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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영과 진리



영적 기독교론 계속 4

전병호 by  조회 수:27 2015.01.18 15:46

영적 기독교 (17)

 

신앙과 신앙생활 (3)

 

구원론의 진리 내용은 그 구원을 요하는 인간의 상태를 무엇으로 봄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할 것이다. 사람을 죄인이라고 보아서 이에 그 구원론은 속죄 교의가 되어 나타나며, 성결 주장이 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구원을 요하는 상태는 그것을 죄라고만 해서는 오히려 다하지 못하고, 그것은 좀 더 포괄적이요 총체적인 표현을 요하는 것이니, 우리는 그것을 다시 말하여 이라고 한다. 그래서 영적 기독교에 있어서 구원을 요하는 인간 상태는 그것이 육이다.

육이란 말로써 우리는 거기에 죄 문제를 내포하고도 또한 죄라고만 하여서는 다하지 못하는 바, 구원을 요하는 인간의 상태 전부를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육은 구원받아야 할 사람의 전 존재이어서, 그것은 영에 대조되는 것이다. 사람이 구원될 상태는 그것이 다만 죄의 사면만으로 그치지 않고, 다만 죄의 세력을 죽임으로 그치지 않고, 그것은 영이 되어야 하고, 그 구원의 상태가 영이 될 것임에 대조되는 것으로, 그 구원을 요구하는 상태는 인 것이다. 즉 우리는 구원 얻어 영이 되어야 할 자로 생래의 우리는 육인 자인 것이다. 우리는 육인 자인데,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될 상태는 영인 것이다.

우리는 온전히 육인 자요, 우리가 ()()가 되기 위해서는 온전한 타자인 그리스도의 것을 받아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온전히 육인 자의 신앙 대상인 자의 의미로 그리스도는 영인 것이다. 그래서 이 온전히 육인 자가 영이 되지 않으면 아니 됨에 있어서 절대로 요구되는 양식은 그리스도이니, 이 의미로 그리스도는 생명의 떡인 것이며, 그 살과 그 피는 참 음식인 것이다.(6) 이에 이르러 우리의 말하는 바, 영과 육의 의미는 얼마만큼 명확하여진 줄로 안다.

우리의 죄가 사면되고, 죄가 닦여지면 구원이 다하는 것임과 같이 생각해서는 부족하다. 사람은 원래 선한 것인데 중도에 죄로써 더럽혀졌던 것을 그리스도의 속죄적 행동으로 그것이 다 씻겼으니, 이것이 구원이라고 유교 사상적으로 기독교의 구원을 읽어서는 아니 된다. 기독교의 구원은 그런 것이 아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사람은 언제든지 육인 자요, 그는 영인 그리스도와 부절의 사귐을 얻어서만 영된 자임을 얻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영, 육의 생각은 신약성경의 지지를 충분히 얻는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신약성경에 있어서 바울은 육을 대개는 죄에 관계시켜서 썼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육은 원래 악한 것이 아니고, 그것이 죄의 자리요, 죄의 기구인 한에 있어서 안된 것으로 되어있다고 하여 즉 육이 악한 것이 아니고 죄가 악한 것이라고 하는 많은 사람의 의견은 반드시 정확히 바울이 쓴 육의 의미를 설명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물론 바울은 희랍사상에 입각하여 물질, 악의 이원론적인 생각으로 육을 악하다고는 생각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원론에 떨어짐을 두려워하여 육이 악한 것이 아니고, 죄가 육을 그 자리로 하며, 그 기구로 함이라고만 하여서는 바울이 쓴 이란 단어의 뜻을 충분히 해석하지는 못한 것이다.

바울은 육의 일들이라고 하여 음행, 더러움, 호색 등의 죄를 열거하였다.(5:19~22) 또한 육의 所欲(소욕), 육의 所願(소원)을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노여움의 자식들인 것을 말하였다.(2:3) 이에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죄가 근본이란 것이 아니고, 육의 일, 육에서 일어나는 소원이 죄로 나타나는 것이어서 죄보다도 더 근본된 것은 육인 일이다. 그뿐 아니라 바울은 또 말하여 육은 영을 거슬러 소원하고, 영은 육을 거슬러 소원한다 하며,(5:17)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면 우리는 육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고 하여(8:9) 그는 이에 확실히 육을 영에 대조되는 것으로 하였나니, 이 모든 절들을 종합하여 생각하면 바울에게 있어서 죄보다도 더 근본 된 문제는 육인 일을 결론으로 하여 옳을 것이다. 즉 바울에게 있어서도 구원을 요하는 인간 상태의 더 근본적이요, 더 포괄적인 표현은 이란 말로 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요한복음에 있어서는 육은 그것을 반드시 죄에 관계시키지 않고 그것을 써, 생래의 사람의 전 존재를 가리켜 씀이 있다. 그리하여 육은 죄의 문제를 포함하고도, 반드시 죄가 아니고도 사람은 구원 얻어야 할, 사람의 존재를 표하는 말이 된다.

사람은 다만 죄 때문에 구원 얻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또한 그가 육이기 때문에 구원 얻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구원을 요하는 상태를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사람은 또 다른 생명으로 한 번 더 다시 나야 한다고 하는 신생의 의의를 충분히 알지는 못하는 것이다. 구원은 다만 죄를 없이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육인 자가 영의 생명을 하나 더 받는 일인 것이다.

