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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7년 4월 30일  주일아침예배  롬 9:14-16   非也 無矜恤之心 非基人也

 

 

중국의 고전 맹자를 보면 由是觀之 無惻隱之心 非人也 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남의 어려움을 보면 참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할 때, 모두 깜짝 놀라고 측은한 마음을 가지고 달려가 구하게 됩니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부모와 관계를 가지려는 것도 아니고, 마을 사람이나 친구들에게 명예를 얻으려고 한 것도 아니며 구하지 않았다고 비난의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측은한 ㅁ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측은한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면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사람이 아닙니다.(이렇게 본다면 由是觀之를 非也로 해석하였습니다.)

 

뉴질랜드 더니든순복음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는 조상호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지난 97년 12월26일 Boxing Day(유럽에서 크리스마스 다음 날인 12월 26일을 이르는 말로, 영국, 호주 등 영(英) 연방국가는 이 날을 공휴일로 지정했다. 복싱 데이는 과거 봉건시대 유럽 영주들이 주민들에게 상자(box)에 담아 선물을 전달하고 하루 휴가를 주었다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오늘날엔 미국의 블랙 프라이데이 · 사이버 먼데이 등과 함께 세계적인 세일 이벤트 기간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영국과 미국, 캐나다 등의 상점들이 복싱 데이에 대대적인 할인판매 행사를 하기 때문이다.)에 조 목사님 가족이 Alexandra를 가던 중에 한참 오르막길을 올라가는데 갑자기 ‘펑’하는 소리와 함께 본네트 뚜껑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이었습니다. 얼른 차를 길가로 붙여 세우고 본네트 뚜껑을 열었습니다. 아니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라디에이터와 엔진을 연결하는 냉각수 호스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있었습니다. 조 목사님 스스로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차에는 스패너라든지, 십자드라이버라든지 공구로 사용할 것도, 물을 담을 그릇하나 없었습니다. 햇볕이 쨍쨍 내려 찌는 첩첩 산중 오르막길에서 어떡합니까? 예수 믿는 사람의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기도가 아닙니까? “하나님 도와 두세요. 돕는 분을 보내어 주세요”라고 짧게 속으로 기도하였는데 이상하게도 걱정이 되지 않고, 오히려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기도를 한 후, 지나가는 차량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고장난 차 앞에 섰습니다. 많은 차량들이 지나갔습니다. 멈추는 차가 한 대도 없었습니다. 조목사님은 어쩔 줄 모르고 고장 난 차 앞에서 엉거주춤 서서 있었는데, 어떤 차가 가던 길을 되돌아오더니 갑자기 고장 난 조 목사님 차 뒤에 멈추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더니든순복음교회 옆에 있는 Lauson제빵회사에서 근무하며 Apostolic Church에 다니는 Paul Bray라고 하는 신실한 크리스챤이었습니다. 그 분은 부인과 간난 아기와 함께 휴일을 맞아 우리와 같은 목적지인 Alexandra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 분은 조목사님이 어찌 할 줄 모르고 있을 때, 자신의 차 속에서 드라이버를 꺼내어 손에 기름을 묻히면서 직접 호스를 빼낸 다음, 조목사님과 함께  오던 길을 다시 약20분 정도 달려서 Lowrence의 한 주유소에 왔습니다. 처음에 그분이 조목사님을 내려주고 자신의 길을 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자기 길을 가지 아니하고 조목사님을 끝까지 도와주는 것이었습니다. 주유소에 들어가서 고무호스를 사고, 다른 공구를 빌리고, 쓰레기통에서 빈 콜라병, 빈 우유병을 줏은 후, 그것에 물을 가득 채워 가지고 차가 고장 난 곳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냉각 호스를 교체하고 물도 집어넣은 후, 자동차 키를 다시 돌리자, 시동이 걸리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조목사님과 가족들은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에게 정중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헤어졌는데, 그분은 어찌된 영문인지 앞서 가다가 다시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은 혹시나 차가 중간에 다시 고장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뒤따라갈 테니까 저더러 서서히 달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고장난 지점으로부터 약30~40Km떨어진 또 다른 주유소까지 서서히 운전을 하고 그 분은 뒤를 따라왔습니다. 그곳에 도착하여 냉각호스를 다시 점검한 결과 큰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조 목사님 차가 계속 달릴 수 있다는 확신이 들자, 목사님 보다 오히려 더 기뻐하였습니다. 그 분은 이제 안심이 되었던지 '안전한 여행을 바란다'는 말을 남기고 헤어지려고 해서 조 목사님은 주유소에서 구입한 아이스크림을 함께 나누어 먹으며 다시 한번 크게 감사를 표시하고 헤어졌습니다.

