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8년 3월 4일  고후 8:9, 6:10  使爾爲富 使多人富

 

본문(고후8:9)을 보면「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실 때에 가난한 자로 오신 것은 우리를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고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를 믿은 후 모두가 많은 것을 소유한 부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서 부요라고 하는 말과 부자라고 하는 말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부자라고 하는 말은 소유의 표현입니다. 따라서 양적으로 많이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부요라고 하는 말은 소유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존재와 가치의 의미입니다.


많이 소유하였어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더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부요한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가진 것이 없어도 현재 가진 것으로 만족하게 여기며 예수 한 분만으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은 부요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받은 은혜 중 가장 큰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서 부요한 자가 된 것입니다.

옛날 어느 양반 집 하인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그 하인이 탄식을 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마침 주인이 지나다가 보게 되어 "너는 무슨 일로 그렇게 탄식을 하고 있는고?"하며 주인이 하인에게 물었습니다. 하인은 "예. 저에게 천량만 있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그 만 한 돈이 없으므로 이렇게 하인이 되어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넉넉한 양반은 "그래 그 돈으로 행복하여 진다면 너의 소원을 들어주겠다."라고 하인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돌아서기 무섭게 하인은 다시 탄식을 하였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1만 량만 있으면 행복하여 질 수 있다고 말할 것을, 천량 밖에 못 받게 되었네"라고 탄식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은 이처럼 한량限量 없습니다. 가져도 가져도 부족함을 느끼는 것이 인간의 욕심입니다. 셋방살이하는 사람이 전세라도 있으면 좋겠지 하며 전세 사는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전세를 얻을 만큼 돈이 모아지면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저 초가집이라도 내 집 하나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초가집을 가진 후에는 기와집을 가지고 싶고 그 후에는 서울 강남 아파트에 살고 있늠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부족한 것을 탄식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부요케 하시려고 가난해 지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라던 화려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고 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예수님 곁에 서지도 못할 것입니다. 아마도 권력이 있는 사람이나 돈이 많은 사람들이 제일먼저 예수님을 차지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친구가 되셨고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던 사람들은 비천한 사람, 세상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같은 정말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오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부자나 부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이 나쁘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족하는 부요함이 없이 탐심으로 가득하여 소유만 늘이려하면 그것은 진정한 복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많이 가졌던 그렇지 않든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부요한 자라고 하는 존재의 가치에 의미를 두는 사람은 어떠한 처지에도 만족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교회가 구제 사업을 많이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교회는 구제 사업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이 최선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구세주로서 오신 것이 단지 가난에 지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배고품을 덜어주고 잘 살아가도록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가난하지만 부요하게 살아가는 비결을 알려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몸소 실천해 보이셨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네가 가난한 형제를 돌보고 그들이 잘 살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네가 먼저 가난해 져야 한다."입니다.
오늘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스스로 가난해 져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사람들 중에 고급 빌라에 살며 고급외제차를 타고 다닌 다면 자신의 인생관을 바꿔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하여 가난해지셨습니다.

 

어느 회사의 사장님이 계셨습니다. 회사는 노사분규가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근로자의 임금인상 요구에 따라 매년 20%이상을 올려주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사장님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여야 노사분규가 없고 사업체를 잘 운영하겠습니까?"를 물었습니다. 사장님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네가 가난하여져라!"하는 응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그는 그 때부터 가난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고급 외제차도 아반트로 바꾸고 고급 빌라아파트에서 회사 근처 서민 아파트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판 돈으로 노동쟁의 하는 근로자들에게 간식을 제공하고 대화를 시작하니 원만한 타협이 이루어지고 그로부터 얼마 후 노사분규가 사라지고 회사는 잘 운영되게 되었다고 하는 간증입니다.