육을 죄악의 근원이라고 보는 이상, 육이 악하다고도 거의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육이 악하다고 아주 따서 말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육을 아주 악이라고 하지 않고, 죄악 이상의 문제를 거기에 포함시키는 데에 우리가 구원을 요하는 인간 상태를 죄라고 하지 않고, 육이라고 하는 소이(까닭)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육이 악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육은 영이 아닌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육은 우리가 영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부정할 것이라고 한다. 이에는 선악의 윤리 관념이 포괄은 되었으나, 그러나 또한 이는 윤리 관념을 초월한 것임이다. 즉 우리는 육에서 일어나는 일체 의사와 행동은 그것을 다 죄라 하여 버려야 할 것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가령 그 의사와 행동이 선한 것에까지도 그것을 육이라고 하여 부정할 경우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육의 각 의사와 행동을 다 죄라 하여 그것을 금할 것이라고 하는 금욕주의에 달아나는 것이 아니다. 그 육의 행동을 일일이 문제 삼아 검사하는 그런 세심한 수양에 빠지려는 것도 아니다. 육의 의사와 행동은 그것을 그대로 시인하여서 가한 경우가 많다. 공복에 탐식은 가하다. 내외의 동침을 일일이 문제 삼을 것은 없다. 그러나 일이 종교적 의의를 띈 것에 있어서 영의 뜻이 행하여야 될 자리에 육의 뜻이 일하면 우리는 그것을 부정하여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행동이 우리의 하나님과 관계에 의의를 가진 일에 있어서 영의 일이 행하여야 될 자리에 육의 일이 일하면 우리는 그 육을 부정하여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 있어서 선악의 판단은 그것이 반드시 가당한 것이 되지 않는다. 육의 일은 그것이 선한 것이라도 그것이 육의 일이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영의 일이 아닌 이상, 그것이 영의 일이 행할 자리에 서면 그것은 부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앙생활의 문제는 하나님이 윤리적으로 일하시면서도 윤리이상의 일임과 같이 그것은 윤리 관념을 포함하고도 윤리 이상의 일에 옮겨가는 것이다.

영적 기독교 (18)

 

신앙과 신앙 생활 (4)

 

기독교 신앙은 그것이 信經(신경)을 승인하는 일이 아니고, 교리를 이해하는 일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것이 생명이고, 그 생명의 필연인 바 생활이다. 크리스천이 소유한 생명은 세상과는 구별되어 존재하는 것이지만, 즉 그것은 세상은 없다 하더라도 있을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세상과 생활에서 자기를 풍부히 하며, 자기를 확장할 수 있는 것이다.

크리스천의 생명은 그것이 자기를 풍부히 하기 위해서 세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 있어서 온갖 사물에 마주쳐 그 사물 처리에 그 태도를 결단함으로써 자기가 풍부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크리스천의 신앙은 그 생활을 위하여 세상을 요구한다. 세상이 없이는 그것은 생활의 일이 없어서 그 생명인 힘을 쓸 데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신앙 생명을 창조 하기 위하여 그 생활 생장의 무대로 세상을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선 둔세주의(은둔주의)가 기독교가 아닌 것을 알지 않으면 아니 된다.

세상에는 그 신앙을 위하여 세상을 피하여 산중에 도망하는 자가 많다. 그것은 이교의 입산의 생각을 기독교에 옮겨 가진 것으로 그것은 크리스천의 바른 태도가 아니다. 도리어 크리스천은 그 신앙생활을 위하여 세상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리하여 그 마주친 사물에서 그 태도를 결정하여 그 신앙 생명을 풍부히 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그 마주친 사물에서 나의 태도를 영에 결정하는 일이다. 크리스천은 육에 있는 자가 아니고 영에 있는 자이다.(8:9) 이 영에 있다는 일은 어떤 추상 세계에 사는 일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구체적인 생활에 있어서 육에 아니고, 영에 그 입장을 세우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 부딪친 사물을 치리함에 있어서 영의 입장을 세우는 일은 언제든지 육의 희생을 그 다른 한쪽 면으로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육이 즐거워하고, 육이 장성하는 일에 대하여 우리는 그 육의 욕망을 희생하고, 그 육을 죽임으로써만 영에 서게 되며, 영에 있게 되는 것임이다. 언제든지 육의 욕망은 영을 거스르고, 영의 욕망은 육을 거슬린다.

우리는 신앙을 위하여 영과 육의 전쟁에 들어선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마주치는 사물에는 그것이 종교적 의의를 띠는 것인 한에 있어서, 거기에는 반드시 영과 육의 문제가 있다. 그 마주치는 사물을 영에 있어서 취급할까? 육에 있어서 취급할까? 이것이 언제든지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을 만일 육에 있어서 취급하면 영은 죽는다. 영에 눈이 뜨인 자에게 있어서 그 최고 의식이 아랫것, 헛된, 용렬한 세력에 압도됨은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죽음의 타격이다. 그는 아무래도 그 영을 살리고, 그 육을 희생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자이다. 그런데 내가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기뻐하나, 그러나 내가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마음의 법과 서로 싸워 나를 나의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굴복케 함을 본다.

!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7:22~23)이다. 즉 우리에게 있어서 육의 힘은 영의 의식보다 강하다. 보통대로는 양자의 싸움은 언제든지 육의 편 승리이다. 그래서 우리가 육으로가 아니고, 영으로의 삶에는 다른 법이 있는 것이다. 신앙이 곧 그것이다.

신앙으로써 우리는 능히 강대한 육을 유린하고, 영의 뜻을 사물에 투철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신앙은 그것이 영의 승리자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계되는 것임이다. 여기에 신앙이라 함은 바울의 속죄 주장에 있는바 신앙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신앙과는 다른 신앙이다. 이는 차라리 복음 중에 잘 설명된 신앙이다. 거기에서 신앙은 예수의 권능에 믿음을 주는 일이었다. 예수는 이 신앙에 응답하여 권능을 행사하여 이적을 행하는 것이었다.

예수는 사람이 자기와 관계하여 거기에서 이적이 성취되게 하는 신앙, 그런 신앙이 사람에게 있게 하기 위하여 노력하며, 그것을 찾으면 이를 칭찬하셨다. 그래서 예수는 사람의 믿음을 보고(2:5) 그들의 병을 그 권능으로 고쳐주고는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혹은 네 믿음대로 되라”(8:13)는 말씀을 그들에게 주는 것이었다. 그는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믿어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말하기를 여기에서 옮겨서 바다에 던져지라 하고, 제 마음에 의심하지 않고 제 말한 대로 되리라고 믿으면 그대로 되리라. 그런고로 내가 말한다. 무엇이든지 기도하여 구할 때 받았다고 믿어라, 그리하면 그대로 되리라.(9:23~24) 여기에 구원의 성취를 위하여 우리에게 요구되는 신앙이 잘 나타나 있다.

