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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영과 진리



영적기독교론 계속 3

전병호 by  조회 수:24 2015.01.18 15:42

영적 기독교 (8)

 

예수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傳記(전기)는 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네 복음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지식을 얻을 가장 중요한 자료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네 복음서로 그리스도전이 다 되는 것(완성)은 아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리스도는 부활하셔서 현재에 살아계시고, 그는 신자의 현재의 요구에 응하여 그 자신이 누구임을 신자에게 계시하여, 신자는 그 현재의 경험으로써 그를 주관적으로 파악하고, 다른 표현으로써 그리스도를 언표할 수 있음이다. 물론 다른 표현으로 하는 경우라도 그것이 네 복음서의 그리스도와 다른 그리스도여서는 아니 된다. 네 복음서의 그리스도인 그가 사람의 주관에 파악되며, 그 정당한 발전으로 다른 표현으로써 그가 언표 됨은 그것이 다만 그가 역사적 인물일 뿐 아니라, 부활하셔서 영으로 현재 신자 안에 역사하시는 살아계신 ()인 증거도 된다. 이 의미의 예수 그리스도관의 최초의 것을 우리는 신약성서 중 바울의 서한에서 본다. 바울의 속죄관, 구원관, 그리스도 경험은 그것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것으로, 그것으로써 그리스도가 언표된 것이니, 바울의 기독교는 그것을 일종의 그리스도 ()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사람의 영혼이 신앙 경험을 한 체계에까지 진보시켜 기독교가 되어 있을 때에 거기에는 반드시 그리스도가 음미되어, 한 그리스도전이 쓰여 있을 것이다. 이는 기독교는 언제든지 그리스도임이다. 고로 사람이 기독교를 발표하였을 때에 그 가장 중요한 것이 그 그리스도관에 있을 것임은 물론이다.

예수 그리스도론은 영적 기독교의 중심이 있는 데이다. 나는 지금 그것의 학문적 표현이 매우 부족함을 느끼면서 다만 나의 영감을 독자에게 전할 생각으로 이를 부족한 대로 논술하고자 한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아는 데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되는 일은 그가 독자적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아는 일이다. 그 자신의 의식 중에 명료하게 이것이 있었고, 또 그는 확실히 이를 언명하셨다.(11:27; 13:32; 20:17) 또한 우리가 그의 생활을 연구한 결과, 그에게서 무쌍한 인격을 보는 이유도 이를 그의 독자적 의미의 하나님 아들인 데에 가져가지 않으면 안 된다.(16:16, 베드로의 고백 참조)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아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이 요긴한 일은 그가 사람이 된 일이다. 사람이 된 예수 그리스도, 그의 생활의 원리, 그의 사람으로의 내적 발달의 경로를 봄이 우리의 구원, 우리의 영적 생활, 영적 생명의 생장발달에 지극히 필요하다. 사람들이 흔히 그 예수를 아는 지식이 그의 일을 봄에 그치고, 그의 사람 된 생활의 원리에 미치지 못함은 부족하다. 공관복음서나 제4복음서나 그 기록의 주안점은 그의 구주로의 일과 말에 있고, 그 자신의 내적 생활의 원리에 그다지 착안하지 않았음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내적 생활의 원리, 그 내적 생명 발달의 경로를 알아 그리스도를 아는 일은 조금 곤란한 일에 속한다. 그러나 복음서 기사 중에 잠재한 바를 움켜쥐고, 바울의 주관에 잡힌바 된 그리스도의 모양을 엿보고, 우리의 주관에 일하는 그의 생명의 영의 양식을 알아서, 우리는 능히 그리스도의 내적 생활의 원리, 그의 생명 발달의 경로를 알아 그것을 우리의 영적 생명의 생장의 양식으로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나, 사람 된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다. 그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존재만으로는 우리의 구주가 되지 못하고, 그가 우리의 구주됨에는 성육신하여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었은즉, 사람 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이 우리의 구원에 지대한 관계가 있음을 가히 알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구주이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그의 구주로서의 말과 일을 본다. 그러나 그의 말과 일은 그가 세상을 향한 사명이다. 사명보다 먼저 존재가 없으면 아니 될 것이 아닌가? 예수에게도 그가 사명에 사는 것에 앞서서 그가 그의 존재를 위하여 사는 것이 있을 것이 아닌가? 사명에 사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나, 그것은 사람의 제일 생활이지 못하다. 사람에게 자기의 존재 자체를 위한 제일 생활이 있고, 다음에 그 존재의 당연한 결실로 그의 사명의 생활이 있는 것이 순서이다. 존재를 위한 생활이 없이 사명의 생활이 있고자 하여 그 사명 생활 그것이 무가치한 것이 될 것임은 명백한 일이다. 선한 존재가 없이 선한 일을 바라는 것과 같은 무리는 없다. 우리가 만일 전도자로 택함을 받았을진대 전도의 사명을 다하는 일은 우리에게 치명적으로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가 좋은 전도를 하려면 먼저 그 전도와는 별도로 그가 좋은 신자 되는 일이 그에게 행해져야 할 것이 아닌가? 그가 전도는 염두에 두지 않고 우선 그 자신이 구원 얻는, 그 자신이 더 영된 생활에 나아가는, 그 자신이 좋은 신자임을 얻는 생활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가 만일 나는 전도하기 위하여 신앙한다 하면 이처럼 마땅치 않은 일은 없어 그에게는 신앙도 전도도 있을 수 없는, 그는 진리의 세상 사람이 아니다. 이와 같은 심리 순서가 예수에게도 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는 구주이다. 그는 구주로의 말과 일을 행하였다. 그러나 이것 말고 그의 제일 생활이 그 자신을 위하여 있었을 것이 아닌가? 그가 세상을 위한 생활만을 보고, 그 자신을 위한 생활이 있음에 착안하지 못함은 그를 아는 지식의 대 결함이다. 그에게도 그 자신을 위한 생활이 있었을 것이다. 그 자신의 존재를 그 구주되는 일과는 별도로 무엇으로 하려는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가 구주되기 위하여 산 것이 아니고, 그가 그 자신의 존재를 무엇으로 하였기 때문에 그가 인류의 구주도 됨을 얻은 것이다. 예수 자신을 위한 생활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는 무엇이 되고자 하였을까? 그가 무엇이 된 결과 그는 인류를 구원하여 구주임을 얻었는가? 우리는 이 방면으로 예수를 알며, 이 방면으로 우리의 구원을 설명하여 보지 않으면 아니 된다.

예수가 그 사명과 별도로 무엇이 되려고 하였으며, 무엇이 됨을 얻은 일을 나는 말하여 그는 영이 되고자 하였으며, 영이 됨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하 數節(수절)에 나누어서 그리스도는 영이라는 나의 의미를 설명하고자 하노라.

영적기독교 (9)

 

예수그리스도 (2)

 

예수는 영이 되고자 하여 영이 됨을 얻었다고 나는 말한다. 그가 영이 되고자 하였으면 그는 사람이요, 육이기 때문이다. 그가 하나님이요, 영이었더라면 그는 영이 되고자 할 것이 없음이다. 그리고 그가 영이 됨을 얻었으면 이는 그가 우리와 같은 사람은 아닌 사람이다. 보통사람은 육에서 난 육인 자로 그들은 도저히 영이 됨을 얻지 못함이다. 즉 예수는 사람이 아니면 아니 된다. 그러나 또한 그는 사람이어서는 아니 된다. 사람이요, 사람이 아닌 자, 이 역설에 맞게 된 인격이 예수 이시다. 그래서 성경은 이 인격의 기원을 기기에 맞게 전하여 준다. 가로되 말씀이 육이 되었다.

