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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영과 진리



영적 기독교론 계속 2

전병호 by  조회 수:31 2015.01.18 15:38

우선 모세의 종교를 생각하여 보자. 모세의 종교는 율법 종교이다. 율법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영인 하나님을 이해하여 언표한 것이다. 율법 주장에 두 요소가 있다. 제일 요소는 하나님의 현현이다. 제이 요소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당시의 상태이다.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상태는 그 나타난 , 하나님의 영을 율법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율법의 하나님으로 그들에게 알려지고, 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써만 하나님 앞에 서는 줄로 알았다. 그리하여 율법주장은 그들에게 가장 유효한 진리 주장으로 들렸었다. 그래서 그들의 대표 모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았다. 즉 모세는 하나님의 영을 율법으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그의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주장하는 율법은 곧 진리이다. 그는 진리를 잡고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하여 여러 가지 법도를 제정 선포한 것이다. 고로 율법 진리는, 영은 인간 상태에 있어서의 현현, 언표이다.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상태가 없이는, 율법 진리의 언표는 없다. 물론 하나님의 영의 그 상태를 건드림이 없이도 율법 진리는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대개 사람은 먼저 율법에서 하나님을 보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요, 하나님은 또 자기를 먼저 율법의 신으로 보이는 것이 순서이었다. 어떻든지 율법은 결코 이론이 아니고, 설이 아니고, 사실에 접촉한 영의 언표로 진리이었나니, 율법으로 당시의 이스라엘의 일체 문제는 해결되어, 율법은 곧 당시의 종교(the religion), 진리(the truth)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가 율법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아니 되고, 사람의 영혼이 율법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때에, 율법은 영의 과거의 언표이다. 진리는 진리이나, 지나간 진리이다. 진리로 존경은 하나, 금일의 우리가 율법으로써 살며, 율법을 가지고 우리의 일체의 문제를 해결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배우지 않으면 아니 된다. 진리 는 영의 언표인 고로 시대에 따라서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영이다. 영은 새 시대, 새 사건에는 새 언표를 드러내야 할 것이 아닌가? 모세의 경우에 율법을 언표한 영은 금일의 우리의 요구에는, 또 우리에게 맞는, 우리의 일체 문제를 해결하여 주는 힘인 진리를 언표하여 줄 것이 아닌가? 세계가 만일 같은 법률로써 언제든지 다스려진다면 그것은 생명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지으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생명이 있는 것을 지으셨다. 생명이 있는 것은 변한다. 변한 요구를 낳게 된다. 그래서 이 변하는 새 요구에 하나님은 그 자신을 보여주어서 그들의 양식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더 높이 자기를 나타내어 줌으로써 그 창조를 진보시키시는 것이다. 즉 사람을 자기 자신과 같은 데까지 인도하시는 것이다.

한 진리의 시대가 지나갔을 때에 그 지나간 진리를 살리려는 사람의 운동은 비록 그 진리에 대한 충성으로 칭찬받을 것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효과를 보지 못할 헛된 일인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만일 묵은 진리의 고집이 될 때에는 도리어 하나님께 반항하며, 하나님을 배척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유대인은 율법에 충실하고자 하여 은혜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묵은 진리의 고집, 이는 종교적 죄로 인류가 질 수 있는 가장 두려운 죄이다. 우리는 진리에 대한 맹목적 고집을 버리고, 지혜롭게 새 진리의 현현을 분별하는 자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아니 된다. 사람들이 혹은 말하리라. 그렇게 유약한 태도를 가지고야 어떻게 異端邪說(이단사설)이 백출하는 종교계에서 참 신앙을 유지하고 있을 수 있을 것이냐고. 실로 그런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의 영혼은 속임을 받아 망하여 있다. 그러나 건전한 신앙은 영을 분별하는 밝음(이는 성령의 은사이다)을 가진 것이 아니면 아니 된다. 우리는 새 설이라면 무엇이든지 추종하여서는 아니 된다.

실로 새 설 중에는 악마로부터 온 것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그 나타난 진리가 성령께로부터 온 것인지 악마로부터 온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다. 대개 성령 안에 있는 자는 그 동일한 영의 언표인 진리, 그리고 그것이 나의 전 생명 요구를 채우는 것인 때에 그것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임이다. 그리고 기독교 진리를 분별하는 한, 표준은 이러하다. 기독교 진리는 과학과 같이 사실을 취급하는 것이 아니면 아니 되는 것이니, 사실을 해결하는 위로부터 온 힘은 진리이다. 공리공론으로써 신비계 (神祕界)에 배회함이 이단사설의 특징일 것이다. 성령의 빛 속 에서 사물의 진상을 밝히 함이 기독교 진리이니, 명쾌함이 그 특징일 것이다. 어떻든지 요구가 있고, 현현이 있고, 성령의 證示(증시)가 있을 때에는 묵은 것에 고착하여 있지 말고, 새 것에 나아갈 것이다.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의 밑에 달려가는 제자들은 행복하다. 언제까지든지 요한에게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대저 로마 가톨릭 교회 같은 것은 그 헌 옷임이 판정된 일이건만 거기에 오히려 붙어있는 사람이 많음은, 사람의 우매함에 진저리가 난다. 영의 언표인 진리의 변함을 알지 못하여 새 시대에 더 높은 진리가 들렸음에도 불구하고 헌 形骸(형해)의 그늘에서 졸고 있는 인간의 많음이여!

