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교회 80년 회고와 감사
2015년 1월 19일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총회 주제 강연
교단 창립 80년을 회고하면서 먼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그리고 창립자 최 태용 목사님을 비롯한 초기 복음교회 모든 성도들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를 드립니다. 최근 저는 전라북도의 100년 이상 된 교회들을 순방하며 그 역사를 탐방하여 1년여 동안 매주 금요일마다 극동방송국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 기독교사상 잡지에 탐방 기사를 지난 10회에 걸쳐 계속 연재하여 오고 있습니다. 초창기 전북지역에 들어와 선교하던 선교사들의 발자취들을 따라가며 그들의 선교적 열정과 수고에 깊은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더욱 놀라운 것은 100여 년 전 그 선교사들에게 복음을 들은 지역 주민들이 눈물과 땀과 심지어 피를 흘려 가며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지키고 교회를 부흥시켜나간 이야기를 알게 될 때 저는 심령이 떨리는 것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당시 선교사들과 초대 교회 지도자들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가지지만 그 당시의 지역 평신도들께 참으로 감격하고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복음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최 태용 목사님 백 남용 목사님 윤 치병 목사님을 비롯한 복음교회 초창기 목사님들과 장로님들께 무한한 존경심과 감사의 마음을 가집니다. 그러나 지난 80년 동안 복음교회가 이어 온 그 배후에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복음교회를 위해 땀 흘려 봉사하며 찬마루 바닥에 엎드려 교회를 위해 기도한 수많은 평신도들이 있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 3가지로 하나님께 감사 하며 복음교회를 창립하신 최 태용 목사님과 초창기 복음교회 교인들께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창립자 최 태용 목사님과 초대교회 성도들이 복음교회를 세우고 그 복음교회를 우리에게 물려주신 바에 다시한번 하나님께 그리고 초창기 교인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20년 전 복음교회 총회 신학교 입학생을 면접할 때 이야기입니다. 서천의 어느 기독교장로회 소속 교회에 다니는 한 젊은이가 입학원서를 내고 면접을 하는데 당시 조 용술 목사님이 면접을 하시였습니다. 조 목사님이 학생에게 묻기를 “왜 우리 신학교에 입학하려고 하는가?”라고 말하니 그 젊은이가 “복음교회와 제가 다니는 기독교장로교회와 비슷한 신앙 노선이라고 저희 교회 목사님에게 들었습니다. 가까운 곳에 우리교단의 신학교가 없어 소식 듣고 지원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이 젊은이의 대답을 듣고 조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당신 같은 분은 우리 신학교 보다 더 좋은 신학교에 가야 합니다. 우리 신학교에 오면 안 됩니다. 우리 신학교는 아직 작고 보잘 것 없어서 별로 배울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 학생은 퇴짜를 맞고 돌아갔습니다. 저는 옆에서 조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매우 섭섭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맞으나 이렇게 배우겠다고 온 학생을 보내버리면 과연 어떤 학생을 가리키겠다는 겁니까’ 라고 항의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 계신 총대들께 비슷한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우리나라에 수많은 교단들이 있습니다. 수백만 명의 교세를 자랑하는 교단도 있고 단일 교회에 수십만 명이 예배를 드리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겨우 50여개 교회에, 어느 중형교회 보다 그 교인수가 작은 기독교대한복음교회에 어째서 목사로 장로로 평신도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서울 교회 장로님들께 묻고 싶습니다. 서울에는 교회당도 화려하고 파이프 오르간이 팡팡 터지고 온갖 교육시설이 완벽하고 수십 명의 목사님들과 수백 명의 장로님들이 활동하는 그런 교회들이 있는데, 그런 교회에 다니지 않고 어째서 서울복음교회에 다니시는가? 큰 교단 큰 교회의 장로님 권사님들은 당신들이 그 교회 소속임을 기록한 명암을 가지고 다니는데 어찌 한국에서 가장 작은 교단에 속하여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만일 저에게 묻는 다면 ‘그것은 제 양심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복음교회는 제 양심입니다. 그리고 최 태용의 양심입니다.