신앙은 그것이 신적 권능을 불러일으키게 되어 일어나고, 거기에 신앙이 있어서는 거기에 신적 권능이 초래되어 거기에는 이적이 성취되는 것이다. 신적 권능은 신앙을 통하여서 그 충분한 효력을 발휘하여 이적을 성취한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으로써 신적 권능으로 이적이 행하여지게 하여 우리에게서는 육이 죽고, 영이 사는 일이 행한다. 즉 우리가 세상에서 만나는 사물에 있어서 그것을 육으로 취급하지 않고, 육을 죽이고, 그리고 그것을 영으로 취급하여 영으로 사는 일은 신앙으로, 신적 권능의 이적으로 가능하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그것이 이적의 생활이다. 신앙생활에는 초자연적인 신적 권능이 자유로 들어와서 일한다. 그래서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 이 신앙 결단으로는 모두 가능이다.(9:23) 그래서 신앙으로 이적이 행하여지게 하여서 우리에게 육을 죽이고, 영으로 사는 것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물을 육으로 아니고, 영으로 처리하는 신앙을 결단하기 위하여 기도한다.

기도에 있어서 우리는 성령의 도움을 받으며, 그 밝힘을 받으며, 신적 권능의 일을 받아 우리는 그 부딪친 사물을 처리하는 입장이, 태도가 영에 결정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신앙생활은 그것이 신앙이어서, 그것은 자기란 범위 안의 운동이 아니고, 그것은 타자인, 영의 권능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계되는 것인즉,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체적 생활에 어떻게 없어서는 아니 될 이로 관계하는 것을 가히 알 것이다.

신앙생활이란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권능 때문에 우리는 사물에 육을 따라가 아니고, 영을 따라하는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또한 우리는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는 영이라는 주장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이 되어 나서 사물에 육을 따라가 아니고, 영을 따라 사셔서 그것을 완성하심으로 영이 되신 자이다. 그래서 성령이 영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주실 때에 우리에게서는 또한 육이 철저히 부정되고, 영이 완전히 승리를 얻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바울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래서 이제는 벌써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나의 안에서 그리스도가 산다”(2:20)는 말이 의미하는 바이다.

그리고 우리가 육으로 죽고, 영으로 사는 일은 세상에서 부딪치는 사물마다 처리에 있어서 그러한 것이니, 그렇게 사물마다에 있어서 영의 태도의 결단에 관계되어서 영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일상의 구체적 생활에 긴밀히 관계되는 것이다. 우리의 매일의 생활에, 우리의 일마다 처단에 그리스도는 없어서는 안 되는 이이다. 그리스도 없이는 우리는 그 일에 있어서 영을 살리고, 육을 죽이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영임을 알아 그리스도는 그렇게 긴요하고 절실하게 우리의 매일의 생활에 관계되는 이가 되나니, “예수 그리스도는 영이란 우리의 신조는 우리를 그렇게 그리스도에게 밀접히 관계시켜 우리의 신앙을 풍부히 살리는 신조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육을 부정하여 십자가에까지 하며, 그 영을 살리어 부활에까지 하여서 그는 우리의 영적 생활을 위한 영원한 원천이 되신 것이다. 이제 우리가 육을 부정하, 영으로 살아 나아가는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그는 영원히 우리의 신앙 대상이다. 그는 우리의 영의 생활을 위하여 부절의 도움을 주신다. 우리는 그를 대상으로 신앙하고 영의 생활을 하여 영원에 나아간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영으로 살려고 하는 요구와, 또한 영으로 살아지는 만족을 통하여 영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나아가나니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우리의 영원한 생명은 증장하는 것이다.

영적 기독교 (19)

 

신앙과 신앙생활 (5)

 

이상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신앙생활은 그 사물 처리에 있어서 그 육을 부정하고, 그 태도를 영에 결정하는 일이어서 이를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영의 생활이다. 그래서 영의 생활은 이를 바울의 어구로써 설명하면 그것은 육은 따라 κατσρκα -카타 사르카-가 아니고, 영을 따라 κατ πνευμα -카타 프뉴마- 사는 생활 이다.(8:4~5) 그리하여 영의 생활, 즉 육을 따라가 아니고, 영을 따라 사는 것은 그것을 다 내용적으로 설명하면 이는 사물에 육의 뜻을 행하지 않고, 영의 뜻을 행하는 일이다. 동일한 사물을 의미하는 바에 육의 뜻이 있고 영의 뜻이 있다.

그래서 육의 뜻은 그 사물에 대한 어두운 지식, 또는 헛된 지식이고 그 사물에 대한 영의 뜻이야 실로 그것이 밝은 지식, 실체의 지식이다. 그래서 이 밝은 지식, 실체의 지식을 한 말로서 말하여 나는 그것을 진리 지식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육의 헛된, 어두운 지식을 물리치고, 영의 밝은 진리 지식으로 사물을 처리하나니, 이를 간단히 말하면 신앙생활은 곧 진리 생활이다.

우리가 한 사물에 부딪친다. 그 사물을 처리하는 우리의 의지와 행동은 우선 육적이다. 즉 생래의 사람대로가 그 사물을 처리한다. 그리하여 이는 특히 그 마주친 사물의 종교적 의의가 있지 않은 것인 한에 있어서 가하다. 즉 우리는 밥 먹을 때가 되어 주린 맛으로 받을 밥을 아무 문제를 일으킴이 없이 먹어서 가하다. 그러나 같은 밥이라도 그것에 종교적 의의가 붙어 있는 일이 있다. 즉 내가 그 밥을 먹어서는 나의 하나님과 관계가 상하는 일이 있다. 그런 일에 있어서는 나는 斷然(단연)히 육의 식욕을 물리치고, 굶어 죽을지언정 그것을 먹지 말아야 한다. 즉 같은 밥을 먹는 일이나, 그 밥을 먹음으로 육이 승리하고, 영이 패하여 죽을 경우에는 우리는 신앙하여 기적적 권능의 일을 받아 육의 뜻을 물리쳐 육을 죽이고, 영의 뜻을 따라 행하여 영을 살려야 한다. 그래서 사물에 대한 육대로의 뜻은 사실 의미가 없는 것이다. 실재가 없는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사물에 대한 의의는 그것이 유일한 실재자와 관계하여서만 그 실재적 의의가 생기는 것임이다. 다만 ()이 존재하고, ()이 선하고, ()이 아름답다는 것만으로는 그것은 실재적 의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실재자와 관계에 있어서 실재자의 영원한 의지와 목적에 결부되어서만 그것에는 실재적인 의의가 붙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의지와 목적을 봄이 없이 ()이 선하며, 미려함을 보아 거기에 무슨 의의가 있을 것인가? 그래서 우리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그 마주치는 사물을 육의 뜻대로 처리하는 생활은 그 생활이 있기는 있을지라도 그것은 의미 없는 생활이다. 즉 진리가 없는 생활이다.

