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5일 부활주일 아침예배 고전 15:12-22 라온코이노니아의 나비
칼 바르트(Karl Barth)는 "부활절과 성탄절 설교는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 왜냐하면 그것은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부활절 설교는 짧게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구차하게 증명하려고 하지도 말고 그것을 힘써 변증하려고도 말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믿고 살라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게 살고 믿음 있는 사람은 믿음 있게 삽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오히려 길어질 것 같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는 중에 제 가슴을 아프게 한 두 사건 일제시대 위안부 피해 사건과 세월호 사건으로, 이 두 사건을 오늘의 말씀에 담아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부활의 소망을 나누고 싶어 말씀이 길어질 것 같으니 미리 그러려니 생각하시고 말씀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이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잘못 믿는 것이고, 우리가 잘못 사는 것이고,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불상한 사람이며, 처량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도 지은 죄 용서 받지 못하고, 예수님 부활 없다면 우리도 결코 죽은 다음에 부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지난 2000년동안 세계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찬양하였습니다.
오늘의 설교제목은 라온 코이노니아의 나비입니다. 부활절과 나비와 무슨 관게가 있습니까. 이제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잘아는 나비야 동요가 있지요. 국민 동요라고 말 할 만합니다. 어린아이 마음으로 함께 불러 볼까요?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오너라 호랑나비 흰나비 춤을 추며 오너라
봄바람에 꽃잎도 방긋방긋 웃으며 참새도 짹 짹 짹 노래하며 춤춘다 “
초등학교에서 처음 이 노래를 배울 때 선생님이 먼저 계명부터 알려 주셨습니다.
“솔미미 파레레 도레미파 솔솔솔 솔미미미 파레레 도미솔솔 미미미
레레레레 레미파 미미미미 미파솔 솔미미 파레레 도미솔솔 미미미~“
독일 동요로 우리나라에서 너무나 잘 부르는 동요들이 많습니다. “어여쁜 장미”, “들장미”, “노래는 즐겁다”,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부엉 부엉새가 우는 밤..." 동무들아 오너라..." "나는 숲 속의 음악가..." "이 몸이 새라면 이 몸이 새라면..." "깊은 산 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그런데 "나비야 나비야..." 이 동요도 본래 독일의 동요입니다. 나비야라는 가사와는 달리 '꼬마 한스'(Hanschen klein) 또는 '5월엔 모든 것이 새롭다'(Alles neu macht der Mai)로 알려져 있습니다. '꼬마 한스'는 프란츠 비데만(1821~1882)이 작사한 노래로 주인공 꼬마 한스가 엄마 몰래 혼자 먼 곳으로 떠나 7년 후 몰라보게 커서 돌아와 어머니와 형제들과 다시 만난다는 내용입니다.
'5월엔 모든 것이 새롭구나/몸과 마음이 신선하고 자유로워라
집을 나와 숲을 뛰어 다니고/광장에는 햇볕이 따사롭다/초원과 숲의 향기가 진동한다…'
이스라엘에서는 '꼬마 요나단'이란 동요로 불렀습니다.
יונתן הקטן [요나탄 하카탄]
יונתן הקטן [요나탄 하카탄] 꼬마 요나단이
רץ בבוקר אל הגן [라쯔 바보케르 엘하간] 아침에 공원으로 달려갔어요
הוא טיפס על העץ [후 티페스 알 하에쯔] 나무 위에 올라가서
אפרוחים חיפש [에프로힘 히페스] 병아리들을 찾았습니다
אוי ואוי לו לשובב [오이 바보이 로 라쇼바브] 개구장이 요나단에게 큰 일 났어요
חור גדול במכנסיו [호르 가돌 베미크나싸브] 바지에 큰 구멍이 났네요
מן העץ התגלגל [민 하에쯔 히트갈겔] 나무에서 굴러떨어져
ועונשו קיבל [베온쇼 키벨] 벌을 받았어요
이 노래가 프랑스 스페인 세계 각국 어린이들이 부르는 세계적인 동요가 되었습니다. 이 동요가 ‘나비야’로 부르게 된 것은 미국에서부터입니다.