영적 기독교 (3)

 

하나님의 본질의 계시와 기독교의 신 해석 ()

 

다음에 우리는 영과 진리의 빛으로서 예언자와 시인의 종교에 대하여 잠깐 생각하여 보기로 하자. 인간 상태,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나, 또는 사회적인 것이나, 그것에 대한 영의 언표, 그것을 말하는 영의 의의인 진리, 이 진리 주장이 그들 예언자와 시인의 종교이다. 예언자는 영의 느낌을 받아 그 사회를 보아 그 사회 상태에 대한 영의 의의, 즉 진리를 지득하는 것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사회 상태를 인식한 예언자의 영혼에 하나님의 영이 임함에 이는 그들 자신에게 생긴 진리 확신이 되며, 또한 그들이 그 사회를 향하여 외칠 진리 주장이 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 사회 상태에 대한 영의 의의를 지득함으로써 영을 이해 파악하며, 영을 해석 주장하는 것이었다. 독립한 영은 사람이 알 수 없다. 그러나 인간 상태 위에 임한 영은 그 상태에 대한 영의 의의로써, 즉 진리 이해로써 사람에게 알려지는 것이다. 이렇게 예언자는 그 사회 상태를 조건으로 하여 영을 알았고, 그들의 그 사회에 대한 영적 지식은 그 사회 상태의 문제를 해결하는 절대 명령인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의 영밖에는 사물의 진상을 더 잘 드러낼 다른 무엇이 있을 수 없음이다. 영의 감동으로써 된 예언자의 지식은 그 사회 상태에 대한 가장 명료한 지식이다. 그래서 그들의 주장은 그 사회에 대한 절대 명령이다. 이것이 예언자의 확신, 예언자의 주장의 세력이다. 아모스에게 영이 임하여 그것이 그의 여로보암 2세 치하의 외적 번영, 내적 퇴폐의 상태에 대한 진리 지식이 되었다. 그는 그에게 그 사회에 대한 절대 명령이 있는 확신에 몰려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예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또 시인은 자기의 상태 위에 임한 하나님의 영을 자기 상태의 문제 해결로써 이해하여 언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영이 그에게 임하였을 때에 그는 그의 요구의 만족에서 하나님을 이해하여 언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시니라든지,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라든지 이것이 다 자기 상태의 요구에서 하나님을 맛보아 발표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즉 그 상태에 대한 영의 언표인 진리, 그 진리 이해에서 사람은 영을 아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영혼으로 하여금 여러 종류의 상태 하에 있게 하고, 그 상태의 요구에 임하는 그 영을 깨닫게 하여 ()인 자기를 알게 하며, 사람에게는 영의 내용을 아는 진리 지식의 증가로써 그 생명이 생장되게 하시는 것이다.

이제 여기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아니 될 문제는 예언자와 시인의 경우에 있어서 그 주장된바 진리가 그 시대, 그 사정, 그 요구의 해결을 위하여 있는 것인즉, 시대의 사정과 요구가 다른 금일의 우리에게 있어서야 그 진리는 무용의 것이 아니냐고 하는 문제이다. 만일 그 사정, 그 요구가 그 때에 한하여 있는 것이라면 그 진리는 물론 그 일이 우리에게 직접 문제 해결의 의미로는 무용일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진리는 영의 현현인즉 우리는 그 때의 상태와 거기에 현현한 진리를 배워서, 지금도 우리의 모든 문제 해결이 거기에 있는 그 영의 성질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고로 성서를 연구하는 일은 언제든지 필요하다. 더구나 일이 도덕적, 심령적 시험에 관한 것은 때와 장소를 초월하여 있는 것이다. 같은 도덕적 상태, 같은 심령의 상태가 금일에도 있어지는 이상, 삼천년 전의 다윗의 시는 금일에도 같은 상태에 있는 자에게 그 문제 해결을 위하여 현재에 살아서 임하는 진리로 일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살아 계신 영이 그 시인의 언표를 써서 일할 때에 한하여 그러한 것이다. 이사야의 세상과 금일의 세상과 그 도덕적 상태가 동일한 것일 때에 이사야의 견책은 또한 그대로 금일의 세상을 책망하는 진리임이 분명하다. 고로 어떤 심각한 상태에 언표된 진리는 그것이 한번 창조된 바 광채와 같아 그 빛을 영구히 방사하면서 있는 것이다, 영의 그 상태에 대한 언표인 진리에는 그 상태를 해결 짓는 일시성이 있는 동시에 또한 그 영원불변의 영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영원성이 있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영적기독교 (4)

 

하나님의 본질의 계시와 기독교의 신 해석 ()

 

다음에 우리는 우리의 고찰을 신약의 종교에 옮기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서는 장을 달리하여 논술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주로 신약 종교의 체험에 있어서 그 대표에 서는 바울의 종교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다만 여기에 간단히 말하여 둘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영과 진리의 총 계시인 일, 그가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알 바의 모든 것인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것이고, 이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장에서 설명한다. 그리고 사람의 영혼이 이를 씹어 음미함에 있어서 진리는 언표 주장되는 것이다. 이 인간영혼의 영적 경험의 인도자는 παρακλητοζ -파라클래토스- 성령이시다.

성령은 인간 상태에 영인 예수 그리스도를 현시하여 그들이 진리 이해에 있어서 문제 해결을 얻고, 살림을 받게 하는 것이다(고로 성령은 살리는 영)이라고 하였다.(6:63) 다시 말하면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고 사람 안에 임하면, 사람은 그의 하나님께 나아감에 있어서의 경우를 상태로 하고, 그 상태에 대한 진리 언표에 있어서 그 영을 이해 파악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그의 안에 생긴 것이 진리 확신이요, 또 이것이 그에게서 나타나니, 진리 주장인 것이다. 그러니, 이 진리 확신, 진리 주장처럼 실재적인 것은 없다. 그런데 이 영적 경험, 진리 주장에 있어서 초대교회 신자들 간에 대표로 설 자는 저 바울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실 중의 십자가와 부활을 그 가장 중요한 것으로 하여 그는 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해석에 그 종교를 가진 것이었다. 바울의 문서 중에는 예수가 무엇을 하였다, 무엇을 말씀하셨다 함이 쓰여 있지 않다. 그는 예수의 여러 가지 언행에 주목하기보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의 절정에 있는 二大(이대) 사실, 그의 죽음과 부활의 사실이 그의 종교의 제목이 되었다. 이를 바울의 지혜가 그렇게 하였다고 할 것이 아니라, 성령이 저를 그렇게 인도하였다고 할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구성하는 종교는 우리가 예수의 언행에 주목하여 그 여러 종류와 언행을 본받으려는 것이어서는 아니 된다.(이렇게 하여서는 다른 성현을 배우는 일과 같게 된다. 그런데 금일의 사람들이 기독교에서 그런 경향을 농후하게 보임은 유감이다) 우리는 영인 예수 그리스도를 받지 않으면 아니 된다. 저를 그 총체인 영으로 받아 우리의 상태에서의 진리 언표로 저를 이해 파악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우리는 예수의 언행이 기록된 복음서를 가져서 예수에 대하여 앎이 있음을 행복으로 안다. 그러나 우리의 종교는 복음 서적이어서는 아니 되고, 언제든지 바울의 서한적(書翰的) 종교라야 한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총 계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경험에 있어서 진리 이해로 파악하고, 이 진리 주장이 우리의 종교이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해석자인 성령의 직분은 중대하다. 우리의 종교는 성령 종교라야 한다. 우리는 예수의 말씀의 진의를 깨닫지 않으면 아니 된다. 가로되,

 

그러나 내가 실상을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가 가는 것은 너희에게 유익하니라.