그래서 우리는 부딪치는 사물을 될 수 있는 대로 종교적 입장에서 처리하기를 배워, 우리의 생활을 의의가 있는 것으로 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부딪친 사물 처리에 있어서 그것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어떤 의의를 가졌는가를 염려하여 기도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리하여 그 사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의 의미를 찾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사물에 있어서의 이 의미는 하나님의 의지가 그것을 우리에게 준 의미요, 그리고 그것은 그것으로써 우리 영의 행동이 결정되는 것이며, 나는 그것이 육의 뜻에 대조되는 것이므로 이를 사물에 대한 영의 의의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사물에 대한 영의 의의,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생활에 참 의미를 주는 것이어서 그것은 실재요, 진리이다. 그래서 영의 생활은 이 영의 의의,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이므로 그것은 실재생활, 진리생활이다. 예컨대 우리가 어떤 때에 병을 앓았다고 하자. 그리하여 우리가 병을 앓았다는 사실, 병이란 것은 얼마나 괴로운 것이라는 경험만으로는 그것은 의의가 없는 것이다. 이 지식, 이 경험은 진리 지식이 아니고, 그것은 어두운 지식, 헛된 지식이다. 그러나 그 병의 의의를 우리가 대 하나님 관계에서 찾아 그 병이 과연 하나님의 이러 저러한 교훈을 위하여 있었음을 앎은 그것이 우리의 영혼을 양육하는 진리 지식이니, 즉 그 병든 사실에 대한 실재적 의의인 것이다. 그렇게 다만 ()의 사실의 지식은 그것이 우리의 진정한 생활을 위하여 별 소용이 없는, 의미가 없는 헛된 지식이고, ()의 영의 의의, 그것이 우리의 진정한 생활을 구성하여가는 유용한 것이어서 그것의 지식이 실로 ()의 참 지식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사물에 부딪치면서 사는 일은 그것이 마치 暗夜(암야)의 행로와 같다. 우리는 다만 ()에 부딪칠 뿐이요, 그것의 정체와 그것의 위치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온전히 어두움 속에서 해맨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와 부딪친 사물의 진상을 알고 싶어 빛을 요구함이 대단하다.

긴 밤은 필경 다하고, 일광이 세상을 조명한다. 이에 우리가 헤매던 장소, 우리에게 부딪치던 사물의 진상은 명료하게 알려져서 우리는 자기를 비판하며, 큰 지식에 도달한다. 성령의 조명, 해석이 없이 우리가 사물을 인식함은 다만 암야에 ()에 부딪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영이 그 사물에 대한 진리를 알고자 하여 갈구하는 요구에 응하여 임하는 성령의 그 사물에 대한 해석을 받아 이에 모든 것을 밝히 안 기쁨과 영광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상에 의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진리 지식은 그것이 사물의 진상의 지식인 동시에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뜻의 지식 ἡ ἐπίγνωσις τοθελήματος θεο -헤 에피그노시스 투 델데마토스 데우-(1:9) 일이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가 성령의 빛 중에서 본 사물의 진상은 그것이 ()을 그 있는 모양대로를 아는 일인 동시에 또한 그것은 ()을 그렇게 의미하신 자의 마음, 뜻을 아는 일이 됨이다. 즉 사물의 진상의 지식은 실재자가 그의 영원하신 뜻과 목적에 의하여 사물을 그렇게 있게 한 것, 그렇게 배치한 뜻을 아는 일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물의 진상을 알아 하나님의 뜻을 알아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그러면 신앙생활은 그것이 사물 처리에 있어서의 영의 생활, 진리 생활이면서 또한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생활이다. 구체적인 사물을 영을 따라 진리로써 처리하는 일은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일에 결국 이르게 된다. 이에 구체적 세계의 생활과 초연한 하나님을 아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피차에 떨어질 수 없는 것으로 결부되어 있게 된다. 인생을 구체적으로 사는 일이 하나님을 아는 일이 됨, 이는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인생을 살아 하나님을 알아 영원한 생명을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영의 생활, 진리 생활의 개척자 ἀρχηγός -알케고스- 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는 우선 우리의 신앙생활의 모범이다. 그러나 그는 다만 우리의 신앙생활 영의 생활- 진리 생활의 개척자, 모범으로만 우리와 관계되지 않는다. 화육하여 육을 따라가 아니고, 영을 따라 살아 진리인 생명이 되신 그리스도는 그 자체가 임하여 현존함으로써 우리의 사물 처리의 생활에 있어서 그 육의 부정, 그 영의 승리가 되어 주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사실 생활에 있어서 육을 부정하고, 영을 살리는 생활을 함은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성령으로 우리에게 임하여 현존함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실 생활에 있어서 영의 생활, 진리 생활을 하여 일마다 그리스도 자체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이 의미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 그것이고, 우리의 생활 그것이다. 나는 앞에서 신앙생활은 그것이 사실 생활이면서 하나님을 아는 생활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신앙생활이 하나님을 아는 생활인 일은 그것이 그렇게 실체적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일을 내용으로 하여서 그러하다. 즉 우리는 사물 처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살을 먹으며, 그 피를 마심으로 실체를, 그리스도를 알아 또한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일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일의 내용이다. 우리의 그리스도 지식의 증장은 곧 우리의 그리스도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의 성장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곧 홀로 하나이신 참 하나님을 아는 일이 된다. 그리하여 신앙생활은 그것이 그리스도를 아는 생활, 하나님을 아는 생활이어서 그것은 곧 영원한 생명의 생활이다. 우리는 지금 사실 생활에 있어서 신앙생활을 하여 영원한 생명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적 기독교 (20)

