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영과 진리



영적 기독교론 계속 5

전병호 by  조회 수:40 2015.01.18 15:52

영적 기독교 재고

 

1

첫째로 나는 영과 진리라는 말로써 모든 기독교 주장의 원리적 척도라고 할 것을 세우고자 한 것이다. 모든 기독교 주장에는 거기에 영과 진리로써 자()일 수 있는 것이 그 밑에 깔려 있다. 영이라 하여 나는 초연한 하나님을 우선 의미한다. 초연하다 함은 그가 사람과는 아주 타자인 자, 사람의 일체 생각에서 아주 뛰어나 있는 자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초연하다 하여 온전히 사람의 생각 밖에만 계시다면 그는 사람과 온전히 관계없는 이, 그런 하나님은 우리가 기억할 수도 없는 이일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초연한 하나님이면서도 또한 사람 안에 들어와 사람에게 이해되며, 사람의 말로써 표현되려고 하는 하나님이다. 내가 하나님을 영이라 함은 이 사람에게 접근하시는, 그러나 사람과는 타자인 초연한 하나님을 의미한다. 즉 사람에게 해석 되고자 하는 하나님을 말하여 나는 영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하나님 해석을 말하여 나는 진리라고 한다. 진리는 사람에게 이해 표현된 하나님이다. 그것은 다만 사람의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 한 하나님이 사람의 말로써 해석된 것이다. 그러니 기독교 진리 주장에는 거기에 신적인 것이 있다. 종교가 있다.

이렇게 영이신 하나님은 진리로서 사람에게서 언표 되는 것인데, 사람의 하나님 이해는 그것이 사람의 도덕적, 종교적 상태를 그 재료로 하고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 지식은 그것이 사람의 종교적 고통에 있어서의 문제 해결로 사람에게 파악되는 것이다. 자기가 무엇이며, 자기가 행할 길이 무엇임이 알려짐에서 하나님은 이해되는 것이다. 자기의 죄를 깨달아 회개하며, 사면을 경험한 것이 곧 하나님 지식이요, 진리이다. 그래서 하나님 지식은 곧 사람의 종교적 경험이다. 그래서 사람의 종교적 경험에 있어서 거기에 사람의 참 모양이 인식되며, 거기에 하나님의 실재적인 말씀이 나타나나니, 그것은 곧 진리이다. 사물의 진상이다. 하나님 지식은 그것이 이런 경험적인, 확신인 진리이니, 그것은 무당이 귀신의 말을 받듯이 말씀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기독교 경험의 기초를 이렇게 말하는 것은 기독교를 현대의 비판적 학문으로 인한 손해에서 보전하고, 그것을 어떤 한 번 짜놓은 형태와 교리에서 해방시켜서 그것이 사람 안에 현재적으로, 경험적으로 실현되는 산, 권능의 종교가 되게 하고자 함이다. 우리는 권위를 붙인 어떤 교리에 복종함으로써 신자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상태를 재료로 하고, 거기에 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한 신자이다. 기독교는 그것이 금일의 우리가 경험한 종교이다. 그것은 금일의 우리가 확신한 진리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경험으로써 가장 적절히 하나님을 이해한 대로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였으며, 또한 해결할 대로 받은 영을 진리로써 언어로 표현하여 기독교를 주장하여서 가한 것이다. 기독교가 그 시대를 정복할 사명을 다 함에는 그것은 그 시대 사람의 확신의 표현이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래서 우리가 과거의 형식에 의하여 기독교를 생각하지 않는 일은 용납되는 일이다. 우리는 영과 진리의 특징을 가지고 우리 안에 있게 된 기독교 경험을 현재적 의식으로 표현 주장하여서 가한 것이다. 다만 전통적인 것에 편드는 열심만으로는 안 된다. 우리는 .현대인으로 현대를 압도하는 높은, 깊은 인식으로 그리스도를 알며, 하나님을 알아 산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내어보낼 것이다.

 

2

다음으로 나는 그리스도관을 생각한다. 요한복음은 엄밀한 의미의 역사가 아니고, 그 저작 당시(1세기 말)의 그리스도관으로써 그의 역사를 회고한 글이라 함이 금일의 요한복음 연구자들의 거의 일치된 의견이다. 신약성경 중에도 거기에 시대의 변이가 있어 다른 시대의 사람에게서는 다른 사상 양식으로서 그리스도가 생각된 것이다. 바울은 원시 교회보다는 우주적인 그리스도를 생각하였으며, 요한복음 저자는 바울보다는 더 형이상학적 범주에서 그리스도를 생각하였다. 이는 그리스도가 다만 역사상의 인물이 아니고, 그가 현재 살아 계셔서 그 활동을 신자의 심령 위에 휘두르시는 이임에 인한 것이다. 한 시대 사람은 다른 시대 사람의 그리스도관으로 족할 수 없고, 그들은 각각 그들 구원의 경험으로써 그리스도를 다시 생각하여 그들 확신인 그리스도관을 그 시대에 주장하여서 가한 그것이 신약 시대에 있어서 그러하였음과 같다. 그래서 우리는 또한 우리 사고 능력이 닿는 데까지 그리스도를 더 높이, 더 깊이 생각하여 보지 않으면 아니 된다.

 

우리의 그리스도관의 기조가 되는 것은 그는 그 일을 함으로써 우리와 구원을 이룬 이이기보다, 그는 그가 그렇게 있음으로써 우리의 구원이 됨이라는 것이다. 사역은 인격의 활동이어서 사역과 인격은 불가분의 것인데 우리는 사역과 인격을 오히려 나누어서 생각함을 요하고, 사역의 가장 깊은 의미는 그것이 그 인격의 완성에 귀결됨에 있으며, 가장 의미 깊은 사역은 인격 그 자체를 세상에 존재하게 함에 있는 것이다. 사역이 만일 사역 그 자체만이 세상에 성립하는 사역이면 이는 도덕적 가치가 결핍된 사역이다. 사역은 그 일이 세상에 성립하는 동시에 그것은 또한 그것이 나온 인격에 선을 귀결하는 것이 아니면 아니 된다. 그래서 사역을 통하여 제일 가치 있게 되는 것은 선한 인격 그것이다. 그리하여 선한 인격을 존재하게 함, 이것이 세상을 위한 최선의 사역이다. 그래서 사역과 인격과의 관계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그리스도관의 척도이다.

보통 사람은 사역에만 착안할 줄 알고, 사역과 인격과의 관계를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속죄적 사역만을 보고, 그리스도 자신의 인격을 잘 보지 못한다. 물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과 인류의 도덕성이 요구하는 대로 속죄 사역을 부담하신 자이시다. 그는 인류의 죄를 속하여 그들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일을 그 사역으로 하신 자이었다. 그런데 사역이면 사람의 전부인가? 그렇게 보는 것이 일반의 생각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아니하여 사역은 사람의 외면에 지나지 않고, 사람에게는 더 중요한 내면이 있는 것이다. 일반의 생각은 그리스도의 외면을 보고 있을뿐이요, 그 내면을 잊고 있다. 그리스도는 속죄 사역을 하셨다. 그리하여 그 피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과 화목 되었다. 이는 실로 거룩한 사역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일이 있다. 즉 예수가 자기의 뜻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십자가를 짐으로써 된 그리스도 자신의 인격의 완성이다. 여기에 물론 우리는 그가 하나님인 채로 머물러 있지 않고, 아주 사람이 된 그리스도를 예상한다.

복음서는 여기저기 그가 사람인 이로 발달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말씀이 육이 되었다는 일, 광야의 시험을 받음, 겟세마네의 고뇌 등등. 그래서 그가 사람으로 발달하는 자기를 표현하는 칭호가 인자라는 부름이었다. 그래서 예수가 자기를 부정하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져서 속죄 사업을 이루므로 우선 제일의적(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으로 그 자신에게 된 일은 그의 인자로서의 인격의 완성이다. 그래서 그의 전 생애는 이 십자가로써 완성되는 인격의 과정이었다.

사람을 위하여 병을 고치며, 사람에게 하늘나라를 말씀하는 일은 그의 일이었으나, 이 일을 표면으로 하고, 그 내면에는 언제든지 자기를 부정하고, 아버지의 뜻을 찾아 복종하는 자기 자신을 위한 생활이 있었다. 그래서 이 생활을 바울의 어구대로 표현하면 그것은 육을 따라가 아니고 영을 따라 걷는 περιπατεν οκατά σάρκα λλά κατά πνεμα -페리파테인 우 카타사르카 알라 카타 프뉴마- 생활이다. 로고스가 육이 되어 그는 역시 영인 하나님께 대조되어 부정되지 않으면 아니 될 육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예수의 성공은 그가 하나님께 부탁받은 사역을 이룸에 있기보다 먼저, 그가 그 육을 완전히 부정하고, 영으로 살아 영된 자가 된 데에 있다. 그래서 예수의 일이 우리를 구원하는 일인 동시에 그가 존재한 인격이 또한 우리의 구원이 되는 것이다. 종래의 사람들은 예수의 사역으로의 구원을 잘 아나, 예수의 인격으로의 구원을 잘 모르는 것 같다. 바울의 주장의 강조가 예수의 속죄 사역에 있은 것은 의심이 없으나, 그러나 그에게는 더 깊은 경험이 또한 있었다. 즉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가 그의 안에 있다는 확신이다. 이 경험의 대상이 되는 그리스도는 다만 속죄 사역을 하는 주가 아니라, 그가 사람 안에 내주함으로써 사람에게서 육을 따라가 아니고, 영을 따라 걷는 생활이 산출되는 나의 소위 영인 그리스도이다. 육을 따라가 아니고, 영을 따라 사는 것을 완성한 자가 영으로 우리 안에 계심으로써만 우리에게는 육으로 죽고, 영으로 사는 것을 행하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영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육에 ν σαρκί -엔 사르키- 있지 않고, 영에 ν πνεύματ -엔 프뉴마티- 있음으로써 구원 얻은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영에 있는 일이 육을 따라가 아니고 영을 따라 사는 도덕적인, 진리적인 생활을 예상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그리스도를 다만 속죄의 주로 하여서는 그는 우리의 전 신앙 경험의 구주로 다 말 되지 못하였으며, 또한 그는 우리의 하루하루의 신앙생활의 원리로 충분히 알려지지 못한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에서 구속되었으니,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감사한 생활을 하면 된다고만 하여서는, 거기에 그리스도가 충분히 우리의 생활상의 양식으로 알려 있지 않은 것이다. 그리스도는 육이 되어 육을 부정하고, 영이 되신, 그리하여 육인 우리의 신앙 대상이 되어주신 영이다. 그리스도를 이렇게 알아서 그는 육으로 아니고, 영으로 사는 신앙생활을 한다. 그리스도는 육을 부정하고 영이 되어서, 그 살을 우리에게 먹이며 그 피를 우리에게 마시게 하기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자이시다. 현대적 분위기 중에서 부흥되는 복음주의 기독교가 객관적 확실성을 논조로 하여 십자가의 속죄를 고창함을 보아, 우리는 겨우 그것이냐?”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속죄적 기독교로써 다 말 되지 못한 기독교를 말하는 것이 우리의 영적 기독교임이다.