이는 내가 가지 아니하면 파라클레토스(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낼 것임이라.(16:7 자역)

 

바울의 신학 중 주 된 것인 속죄론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자. 바울은 죄로 고통 하는 영혼의 소유자이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 앞에 죄의 문제 해결을 얻고자 하였다. 이런 상태에 있는 바울에게 영이 임하였다. 다시 말하면 성령은 그리스도 예수를 가지고 왔다. 바울은 자기의 상태 위에 비춰지는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로되,

 

그리스도 예수에게 있어서의 속죄로 말미암아 그의 은혜로 값없이 의로워지는지라. 하나님께서 그를 세우사 그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해의 제물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의 참음으로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던 그의 의를 나타내려 하심이라. 지금 이때에 그의 의를 나타내기 위함이니, 그리하여 자기가 의로운 자도 되시고, 또 예수를 믿는 자를 의롭게 하시는 자도 되려 하심이라.(3:24~26 자역)

 

저 유대인 바울은 하나님의 죄의 문제 처치에 대한 지식을 가졌었다. 즉 하나님은 죄에 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를 벌함이 없이 그의 의는 만족되지 않는다. 동시에 그는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죄를 사하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여 죄를 위하여 속죄의 제를 드리게 하였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의 죽음, 그의 참담한 피, 그것에서 영원히 사람의 죄를 속하는 제물을 보았다. 과거의 속죄제는 장차 올 일의 모형이었다. 이제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그 아들의 십자가의 죽음이 인류의 죄의 영원한 속죄제물이 되게 하고, 누구든지 -유대인 이방인의 구별도 철폐되고- 그를 믿으면 죄 사함을 얻게 되었다고 바울의 영혼은 이제까지 들은 적이 없는 대 진리를 깨달아 뛰노는 것이었다. 그의 안의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가 그 죄에 고통하는 상태에서 속죄론으로 언표되어 그의 진리 이해, 그의 진리 주장이 되어 나타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생각할 문제는 진리 이해를 위한 우리의 상태, 이것이 인간의 상태이나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라는 일이다. 속죄 진리가 언표된 바울의 인간 상태, 죄의 고통, 하나님과의 죄의 문제 해결의 요구, 이것이 바울의 상태이나,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인류 중에 누구든지 그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려면, 우선 윤리 의식에서 출발하여 죄의 고통을 경과하여 죄 사면의 경험으로써 하나님과의 첫 접촉을 할 것은 정한 순서이다. 그런데 특히 유대인, 그들에게는 율법이 왔고, 율법 때문에 죄 의식은 더 예리 심각하게 되고, 참 하나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죄 문제의 해결을 얻고자 하는 요구, 죄 사면의 길을 속죄제에 가지게 된 일 등, 이는 더 명료하게 죄를 문제로 하고 하나님 경험에 나아갈 상태이었다. 그래서 구약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명확한 인상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창조하신다는 일이다. 창조 이야기의 계속으로 히브리인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아브라함을 갈대아에서 떠나 가나안으로 가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이 모세를 그의 사퇴에도 불구하고 애굽에 보내었다. 하나님이 예언자들을 보내셨다. 그들 예언자는 그들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을 토하였다. 그래서 그리스도에게 있어서의 하나님의 죄 사면의 진리를 받아 주창할 유대인의 죄 의식의 상태, 이 점에 있어서 저들의 대표에 선 바울의 상태, 이는 하나님의 창조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인 인간 상태, 이 상태에 조명되어 언표되는 영의 진리, 이는 하나님을 기원으로 한 절대 진리이다. 그러한 속죄 진리는 절대 진리 이다.

바울의 속죄론은 유대적 사상이라, 금일의 우리가 반드시 이 길의 순서를 밟지 않으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이치는 없다고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이런 이론이 서지 못하는 것은 이상의 논의에서 명백하다. 유대인적 인간 상태, 이것이 사람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데에 대한 전형적인 것이 아닌가? 사람이, 사람이 짓는 죄를 문제로 하고 하나님을 경험하지 않고서 바른 하나님 경험에 나아갈 수 있는 일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노하지 않고, 죄를 사함에 엄한 수속이 없이, 그냥 마음 좋은 할아버지가 아이의 죄를 사하듯이, 죄를 사하는 속성의 하나님을 생각할 수 없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당연한 길이며, 이는 하나님 자신의 역사에 있어서 그릇됨이 없는 점차적 현현인 것이다. 다만 머리에서만 하는 이론이 아니고, 참말의 종교 경험에 이르려 하면 우리는 우선 실재적으로 죄를 알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한 하나님의 사면을 체험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고. 우리는 지금까지의 인류의 종교 경험을 재료로 하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속죄론은 절대 진리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를 교의로 하여 잡고 있으면 신자인 것이 아니다. 이를 교의로 하여 잡고 변호하는 일은 이를 교의로 받지 아니하여 반대론을 하는 것과 그 아직 신자 아닌 점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우리는 속죄를 시험하여 속죄론을 얻으며, 더 나아가서 그 진리의 언표 이면에 있는 영의 실재에 이르러 있지 않으면 아니 된다. 속죄론의 깊은 이면에 있는 영의 임재, 하나님 경험, 하나님 지식, 영적 생명의 생장을 얻었음에 우리의 행복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영을 수반하지 않은 속죄론, 교회에 있어서의 교의적 학습, 이성으로 하는 신학적 이해로 된 속죄론은 참된 의미의 속죄론이 되지 않는 것이다. 바울에게만 속죄론을 말하게 하고, 우리는 이를 학습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각자가 자기의 영적 경험으로 말미암아 같은 속죄론을 새롭게, 확실히 주장하게 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자기의 영적 경험에서 자연스럽게 용출하는 속죄론이 아니면 거기에 귀를 기울일 가치가 없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는 속죄론을 듣기 원하는 것보다, 그의 안에 있는 영을 보고자 함이다.