 

신앙과 신앙생활 (6)

 

이상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신앙생활은 그것이 사물을 그 진상대로 처리하는 생활이다. 그래서 나는 그 행위를 명명하여 이를 진리 행위라고 한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행위는 그것이 사물을 진리대로 처리하는 진리 행위이다. 앞에서도 말한 바 있었거니와 우리가 생래의 사람의 지식대로 사물을 처리하는 일은 그것이 마치 암야 중에 무슨 일을 행하는 것과 같아 그 행위에는 적당성이 없다. 즉 그것은 사물의 진상을 알지 못하고 하는 행위이므로 그 행위는 혹은 큰 것에 실패하고, 혹은 작은 것에도 실패하여 그것에 알맞은 행위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에 있어서 흔히 우리의 행위가 재미없는 일, 적당하지 못한 일, 헛된 일을 경험한다. 예컨대 우리가 어떤 때에 어떤 친구의 원조를 믿고, 그것을 중심으로 하고 무슨 일을 계획한다. 그리하여 그 일을 그 친구에게 의논한다. 그런데 그 때에 그 친구의 객관적 사정은 그 일에 대한 원조를 전혀 줄 수 없는 형편에 있다. 이 일을 알게 될 때에 우리는 우리의 행위가 얼마나 재미없고, 적당하지 못하고, 헛된 것을 알아 부끄러워 한다. 이러한 행위가 나의 말하는바 육의 행위, 어두운 지식의 행위, 헛된 행위이다. 이에 반하여 신앙, 확신의 행위는 밝은 빛 중에서 하는 행위, 사물의 진상을 영에 있어서 밝히 알고 하는 행위, 즉 진리의 행위이어서 그것은 꼭 들어맞는 적당한 행위이다. 그래서 이는 사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서만 할 수 있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위 결단에는 기도가 요구된다.

기도하여 우리는 성령의 은혜로써 육의 일을 찾아 그것을 부정하고, 영의 밝음 중에서 사물의 진상을 잡아 확신을 얻어가지고 그 행위에 옮겨야 한다. 그런데 사실 생활에 있어서 우리는 매사에 이 진리 행위를 행하지 못하고, 많은 실패를 한다.

우리는 많은 재미없는, 적당하지 못한, 헛된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우리의 행위의 표준을 높이 진리 행위에 두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이 표준이 없으면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비판하여 회개할 줄 모르고, 따라서 우리의 영적 생활은 그 내용이 빈약하게 된다.

진리 행위, 우리는 이를 표준으로 하고 우리의 행위를 되도록 그것이 되게 하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일체 행위를 이 표준으로써 비판하여 우리의 육의 모든 헛된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져서 괴로워하여, 그리하여 영의 요구에 깊어가야 한다.

진리 행위는 그것이 그 경우에 있어서 가장 적당한 행위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도덕적 가치가 가장 높은 행위이다. 진리 행위는 도덕적인 것이다. 그러나 일체의 도덕적 행위가 다 진리 행위가 되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 행위가 도덕적으로 죄가 아니고, 선한 행위이고, 사람의 칭찬을 받는 좋은 행위일지라도 그것이 그 사물 처리에 있어서 꼭 알맞은 행위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행위는 다만 우리가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를 행하면 족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사물의 처리에 있어서 진리, 즉 하나님이 그 사물을 의미하여 그것이 그 사물의 진상인 것을 행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리하여 이 행위가 도덕적 영광이 있는 행위인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는 도덕 이상에 그 가치를 가진 행위이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행위요, 사람이 영에 서서 행하는 행위요, 그 사물을 가장 알맞게 처리한 행위이다. 그리하여 다만 도덕 행위가 아니고, 도덕 이상의 진리 행위라고 하여 우리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사물 처리의 행위를 합당하게 명령한 생각이다. 다만 도덕 행위여서는 그것은 도덕률에 맞게 행하는 범신론적 행위이다.

, 인격적인 하나님과 교섭에서 그 행위를 결단하는 신앙생활의 행위가 다만 도덕 행위가 되지 않을 것은 논의를 기다리지 못할 일이다. 그래서 진리 행위는 그것이 개개의 사물에 개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아 행하는 행위이어서 그것은 종교적인, 생명적인 행위이다.

 

종래의 기독교에 있어서 신자의 실제 생활은 그것이 도덕 생활, 윤리 생활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가르쳐졌다. 그들은 간단히 생각하기를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공로 없이 의롭다함을 받았다. 이후는 그가 성결의 생활을 할 것이니, 이것이 크리스천의 생활이라고. 그리하여 보통으로 그들에게 있어서 성결의 생활은 도덕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 생활을 의미하는 이상의 일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에 크리스천 생활은 그것이 모두 도덕률에 따르는 도덕 생활 밖에는 되지 않게 되어있다. 그래서 종래의 기독교에 있어서 그 교리는 그것이 도덕 이상의 종교로 되어 있으나 그러나 그 실제 생활, 실제 행위는 그것이 도덕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고로 역사에 있어서 기독교는 자주 도덕교에 떨어지는 일이 있었다.

물론 기독교는 그것이 엄격한 도덕교이다. 크리스천의 행위는 그것이 도덕으로 비판받을 것이요, 도덕률에 따르는 행위여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가 그 교리에 있어서 도덕교 이상임과 같이 그것의 실제 생활, 실제 행위도 그것이 도덕적 이면서도 도덕 이상의 것이 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래서 나는 신앙생활은 그것을 진리 생활, 진리 행위라고 하여. 그것에 초 도덕적 가치로서 하는 이론적 기초를 준 생각이다.