 

3

우리는 이상에서 그리스도관을 생각하면서 신앙 생활관에도 접촉하는 바 있었다. 거기에 이미 신앙생활의 원칙이라고 할 것이 보여 있으나, 우리는 이에 그것에 대한 좀 더 자세한 고찰을 하여 보지 않으면 아니 된다. 생활에 대한 보통 개념은 그것이 사회적 행위를 의미하는 것인 듯하다. 그래서 생활은 주로 보이는 행위 문제이다. 사람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생각도 그것은 주로 신자의 행위 문제인 듯하다. 그러나 나의 말하는 신앙생활은 그 주안을 두는 데가 다르다. 신앙생활이라 하여 나는 주로 신앙 그 자체의 생활, 말을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영적 생명 그 자체의 생활을 뜻한다. 즉 그것은 수평적 관계이기보다도 주로 수직적 관계이다. 그것은 주로 주관 세계의 일이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아는 생활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알아 나아가는 생활이다. 일찍이 요한은 말하였다. 홀로 하나이신 참 하나님을 알며, 그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앎, 이것이 곧 영원한 생명이라고. 그리스도를 아는 일이 영원한 생명이고, 영원한 생활의 장성은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이다. 그리스도 지식의 증가, 그것이 영원한 생명의 자람이다. 신앙생활의 세계가 이런 세계이므로 나는 그것을 주관적 세계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이 이를 들으면 그것은 신비주의라고 하리라. 우리는 기독교로써 하나님을 향하여 자라고자 하고, 하나님이 신비적인 이이므로 우리의 종교가 신비주의라면 이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비주의가 보통으로 신비주의가 뜻하는 것, 그것은 주관적이요, 主感主義(주감주의), 凡神的(범신적) 임을 뜻한다면, 우리는 단연 신비주의가 아니다. 다음에 말하는 우리의 소위 신앙생활은 우리가 신비주의가 아님을 증명하리라.

신앙생활은 그것이 나 자신과 영적 생명의 자람의 생활이나, 그것은 인생 생활에서 되는 생활이다. 인생의 일상생활이 곧 신앙생활 그것이 된다. 즉 한 사람으로 세상에 사는 데에 있어서 부딪치는 사건, 문제의 취급에 영의 생활, 영적 생명의 생장이 있는 것이다. 이는 신앙생활은 인생 생활을 떠난 별다른 생활이 아니고 평범한 생활 사건의 취급에 있어서, 그 태도를 육에 아니고 영에 결단함으로써 영을 수확하면서 사는 영의 생활임이다. 크리스천은 고쳐난 자로, 그는 생래의 사람 즉 육으로 살 자가 아니고, 새 생명 즉 영으로 살 자이고, 그리고 그가 그 부딪친 사물의 취급에 있어서 그 생활자를 육이 아니고 영이게 하려 함에 신앙의 결단을 요하는 것이다. 신자는 세상에 있어서 다른 사람과 같이 생활을 하는 자이고, 그 생활에 있어서 육으로 아니고 영으로 삶에 신앙을 요하는 것이다. 이로 보건대 신앙생활이란 달리 있는 무슨 생활이 아니라, 일상의 보통 생활위에 있는 생활임을 가히 알 것이다. 그러니 나의 소위 신앙생활은 이 세상 생활 외의 생활이 아니라 도리어 이 세상 생활이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생활이다. 이 세상 생활이 없으면 신앙생활은 재료를 잃어 생활이 없게 된다. 그런고로 왕성히 문제를 가진 사람, 환난의 사람, 그는 그가 새로 날 자인 본성의 요구상 문제 취급에 있어서 육을 죽이고, 영을 살리지 않을 수 없어 이에 신앙하나니,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 신앙은 자라고, 영의 생명은 왕성한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우리가 고찰함을 요하는 것은 신앙생활은 그것이 이 세상 생활과 다른 생활이 아닌 생활이면서, 그것은 또한 보이는 생활 위에 있는 영의 생활인 일이다.

나는 신앙생활의 더 중요한 의의를, 보이는 생활에 두지 않고 영에 둔다. 즉 신앙생활의 의의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에 진보하며,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적 생명이 자람에 있는 것이다. 이는 신앙생활로써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며 하나님을 알며, 하나님을, 그리스도를 아는 일의 진보가 우리의 영적 생명이 자람임이다. 그리스도는 다만 죄에서 우리를 구속함으로써만 구주가 아니라 그는 우리의 일상생활의 힘의 근원이시요 생활의 원리가 되어주시므로 구주이다.

그리스도에게는 그 구속의 사역을 하는 이면에 그 자신을 위한 생활이 있었나니, 즉 그는 육을 따라가 아니고 영을 따라 살아 영이 되시므로 육인 우리의 영적 생활의 원천이 되어주신 것이다. 그래서 이 영인 그리스도를 신앙생활에 있어서 해득함으로써 우리의 영적 생명은 자란다. 우리가 새로운 문제에 부딪쳤을 때에 우리는 그것에 대한 육과 영의 뜻을 分辨(분변)하지 못하는 어두움에 빠져 괴로워한다. 이 요구를 통하여 적당한 때에 우리는 영의 깨달음을 얻나니, 즉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한 영의 뜻을 알아 그 문제를 영의 뜻대로 처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경험에 있어서 우리가 문제 처결의 확신을 얻음은 거기에 영인 그리스도가 임하였음이요, 영인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 문제에 대한 육의 뜻을 부정하고 영의 뜻을 앎으로써 우리에게 해득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생활에 있어서 육으로가 아니고 영으로 사는 것이 곧 그리스도 해득의 생활이 되는 것이다. 사물에 대한 영의 뜻은 그것이 어두운 우리의 의견에 대조되는 바, 명확한 사물의 참 모양이므로 나는 그것을 진리라 한다. 육인 우리는 사물의 진리를 알지 못한다. 거기에 영의 임함이 있어서만 사물의 진상, 즉 진리는 언표 된다. 그래서 영으로 임한 그리스도는 진리로써 우리에게 해득 된다. 진리는 사물의 진상인 동시에 그것은 그 사물을 그렇게 의미하는 자의 뜻임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생활에 있어서 그 부딪치는 사물에서 진리를 알아 영인 그리스도를 해득하여 나아가는 것이니, 일상생활인 신앙생활에 있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아 나아가는 영원한 생명의 생활을 하는 것이요, 또한 그의 창조의 가장 귀한 수확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의 제 일의(근본이 되는 첫째 의의)를 이 영의 세계에 둠은 당연한 일이다.

신앙생활은 그 제일의를 영의 세계에 가졌으나, 그 생활은 이 세상 생활 그 자체에서 벗어나지 않음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그래서 개인에게 있어서 주관적으로 영을 살리는 행위는 그것이 사회적 윤리적인 의미에 있어서도 거의 항상 최선의 행위이다. 사회적으로 선인 일이 사물의 진리의 한 요소임이다. 그러나 신앙 행위는 그것에 윤리를 무시하고 행하게 되는 일이 있다. 우리는 때에는 부모처자를 원수로 하고, 진리에 따라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있음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 행위를 다만 도덕으로 규율하지 못한다. 그는 영의 뜻, 영의 명령, 진리의 확신에 따라 행하는 자이다.

隱遁(은둔) 생활, 감정의 도취, 희열을 구하는 생활, 이런 신비주의와 우리의 종교가 얼마나 다른 것을 가히 알 것이다. 우리는 영의 세계를 말하나, 그것은 이 세상에서의 강한 생활을 의미하며 동시에 그것은 실제 생활에 있어서의 의지적 결단으로써 신앙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 생활을 긍정하고 되는, 아니 세상 생활 위에 건설되는 이 영적 종교의 주장은 그것이 하나님의 영적 창조에 대한 正觀(정관)임을 믿는다.

무릇 이미 정해진 교회 신학에 자기를 내어 맡기고 경건히 그것을 지키는 신자, 전도자의 평안이 나에게는 부럽다. 이미 정해진 교회와 신학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확신을 자기로서 갖지 않을 수 없는 나는 화있는 자이다. 나는 유희적으로 이 설을 농하는 자가 되지는 못한다. 영적 기독교의 표현은 나에게 있어서 엄숙한 무거운 짐이다. 내가 과거의 신학 형식에 의하지 않고, 새로운 사상 배경으로 기독교를, 그리스도를, 신앙생활을 생각지 않을 수 없는 무거운 짐을 독자들은 양해하여 주기 시작함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의 완성은 오히려 먼 장래로 미루지 않으면 아니 되거니와 그 강령만이라도 되어서 이로써 우리가 새로운 범주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려진 생각으로 신앙생활을 영위하게 됨은 기쁨이다.

 

 

 

 

 

 

 

 

 

 

 

 

 

 

 

 

 

 

1. 기독교의 과제와 그 현재적 개정

-100호 기념 강연 제1-

 

복음교회의 출현에는 원래 말씀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우리로 말미암는 말씀에 대한 조선 기독교계의 대접이 이 교회의 출현을 부득의하게 한 것이다. 우리로 말미암는 말씀을 인하여 우리가 조선의 기성 교회와는 구별이 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일찍이 나의 신앙의 말씀을 약간 계통적으로 서술하여 본 것이 영적 기독교인데, 당시의 그것은 결코 학문적인 것이 못되고 다만 유치한 상식적인 표현에 불과한 것이나 그러나 그것에는 원래 신학적인 기도가 있는 것이요, 그것이 짊어진 중심적 과제에는 어떤 사명이 있는 일은 지금도 내가 믿지 않을 수 없는 고로 나는 이에 그 중심적 과제를 해명하고, 그것을 지금 내가 아는 범위 안에서 현대적 사유와 절충을 시키고, 그리고 그것의 건설적인 방면을 다시 한 번 말하여 보고자 함이 이 강연의 취지이다.