문재인대통령의 낡은 구두가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 구두는 4년 전 폐업된 한 청각 시각 장애인들이 만든 ‘이지오’라는 브랜드 구두였던 것입니다.(2017년 5월24일 MBN 뉴스앤 이슈) 이 구두는 2012년 가을에 구두를 팔려고 국회에다 진열을 하였었는데 그때 사서 신었던 구두를 지금까지 신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본받을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문 대통령의 이 같은 자세가 대통령 임기 마지막 까지 계속 된다면 성공적이 대통령이 될 것이고 국민들은 행복해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대감이 실망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대통령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마음은 부요해 질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빌2:6에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시되 종처럼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굿간에 태어나시고 그 처음 누이신 곳이 말구유였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자랐고 성인이 되신 후 머리 둘 곳도 없이 다니시며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으며 벌거벗긴 몸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벗겨진 옷은 로마 군인들이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리고 자기 무덤이 아닌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처럼 이제 묻히실 자리도 없었습니다. 왜요?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부자 되라” 흥부의 박 틀듯 우리를 부자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친히 가난하게 되셔서 우리로 하여금 부요한 자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제 우리는 부요한 사람입니다. 부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이 아니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부요하게 된 사람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의 자존감입니다. 흔히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고 전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물질적으로 부자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기독교인들은 예수 믿음으로 부요케 되었으니 그런 의미로 이미 모든 기독교인은 영적으로 부자입니다. 이것을 부요신앙(prosperous faith 성경 헬라어 푸루토스 신약성경에 22회 그중 바울서신에 15회 사용하였다) 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이론에 고지론(高地論)이란 말이 있습니다. 고지론이란 전투에서 고지를 점령해야 그 전투를 이기고 영토를 장악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우리 사회 권력 집단을 장악하는 즉 고지의 정복이 가장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가난한자가 부자되고 낮은자가 높은자가 되고 꼴지가 첫째가 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는 신앙입니다. 아마도 많은 기독교인들의 믿음에는 이런 고지론이 있을 것입니다. 그 대표적이 례가 이명박 대통령입니다. 그는 교회 장로였고 밑바닥 인생에서부터 대통령으로 최정상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의 고지론은 지금 밑바닥론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축복에는 반드시 거처야 할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 길은 버려야 얻는 길이요 가난해져야 부요하게 되는 길이요 죽어야 사는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사람이 누리는 은혜가 심령의 부요함입니다. 심령이 가난한자가 곧 부요한 자입니다. 역설적인 말입니다만 심령이 가난한자가 천국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부요함을 얻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십자가의 길에서 얻는 과정이요 현재 진행형입니다. 지금 심령이 가난해 지는 것이 곧 부요하게 되는 것이요, 매일 매일 십자가 지며 사는 부요한 심령의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거치지 않는 고지점령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고지론은 자칫 탐욕론으로 기독교의 바른 신앙태도가 아닙니다.

 

다윗왕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예루살렘에서 야반도주를 하게 됩니다. 이때 시므이라는 사람이 따라와 저주를 퍼붓습니다.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고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 (삼하 16: 7-8)
다윗의 부하들이 시므이를 죽이려 하니 다윗이 말립니다. ‘시므이’의 저주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저주성 폭언마저 자신의 죄에 대한 채찍으로 내리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라 생각하며 하나님께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겸허함으로 받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다윗의 십자가의 길이었고 심령이 가난해지므로 부요해 지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의 신앙을 기뻐하셨습니다. 만일 이때 다윗이 자기를 저주하는 시므이를 죽였다면 다윗의 도피의 길은 망하는 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올라가셨을 때에 유대인들의 조롱을 받으셨던 것처럼, 시므이의 저주를 다윗은 자신의 십자가로 받았습니다.  여기에 다윗의 부요의 신앙이 있었던 것입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알량한 자존심을 꺾지 못해, 울컥울컥, 순간순간 보복 심리로 사람들은 쌍심지를 눈에 달고, 입에 개 거품을 물고 덤벼듭니다. 틈만 있으면 미해결의 감정이 속을 헤집고 올라와 낑낑대는 몸부림치거나, 겐세이(牽制 けんせい 이은재의원의 말)한다고 남의 말을 듣지 않는 편협함, 자기 눈 안의 들보를 알지 못하고 남의 눈에 티가 있다고 아우성치며, 남의 아픈 가슴을 헤아리지 않고 끓는 냄비처럼 바글대는 얄팍한 감정의 손짓들, 이런 모습들을 우리는 심심치 않게 보고 있습니다. 만일 그런데 우리가 이들 가운데 있지 않고 혹시 실수라 할지라도 잘못된 길에 있음을 알 때 겸손히 회개하고 십자가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바로 우리는 부요의 신앙을 가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요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합니까?
봉독한 고후6:10에 무슨 말씀을 하였습니까?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使多人富)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부요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의 설교 제목입니다. 使爾爲富 使多人富 부요신앙을 가진 사람은 많은 사람은 부요하게 하는 사람이다란 의미입니다. 한문성경(김경수 편)에서 따온 말씀입니다.

네 가지 예화를 들려드리겠습니다.


