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12
레이놀즈의 전킨선교사 추모글
(Station Report. 남장로교 17회 연례회의 1908년 10월 17일-23일. pp.1-6)
죠지 전킨(George Junkin) 판사의 장남인 윌리엄 멕커리 전킨(William McCleary Junkin)은 버지니아 주 크리스티안버그에서 1855 년 12 월 13 일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1908 년1 월 전주에서 급성 폐렴으로 사망하였습니다.
그는 버지니아주 렉싱톤에 있는 워싱톤앤리대학교에서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는 1886-87 년 동안 해외선교분야에서 자원 봉사를 했습니다. 그는 1892 년 6 월에 결 메리 레이번(Mary Leyburn) 양을 만나 혼인을 했습니다. 그의 신학 과정은 1889-92 년 버지니아 주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3 년 동안 공부를 하였습니다. 학기 동안에 흑인들을 찾아가 주일학교 활동을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휴가 중에 산중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성공적으로 선교사업을 하였습니다.
집행위원회(*남장로교 해외선교위원회)가 한국 선교를 개시하기로 결정한 것은 그의 기도와 열렬한 주장 때문이었습니다. 7 명의 선교사로 구성된 선교사들이 1892 년 11 월 4 일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1893 년 6 월 28 일 Junkin 씨는 장로교 선교협의회의 구성을 도왔습니다. 그 목표는 "개혁 신앙과 장로교 형태의 체제를 유지하는, 한국에서 하나의 토착 교회를 이루는 통일 조직입니다. " 그는 1894 년에 의회 서기로, 1895 년에는 의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이 협의회는 충청 남부와 전라 지방에 남부 선교부를 설치하기로 하였습니다. 답사자로 전킨과 테이트는 1993 년 9 월에 257km 떨어진 전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어느 날 폭우로 크게 부풀어 오른 개울을 건너가다가 그의 발이 미끌어져 물에 휩쓸려 갔습니다. 한 한국인이 그를 구조하러 뛰어들어 그를 구출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은 수많은 힘들었던 일들 중의 하나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말 안 듣는 한국 조랑말로 인해 온갖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한번은 그가 탔던 작은 연안 증기선이 난파의 위험을 당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보통 14 시간이 걸리는 바다 여행이 닷새나 걸렸던 일이 있었습니다. 한 밤중에 그가 잠자던 초가지붕에서 불이 붙어 가까스로 불을 끄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 주막에서 잠을 자다가 가스 중독으로 사경을 헤매다가 겨우 함께 갔던 동행인으로부터 밖으로 끌려 나와 소생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목숨을 걸고 콜레라 전염병에 걸린 병자와 사망자를 돌보는 것을 도와주기도 하였습니다.
무더위 장마철에 자전거로 순회하던 중 논 길을 가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기독교인의 집에 도착할 때는 지쳐버려 마루에 누워버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여행 중 전킨 씨는 극심한 이질에 걸리는 바람에 6개월 동안 일어나지 못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이야기의 실마리로 돌아가겠습니다. 동학 혁명과 1894-5 년 청일 전쟁 기간 동안 우리가 맡은 선교지역에서 활동할 수 없었던 전킨 씨는 서울의 "서소문" 밖에 있는 한국인의 집을 개인적으로 구입하여 가족과 함께 그곳으로 이사했습니다. 드루 의료선교사의 협력으로 전도 와 의료 선교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그와 드루 박사는 1895-6 년 겨울 군산 선교부를 열었습니다. 그들은 1896년 봄에 갑판이 없는 개방형 범선으로 가족들과 함께 이사하여, 작은 짚으로 뒤덮인 초가집에서 3년 동안 살았습니다. 말 그대로 조수로 인하여 간간이 썰물이 마당에 까지 들어왔습니다.
전킨 씨는 드루박사와 함께 군산 외곽 섬들을 순회하는 것 외에도 시골 마을에 여러 전도 지점을 확보하여 많은 사람들로 부흥하였습니다.
1899년에 4.8km 떨어진 부지에 집을 짓는 일로 인해 목수들과 말썽 부리는 인부들로 매우 피로하였고 또 위에서 말하였던바 여러 질병들로 인해 몸이 많이 힘들어 함여 선교부에서는 전킨씨를 미국으로 휴가를 보냈습니다.
1900-01년에 미국의 본집에 가 있을 때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웅변으로 교회들을 다니며 한국의 부흥에 대해 피력하였고, 병원 건립을 위해 상당한 모금을 하였습니다.
군산으로 돌아온 전킨 씨는 사역에 다시 돌아가, 소년 학교의 책임을 맡고, 학교를 짓고, 선교 훈련을 가르치고, 평양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등 전과 마찬가지로 에너지가 넘치는 일에 몰두하였습니다. 1904년에 다시 그의 옛 질병의 위협으로 그의 건강을 해치게 되었습니다. 선교부는 전킨 씨를 전주로 옮기고 그를 시내 교회 책임자로 맡기고 반경 10km 이내로 제한하였습니다. 많은 낙심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의 "믿음의 일과 사랑의 수고"는 우리 선교현장에 늦게 교회 건물을 건축하였으며, 주변 지역에 열두 개의 집회 장소를 세웠습니다. 그는 또한 포사이드 박사와 함께 작은 고아원을 설립하고 거리에서 배회하는 아이들을 모았습니다.
그는 1907 년 크리스마스 다음날 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극심한 고통을 겪었고, 3 명의 의사와 훈련 된 간호사가 있었지만 질병의 진행을 막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닫고 침착하게 한국인에 대한 유언을 말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였습니다.
