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9일 주일아침예배 히 2:11-18, 마 12:50 同氣連枝신앙
5월5일은 어린이날 5월 첫 주일은 어린이주일, 5월8일은 어버이날 5월 둘째주일은 어버이주일, 5월 3째 주일은 부부주일, 5월 4째 주일은 경로주일입니다. 그런데 형제자매의 날, 형제자매 주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미국에는 형제자매의 날이 있습니다. 바로 4월 10일 내일을 ‘형제자매의 날’(National sibling day)이라고 합니다. 1997년 클라우디아 에바트라는 여성(로펌 근무)이 어려서 죽은 오빠와 여동생을 생각하며 형제자매의 날을 만들었습니다. 4월 10일이 여동생의 생일이었습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1998년 미국의 39개 주가 이날을 형제자매의 날로 채택하였고, 이어 2000년 빌 클린턴 대통령이 국가기념일로 선포하였습니다. 꼭 미국을 따르기 보다는 우리나라도 형제자매의 날을 정하여 형제자매간의 사랑을 더욱 돈독히 하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에 60억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 DNA가 같은 사람은 형제자매 밖에 없습니다. 다른 말로 말씀드리면 형제자매는 하나님이 같은 유전저 DNA를 부모의 혈통으로부터 이어받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설교제목을 ‘동기연지’의 신앙‘이라고 하였습니다. 동기연지란 천지문에 있는 말입니다.
천자문은 이렇게 사작하죠,
1.천지현황 우주홍황 (天地玄黃 宇宙洪荒 하늘천, 땅지, 검을현, 누를황, 집우, 집주, 넓을홍, 거칠황 :
하늘과 땅은 검붉고 누르며, 우주는 넓고 아득하다.)
2.일월영측 진숙렬장 (日月盈昃 辰宿列張 날일, 달월, 찰영, 기울측 ,별진, 잘숙, 벌렬, 베풀장 : 해와 달은 차기도 하고 기울기도 하며, 별들은 각각 하늘에 벌여 있다.)
3.한래서왕 추수동장 (寒來暑往 秋收冬藏 찰한, 올래, 더울서, 갈왕, 가을추, 거둘수, 겨울동, 감출장 : 추위가 오면 더위는 간다. 가을에는 거두어 들이고 겨울에는 저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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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공회형제 동기연지 (孔懷兄弟 同氣連枝 매우공, 품을회, 형형, 아우제, 같을동, 기운기, 이을연, 가지지 : 간절히 생각되는 것은 형과 아우의 사이이니, 동기는 한 나무에서 나누어진 가지와 같다.)
공회형제 동기연지(孔懷兄弟 同氣連枝)란 “간절히 생각함은 형제간의 우애이니 동기간은 한 나무서 이어진 가지니라.”란 의미입니다.
『삼국지(三國志)』에 보면 천하의 영웅인 조조(曹操)에게 맏이인 조비(曹丕)와 셋째인 조식(曹植)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원래 조조와 조비, 조식은 다같이 시문이 뛰어나 삼조(三曹)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맏이는 문무를 겸비하여 전장에도 많이 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조조는 두 아들 중에서 시문이 뛰어난 셋째 아들인 조식에게 권력을 넘겨 주고 싶어 했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둘의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야심이 많은 조비는 조식에게 경계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중에 조조가 조비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죽자 조비가 보위에 올라 위(魏)나라 문제(文帝)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동생에게 못되게 굴다가 어느 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건아, 선친이 살아계실 때부터 너는 시재를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면 이 자리에서 일곱 걸음 걸어가는 동안에 시 한 수를 지어라. 너와 나는 형제이다. 형제라는 뜻이 들어가되 형제의 단어가 들어가지 않은 시를 지어라. 만약 짓지 못하면 여덟 걸음에 목이 떨어지리라."
제 아무리 시재가 출중해도 일곱 걸음 안에 시를 짓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조식을 제거하려 했던 것입니다. 잠시 생각한 후 조식은 일곱 걸음을 걸으며 댜음과 같은 시를 을펐습니다.
煮豆燃豆萁 자두연두기 꽁깍지를 태워서 콩을 삶으니
豆在釜中泣 두재부중읍 콩은 솥 안에서 울고 있구나.