 

1. 영적 기독교 성립의 사정과 그 중심적 과제

 

어떤 신학적 주장이든지 그것을 바로 이해함에는 그것을 둘러 싼 한 교회의 정황, 사상계의 조류를 살피는 일이 먼저 요구된다. 사명이 있는 사상은 다만 공중에 떠있는 무엇을 관망하고 하는 獨語(독어)-혼잣말-가 아니, 그것은 그 시대의 구체적인 사정에 핍박되어 발생한 바, 그 시대를 이긴 신앙의 소리이다. 사상은 전투의 함성이다. 적을 알지 못하면 전투의 의미는 모른다. 그래서 영적 기독교도 그것의 성립에는 그 몫에 ()한 교회의 정황과 사상계의 조류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대체 영적 기독교는 어떠한 사정 중에서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말한 것인가?

조선 교회가 일반적으로 보아 기독교의 바른 토대를 가지고 ()일을 나는 확인한다. 나 자신의 신앙의 출발이 부흥회의 하루 밤 변동으로, 그 순간 이후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치 못하게 되었고, 성경의 모든 기적 이야기를 그대로 승인케 되었고 일체에 아멘을 말하게 된 것이어서, 말하자면 나는 조선 교회의 通例(통례)의 일에서 산출된 교회의 아들이었다. 나는 원래 조선 교회의 기본적인 신조에 의심을 가진 것 같은 합리주의자가 아니었고, 나는 처음부터 정통주의 조선 교회의 아들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오히려 나는 조선 교회의 기저에 있는 정통주의에는 동감과 지지를 느끼고 있는 자로, 나는 기성 교회와 그 기본적인 데를 다투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나의 선앙이 조금 자란 후 나의 눈에 보이는 조선 교회는 어떤 것이었던가? 거기에 정통적인 신조는 있어도 그것이 조선인의 영혼에 있어서는 죽은 형해에 지나지 아니하고, 거기에 신앙의 형식은 있어도 그것에는 내용이 들어있지 아니하였다. 어쩐 일인지 조선인의 신앙 생명은 단명하다. 어떤 기간 신앙이 경이와 정렬로써 영위되고는 그만 그 생명성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것은 마치 달가스가 덴마크의 황원에 이식한 잣나무가 4, 5년 생장을 하고는 그만 고사하고 만 것과 같다.

조선인의 신앙은 수년의 생장을 하다가는 하나님을 잃고, 그리스도를 잃고, 그만 정체되어 버리고 만다. 그들 연장자들에게 있어서는 신앙은 거의 생명적인 것이지 아니게 되어 있다. 장로, 전도사, 목사의 신앙은 다 속으로는 말라버리고, 체면으로 신앙을 노력 하고 있는 것뿐이다. 가치 있는 신앙은 그들의 말하자면 1, 2년생에게서만 볼 수 있다. 신앙이 정체되어 사활 문제가 신앙 그 자체에 두어 있지 않은 교회가 번잡한 세속적인 일 중에서 분쟁과 부패에 나아감은 당연한 일이니, 내가 보는 바로써 하면 조선 교회의 구원 문제는 홀로 그 신앙의 병증을 고치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다. 신앙의 정체를 혁신하면 교회는 회복되고, 그것을 못하면 그 나머지 문제의 수정으로는 교회는 언제든지 구원되지 못한다. 달가스가 수년 자란 잣나무를 한 차례 잘라줌으로써 北洋(북양)의 황원의 식림에 성공한 것과 같은 일이 조선 교회에도 없어서는 아니 될 것 같다. 외래의 신앙은 한 번은 수술을 해주어야 그것이 조선에서 바른 생장을 하게 될 것 같다.

원래 조선 교회에 수입된 기독교는 미국의 근본주의 (Fundamentalism)와 그 ()의 것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일반 경건한 신자의 사상은 대개 이 근본주의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비평학과 자유주의 신학으로서 아직 새로운 건전한 신학이 서기 전의 선교가 근본주의적인 정통주의를 전제로 하고 된 일은 또한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러나 근본주의가 기독교의 진리를 영원히 산 것으로 말하지 못하는 것이고, 그것을 기초로 하는 선교가 사람의 신앙을 충분히 키우지 못하는 일은 우리가 그 결과를 조선 교회에서 잘 본다. 오래된 고전주의적 기독교인 고로 조선 교회의 신앙은 정체하고 만 것이다.

근본주의란 그 번역된 단어가 지시하는 바와 같이 신앙을 위한 일체의 규범이 成文(성문)으로 이미 저기에 고정되어 있어 신앙한다는 일은 그것을 승인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일로 생각하는 일이다.” 성경의 글 내용이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경 문구로 맞추어 놓은 교리 문답서가 신앙과 사상과 내지 모든 지식의 영원한 진리라고 하는 일이다. 그렇게 모든 것은 이미 저기에 고정되어 있고, 이제 신앙은 다만 거기에 依 據(의거)하는 일이다. 이로써 하면 신앙은 교리 문답을 외우면 졸업한 것이 되고, 모든 지식은 성경의 글 내용을 기억하면 變通(변통)이 없게 된다. 미국에서 다윈의 진화론이 성경과 위반된다 하여 소위 원숭이 소송 사건(Affen-prozess)까지 있었던 일은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이다. 이런 태도를 고집함에 있어서는 과학은 불가능하고, 신학까지가 해소되어 버리게 된다. 신학이 언제든지 새 시대의 새 입장에서 기독교 진리를 추구하는 본연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다만 기정의 글 내용과 체계를 변호함으로써 ()을 삼으니, 근본주의에는 참된 의미대로의 신학이 없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그것이 그들의 관념대로의 하나님 말씀이다.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고, 사람은 다만 그 필기자일 뿐이다. 고로 성경의 문구 그대로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교리나 신학은 성경 문구를 추출하여 서로 이어놓은 일이고, 그렇게 하여 얻은 교리는 사람이 不問曲折(불문곡절) -자세한 까닭을 묻지 않음-하고 믿어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이 이런 것이라면 간단하고, 용이하여서 좋기는 하다. 그러나 그렇게 하여서 사람 된 자에게 생명이 없게 됨을 어찌할까?

그래서 이런 근본주의가 참 신앙을 위하여 어찌하여 안 된 것인가? 이를 한 마디로 말하면 근본주의는 주지주의인 까닭이라고 할 수 있다. 근본주의는 기독교 진리의 주지주의화이다. 지식의 성격도 서로 달라서 주지주의적 지식은 신앙적 지식, 행위적 지식은 기왕적(旣往的)지식이 아니고, 미래적 지식, 요사이 말로써 하면 종말론적 지식이다. 이에 반하여 주지주의적 지식은 기왕적 지식이다. 그것은 알면 그만인 일, 이미 안 한계 이내의 지식이다. 지식이 미래에의 행위, 영원에의 모험을 지향하는 지식일 때 그 지식은 생명적인 지식이다. 홀로 하나이신 참 하나님과 그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원래 이런 지식이기 때문에 그 지식이 곧 생명이다. 그런데 근본주의에 있어서 일체는 모두 닫힌 체계 (closed system)이다. 이미 한계 안의 지식이고, 그것은 미지를 항상 모험하는 지식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 지식이 생명적인 것일 수는 없다. 이제 우리는 이 전제를 가지고 구체적인 기독교 경험을 살펴보기로 하자.

사람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다. 그런데 근본주의를 전제로 한 기독교 경험에 있어서는 이것이 기왕의 죄 인식에 그치고 만다. 죄인이란 부단히 추구할, 항상 새로이 看取(간취)할 진리가 아니고, 벌써 다 알고만 건조한 기왕의 지식에 불과하게 된다. 물론 기왕의 죄를 인식하는 일도 치열한 회개의 경험을 수반하여 어떤 기간은 생명적인 충동 중에 사람을 둔다. 그러나 이 회개의 경험도 그것은 원래 미래적, 종말론적 성격의 것이기 때문에 생명적인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전제가 되어 있고, 그것의 基底(기저)를 가지는 것이 근본주의인 때에 그 생명적 경험은 쉽게 막히고 만다. 무한히 신장할 것에 가까이 天井(천정)이 누르고 있다. 천정에 닿기까지는 자라나, 불원 천정에 닿아서 생장은 막히고, 얼마 후에는 고사하고 만다.

죄란 기왕의 범죄들이다. 속이고, 빼앗고, 외도하던 일이다. 그래서 이 죄들을 회개하면 이제는 죄인이 아니게 된다. 사람이 죄인이 아니게 된 때에 기독교 경험은 종식된다. 근본주의로써 그 급소(急所)를 잡혀있는 경험이니 사람이 죄인인 일은 기왕의 범죄를 기억하여 사람은 죄인이라는 신경을 승인케 되면 문제는 그만 낙착이 되고 만다. 무릇 이런 경험을 밟아서 교회의 신앙 경험은 산 신앙으로부터 신경의 지적 승인에 와서 고사하고 마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기독교적 진리가 근본주의 하에 그렇게 主知化(주지화) 되고, 경화되어버리는 것인데 여기에 우선 ()관에 대하여 말하면 나는 이 조선 교회의 고정적, 주지적 죄관을 교정하려는 企圖(기도)로 사람은 죄인일 뿐 아니라, 또한 인 자라고 말하였다. ‘을 말하는 것은 결코 스콜라적인 논의를 위한 것이 아니고, 그것은 조선 교회의 죄관, 인관을 교정하려는 소원으로 말한 것이다.

조선 교회에 있어서 죄는 범죄한 죄이니, 그것은 소위 회개와 속죄로써 처리되며, 내지는 깨끗이 성결에까지 이르는 것이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육은 그렇게 간단히 처리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다. 육은 사람이 육을 가지고 있는 한 남아있는 문제이다. 육으로써 하나님 앞에 선 영원한 죄인이 의미된다. 그래서 육은 항상 새로운 신앙적 취급을 요하는 것이다. 육은 지식으로 알아버리면 그만인 것이 아니고, 그것은 항상 신앙의 결단과 모험을 요구하면서 앞에 놓여있는 것이다. 육의 앞에는 신앙이 주관화되며, 졸고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항상 새로운 신앙 결단을 요하는 것으로 육은 우리 앞에 있다. 사람의 죄성을 신앙적으로 파악하여 우리는 이를 육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육의 提唱(제창)은 그것이 근본주의적 죄관의 혁명을 의식하고 한 말이었다.