크로닌 ((Archibald Joseph Cronin, 1896년-1981년 1월 6일)이라는 작가요 의사인 그의 간증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의대를 졸업한 유능한 청년 의사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의대를 졸업하고 돈을 벌기 위해 병원 개업을 했습니다. 가진 것이 적은 이 의사는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서 병원을 개업했습니다. 이 의사는 이제 병원을 개업했으니 돈을 많이 벌어서 은행 빚도 갚고, 그 다음에는 자신이 살집도 마련하고 또 병원을 크게 확장해서 장차 종합병원을 만들어야겠다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환자를 대할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한 푼이라도 더 벌까! 하는 생각에 완전히 사로잡혔습니다. 어떻게 하면 손해를 보지 아니하고 한 푼이라도 더 벌까! 하는 생각에 묶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요즈음 많은 병원들이 그런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날이 갈수록 환자들은 늘지를 않고 줄어들었습니다. 수입도 나빠지고 사태는 조금도 개선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젊은 의사는 자신의 삶을 깊이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는 자신이 돈에 혈안이 되어 있는 사이에 어느새 자신이 신앙을 다 팔아먹고 헌털뱅이 신자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돈에 혈안이 되니까 자연히 신앙을 잃어버리고, 또 교회도 나가지 않게 되고, 주일이 되어도 혹시 급한 환자가 오면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으로 자신을 정당화시키면서 주일날도 병원 문을 열어 놓았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자연히 주일성수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돈에 혈안이 되어 있으면 자연히 신앙은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구나!’하는 것을 깨닫고 그 젊은 의사는 자신을 깊이 회개했습니다. 의사가 된 까닭이 무엇일까? 돈을 벌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인간의 귀한 생명을 위해서인가? 의사가 되기까지 선언했던 히포크라테스의 정신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돈을 벌려고 했다면 경영대학을 가든가 상경대학을 갈 일이지! 내가 의대에 들어가서 그 힘든 공부를 한 이유는 분명히 돈 때문인 것 같지는 않다하는 생각으로 바뀌게 되면서 이제는 인간의 생명을 구하는 의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한번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마음을 바꾸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환자들을 대합니다. 의사가 마음을 바꾸니까 병원의 운영방침이 180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전에는 환자들을 보면 환자가 돈으로 보였습니다. 치료비를 제대로 낼 수 있는 환자인가 아닌가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마음을 바꾸어 먹은 다음에는 돈보다는 인간의 생명을 먼저 생각해서 ‘내가 저 환자의 병을 꼭 고쳐서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섰습니다. 환자를 꼭 고쳐야 겠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바꾸고 난 다음에 일을 하다가 보니까 이 의사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동안 자신이 의대를 졸업하고 돈을 벌어야겠다는 데에 정신을 다 쏟는 사이에 세상은 너무나 많이 변한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신종 바이러스가 생겼는지! 또 얼마나 많은 새로운 약들이 개발이 되었는지! 또 치료하는 의료기구도 얼마나 새로운 것들이 많아졌는지! 돈에 혈안이 되어 있다가 보니까 자신이 의사로서 마땅히 더 공부하고 새로운 것을 연구하는 일에 얼마나 뒤떨어졌는지! 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젊은 의사는 환자들의 생명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또 새로운 분야의 개척을 위해서 더 열심히 연구하고, 또 교회에도 빠지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영적으로 부요해지기 위해 열심을 내었습니다. 사람이 바뀌면 거기에서 새로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의사의 생각과 삶이 바뀌니까 신통할 정도로 자신의 병원에 찾아오는 환자들의 병이 잘 나았습니다. 다른 병원을 전전긍긍하면서 괴로움을 받았던 환자들도 이 병원에만 오면 병이 낫는 것입니다. 차츰 이 의사는 환자들 사이에서 ‘이 사람은 명의다’라고 하는 소문이 퍼져 나갔습니다. 병 고침을 받고도 병원비를 제대로 내지 못한 환자들의 입에서 ‘이 분은 명의다’하는 소문이 점점 퍼지면서 그 의사는 자연히 명성과 돈을 함께 얻었습니다. 그는 후에 자신의 병원과 교회를 중심으로 지역 사회를 위해서도 많은 일을 한 의사가 되었다고 합니다.(정언용목사) 그래서 이 의사는 마침내 부요의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예를 더 하겠습니다.
‘끝없이 도전하고 아낌없이 나눠라’는 책은 김용복(金龍福) 회장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힘들고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미군부대에서 하우스 보이로 영어를 배우고 운전을 하면서 주경야독으로 건국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75년에 사우디로 건너갔습니다. 사우디에서 채소를 재배하는 일에 전 재산을 쏟아 부었다가 그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밤낮 술에 취해 지내다가 독실한 크리스천 부인의 전도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은혜 받고 새 출발하는 마음으로 다시 사우디로 건너가서 4년만에 채소 재배에 성공을 하였습니다. 교회부터 건축하겠다는 약속대로 농장에 교회를 지어 하나님께 봉헌했습니다. 부요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확실하게 가졌습니다. 그 후 농장은 사우디 농과대학생들의 필수 견학코스가 되었고 밀 경작까지 성공해 11만kg의 밀을 농림부에 납품하는 사우디의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1989년 14년의 사우디 생활을 접고 고향 강진에 들어와 70만평 땅에 영동농장을 세워 가난한 학생을 돕는 뜻으로 10억 재산으로 ‘용복장학회’를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100억을 내놓아 ‘한사랑 농촌문화재단’을 설립하여 농업발전에 기여한 사람들에게도 후원을 하며 지금도 선한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는 매년 초에 유서를 쓴다고 합니다. ‘내 몫의 재산은 물론 장기까지도 필요한 곳에 사용할 것이다’하고 유서에 써놓고 남아있는 부동산도 처분하여 불우한 어린이를 돕는 사업을 하는 것이 자신의 꿈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돈은 분뇨와 같아서 한 사람이 너무 오래 가지고 있으면 부패하고 구린내가 납니다. 그러나 적절한 시기에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면 향내가 나고 비료가 되어 죽어가는 생명도 살리게 되지요. 세상은 저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물으십니다. ‘네 소유를 어떻게 사용했는가?’ 이 물음에 당당하게 대답하는 종이 되고 싶습니다. 이것이 저의 간절한 소망이요 꿈입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김광일목사) 김용복 회장은 역시 부요의 신앙을 가졌기에 그 큰 축복을 받았다고 하겠습니다.