"죽음은 승리로 삼켜졌다"고 그는 그를 위해 그의 침대 옆에 앉아있는 한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 "이것이 죽음이라면 죽는 것도 좋다"; 그리고 숨을 헐떡이며. "나는-지금-간다-난-참으로-행복하다.(I-am-going-now-and-I-am-so-happy.)“
1908 년 1월 2일 그의 영혼은 안식에 들어갔습니다. 그의 "몸은 여전히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있다"는 군산선교부 선교 묘지의 랭킨 박사의 무덤 근처에 3 명의 어린 아들과 나란히 놓여있었습니다. 회색 화강암으로 된 그의 묘비에는 한국에서 "예수를 믿은 전킨목사는 영생을 가졌다.(Pastor Junkin through faith in Jesus hath everlasting life.)"라는 간단한 비문이 새겨 져 있습니다.
유족으로 그의 아내인 메리 레이번 전킨 부인과 5 명의 자녀 : 애드와드, 윌리, 마리온, 메리, 그리고 아버지의 사망 후 태어난 유복자 아들이 있습니다.
가족은 1908 년 4 월 미국으로 돌아 왔습니다.
이러한 간결한 개요는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칼을 뽑은 것처럼 용감한 십자가 군병으로서의 삶의 이야기의 요점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종, 잘 하였소!
이제 사랑하는 하나님 나라에서 편히 쉬십시오. "
그의 성격은 드문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말하고 쓴 모든 것을 통하여 예리한 유머 감각과 번쩍이고 재치와 행위는 빛을 발했습니다. ; 기운차게 울려 퍼지는 웃음; 친구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기쁨이 넘치는 손" ;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에 대한 생생한 관심과 사람들과 그들의 일들에 대하여 관찰하는 그의 놀라운 태도; 즐겁게 성경을 연구하고 성실한 준비와 대단한 웅변적 능력이 조화되어 전킨씨는 매력 있고 환영받는 대중 설교가 이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계절이 가고 오고 간에, 길을 갈 때나, 여관에 머무를 때나, 증기선이나 기차 여행 중이던 간에, 한사람이나 또는 3 천명의 청중 앞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는 그의 어머니가 매년 쇠약해져 가심을 염려하는 따뜻한 마음을 기진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동생들에게 좋은 도우미 이였고 현명한 상담자 이였으며, 열렬한 연인이고 헌신적인 남편이고, 다정하지만 확고한 아버지이고, 솔직하지만 충실한 친구요 동정심이 많은 목사이었습니다. 외국사람들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이 왕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사랑을 얻었습니다. 그가 군산을 떠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몰려와 항의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를 지킬 수 있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지만 그들의 사랑하는 목사를 지키기 위하여 미국에 전보를 보내기 원했습니다.
전킨 씨는 확고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의 신성한 영감과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임"에 확고한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는 고통스러운 시련이나 극심한 실망의 시기에 하나님의 선하심이나 "성도들에게 한 번 전해진 믿음"의 최종 승리를 결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들들에 대한 책임에 대해서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시든지 열심히 하는 것을 결코 잊지 않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뛰어나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신학교 시절부터 문을 굳게 닫아걸고 그와 그의 친구는 하나님께서 한국인들에게 "신앙의 문을 열어 주실"것을 피곤하고 지쳐 염려스러움에도 매일 간청했습니다. 그의 음성기도는 영감과 그가 은혜의 보좌로 인도한 사람들에게 위로와 힘의 근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자발적인 헌신은 "가장 효력 있는 의인의 열렬한 기도"였습니다.
전킨 씨는 행동과 성취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는 성경위원회의 개편과 공의회와 노회의 업무, 한국의 신학 교 설립을 주도적으로 도왔습니다. 그는 처음 일곱 명의 (*한국인)장로교 목사들의 교육과 졸업과 목사 안수를 도왔고, 그의 임종 때 저학년 학생들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큰일을 기대한다고 말해 주십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선교부에서의 그의 사역과 그의 소천으로 인한 우리의 선교사업의 손실에 대해 나는 무엇이라고 말해야할까요? 선교 개척자요 선교부 설립자이고 신앙훈련 강사이며 현명한 상담가로 설득력 있는 설교자로 즐거운 동반자요 진정한 친구 이런 말들에 대한 손실에 직면하여 너무나 부족하고 공허하다고 하겠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죽었지만 말하게"하라. 그의 죽음에 대한 슬픈 소식과 거의 같은 시기에 우리에게 도착한 ‘11월 선교지(Novemver Missinary)‘에서 전킨 씨가 쓰기를 "내 선교사역을 희생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너무 불쌍하게 느껴지나요? 미국에서 3 년 동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자아와 그리스도를 비교하면 불행한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선교사로 오고 싶지 않았습니다만. 주님이 그것을 놓치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윌가(Wall Street)의 그 누구의 자리와도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이 기사는 "죽음의 은총을 기뻐하라"라는 말로 끝맺었습니다. 그는 한국 기독교인들을 의미했지만, 그 말들은 자신의 천국에 돌아가는 것을 아름답게 묘사합니다.
천국의 첫 번째 "연례총회"에서 더 높은 헌신의 자리로 승진 한 그를 지상의 연례 회의에서 그를 얼마나 섭섭해 할까요. 그리고 가슴 아픈 사별을 당한 우리 누이를 위해 동정과 사랑과기도로 얼마나 위로와 우리들의 따뜻한 마음을 가져야 할지.
"자비의 아버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 그녀와 자녀들에게 몸의 건강, 마음의 평화, 모든 영적 및 현재적 축복과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윌리엄 멕컬리 전킨의 삶과 수고에 대한 불멸의 기억을 통해 더욱 뜨거운 봉사, 더 열렬한 기도, 더 확고한 믿음과 따뜻한 사랑으로 격려 받기를 바랍니다.
윌리엄 데이비스 레이놀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