Butterfly Butterfly / come and fly on over here / Yellow and white butterfly
come and dance on over here / flowers opening and smiling on the spring
breeze of air sparrows chirp chirp chirp singing and dancing, too.
이‘버터프라이’가 일본으로 전해져 1881년부터 “나비야 초초 초초 蝶々 (チョウチョウ)”으로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쵸오-쵸오-,쵸오-쵸오- 나비야 나비야
나노하니 토마레 유채꽃잎에 내려 앉아라
나노하니 아이타라 유채꽃잎이 지겨우면
사쿠라니 토마레 사쿠라노 하나노 벚꽃에 내려 앉아 벚나무 꽃의
하나카라 하나에 꽃에서 꽃에 꽃에서 꽃에
토마레요 아서베 내려앉아서 놀아라
아소베요 토마레 놀다가 멈추어라
우리나라에서 처음 1915년 안애리(安愛利)씨가 펴낸 '창가집'에 교회 주일학교 노래인 '상학(上學)시간 되거든'으로 불려졌습니다.
학도야 학도야 역사 지리 산술책
모두 다 가지고 어서 빨리와
상학시간 되기 전 미리와서 기다려
종소리 나거든 정신 차리세
(중국에선 작은 배를 뜻하는 '샤오샤오촨小小船)
그후 영어 가사를 번역하여 지금 우리가 부르는 “나비야 나비야”로 불려 졌습니다.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 장자(莊子,BC 365 - 293?)의 호접몽(胡蝶夢) 이라는 이야기가 유명합니다. 어느 날 장주(莊周)는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습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즐거울 뿐, 자기가 장주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얼마 후 문득 꿈에서 깨어보니, 자신은 틀림없는 장주였습니다. 그러니 장주가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아니면 그 나비가 꿈을 꾸면서 장주가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현실과 꿈이 구별되지 않는다는 이 말은 인생의 덫 없음을 말할 때 자주 인용되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시조가 있습니다.
일 평생 즐긴 허무한 세월 平生最是戀風光 평생최시연풍광
오늘 꽃 보니 미치도록 좋지만 今日花前風欲狂 금일화전풍욕광
원컨대 차라리 莊子 胡蝶夢의 나비되어 願此漆園胡蝶夢 원차칠원호접몽
꽃가지, 꽃잎 따라서 나비되어 날아 볼꼬 繞枝攀蘂恣飛揚 요지반예자비양
노년의 다산 정약용도 만물이 늙어가는 사정을 헤아리며 “그윽한 근심이 한 바탕 꿈이 되어 나비로 가볍게 날개짓한다”고 하였습니다. ‘한바탕 꿈’이라는 말에서 장자의 호접몽을 연상하게 됩니다.
나비는 인생의 덧없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또 훨훨 창공을 날아다니는 자유로움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조선 영조대왕 시절에 살던 김천택이 1728년(영조4년)에 편찬한 시조집 청구영언에 있는 작자 미상의 시조입니다.
나비야 청산 가자 범나비 너도 가자 / 가다가 저물거든 꽃에 들어 자고 가자
꽃에서 푸대접하거든 잎에서나 자고 가자.