本是同根生 본시동근생 본디 한뿌리에서 생겨났건만
相煎何太急 상전하태급 어찌 이리 급하게도 볶아대는가.
이 것이 저 유명한 칠보시(七步詩)입니다. 콩깍지는 형인 조비를 솥 안의 콩은 조식 자신을 표현하여 절박한 현 처지를 읊었던 것입니다. 이에 탄복한 조비는 눈물을 뿌리며 동생 조식을 끌어안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용서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조식은 시재가 특출하여 죽음에까지 이르렀다가 시재 때문에 목숨을 구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본디 한 뿌리에 태어났다’라는 본시동근생(本是同根生)이란 말이 나오는데 아우를 일러 동생(同生)이라고 하는데 동생이란 말은 여기 同根生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천륜으로 맺어진 핏줄인 형제ㆍ자매는 서로 사랑하고 우애 있게 지내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익에 따라 반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바로 권력과 재산이 주가 될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차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형제가 반목힌디는 것을 불교에서는 어리석은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이라고 말합니다.
(불교에서 삼독이란 탐욕(貪慾, lobha)과 진에(瞋恚, dosa)와 우치(愚癡, moha)를 가리킵니다. 탐욕은 본능적 욕구를 포함해서 탐내어 구하는 것을 말하고, 진에는 뜻에 맞지 않을 때 일어나는 증오심이나 노여움이며, 마지막으로 우치는 탐욕과 진에에 가려 사리분별에 어두운 것을 말합니다.)
형제란 같은 핏줄을 나눈 동기이지만 《논어(論語)》에 보면 사해형제(四海兄弟)라는 말도 있습니다.(다음 백과: 「사마우(司馬牛)가 근심하면서 말했다. “사람들은 모두 형제가 있는데 유독 저만 없습니다.” 자하(子夏)가 말했다. “죽음과 삶에는 명이 있고, 부유함과 귀함은 하늘에 달려 있다고 들었습니다. 군자가 공경하며 실수하지 않고, 남과 접촉하는 데 공손하고 예의가 있으면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형제입니다. 군자가 어찌 형제가 없는 것을 걱정하겠습니까?”司馬牛憂曰, 人皆有兄弟, 我獨亡. 子夏曰, 商聞之矣. 死生有命, 富貴在天. 君子敬而無失, 與人恭而有禮, 四海之內, 皆兄弟也. 君子何患乎無兄弟也.」 이 이야기는 《논어(論語) 〈안연(顔淵)〉》에 나온다. 자하가 한 ‘온 세상이 모두 형제’라는 말에서 ‘사해형제’가 유래했습니다. 사마우의 형 사마환퇴(司馬桓退)는 천하에 악명을 드날린 악한으로 송(宋)나라에서 일어났던 반란에 가담하였다가 실패한 후 망명하여 떠도는 신세였으므로, 사마우는 형제가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던 터라 자신은 형제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1996년 4월6일 그룹 창립 50주년을 맞아 이취임식을 가진 朴定求 금호그룹 회장과 朴晟容 명예회장은 이날 어머니 李順貞 여사로부터 상아도장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 상아도장에는 「孔懷兄弟 同氣連枝」란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번 도장증정은 형제간의 돈독한 우애를 당부하는 노모(老母)의 깊은 마음이 담겨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여름날 더위에 지친 사자와 멧돼지가 물을 마시기 위해 작은 샘물가로 왔습니다. 서로 먼저 마시려고 하던 그들의 다툼은 결국 목숨을 건 싸움으로 커져 버렸습니다. 싸움을 하다말고 숨을 가다듬기 위해서 잠시 쉬던 이들은 자신들이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 독수리떼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잠시 미운 감정을 접어두고 말했습니다. “서로 싸우다 시체가 되어서 까마귀와 독수리의 먹이가 되느니 차라리 사이좋은 친구가 되는 편이 낫겠네.”