영적 기독교 (5)

 

하나님의 본질의 계시와 기독교와 신 해석

 

바울의 속죄 진리의 주장에 첨부하여 그의 은혜 종교의 주장을 잠깐 생각하자. 영과 진리의 원리는 제반 기독교 경험의 깊은 바닥에 흐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에 이 빛으로써 제반 기독교 경험을 살펴보아 그 경험의 진상을 새롭게 보는 동시에 영이 무엇이며, 진리가 무엇임을 그 예증에서 배워 알고자 하는 것이다.

바울은 율법을 행하여 하나님 앞에 서고자 하여 율법이 행하여지지 않는 고뇌를 가진 자이었다. 이 고뇌는 종교적 고뇌요,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진 고뇌이니, 실로 가장 깊은, 가장 큰 고뇌이다. 이 고뇌의 상태에 영은 임하였다. 그는 영이 보여주심에 따라 십자가의 예수를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제 편의 율법의 행위 없이 하나님의 일로 자기의 구원이 예수에게서 이루어져 있음을 보았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영이 그의 안에 임하여 있음은 그가 그리스도를 자격으로 하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음을 깨닫게 하였다. 율법을 행하지 않고 율법이 가르치던 바를 그리스도 안에서 얻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얻어 보니, 율법을 행함이 없이 하나님이 이룬 율법의 의를 얻은 것이다. 이는 율법의 무거운 짐에 고생하던 그에게 있어서 놀랄만한 은혜의 사실이었다. 이제는 사람들이 율법을 행하려고 할 것이 없다. 그들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된다. 율법의 경험을 가진 바울은 자기에게 대조되어 빛나는 은혜 구원의 진리를 밝히 깨달아 명쾌히 주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즉 율법 경험을 상태로 한 영혼에 영이 임하여, 은혜 구원의 진리는 언표 주장 되는 것이었다.

다른 사도들도 유대의 율법의 멍에를 매어 본 경험이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는 성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에게서는 어찌하여 율법의 파기, 은혜의 구원이 주장되지 못하였는가? 이는 다름 아니다. 다른 사도들은 그들이 율법 밑에서 살기는 하였으나, 그들이 율법을 철저히 경험한 것은 아니다. 고로 그들에게 영이 임하여서 그 율법 대 은혜의 진리가 철저히, 선명히 언표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의 주장 중에도 은혜 종교의 요소가 들어있다. 그래서 그들은 은혜 종교를 주창하며, 이를 이해하며, 이에 찬성할 자격은 가졌다. 그러나 그들이 이를 선명히 주창하는 자일 수는 없었다. 은혜 구원의 진리가 언표될 상태는 하나님과 자기 간에는 다만 율법이 있을 뿐인 때에 율법을 행하려 하나 행하여지지 않는 심오한 종교적 고뇌를 가진 바울에게 있었다. 바울의 영혼에서 은혜 구원의 진리는 밝히 언표 되어 선언되는 것이었다. 이에 우리는 알 수 있다. 진리 주장이 위로부터 말미암는 것인 동시에 그것을 언표 할 인간 상태가 또한 중요한 조건이 되어 있는 것을. 그 진리가 언표 될 상태가 갖추어지기 까지에는 진리는 언표 되지 않으며, 영은 파악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인류의 하나님 이해에 歷史(역사)를 요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무한을 우리가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변하는 역사 중에 있어서 여러 종류의 상태에 이르러, 그 상태에 있어서 언표 되는 진리로 그를 알아 나아가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다.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양식답게 그는 무한하신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여러 종류의 상태에서 진리 이해로써 그를 소화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바울의 종교 경험을 한 가지 더 취급하여 우리는 배우는 바가 있고자 한다.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합하는 신자의 옛 몸의 죽음, 신자의 새 생명의 생활을 말하였다. 이는 속죄 경험이 아니다. 죄의 사면을 받는 일보다 더 깊음에 들어가서 하는 경험이다. 물론 죄는 유기적으로 옛 몸에 관계되어 있어 이 경험에 죄의 요소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 경험에 있어서 주된 상태는 죄가 아니라, σμα -소마-이다. 죄의 몸이다. 이를 더 분명한 신학적 용어로써 말하면 육 σάρξ -사르크스-이다. 우리는 우선 이 용어에 대한 지식을 갖지 않으면 아니 된다. , (), 이를 이론상으로는 나눌 수 있다. 체는 다만 생리기관이다. 체 그 자체에는 아무 죄가 없다. 그러나 그 하나님께 반역하며, 영의 원수가 되어 있으며, 죄의 원리가 되어 있는 육이 체에 그렇게 깊이 자리를 정하고 있어, 우리는 육과 체를 분별하지 못하고, 때에는 체를 죄의 몸, (6:6) 죽을 몸(8:11)이라고 부르는 것이라. 그래서 바울이 여기에 문제로 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여기에 문제가 되어 있는 것은 육, 육의 자리인 몸, 죄의 몸, 죽을 몸이다. 이 상태의 바울에게 영은 임하였다. 그는 그의 죽음에 자기의 죄의 몸이 합하여 멸하며, 그 부활로 말미암아 자기 안에 신생명의 생활이 있게 됨을 보았다. 그래서 이 경험은 한번 하여서 단번에 필하는 것이 아니고, 몸이 존속하는 한에 영구히 계속하는 것으로 말씀되었다.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있으면 몸은 죄 때문에 죽음이요, 영은 의 때문에 생명이라. 그래서 예수를 죽은 자 중에서 일으키신 영이 너희 안에 거하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중에서 일으키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의 죽을 몸을 살리시리라.(8:10~11)

 

즉 우리의 죽을 몸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영으로 말미암아 이제로부터 영구한 미래에 살림을 받으리라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우리는 자주 죽을 몸의 압박에 괴로워하는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거하는 영의 일로 우리는 자주 죽을 몸이 영에 삼켜 부활을 경험한다. 그렇다고 이 몸이 존속하는 한에 우리는 영이 단번에 필하는 승리를 보지 못한다. 이에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가진 우리도 속으로 탄식하여 아들이 되기를, 즉 우리의 몸이 속량을 얻기를 기다리는 것이다.(8:23) 몸의 처치를 문제로 하는 상태는 몸 위에서 행하는 영이 시각마다 승리에 합하여 미래의 몸의 부활의 소망으로 해결되었다.