 

이 조상호 목사님의 경험 이야기에서 Paul Bray씨는 어려움에 처한 조 목사님의 가족들을 다른 사람들처럼 거들떠보지 않고 자신의 여행길을 갔어도 상관없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손가락질할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Paul씨는 아무 조건 없이, 아무 대가없이 조 목사님을 도와주었던 것입니다. 맹자의 말처럼 측은지심을 느끼고 조목사님을 도왔다고 하겠습니다. 맹자는 측은지심은 인간의 기본적인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다른 사람들은 조목사님의 어려움을 보고도 지나쳤을까요? 

 

예수님의 강도 맞은 사람의 비유(눅10:25-37)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강도를 만나 피투성이가 되어 길가에 쓸어저 있었습니다. 한 제사장이 지나갔습니다만 그대로 지나쳐 가버렸습니다. 또 레위인도 지나갔지만 그를 도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삐 장사하러 가던 사마리아 사람이 이 강도 맞은 사람을 응급처치 치료해주고 주막에 데리고 가서 치료비를 주며 의사의 치료를 받도록 하였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측은지심을 가졌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非人也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할 것입니까? 맹자는 그런 사람은 인간이 아니다라고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레위인이나 제사장 같은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은 사마리아사람과 같은 사람임을 예수님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너희도 가서 긍휼을 베풀(포류우 카이 수 포이에이 호모이오스-엘레오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으로 긍휼을 배풀지 않으면 기독교교인이 아니라하겠습니다. 그래서 맹자의 由是觀之 無惻隱之心 非人也말을 바꾸어 非也 無矜恤之心 非基人也라고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은 기독교인으로 마땅히 마음에 가지고 행하여야할 기본을 긍휼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긍휼을 자비라고도 번역하였습니다. 또 측은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영어로도 긍휼 자비 측은을 pity, compassion으로 똑같이 말합니다.

 

어린시절 그러닌까 초등학교 3학년 때 그럴 때입니다. 당시 고물들을 주어 엿장수한테 가지고 가면 엿장수는 엿을 잘라 주었습니다.  아직 6.25전쟁 때 파괴된 대전 시내 여기저기에 철 고물들이 있었습니다. 한 동무하고 고물을 주으러 다니다가 그 동무가 커다란 부서진 자전거를 발견 하였습니다. 야 수지 맞았다하며 좋아하였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때까지 끊어진 철사 몇가닥을 주었을 뿐입니다.  동무랑 같이 엿장수 아저씨에게 갔습니다. 그 동무가 먼저 부서진 자전거를 엿장수 아저씨에게 내밀자, 엿장수 아저씨는 너무 좋아하시면서 3망치 분량의 엿을 주었습니다. 참고로 옛날의 엿은 길쭉한 가락엿도 있었지만, 널찍한 펼쳐 논 떡판과 같은 모양의 엿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널찍한 엿판에 있는 엿을 팔 때는, 뾰족한 정을 대고 망치로 두들기어 조금씩 떼어내어 팔곤 하였는데, 그 날 엿장수 아저씨는 제 동무가 가져온 부서진 자전거를 보고 너무 좋아서 3망치 분량의 엿을 주었습니다. 이윽고 저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가느다란 철사 다섯 가닥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저에게도 3망치 분량의 엿을 떼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나는 끄트머리에서 조그맣게 엿 조각을 떼어 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3망치 분량의 엿을 준 것입니다. 그러자 제 동무가 엿장수 아저씨에게 항의하였습니다. "아저씨, 병호 재는 왜 나하고 똑같이 주는 것예요? 병호 것 철사하고 내 것 자전거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데, 왜 똑같이 3망치 엿을 주는 것예요?" 그러자 엿장수 아저씨가 뭐라고 말 한 줄 아십니까? "야, 내가 누구니? 나는 엿장수야. 내가 엿을 한 망치를 두드려서 주든, 세 망치를 두드려서 주든 그건 내 맘이야. 너 엿장수 맘 대로라는 것 들어봤니?"
 