1937년 영과 진리 103호에서 최 태용 목사님은 이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조선에는 조선인의 교회가 서지 않으면 아니 된다. 신학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조선인 자신의 교회가 서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이것이 조선인 기독자의 양심이다. ... 조선인 기독자가 이 양심이 없음은 그것이 그에게 조선인 신자로의 자각이 없음이다. .... 우리는 우리의 양심에 따라 복음교회인 것이다, 우리 교회는 다른 교회보다 못할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앞길에는 많은 곤난이 놓여 있어 우리는 이런 나에 압살 되고 말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의 양심을 지키고 최후까지 나아가련다.”(최태용전집 5,130쪽)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명절 때가 되면 도시에서 크게 성공한 자식들이 시골집을 찾아 갑니다. TV에서 보니 아주 궁벽한 시골 초가집에 자가용차들을 몰고 온 자식들이 늙으신 부모님에게 세배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비록 가난하고 작은 초가집이지만 내 고향 내 부모님이 살고 게신 그 곳은 그곳에서 태어난 자식들의 양심이요 자랑인 것입니다. 비록 작고 너무나 가난한 교회이지만 우리 복음교회는 조선인의 고향 같은 자신의 교회로 조선의 기독인들에게 자랑이요 양심인 것입니다. 작은 것이 부끄러움이 아니라 이런 훌륭한 조선 기독교인의 양심을 물려준 창립자 최 태용 목사님 계셨다는데 우리는 깊은 감사와 자랑을 하게 됩니다. 복음교회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신앙양심입니다.
1939년 1월 4일 복음교회 제 3회 총회에서 최 태용 목사님은 개회 설교에서 이런 설교를 하였습니다.
“동양 민족을 보아서 그 혹자는 산업문화로써 인류에 공헌할 자이고 그 혹자는 예술로 공헌할 자 이리라. 조선인의 몫은 무엇이냐? 나는 믿는다. 예수 믿는 일밖에 조선인이 세상에, 동양에 공헌할 것이 없다고. 그렇다. 우리는 예수 믿는 일로서 공헌할 것이다. 예수 믿는 일로서 우리는 일본을 가리키고 중국을 가르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약한 것을 택하여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이 이 일을 이루리라. 다른 일들은 타에 양보하자 예수 믿는 일에 있어서는 우리가 동양에서 재패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래서 이런 이상과 사명으로 보아 어찌 기성 선교사 교회로써 우리가 만족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우리는 만난을 무릅쓰고 복음교회를 시작한 것이다. .... 지난날 어떤 형제는 말하였다. 벽촌에서 두어 신자를 데리고 복음교회로 예배 보다가 성공 같은 성공을 보지 못하고 죽어도 좋다고, 그래서 이것이 우리 복음교회원의 각오인 것이다. 만 3년 된 아기교회! 그러나 그것은 명예로운 역사이다. 사람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만 3년 된 아기 교회, 그러나 이제 80살 노인이 된 복음교회 그러나 아직도 걸음마를 면치 못한 그런 우리 복음교회 그러나 80년의 역사는 자랑스럽고 명예로운 역사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80년을 지켜온 수많은 복음교회 신앙선배들과 오늘의 복음교인 여러분들께 고마운 마음을 가집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창립자 최 태용 목사님께 좀 더 감사할 일이 있습니다. 최 목사님은 많은 교회들 가운데 또 하나의 교회를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최 목사님은 부패하고 고목화 된 교회가 아닌 새롭게 돋아난 새로운 교회를 세우시려 하였습니다. 그것은 교단의 3대 표어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이 자리에서 3대 표어를 소개하는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 다만 많은 이들이 최 목사님의 언표 된 의미가 아닌 각기 자신이 생각한 의미로 재해석하고 있다는 것은 지적하고 싶습니다. 최 목사님은 복음교회를 세우려는 훨씬 그 이전부터 한국교회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는 일에 고민하며 기도하며 연구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받고자 힘써 노력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청산학원에서 서구의 비평적 신학과 칼 바르트 신학을 접하면서 새로운 신학에 대한 지평을 넓혀 갔습니다. 