말씀은 창조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어 그 만물 창조에는 하나님의 뜻을 만물에 나타내는 자로 일하신 하나님인 자이다. 그는 만물 창조의 책임자이다. 창조 완성은 그에게 중히 관계되어 있다. 그런데 그 창조의 한 모퉁이에 대단한 암영이 덮이게 되었음에 그 피조물의 최고위에 선 자가 그 생명의 근원된 자를 반역하여 멸망에 흘러감에, 벌써 다른 방법으로는 그들을 구원할 도리가 없고, 그들은 멸망하고, 그 창조는 실패에 돌아가지 않을 수 없음에, 창조의 책임자인 그는 이에 하나님과 동등인 데에 억지로 있을 수는 없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상을 취하여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육이 되었다. “은 인간성을 도덕적 의미로 표현한 말이다. 그것에는 인간성의 전부, 영혼, 영까지도 포함되어있어 은 곧 온전한 사람이다. 그러나 사람을 육이라 하여 이는 그 감각으로 말미암는 시험을 받는, 말하자면 인간성의 약한 편을 표하는 말이다. 이 육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죄의 근거지이다. 죄는 육을 자리로 하고 우리에게 일하여 우리를 그의 종이 되게 하며 우리는 육 때문에 죄에 얽매어서 죄에서 죄에 끌려가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벌써 육의 감각의 시험으로 말미암는 죄의 경향을 물리치고, 거룩한 걸음으로써 영에 이를 능력은 없다. 그에게 죄는 육에 있어서 폭군이요, 그들은 육 때문에 죄의 노예이다.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된 자이다. “되었다는 존재의 변화를 의미한다. “말씀인 존재에서 육인 존재로 변화한 것이다. 이는 말씀이 육을 취하였다든지, 말씀이 육을 입었다든지 하는 말과 다르다. 예수의 인격은 전능한 말씀이 그 마음대로 할 육을 취한 것이 아니다. “말씀이 육이 되어 그는 시험을 받는, 약한, 육인 사람이 된 것이다. 이 의미는 우리와 ()의 목적을 위하여 대단히 중요하다. 예수는 육이 되어 육인 자로 힘껏 노력을 하여 영인 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육인 정도가 우리의 육인 정도와 다름이 있음을, 또한 우리가 알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도 우리와 같이 죄의 폭군이 그 육에 군림하여 있는 의미의 육인 자이었더라면 그도 우리와 같이 실패하여 영도, 생명도 세상에는 없고, 인류의 구원은 없다. 그의 육은 죄의 폭군이 거기에 군림하여 있지 않은 점에 있어서 우리의 육과 다르다. 그러나 시험을 받고, 죄를 영접할 수 있는 점에 있어서 그의 육은 우리의 육과 같다. 완전히 같다. 같은 물질이고, 같은 감각이고, 같은 약점을 가진 육이다. 이 우리의 육과 같으나 같지 않은 일을 바울은 죄의 육의 모양이란 말로써 표현하였다. 이런 육이 되어 그는 그 맑은 내적 의식으로써 아버지 하나님께 의지하고, 기도하고, 노력하여서 육의 죄에의 경향을 다 물리치고, 육에 있어서 영으로 행하여 영인자가 되며, 인류의 구주가 된 것이다.

그가 그 육은 우리와 똑같은 육이나, 그러나 그 육이 우리의 것과 같이 영이 될 소망이 없이 죄에 잡힌 육이지 않고, 육 이라도 영이 될 수 있는 육이기 위해서 그는 그 인격의 기원을 우리와 달리할 필요가 충분히 있었을 것이 아닌가? 우리와 같은 탄생을 하여도 말씀이 육이 된 목적은 실현된다는 無理(무리) 보다도, 하나님의 아들이 처녀에게서 성령으로 잉태 되어 탄생 하였다는 무리 쪽이 나에게 있어서는 더 믿을 수 있는 무리이다.

예수와 같은 인격이 처녀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탄생하는 것은 나에게는 타당한 일로 들린다. 예수가 남녀의 관계에서 나서 그 육이 죄의 육이지 않고, 능히 영에 이를 수 있는 육이라 함은 나에게는 더 믿을 수 없는 말이다. 우리는 예수와 인격의 그 참 모양을 보아 그가 성령으로 잉태되어 처녀에게서 탄생한 일을 가장 타당한 일로 믿는 바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이요, 영인 말씀이 육이 온전히 되어가지고 다시 영이 됨,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진로이다. 이제 우리가 주목할 바는 이 진로를 행하는 예수의 생활이다. 그의 영이 되는 진행이다.

영적기독교 (10)

 

예수그리스도 (3)

 

이제 우리는 육이 된 예수 그리스도가 영이 되는 내용을 살피지 않으면 아니 되는데 그의 공생활 전의 생활을 알 수 있는 우리의 자료는 극히 결핍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30년간의 사생활의 그 생활 원리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그의 長成(장성)에 대하여 약간 생각하여 보기로 하자. 그가 육인 자, 즉 사람이 되어 탄생한 이상 그의 육체의 발육이 보통 사람의 그것과 같은 과정을 밟아 되는 것이었을 것은 물론이고, 그의 심리 발육, 정신 운동의 발달도 그것이 보통 사람의 그것과 다름이 없는 순서로 되는 것이었을 것을 우리는 인정하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가지 생각하는 것은 그의 육체적 심적 발달, 발육은 그것이 아무 병적인 것이 없이 극히 자연스럽게, 순조롭게 되는 것이었으리라고 함이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점점 자라니, 하나님과 사람에게서 귀히 여김을 받더라”(2:52)하였음과 같이 창조가 있은 이래 그에게서처럼 ()이 순조롭게, 자연스럽게, 완전히 발육하는 것은 없어 그것은 과연 하나님과 사람이 보기에 탄미를 마지 못하는 물의 전형적 발달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그의 그 하나님께 대한 독자적 의식, 즉 그의 독자적 의미와 하나님 아들아란 느낌의 발생과 발달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지 않으면 아니 된다. 예수에게 있어서 그 하나님 아들이란 느낌은 언제 어떻게 하여 발생한 것이었을까? 예수가 사람이 되어서 장성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우리의 논의의 당연한 일로 우리는 그의 하나님 아들이란 느낌이 그의 아기 때부터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고, 그것이 그의 영혼이 발육하는 道程(도정)에서 상당한 시기에 당연한 순서를 통하여 성령의 계시로 말미암아 그에게 인식된 것으로 믿는 바이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그 하나님 아들이란 느낌이 벌써 그의 12세 때에 있었다는 기록은 믿을 수 있는 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그때까지 그 특별히 현저해지는 도덕적 총명, 그 특별히 명료해지는 종교적 의식에서 그의 그 노력에 대한 하나님의 특수한 도움을 깨달았을 것이요, 그 도중 어느 때에 성령의 계시로 말미암아 자기가 보통 사람과는 다른 의미에 있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感得(감득)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 같은 일은 예수의 경우에 있어서는 12세에라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나는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예수가 그 세례 시에 비로소 그 하나님 아들인 자각이 확실하여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와 같이 왕성한 하나님과의 사귐을 가진 자, 풍부한 영적 경험을 하는 자가 어찌 나이 30 전에 그의 독자적 의미의 하나님 아들임을 알지 못하였을 것인가?

예수가 그 사명감인 메시아 ()에 앞서서 그가 하나님 아들이란 느낌을 가졌을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러나 한 물의 양면과 같은 존재감과 사명감은 결코 멀리 떨어져있는 것일 수 없어, 그에게 하나님 아들이란 느낌이 있은 후에 또한 반드시 그 메시아 감이 왔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즉 그는 그 메시아 감을 세례 전에 일찍 가지고 있었다고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그 특별히 풍성한 내적 생활에 보증받은 바 그 특수한 사명에 대해서도 불붙듯 하는 확신을 가졌을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이요, 절정인 메시아의 일이, 또한 전 인류의 멸망에서 구원의 일이 자기에게 당하였음을 알고, 거기에 맞게 자기 안에 쌓이는 능력과 포부 때문에 그는 때로 그의 젊은 피와 살이 뛰놀음을 억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는 지금인가? 지금인가? 하고, 그는 날개를 뻗으면서 계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에 대한 아버지와 확실한 지시를 얻기까지는 움직이지 않고, 그 사명감에서 일어나는 충동을 항상 희생하고 계셨을 것이며, 그리하여 나이 30이 되기까지 다만 한 개인의 ()생애를 힘써 하고 있었음, 이것이 또한 진리 분별의 날카로운 그가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30년간을 私人(사인)으로 가장 좋은 사람으로 사셨다.