박근혜 전대통령도 동생 박근령씨와 남동생 박지만씨 간에 사이가 좋지 못하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탄핵 후에 그 관계가 좋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 롯데그룹 후계 자리를 두고 신격호 총괄회장의 장남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과 차남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간에 형제의 난이 벌어졌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박전대통령에 대한 뇌물사건으로 두 형제간의 싸움은 잠시 후전상태에 들어 간 것 같습니다.
오늘 봉독한 히 2:11에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자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皆出於一 故稱之爲兄弟 不以爲恥)”란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孔懷兄弟 同氣連枝란 말입니다.
히브리서 말씀은 우리의 구원의 주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형제라고 불러주셨다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곧 예수 그리스도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 곧 성도들이 다 한 근원 하나님케로부터 났다고 했습니다(호 테 가르 하기아존 카이 호이 하기아조메노이 에크 헤노스 판테스).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신다(우크 에파이스퀴네타이)고 했습니다. 고귀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낮고 천한 우리들을 형제로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심은 놀라운 주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 보좌에 계실 분이 이 세상에 오시어서, 죄 없으신 분이 죄 많은 인간의 자리에 까지 오시어서, 우주삼라만상을 소유하신 부요한자로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시며 마침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어린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어 온갖 고초를 격으시고 마침내 도적들과 함께 십자가에 온몸의 피를 다 쏟기까지 고난당하시고 죽으심은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그러면 누가 예수그리스도의 형제입니까?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죄 씻음 받은 모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형제요 우리 서로 서로 형제입니다. 그리고 형제 관계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 된 관계입니다. 동기연지라 하였는데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흘리신 피와 그 사랑을 연지連枝, 이어받아連 가진枝된 우리 성도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사랑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10)" 사랑할 만한 가치가 없고 사랑해도 그 보상을 기대할 수 없음에도 먼저 사랑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주님께서 사랑했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하나님의 본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었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그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살인마를 자신의 양자로 삼은 손양원 목사님이 실천한 사랑입니다. 이것이 문둥이가 된 성자 다미엔 신부의 사랑의 실천입니다. 하와이 군도 몰리카 섬에서 문둥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 자신도 문둥이가 된 다미엔이 실천한 사랑입니다. 군산앞바다에서 전복된 배안에서 사람들을 구하고 본인은 죽은 아펜셀러선교사의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당시 중앙대사범대 일어교육과를 국가 전액 장학생으로 졸업하고 임용고시 합격후 단원고에 첫 발령을 받아 4년째 근무 중에 2학년 1반 19명을 탈출시키고 자신도 구조될 상황이었으나 도와달라는 학생의 전화를 받고 내려갔다가 54일만인 6월8일 구명조끼도 입지 않은채 3층 식당에서 발견되었던 1반 담임선생님 유니나선생님의 헌신적인 제자사랑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하신 후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고 있는 베드로를 만나 세 번씩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해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첫 번째 두 번째에 예수님이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아가파스라고 물으셨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사랑합니다를 필로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아가페는 신적 사랑이고 필로는 친구간 또는 형제간의 사랑을 말합니다. 왜 베드로는 필로라고 대답하였을 까요? 아가페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신적인 사랑입니다. 어찌 인간으로 예수님 같은 아가페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입니까? 그러나 필로사랑은 인간의 가장 깊은 마음과 정성을 다 바쳐 할 수 이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래서 철학을 영어로 필로소피아 Phildsopia라고 합니다. 철학은 인간의 최고의 사랑을 배우는 지혜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로 예수님은 아가페 사랑으로 묻지 않으시고 네가 나를 필로 사랑으로 사랑하느냐(필레이스 메)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수 기노스케이스 호티 필로 세)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성경에서 이 필로를 사랑하는 사람 간에 입마춤 Kiss를 의미하기도 합니다.(막14:44, 눅22:48)