육을 어찌하겠느냐고 하는 상태, 이는 그리스도 안에 둠을 받아 죄의 몸은 멸하고, 영은 의로써 산다는 진리 언표로써 해결되었다. 육을 문제로 하는 것이니, 그 대상은 영이다. 사람은 육에 있지 않고, 영에 있지 않으면 아니 된다. 육인 자이지 말고, ()인 자여야 한다. 육인 자가 영인자가 됨에 위의 영이 요구된다. 이 영은 그리스도가 아니면 아니 된다. 왜 그러냐 하면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가 영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일만이 우리를 육으로 죽고, 영에서 살게 하는 것임이다. 고로 바울이 우리의 안에 있는 그리스도로 언표 하였다.

그리스도를 영으로 하여 육인 우리를 대상으로 하고 영적 생활에 나아가는 일은 바울에게 있어서 충분히 언표 주장되지는 못하였다. 그의 경험 중에 이 요소는 있다. 그러나 그는 더 절박한 주장을 죄와 사면, 율법과 은혜 등의 문제에 가졌기 때문이리라. 그에게 있어서 영인 그리스도의 경험은 충분, 명료히 발표되어 있지는 않다. 그래서 이는 더 발달되지 않으면 아니 될 기독교 경험이요, 더 진보된 명료한 진리 언표가 있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영적 기독교 (6)

 

하나님의 본질의 계시와 기독교의 신 해석 (계속) 3

 

다음에 여러 가지 기독교의 교의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모든 교의에서 우리는 영과 진리의 원리를 볼 것이다.

 

회개. 우리가 우리의 잘못한 것을 뉘우치는 것이 기독교적인 의미의 회개가 아니다. 회개가 우리에게서 되는 일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내가 아닌 절대타자인 하나님께로부터 온 무엇 때문에 되는 일이다. 그 최고 의식을 도덕에 가진 자.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그의 도덕적인 것을 먼저 생각하는 자, 그래서 자기가 얼마나 그 최고 이상에서 먼 생활을 하는 것을 인식하는 자, 그런 상태의 자에게 영이 임함에, 그에게서 죄의 회개인 진리 언표가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 영의 책망을 받아 그는 회개하는 것이다. 고로 영의 요소가 없는 뉘우침은 그것이 아무리 심각한 것이라도, 그것이 아무리 결단적인 것이라도 그것은 기독교적 회개는 아닌 것이다. 그래서 죄의 회개는 그것이 인간 상태에서 언표된 한 진리이다. 이 진리 지식의 파악은 사람이 하나님 지식에 이르는 확실한 일보이다. 즉 죄의 회개로써 하나님이 그에게 음미된 것이니, 그는 하나님을 아는 영원한 생명의 걸음을 시작한 것이다.

 

신생. 신생이나, 회개나 이것이 크리스천 생활의 시작을 말하는 것임에는 동일하다. 그러나 회개는 죄에서의 변환 편을 보아 말하는 것이요, 신생은 생명의 혁명 편을 보아 말하는 것이다. 생래의 인간은 육인 자이다. 멸망할 것이다. 그가 하나님 나라를 받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위로부터 오는, 절대타자에게로부터 오는 영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위로부터 오는 영을 받은 자는 그가 혈육으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의 뜻으로 난 것도 아닌 것을 그의 안에 의식하게 되며, 따라서 혈육과 죽음에 속박된 것 같지 않은, 영의 영원한 생명을 인식하게 된다. 즉 그에게서는 그 혈육이 영에 정복되며, 썩을 것이 생명에 삼켜지는 일의 사업의 시작을 행한 것이니, 그는 신생한 것이다. 이 신생이 생명 편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에 생장의 뜻이 포함되었나니, 시작된 영원한 생명은 영원히 진보하여 자라서 정체함이 없을 것이다. 무한한 하나님을 그 생장의 범위로 하며, 그 생명의 양식으로 함이다. 그래서 이 생장은 내 안의 것이 발달되어 나아가는 일이기보다 위의 것이, 영의 것이 우리에게 와서 더하여 자라는 특징을 가졌음을 우리는 주목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위로부터 오는 것으로 더함을 받아 위로 신장하는 생장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금일의 사람들은 흔히 자기 안의 것의 발달을 말하, 위로부터 오는 것을 알지 못하여 그들 종교는 위를 향하여 닫힌 종교 이다. 그들에게 위의 것을 요소로 하는 기독교가 참으로 알려질 까닭이 없다.

위로부터 오는 영이 우리 안에 생명을 이루어가는 일의 내용은 진리 이해이다. 우리의 상태에서 영이 진리로 언표되는 것을 이해함에 생명은 있으며, 생명의 생장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영을 받아 신생되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생애가 시작된 것이다.