때는 왔다. 광야에서 세례 요한의 소리를 들었다. 그의 나사렛의 구석진 () 생활은 종막을 고하였다. 그는 이제 세계에 나타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광야에 외치는 소리 있음을 들어 그는 비상한 충동을 느껴 요단강가에 나아가는 것이었으리라.

재료가 결핍하여 예수의 공생활 전의 생활에 대하여서는 대략 이상과 같은 고찰을 하여둠에 그치고, 그리고 우리는 이제 복음서에 있는 재료에서 예수의 생활 원리를 찾으며, 예수의 인격 내용이 무엇임을 알아보기로 하자.

영적기독교 (11)

 

예수그리스도 (4)

 

공관복음서는 다 예수가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후 광야에 가서 악령에게 시험을 받은 일을 전한다. 그 시험의 내용은 잠간 두고, 예수가 시험을 받았다는 그 일 자체가 우리에게 의미 있는 자료를 제공하여 주는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와서 그 권능을 휘둘러 인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나, 마리아를 통하여 난 그는 사람 된 그이다. 육이 된 그다. 그에게는 그의 신격으로 모든 일을 보며, 모든 권능을 쓰는 일이 허락되어 있지 않다. 그도 사물의 진리를 알지 못하여 곤란을 당하는 자이다. 그가 진리에 대하여 어두움을 느끼면서 악령이 또한 그의 마음에 그것의 원리와 법칙(理法)을 속살거리는 것이 아니었는가? 그는 역시 사람의 과정을 통하여 진리 이해에 이르는 것이 아니었는가? 그가 악령의 시험을 받았다고 들어,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 구원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고, 사람으로 발달하는 자인 것을, 그리하여 그의 사람됨의 완성이 또한 인류 구원이 되는 것을 알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결코 주관적으로 그리스도를 보는 자가 아니다. 공관복음서가 말하는 예수가 시험받은 사실은 예수가 그 구주인 임무를 하나님 아들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인자로서 행하는 것임을 무엇보다도 확실히 우리에게 전하여 준다. 예수가 사람이 되어 육의 어두움을 통하여 진리를 이해하고, 그리하여 그에게 있어서 인간 생명이 완성되어 인류 구원이 있게 되는 일을 우리는 알지 않으면 아니 된다.

예수가 광야에서 시험받은 일은 사람 된 그가 진리 이해에 도달하는 과정이었다. 사물에 대한 영의 의의와 지식, 즉 사물 진상의 지식은 역시 육이 된 예수가 고투와 경험을 통하여 영의 비췸을 받아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예수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아 하늘로부터 확증이 와서, 이제 그는 필경 메시아적 활동에 들어가려 한다. 하나님의 아들인 확신은 불붙듯 한다. 세상은 자기로써 구원될 것이, 반드시 그렇게 정하여진 일이다.

그에게 그 사명에 대한 총체적 확신은 충만하다. 그러나 이를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그는 이제 그 사명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또한 어떻게 그 복음을 전하여야 바르게 하나님 나라가 성취될 것인가? 그가 그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받은 바 그 권능은 어떻게 쓸 것인가? 예수는 메시아인 그에 대하여는 확신을 가졌으나, 행동할 메시아인 그에 대하여는 아직 어둡다. 그래서 행동할 그의 진상 지식에 도달하가 위해서는 그는 역시 그 영혼이 어두움을 통하여 조각되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는 그 메시아적 활동을 위한 진리인 계획을 얻기 위하여 우선 비진리인 계획을 제의받아 그것을 음미하여 보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었다. 이 암흑 중의 비 진리의 경험으로써 생기는 진리 요구의 인간 상태가 없으면 영의 진리는 언표 되지 못하나니, 예수가 그 메시아적 활동에 들어가기 전에 시험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의 진리 지식에의 도달이 역시 인간적 과정을 통하여 되는 것을 명확히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는 사람으로 진리 지식에 도달하여, 육신으로 영이 되어 우리의 구주임을 얻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전제를 두고, 우리는 이제 그 시험 내용에 대하여 잠간 생각하여 보기로 하자. 복음서에 기록된 바는 다 그것이 상징적, 은유적인 것이어서 우리는 반드시 적확히 그 내용적 의미를 알아서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사실이 있은 시기로 보아 그것이 그의 메시아적 활동에 관한 시험인 일은 확실하다. 그래서 그것을 그의 메시아적 활동에 관계시켜서 볼 때에 우리는 그 에서 세상의 경제 문제, 성전에서 종교 문제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악령이 그에게 제시하는 제일 안은 이러 하다. 인생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제일 문제는 문제이다. 그들은 그것에 부딪쳐서 도덕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넘어진다. 세상의 구주된 자는 우선 인류의 문제를 생각지 않으면 아니 된다. 네가 만일 하나님 나라를 인류 중에 건설하려면 네가 가진 하나님 아들의 권능으로써 우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라. 그리하면 천하는 홀연히 너에게 돌아올 것이 아닌가고. 유대인 학자 Klausner는 말하기를 당시의 메시아아관으로써 하면 메시아 된 자는 이방세계의 정복자, 그 백성에게 물질적 행복을 더하여주는 자가 되지 않으면 아니 된다고. 그렇게 예수는 그 메시아 일에 대하여 우선 물질적 행복을 그의 초자연적 권능으로써 그 백성에게 갖추어주는 일로써 시험을 받은 것이다. 이 비진리적 議案(의안)을 타파하여 명료해지는 것으로 영의 진리는 예수에게 비추어졌다. 가로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 예수가 인류의 구주로서 할 임무는 사람에게 물질적 행복을 제공하는 일이 아니다. 그가 건설할 나라는 물질적 행복을 누리는 세상 나라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 말씀을 나타내어서 사람을 영으로 살려서 영의 왕국을, 하나님 나라를 인류 중에 세우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이 시험에서 그는 그가 하나님 아들인 확신과 권능을 어떤 방향에 쓸 것을 결정 받은 것이다. 즉 이 세상적인 일을 할 것이 아니라, 영적, 종교적인 일이 그의 일이라고. 여기에 제2 문제는 들어온다. 종교적인 일 일진대 너는 네가 가진 하나님 아들의 권능으로써 사람들의 경이의 눈을 끌 행동을 하라. 그들은 단번에 놀라서 네가 하늘에서 온 메시아임을 알아 너를 믿어 따를 것이라고 함이 악령의 제2의 시험이다. 즉 종교적 모험을 하라는 것이다. 이 비진리적 제안을 부정한 것으로 영의 진리는 그에게 비춰지게 되었다. 가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즉 그로써 나타낼 일은 결코 일시적 모험에 의한 사람 안에 생기는 경이가 아니다. 그는 그 하나님을 의지하여 행하는 바가 극히 자연스러워서 사람 안에 정숙히 진리를 알게 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이 세상 다수의 사람들이 일시에 그의 큰 행동에 놀라서 떠드는 데에는 하나님 나라는 없다. 두 세 사람의 적은 무리가 잔잔히, 빛나는 그의 영광에서 은혜와 진리를 보게 함이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고. 그는 확실한 진리 지식에 이른 것이다. 예수가 만일 사람에게 제공하기를 물질적 행복으로써 하며, 그 종교 운동을 이상한 하나님의 도움을 드러내는 모험으로써 하면 그로써 서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고, 이 세상 나라이다. 그 제일 안적인 것(악령의 시험)등을 따라 예수의 마음에 보여지는 것은 모든 세상 나라와 그 영광이다. 이제야 예수는 그 의안들이 악령의 것임을 알고, “사탄아 물러가라를 호령하여 이에 40일의 광야시험의 막은 닫힌 것이다. 그래서 악령의 시험은 결국 그가 영의 진리를 이해하기 위한 과정을 만들어주는 데에 지나지 않고, 그는 그 시험을 통하여 영의 진리를 파악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그가 세울 나라의 성질에 대하여 확실 명료한 지식을 갖게 되었으며, 그가 그 나라를 위하여 행동할 바에 대하여 분명한 설계를 갖게 되었다. 그는 영의 나라를 사람 안의 깊음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갈릴리에 돌아와서 사람들 안의 깊은 지각에 호소하여 때가 차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화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고 부르짖는 것이었다.