이 최고의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내 마음에는 맞지 않고 아직 내 마음에 증오가 가시지 않고 아직 미운 감정이 정리 되지 않았고 계속해서 피해를 주고 괴롭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방법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 때 우리 삶은 사랑의 기적이 일어날 것이고 우리 가정과 교회 사회는 사랑으로 감동이 넘치는 살만한 땅이 될 것입니다. 형제에 대한 미움이 생깁니까? 그러면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해보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그러냐 그러면 네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마음에 미운 감정이 생길 때 10번이고 20번이고 50번이고 계속하여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는 기도를 반복적으로 드립니다. 그리면 어느새 저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이 가득 참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미운 형제를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형제를 사랑하기가 아주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경건은 연습입니다. 훈련이 필요합니다. 누구나 총을 잘 쏠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훌련소에 가서 총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 배움은 기압도 받아가면서 강제로 배우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의 생명을 지키고 가정을 지키고 나라를 지키는 일이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억지로라도 배워야 나도 살고 형제도 살고 가정도 살고 이 나라도 살리는 일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사랑해야 합니다. 싫어도 사랑해야 합니다. 게으름을 피우거나 차일피일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인의 삶입니다. 사랑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랑하라는 것은 우리 주님의 명령입니다. 거역 하는냐 순종하느냐 둘 중의 하나입니다. 죄와 의의 문제입니다. 형벌과 상급의 문제입니다. 실천의 문제요 의지의 문제입니다. 창조와 파괴의 문제고, 삶과 죽음의 문제이고, 희망과 절망의 문제이고, 관계의 회복과 관계의 절단의 문제입니다. 사랑하면 창조되나 사랑하지 않으면 파괴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삶이 있으나 사랑하지 않으면 죽음이 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희망과 관계회복이 있지만 사랑하지 않으면 절망과 관계의 절단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의지적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1 3: 10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 하니라”
심지어 요1 3:15에서는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요일4:16에 “사랑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그라므로 요일 4:20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 기독교인들은 불가불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는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흠이 많고 상처 많이 주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억지로라도 사랑해야 합니다. 싫어도 미워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사랑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체 받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라고 했습니다.
20세기 최고의 정신분석학 심리학자인 에릭 프롬(Erich Fromm1900~1980)은 그의 저서 '사랑의 예술'에서 사랑의 특성을 다섯 가지로 이야기했습니다.
1) "사랑은 배려와 관심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화초를 사랑하면 조석으로 물을 주고 벌레를 잡아주는 수고와 관심이 있어야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합니까? 그렇다면 자녀에게 대한 깊은 관심이 끊이지 말아야 합니다. 자식이 안색이 안 좋거든 어디가 아프냐고 …, 자식에게 근심어린 기색이 있으면 무슨 고민이라도 있느냐고 …, 엄마가 너의 고민 해결에 힘이 되어주고 싶은데 이야기 해 줄 수 있겠느냐고 …,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관심도 깊어만 가는 것입니다.
2) "사랑은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면 자식이 어떤 잘못을 했을지라도 전적으로 책임을 지려할 것입니다. 선생님이 학생을 사랑합니까? 그러면 그 학생에 대해서 전적으로 책임을 질 수 있는 선생님이라야 학생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사랑은 상대방을 존경한다"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키울 때에 남보다 예쁘고 아름답게 키우고 싶은 욕망은 당연한 것입니다. 어느 주부가 미장원에서 겪은 사실을 책자에 기록한 내용을 보았습니다. 아주 세련된 한 엄마가 5-6세쯤 되어 보이는 딸의 손을 잡고 미용실에 와서는 파마를 해 주고, 화장을 시켜 주었습니다. 어린 꼬마는 싫다면서 발을 구르며 울고 있는데 거기에다 귀까지 뚫고 귀고리를 달아 주더라는 얘기였습니다. 자식의 의견과 인격을 마구 짓밟아 가며 강아지를 물에 매어 강제로 끌고 가듯이 자식을 가꾸어 주는 것이 사랑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사랑은 인격이 존중되면서 움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4) "사랑은 이해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몸짓 하나, 얼굴 표정 하나, 손짓 하나까지 이해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실수를 범했어도 그 허물을 이해해주고 감싸주고 용서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개중에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네 실수를 이해는 하겠는데 용납은 못하겠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이해하는 것이고 이해했으면 용서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5) "사랑은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을 끔찍이도 사랑하셨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육신을 내어 주셨고,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모두 쏟아 부어 주셨으며, 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주셨습니다.