마20:1-16에보면 예수님의 포도원 주인 비유가 있습니다. 포도원 일꾼 한사람을 아침 아홉시에 채용하여 포도원 일을 맡겼습니다. 또 12시에 그리고 3시에 그리고 다섯시에 일꾼을 채용하여 일을 시켰습니다. 이스라엘 율법에 저녁 6시에 모든 일을 마쳐야 됩니다. 그래서 저녁 6시 일을 마치고 하루 일당을 주는 데 아침 9시에 일한 사람에게 한 달란트를 그러닌까 10만원을 주었습니다. 12시에 온 사람에게도 3시에 온 사람도 그리고 겨우 1시간만 일한 5시에 온 사람에게도 10만원을 주었습니다. 그러닌까 아침 9시에 온 일꾼이 항의를 하였습니다. 아니, 5시에 온 사람도 10만원을 준다면 나는 일당을 더 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주인은 뭐라고 말하였습니까? “내 것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긍휼의 대상은 일이 아닙니다. 또 얼마나 오래 일하였느냐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의 대상은 사람입니다. 10만원은 하루 일당입니다. 그 일당 품삯은 그 일한 사람과 가족들의 생계가 달려 있습니다. 오후 다섯 시에 와서 겨우 한 시간 일하였지만 그 사람은 일력시장에서 하루 종일 그날 일당을 받지 못하면 그의 가족들이 그날 굶어야 할 것이라는 걱정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는 단 몇 푼이라도 벌어가야 그날 저녁 고구마 하나라도 사서 가족들과 나누어 먹을 것인데 5시가 되도록 그에게 일시키는 사람이 없었으니 그는 아마 절망으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일거리가 생겼습니다. 포도원에서 일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비록 한 시간 일이지만 고구마 한 개라도 사들고 갈수 있다는 희망이 생겨 열심히 포도를 땄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그에게 한 시간 동안 일한 품삯을 주어도 비난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시간이 아니라 하루 일당을 쳐서 지불하였습니다. 이는 포도원주인의 마음대로입니다. 그리고 이는 포도원 주인의 긍휼의 마음입니다. 긍휼은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요 예수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역사를 보면 온통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역사입니다. 태초에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하심도 아버지 하나님의 긍휼하심이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추방되어 나갈 때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심도 아버지 하나님의 긍휼하심이요, 홍수심판에서 노아의 가족을 구원하심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이요, 바베탑을 세운 인간들의 말을 다르게 하심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이요, 아브라함을 택하심도 이삭을 제물로 받지 않으시고 에벤에셀 양을 준비하심에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이요, 얍복강에서 야곱과 씨름하시고 이름을 이스라엘로 부르게 하심도, 요셉을 애급나라의 총리가 되게 하심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이요, 모세를 통해 애급에서 노예생활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 주심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이요. 이렇게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소개한다면 성경 전체를 읽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로마서 9장 15~16절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알라 투 엘레온토스 데우)."고 말씀하였습니다. 사람이 구원받은 것은 소원하고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있는 노력으로 심판을 면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16절 하반절의 말씀처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습니다. 미가서 6:8에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정의 사랑 겸손 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의 세 가지 성품입니다. 그런데 이 정의 사랑 겸손을 하나로 합치면 바로 그것이 긍휼입니다. 그 긍휼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본문 18절 말씀이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의 긍휼은 아무나에게 주는 긍휼이 아니란 말입니다. 긍휼함을 받을 자에게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신다는 말씀입니다.  왜 하나님은 야곱을 에서 보다 더 사랑하셨습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야곱은 팟죽 한 그릇으로 형의 장자권을 빼앗았고 눈먼 아버지를 속여 형이 받을 축복을 가로 챘고 삼촌 라반을 속여 수많은 양들을 착복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나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셨습니다. 야곱에게 긍휼을 보이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고 그 축복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에서는 그 가치를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중요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바라고 구하고 기다리는 자에게 하나님은 긍휼하심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복입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의 팔복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와 중세교회의 수많은 성가의 가사 중에는 "주여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란 가사가 거듭해서 나옵니다.
(Oh Lord have mercy Oh Lord have mercy Oh Christ have mercy Have mercy
주여 긍휼을 베푸소서 그리스도여 긍휼을
Oh Christ have mercy Oh Christ have mercy Jesus have mercy Oh have mercy
그리스도여 긍휼을 주소서 예수님이여 긍휼을
Oh God have mercy Oh God have mercy Jesus have mercy Oh have mercy, mercy
여호와시여 여호와시여 예수님이여 긍휼을
Oh my God what have I done 오 주여 내 한 일에
Oh my God what have I done 오 주여 내 한 짓에
What have I done 내 행위에
Oh Lord have mercy 긍휼을 주소서
Oh Lord have mercy Oh Christ have mercy Have mercy
그리스도여 주여 긍휼을 베푸소서)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기도는 "주여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입니다. 아마 제가 한 평생 가장 많이 한 기도의 말은 "저에게 긍휼을 주소서" 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길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신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이웃을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체험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다.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긍휼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긍휼을 베풀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체험한, 남편 다섯을 두었던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은 아마 한 평생 자기처럼 불행한 형편에 처한 수 많은 사람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며 살았을 것입니다. 간음현장에서 붙잡힌 그 불행한 여인도 아마 한 평생 자기처럼 불행한 형편에 처한 수 많은 사람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며 살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주님의 긍휼하심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정교회의 수가성기념교회내 그림)