 

(). 기독교의 성은 우리가 도덕적 수양으로 쌓아 올린 무엇이 아니다. 또한 우리가 다시 죄를 지을 수 없도록 어떤 때에 변함을 받아 성결한 자가 된 것도 아니다. 기독교의 성은 육신에 행하는 영의 통치이다. 영의 특징이 성이니, 영이 있는 곳에 육을 정복한 성의 열매가 있는 것이다. 우리의 육신이 그 이기적 성질의 변함을 받은 것이 아니다. 영이 그에게 있기 때문에 영의 승리의 광채로 저기에 성이 있는 것이다. 고로 성의 덕이 빛나던 육신이라도 만일 그 주장하던 영이 떠나 그 육신을 방치하면 그것은 다시 옛 이기주의에 돌아가 죄에 이르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크리스천의 성이 육신의 성으로 변화(聖變)가 아니라, 영의 광채인 것을 알 것이다. 異敎(이교) 수양의 목적을 달성한 성의 관념을 기독교에 가지고 와서 그런 성을 얻고자 하며, 또한 주장하는 자는 그릇되었느니라. 또한 성의 결과에만 착안하여 육이 무엇이며, 영이 무엇임을 몰라 자기의 聖變(성변)으로 황홀경에 빠지는 것도 무분별이니라. 크리스천의 성은 영의 광채이니, 우리는 변천하는 여러 경우에 있어서 그 육이 욕망하는 바를 죽이기 위하여 새로운 영의 공급을 받지 않으면 아니 되, 육의 저항이 강할 때에는 또한 더 영적 힘의 보탬을 얻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을 유지하며, 성에 처하여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천의 최고 이상은 성이 아니다. 그는 성에 있으면 족한 것이 아니다. 그의 가장 높은 소원은 하나님이다. 하나님께 이르러 그는 최고 만족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되는 일의 최고의 것은 그 결과인 영이 아니라, 더 그 근본인 영적 생명이다. 그는 그 변하는 경우 경우에서 영으로 말미암는 성을 나타내어 사실 그 영적 생명이 생장하는 것이다. 영인 하나님, 그를 아는 영적 생명, 여기에 기독교의 지성소는 있는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적 성이 온전히 위로부터의 요소, 즉 영에 의하여 되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사물에 대하여 취하는 성스러운 입장은 역시 진리 이해로 되는 것이다. 사물의 진리를 알며, 사물에 진리를 행함 없이 성스러운 행위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성의 광채 속에 영의 위로부터의 강림이 있으며, 우리의 사물에 대한 진리 이해가 있는 것을 우리는 보는 것이다.

재림. 영과 진리의 기독교는 그 종교구성의 절대 요소를 위로부터 오는 영에 가졌다. 이 일을 우리는 우리의 세계관, 역사관에도 옮겨가지 않을 수 없다. 위로는 완전한 세계를 기대하며, 거기에 이르는 역사에 대한 관을 가졌다. 우리는 현재의 세계가 완전한 것이 아님을 절실히 느낀다. 우리는 인류가 이대로 진보하여 완전에 이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 한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선의 진보에 대한 악의 평행적 진행을 보아, 선의 악에 대한 철저한 승리를 보지 못할 뿐 아니라 선의 표면적 개선에 대하여 악의 저류는 왕성하며, 때가 지나감에 따라 잃어지는 선이 많음을 봄이다. 이 세상을 닫아서 이대로 두면 여기에서는 선은 점점 퇴폐하고, 악은 점점 모든 것을 덮어 이김에 이를 것이 확실하다. 이것은 우리의 확실한 관찰이다. 우리는 이 사회관을 우리의 상태로 하고 그리스도 재림의 진리를 이해 파악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에 있어서도 위로부터의 힘이 이 세상의 선을 유지하고 있으며, 때에 그 힘의 최후적 현현이 있어 세계를 온전히 변하게 하여 ()만이 그 중에 충만하게 하는 일을 우리는 성령의 권면을 받아 믿지 않을 수 없다. 위로부터의 영에 눈을 주고 있는 우리가 그 현현으로 말미암는 최후적 심판과 변화가 있어 세계가 완성됨을 믿는 역사관을 가짐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이를 신조의 승인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해한 진리로 파악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자주 이 현실의 사회에 비애를 가질 때에 성령, 즉 진리의 영이 우리의 심령에 주의 재림의 진리를 말씀하여 주시는 일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주 예수가 재림하셔서 인류를 심판하시며, 만물을 부흥시키시며, 영광의 세계를 나타내시는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말하여 둘 것은 우리는 현대적 연구의 결과,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 과거의 사람들의 종말적 사변의 자세한 숫자적 설계의 일에는 쉽게 승인을 줄 수 없다는 일이다. 그런 자세한 설계를 생각하는 것은 너무 하나님의 일을 인위적으로 구획하는 일이다. 우리는 그 설계를 몰라도 좋다. 다만 주의 재림의 일을 이상과 같이 진리로, 원리로 잡고 있으면 족한 줄로 안다.

이상에서 우리는 진리가 그것이 인간 상태에서 언표 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위로부터 온 것, 영의 것인 것을 배워 알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것의 발전이 아니고, 위로부터 온 영이 그 인간 상태에 해결을 지어준 바, 그것은 영인 것이다. 진리는 인간의 것의 무엇의 발로가 아니라, 그것이 온전히 위로부터 온 것, 영의 것, 그것 자체가 영인 것을 우리는 알지 않으면 아니 된다. 고로 성서적 진리 주장은 그것이 그의 인간상태의 해결로써 그에게 이해된 바로 그의 살이 되어 있고, 피가 되어 있는 말씀이지만, 그것은 그의 이 아니며, 그의 사상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언어가 부족하여 관이라든지, 사상이라든지 하는 말을 쓰나, 그러나 그것이 크리스천의 진리 주장에 있어서 쓰일 때에는 거기에 세상 사람들의 말과는 상이한 내용이 있음을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크리스천의 진리 주장은 위로부터 온 것이다.

영적 기독교 (7)

 

하나님의 본질의 계시와 기독교의 신 해석 () 4

 

전술한 바에서 우리는 기독교 진리 주장의 깊은 이면에 있는 원리가 무엇임을 알았으며, 또한 이 원리가 각각 그 진리 주장을 바른, 새로운 빛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흔히 진리 주장 그것에 잡혀서 그것을 혹은 너무 크게, 혹은 보다 작게 여기는 우리 감정의 영향의 ()를 받아, 진리를 그 참 모양대로 취급하기에 부족한 일이 있다. 대저 우리가 진리 주장보다 더 그 깊은 바닥의 원리를 알기 전에는 진리를 그 참 모양대로 알아 취급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속죄 진리의 주장이 무엇임을 그 주장의 깊은 이면의 원리를 알아야만 바로 알 수 있으며, 그 원리를 잡음으로써 속죄 진리에만 머물러 있어서 그것을 誇大(과대)하게 주장하며 고집하는 폐단에 빠지지 않고, 더욱 같은 원리에 따라 다른 종교 경험, 진리 음미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가령 속죄 진리의 주장 자체가 파괴되는 일이 있을지라도 오히려 그 원리를 잡고 있으므로, 그 원리로써 또 다른 확실한 경험을 하고 있으므로 우리의 그리스도인 되는 일은, 남아있는 그런 신자가 우리는 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진보한 경험, 확신에 있는 일만이 참으로 속죄 진리를 변호하는 일이 된다.