白蝴蝶汝靑山去 黑蝶團飛共入山 / 백호접여청산거 흑접단비공입산
行行日暮花堪宿 花薄情時葉宿還 / 행행일모화감숙 화박정시엽숙환
한편 한문으로 나비 접(蝶)자는 80세를 뜻하는 질(耋)과 중국식 한자음(die)이 같기 때문에 80세 또는 장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여러 가지 상징 의미를 가진 나비를 미술품이나 민속품 등에 폭넓게 적용하였으며 그 쓰임새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혼수품이나 베갯모, 매듭 그리고 함이나 가구 등에 쓰인 나비 장식은 부부의 금슬이 좋기를 의미합니다. 우리나라 옛 그림가운데 고양이와 함께 그려지는 나비는 70세를 맞는 기쁨을 누리기를 기원하는 것으로 장수의 의미를 가지며(김홍도의 황묘농접 그림이 유명합니다. 고양이와 함께 그려지는 나비耄耋圖모질도:고양이 묘(猫)와 나비 접(蝶)의 묘접(猫蝶)의 중국음 '마오[mao]디에[die]'가 모질(??)과 같아, 이런 의미 부여가 이루어졌다.)국화와 함께 그린 나비그림은 80세가 될 만큼 장수하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모란과 나비는 부귀영화의 기쁨을 기원하는 것이며, 줄기와 뿌리가 끊임없이 뻗어 나가면서 마디마다 꽃과 열매가 맺히는 참외나 호박, 땅콩 같은 덩굴식물과 나비는 자손 번성의 기쁨 또는 장수의 기쁨을 의미하고, 연꽃과 나비 또한 자손 번성의 기쁨을 기원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변상벽의 모질도} (김홍도의 모질도)
그러면 기독교에서는 나비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합니다. 흔히 부활절의 상징으로 계란이 병아리로 부화되는 이야기를 말 하고 있습니다만 실은 이런 이야기는 약 150년 전 미국 남북전쟁 때 생겨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의 상징으로 나비를 말하는 것은 초대 교회 때부터 전래 된 이야기입니다. 추하고 생명도 없어 보이는 번데기를 뚫고 아름다운 나비로 탈바꿈하여 나옵니다. 이 때문에 초대 기독교인들은 나비를 부활의 상징과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새 생명을 얻는 부활의 상징으로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나비효과’라는 말이 있습니다(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노턴 로렌즈가 1972년에 미국 과학부흥협회에서 실시한 강연의 제목인 '예측가능성-브라질에서의 한 나비의 날갯짓이 텍사스에 돌풍을 일으킬 수도 있는가 Does the Flap of a Butterfly's Wings in Brazil Set Off a Tornado in Texas?'에서 유래한다).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단순한 날갯짓이 미세한 기류의 변화를 일으켜 몇 주 후면 미극 땅을 휩쓰는 토네이도 폭풍우가 된다는 가설입니다. ‘설마 그럴 리가 있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 말은 시작은 미역하나 나중에는 창대하리라는 말씀과 같은 의미로 많이 비유하여 사용하는 말입니다.
중국에 이런 우화가 있다고 합니다. 한 대장장이가 실수로 못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순간 전쟁이 일어났고 대장장이는 결국 못 하나가 빠진 말굽을 기마병의 전투 말에 박았습니다. 출정에 나선 기마병은 쇠 말굽이 없어 전투 말이 상처를 입는 바람에 바로 낙마하고 말았습니다. 이 기마병의 갑작스런 부상 때문에 전략에 공백이 생기면서 전세가 한순간에 기울어져 걷잡을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제국 전체가 멸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같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아주 작은 일로 작은 변화가 일어 났을 뿐인데 얼마 시간이 지나니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들이 합해져서 크고 복잡한 일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나비효과’는 성경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전에는 무엇이었습니까? 시편 22: 6절에서 시인은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욥 25:6절에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같은 인생이랴”라고 하였습니다. 비유컨대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벌레같은 존재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5:18 말씀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삶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오늘 봉독한 고전 15:22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예수 한 사람의 죽음이 이 땅에 구원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가 구원하심을 신뢰하며,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그래서 자신의 삶을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가져가는 사람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2천 년이 지난 오늘날 전엔 벌레 같았던 죄인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 전 세계 25억의 사람들이 그 십자가의 구원의 은총을 받고 부활의 소망을 가진 나비들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예수의 삶이 ‘나비 효과’를 증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벌레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소나무에 있는 송충이는 정말 징그럽습니다. 옛날 학생 때 학교에서 단체로 송충이 잡으로 가던 때가 생각납니다. 나무젓가락으로 한 마리씩 잡으니 한 깡통이 되었습니다. 아름답게 너울너울 날아다니면서, 꿀을 먹는 신선 같은 나비가 징그러운 애벌레 출신입니다. 죽은 것 같은 번데기가 된 후에 허물을 벗어버리고는, 이전에 상상할 수 없던 창공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다니 얼마나 신기합니까?. 나비는 벌레가 거듭난 것입니다. 벌레같은 우리 인생도 십자가를 통과하여야 나비로 부활하는 것과 같습니다. 십자가 밑에서 나의 죄와 악의 허물이 벗겨져야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을 통해 살아나 마침내 이제는 벌레 인생이 아니라 나비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시인 도종환의 ‘나비’라는 짤막한 시가 있습니다.
