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21일 주일아침 예배 시편 66: 10-20 백투더퓨처에서 부르는 친송
1985년 빽 투 더 퓨쳐 (Back to the Future 감독 로버트 저메키스 주연 마이클 J.폭스, 크리스토퍼 로이드 )라는 영화가 상영이 되었습니다. 이 영화의 내용은 2015년 10월 21일 ‘마티 맥플라이’는 스케이트보드를 즐겨 타는 평범한 고교생이 평소 ‘마티’와 친하게 지내던 괴짜 발명가 ‘에메트 브라운’ 박사가 자동차를 개조해 만든 타임머신 차를 타고 30년 전 과거로 돌아 갑니다. 그 과거에서 마티의 부모가 아직 청소년 시절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러 우여곡절을 격은 후 다시 30년 후로 되돌아온다는 영화입니다. 그러닌까 이 영화는 1985년 영화로 2015년을 상상하여 만들었습니다. 당시 30년 후인 2015년에 있게 될 여러 가지 물건들을, 당시로서는 아직 있지도 않은 그러나 30년 후에 있을 것이라 상상하여 만들었습니다. 과연 우리가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꿈꿨던 미래가 올 것인지 당시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그런 생각들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엔 1987년에 개봉되었습니다. 당시 저도 그 영화를 보면서 정말 2015년에 그런 일이 있을까 의심도하고 궁금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영화에서 보여준 30년 후 미래보다 실제로 더 발전한 시대에 현재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1985년에 상상한 2015년 기술로 첫 번째 마티가 타고 다니는 스케이트보드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부상 스케이트보드로 초전도체원리로 금속체 위를 공중에 떠서 가는 것입니다. 현재 그런 스케이트보드는 없습니다. 이미 기차가 자기부상원리로 철도 위를 달리고 있는 현실입니다. 지금 전동 스테이트보드를 학생들이 타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전선줄이 없는 전화기입니다. 우리는 이미 핸드폰 전화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 화상전화가 나오는데 그것도 핸드폰으로 화상전화가 실용화되고 있습니다. 손안에 게임기가 있는데 지금 아이들이 가지고 놀고 있습니다. 태블릿 컴퓨터가 나오는데 이미 아이들 장난감이 되어 있습니다. 자동으로 신발끈이 조이는 운동화가 나오는데 나이키에서 이미 판매하고 있습니다. 로버트가 주유소에서 자동차에 주유를 하는데 이것도 실용화되고 있습니다. 지문인식으로 자물쇠를 여는데 이것도 벌써 실용화되고 있습니다. 3D홀로그래피가 나오는데 이거도 벌써 사용되어 마치 실제로 기차를 타는 것 같기도 하고 천둥오리가 날아서 나에게 오는 것 같은 영상을 쉽게 보고 있습니다. 아직 영하에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있는데 하늘을 나는 자동차입니다. 미국의 테라푸기어사는 이미 하늘을 나는 2인승 자동차를 개발해 2012년 뉴욕 국제 자동차쇼에서 소개하고, 2015년 도로와 하늘에서 비행 시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TF-X라는 모델명을 가진 이 자동차는 2024년부터 판매될 예정인데, 대당 가격은 3억원을 넘길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1985년에 30년 후 사람들이 어떤 첨단기술을 사용하여 살아갈 것인가를 상상하고 영화를 만들었는데 거의 이루어진 현실입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1985년 방영된 영화에서 타임머신 자동차를 타고 2015년 10월 21일 미래로 간 날을 기념하여 10월 21일을 빽투더퓨처데이 곧 ‘미래로돌아간 날’이란 기념일을 정하여 대대적이 축하행사를 벌리고 있습니다. 오늘 10월 21일은 미래로 돌아간 날입니다. 당시 주연이었던 마이클 J.폭스는 현재 50대로 파킨스병을 앓고 있는데 오히려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에 열심을 다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빽투더퓨처 찬송입니다.