그래서 기독교 진리 주장의 근본 요소는 위로부터 오는 영과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감에 있어서 만나는 際會(제회) 문제를 문제로 하는 인간 상태이다. 다시 이 인간 상태를 분해하면 마음과 사물이다. 사람의 마음이 사물에 봉착하여 하나님 앞에 그것이 무엇임을 몰라 고통하고 있는 것이 인간 상태이다. 이런 상태에 위로부터 영이 임하여 그 빛으로써 그 사물이 무엇임을 밝히 보여줄 때, 사람은 그 사물이 무엇임을 알아 문제의 해결을 얻는 것이다. 이렇게 사물의 영적 의의를 아는 일은 곧 사물에 대한 영의 뜻을 아는 일이니, 이렇게 되어 절대 영의 성질은 우리에게 알려지는 것이다. 이런 지식은 즉 사물 진상의 지식 즉 진리 지식이니, 확신으로 새로 주장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진리 주장인 것이다. 그리하여 진리 지식은 우리가 상이한 사물에 봉착하여 생기는 상이한 인간 상태로 언표되는 영의 진리의 음미로써 축적되나니,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진보요 또한 영원한 생명의 생장인 것이다. 우리는 인간 상태의 해결을 받아 살림을 받는 것이다. 즉 진리를 알아 생명에 있으며, 진리 지식에 진보하여 생명이 자라는 것이니,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기독교 진리 주장은 이상의 특징을 가진 것이다. 고로 이것을 시험석(試驗石)으로 하고 모든 주장을 시험함으로써 통과하는 자는 기독교 진리요, 그렇지 않은 자는 기독교 진리가 아닌 것이다. 거기에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상태가 있었는지 여부, 거기에 절대자인 하나님의 영의 언표가 있었는지 여부(與否)를 보아, 우리는 그것이 기독교 진리이며,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이지적 순례, 인간의 주관주의, 이는 다 그들이 절대타자인 하나님께 나아가는 상태임에 부족하며, 또한 거기에 그에게로 오는 영의 언표가 없어 그것이 기독교 진리 됨을 얻지 못한다.