이상에 있어서 근본주의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신앙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으리라고 믿는다. 또한 우리의 근본적 기도가 어디 있는 일도 이상에서 약간 암시되었다. 그런데 영적 기독교 성립 사정에는 또 한 가지 말하지 않으면 아니 될 요소가 있다. 근대주의(Modernism)가 그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말하는 근대주의는 성경 비판(Criticism)과 자유신학(Liberalism)이다.

근대과학은 무엇이나 그 연구 대상으로 하지 않음이 없다. 성경도, 기독교도 과학적 연구의 범위 외에 있어질 까닭이 없다. 성경에 대한 사본 비판, 언어학적 연구, 역사적, 비판적 연구 등에 의하여 성경을 종래의 관념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 되었다. 가령 사본 비판의 결과 성경 문구에도 여러 가지 상이한 이름이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하나님 말씀에 어찌 여러 이름이 있을 수 있을까? 기독교 교리의 표현에도 주위의 여러 종교, 시대의 사조 등의 영향이 있음을 본다.

그러면 무엇이 기독교의 고정된 교리인가? 예컨대 바울의 속죄론은 유대 사상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현현이니, 죄인은 속죄라는 번거로운 수속을 밟음이 없이, 다만 회개로써 하나님의 사랑에 영접될 것이 아닌가 하는 논의가 제기 된다. 그리하여 19세기 아래, 정통적 기독교 신앙은 그 근본이 흔들려서 사람이 단순히 신앙을 유지하려면 그런 모든 비판주의를 마귀의 소리라고 물리치고, 시대의 모든 소리에는 귀를 막아야 신앙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태도가 불건전한 것임은 물론이다. 정직한 과학적 연구에 못 견디는 것이면 그것은 진리가 아닌 거짓이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진리라면 그것은 모든 과학적, 학문적 연구에 견디고, 다시 그것을 넘어서 수립되는 무엇이 아니면 아니 된다. 물론 한편 정통주의가 비판적 연구를 마귀시하고 있는 동안에, 다른 한편, 다수의 학자들은 모든 학문적 연구를 맞아들이면서 그것을 넘어선 기독교의 건설에 모든 노력을 경주하여 와서 금일에는 비판주의와 정통주의의 문제는 해소되고, 기독교는 다시 그 근본적인 데로부터 힘차게 세계에 宣揚(선양)되면서 있다. 신학이 모든 학의 왕관이 된다고 사람들은 현대적 의식을 가지고 부르짖고 있는 현상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시대적 환경 속에 신앙의 걸음을 걸어왔다. 그래서 내게 만일 사명이 있는 주장이 있다면 이는 이 환경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영적 기독교는 본래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기도된 것이다.

어떻게 하여야 조선 교회의 경화된 신앙을 신앙에 회복되게 하고 그 空桶(공통)-빈통- 한 것에 산 풍부한 내용을 담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여서 기독교를 근대주의에 대하여 더 근본적인 데로부터 辯疏(변소)-잘못이 없음을 해명함-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한 근본 이론에 착안함으로써 이 두 면의 과제에 해결을 짓고자 한 것이니 영과 진리가 곧 그것이다. 나의 보는 바로서 하면 모든 기독교 주장은 영과 진리를 그 근본 논리로 하고 구성된 것이니 기독교 주장의 영과 진리적 해명은 한편 모든 근대적 비판에 견디게 하고, 다른 한편 신앙을 근본주의적 死角(사각)에서 구하여 그것이 사람 안에 현재적으로 생명 경험을 주는 종교로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영과 진리란 그렇게 하여 제출된 근본 논리 이다.

영과 진리는 모든 기독교 주장의 기저를 이루는 근본 논리이다. 모든 기독교 주장은 영과 진리를 그 구성 논리로 하고 언표된 것이다. 영은 계시되려는 하나님을 의미하고, 진리는 그 계시가 사람에게서 이해 언표된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절대 타자로 알려지지 않는 숨은 하나님이나 그러나 또한 사람에게 자기를 현현하고자 하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이 현현의 하나님을 말하여 영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자로 사람과 하나님 사이는 거리가 있으나, 그러나 또한 사람은 하나님과 만나지는 데가 있다. 즉 진리에 있어서 그러한 것이다. 나의 이른 때의 표현을 이에 인용한다. 영이란 창조자, 절대자의 본질로 이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영은 또한 설명되는 것이다. 이는 영이 진리로써 자기 현현을 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진리란 우리의 이해를 위하여 영이 구체화한 것이다. 즉 진리는 영의 언표이다. 사람은 영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진리를 계시 받음으로써 영을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진리는 사람이 이해한 영이다. 사람 안에 영이 임하면 그것은 진리로써 그에게 이해되는 것이다. 또 사람은 그 받은 바 영을 진리로써 언표하는 것이다.

영과 진리의 더 충분한 설명은 후장에서 말씀될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이제, 이 근본 논리가 우리의 중심 과제에 대하여 무슨 공헌을 하는가를 간단히 말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우리의 중심 과제는 기독교를 어찌하여야 근대주의에 대하여 변증하면서, 그것을 근본주의적 枯死(고사)에서 구하여, 현재적으로 생명 내용이 풍부한 신앙이 되게 하겠느냐이다. 진리는 거기에 영인 하나님이 해득되어 있어, 그것의 우세한 내용은 사람의 것이 아닌 영이나, 그러나 그것은 또한 사람의 인식 능력을 통하여 이해 언표된 것이니만큼 거기에는 인적 요소가 있는 것이다.

진리에 있어서 영이 현현되어 있으나 그러나 진리는 또한 그것이 사람의 문제가 해결된 장소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진리에는 사람이 그 문제를 해결한 구체성이 있고, 따라서 시간성이 있다. 물론 진리는 이런 것이 아니면 그것은 사람에게 쓰임이 없는 것이나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또한 진리는 비판의 대상도 된다. 그래서 진리가 비판의 대상이 될 때, 비판되는 것은 거기에 있는 인적 요소이고, 영은 비판을 초월하여 있다. 그리하여 진리에는 비판이 닿는 데가 있고, 또한 비판의 손이 닿지 못하는 데가 있다. 그래서 진리의 비판은 필경 그 비판되지 아니하는 데를 지시함에 더 깊은 목적이 있게 된다. 바울의 속죄론은 유대인 바울의 영적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그것은 유대 사상을 지반으로 하고 언표된 것이리라.

그러나 바울의 속죄론을 해부적 이론으로 기억하는 일이 속죄를 경험하는 일이 아니고, 속죄를 경험하는 자는 바울의 말씀을 들어서, 거기에서 영의 현전을 경험치 않으면 아니 된다. 바울의 속죄론에는 그가 모든 언어를 써서 말하려고 하여도 다 말하지 못하는 바, 그렇기 때문에 말할 때마다 새로운 바, 말하자면 영인 것이 있다. 이 영인 것이 바울의 속죄론으로 언표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언표 된 속죄론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자유요, 언제든지 새 언표를 취할 수 있는 영이다. 이 영으로써 항상 새로운 속죄론이 언표 되는 일이 가능하다.

그래서 비판은 한 속죄론을 비판할 수 있으나 영을 비판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이 영이 남아 있는 한, 기독교는 언제든지 남아있다. 다만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비판을 넘어서 항상 새로이 동일한 자기를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영의 언표인 진리가 결코 ()하여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영의 언표로, 영은 그 언표 이외에 그 때, 그 장소에서 자기를 현현할 길이 없는 것이요, 또 그것이 언표 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거기에서 그의 사활 문제가 해결된 자리로,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생명인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가 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진리가 중요한 것이니, 우리는 모든 진리 언표를 중히 여기고, 더욱 성경을 중히 여겨, 그것의 연구로써 그 영에 접함이 긴요하다.” 그리하여 우리의 영과 진리 논리는 한편 비판에 제한을 주고, 다른 한편 영의 적극성을 잘 지켜 유지케 한다. 이에 있어서 비판은 그 파괴성이 해소 되고, 그것은 영의 현재성, 적극성의 증명도 된다. 그래서 이제 영과 진리의 논리가 신앙을 근본주의적 枯死(고사)에서 구출하는 일은 많은 말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기술한 바와 같이 고정주의는 기성의 글 내용에 고착 응결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진리의 구체성, 시간성을 모르고, 영의 초월성을 모르므로 된 오해이었다. 영을 모르고, 진리를 몰라서 기성의 글 내용에 고착되어 비판을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영과 진리의 논리로 기독교의 근본은 꾸준히 유지되면서 그것은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비판을 통하여 다시 기독교의 적극성, 현재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영과 진리는 사람의 신앙을 기성의 글 내용에 고착시키는 일이 없이 동일한 영에 대한 새로운 다양한 해득을 示唆(시사)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풍부에 신앙을 인도한다.

신앙의 대상은 기성의 글 내용이 아니고 영이다. 신앙의 내용은 고정한 것에 대한 변명의 정렬이 아니라 영의 해득, 하나님 지식이 풍부하게 된다. 나는 여기에서 바르트에게 배워서 나의 영적 기독교에 교회와 신학이란 제한을 붙이기로 한다. 영적 기독교에는 아무래도 주관성, 자유성이 강하므로 그 객관적 제한으로 교회를 範圍(범위)로 하는 일이 필요함이다. 생명은 주관성이 강한 것이므로 생명을 주장하는 영적 기독교가 주관적 成事(성사)에 치중함은 부득이한 것인데 다행히 거기에 교회가 있다. 교회에 있어서 주관은 곧 객관이 되고, 객관은 곧 주관이 된다. 우리는 제 마음대로의 기독교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교회적인 것이다. 교회의 것이 내 것이 되고, 내 것이 교회의 것이 된다.