 

세 번째 예화입니다.
정치가요, 학자요, 주한 미 대사(1993년 10월-1997년 2월)를 지냈던 제임스 레이니(James T. Laney)가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여 에모리 대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건강을 위해 매일 걸어서 출퇴근하던 어느 날, 쓸쓸하게 혼자 앉아 있는 노인을 만났습니다. 레이니는 노인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인사를 나누고 말벗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 후 시간이 날 때마다 노인의 집을 찾아가 잔디를 깎아주거나 커피를 함께 마시면서 2년여 동안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길에 노인을 만나지 못하자 노인의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런데 노인이 전 날 돌아가셨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곧바로 장례식장을 찾아가 조문하면서 그 노인이 바로 코카콜라의 회장을 지낸 분임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다가와 “회장께서 당신에게 남긴 유서가 있습니다”라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힌 봉투를 건넸습니다. ‘우리 집 뜰의 잔디도 함께 깎아 주고, 커피도 나누어 마셨던 나의 친구 레이니에게, 당신은 2년여 동안 내 집 앞을 지나면서 나의 말벗이 되어 준 친구였소. 고마웠어요. 당신에게 25억 달러와 코카콜라 주식 5%를 유산으로 남깁니다.’ 너무 뜻밖의 유산을 받은 레이니 교수가 거기서 3 가지를 깨달았대요. 첫째는 세계적인 부자가 저렇게 검소하게 시골에서 살았었구나. 둘째는 자신이 코카콜라 회장이었음에도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 놀랐고요. 셋째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사람, 지나가는 사람에게 그렇게 큰돈을 준 것에 놀랐다고 해요. 미국의 정신의학자인 칼 메닝어 박사는 말하기를 “남에게 돈을 주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정신건강을 진단할 수 있다. 남에게 후하게 베푸는 사람 치고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랬어요. 제임스 레이니는 노인에게 베푼 따뜻한 사랑으로 엄청난 부가 굴러 들어왔지만, 그 부에 도취되어 정신을 잃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부에 자기 재산까지 얹혀 학생과 학교를 위한 발전기금으로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에모리 대학 총장으로 학생들을 위해 봉사하였습니다. 제임스 레이니는 자신의 사랑을 행동으로 증명하였던 사람입니다. 레이니 교수가 행한 일은 그렇게 큰일을 하였다고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 일은 부요한 신앙을 가진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는 아주 큰 일 이라고 하겠습니다.

 