이상에서 말한 바와 같아 예수의 광야 시험은 그것이 그의 메시아적 활동에 관한 것이었으나,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주의할 일은 그 시험의 결과가 그 자신의 인격에 귀결되는 일이다. 그것은 세상 구원을 위하여 당한 일이나, 그것은 우선 먼저 그 자신의 진리 解得(해득)의 문제인 것이었다. 그 자신이 그 행동하려는 자기 위치의 진상 지식을 얻는 문제이었다. 그래서 시험 이야기가 전하는 바도 그러하여 거기에 세상이 어떻게 된다는 일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그 자신이 하나님 아들로 어떻게 하지 않을 것, 어떻게 할 것이 결정되는 일로 기록되었다. 시험에 실패하여서는 예수의 인격이 실패한다. 시험에 성공하여야 예수의 인격이 성공한다. 그래서 인류 구원은 그것이 그에게서 인격 성공의 결과로 오게 된다. 그렇게 사람 된 예수가 사람의 과정을 통하여 사람으로 진리를 알아 영이 됨에, 즉 예수 자신의 인격이, 생명이 성취됨에 인류 구원이 있게 됨을 우리는 알지 않으면 아니 된다. 무엇이든지 일시에 성행하는 것은 악마로부터 좇아 나온 것이니라.

이 세상에서 왕성하지 못하며, 정숙하며, 미미하나 분명하며, 느릿느릿하나 확실한 것이 하나님 일의 성질이다. 그러면 나는 왕성한 대사업을 갖지 않고, 작고 확실한 것을 붙들고 나아가리라. 盛大(성대), 그러나 불순을 많이 섞은 것보다 미소하여 보다 순수한 것을 나는 가지기로 하리라.

영적 기독교 (12)

 

예수그리스도 (5)

 

예수는 필경 전도의 공생활에 들어섰다. 예수가 이러 이러한 말씀을 하고, 이러 저러한 일을 행하신 것은 네 복음서에 쓰여 있다. 우리는 이에 예수의 하나하나의 언행에 대한 주석을 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이에 예수의 몇몇 사실에서 그가 그 자신으로 무엇이 되는 일을 보아 이를 논증하면 족한 것이다. 사람의 구원은 그것이 예수의 교훈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그 자신에 관계하여 있는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보는 바이다. 이는 복음서에 그가 자주 를 주장하여 사람의 구원을 자기 자신에 관계시킴을 봄이다. 그는 말하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는 다 내게로 오라고 하였다.(11:28) 요한복음에는 그의 자기주장이 더 철저하여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면 아버지께로 올 자가 하나도 없느니라.(14:6) 내가 생명의 떡이라.(6:35~48) 나를 먹는 자는 나로써 살리라(6:57)고 하였다. 예수의 구원은 다만 사람을 가르쳐서 그의 양심을 각성하게 하여 바른 길을 걷게 하는 데에 있지 아니하고 그것은 그 자신과 관계하여 그와의 인격적 결합에 있어서 되는 무엇이다. 이에 사람의 구원이 있게 하기 위해서는 그가 밖에서 그의 일을 나타내며, 성취함보다도 그 자신이 그 정한 바 행로를 밟아가며, 그가 그 자신으로써 무엇이 되는 일이 필요한 것이었다.

희랍인 두세 사람이 예수를 보고자 할 때 예수는 그들을 보지 아니하고 하시는 말씀이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제 한 알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느니라”(12;23~24). 예수에게 있어서 지금 사람들에게 말씀을 주며, 병 고치는 일을 행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일이 되지 아니한다. 즉 그러한 일을 일일이 행하지 아니하여도 가하다. 찾아온 희랍사람 쯤은 만나지 아니하여도 가하다. 만나지 아니하여서 가하다기보다 만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예수가 지금 그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일은 그들에게 궁극의 효력을 가지는 일은 되지 못함이다. 예수의 전도는 말씀을 전하는 데에 있지 아니하고, 그 자신이 그 정한 행로를 가서 죽는 데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자신이 그 갈 길을 다 가서 그의 생활을, 아니 그 자신을 결론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자신에게 사람의 구원이 있게 하는 것이 예수의 구원이다. 그 자신으로써 일이 그렇게 되지 아니하면 아니 되는 것인 고로 그가 지금 사람을 많이 만나 말씀을 전하는 일은 그에게 그다지 중요한 일이 되지 않고, 그는 지금 오직 몇 사람의 증인을 교양하면 족한 것이었다. 이에 우리가 알 것은 우리는 밖에 나타난 예수의 언행에만 주목할 것이 아니고, 다 그 자신, 그 자신의 생명 내용에 대하여 깊은 고찰을 하여 보아야 할 것이라 함이다.

 

나는 인생을 산다. 나는 나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대개는 가정을 떠나서 혼자 떠돌아 다녔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내가 인생을 도피하여 하는 일이 아니었고, 나의 경우 필연의 추세를 따라 나를 처하는 일일 뿐이었다. 나의 기독교에, 遁世主義 (둔세주의)-속세를 피함-는 없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어 인생을 산다. 나의 성북동 생활은 그것이 세상의 번잡을 피하여 하는 깊숙한 곳의 생활이기보다 집세 싼 데를 따라가니 거기였을 뿐이다. 나는 지금도 독거(獨居)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경제 문제가 있고, 사람 사람 관계가 있고, 인생 생활()가 있어 여기에도 충분히 인생 그것이 있다. 나는 독거하여 인생을 피한 것이 아니다. 나에게도 나의 앞에 당한 인생 그것이 있다. 그래서 나의 독거 생활도 그것이 인생 그 자체를 사는 것인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둔세주의는 사람이 생각한 종교이다. 하나님의 종교에는 둔세주의가 없다. 그것은 인생에 있어서 그 사실 하나하나에서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을 알아 나아가게 하는 실제 생활의 종교이다.

