태에 도달한 사람은 주관이니 객관이니 그 차이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늘 지극한 행복 속에 살며 영적 지도자로 인류의 평화를 위해 일하기도 합니다. 의식지수 700룩스는 깨달음 입니다. 그리고 의식지수 1000은 영적 완성자로 신성시 됩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이 수준에 도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세상의 빛이라 하셨으니 10만 룩스 이상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의식지수는 지금 어느 수준에 와 있습니까? 아직도 수치심 죄의식 무기력 슬픔 두려움 욕망 집착 분노 자존심 이런 것에 얽매어 있다면 우리는 의식 수준이 200에도 못 미치는 어두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무엇을 보십니까? 우리의 중심 곧 의식을 보십니다. 지금 어떤 의식에 사로 잡혀 있는가?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받을 성도로 간택 받기 위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의식 지수를 높여야 합니다. 어둑컴컴한 의식의 밝기 룩스를 높혀 가정을 밝히고 사회를 밝히고 세상을 밝히는 의식 수준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엡 4:15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이 말씀을 다시 말씀드리면, 바울 선생님은 예수그리스도의 1000룩스 이상 밝기에 이르기 까지 밝혀가야 한다는 말씀하였습니다. 물론 1000룩스 까지는 갈 수 없지만 200 300 400으로 높혀 가야 합니다. 200이 용기고 310이 자발성이고 350이 포용성입니다. 400은 이성이고 500은 사랑입니다.
기독교의 신앙행동은 무의식적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를, 마치 무당이 굿을 하며 무아지경에 빠지는 그런 것을 말하지 아니하고, 분명한 의식과 마음상태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바울 선생님이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되었다’라는 말씀은 200이하 어두운 으식으로 살다가 이제 200 300 500이상으로 밝은 의식으로 살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그 의식은 여전히 어둠속에 있다면 아직 그의 의식수준은 어둠속에 있으니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어떤 의식을 가지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믿음과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 그 중심의 밝기가 어떠한가 그 중심에서 얼마만의 힘이 발휘되고 있는가? 그것이 바로 나의 믿음의 역량의 범위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은 여러분의 중심에서 나오는 빛의 밝기를 그 의식지수를 보고 계십니다. 나의 의식의 총량을 달아보십니다. 아마도 나는 200룩스도 못 될 거라고 염려하실 분이 있을 거 같습니다. 그러나 아직 의식의 지수가 높지 않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랄총량의 법칙>이란게 있습니다. 한동대 법대 김두식 교수가 쓴 “불편해도 괜찮아”라는 책에서 나온 말입니다. 김교수는 희망제작소의 유시주(유시민의 여동생. 희망제작소는 2006년 박원순 변호사를 중심으로 한 시민, 시민사회 활동가, 사회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사회혁신을 표방한 단체)의 말을 전합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평생 쓰고 죽어야 하는 ‘지랄’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 어떤 사람은 그 지랄을 사춘기에 다 떨고, 어떤 사람은 나중에 늦바람이 나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죽기 전까진 반드시 그 양을 다 쓰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시절 어른들의 말을 잘 안 듣고 지랄발광 하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부모 속을 더럽게 썩히고 말괄량이 장난꾸러기 말썽꾸러기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청소년의 뇌가 형성기에 있기 때문에 비상식적인 행동을 자기도 모르게 저지르게 됩니다. 그런데 어려서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으면 나이 들어서 어느 땐가 느닷없이 이해 할 수 없는 행동을 합니다.(김려령의 가시고백을 읽어보세요) 만일 어려서 90을 저지른 사람은 나이 들어 10정도만 해서 순해지고, 어려서 10정도로 순하였던 사람이 나이 들어 90의 일을 저질러 100을 채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70-80년대 운동권에서 박정희 물러가라고 데모대에 앞장을 섰던 사람이 이제 나이 70이 넘어서 보수주의자가 되어 무조건 박근혜대통령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은 바로 지랄총량 지수를 맞추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젊은 시절 물불을 가리지 않고 신앙생활에 열심하며 목사님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순종하던 사람이 나이 들어 권사 장로가 되면서 열심도 떨어지고 율법주의자가 되고 목사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일도 다 이 지랄총량법칙에 따르고 있다면 이해가 갑니다.