네 번째 예화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극단적인 평가를 받았던 파블로 피카소 라는 화가가 있는데요. 화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열 다섯 살 때부터 풍속화와 인물화에 아주 능숙한 그림 솜씨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가 20대 초반 무명 시절에 아주 가난하고 배고픈 시절을 보낸 적이 있었어요. 낯선 도시 파리에서 끼니를 거른 지 여러 날이 지나자, 그는 굶주린 배를 채워보려고 어느 카페에 들어갔었대요. 가진 게 없었지만 마른 빵 한 조각과 커피 한 잔 시켜놓고 그림을 그리는데 열중하고 있었어요. 카페 주인이 보니까, 아주 초라한 행색을 한 젊은이가 빵 한 조각과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서 몇 시간째 노트 위에 연필로 선을 그어대고 있더래요.
계산하기를 기다리던 주인이 계산서를 들고 젊은이 앞에 다가섰어요. 젊은이가 고개를 들더니 주머니를 뒤지는 거예요. 하지만 텅 비어있던 주머니에 뭐가 있겠어요? 피카소는 얼굴을 붉히면서 어쩔 줄 몰라 했어요. 그러다가 주인에게 사실대로 말하면서 사과했어요. “죄송합니다. 지금 저에게는 돈이 없답니다. 하도 배가 고파서 그만...... 허기라도 채 울려고 들어와서...... 음식을 주문하고 말았어요...... 염치없는 일이긴 하지만 음식 값 대신 제 그림을 받아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그랬어요. 여러분이 카페 주인이라면 무명 화가의 습작 그림을 음식값으로 받으시겠어요?
피카소는 재빨리 의자에 앉아 냅킨에다 카페 주인의 얼굴을 그려서 음식 값이라고 내밀었어요. 주인은 냅킨에 그려진 그림을 보더니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어요. “정말 훌륭한 그림이구려. 몇 프랑의 음식 값보다 이 그림이 몇 백 배가치가 있게 보이는구려.” 카페 주인이 음식 값으로 그림을 받아주자, 피카소의 얼굴에도 웃음이 번졌어요. 수 십 년이 지난 후에 피카소가 천재화가로 유명세를 타게 되었어요. 피카소가 냅킨에다 그려준 카페 주인의 초상화가 경매장에 나왔어요. 피카소가 젊은 시절에 습작으로 그린 작품이라며 메종드라쉬니 경매장에서 수 백 만 달러에 팔렸던 겁니다. 배고픈 화가에게 베푼 긍휼이 여기는 마음, 따뜻한 사랑이 이 카페 주인은 부요한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부요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부요하게 살도록 도와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했던 일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기억이 무엇이었나요? 인생을 살아오면서 가장 감동적이고, 가장 보람된 일이 무엇이었나요? 베풀 능력이 있을 때 따뜻한 마음으로 베푸는 거, 힘이 있을 때 봉사할 수 있는 거, 이게 부요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을 부요케 해 주는 일입니다.  누군가에게 예수의 향기를 전해주는 일 그것이 부요한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가 가진 심령의 부요는 천만금 물질을 소유한 사람보다 더 부자입니다. 

3월 9일부터 18일까지 평창에서 또 다른 동계올림픽이 개최됩니다. 세계장애인 올림픽입니다. 사람들은 그동안 평창동계올림픽에 환호성과 축하를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올림픽에 대해 별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정부나 언론에서도 크게 관심을 두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인간 승리는 장애인 올림픽에서 볼 수 있습니다. 관심을 가지고 보는 건강한 사람들은 시각장애인들의 경기를 안쓰럽고,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각은 편견입니다. 짐 피빅이란 이가 이런 말을 했어요. 이런 말이 있습니다.“점자를 읽는 데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들이 결코 맛볼 수 없는 경이로움이 있다. 즉 낱말을 만지면 사람을 만지듯이 감동시키는 경이로움이 있다.(짐 피빅)” 우리는 장애인들의 경기에서 삶의 기쁨과 위대한 승리와 ‘어쩌면 저렇게 잘할 수 있을까?’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저는 그들에게서 넘치는 부요한 삶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약하고 가난하고 부족한 상태에서 그들은 너무나 크고 놀라운 많은 부요함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가난하고 부족하고 어리석고 약하지만 아니요 우리는 이 작은 공간에 하나님의 부요하심이 가득함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를 부요케 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그 구원과 은총의 부요함이 여기 우리 안에 가득하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또 다른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는 우리 라온코이노니아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使爾爲富입니다. 우리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늘 부요하게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나는 가난하다고 탄식하지 말고 나는 약하다고 불편하지 말고 나는 눍어 아무 쓸모없다고 절망하지 말고 나는 부요하다고 자존감을가지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소원은 부요하게 사는 일입니다. 욕망에 머물러 있으면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가난한 자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죄가 어디서 옵니까? 물질의 탐욕입니다. 신앙은 탐욕을 버리는 일입니다. 오히려 가난해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그러면 심령이 부요하게 됩니다. 使多人富 심령이 부요한자는 천국을 소유한자요 많은 사람들을 부요케 해 주는 사람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누구를 부요케 해 줄 것입니까? 누가 우리로 말미암아 부요케 될 것인가? 우리 라온 코이노니아는 바로 남을 부요케 해주는 성도들의 신앙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하게 인생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