66편 이 시편 내용이 참 평화스럽습니다. 간혹 보면 어떤 시편에는 시인이 극심한 고난 속에서 부르짖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시66편은 그런 고난이나 아픔을 노래하지 않습니다. 66편시는 개인 찬양시로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며 예배드리는 시인의 모습을 상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시인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났으나 그 시험을 자신의 믿음을 단련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고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어려움에서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바다를 건넜던 당시를 회고해 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여러가지 읽는 방법이 있습니다. 다독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무조건 빨리 읽고 많이 있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일 년에 10번 이상을 통독한 사람도 있습니다. 다독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 방법을 익히면 몇 분 만에 성경을 통독하게 됩니다. 저도 그런 방법을 배워본 적이 있습니다. 또 다른 방법은 정독입니다. 말씀을 꼼꼼히 생각하면서 읽는 것입니다. 말씀의 내용을 음미하면서 읽습니다. 이런 성경 읽기가 올바른 방법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지 성경읽기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머릿속으로 말씀의 이미지를 영상화하면서 읽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을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거나 영상화 시킵니다. 마치 영화를 보듯합니다. 그러면 보다 뚜렷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이것은 영성적 읽기방법입니다. 그것은 먼저 깊이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이 내 안에 충만히 거하심속에서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그때 성령께서 나를 성경 속으로 안내하시고 우리는 성경 사건을 직접 보고 느끼고 체험하듯 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할 때 그 속에 내가 있고 홍해 바다를 건널 때에 내가 그들과 함께 홍해바다를 건너 시내산으로 갑니다. 당시 사건들을 직접 경험하듯 영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엄청난 기쁨과 감격에 하나님께 환호성을 지르며 찬양을 부르게 됩니다. 말로만 듣고 글로만 보던 장면을 직접 본다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 시내산을 말로 들을 때 아마 아무런 감정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직접 시내산에 가서 시내산을 오를 때 감동은 아직도 제 가슴에 큰 기쁨으로 남아 있습니다. “모세가 홍해바다를 가르니 이스라엘 백성이 건너갔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여러분 무슨 감동이 일어납니까? 아,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구나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내가 직접 모세의 홍해바다가 갈라지는 장면을 보았다면 얼마나 놀라운 감격일 것입니까? 이 직접 보고 경험케 하는 성경읽기 방법이 영성적 일기방법입니다. 그때 나는 3000년 후 미래로 부터 모세시대로 온 사람이 됩니다.
시편 66:6에 “하나님이 바다를 변하여 육지가 되게 하셨으므로 무리가 걸어서 강을 건너고 우리가 거기서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였도다.” 이 말씀에는 엄청난 역사의 맥락이 들어 있습니다. 앞에서 ‘하나님이 바다를 변하여 육지가 되게 하셨다.’는 말씀은 모세로인한 홍해바다가 갈라지는 장면을 말한 것이고, 다음에 오는 ‘무리가 걸어서 강을 건너고’는 여호수아의 인도로 요단강을 건너는 때를 말합니다. 이 두 역사적인 장면을 시인은 마치 보았듯이 “우리가 거기서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였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시126을 보면 이 시는 성전에 올라가면서 부르는 찬송시입니다. 그 찬송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다시 돌아왔을 때를 생각하면서 1절에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라고 노래합니다. 지금 성전에 올라가면서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그때로부터 수 백년 후에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찬송을 부르는 사람은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에서 돌아올 때의 그 기쁨을 함께 느낍니다. 그들은 지금 마치 그 귀환하는 기뻐하는 사람들 가운데 함께 있는 듯한 생각입니다. 그래서 3절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이와같은 경험을 역사적 영적현재감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아주 중요한 특색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영적 현재감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비록 시간적으로 수 백 년 수 천 년이 흘렀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 안에 그 일은 현재적 사건으로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믿음의 체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있는 말씀이라고 말을 하는데 이 말을 사람들은 이해를 못합니다. 