2. 기독교의 과제와 그 현재적 개정

-100호 기념 강연 제2-

 

2. 현대적 사유와 영적 기독교

 

前講(전강)에서 밝힌 바와 같이 영적 기독교는 조선 교회의 화석화된 것과 같은 신앙 형태에 대하여 신앙을 어떻게 하면 생명이 풍부한 것으로 辯疏(변소)-사리를 풀어 밝힘- 할 수 있을까 하는 중심 과제를 짊어지고, 그 과제의 해결을 영과 진리의 근본 논리로서 지으려고 하는 기도이었다. 그런데 現今(현금)-바로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도 그 중심 과제와 근본 논리는 변하지 아니하나 그러나 당시에 내가 그것을 주장 발전시킨 사상적 지반이라 할 것과 현금의 사상계의 경향과는 아주 딴 판이기 때문에 영적 기독교를 현금의 사상적 시사에 의하여 다시 생각하면서 거기에서 지금 보아서 틀린 의상을 벗겨버리고, 그것을 더욱 현재적인 것으로 말함으로써 그 원래 목적한 바를 달성케 하려는 것이 이 회의 강연에서 말하려는 바이다.

영적 기독교는 나의 10년 전의 저작인데 당시의 나와 지금의 나는 그 지식에도 약간의 차가 있게 되었겠고, 그 사상에는 시대의 사조와 함께 물론 상당한 변화가 있게 되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당시의 나는 자연 과학 중심의 약간의 교육을 받고, 성경에 대한 얼마만큼의 연구가 있었을 뿐이요, 철학계, 신학계에 대한 견문이 아주 적었고, 더욱 대전(2) 이후 독일의 사상의 변동에 대하여 잘 알 길이 없었다. 바르트 신학에 관하여서도 당시 일본에서 행하는 간단한 소개를 들었으나 물론 이로써 그 전모를 엿볼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런 자로서 감히 무엇을 말하였다는 것은 부끄러움의 ()이고 또 지금의 나도 이것을 충분히 행할 자격이 없음을 스스로 알기 때문에 도리어 말하지 않는 것이 가할는지도 모르나 그러나 한 때 현대적 사조에 접하여 다대한 타격을 받은 것 같던 것도 근년 이래 점차 회복되어 현재에는 사상적 확신만은 다시 섰으므로 100호 발행을 기회로 하여 이에 또 한 차례 영적 기독교를 말하여 보는 것이다.

현대는 사상계에 일대 전환이 행한 시대이다. 歐洲(구주) 대전-1차대전- , 각 방면에 점차 새로운 사상이 대두하더니 이제 이 시대의 사상은 그 모양이 확실하여져서 이것이 前代(전대)와는 분명히 구별되는 것이 되게 되었다. 우리는 사상사적 견지에서 현대를 근대와 구별시키고, 근대사상이란 것은 구주대전을 최후로 하고 파탄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 사상의 변혁을 잘 이해하며 잘 서술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나, 나는 이에 나의 주제에 관한 한에 있어서 얼마만큼 그것을 말하여 보고자 한다.

우리가 잘 아는 바로써 보더라도 대전 후에 일어난 사상운동에 두 개의 큰 모양을 인정할 수 있다. 하나는 마르크스주의요, 또 하나는 파쇼 운동이다. 마르크스주의는 그 소위 유물사관으로써 근대의 관념적 철학에 대립하고 프롤레타리아 운동으로 자본주의를 반격하였다. 우리는 물론 유물사관에는 반대이고 또 마르크스주의로 말미암아 건전한 새 경제 조직이 출현한 것을 알지 못하나 이것이 근대 자본주의 문화에 대한 한 근본적인 비판이었다는 가치만은 거기에 인정한다. 자본주의 문화, 이는 前近代的(전근대적) 이념의 큰 성과이다. 관념론적 철학의 지지를 얻은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의 성과로 저기에 자본주의 문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자본주의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는 일은 그것이 시대가 변하고, 사상이 바뀌었음을 증거한다. 파쇼 운동도 우리는 그 粗野(조야)-거칠고 촌스런- 모양을 그대로 찬성할 수는 없다. 그 국가주의 내지 국수주의는 자연히 타국, 타민족의 배척이 된 것이고, 나라 나라가 서로의 주의에 서게 되면 전쟁은 피할 수 없어 필경 인류는 자멸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이 파쇼 운동의 사상적 지반이랄 것에 대하여 충분히 주의하여 관찰할 필요가 있다. 거기에는 역시 근대주의에 대한 비판이 들어있음이다. 파쇼의 전체주의, 통제주의는 그것이 근대의 자유주의, 개인주의, 따라서 주관주의에 대한 反立(반립, Antithese)이다. 금일의 정치적, 경제적 실정은 사람을 자유로운 개인으로만은 설 수 없게 한다. 사람을 국가 중에서 국민의 일인으로 행위 할 수밖에 없게 한다. 이 가부는 나중 문제이고 금일의 사회적 실존으로 인간은 이런 제약 중에 서있는 사실을 어찌할 수 없다. 개인과 단체에 대한 보다 조정된 모양은 이를 우리가 후일에 가진다고 할지라도 종래의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만은 한 차례 청산치 않으면 아니 되게 되었다.

이성의 권리를 극단에까지 주장한 것은 그것이 또 하나의 근대주의의 특징이리라. 그 이성이란 것은 합리주의적인 의미에 있어서 이성이다. 사물을 자연적, 연쇄적 연속관계에 있어서만 생각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연 과학의 연구에 성공하고 기계학에서 성공을 거둔 승세로 합리주의적인 입장을 어디까지든지 내밀어서 우주의 迷惑(미혹)을 이로써 풀라는 것이 근대인의 意氣(의기)이었다. ()로서 한 때는 형이상학의 해소, 과학 만능도 부르짖었던 것이다. 이런 사상의 분위기 중이므로 종교 같은 것은 말할 장소가 좁아지고 특히 역사적 종교의 주장, 기독교의 절대성, 그 역사적 계시의 주장 같은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졌었다.

그런데 세계대전의 참극을 지내며 보낸 후 사람들의 눈은 점점 인간의 실존 그 자체에 향하게 되어 소위 비합리주의와 대두를 보게 되었다. 인간 존재의 비합리성이 말 되고, 비연속의 연속을 말하는 변증법이 쓰이고, 인간과 그 세계의 종말성과 함께 영원이 말씀되게 되었다. 이런 사상운동에 있어서 그 선봉을 맡은 자들이, 신학의 관심을 제일로 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일을 우리는 기억할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임을 우리는 알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근대적 세계관은 범신적, 내재적, 무신적인 것이었다. 그 철학은 인식 주관의 정립에 있게 하였다. 人文(인문)은 생의 자율적 발전이란 입장에서 말되었다. 역사는 내재적인 것의 발전 진보로 말되었다. 그래서 이런 장소에서 하나님은 정당히 말씀될 수 없는 것임은 물론이다. 근대 신학이 이 내재적인 세계관의 제약 중에서 말하려고 한 고민에는 동정을 아낄 수 없다. 진면목한 신학은 그 기저를 그들이 생각하는 바, 기독교의 본질인 데에 세웠지만 그러나 그것을 생각하며 발전시킨 것은 범신적, 신비적, 내재적 세계관이었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기독교의 가장 기초적인 일인 하나님께로의 것, 하나님의 말씀, 계시 같은 것을 힘차게 말 할 수는 없었다. 그것을 말하자면 사람의 종교를 말하는 신학이고, 그것은 하나님께로의 것을 말하는 신학이지 못하였다.

이에 대하여 기독교를 온전히 하나님 편의 말씀으로 辨駁(변박)-시비를 분변하여 논박함-하는 것이 바르트 등의 신학이다. 그리하여 소위 변증법적 신학이란 신학이 등장하였는데, 이는 원래 신학의 영역에서 나온 것이나 그러나 이는 또한 근대 문화에 한 근본적인 강렬한 비판이 되게 되었나니 변증법적 신학은 그것이 우리가 현대의 사상계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혁명적인 사상이다.

바르트는 최초 소위 변증법적 사유에 의하여 근대적인 주관주의, 역사주의, 모든 내재적인 관념으로부터 기독교 고유의 교의를 구출하고 다시 이를 현대적인 의식으로써 세계에 辯疏(변소)-사리를 풀어 밝힘-하면서 그 신학을 발전시키면서 있다. 인본적인 합리주의에 제한을 받는 근대 신학은 정당히는 하나님의 계시를 말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더니 변증법적 신학에 있어서 인간의 타락과 죄성이 철저히 주장되면서 계시의 가능성이 확보되고, 사람을 죽이고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 말씀이 가장 근본적인 일로 말씀되게 되었다.

이런 현대적 사조에 대조하여 보아, 영적 기독교는 그 표현이 현대 이전에 속하고 더구나 교회를 떠난 나 개인 안에 생장한 사상이기 때문에 그것이 심하게 주관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일을 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내가 이에 영적 기독교의 재인식을 기도하는 것은 거기에는 모든, 현대로부터 보아서 헌 옷을 벗기고도 남는 무엇이 있음을 믿음이다.

나는 깨끗이 거기에 채용된 자연 과학적 진보의 개념, 진화론적인 사유, 범신론적 발전주의, 역사주의적 발전 관념을 청산하고, 거기에 있는 개인주의, 경험주의, 주관주의를 개정하리라. 그러나 그러고도 오히려 영적 기독교가 근본적으로 지향한 바 생명 신앙, 신앙의 내용 풍부의 문제는 남아 있으며 그 건설을 위한 영과 진리의 논리는 버리지 못한다. 그래서 우선 나는 여기에 바르트 신학에 대한 약간의 비판을 시도하면서 영적 기독교가 해결할 문제를 향하여 얼마만큼의 걸음을 진보시켜 보기로 한다.

바르트 신학의 제목인 하나님 말씀은 무엇이냐?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경에 증거 된 말씀이라고 한다. 이렇게 말하여 바르트는 물론 근본주의적 성경관에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성경 말씀이 逐字神言的(축자신언적) 하나님 말씀은 아니다. 그러면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 말씀은 정확히 무엇이냐? 나의 아는 범위에서 보면 바르트 신학의 하나님 말씀은 퍽이나 의문이 있는 데이다. 다만 일반적으로 하나님 말씀의 주장은 그 취지를 잘 알 수 있으나 적확히(정확하고 안틀리게) 하나님 말씀은 무엇이냐?는 대답 되어지지 않았지 아니한가?