그러나 그야말로 그의 심령에 하늘로부터 비둘기 같이 때로는 바람 같고 불의 혀 같은 성령의 강한 역사로 샘같이 솟아난 물줄기가 있었으니 바로 영적 기독교론 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영적 기독교론은 전혀 새로운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고 성령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잡지 ‘영과 진리’에서 20회에 걸쳐 영적 기독교론의 논지를 펼쳐 놓았습니다. 최 목사님은 이 영적 기독교론에 입각하여 조선복음교회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장로교회는 칼빈의 신학 특히 예정론에 입각한 신학적 바탕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감리교회는 웨슬레의 신학 특히 자유의지론에 입각한 신학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성결교회는 사중복음에 입각한 성결론을 그 신학의 주제로 삼고 있으며, 순복음교회는 오순절 성령운동을 신학적 기저로 세우고 있듯이 복음교회의 신학은 창립자 최 태용의 신학 곧 영적 기독교론 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의 복음교회 목사님을 비롯한 장로님들 평신도들에 이르기 까지 복음교회의 신학을 거의 들어보지도 못한 체 복음교회에서 목회를 하거나 교인으로 출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복음교회가 장로교회인지 감리교회인지 순복음교회인지 분간이 안 되는 입장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교단에 신학이 없다는 것은 뿌리가 없는 교단이요 신학교에서 교단 신학을 가르치지 않으면 총회신학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영적기독교론은 1979년 영적기독교의 과제와 그 현재적 개정이란 제목으로 발표한 최태용의 영과 진리 100회 기념 강론집을 펴내면서 당시 서울복음교회의 오충일 목사님은 발간사에서 “복음교회가 영적 기독교로서의 역할을 소홀히 하여 왔다는 것을 회개 합니다”라고 하였으며, 제가 그 강론집을 해설을 하였는데 저는 영적 기독교론이 최 태용의 독창적 신앙고백으로 민족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기에 주저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20년 전 6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최 태용의 생애와 신학”을 여기 계신 채 수일 총장님이 주관한 한국신학연구소에서 펴냈는데 그 책에서 김 경재 박사님이 영적 기독교론에 대해 논문을 발표하였습니다. 김 경재 박사님은 그 글 말미에 결론적으로 “최 태용 신학의 훌륭한 점은 그의 신앙과 신학이 매우 생명적이고 생동적이기 때문에 진리의 실천적 삶이라는 생활 신앙으로 이어질 강점을 지니고 있다. 그의 신앙과 신학이 개인의 주체성, 내면성, 창의성, 체험성, 영성을 많이 강조하면서도 탈 역사적이거나 둔세적 신비사상운동으로 빠져들지 않은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그의 교회관은 ”교회는 자신의 교회이어라“는 명제를 내 걸 수 있었으며 ...그러한 신앙노선은 요즘의 말로 말하면 역사 참여적 신앙 현실 참여적 신앙이라는 말이다.... 최 태용의 신앙과 신학이 그런 실천적 동력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생명이 영에 촉발 받아 영적 생동감으로 거듭나면 진리라는 언표로 나타나는데 진리 언표는 언어적 진리언표만이 아니라 모든 진리의 로고스가 육을 입고 화육하면서 진리임을 스스로 자증하는 영적 열매를 맺는 행위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이처럼 영적 기독교론이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 복음교회의 신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데 아직도 많은 복음교회 목회자나 성도들에게 생소하게 들려지고 있는 모습이 바로 복음교회의 정체된 원인의 하나라고 생각이 됩니다. 저는 지난 1년 동안 복교회총회신학교 대학원 과정에서 복음교회신학이란 과목으로 이 영적 기독교론을 강의한바가 있습니다.
이제 교단 창립 80 주년을 맞이하면서 총회 임원회에서 최 태용 목사님이 발표한 영적 기독교론을 ‘영과 진리’에서 발췌하여 이러한 단행본으로 출판하도록 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차제에 모든 복음교인들이 함께 읽고 우리 교단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창립자 최 태용 목사님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일은 바로 그분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새로운 생각 즉 역사를 꿰뚫어보는 예지적인 탁견叡智的 卓見이라고 하겠습니다.