 

하나님은 그가 일체 인간들의 사상, 想像(상상)의 밖에 계신 초연하신 자인 의미로 영이시다. 그러나 그 영은 예수 그리스도로서 화육하여 인간 생명으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여 그에게서 새 생명, 즉 영적 생명을 나누어 받는다. 그리하여 그가 받은 새 생명은 그것이 그의 생활 원칙이 되어 진리 생활, 진리 행위로서 표현 된다.

우리는 영적 기독교로써 과거의 기독교의 껍질을 깨뜨리고, 생명이 더한층 자람을 자란 것으로 믿는다. 우리의 영혼은 어떤 새 세계를 발견하고, 새 인식이 왕성한 것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하여 과거의 것을 온전히 부정하거나, 그것을 내어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물론 과거의 기독교 중의 본질적이 아닌 것, 일시적인 것은 우리가 그 모양은 그것을 버리기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 기독교 중에는 과거의 일체의 기독교 주장의 정신이 다 들어있다고 생각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영적 기독교는 그것이 과거의 것과는 전혀 연락이 없는, 따로 된 새 것이 아니고, 그것은 역사적 기독교의 근간에 이때에 새로 핀 지엽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영적 기독교는 그것이 배타적(exclusive)인 고립적인 것이 아니고, 포괄적(inclusive)인 누진적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 성에 의하여 사람의 죄를 책망하여 회개를 재촉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죄인 사면의 일을 말하리라.

우리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기 위하여 사람이 그 무한히 그릇된 육을 부정하고, 영의 생명에서 영의 생명에 나아가기를 권하리라. 그리하여 나는 과거의 기독교에 그것의 당연한 발전인 영적 기독교를 더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우리의 기독교는 퍽 큰 포괄적(comprehensive)인 것이 되어 이는 우리의 영적 생명의 각양의 발달에 있어서 그 양식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어 생명을 얻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지 생명인 자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생명으로써 자라고 또 자라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일을 생명이 되게 하고, 그것이 영원한 생명의 자람을 자라게 함에 영적 기독교의 주장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쁨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써 자라는 자람 위에 있다. 생명의 자람, 이것이 하나님께 가장 높은 예배이다.

 

하나님께만 영원히 영광이 올라가리로다. 아멘.

영적 기독교 종료

 

영적 기독교의 서술을 이로써 마쳤다. 그것의 초작은 지금으로부터 4년 전 일본어로 썼었다. 그러나 본지에 게재한 것은 그 중심 사상은 같으나, 그 글은 거의 딴 저작이라고 할 만큼 개작한 것이다.

나는 이 서술을 마친 금일 그 제일 편은 그것을 또 개작할 필요를 느낀다. 기타에 있어서도 문제는 충분히 발전되어 논의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는 아직도 오히려 미완성의 작품이다. 그리하여 아마 이는 나의 일생의 과제로, 나는 종생토록 이 저작에 종사하고 있어야 할 것 같다. 미완성의 작을 일찍이 세상에 내어놓은 일은 부끄럽다.

그러나 그것이 그 서술에 있어서 미숙한 것이지, 나는 확실히 중심된, 본질적인 무엇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나는 이 미숙한 서술로써라도 그 본질적인 무엇을 독자에게 던졌다고 생각한다.

나는 금후에 나의 경험과 학문의 진보를 기다려 그 완성을 기하려니와, 하나님께서 독자 제군 안에도 이 영적 기독교를 발전시켜, 독자에게서 더 심원 유력한 주장이 나타나기를 바라면서 나는 이 원고를 마치노라.

영적 기독교 생활관

 

영적 기독교는 육인 사람이 영인 그리스도와 결합을 말한다. 그리하여 사람이 구원에 있는 상태를 말하여 영에 있다 하며, 그 생활을 말하여 영으로 산다고 한다.

영에 있다, 영으로 산다 하여 이는 이교 수양에 있어서 어떤 황홀 상태에 출입하는 일, 신비주의에 있어서 사람이 자기 감흥에 취하는 일, 다만 주관적인 法悅(법열)-황홀한 기쁨, 狂喜(광희)-미치다시피 기뻐함-의 상태에 이르게 하는 일과 어떻게 다른가? 사람이 만일 우리 용어의 내용에 주의하여 주지 않고, 거기에다 제 마음대로 뜻을 읽어 넣어서는 재미없다.

우리가 누누이 말한 바와 같이 기독교 경건에도 그것에는 잡다한 이교주의가 섞여 있다. 더구나 조선과 같이 기독교의 신학적 인식이 부족한 데에 있어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 열심, 그 기도로써 흔히 이교주의에 달아나는 것을 우리는 많이 보는 것이다. 영적 기독교의 주장을 들어서 그 내용에 확실한 이해가 없이 함부로 덤벼서 사람들은 혹은 아주 다른 길로 달아나려고 하는 위험이 있음을 보아 나는 이에 영적 기독교의 생활관을 再述(재술)하는 것이다.

우리는 육을 부정한다고 한다. 부정이라 하여 나는 부득이 여기에 철학적 용어를 가져다가 썼으나, 그 말하는바 내용은 종교적, 윤리적, 실제적인 것이다. 먼저, 육이란 말로써 우리는 철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고, 육은 종교적으로, 구원관적으로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즉 육이라 하여 우리는 구원관에 있어서 사람을 그렇게 규정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육의 부정이라 함은 그것이 우리가 종교적으로, 경험적으로 도달하는 상태, 즉 영을 예상하고, 그 영을 위하여 생래의 사람의 전부가 종교적으로, 경험적으로 부정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육의 부정이란 것은 철학적, 사색적, 명상적 영역의 일이 아니고, 그것은 생활이다. 확실한 사실 생활이다.