전에는 그 중심의식이 수치심 죄의식 무기력 슬픔 두려움 욕망 집착 분노 자존심에 있었다 해도, 이제 부터는 용기 자발성 포용성 이성 사랑의 빛으로 환히 그 중심으로부터 점점 빛을 발하니, 하나님 보시기에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하여 하나님이 성령을 기름 붓듯 하매 하나님의 평안과 기쁨과 행복이 넘치리라 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하버드대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아프리카에 있던 슈바이처 박사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박사님은 이 학생을 만나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그래도 하버드대학교에 다니는 대학생인데 환영은 못해줄망정 만나주지도 않으니까 이 학생은 화가 많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몹시 실망해 귀국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큰 비가 와 마을이 온통 물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그때 한센병을 앓는 한 아이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보고 뛰어들어 구해주었습니다. 그제야 박사가 그를 불러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며칠 자네를 지켜보니 전혀 나를 만날 준비도, 만날 가치도 없었네. 그런데 아이를 구해주는 것을 보고 자네에게 긍휼의 마음이 있는 것을 보았네.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의사나 약이 아니라 긍휼의 마음일세.” 라고 말했습니다. 전에는 그 중심의 의식 지수가 100도 안되었는데 이제는 300도 넘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의 의식지수를 날마다 조금씩 높혀 룩스 밝기를 밝혀 나가는 것입니다. 슈바이처가 하바드 학생을 지켜보았듯이 지금 나의 중심을 하나님이 보고 계십니다. 성령께서 내 의식지수를 재보고 계십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동침한 후 하나님이 불꽃 같은 눈으로 보고계심을 깨닫고 회개하기를 시편 51편 10절에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다윗의 의식은 정직했기 때문에 회개도 할 수 있었고 그의 의식을 보시는 하나님이 아름답게 보셨던 것입니다. 시편 15편 2절에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은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인정받고 특별한 사랑을 받으려면 의식 지수가 높아 진실하고 또 정직해야 합니다.
마틴 루터는 "내 머리위로 지나가는 새는 막을 수 없으나 그 새가 머리 위에 둥지를 틀게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지나가는 나쁜 생각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지마는 그 생각을 받아 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생각은 의식으로 연결되고 그 의식은 행동으로 연결되어 욕심이란 의식이 죄를 낳고 죄라는 의식이 사망을 낳게 됩니다. 의식이 저급하면 마귀와의 영적전쟁에서 패배하게 됩니다. 의식지수가 낮아지면 결국 자신이 고통스럽습니다. 삶이 평안하지 않습니다 사는 게 재미가 없습니다. 매사 의욕이 떨어집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다윗은 평생 정직과 성실함으로 자신의 의식 지수를 적어도 500룩스 이상 높였습니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그 의식수준이 상당하였으니 눈이 번짝 거렸고 그 모습에서 선한 픔위가 풍겨 나와 바로 ‘제 후, 이 아이가 그 아이다’라고 하나님이 박수를 치셨던 것입니다.
엡5:8이하의 말씀에서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에는 우리들의 의시지수가 200룩스 이하라 어둠이더니 이제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의식으로 의식지수가 200룩스가 넘어서 나로 인하여 집안이 환하고 직장이 환하고 세상이 환하게 되어야 합니다. 나로 인하여 그 어디에도 어두움이 없어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세상에 태어나와서 먼저 가지게 되는 의식이 공포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공포의식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세상에 대한 공포심을 떨쳐 버리는 것입니다. 오히려 기쁨으로 밝고도 명랑하게 세상을 그야말로 舟遊天下하며 사는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의식의 지수를 높혀 나가야 합니다.
라온 코이노니아는 의식지수를 높이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라온 코이노니아에는 어둠이 없으니, 하나님이 나의 중심을 들여다보십니다. 처음에는 선택하였지만 후회스런 사울 왕이 아니라 다윗과 같은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보십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빼어나고 사람들 앞에서 빛을 발하는 아름다운 높은 신앙의식의 소유자가 되시고 날마다 일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의 은혜로 형통한 삶을 살아가는 라온 코이노니아 가족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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