누가 너를 용서하지 않을 수 있으랴
네가 생각하기조차 싫은 끔찍한 모습의 벌레로 살았다 할지라도
온몸에 독기를 가시처럼 품고 음습한 곳을 떠돌았을지라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너의 고통스러운 변신을 기뻐하는 것이다
네가 지금은 한 마리 작은 나비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전에는 우리는 벌레같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벌레로 살 것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으면 탈피하리니 새 생명의 날개를 펴 하나님의 아름다음 창조의 세게를 날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나비가 된 줄 알았는데 나방이가 되기도 합니다. 나비와 나방이는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어떻게 구분이 됩니까? 예외적인 것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나비의 더듬이는 가늘고 길며 끝이 뭉툭한 반면, 나방은 수컷은 두껍고 털이 많으며, 암컷은 가늘고 길며 끝이 뭉툭하지 않습니다. 많은 나방이 야행성이지만 나비는 주행성입니다. 애벌레에서 번데기로 변태할 때, 나방은 번데기 둘레를 둥근 고치로 보호하는 반면, 나비는 딱딱한 번데기 껍질을 이용합니다. 대부분의 나비는 밝고 화려한 색의 날개를 가지고 있다. 야행성인 나방은 갈색 회색 흰색 검은색 등의 단색이거나 여기에 지그재그나 소용돌이 등의 위장 무늬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방은 앉을 때 날개를 펼치고, 나비는 날개를 접고 앉습니다. 나방은 앞날개와 뒷날개가 연결되어 있는 반면, 나비는 나뉘어 있습니다. 이처럼 나비와 나방가 다른 것처럼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닌다는 사람들 가운데도 진실한 성도가 있는 반면에 그러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진실로 예배드리는 나비 같은 성도가 있는 반면에 구경꾼으로 앉아 있는 나방이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십자가지고 주님을 따라 부활의 아침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성도가 있는 반면에 애당초 심자가 질 생각은 안하고 멀찍이 따르다가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나비 입니까 나방이 입니까?
나비는 부활을 새 생명을 자유로운 삶을 찾아 너울너울 날개 짓을 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고 그 부활의 아침의 햇살을 받아 나비처럼 날아 사는 우리들의 삶은 이제 새로운 생명의 날개 짓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비가 나는 곳에 자유가 있고 소망이 있고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서울 종로구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의 뒤편 그림자에 부활을 뜻하는 나비 한 마리가 새겨져 있습니다. ‘살갗을 찌르며 살을 저미는’ 아픈 세월을 이겨내고 자유롭게 비상하는 나비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상징입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한 분이 절규하였습니다. “일본이 내 삶을 파괴했다. 어떻게 일본이 감히 이 문제를 피할 수 있는가? 나는 살아 있는 한 내가 겪은 것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아니 내가 죽은 이후에도 일어난 모든 일을 잊지 않을 것이다.” 할머니들의 한(恨)이 깊고도 깊습니다. 2014년 5월 30일 미국 워싱턴DC 인근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카운티 정부청사에서 위안부 기림비 제막식이 열렸다. 가림비 주변에 장미가 심어졌고 가림비를 마주보고 양쪽으로 날아가는 뜻한 나비모양의 벤치가 놓여 있습니다. 건립위원회는 ‘나비’가 위안부 할머니의 상징이고 평화와 보편적 이미지를 강조한다는 뜻에서 소녕상보다는 나비모양의 의자를 설치하였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제막식에서 위안부 피해자 강일출(86) 할머니가 20여 마리가 나는 나비들과 함께 너울너울 나비춤을 추었습니다.