 

우리가 긍휼이 여기는 사람이 되려면 먼저 주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기심을 받아야 하고 체험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을 받고 긍휼하심을 받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인은 아닙니다. 눅7장에 나오는 죄인인 한 여자는 사랑을 받을 줄 알았는데 레위인 시몬은 사랑을 받을 줄을 몰랐습니다. 죄인인 그 여자는 긍휼하심을 받을 줄 알았는데 시몬은 긍휼하심을 받을 줄 몰았습니다. 스폰지와 같은 부드러운 심성은 사랑의 물을 흡수할 수 있지만 차돌과 같은 딱딱한 심성은 사랑의 물을 흡수할 수가 없습니다. 스폰지와 같은 부드러운 마음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의 긍휼을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단순한 윤리의 종교가 압니다. 기독교는 사죄의 종교요 은총의 종교요 사랑의 종교요 긍휼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 아래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고 체험하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은 사람,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은 사람만이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미국의 이름 있는 시인 로엘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분이 쓴 글 중에 “롱펠의 꿈”이란 이야기가 있습니다. 롱펠은 중세시대의 어느 성의 군주였습니다. 그는 말 타기를 좋아하며 모험을 즐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롱펠은  어느 날,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작별의 저녁 식사를 하실 때에 포도주를 부어 마시게 한 은잔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것을 생각한 것입니다. 듣건데 그 은잔은 후에 미술가의 손에 넘어가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의 얼굴이 밑바닥에 그려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유명한 은잔을 찾아 후대 사람들에게 기념으로 보여 준다는 것은 뜻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긴 여행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물통에는 물이 가득하고 자루에는 빵이 가득했습니다. 모든 짐을 말 잔등에 싣고 돈도 넉넉히 가지고 말을 탔습니다. 성문을 지나 먼 여행길을 달려 어느 벌판을 지나가다가 나병 환자를 만났습니다. 그는 지치고 배가 고파 보였습니다. 떨어진 옷을 걸치고 지팡이를 휘두르며 구걸을 했습니다. "형제여!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나를 도와 주세요.먹을 것을 좀 주십시오. 물을 좀 주세요." "나의 가는 길을 방해 하지 말라. 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구주 예수님의 은잔을 찾기 위해 떠나가는 몸이다. 더러운 나환자가 어찌 나의 가는 길을 막는가?" "나를 살려 주세요. 이대로 두면 굶어 죽습니다." 나병자는 더욱 애걸을 하면서 말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금돈 한 개를 던져 주고 말을 달렸습니다. 이곳저곳 다니며 은잔을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10년 가까운 세월로 구라파 여러 나라들을 여행하였지만 헛수고였습니다. 이제 힘없이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모든 꿈은 사라지고 떨어진 옷을 입은 그는 힘없이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추운 겨울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벌판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때 기진하여 간신히 몸을 가누며 걸어 가다가 쓰러져 죽을 것만 같은 한 걸인을 만났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것으로는 이 빵이 있을 뿐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이것을 받으세요." 롱펠은 걸인을 일으켜서 차고 있던 표주박으로 물을 따라 걸인에게 먹여 주었습니다. 그러자 걸인은 홀연히 빛이 나더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보라! 나로다 두려워 말라. 너는 은잔을 얻으려 이 나라 저 나라로 여행하였으나 너 얻은 것이 무엇이냐? 보라! 너의 손에 들려있는 쪽박을... 나에게 물을 떠준 그 쪽박이 네가 찾아 헤매던 은잔이니라. 네가 준 그 빵이 찢기운 나의 몸이요, 나에게 마시운 그 물이 십자가의 피로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음식이 성찬이로다." 롱펠이 정신을 차려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그 후 그는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재물을 나누어 주었다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친절을 베푼 오네시보로를 위한 기도를 이렇게 드렸습니다.