영적 기독교 (13)

 

예수 그리스도 (6)

 

이상의 고찰에서 우리는 예수의 일이, 그 사명이 그 자신에 집중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우선 그 자신을 위하여, 즉 그 자신으로써 무엇이 되기 위하여 생활하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그의 생활에서, 그 생활을 관통하는, 그 생활을 포괄하는 원리를 찾아내어 그것을 논증하여 그것을 확립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이 원리가 우리와 기독관의 척도가 되며, 이 원리가 곧 우리 안에 재현되어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되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우리의 논의의 가장 중요한 문제에 봉착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 생활에 있어서 범사에 자기 뜻을 구하지 않고, 자기를 보내신 자인, 아버지의 뜻을 구하였다. 그는 자기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 아버지의 하시는 것을 본 것만을 자기도 행하였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여 자기의 하는 모든 것을 그에게 보여주시는 것이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이었다.(5:30, 19, 20, 6:38) 그가 그의 맡은 바 최후의 행동을 하려할 때 아바 아버지여, 당신께서는 능치 못한 것이 없나이다. 이 잔을 나에게서 치워주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14:36)라고 기도하여 자기의 뜻을 물리치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의 쓴 잔을 마셨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는 그가 그 생애 중, 범사에 당하는 원리이었다. 즉 그리스도는 그 생애 중 범사에 기도하여 자기의 뜻을 부정하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생활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그 십자가는 그가 자기의 뜻을 부정하고, 아버지의 뜻에만 순종하여 사는 것을 최후적으로 결론하는 것으로, 자기의 철저한 부정, 아버지께의 철저한 순종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육이 되어 나셨다. 그리하여 그는 벌써 하나님이 되지는 못하고, 육인 인간이다. 그리하여 이제 그에게 하나님의 뜻은 바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고, 그에게는 우선 육의 뜻이 일하는 것이어서 그는 그 육의 뜻을 부정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여기에 그의 기도가 있고, 그의 싸움이 있다. 그리하여 그는 범사에 이 싸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보아 그것을 확실히 파악하여 확신을 가지고 생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담대히 말씀하였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즉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3:13). 이는 니고데모와 대화중에 하신 말씀인데 자기를 하늘에 올라간 자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오히려 땅에 있어서 인자이면서 하나님의 뜻만을 행하여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가 완전한 것을 증거하는 말씀이니, 즉 자기 생활의 성공의 확신을 피력하신 것이다. 이에 그는 또 다른 데에서 말씀하시기를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산다”(6:57) 고 하였다. 이는 하나님이 그 생활의 원리이어서 하나님대로가 그의 생활이 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만 그는 또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14:9)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인자이면서 하늘에 올라간 자이로다라고 하며, 보냄을 받은 자이어서 아버지대로 산다고 함에는 그것은 마치 얼음 위를 밀치는 것과 같은 아무 저항이 없이 되는 일이 아니고, 사람으로 하나님의 뜻만을 생활하는 무서운 고투의 의미가 있는 일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즉 그는 육이 된 자이어서 육에 있어서, 그 육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생활하신 것이다. 고로 예수의 하나님의 뜻의 생활이란 막연한, 신비적, 상상의 생활이 아니고, 그것은 구체적인 명확한 생활이었다. 육을 무찌르는 하나님의 뜻을 진리로 파악한 생활임이다. 이를 더 상론하면, 그에게 있어서도 매사에 먼저 일하는 것은 육의 뜻이요, 그는 그 육의 뜻을 괴로워하여 기도하며 그 육의 뜻을 타파하는 밝은 지식, 즉 진리 지식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 생활하신 것이다. 그는 육의 어두운 뜻대로는 한 일도 행하지 않고, 매사에 밝은 진리 지식을 얻어서만 행하셨다. 그리하여 그는 육의 사람이면서 완전히 진리에 서 있는 자이어서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일치하는 자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가리켜 나는 진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인생의 걸음을 완전히 진리로 걸어 진리인 자이다. 그리하여 그렇게 매사에 진리 즉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충분히 생명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가리켜 나는 생명이라”(14:6)고 하신 것이다. 그는 원래도 진리요, 생명인 자이었다. 그래서 육이 되어서도 그 육을 부정하고, 육에 있어서 진리요, 생명인 상태에 도달한 것이다.

그래서 그가 화육하여서 진리가 되며, 생명이 되신 일은 그것이 인류 구원을 위함이다. 이제 그가 인류 구원을 위하여 육을 부정하고, 진리가 되며, 생명이 되어 그 신앙 대상이 되고 그 생활 원리가 된 일을 나는 요약하여 말하여 그는 영이 되었다고 하며, 그리스도는 영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가 영이라 함은 그가 화육하여 그 육을 부정하고 된 바의 적극적 방면을 말하는 것이요, 또한 육인 우리의 신앙 대상이요, 생활 원리로의 그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는 영이 되어 육인 우리의 신앙 대상, 生理(생리) 원리가 되어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영인 내용은 육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뜻만을 행하여 진리이신 자요, 생명이신 자인 일이다.

그는 말씀하셨다. “내가 곧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로라. 사람이 만일 이 떡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니,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내가 주는 떡은 곧 나의 육이니라”(6:51). 이 절에 있어서 모든 말의 의미는 이라는 한 말에 집중되어 있다. 이는 그가 그의 을 주장한 말씀이다. 의 의미를 알면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요, 기독교를 아는 것이다. 이는 그가 화육하여, 육을 부정하고, 육에 있어서 영이 되어 그 영된 육인 자기가 곧 인류의 영원한 생명을 위한 신앙대상이요, 원리인 일을 말씀하신 것이다. 즉 육이 되어 영된 육의 주장이다. 이 영된 육은 그것이 곧 인류의 영원한 생명을 위한 떡이다. 여기에 실로 화육(Incarnation)의 의의가 있는 것이다. 화육한 로고스(즉 육이 되어 육을 부정하고, 영된 육)는 곧 인류의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다. 인류의 구원은 여기에 있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나도 아버지로 사는 것과 같아 그렇게 나를 먹는 자도 나로 살리라”(6:57) 화육한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생명이신 아버지는 그의 생활원리가 되어 그는 육을 부정하고, 아버지대로 생활을 하니, 그는 육에 있어서 영이신 자이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있어서 영인 그리스도는 그의 생활 원리가 되어주어서 그에게도 육으로 아니고, 영으로 사는 생활은 있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이를 말하여 나의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2:20)고 하였다. 나의 안의 그리스도Χριστς ν μοί -크리스토스 엔 에모이- 는 곧 생활 원리로의 그리스도이니, 이 사실을 그 안에 가진 자에게는 그에게 그리스도가 재현되는 것이다. 즉 그에게 있어서도 육의 부정이 행하여지고, 영이 되는 일이 행하여지나니, 이 경우에 있어서 육은 나요, 영은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리하여 육인 나는 죽고, 영인 그리스도가 나에게서 살아 나의 전부가 되어 이에 나도 영인자인 것이다. 이 육인 나를 죽이고, 나를 영으로, 영에 있어서 살게 하는 자로의 그리스도를 나는 불러서 영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육이 되어 그 육을 부정하고 무엇이 되었나니, 그 무엇이 된 것이 육인 우리를 정복하고 점령하는 것인즉 이 무엇을 그 육에 대조되는 말로 영이라고 부르는 외에 더 적당한 말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즉 그리스도는 화육하여 영이 되어 육인 우리의 신앙 대상이요, 생활 원리로의 영이신 자이다.

나는 이미 그리스도는 그의 밖의 일로서가 아니고, 그 자신으로서 무엇이 되어서 우리의 구원이 된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그가 영이 된 일이 우리의 구원이 된 일은 이상에서 설명된 줄로 안다.

영적 기독교 (14)

 

예수그리스도 (7)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절정이요, 그 총결산인 그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자.

하나님의 인류를 위한 경륜의 영원한 목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써 인류를 죄에서 구속하려는 데에 있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것이 구약 계시의 초점이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여 교도하신 것은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예비이었다. 그래서 예수에게 있어서 그 십자가는 하나님이 정하여 맡기신 일이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적 의의를 바로 해석한 자는 사도 바울이다. 그가 말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세운 바 되어 그의 피를 믿는 자의 속죄의 제물이 되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써 자기가 의의 하나님이요, 또한 자기가 예수를 믿는 자를 의롭게 하는 하나님도 되시는 일을 나타내셨다.(3:25~26) 인류의 죄를 노하시는 하나님이 그 ()()를 완화하고 용서하시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요, 또한 이 십자가에서 죄의 인간의 양심이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노와 사면을 감수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죄의 인류는 완전히 화목(和睦)되었다.