2014년 5월 30일(한국시각) 미국 워싱턴DC 인근인 버지니아주 페어펙스카운티 정부 청사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기림비 평화가든’에서 군위안부 피해자 강일출(86, 왼쪽 두번째) 할머니가 나비춤을 추고있다.(사진출처:뉴시스)
세계 곳곳에 세워지고 있는 소녀상 주변에 환생과 평화를 상징하는 나비가 날고 있는 한 일본 수상 아베가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세계 역사상 전례 없는 ‘오욕의 위안부 역사’를 결코 지울 수 없을 것입니다
고 심달연(1927-2010) 할머니를 소개하려 합니다. 심 할머니는 열세 살 무렵에 일본군에 끌려가 대만 일본군 위안소에서 온각 성적폭행과 그 정신적 충격으로 평생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습니다. 딘 2005년부터 2010년까지 원예 심리 치료를 받으며 정상적인 활동을 하게 되었고 플로리스트(꽃 장식가)가 되어 고양시세계 압화공예대전에서 두차례나 특병상을 수상하였습니다. 네 번에 걸친 전시회와 작품집‘할매, 사랑에 빠지다 1,2’를 출간하여 사람들에게 호평을 받았습니다. 심 할머니는 육체적 정신적인 아픔을 겼었지만 그 상처에지지 않고 당당히 예술가로서의 삶을 나비처럼 훨훨 날았습니다. 심 할머니와 위안부 할머니들을 돕는 나비들이 있습니다 바로 마리몬드라는 브랜드로 사회적 기업(대표 윤홍조)을 하는 일단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할머니들이 남긴 작품을 이용해서 의류와 가방 그리고 엑세서리를 만들어 판매하여 그 수익금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을 돕고 있습니다. 이들을 소개하는 것은 바로 마리몬드라는 이름을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마리몬드(Marymond)라는 말은 마리포사(Mariposa)와 아몬드(Almond)를 합친 조어(造語neologism)입니다. 마리포사라는 말은 라틴어 또는 스페인어로 ‘나비’라는 의미이고 아몬드는 아몬드 나무 꽃을 의미합니다. 아몬드 꽃의 꽃말은 새 생명, 회복 즉 부활을 의미합니다. 아몬드 꽃은 이스라엘에서 겨울이 지나 가장 일찍 피는 꽃입니다(히브리어로 솨케드). 우리 성경에 열 번 언급되어 있는데 살구나무라고 번역하였고 감 복숭아, 파단행으로도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나 잘못 번역한 것입니다. 구지 번역한다면 중국에서 편도나무라고 번역한대로 할 것입니다. 천주교 성경에서는 편도나무라고 번역했습니다. 아몬드나무는 성경에서 특히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나무라고 하겠습니다. 아론의 지팡이가 아몬드나무입니다. 그 나무에서 잎과 꽃이 피었습니다. 성막의 등잔대가 아몬드나무로 되어 있습니다. 아몬드 잎사귀와 아몬드 꼭으로 아로새겨져 있습니다.(출37:19) 이처럼 마리몬드는 나비와 부활을 의미하는 두 낱말이 합쳐져 외롭고 슬픈 인생을 가슴아프게 살아온 할머니들에게 다시 소망과 기쁨을 안겨드리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리몬드는 모든 사람을 꽃처럼 아름답고 소중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꽃 중에는 못다 핀 꽃이 있지요. 상처받고 존엄성을 잃어버려 활짝 피어나지 못한 사람들처럼, 그런 못다 핀 꽃에 나비가 찾아와 다시 피어나도록 도와주고, 다시 피어난 꽃은 또 다른 나비가 되어 미처 피어나지 못한 또 다른 상처받은 사람을 회복시키러 찾아갑니다.