어째서 수천 년 전의 말씀이 현재도 살아 있는 말씀인가 의아해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수천 년 전 사건에 지금 동참하고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현재적 사건으로 이해하므로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5천명을 먹이실 때에 그곳에 나도 있어 그 물고기와 떡을 먹었고, 예수님이 바디메오의 눈을 뜨게 해 주실 때 그 현장에 나도 있어 목격하였고, 예수님이 팔복을 말씀하실 때 나도 거기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골고다로 올라가실 때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할 하실 때에 나도 거기에서 그 모든 장면을 다 보았기 때문에 나는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는 영적인 눈을 가지지 못하면 의심하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현재적 사건으로, 나에게 체현(embodiment)되는 경험으로, 실제적 믿음이기 때문에 의심할 수 없는 절대적 믿음인 것입니다. 예수님 때로부터 2000년 후의 내가 2000년 전 예수님 시대로 돌라가서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혹 어떤 사람들은 지금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날마다 기도 가운데 성령충만 함으로 인도되어 과거로 가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기독교 신앙은 신비적입니다. 그러나 이 신비는 성경을 읽어갈 때에 성경말씀 속으로 들어가는 신비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을 만나고 아브라함에 관한 말씀을 읽을 때에 아브라함을 만나고 다윗에 관한 이야기를 읽을 때에 다윗도 만나고 복음서를 읽을 때에 예수님을 만나고 바울서신을 읽을 때에 거기서 바울을 만나게 되니, 우리는 찬송하고 기뻐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기쁨의 종교입니다.
다시 시편 66편으로 돌아가서, 8절에 “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의 찬양 소리를 들리게 할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66편 시인 본인만 역사적 영적 체험으로 기뻐하지 아니하고 만민들이 모든 사람들이 자기와 똑같은 체험으로 하나님을 송축하고 찬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영적 체험 없이는 올바른 하나님을 찬양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시련과 고난이 있습니다. 오늘의 66편 10절에 시험 단련이란 말이 나옵니다. 11절에서는 그물, 짐 이런 말도 있습니다. 12절에서는 불과 물을 통과했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시인이 시련과 고난에서도 하나님께 찬송 돌리 수 있는 비결은 이미 시인은 역사적 영적으로 홍해바다도 건넜고 요단강도 건넌 체험이 있기 때문에 그 때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었기 때문에 오늘에 닥쳐온 환난과 시험 앞에서도 시인은 하나님께 찬송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은혜 체험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현재 사건으로 체현하여 경험하는 신앙인은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아직 내가 살아 있음을 생각하고 놀랍고 감격스러워 하는 사람은 그 아침에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입니다. 아침에 오늘도 앞산에 떠오르는 태양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요. 언젠가는 내일에 뜰 태양을 못 보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날이 오늘이 아니라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사모가 아침에 일어나서 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앞산에 지금 막 떠오르는 해를 사진을 찍어 핸드폰으로 자녀들에게 보내는 일입니다. 아침에 떠오르는 해살처럼 오늘도 너희들의 하루가 하나님의 은총하에 환하게 밝아지라는 소원의 기도를 그 사진에 함께 담아 보냅니다. 저는 그 모습을 옆에서 보면서, 아내의 영성이 매우 깊다는 것을 느끼고, 오늘 아침도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아내를 보면서 기쁨이 제 가슴에 가득하게 되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어쩌면 나는 먼 미래로부터 여기 이곳에 와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 모두는 먼 미래로부터 이곳에 와서 지금 하나님이 인류 역사를 어떻게 구원하고 계시는 가를 목격하게 하시는 것이 아닌가?하는 엉뚱한 상상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할 일은 아무리 세상이 험하고 힘들고 괴로운 일 많이 있다고 해도 아니요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님님께 찬송과 영광 돌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니크로스비는 눈이 먼 시각장애인이면서도 평생하나님을 찬미하는 찬송시를 썼습니다. 이래서 화니크로스비는 “예수를 내가 구주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 쌍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보리로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
이 화니크로스비의 찬송이 나의 찬송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이 시간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간증 나의 찬송을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추상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현재적 신앙 체험 곧 지금 여기서 하나님을 만나는 신앙입니다.