이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게 한 하나님의 뜻이다. 그런 하나님의 계획과 의미 하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를 청하여 십자가의 외적 의의라고 한다. 외적 의의라 하여 그것은 천박하여 없어도 좋은 것과 같은 가볍게 여기는 의미의 외적 의의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요, 객관적으로 정하여 있는 사실이어서 예수 자신으로는 거기에 순종하여 당할 수밖에 없는 권위가 있는 의미의 외적 의의이어서,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절대적 의의이다.

죄인이 하나님과 화목하는 길로는 속죄적 의의를 가진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다른 길이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십자가에는 또 내적 의의가 있는 의미에서 속죄적 의의는 외적 의의이다. 그래서 이 십자가의 내적 의의를 과거에 있어서, 또한 현재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그 시선이 모자란 것이다.

십자가의 내적 의의를 운운하여 이것이 공연한 신비적 탐색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십자가의 내적 의의를 알아야만 우리의 신앙생활, 영적 생활은 명확한 진리 설명을 얻어 우리에게는 충분한 생명 생장이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의 생애가 십자가를 절정으로 하는 것이며, 그 생애의 전부가 십자가에 포괄되는 것인 이상, 이제 영적 기독교의 기독관이 이 십자가의 내적 의의의 설명에 집중됨은 물론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면서 예수는 기도하셨다. “아바 아버지여, 당신께서는 능치 못한 일이 없나이다. 이 잔을 나에게서 치워주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뜻하는 것이 아니고, 당신의 뜻하는 것이 이루어지이다”(14:36). 하나님이 뜻하는 것은 그 독생자의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인류의 죄를 사하시려는 것이다. 그런데 육이 된 예수는 그 육의 뜻대로 그 십자가를 괴로워하며, 그것에 당하지 않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그 전 생애의 생활 원칙에 따라 육대로가 아니고, 영대로 일을 처결하여 나의 뜻하는 것이 아니고, 당신의 뜻하시는 것이 이루어지이다의 결단의 기도로써 자기를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여기에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로써 외적으로 하나님 편으로는 그의 인류를 구속하는 목적이 성취된 것을 보고, 내적으로 예수 자신에게 있어서는 그 육을 부정하고 살아오던 영적 생명이 최후의 승리를 개선한 것을 본다. 즉 십자가로써 하나님의 인류 구속의 일이 성취되는 동시에 그것은 예수 자신에게 있어서는 그 육을 부정하고 살아오던 영적 생명이 완성된 것이다.

나의 뜻하는 것이 아니고, 당신의 뜻하는 것이 이루어 지이다하고 십자가를 져서 그것은 예수가 그 육을 철저히, 최후적으로 부정하고, 영으로 걷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고 육의 철저한 최후 부정에는 또한 영의 적극적, 영원한 승리가 있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있는 것이 아닌가? 원래 육의 부정은 영의 활동이니, 육이 부정되는 데에 영의 적극적 임재는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한 일이어서 그것을 소극적으로 보면 육의 부정이요, 그것을 적극적으로 보면 영의 생활이다. 그렇게 예수의 십자가의 부활도 그것은 한 일의 양면이어서 십자가가 있어 부활이 없을 수 없다. 그래서 십자가로써 육을 최후적으로 부정한 예수의 영적 생명은 부활로써 그 영원한 영광을 빛낸 것이다. 그리하여 그 십자가와 부활로써 예수는 그 육으로가 아니고, 영으로 살아오던 자기의 생활을 결론한 것이니, 예수는 십자가와 부활로써 자기 자신을 완성시키신 것이다. 즉 육이 되어 영으로 살던 예수는 그 육이 완전히 영에 정복되어 영이 되신 것이다. 이에 우리에게 그의 부활의 의의도 명료하여진 것이다. 이렇게 예수는 자기의 뜻을 부정하고, 십자가를 져서 외적으로는 하나님의 인류 구속의 일을 이루는 동시에, 내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생활을 결론하여 자기를 완성하셨나니, 즉 나의 말 하는 바 영이 되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영원히 영이신 자로 믿는 자의 신앙 대상이 되어주신 것이다.

이 십자가와 부활관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는가는 스스로 명료한 일이다. 십자가와 부활이 그런 것이어야만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육(바울은 이를 또 옛 몸이라고도 하였다)으로 죽고, 영으로 사는 신앙 경험이 우리에게 행하여지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일은 다시 말하면 우리가 예수의 영을 받는 일이다. 예수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여서, 우리에게는 예수의 생활, 그의 십자가와 부활이 재현되는 것이니, 이에 우리에게서 육인 나는 죽고, 영인 그리스도가 사는 일이 행하여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의 경험이며, 기독교 경험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래서 이 경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내적 의의로부터가 아니고 어찌 설명되는가? 속죄는 십자가의 외적 의의이다. 이 속죄 경험의 관문을 통하여서 우리는 그 내적 의의의 경험에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으로써 육으로 죽고, 영으로 사는 일은 우리가 그 속죄로 말미암는 사면을 경험한 후에 도달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생활이다.

지금까지의 기독교는 십자가의 외적 의의를 주장하고 이 내적 의의에 대하여 충분한 지식을 갖지 않아 그 신앙 경험, 신앙생활이 내적으로 빈핍하다. 속죄에 의한 사면을 경험하여 기뻐하는 일은 가하다.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의 전부가 아니요, 그것은 외적 경험이고, 그리고 다 그 안에 깊은 내적인 기독교가 있고, 더 심원한 기독자 생활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이 혹은 말하리라. 네가 말하는 십자가, 부활관은 그것이 자기 경험의 추정이어서, 그것이 객관적 의의임에는 의심이 있다고. 그러나 십자가의 속죄적 의의만을 확실한 기독교라 하고, 내적인 십자가관은 그것을 확실성을 가진 기독교로 허락하기에 주저할 아무 이유가 없다. 그러면 로마서 3장은 확실성을 가진 기독교이고, 로마서 6장은 확실성을 가진 기독교가 아니라 할까? 대저 지금까지의 기독교는 로마서 3장의 기독교이고, 로마서 6장의 기독교는 이를 아직 알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기독교는 믿는 자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합하여 그 옛 몸으로 죽고, 그의 부활에 합하여 새 생명으로 사는 일은 그것을 그리스도와 신비적 결합이라 하여 이를 신비에 붙여두고, 그것을 진리로서 확실히 파악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를 믿어 우리가 육으로 죽고, 영으로 사는 일이 내적 기독관, 내적 십자가관으로써 설명되어 그것이 진리로 우리에게 파악되는 것이다.

예수는 그 십자가로써 그 육을 부정하고, 영으로 살아오던 자기의 생활을 결론하여 자기를 완성하셨다. 즉 영이 되셨다. 이제 성령으로 그 그리스도가 믿는 자의 안에 재현되니, 거기에는 그 육으로 죽고, 영으로 사는 일이 행하여진다. 즉 내가 죽고, 나의 안의 영인 그리스도가 사는 일이 행하여진다. 부득이하여 나는 그리스도관, 십자가관 하여 ()”이란 말을 쓰기는 썼으나,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관이 아니고, 객관적 사실이다. 화육하여 십자가를 지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그가 객관적으로 육의 부정, 영적 생활의 진리의 엄존이다.

나는 나의 경험을 그리스도에게 추정하는 것이 아니고 진리인 그리스도, 그에게 강제되어 나에게서도 육의 부정, 영의 생활이 행하여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에 정복되어야만 나는 육으로 죽고, 영으로 사는 자이다.

십자가와 부활로써 그리스도는 영이 되셨다. 그리하여 그는 이제 육인 우리의 신앙 대상, 생활 원리가 되어주신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우리를 육으로 하고, 그리스도를 영으로 한 거래로 말미암는 왕성한 신앙생활이 전개되는 것이다.