위안부 피해자 고 김순덕(1921~2004)할머니가 그린 작품 중에 못다 핀 꽃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지난해 카토릭 로마 교황 방한의 대미를 장식할 18일 명동대성당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군자(89)·강일출(87)·이용수(87) 할머니 등이 맨 앞줄에 앉아 있었습니다. 교황은 피해 할머니들을 직접 만났습니다. 이 자리에서 할머니들은 김순덕 할머니의 그림 ‘못다 핀 꽃’(위 사진) 사본(가로 50㎝, 세로 80㎝)을 선물하였습니다. 김 할머니가 1995년에 그린 이 작품은 한국뿐 아니라 일본·미국·캐나다 등에 널리 소개되어 위안부 문제를 이슈화한 상징물이기도 합니다. 꽃봉오리 앞에 슬픈 표정으로 선 그림 속 소녀는 열여섯 살 때의 김 할머니 자신입니다. 김군자 할머니는 교황에게 “그림을 바티칸 집무실에 걸어 달라”고 부탁하기도 하였습니다. 소녀 시절 영혼을 유린당한 ‘못다 핀 꽃’ 한 송이가 수 십년 만에 바티칸에서 꽃망울을 터뜨리게 될 것 같습니다.
부활하시 주님은 누구를 가장 먼저 만셨습니까? 슬픔속에 눈이 퉁퉁 부은 마리아를 마나셨습니다. 부활의 나비가 누구에게 먼저 찾아 갈 것입니까? 우리 주변에 못다 핀 영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기쁨을 주고 삶의 용기를 주고 부활 생명을 나누어 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일년 전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서 있었던 세월호 침몰사건을 기억합니다. 수확여행으로 들 뜬 마음으로 밤을 새다싶이 하였던 어린 단원고 학생들 그 아침에 그들에게 무슨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무책임한 어른들로 인하여 못다 핀 꽃 봉오리가 하나 둘 바다에 떨어졌습니다. 누가 못다 핀 그들의 꽃망울을 피워 줄 것입니까? 대통령이 해수부장관이 국회의원들이 종교인들이 그 누구도 그들의 슬픈 눈을 감겨 줄 수 없습니다.
김기림이란 시인이 ‘바다와 나비’라는 시를 썼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아!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어”뜬 눈으로 잠들었던 그들이 나비가 되어 훨훨 하늘을 날아가리라. 알몬드 꽃에 앉아 그 짧은 인생은 아마도 꿈이 였을거야. 호접몽이라도 좋으니 슬픈 배신의 인간사는 다 잊어버리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는 지난 금요일 팽목항에서 유가족들과 함께 고난일 예배를 드리며 그들의 아픔을 한국교회가 함께 짊어지는 십자가로 공유하며 부활의 소망을 함께 기원하였습니다. 그 어린 학생들의 희생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오버랩overlap 되고 오늘 부활의 아침 그들이 나비되어 우리에게 날아와 여기에 앉았습니다.
전 세계에서 존경받는 여배우인 고 오드리 헵번의 아들 숀 페러(56·Sean Hepburn Ferrer)가 세월호 기억의 추모 숲 조성 사업을 시작할 전망입니다. 세월호 추모 숲 프로젝트 관계자는 “오드리 헵번의 첫째 아들 숀 페러가 오는 10일부터 세월호 추모 숲 조성 착공에 들어 간다”고 전하였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아무도 그 누구도 이제는 잊어버린 과거로 묻어버리려 하는 지금 벽안의 사람이 나비처럼 날아와 팽목항에 앉은 것입니다. 그 곳에 추모의 숲을 만들다니 나비의 보금자리가 될 것이라 생각하니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라온 코이노니아 부활의 성도 우리는 언제까지 나의 벌레 같은 인생으로 살아 갈 것입니까?
김흥국씨가 평생 단 한곡으로 인기가수 생활을 하였죠. 무슨 노래입니까? 호랑나비입니다.
“호랑나비야 날아봐 하늘높이 날아봐, 호랑나비야 날아봐 구름위로 숨어봐 ” 우리 기독교인들은 나비같이 부활의 기쁨을 가지고 하늘 높이 하나님 나라에 이르 때 까지 훨훨 날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결코 고난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결코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영광스러운 부활에 이르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지만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장차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주님 오실 그 날까지 라온 코이노니아 성도는 부활의 나비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즐거운 라온 인생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 이전글 - 2015년 4월12익 주일아침예배 행 11:22-26 라온 코이노니아의 가치
- 다음글 - 2015년 3월 29일 주일아침예배 성교 고전 1:18-24 라온코이노니아의 십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