평범한 이화여대 4학년 이었던 이지선씨는 자동차 화제 사건으로 온 몸이 화상을 입어 7개월 동안 수없이 수술을 받았습니다. 전에 아름답던 모습은 사라지고 화상으로 얼굴은 흉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그는 너무 고통스러워 자기를 죽게 내버려 달라고 하였지만 하나님이 자신에게 준 새로운 사명을 깨닫고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고 박사가 되어 지금 한동대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이 이지선씨가 병원에서 처음으로 쓴글이 2001년 1월 11일인데 이런 글을 썼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 잃은 것 같지만...약함 가운데 상처투성이 몸 가운데 짧아진 손가락에도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고, 소망을 주시며, 날마다 하나님을 향해 손들고 찬양하고 싶은 마음을 주십니다. 내가 기도했던 모습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삶을 누리게 하시며, 큰일보다는 의미 있는 일을 하게 하신 것을 믿습니다. (생략)..흰 눈이 펑펑 내리는 것도 봤어요.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살아있어서 흰 눈도 보게 하시고 추운 겨울을 다시 맞게 하시니! 지선이는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화상을 입고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겨 온몸이 오그라지고 비틀어졌음에도 살아 있음을 감사하며 자신이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말한 이지선박사는 확실히 하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고난 속에서 만난 이지선 박사는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존 맥스웰의 「작은 시작」이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 명의 사람이 모인 곳에서 빳빳한 50달러짜리 지폐를 들고 “이 50달러를 원하시는 분 계십니까?”라고 하니 여기저기서 손을 들었습다. 그래서 그 50달러를 막 구겨서 다시 “아직도 이 돈을 원하십니까?”라고 하니 역시나 여기저기서 손을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그 돈을 발로 짓밟아 너덜너덜하고 더럽게 한 다음 “아직도 이것을 원하시는 분?”하고 물으니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손을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무엇을 알게 됩니까? 내가 아무리 구겨지고 더렵혀지고 밟히고 침 뱉음을 당해도 나는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은 그런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구겨지고 밟혀도 오히려 그럴수록 하나님은 나에게 가까이 오셔서 나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언제까지나 너와 함께 하리라고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무엇보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이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하신 말씀이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아브라함 앞에 게신 하나님 앞에 나도 잇고 삭개오 앞에 계신 예수님 앞에 나도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기 지금 우리는 이천년이란 간격을 넘어 2018년 10월 21일 미래로 오시어 여기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나는 좌절하지 않고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실망하지 않고 희망을 가직 됩니다. 패배하지 않고 승리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 66편 12절 말씀에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우리를 끌어내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라고 시인은 노래하였습니다. 여기서 ‘풍부’라는 말은 원어로 ”르바야“라는 말로 이 말은 포화상태를 말합니다. 잔이 철철 넘치는 것을 말합니다. 시23:5에 ”내 잔이 넘치나이다“란 말씀과 같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은혜가 넘쳐흐른다는 말씀입니다. 때로 인생길에 폭풍우가 몰아치기도 하고 눈보라가 불어 닥치기도 합니다. 지진이 난 것처럼 터전이 흔들리고 산사태가 난 것처럼 송두리째 세상에 무쳐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소망의 말씀을 듣고 위로와 용기를 얻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모세의 홍해바다 앞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요단강 앞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빽투더퓨쳐 다시 미래로 돌아옵니다. 오늘 우리는 홍해바다나 요단강 사건으로부터 3000년 후 미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내 앞에 있는 홍해바다를 가르시고 요단강을 끊어 길을 내주시는 하나님을 송축하고 찬양하여야 합니다. 우리들의 모든 찬송은 그러므로 미래에서 부르는 찬송입니다. 그 미래는 바로 오늘 우리의 현재입니다.
우리 라온코이노니아는 언제나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이곳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송축하며 찬송하는 신앙공동체 자리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하시고 기뻐하시며 행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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