하나님 말씀은 성경이 증거하는 그리스도란 사실, 그 십자가라고 되나, 다만 그리스도란 사실이 하나님 말씀으로는 들려지지는 않는다. 다만 십자가가 아니고, 십자가에 대한 사도의 증거가 하나님 말씀으로 사람에게 임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십자가에 대한 사도들의 증거는 한 모양이 아니어서 바울의 증거와 요한의 증거가 서로 다르다. 그러면 이런 경우에 어느 것이 정확히 하나님 말씀이 되는가? 그래서 우리는 불가불 하나님의 계시를 증거하는 사도들의 경험을 認容(인용)하지 않을 수 없지 않겠는가? 경험이 인용되는 데에는 개인적 주관성이 허용되게 되지 않는가? 주관적 경험이 아주 인용되지 않는 데에 하나님 말씀이 나타날 리가 없다. 물론 우리가 기독교에 있어서 인간의 자주적인 주관성을 인정할 수는 없다. 사람의 자주적인 주관적 발전에 기독교가 있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 물론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계시를 위에 놓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러나 또한 다음에 계시를 전제로 한 주관적 경험이 말 되지 않을 수 없다. 그 주관적 경험은 하나님께 攻取(공취)-적의 진지를 공격하며 빼앗음-를 당한 사람이 하나님께 패하여 사람이 하나님께 굴복된 경험이다. 거기에서 말씀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사람의 주관에서 되는 사변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기독교를 말함에는 하나님 말씀이 말씀되지 않으면 아니 되는 동시에 거기에는 또한 사람의 경험이 말씀되지 않을 수 없다. 거기에는 하나님 말씀의 신학이 있어야 하는 동시에 또한 신앙 경험의 논리가 없으면 아니 된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 말씀과 신앙 경험은 둘로 분열되어 있는 것이어서는 아니 되고, 그것은 하나님이지 아니면 아니 된다.

하나님 말씀은 사람의 신앙 경험을 창조함으로써 말씀 되고, 사람은 신앙 경험을 말함으로써 말씀되고, 사람은 신앙 경험을 말함으로써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지 아니면 아니 된다. 소위 하나님 말씀의 신학으로써는 부족하다. 하나님 말씀이 신앙 경험과 함께 말 되는 한 논리가 요구된다. 그래서 이 논리로 제출 되는 것이 영과 진리이다.

신앙 경험을 말할 때 그것은 개인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개인이 회피되고, 경험이 인정이 안 되고, 어디서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될 것인가? 물론 () 세계적인, 신학적인 개인경험은 이를 기독교에서 엄격히 배제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의 대상이 되는 개인, 하나님 말씀이 창조하는 신앙 경험, 우리의 신학은 이를 말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래서 이 개인은 교회를 인하여 공공한 자가 되고, 이 경험은 교회에 말씀 되는, 하나님 말씀을 인하여 객관적인 것이 된다. 개인의 신앙 경험은 교회에서 말씀 되는 하나님 말씀으로 말미암아 창조되는 것이고, 개인은 교회에 하나님 말씀을 반환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 말씀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교회를 인하여 신앙 경험은 객관적인 확실성을 가진 것이다.

그리하여 영적 기독교에서 모든 前代的(전대적) 의상을 벗기고, 그 개인주의, 주관주의를 한 차례 파기하고도, 우리는 바르트 신학을 넘어서, 다시 신앙의 개인적 경험성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 일찍이 나는 나의 無學(무학)으로 인하여 나의 주제를 정당히 발전시키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현대의 비합리주의라든지, 변증법이라든지, 실존적인 사유라든지, 행위적 자기의식이라든지, 종말론이라든지, 이는 다 도리어 영적 기독교의 주제의 발전에 도움이 있는 것이 된다.

우리의 과제는 원래 신앙을 어떻게 생명적인 것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신앙을 어떻게 내용이 풍부한 것으로 말할 수 있을까 이었다. 그래서 이 과제의 해결에는 근대주의적인 발전사적 개념보다도 현대적인 사유가 더 유익하다.

영적 기독교는 신앙의 생명성을 그 智識性(지식성)에 구하고 신앙의 내용 풍부를 그 眞理知(진리지)의 왕성 풍부에서 보았다. 이 일은 지금의 나도 더 확실히 주장하고자 하는 바 이어서 물론 가하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지식이 부족하여서 이 과제의 발전을 거의 자연 과학적인 생장의 개념, 또는 자연적인 양적 개념에 의하여 설명하였다. 마치 영적 생명은 사람 안에서 자연적인 발전을 이룩하고 있고, 그 생장은 진리 지식의 거의 자연적 축적에 의하여 되는 일 같은 감을 주게 말하였었다. 그런데 이 일은 금일의 소위 변증법 같은 논리를 얻어서 더 잘 설명될 일이다. 생장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바울도 αξάνεν -아사네인- ‘자란다는 단어를 써서 하나님 지식에의 생장’(1:10) ‘그리스도에의 생장’(4:15)을 말하였다.

성경의 기독교는 금일의 바르트 신학과 같이, 그렇게 사람의 안에는 아무 되어가는 일을 허락하지 아니하는, 이 의미에 있어서 소위 위로가 없는 신학같은 것이 아니고, 그것은 충만함 πλήρωμα -플래로마- (3:19, 4:13)이 있는, ‘자람이 있는 종교다. 그러나 이 자람, 이 충만 풍부는 물리적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고, 영적으로 변증법적, 또는 종말론적으로 생각할 것이었다. 그 생명, 그 충만, 그 풍부는 영의 것이다. 즉 그것은 차안의 것이 아니고, 피안의 것이다. 우리는 신앙으로 싸워서 그것을 획득한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에 소유되는 것이요, 육인 사람의 고정적 소유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물론 우리가 영적 생명의 생장, 증장에 의한 풍부도 생각한다. 과거의 것은 그대로 고정되어 남아있는 일이 없으나, 그러나 그것은 현재에 지향하게 되어 현재적 생명에 變貌(변모)하여 현재의 생명을 풍부히 한다.

이상과 같이 하여 생명 신앙의 생장성, 그 풍부성은 설명 되었는데 또 우리는 신앙의 생명성을 그 지식성에 구한 일을 말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신앙이 생명이란 일은 우리가 天的(천적)인 생명에 참여한다든지, 천적인 생명이 우리 안에 주입되었다든지 가 아니다. 생명을 이렇게 생각하는 일은 결국 觀想的(관상적), 신비적인 것에 지나지 않고, 그것은 결코 건실한 기독교 경험이 못된다. 신앙이 생명인 일은 확실한 신앙 경험에서 인도되는 개념이 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의 생명을 그 지식성에서 본다.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ἡ ἐπγνωσις τοθεοῦ -헤 에피그노-시스 투 테우- 으로, 즉 진리()로 생명이다.

하나님을 아는 일은 그것이 觀想的(관상적)인 지식이 아니고, 그것은 행위적 지식이다. 그것은 미지에 대한 모험, 영원에의 비약이 의미되는 지식이다. 그래서 이 행위성, 모험성, 비약성에 우리는 생명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식의 행위성은 그 윤리성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따라서 이것이 건실히 일상 경험적인 일이게 된다. 일상 경험적인 일로, 신앙은 피안에의 비약, 영원에의 모험을 행위 하는 것이어서, 신앙이 생명인 일은 그것의 이런 행위성에 있는 것이다.

한데 합쳐서 말하면, 진리 지식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지식이요, 또 한 사람의 罪性(죄성)에 대한 지식이다. 신앙의 일상적 경험으로써 우리에게 결과로 되는 진리 지식은 내가 죄인임을 새로이 깨달아 새로이 하나님의 은총의 座前(좌전)에 엎드리는 일이다. 그래서 진리 지식이란 결국 은총의 하나님과 죄인과 교섭의 여러 문제이다. 모든 기독교 교의는 은총의 하나님과 죄인과 교섭의 제(제사) 문제를 설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것은 영과 진리를 그 근본 논리로 하고 구성된 것이고, 그것은 구체적으로는 진리 주장으로 저기에 있게 된다. 즉 내가 여기에서 말하는 바는 교의적 진리와 신앙 경험적 진리는 같이 영과 진리의 논리로써 구성되고, 그것은 크게 진리의 한 명제에 귀일된다는 일이다. 즉 그것은 은총의 하나님과 恩人(은인)과 교섭이란 명제에 돌아간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진리 생활이라고 한다. 이는 생활은 곧 敎義(교의)요 교의는 곧 생활이란 의미에서 그러하다. 바르트는 교의학은 즉 신앙 행위(Der Dogmatik ist die Glaubensakt)라는 말을 하였거니와 나는 신앙생활은 곧 교의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교의가 영의 구체적 현현인 진리임과 같이, 신앙생활은 영의 경험적 현실로 진리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영적 기독교에 있어서는 교의와 생활은 한 가지로, 그것은 영과 진리를 그 근본 논리로 하는 것이다.

3. 영적 기독교의 신앙 생활관

-100호 기념 강연 제3-

 

내가 왕년에 발표한 영적 기독교3장으로 나뉘어 있어서, 1장은 영적 기독교의 방법론이라고 할 영과 진리의 확립을 기도한 것이고, 2장은 그리스도관을 취급하여 그리스도를 우리의 신앙대상, 신앙생활의 원천으로 하여 으로 잡아서 정하는(措定) 것이 그 취지이었고, 3장은 신앙 생활관을 말한 것이었다. 그래서 영적 기독교에 어느 정도의 공헌을 인정해 줄 것이 있다면, 그 확실한 데는 그 신앙 생활관일 것이다. 그 신앙 생활관은 대체로 그릇됨이 없다. 그러나 약간의 수정을 요하는 데가 있고, 또 전체로 그것을 현대적 사유에 의하여 더 확실히 주장 해보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나는 당시에 재래의 기독교를 속죄적 기독교라 하여 그것을 영적 기독교와 구별하고 속죄적 기독교에 신앙의 기초적인 가치를 주면서, 그러나 그것에는 신앙생활이 없다는 뜻을 말하였다. 속죄론은 오히려 의의를 가진 것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재래의 속죄적 기독교를 실제적 의미에 있어서는 그렇게 말함도 무방할까 한다. 실제적인, 통속적인 의미대로는 속죄적 기독교에 있어서는 사람이 속죄로 말미암아 그 범죄한 죄가 사면되는 은혜를 잠간 즐기고는 그 후 어떻게 살 것을 알지 못하여 그 영이 방황하고 있는 것 같이 나에게는 보인다. 나의 보는 바로써 하면, 사람의 신앙은 그 범죄를 회개하고, 십자가로써 그것이 사면됨을 파악하는 어떤 기간은 거기에 신앙생활이라고 할 것이 있으나, 사죄를 믿고, 평안을 누리고 있는 동안, 그에게 부지중 산 신앙생활은 없어지게 된다.