영적 기독교 (15)

 

신앙과 신앙생활 (1)

 

1편에서 우리는 기독교 진리 주장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영을 엿보고, 그 주장의 원리로 영과 진리의 원칙을 수립하였다. 2편에 있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 자신으로 무엇이 됨으로써 우리의 구원이 됨을 보았나니, 그는 영이 되어 육인 우리의 신앙 대상이 되어 주신 일을 우리는 거기에서 주장하였다. 이제 우리는 이 제3편에서 그 성취된 구원을 섭취 동화하는 신앙을 확립하고, 신앙 경험의 과정, 신앙생활의 안내를 기술하고자 한다. 이제 영적 기독교는 영과 진리의 원리 제시로부터 그리스도관의 중요한 고찰을 지나 그 가장 주창이 있는 신앙생활에 이른 것이다.

신앙은 구원의 섭취이다. 신앙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섭취하여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 뿐으로는 사람의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고, 그 계시가 사람의 신앙으로 파악되어 이에 완전히 구원의 기독교가 성립되는 것이다. 고로 기독교는 계시와 신앙의 합작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사실의 의미 파악에 기독교는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사실의 의미 파악의 기독교에 두 가지가 있는 것을 나는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는 속죄적 기독교요, 또 하나는 영적 기독교이다. 종래의 기독교는 주로 속죄적 기독교였다. 이제 인류는 영적 기독교에까지 진보하여 이에서 그 영적 생활의 양식을 쳐다보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나는 영적 기독교를 주장하는 동시에 속죄적 기독교를 바로 인정하고자 한다. 하나님은 거룩한 자이시요, 사람이 죄인인 이상 구원은 우선 속죄의 길로써 터지지 않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써 하나님은 그 근본 된 성질인 의를 끝까지 내밀어 사람을 구원하고, 사람은 그 심각한 양심의 인식을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로써 하나님은 자기의 의를 끝까지 내밀어서 믿는 자까지를 의롭게 하는 일을 행하신 것이요, 그리고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그 양심에 충분히 죄의 무서운 일을 알아 회개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죄의 처분을 위하여 충분한 것임을 그 양심에 보증 받아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속죄 진리의 주장은 그렇게 하나님께 있어서 그 근본 된 성질과, 사람에게 있어서 죄의 엄숙한 사실을 따라 주장된 진리이니, 이는 영원한 진리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기독교 경험 중에 있어서 속죄 경험의 위치를 바로 정하지 않으면 아니 될 필요상 이에 약간 기독교 경험에 대한 검토를 하여 보기로 한다.

사람이 성령의 일을 받아 거룩한 하나님 앞에 있는 자기를 발견하였을 때 그에게 강하게 일어나는 것은 죄 의식이다. 자기의 죄를 깨달아 그에게 무엇보다도 강하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 앞에 그 죄의 사면을 받는 일이다. 이때에 성령은 그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사하시는 길임을 보여주나니, 이에 그의 구원 얻은 기쁨은 비할 데 없게 된다.

그는 점점 더 깊이 그 십자가의 사면의 의의를 배워 속죄 진리를 파악하여 자기의 구원확신이 더하여 간다. 그리하여 구원받은 자는 이후 성결한 생활을 할 것으로 그 방면을 향하여 노력하여 나아간다. 그런데 이 프로테스탄트의 정통적 신자들의 경험을 보건대 그 종교적 가치가 높은 신앙생활은 그들이 그 죄를 괴로워하고, 그 죄의 사면을 경험하는 데에 있고, 그리고 그 후의 생활에 있어서는 대개는 그 영적 생명이 충분한 종교적 가치가 있는 성장을 하여 있지 않다. 그들은 혹은 전도에 열중함을 최상의 생활로 하고 있고, 혹은 학문의 자극으로써 그 생기를 유지하고 있고, 혹은 신비적 감흥에 그 즐거움을 가지고 있다.

신앙생활은 그 가장 중요한 것이 자기의 영혼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생명적인 자리에 있지 못하고, 그에게 있어서 전도가 제 일의 것이 되어 그의 영적 상태는 난맥 상태에 있다. 이 상태가 더 나아가면 필경 그의 영에 생명은 온전히 고갈되고,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한 信經(신경)의 지식으로만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또 신앙이 하나님과 사귐으로 그 생명이 무한히 하나님을 향하여 자라 올라가는 상태에 있지 않고, 학문의 隹射(주사)로 겨우 어떤 범위 안의 생기를 유지하고 있음도 또한 병적인 것이다. 또 신앙이 타자인 신앙 대상과 확실한 거래에 의한 진리 지식에 있지 않고, 자기감정의 흥분이거나, 자기의 신비적 사색에 몰입되어 있거나 하는 것은 그것이 주관적 순례이어서 그것은 이교적 수양이고, 기독교는 아닌 것이다.

요컨대 종래의 신자의 신앙 경험을 살펴 보건대 그들은 속죄 경험을 바르게 하고는 그 다음에는 바로 어떻게 살 줄을 몰라 그 영적 생명이 충분한 성장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즉 종래의 많은 신자들에게 있어서 그 영적 생명은 속죄 경험으로써 發芽(발아)하고서는 그 후 하나님 지식에 부절히 충분히 자라지 못하고, 혹은 그 범위 안의 생기를 유지함에 머물러 있거나, 혹은 그 생명이 온전히 死殼化(사각화)하여 버리고 마는 것이다.

속죄 경험은 중대한 기독교 경험이다. 그러나 속죄 주장으로써 기독교가 다하는 것은 아니다. 대개 속죄 경험에 있어서 죄의 주된 개념은 범죄의 죄(guilty)이다. 왜 그러냐 하면 속죄 경험의 주체는 사면이고, 그것이 사면되는 죄이어서는 그것은 근성이 되어 있는 죄이기보다 범법 행위의 죄임이다.

고로 바울의 기독교에 있어서 죄의 문제는 속죄로써 다 처치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또한 그 근성이 되어있는 죄의 처치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또 다른 음미를 발표하였다.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믿는 자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합하여 죽은 자인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에게 합하는 세례를 받은 자는 그의 죽음에 합하는 세례를 받았다.(6:3)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6:6) 또 같은 일을 갈라디아서 220절에도 말하여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것은 행위의 죄를 문제로 하는 속죄의 경험이 아니다.

여기에는 행위의 죄보다도 죄에 기울어지는 옛 사람”, “가 문제가 되어 있어 이것은 이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합하여 못 박아버려서 죄의 몸을 멸함”(6:6)으로써 처치되는 것이다. 즉 속죄로써 죄의 문제는 다 처치되지 못하고, 그것은 죄에 가울어지는 ”, “옛 사람이 그리스도의 죽음에 합하여 죽는 일로써 완전히 처치된다.

여기에 한 가지 또한 주의하여 둘 일은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속죄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바울의 모든 생각이 아니고, 바울은 또 다른 방면으로 그리스도와 신자가 합하는 일을 그 신앙의 시작을 표하는 세례 의식에서 본 일이다. 그는 세례를 신자가 그리스도에게 합하는, 그 죽음과 부활에 합하는 일의 상징으로 본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속죄 행위로써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킴으로써만 구주가 아니고, 그는 또한 우리가 그와 합하여 죽고 살아, 우리가 그의 생명으로 살림을 받으므로 구주이다. 바울의 기독교 인식에 속죄 교의가 그 전부가 아닌 일을 우리가 또한 알아 둘 것이다. 다시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크리스천의 신앙생활의 상태에 대한 더 진보된 설명을 주고 있다. 6장에서 말한 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죽고 다시 산다는 일만으로써는 크리스천의 신앙생활의 설명이 다하는 것이 아니다.