 

육의 부정은 그것이 종교적 생활이다. 그것은 인생 생활에서 당하는 여러 문제에서 행하는 종교적 경험이다. 우리는 인생 생활에서 여러 종류의 사물에 부딪쳐서 문제를 가지게 된다. 그때에 우리에게는 먼저 그 사물에 대한 육의 인식이 일어나며, 그 사물 처치에 대한 육의 지혜의 계획이 일어난다. 그런데 사물에 대한 이 육적 인식과 지혜는 그것이 어두운 것이요, 확신이 없는 것이니, 우리는 많은 사안에 미혹되어 괴로움을 받고, 그 문제는 우리의 짐이 되어 우리의 영을 누른다. 여기에서 우리에게는 영의 요구가 생겨난다. 당한 문제 때문에 우리의 영은 어두워지고, 약하여져서 우리의 영은 그 문제를 어떻게 처치하여야 할 줄을 알지 못하며, 또한 그것을 처치할 힘도 없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기도하게 되며, 신앙하게 된다. 참 기도는 이런 실제적 요구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참 신앙은 이런 실제 문제를 결단하는 권능이다. 기도하며, 신앙하여 우리는 요구 깊은 영혼을 그리스도께 던진다. 물론 이 일은 성령의 도움을 얻어야만 가능하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얻을 때에 우리의 영은 회복되나니, 그 회복은 곧 우리가 그 당한 문제를 해결할 지식과 힘으로 우리에게 이해되는 것이다. 즉 우리가 그 부딪친 사물에 대한 육의 인식과 계획 때문에 미혹된 영혼에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면 우리에게는 그 육의 인식과 계획을 부정함으로 명료하여지는 바, 사물에 대한 영의 인식이 생기나니, 이에 우리는 육에 있어서 그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 사물을 취급하는 입장은 영에 옮긴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영의 지식대로, 또 그 갇혀진 영의 힘대로 사물을 처치하나니,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바 영에 있는 일이요, 영으로 사는 일이다.

 

영에 있는 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일은 그리스도와 결합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에 영이란 문자를 쓰는 것은 그렇게 하여서 그리스도는 영이 되어 주셔서 우리의 구주라는 우리의 그리스도관을 예상하고, 그리고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전적으로 표현함에 있어서 우리의 전부를 육이라고 함에 대조하여 하는 말이며, 더욱 이는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가 생활적임을 표현하려고 하는 우리의 용어이다. 즉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내는 자일 뿐 아니라, 그는 또한 우리의 생활 원칙이 되시는 이다. 그래서 그는 육인 우리에게 임하는 영인 생활 원칙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와 예배 대상이 되는 인격인 동시에 그는 또한 우리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그 살과 그 피가 양식이 되어주어야 할 생활 원칙도 되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 생활 원칙인 그리스도를 우리는 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렇게 영이란 말로써 생활 원칙을 의미하는 이상, 영과 육의 관계는 생활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니 육을 부정하고, 영으로 산다는 일은 인생 생활에서 부딪치는 여러 사물에서 행하는 일인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인생 생활에서 부딪친 문제 때문에 영의 요구를 느껴 영에 옮겨가고, 그리하여 우리가 영에 있어서는 그 부딪친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하는 것이다. 이는 영에 있어서 본 사물의 인식은 그것이 곧 그 사물 진상의 지식이고, 그 지식으로써 한 행위는 그 사물 처치와 가장 참된, 따라서 가장 바른 행위임이다. 이 영에서 본 사물의 인식을 나는 진리 지식이라고 하며, 이 진리 지식의 행위를 진리 행위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물을 다만 육적으로 인식하여 처리할 자가 아니고, 그 사물이 우리의 영적 진보에서 가진 의미를 알아 그것을 그 지식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자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물의 이 영적 의미를 아는 일은 우리가 영에 있어서만 가능하고, 그리고 이 영은 곧 그리스도시다. 그리스도만이 인생을 살되 그것을 하나님 편으로 사셨나니,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만 인생 일체의 사실은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일편으로 유용하였고, 그것이 보편 사람에 있어서와 같이 죽음과 멸망에 이르는 것으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리스도만이 인생 일체의 사실을 실재자와의 관계에서 취급하여 사물을 그 실재적 의의, 즉 진리 지식으로써 처리하면서 사신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적 생활의 개척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는 곧 우리에게 임하여 우리의 영적 생활의 원리가 되는 자가 되신 것이다. 그래서 부딪친 사물로써 영의 요구에 이른 우리의 영혼에 그 영이 임하여서 그것은 그 사물에 대한 영의 의의, 즉 실재적 의의, 다시 말하면 진리 지식으로서 우리에게 이해되는 것이니, 이것이 곧 우리의 그리스도 지식이다. 그래서 사물의 진리 지식은 그것이 사물의 실재적 의식, 즉 사물 진상의 지식인 동시에 그것은 그 사물을 그렇게 의미하는 자를 아는 지식으로 그리스도 지식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사물 처리의 실제에 있어서 진리 지식으로서 우리에게 이해 파악되는 것이니, 이것이 우리의 영적 기독교 주장의 안목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 생활에 있어서 사물은 쇠퇴하고 변한다. 다른 사물에 우리가 부딪쳤을 때 앞의 지식은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소용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부딪친 새 사물에 대해서는 우리는 또 그 사물에 대한 새 진리 지식을 얻어서 그 사물을 처리하지 않을 수 없나니, 그 새 지식에 대하여 어두운 한에 있어서 우리의 영은 새로운 요구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요구로써 우리의 영혼은 또 다시 그리스도를 먹고 마셔야 되나니, 그렇게 하여서 우리가 영으로 회복되었을 때에 우리는 또 한 번 그 부딪친 사물을 의미하는 진리 지식을 얻어 가장 적절하게 그 사물을 처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물이 쇠퇴하고 변함에 따라 우리의 진리 지식은 쌓여가나니, 곧 우리의 그리스도 지식은 그렇게 진보하는 것이다.

 

생활은 중요하다. 진리 생활은 가장 가치 있는 생활이다. 그러나 생활이 버릇이 아니요, 생활이 맞춤이 아니다. 생활은 존재의 결과요, 모든 생활은 또한 존재에 재귀하는 것이다. 진리 생활은 귀중하나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영적 존재의 산물이요, 진리 행위의 소득은 그것이 진리를 아는 일, 즉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진리 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 지식에 이르며, 그 지식에 진보하는 것이다. 우리의 보다 더 중요한 일은 땅 위에서 바른 생활을 행함에 있지 않고 우리의 영이 그리스도를 아는 세계에 수직적으로 진출함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간단히 말하면 이는 생명이요, 생명의 성장이다. 대개 그리스도를 아는 일이 곧 생명임이다.