신자가 경건한 생활을 한다고 하며, 감사한 생활을 한다고 하는 경우, 그것은 흔히 그가 양심적으로 세상을 향하여하는 생활로, 온전히 도덕적인 생활에 지나지 않는 것이요, 거기에 하나님과 항상 새로운 관계에 있어서 되는 행동으로의 신앙생활 그 자체, 항상 새로이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신앙생활 그 자체는 없다. 다만 속죄의 은총을 짊어지고, 경건히, 감사한 생활을 하는 것이 깊은 뜻대로의 신앙생활은 아니다. 죄의 사면을 기독인의 기초적인 은혜로 주장하였음은 가하나, 그러나 사면되었다고 믿는 사람의 신앙생활이 분명히 지시되어 있지 않은 것이 재래의 속죄론 중심의 신학이었다.

속죄론으로써 기독교의 전부가 되게 하려면 속죄로 하여금 시시각각 경험되는 것이게 하여 그것이 곧 신앙생활이 되게 하는 것으로 말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현재 사람은 죄인이 되어 현재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사면되는 일이 말 되면, 속죄론은 신앙 생활을 말하는 것이 되고, 속죄적 신앙은 항상 생명적인 것이 되지만, 그러나 역사 선상의 일점인 사실로의 십자가와, 거기 에서 하나님과 죄인의 화해를 말하는 것이 주안점인 속죄론은 그것 자신의 사명이 있음은 물론이나, 그러나 그로써 신앙생활은 충분히 주장되지 못한다.

이에 대하여 영적 기독교는 생명적인 신앙, 따라서 생활인 신앙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신앙은 생명이 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따라서 그것은 생활이 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래서 우리는 우선 신앙생활을 어떻게 개념화할 것인가?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향한 행동이 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것은 제일의적 인 것으로는 결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윤리생활이 아니다. 그것은 제일의적으로는 세상을 향한 생활이 아니고, 그것은 우선 세상을 무시하고 하는 하나님을 향한 행동이다. 그래서 이 세상을 무시하고 하는 하나님을 향한 행동이, 세상에서 윤리적 가치가 높은 생활도 됨은 물론이다. 그리하여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향한 행위인데,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하나님을 향한 행위는, 그것보다도 먼저 거기에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행위가 없어서는 아니 된다.

사람이 그 혼자는 하나님을 생각할 수도 없고, 하나님을 향하여 행동할 수도 없다. 하나님의 사람을 향한 행위가 곧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하는 행위가 된다. 그래서 이를 하나님 편으로부터 말하면 신앙생활은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이다.

사람의 하나님을 향한 행위는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력으로 추진되어서만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의 권능에 몰려서 사람이 그를 향하여 행동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하는 행위가 신앙 행위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과 사람의 수직적인 관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거래이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행위는, 그 단번에 다한 뜻대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실이 그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실이 하나님의 사람을 향한 행위인 일은 모든 신학이 한결 같이 말하는 바인데 우리는 이에 기독교관을 신앙생활의 견지에서 다시 살필 필요가 있다. 즉 신앙생활을 위한 기독교관이 우리에게 요구되는데, 이런 취지로써 일찍이 말하여 본 것이 영적 기독교의 기독관이다. 이는 원래 다른 장을 만들어 말할 것이나, 간단한 이 강연에 있어서는 이를 신앙 생활관에서 말함이 편리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우리는 다만 그리스도의 속죄 사업을 바라보아서는 아니 된다. 우리는 더 깊이 그 인격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다만 그의 속죄 사업에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인격에서 구원 얻음이다. 우리는 그의 속죄 사업보다도 그의 화육을 깊이 생각하여 보아야 한다. 그의 십자가도 이를 화육론으로 부터 생각하고, 속죄적 기독교도 이를 영적 기독교에 포섭시키려는 것이 나의 당초의 기도이었는데, 이 곤란한 과제는 그것이 역시 현재에도 무거운 과제로 나에게 남아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대략 명료하다. 우선 그리스도를 다만 인류를 위한 속죄 사업을 하는 이로만 보지 않고, 그를 역시 그 자신의 생활을 통하여 완성되는 자로 보고, 우리의 구원을 그 완성된 인격에 있어서 되는 일로 말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기독관, 구원관의 근거를 신약성경 중에서 충분히 얻는다. 요한복음의 기독관, 히브리서의 구원관이 그것이고, 속죄를 중하게 말한 바울의 말씀에도 우리 ()에 근거가 되는 것이 풍부하다.

속히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이라고 한다.(고전 15:45, 6:17) 그리스도롤 영이라고 하여서 우선 제일 우리는 이로써 그 자신을 위한 생활을 엿보려고 한다.

사람이 사업을 위하여 살고, 사명을 위하여 산다는 일도 말이 되며, 또한 그것을 깊이 생각하여 말하면, 이로써 사람의 생활이 깊이 주장되기도 하나, 그러나 가장 양심적인 생활에 있어서는 사람은 그 사명을 위하여 산다는 일에 앞서서 자신을 선한 것으로 하는 일이 있지 않으면 아니 된다. 더욱 하나님을 상대로 하는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그가 하나님의 것을 얻었다는 확신, 말의 어폐에도 불구하고 말하면 그가 하나님 같이 되었다는 확신을 받아 갖지 않으면 아니 된다. 다만 밖을 향한 발전이 아니라, 위를 향한 상승이 없으면 아니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도 이런 의미의 생활이 없으면 아니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에 있어서 그가 인류를 향한 사명을 다하는 일에 앞서, 그가 그 자신으로서 무엇이 되는 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데, 그래서 우리가 생각한 것이 그는 영을 목적하고 생활 하고, 그리하여 땅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영이 되고자 노력하고, 싸웠나니 이것이 그의 생활의 지성소이다. 그는 다만 하나님 아들의 권능을 발휘하고 세상에서 행한 것이 아니라, 그는 그 자신의 양식으로 하나님의 것을 얻으려고, 영이 되려고 노력하고, 싸운 것이다. 이렇게 되지 아니하여서는 그가 화육한 의미가 충분치 못하다. 다만 하나님의 현현이 인류의 구원이 되지 못하고, 인류의 구원에는 그리스도의 화육이 실현된 所以(소이)이다. 그리하여 육이 된 그리스도는 역시 신앙 행위로써 그 자신이 하나님의 것을 빼앗지 않으면 아니 되었나니, 즉 영에의 비약을 하여 영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영인 그리스도가 인류 중에 존재한 일, 이것이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요, 구원인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계시인 일을 우리는 이에 있어서 생각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영인 그리스도의 존재,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이다. 하나님은 영인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인류를 향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영인 그리스도에게 결부하여 신앙생활을 생각하는 일은 용이한 일이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 ν Χριστ -엔 크리스토- 있는 자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영에 있는 ν πνεματι -엔 프뉴마티- 자이고, 이런 자의 생활은 영을 따라 걷는 일 περιπατεν κατπνεματι -폐리파테인 카타 프뉴마티-이다. 그리스도는 영이고, 그리하여 영에 있는 자가 신자이고, 영을 따라 걷는 일이 신자 생활이다. 그런데 이 영에 있는 일, 영을 따라 걷는 일이란 어떤 내용을 가지는 것일까?

그리스도가 영임에 대하여 우리는 육인 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활을 영의 범주에서 생각한 것은 그것이 결코 내재적인 의미의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가 영이 되었다고 하여도, 그것은 역시 그의 신앙생활로 그리 된 것이지, 그 안에 있는 것의 발전으로 도달한 것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되어서는 그가 육이 되었다는 일이 의미 없게 된다. 그렇지 않고 그는 역시 육인 자가 되어서 알지 못하는 세계에의 모험과 비약으로 영이 됨을 얻은 것이다.

우리는 본래부터 영을 그런 초월적인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육인 자라고 하는 경우에 그 육은 온전히 영과 거리가 있는, 영에서는 멀리 떨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신앙생활은 그것이 이 영과 육과의 관계인 것이다. 영으로 말미암아 육은 육이 된다. 그리고 영으로 말미암아 육은 영에 구출해 냄을 받지 않고는(받아야 함이) 마지아니한다. 그래서 이것이 신앙생활이다.

육은 육을 알지 못한다. 자기가 육인 줄도 모르고 있는 것, 이것이 육의 특징 이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육이 육으로 드러남에는 영의 조명이 요구된다. 영의 조명으로 육은 육으로 드러난다. 영이 없이는 육은 알려지지 아니한다. 온전한 암흑, 무지식, 무신경, 이것이 육의 모양이다. 고로 우리가 우리를 육으로 앎에는 영의 조명이 없으면 아니 된다. 하나님께로부터 행위가 앞서서 옴이 없으면 우리에게 신앙생활이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이를 이름이다.

우리가 우리의 육을 알지 못하고, 무감각하고 있으면, 거기에 무슨 신앙생활이 있을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신자이지만 신앙생활이 없는 것이 됨은 그들이 육에 타락하여 있고, 그리고 육을 육으로 알지 못하고 있음이다. 고로 신앙생활에는 하나님께로부터 행위도, 영인 그리스도의 존재가 절대로 필요하고, 또한 영인 그리스도가 임하여 있어서, 거기에는 육을 부정하는 신앙생활이 필연적으로 있어지지 않을 수 없다.