1) 첫 번째 탁견은 비록 등사본이라 할지라도 ‘천래지성’ ‘영과 진리’ 개인잡지를 손수 발간하여 후손들에게 남겨 주신 일입니다. 당시에도 많은 인쇄본 잡지들이 있었지만 이처럼 등사본 잡지는 희귀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어쩌면 귀찮고 남들 보기에 머주짢게 쑥스러운 일임에도 먼 후일에 후배들의 손에 아름답게 인쇄될 날을 바라보고 꾸준히 무려 영과 진리를 100회 이상 발간하였다는 것에 놀라움과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2) 두 번째 탁견은 1920년대 모든 한국교회 목사와 교인들이 무조건 수용하였던 당시 선교사들에 의해 전해진 근본주의 신앙과 신학에 문제가 있음을 일찍이 ‘이것은 아니다’라고 간파하고 우찌무라 무교회주의에 심취하였지만 ‘이것도 아니다‘라고 하여 청산학원에 입학하여 정규 신학을 공부하고 당시 새로운 서구의 비평적 신학을 배우며 칼 바르트 신학에 감동을 받았지만 ’역시 이것도 아니다‘하였습니다. 여기 계신 채 수일 총장님께서 우리 교단 창립 60주년 기념 좌담회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제가 70년대에 신학을 배울 때에 칼 바르트도 여전히 최 태용 목사가 비판했던 그 바르트였거든요. 바르트 신학이든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신학이든 그냥 무조건 서구신학을 수용해 번역해서 전달하는 것이 신학자의 임무라고 생각하는 풍토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서 1920년대 당시에 최태용 목사가 바르트를 비판한 사실은 돋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최 태용 외에 한국의 어떤 신학자가 당시 서구의 신학에 대해서 그처럼 비판적인 시도를 했는지 궁금합니다.” 채 총장님이 지적해 주셨듯이 최 태용은 신학은 충분히 학문적 자세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최 목사님의 학문적 자세는 조선의 자신의 교회를 향한 복음적이고 생명적인 신앙과 신학 그리고 교회를 향한 끊임없는 도전과 응전 속에 ’영적 기독교론‘을 배태하여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었으니 놀라움과 감사의 마음을 가집니다.
3) 세 번째 탁견은 그의 통전적 사고 integral thought입니다. 소위 이성과 감성적인 신앙과 신학이 넘실거리는 때에 그는 과감히 영성신학을 주장하였습니다. 20세기 초 세계 오순절 운동이 일어나면서 영적 신앙운동이 퍼져나갔습니다. 이같은 오순절 운동이 당시 근본주의 신앙으로 볼 때 다분히 이단성이 있다하여 배척을 받았고 우리나라에서도 조 용기목사가 한 때는 이단이라고 불려졌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장로교회 감리교회를 막론하고 오순절 신앙이 널리 퍼져 있음을 봅니다. 그러나 최 태용의 영적 기독교는 그 맥을 달리합니다. 단순한 감성의 향연으로 영성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는 영성을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최 태용은 이성과 감성 그리고 영성을 아우르며 여기에 영의 실천을 더한 통전적 사고를 보여주었습니다. 영이 육화 될 때 비로소 진리로 나타나 영적 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최 태용은 바울의 말씀을 빌어 ‘육이 죽고 영으로 사는 ’일이라고 합니다.
세계교회협의회(WCC) 제 9차 총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회가 2006년 8월 30일부터 9월 6일 까지 제네바 에큐메니칼 센터에서 회의를 영고 21세기 에큐메니칼 운동 수행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한 끝에 21세기의 화두의 하나가 영성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영성도 최 태용의 영성과는 물론 차이가 있습니다.
21세기가 기독교에 있어 어떤 세기가 될 것인가? 흔히 말하기를 Post Christianity 기독교가 지나간 세기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100년 후에 현재 교회들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겠는가에 대해 자신 있게 대답할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최 태용 목사는 오직 영적 기독교로서 21세기 교회만 아니라 인류를 이끌어갈 유일한 방법이라고 이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새로운 길임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차원으로의 신학과 신앙의 문으로 100년 후에도 세계를 구원할 교회 그래서 하나님은 복음교회를 세워주셨다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복음교회 창립 80주년을 맞이하면서 다시금 창립자 최 태용 목사님, 백 남용 목사님, 윤 치병 목사님을 비롯한 초창기 목사님들과 장로님들과 초기 복음교회의 성도를-청진 영흥 금강산등지에서 신앙생활을 하였던 북한의 복음교회 성도들을 기억하며, 그리고 80년 동안 복음교회를 지켜 오신 각 지역의 복음교회 모든 분들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향후 100년 후 미래의 복음교회 여러분께도 안부를 전하며 하나님의 가호를 빕니다.
저는 43년간의 목회를 끝내고 전북교회역사문화연구원이란 작은 방을 마련하였습니다. 24일 11시에 개원할 예정입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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