그런데 이 원리 하에서 생활하여 실제에 있어서 우리는 자주 그릇된 상태에 빠지는 일이 있다. 이는 우리의 생활에 자주 그 암영을 던지는 율법주의이다. 우리는 사물의 진리를 알아 진리 행위를 하고자 하여 그것이 되지 아니함으로써 영혼에 눌림을 받아 고통 중에 신음하게 되는 일이 간간 있다. 이는 율법을 행하려 하여 행하지 못함에 율법은 살고, 나는 죽는 것과 같아 우리가 율법주의에 빠지는 일인 것이다. 사람을 생명에 인도할 율법이 도리어 사람을 사망에 인도하는 것이 됨(7:10)과 같이 진리 행위의 요구는 우리를 생명에 인도하기는 고사하고, 그것은 도리어 우리를 사망에 인도하게 되기 쉽다. 그러나 진리 생활에 있어서 우리가 율법주의에 빠지는 일은 종교를 율법주의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을 가진 우리 생래의 사람의 오해로 말미암은 것이요, 진리 생활 그 자체의 성질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진리 생활은 원래 율법과 같이 우리에게 복종, 이행을 요구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왜 그러냐 하면 진리 지식은 그것이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진리 행위는 그것이 우리 임의로 되는 것이 아님이다. 진리 지식은 그것이 문제를 가져, 요구 깊은 우리의 영혼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확신을 얻을 때에 그것이 우리에게서 일어난 일체의 육적 인식과 계획을 부정시킴으로써 나타나는 것이니, 그것은 말하자면 불수의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진리 행위는 명령될 것이 아니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되는 행위이다. 진리 지식이 명확하여졌을 때에 거기에 벌써 행위는 문제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육의 일을 극복하고 나타난 진리 지식을 받고서 누가 어두운, 헛된 행동에 타락할 것이며, 누가 그 진리 지식의 권능에 잡혀서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않을 것인가? 그렇게 진리 행위는 그것이 더 높은 원인에서 필연적으로 피어 나타나는 행위니, 그것은 결코 율법주의로써 생각할 것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또한 생각할 것은 진리 생활은 그것이 우리 생활의 이상이요, 진리 행위는 그것이 우리의 행위 비판의 표준이고, 사실상 우리의 실제 생활은 거기에 많은 용서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 이상을 목표로 하고 생활하며, 우리의 행위는 그 표준으로써 비판받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지만 육인 우리가 그렇게까지 영의 밝음에 서서 일 하나하나를 그릇됨이 없이 꼭 그 실재의 의의, 진리 지식대로 취급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우리가 때에 영의 확신에서 일을 진리대로 하노라고 한 일에도 후에 살펴보면 거기에는 오히려 육의 헛된 기분이 적지 않게 섞여 있는 일이 있다. 또한 우리는 일을 진리대로 하기에 성공함으로써 진리를 배우기보다, 실상에 있어서는 일을 실패하고, 즉 육의 뜻대로 하여 놓고, 뒤에 와서 그것이 육의 일이었고, 영의 일이 아니었음을 알며, 그 일의 참 모양과 참 뜻은 이러이러한 것이라 함을 배우는 일이 많다. 또한 일에 따라서는 그 일에 대한 진리 지식을 그 일을 우리의 행위로써 처리할 것이 아니고, 그 일을 어두운 채로 하나님께 맡겨버리는 것이 그 일을 진리대로 취급하는 일인 경우도 있다. 그래서 인생 생활의 일체 사건은 그것이 진리 지식으로 우리의 영적 진보에 소용될 것이지만 우리는 모든 문제를 다 일률적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고, 실상 개개의 문제의 취급에 있어서 각각 요령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문제에 부딪쳤을 때에 나의 욕심에 이끌리지 말며, 주위의 사정에 강제되지 말며, 빈 마음으로 일체를 주께 맡겨 구할지니, 그리하면 또한 우리는 성령이 뜻 하시는 바를 알아 일을 진리대로 취급할 줄을 알게 될 것이다. 실제 생활에 있어서는 거기에 많은 용서가 있어야 할 것이나,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우리의 이상과 표준을 명료하게 하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실제 생활에 있어서의 참작이 우리의 이상을 흐리며, 우리의 표준을 어둡게 하여서는 못쓰는 것이니, 그렇게 되면 우리는 생활을 비판하여 회개할 줄을 모르며, 진리를 배울 줄을 몰라 우리의 영적 생활이 빈약하게 되는 것이다.

육의 부정, 영의 생활, 진리 생활, 진리 행위, 이는 다 신앙 생활의 내용 설명이다. 신앙생활은 그것이 인생의 사실 생활에 있어서 육의 부정, 영의 생활로써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의 생활은 그것이 사물을 실재자와의 관계에서 취급하는 일이어서, 즉 그것은 ()을 그 실재의 의의, 진리로 처리하는 것이니 즉 진리 생활, 진리 행위이다. 그래서 요컨대 이는 신앙생활이다. 신앙생활로써 우리는 신앙 대상과 거래를 빈번히 하여 그와 인격적 관계가 깊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개개의 경우에서 그의 뜻 즉 진리를 알아 나아간다. 그러나 우리의 중요한 일은 개개의 진리 지식에 있기보다도 전적으로 되는 신앙 대상과 인격적 관계에 있는 것이다. 즉 신앙생활의 경험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께,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께 더 인격적 신뢰를 두게 되고, 그리스도께 있는, 또한 하나님께 있는 우리를 향한 은총의 태도가 우리에게 더 깊이 보여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일체를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것을 받아 하나님 편으로 더더욱 자라 올라가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하나님의 은총의 창조이다.

어떻게 그리스도를 알까? “그의 십자가의 속죄로써라 함이 재래 기독교의 대답이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라 함이 영적 기독교의 강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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