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주되 모든 것을 주는 것이고 아낌없이 주는 것입니다. 주어 놓고 아까워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인터넷 코이네 2014.05.03.인용)
부부가 결혼하여 가장 오랜 산사람은 몇 년이나 같이 살 수 있을까요? 충북 청원에는 결혼하여 83년이나 같이 사신 분이 있습니다. 남편이 5섯살 아내가 아홉 살 때 약혼하여 4년 후에 결혼하여 지금 할아버지는 92살 할머니는 96살이라고 합니다. 5남 3녀를 낳았고 직계 자손만 무려 105명이 된다고 합니다. 이분들은 지금도 한약방을 하며 서로 존대말을 쓰면 지금까지 부부싸움 한 번 하지 않고 행복하게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같이 살기는 살지만 늘 불만을 가지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40년 동안을 같이 살았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늘 남편에 대하여 불만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노인정에서 야유회를 갔는데 그곳에서 스피드 큐즈가 있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가 문제를 내고 할머니가 답을 맞추게 되었는데 문제는 '천생연분'이었다고 합니다. 문제를 보고 할아버지는 '당신과 나 사이'라고 설명을 하였답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조금도 주저함 없이 '웬수'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당황스럽지만 다시 설명하였다고 합니다. '두 글자 말고 네 글자' 그 때 할머니는 무엇이라고 했겠습니까? '평생웬수'라고 했다고 합니다. 서로 살면서 평생 웬수로 사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서로 같은 교회 다니면서, 서로 같은 회사 다니면서, 서로 같은 식구로 살면서 원수로 대하는 사람들도 종종 보게 됩니다. 요즘 대통령 입후보자들의 말들을 들으면 마치 평생 원수들 같습니다. 사사건건 상대를 헐뜯고 비난합니다. 서로을 죽이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움질들을 합니다. 그걸 보는 국민들도 마음들이 오염되어졌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마음들이 없습니다. 심지어 교단 총회나 어느 모임에 가서 보면 사랑을 가장 강조하는 목사들끼리 평생원수도 아니면서 서로 비난을 하는 것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결정짓는데 있어서 유일한 표증은 사랑이다. 사랑만이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구별한다"고 했습니다.
페스탈로치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이 가까이 오신다."고 말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어디서도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은 우리 품안에 깃들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기독교 철학자로 라브리 운동을 하신 프란시스 쉐이퍼 박사는 사랑을 가르쳐 그리스도의 '제자의 뱃지'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독일의 시인 괴테가 그의 친구인 슈타인 여사에게 보낸 글을 보면 "우리들은 어디로부터 태어났을까? - 사랑으로부터, 우리들은 어떻게 되어 멸망할까? - 사랑이 없기 때문에, 우리들은 무엇으로 자기를 이길까? - 사랑에 의하여, 우리들도 사랑을 찾아낼 수 있을까? - 사랑에 의하여, 오랫동안 울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 사랑 때문에, 우리들을 항상 연결하는 것은 무엇인가? - 사랑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롬 8:12에 우리는 “우리가 빚진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의 빚진자 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의 빚을 갚아여 합니다. 모든 국민은 국방의 의무를 가집니다. 모든 기독교인은 사랑의 의무를 가져야 합니다. 사랑의 의무는 천국국방의 의무입니다. 사랑의 의무를 지킬 때 마귀로부터 자기를 지키고 형제를 지키고 가정을 지키고 나라를 지키고 천국을 지킵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공생애 마지막 한 주간 고난 받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종려주일입니다. 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십니까? 우리를 구원하시어 하나님의 자녀 되어 예수님과 형제 삼기 위해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금주간 우리는 그처럼 피 값을 치루시며 사랑하신 예수님의 형제로 경건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더욱 모든 이웃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이니 사랑하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내일 5월 10일 형제자매의 날에 멀리 가까이 사는 형제자매에게 전화라도 하면서 동기연지의 사랑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의미로 저는 4월 24일 형님과 두 여동생을 군산으로 초정하여 함께 형제자매의 정을 나누고자 계획하고 있습니다.
우리 라온 코이노니아는 바로 동기연지의 신앙 그리스도의 사랑에 이어진 가지된 형제자매입니다. 여러분, 주안에서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우리 코이노니아 형제자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만 가지 은혜와 사랑과 축복이 늘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