영으로 말미암는 육의 지식,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바 진리 지식이다. 진리 지식이란 영으로 말미암아 심판 받아 육을 육으로 아는 지식이다. 우리는 일찍이 진리 지식을 사물 진상의 지식이라고 하고, 그것은 영의 조명으로 알려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당시에 나는 그것을 더 충분히 論明(논명)하지 못하였 으므로 약간의 오해가 일어났다. 사물의 지식이란 나를 떠난, 여기저기에 놓여있는 사물의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사물에 대한 영의 의미의 지식이다. 그래서 그것은 사물 그것이 아니고, 사물에 대한 의미의 심판이고, 그리하여 그것은 필경 육이 심판 받는 일, 육이 육으로 드러나는 일이다. 사물을 의미한 육이 심판 받는 일이다. 사물에 대한 육의 어두운, 미련한, 죄 된 의미가 부정되고, 사물에 대한 영의 의미, 그것이 그 진상의 지식인데, 이것이 우리로의 영으로 말미암아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이 영의 의미의 파악이 우리의 구원이 된다. 우리가 구원 얻는다는 일은 그 때 그 장소의 사물에서 우리가 구출되어 해방되는 일을 뜻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의론을 더 명료하게 하기 위하여 더 사물과 육의 관계를 말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원래 나라는 것은 구체적으로는 그 때 그 장소의 사물과의 관계에서 나를 의식한 나이다. 나는 추상적인, 다만 나라고 생각하는 내가 아니다. 나라는 실존은 그 때 그 장소에 나를 圍繞(위요)-둘러 싼- 사물과의 관계에서 강하게 의식한 것이다. 고로 나를 위요한 사물과 나와는 밀접하여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러니, 육이란 실존은 그 때 그 장소에 나를 둘러 싼 사물과 밀접한 관계에서 서 있는 것이다. 이에 있어서 사물은 육을 한정하고, 육은 사물을 한정한다. 고로 우리가 말한 바와 같이 사물의 의미는 육의 의미가 되고, 육의 의미는 사물의 의미가 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찍이 진리 지식을 사물의 진상의 지식이라고 한 것인데, 그것은 그 사물이 육과의 밀접한 관계에서 서 있는 것인 한에 있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앙생활이란 사물과의 관계에서 서 있는 육이 영으로 심판 받음으로 말미암는 바, 진리 지식의 획득이게 되는데, 이런 일이 생활이 됨은 ()을 기다릴 것도 없다. 왜 그러냐 하면 이는 일상의 일임이다. 내가 나를 둘러 싼 사물 중에 있어서 육인 자인 일은 일상의 일로 그러하고, 그래서 나는 날마다 이 육에서 구원 얻지 않으면 아니 되는 일로, 매일의 요구로 나는 영을 쳐다보고, 때마다 영의 새로운 심판이 나에게 가 하여서야 나는 구원 얻는 자임이다.

이 의미에 있어서는 어제의 구원은 오늘의 구원이 아니고, 오늘의 육은 오늘의 육으로 육이다. 산 세상에서 사는 우리의 사정은 나날이 바뀐다. 한 사정 중에 서 있는 나는 다른 사정 중에서 서 있는 나와 별도의 ()이다. 그것은 서로 독립하여 있는 다른 육과 다른 육이다. 그러니, 이 육에서의 어제의 구원이 오늘의 구원은 못되고, 오늘의 구원이 내일의 구원은 못된다. 그래서 육인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은 날마다 요구되는 것이요, 영의 현현은 때마다 요구되는 것이다. 그래서 육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게 되는 일(8:8)은 나날의 생활이다.

자연대로 있는 우리는 언제든지 육이다. 우리가 새로운 사물에 둘러 싸여, 그 중에 있는 육인 나로 서게 되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오늘 새로이 육인 자로 여기에서는 일을 어제의 영의 은혜가 조금도 방해되지 아니한다. 이 일을 또한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영에 올라서는 일은 거기에 하나님의 영의 은혜가 일하고, 우리의 믿음이 동원되어, 그것은 수상한 일이 아니나, 그러나 우리가 육에 타락하는 일은 얼음 위를 밀치는 것 같이 쉽고, 극히 자연스럽다. 그리하여 우리가 육에 있는 일을 우리는 처음에는 자각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육을 앎에는 우선 기도가 요구된다. 그리고 오직 위로부터 오는 영의 조명을 받아서만 우리는 우리의 육을 알게 된다.

우리가 우리의 현재를 육인 자라고 명시 받아서는 이제 우리는 그냥 있을 수 없다. 우리는 회개하며, 애통하며, 나를 십자가에 내어주어 죽게 하고, 그리고 믿어서, 천국을 빼앗으며, 영에 비약하며, 다시 그리스도를 옷 입듯 하는 은혜를 받기 까지는 평안을 얻지 못한다. 그래서 신자가 육을 알지 못하니, 신앙생활이 없어지는 것이다.

만일 그날그날 내가 육인 자인 일을 깨달음이 없이, 내가 믿는 자이거니 하고, 나날을 보내면 이는 그 신앙이 관념적인 것에 지나지 않고, 그것은 그의 실존에 관계하여 있는 신앙은 아니다. 그것은 생활이 없는 신앙이다. 그것은 죽은 신앙이다. 육을 알지 못하여, 나날의 육의 자각이 없이 지내니, 신앙은 생명이 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현재를 육으로 자각치 못하게 되는 일은 원수스러운 일이다. 이를 알면 어찌 우리의 신앙이 잠 잘 수 있는 것일까? 그러니, 산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자는 나의 현재의 무지, 무관심, 평안은 그것이 내가 육에 타락하여 있는 일임을 無堤(무제)로 하고, 그리고 육을 알기 위하여 기도할 것이다. 기도 중에 우리는 영의 여명을 통하여 점점 육을 육으로 알게 되며, 이에 신앙 행동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우선 나는 나대로는 육인 자일 것으로 정하고, 육을 밝히기 위하여 기도하여야 한다.

내가 서 있는 장소, 나돌아 다닌 사물, 거기에 있는 나는 항상 육인 자이다, 거기에 있는 내가 나대로 행하여서는 나는 육을 따라 행하는 자가 되고 만다. 그리하여 점점 더 깊이 육에 파묻히고 만다. 신자는 매일 매사에 주의 깊은 기호로 경건히 걸어야 한다.

위로부터 오는 영으로 말미암아 육이 심판 받음으로써 진리를 파악하여 영에 이행케 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이에 있어서 신앙은 그것이 행위다. 다만 관념적으로 세상과 사람을 諦視(체시)-주의하여 봄-하고, 영원을 동경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고, 그것은 구체적으로 육을 버리고 영에 비약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진리는 이데아적인 것도, 주관의 논리 같은 것도 결코 아니고, 그것은 구체적인 세상에서 행하는 행위를 포함한 것이다. 그래서 진리는 곧 행위다. 그리하여 신앙생활은 진리 행위의 반복이다.

우리가 신앙에 깨었을 때는 우리가 그 때의 육인 자기를 어떻게 처치하고, 이에 자기를 영에 인도한 것이니, 이것이 진리 지식의 획득이요, 그것이 진리 행위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 행위는 진리 행위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 생활관은 그것이 개인주의적이란 평을 받기 쉽다. 그러나 신앙과 신앙생활은 우선 한 번은 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영역에서 생각할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님과 대면하는 개인이 인정되지 아니하는 데에 신앙이 바르게 말씀될 리가 없다.

나는 신앙 생활관은 역시 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하고 한 차례 생각할 것이라 하노라. 그리고 그런 개인의 대 하나님 행위가 또한 최고의 논리적 가치가 있는 행위이면, 이 개인적 신앙 행위는 시인될 것이다.

원래 기독교 윤리는 다만 인간 사회의 선을 목적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의 목적은 천국의 증거에 있다. 신자의 신앙 행위로써 천국이 증거 되면, 이로써 그것의 () 세상 사명도 다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천국 증거의 목적은 그것이 신자 개인의 () 하나님 행위에서만 강하게 증거 되는 것으로 안다. 사회적 실존인 인간이 자기를 육으로 하여 버리고, 자기를 하나님의 절대의 말씀인 영에 移行(이행)하는 일이, 사회에 영향이 없을 리가 없고, 사회는 신자의 행위에서 강하게 천국의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신앙생활이 개인주의가 아님은 교회가 있음으로서다. 교회의 필연은 또한 다른 방면으로부터 강하게 주장될 것이나, 신앙 생활관에 관한 한에 있어서도 교회는 거기에 생명적인 관련을 가지는 것이다.

영은 교회가 증거하는 것이요, 교회의 설교에 있어서 영은 밝히 증거 된다. 그래서 우리의 육은 교회의 영을 증거하는 설교에 있어서 심판 받는다. 그리고 우리가 육을 부정하고, 영에 구원되면서 포착되는 진리는 그것이 교회 중에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말씀으로 반환되는 것이다.

또 다시 말하면, 영은 결코 인간에 내재한 것이 아니고, 그것은 객관적인 것이요, 公共(공공)한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교회적인 것이다. 그래서 영의 심판을 動因(동인)으로 하는 신앙생활은 그것이 우선 한 차례는 개인적인 일이 되나, 그러나 그것은 곧 교회적인 것이 된다. 그리하여 신앙생활은 강하게 나타나면서, 또 그것은 곧 공공한 것이 되는 것이 신앙이다. 신앙에 있어서는 거기에 개인이 강조되면서, 또 그것은 곧 교회의 강조가 된다. 개인적인 일이 곧 교회적인 일이 되고, 교회적인 일이 곧 개인적인 일이 되는 것이 신앙이요, 신앙생활이다. 신앙생활의 개인주의는 곧 강한 교회주의적 현실이게 된다.

 

바르트의 하나님 말씀의 신학은 다만 초연한 하나님의 사실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데, 그리하여 그것이 내재적인 세계관으로부터 기독교를 구원하여, 그것을 하나님께로의 것으로 말하게 된 공적은 대단하나 그러나 그런 신학으로 신앙생활은 주장되지 못한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말하지 못하고 초연한 하나님 사실만을 말하고 있으면, 그것이 내재적인 세계관과의 싸움을 계속하는 한에 있어서는 불꽃 튀는 논의가 될 것이나, 그러나 그 논의가 끝나면, 그것은 역시 한 관념론에 떨어져서 생명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신앙을 영원히 생명적인 것으로 하여 갖지 않으면 아니 된다. 신앙이 생명적인 것으로 되려면, 그것은 생활하는 신앙이 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래서 영의 심판으로 말미암는 육의 부정의 진리 행위로의 신앙생활은 그것이 영원히 신앙을 생명적인 것으로 하리라.

영적

기독교론

 

처음 찍은 날 | 2015115

처음 펴낸 날 | 2015119

지 은 이 | 최 태 용

펴 낸 이 |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총회

엮 은 이 | 전 병 호

편 집  표 지 디 자 인 | 김 옥 주(친구교회)

인 쇄 인 | 대 봉

 

본 편집본은 고 채문규 장로의 번역본을 재 엮은 것이다.

 

주소 서울시 종로구 종로 6210-1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전화 (02) 762-7529

홈피 www.kec21.or.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