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이라. 원하건대 주께서 그로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하여 주옵소서.”(딤후1:16-18) 오네시보로가 누구인지 성경에는 자세한 소개가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네시보로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네시보로가 바울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을 부지런히 자주 찾아와서 격려를 아끼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격려라는 말은 아나퓨켄이란 말인데 기쁘게 하다 기운나게 하다 란 의미입니다. 개역성경에서는 ‘유쾌케하다’로 번역하였습니다. 오네시보로는 평소 시간 나는 대로 감옥에 찾아와서 갇혀있는 바울을 즐겁게 하여 기운을 북돋아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오네시보로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하나님께서 그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평소에 긍휼을 베풀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을 받는 대신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2:13). 우리 주변에는 불행과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에 그들을 향한 측은지심을 가져야 합니다. 측은지심이 없다면 비인야라 사람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주변에 혹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잇습니까?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들에게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시다. 그리고 그들에게 찾아가서 그들을 어루만지며 눈물과 사랑을 베풀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긍휼을 베푸는 복 있는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이든은 100곡도 넘는 교향곡을 작곡하였다고 합니다. 그중에 교향곡 96번 교향곡을 기적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이런 부제가 붙게 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1791년 3월 11일 런던 하노버스퀘어 홀에서 96번 교향곡 초연 연주회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청중들이 이 유명한 음악가 하이든을 환영하기 위해 하이든에게 몰려갔습니다. 바로 그때에 연주 홀 중앙에 있던 커다란 샹들리에가 떨어졌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그대로 있었다면 수십 명이 큰 화를 당 할 번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도 다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 사람이 큰 소리로 외치기를 “기적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하이든 96번 교향곡을 기적교향곡이라고 사람들은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큰 화를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그리스도의 그 크신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았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긍휼하심을 보여 주지 못한다면 역시 큰 화를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향한 긍휼의 마음을 가짐으로 화를 면하게 된다면 이 또한 기적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은 곧 기적을 일으키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으로 긍휼한 마음을 가지지 못한다면 非也 無矜恤之心 非基人也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라온코이노니아 성도 여러분, 바울이 오네시보로의 집에 하나님의 긍휼을 기도하였듯이 여러분의 집에도 하나님의 긍휼을 날마다 체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나가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그 크신 긍휼하심을 나타내 전하여 주어야 합니다. 이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성도로, 진실한 기독교인으로 하나님이 날마다 주시는 긍휼의 기적을 체험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날마다 주시는 긍휼의 축복 체험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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