더 진보된 또는 더 내용적인 신앙생활의 설명이 있다. 이에 대한 문제는 영과 육의 대립의 일로서 나타난다. 나는 육인 자요,(7:14) 이 육은 죄의 육”(8:3)이요, “육의 생각은 죽음이다.”(8:6) 여기에 물론 죄의 문제도 포함되지만 다만 죄가 아니라, 육이 문제이다. 이에 바울은 육과 영의 일을 대조하여 논하여서 우리가 육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영을 따라 생활할 일, (8:4) 우리가 육에 있지 않고, 영에 있을 일(8:9)을 말하며, 우리가 육을 부정하고, 영으로 사는 일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에서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의 영의 살림을 받아 되는 것을 말하였다.(8:1)

이에 우리가 기독교 경험에 있어서 속죄 경험의 위치를 바로 생각하건대 그것은 죄의 인간이 의의 하나님과 화해하는 일이어서 그것은 기독교 경험의 첫 수속이다. 물론 인류와 하나님과 화해의 성립, 이는 창조이래의 대사이다. 죄인이 하나님과 사귐을 얻는 첫 수속, 이는 대단히 중대하다. 만일 이 첫 수속을 다함이 없이 기독교의 성전에 난입하는 자 있다면 그는 불경건한 자이다. 그런 자는 정문으로 들어오지 않은 도적이요, 강도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속죄는 첫 수속이다,

그것은 관문이다. 그러면 더 중요한 일이 첫 수속의 다음에 있을 것이 아닌가? 더 그 깊은 데가 관문 안에 있을 것이 아닌가? 죄 사함을 받은 일이 우리의 기독교 경험의 선한 출발점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앞에는 무한한 旅程(여정)이 있을 것이 아닌가? 속죄 주장은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더 먼 자리에까지 가지고 가서 일체의 기독교를 다 그 안에 집어넣어서는 아니된다. 우리는 그것을 그 바른 위치대로 토대, 관문의 중요한 것으로 설명 할 것이다.

종래의 기독교 신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충분히 설명한 것은 옳다. 생각하건대 인류가 이 진리를 받아들이며, 이 진리를 소화하기 위해서는 수 천 년의 역사를 요하는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종래의 기독교가 그 주장이 속죄에만 모여 있어서 그 신자의 신앙 경험이 주로 속죄 주장 안에 갇혀 있고, 그 위에 더 생명의 확실한 걸음으로서 진보가 없음을 봄은 유감이다. 그것은 토대 축조는 되어 있으나, 그 위에 건물은 서지 못한 기독교이다. 대개 신약의 계시는 그것이 역사를 통하여 인류에게 섭취 소화되는 것임과 같아 보인다.

개혁 전의 기독교는 그것이 아직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인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속죄를 깨닫지 못하고, 사람이 사람의 종교적 순례를 계속하여 참회에 잠기는 시대이었고, 개혁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은총 깊은 역사에 자기 구원을 보아 새로운 진리에 용감하게 뛰어나가게 되었다. 이후 정통적 신학은 그 주장이 하나님의 속죄 사업에 모여 있었다. 그리하여 최근에는 근세의 자유신학의 파괴에서 겨우 개혁자들의 속죄적 기독교를 만회하는 경향에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나의 보는 바로는 다만 속죄적 기독교를 반복 주장함으로써 이 시대는 정복되지 않는다.

더 중한 병을 치료함에는 더 중한 약을 써야 한다. 우리가 현대의 어려운 병증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더 생명적인 기독교를 파악함으로써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래서 이를 로마서에서 인용하여 말하면 종래의 기독교에는 그 3장은 신학화 되어 있으나, 6, 8장은 신학화 되어 있지 않다. 이제 영적 기독교의 주장은 로마서 6, 8장의 신학화에 있다고 할 것이다.

영적 기독교 (16)

 

신앙과 신앙생활 (2)

 

속죄적 기독교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주된 개념은 그것이 우리 안의 그리스도이기보다 우리 밖에 서신 구주이시다. 거기에 그리스도는 그의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여내는, 우리를 위한 속량의 사업을 한 자를 주 내용으로 하여 개념 되어 있다. 거기에 그는, 또 다른 말로써 하면, 하나님과 우리 둘 사이에 서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사죄하며, 사면을 구하여 화해를 붙이는 중보자를 주 내용으로 하여 개념 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 기독교를 바로 긍정하며, 이 기독교와 우리의 영적 기독교는 한 일의 내외면적인 일을 믿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 밖에 서서 우리를 구원함, 마치 물에 빠진 자를 물에서 건져내어서 언덕 위에 세우면 족하듯이, 그렇게 그리스도의 구원은 우리에게서 행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구원은 그것이 더 내적인 관계에 있어서 우리에게서 행하는 것이다.

종래의 기독교에 있어서 이 내적인 방면이 무시되어 있는 것은 아니로되, 적어도 그것은 그 외적인 방면이 주장되었음과 같이 확실성을 가지고 주장되어 있지는 않다.

종래의 기독교가 그 본질을 말하는 바에 의하면 사람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업에 접하여 죄를 깨닫고, 그 죄는 그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사면되어 이후 그는 하나님과 사귐에 들어간다고. 그래서 그 주장에 그리스도의 속죄적 사업은 잘 주장되어 있으나, 그러나 속량 받은 자가 그 후에 어떤 생활에 들어갈 것에 대하여는 하나님과의 사귐에 들어간다는 막연한 표현을 하고 있다. 물론 하나님과 사귐에 들어간다는 말은 바른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만 말하여서는 그것은 충분히 또한 확실히 우리 생활의 지도 원리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즉 그것이 속죄 진리의 주장에 있어서 그러하였음과 같이 이 하나님과의 사귐의 문제는 아직 충분히 신학화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또 보면 종래의 기독교에 있어서는 바울의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나의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2:20)는 사상을 말하여 이를 그리스도와 신비적 결합(mystical union)이라고 한다. 그것을 신비라고 하여서는 그것은 아직 사람의 경험에 충분히 파악되며, 충분히 소화되어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신자와 결합 문제는 그것이 아직도 신비로 남아있고, 그것은 신학화 되어 충분히 주장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요컨대 속죄적 기독교에 있어서는 우리를 위하여 속죄적 사업을 이룬 그리스도는 충분히 주장되었으나, 바울의 구원 경험의 또 다른 표현인 나의 안의 그리스도는 충분히 주장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를 우리 밖에 서서 우리의 구원을 힘 있게 역사하시는 이로만 하여서는 요한복음의 나는(배고프고, 목마른 자의) 생명의 떡 이로라”(6:35),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리라”(6:54), “내 살과 피는 참 음식 이니라”(6:55)의 우리의 일용의 생명 양식으로의 그리스도는 충분히 주장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이에 영적 기독교의 주장은 이 나의 안의 그리스도”, 그 살과 그 피가 우리의 생명 양식인 그리스도의 주장을 시험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미 우리의 내적 그리스도관, 영적 그리스도관이 선 이상, 우리가 나의 안의 그리스도”, “생명 양식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리스도는 그의 메시아적 사명을 그 밖에 이루는 일로써만 다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그는 그 자신으로써 무엇이 되어서 그 이룬 바 생명을 우리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그 무엇이 된 바는 그것이 육을 부정함으로써 된 것이며, 육에 대조되는 것임을 인하여 우리는 그것을 말하여 이라고 하였다.

화육한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 생명은 그것이 이다. 그리하여 이제 그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다. 이제 그 영은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의 육을 온전히 부정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영에 있게 하며, 영으로 살게 한다. 이 경험을 바울은 언표 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나의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언제든지 육인 우리가 그 육을 부정하고 영의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날마다, 아니 일마다 영인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먹고 마시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의 살과 그의 피는 우리의 참 음식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화육하여 영이 된 그리스도를 먹고 마셨을 때에 우리에게 충만하게 되는 것은 영원한 영인 생명이다. 우리는 영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날마다 살림을 받는다. 그리스도는 실로 살리는 영 πνευμα ζωοποιουν -프뉴마 조오포이운-(고전 15:45)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속량의 주로만 바라볼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생활 원리로 우리 안에 가져서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이 뜻하신 바에까지 깊은 것으로 할 수 있으며, 우리의 영의 생활을 하나님 지식의 풍부한 내용에까지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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