동시에 우리에게는 이 영과 진리를 원리로 하는 기독교 경험의 진보, 그 진리 주장의 발전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께 나아감에 있어서 닥쳐온 인간 상태, 그 상태 위에 언표된 영의 진리, 이렇게 된 진리 주장은 우리에게서 얼마든지 진보되며, 발전되어서 가하며 복되다. 우리가 반드시 과거의 정통 신자가 발표한 진리 형식 중에 갇혀 있을 필요는 없다. 그것이 루터이든지, 칼빈이든지, 우리는 그들에게서 그 원리를 배우면 족하고, 그들의 진리 주장의 형식에 손발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구속받을 필요는 없다. 아니, 성경까지도 그것이 우리의 영의 자유로운 발전을 막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 안의 일을 제한하는 것 일 때에, 그것은 우리의 ()이다. 그래서 과거의 정통 신자의 성경관은 대개 우리의 영을 구속하는 틀이었다. 금일의 비판학문의 큰 공적은 우리를 그런 성경관에서 해방하여 준 일이다. 성경은 그것이 쓰인 사실에 있어서 그것이 사람의 영에 외적, 법적 권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후세의 사람들이 성경에 대하여 소위 성경이란 관념을 구성하여 가지고, 크리스천 되는 일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일이기보다 성경 안에 있는 일로 한 것은 그릇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진리 주장을 경험하여 그 깊은 바닥의 원리를 알아, 같은 원리 우리 안에서 일하게 하여 자유롭게 걸어서 가한 것이다. 만일 진실한 인간 상태와 위로부터 영이 임하여 나타남이 있어 된 진리 확신이면 그것이 외형적으로 성경의 주장과 상반되는 것이라도 대담하게, 자유롭게 주장하여도 가하다. 우리는 베드로나 바울 안에 있을 필요는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족하다. 우리에게 산 하나님의 말씀이 경험되었을 때에 그것을 바울이나, 누구의 서한 때문에 구속받을 필요는 없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산 인간을 구원 하는 일인 이상, 하나님을 방해하지 않기 위하여 진리 주장으로 하여금 자유이게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말하여 둘 것은 그런 진리 주장인 기독교는 사람의 산출물일 수 없다는 일이다. 종교나 신학을 만들어내려고 하는 인간들이 있음을 봄은 가소로운 일이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줄로 생각하는 그 조직에는 실상 종교도 없으며, 신학도 없이 그것은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한 일 없이 사라져버리는 것일 뿐이다. 절대타자인 하나님께로 오는 영을 인간 편에서 아무렇게나 할 수 없는 일은 물론이고, 우리의 종교적 인간 상태도 그것이 결코 인간의 조작일 수 없음은, 마치 병을 사람이 스스로 만들지 못함과 같다. 종교적 인간 상태는 그것이 한 天然(천연)이다. 역시 하나님의 작품이다. 바울이 율법으로써 한 죄의 경험은 그것이 그 자신이 그렇게 만들어 한 것이 아니다. 그는 자연적으로, 불가항력적으로 그런 상태 중에 있는 자기를 찾았을 뿐이다. 그의 그런 상태에 위로부터의 영이 접촉하여 속죄 진리, 은혜 종교는 주장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종교적 인간 상태에 이르게 하고, 하나님이 영을 주어 진리를 언표하여 진리 주장이 있게 하나니, 그리스도인의 진리 주장은 그것이 하나님의 작품이요, 자연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그리스도인의 진리 주장은 그것이 주로 기독교의 토대 구축, 윤곽 건설에 있었고, 그리스도인 생활의 입체적 건설, 내용적 창조에 있어서는 그 주장이 결핍되어 있다. 이는 역사적 순서가 그렇게 한 것으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금후의 기독교는 이 입체적 건설, 내용적 창조로 향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영과 진리의 원리로써 우리는 이 창조, 이 건설에 인도를 받아 나아가지 않으면 아니 된다. 우리는 우선 우리의 신앙의 창조자요, 근원인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임을 새롭게 음미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부언. 이에 이편을 마칠 때 우리는 영적 기독교의 성경의 쓰임에 대하여 몇 마디 말할 필요가 있다. 영적 기독교의 주장은 프로테스탄트의 경건한 성경관과 미묘한(delicate) 관계를 가졌다. 사실 그 성경관을 깨뜨려버리지 않고는 영적 기독교는 사람의 영에 작용할 수 없는 것이다. 다행히 근대의 성경 학문이 그 일을 해 주어서 우리를 그 곤란한 일에서 건져줌은 하나님의 섭리의 은혜이다. 그래서 이 시대에서 자기를 봉쇄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자에게는 영적 기독교의 쓰임은 없다. 그런 사람들이 그 경건을 유지하기 위하여 영적 기독교를 배척하는 일은 도리어 우리가 바라는 바이다. 왜 그러냐 하면 그렇게 하여야만 그들은 그들 신앙을 유지하여 구원을 얻을 것임이다. 그러나 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프로테스탄트의 경건한 성경관에 공격을 가하지 않을 수 없다. 프로테스탄티즘은 사람의 영혼을 교회에서 해방시켜서 성경에 가져다가 얽어 붙이고 말았다. 그들은 맹목적 경건을 성경에 붙여서 성경 성경 하고 있어 성경을 고마워하는 데에 그들 종교의 전부가 있는 듯이 되어버렸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앙이 교회 제도와 한 덩어리가 되어버려서 교회 이상의 아무것도 없는 종교이었던 것과 같이 프로테스탄트의 신앙은 성경과 한 덩어리가 되어 있어 성경 이상의 아무것도 없는 종교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생각하여 보라. 요한의 저작 이상의 요한이 있었을 것이요, 바울의 서한 이상의 바울이 있었을 것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우리 그리스도를 믿는 일로 하여금, 아니 우리 안에서 일하는 그리스도의 일로 하여금, 마가, 누가의 저작, 요한, 바울의 서한 이상 아무것도 없는 것이게 하여버려서 가할 것인가? 그 경건한 성경관, 거기에 프로테스탄티즘의 영성의 위기가 있는 것이다. 옛적에 한번 사람의 신앙, 사람의 그리스도 경험을 교회, 교직, 예전에서 구원하여 낸 일이 있었던 것과 같이 금일은 또한 사람의 영적 생명을 그 맹목적 경건이 만든 성경관에서 구하여 내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즉 교회와 독립하여 신앙과 그리스도 경험이 개인 안에 있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과 같이 또한 그것이 성경과 독립하여 있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이렇게 말하여 교회나, 성경이 無用(무용)이라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다 그것들의 몫에 따라 우리에게 크게 유용하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 안에 참된, 순수한 종교를 가지며, 또 우리의 영적 생명의 생장 발전으로 하여금 그것이 사람의 暗味(암매)로 말미암는 어떤 것의 拘礙(구애)를 받음이 없이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게 하려 함이다. 근대의 비판학은 그 학문의 이유로 인하여 프로테스탄트의 경건한 성경관을 파괴하여 버렸다. 그러나 영적 기독교는 그 종교적 주장 때문에 종래의 경건한 성경관을 혁명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혁명 되지 않으면 아니 될 데는 사람의 경건이 만든 성경관이고, 성경 자체의 존재가치는 언제든지 남아있다. 신약성경은 그것이 점령한 역사적 위치에 있어서 그 가치는 견줄만한 것이 없다. 그것은 기독교 초기의 산물이다. 거기에 아직 전통은 별로 생기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보다 순수하게 그 인격과 활동이 선명히 묘사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인 경험은 그 초기의 독창성의 명쾌함을 띠고 발표되어 있다.(물론 제자들의 신앙 발표에 유대주의 색채를 띰이 있다. 좀더 떨쳐버리고, 새로운 세계에 살았으면 하는 유감이 없지 않으나, 그러나 대체로 유대주의로부터의 정당한 발전이요, 새로운, 독창적 종교를 그들은 충분히 발표하였다. 그들은 새 종교의 πστολος 아포스톨로스(사도)들임에 충분하다.) 그래서 우리가 기독교가 무엇임을, 또 순수한 기독교가 무엇임을 알고자 할진대 충분히 신약성경을 연구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비록 우리가 독립적으로 그리스도 경험을 하고 있으며, 독립적으로 진리 주장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성경으로써 충분히 기초를 받은 것이 아니면 아니 된다. 경험 주장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면 아니 되나 그러나 그것이 성경의 영에 위반되는 것이어서는 아니 된다. 고로 성경의 영에 부절히 호흡하고 있음이 필요하다. 더욱 성경이 우리의 신앙의 정도에 따라 우리의 경험을 지도하며, 우리가 경험한 바에 설명을 주어 우리를 훈육하는 쓰임이 다대함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어떤 의미로든지 우리는 매일 성경을 읽으며, 음미하며, 연구할 필요가 있다. 다만 우리의 영적 생명의 본연의 생장 발전을 위하여 그것을 교회와 독립시킴은 물론, 그것을 성경에까지 독립시켜 그것을 그 생명 근원인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 관계에 세우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을 말하는 바이다. 그 본을 이렇게 바로잡은 후에 교회도 쓰임이 있고, 성경도 쓰임이 있음은 물론이다.

 

성령을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나를 생명에 회복해 주시옵소서.

의지는 의를 따라 기운을 얻게 하옵소서.

육신은 완전히 영의 다스림을 받아 평강에 있게 합소서.

날카로운 진리의 깨달음

왕성한 생명의 운동,

 

! 주여, 성령을 주시사,

나를 또 한 번 새로 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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