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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영과 진리



영적기독교론

전병호 by  조회 수:46 2015.01.18 15:29

 

영적

 

기독교론

“신앙은 복음적이요 생명적이어라”

왜 최태용감독은 생명적 복음을 위한 영적 기독교을 주장하였는가?

(1면 참고용-별도편집한 것 참고)

최태용 지음 | 채문규 번역 | 엮은이 전병호| 편집인 김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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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대한복음교회총회

 

 

 

 

 

 

영적

 

기독교론

 

최태용 감독의 영적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인사의 글|

 

500년 조선의 역사가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식민지 지배라는 엄청난 현실 앞에 절망감에 빠져 있는 한국 백성들에게 한 가닥 희망의 등대 불이 비추었으니 바로 기독교 복음의 도래이다. 바다를 잔잔케 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난파선 같은 나라를 구원할 희망을 바라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에 들어 온 선교사들은 이 백성들의 열망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타인으로 다만 자신들의 선교적 목적 즉 자국의 교회와 교리 선전이 먼저였다. 따라서 민족 구원의 열망을 찾았던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갔고 미국 근본주의 신앙에 입각한 교리주의와 저 천국을 향한 종말신앙이나 탈 역사적 신비주의 운동에 교회들이 빠져 들었다. 20대 말 젊은 최 태용은 마침내 1926년 조선기독교 신앙혁명 선언을 공식적으로 외치면서 영적 생명성을 잃어버린 채 고목화 되고 사각화 되어가는 조선 교계로 뛰어 들었다. ‘조선교회는 죽어가고 있다. 조선교회여 살아나라. 생명으로 나아가라’고. 조선을 살리고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조선 교회는 제2의 종교개혁을 하여야 한다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1918년 최 태용은 일찍이 연희전문학교 신학부에 입학하였다가 졸업 직전에 일본으로 건너가 우찌무라간조의 문하생이 되었다. 그는 한동안 우찌무라간조의 무교회주의에 심취하였지만 그 주의는 다만 일본인을 위한 일본의 신앙운동일 뿐 조선의 우리와는 다르다라는 것을 간파하고 일본 청산학원 신학부에 들어가 서구의 새로운 신학사조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당시 청산 신학부의 다카구라를 통해서 바르트를 소개 받았고 역사비평적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이미 1925년부터 ‘천래지성’이란 잡지와 1928년엔 ‘영과 진리’란 개인잡지를 발간하여 꾸준히 자신의 신앙과 새로운 신학적 주제들을 많은 독자들에게 펼쳐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29년 당시의 그 어느 신학자의 학설이나 도움 없이 순전히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신 안에 끌어 오르는 말씀의 역사를 체험하면서 조선을 살리고 교회를 새롭게 하는 새로운 신앙혁명의 원리를 폭포수 같이 쏟아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새로운 신앙원리를 1929년 영과 진리 7월호에서부터 19317월 호에 이르기 까지 26개월 동안 20호에 걸쳐 연재하였다. 이것이 바로 “영적 기독교론”이다. 그리고 1935년 기독교대한복음교회를 창립하면서 “영적 기독교론”을 복음교회의 신학적 원리로 삼았던 것이다. 각 교단 마다 나름대로 그들의 신학이 있는 것처럼 우리 복음교회의 신학은 최 태용의 신학 곧 “영적 기독교론”이다.  

 

이제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창립 80주년을 맞이하여, 창립자 최 태용 목사의 “영적 기독교론”을 고 채문규 장로께서 새롭게 번역하여 펴낸 ‘영과 진리’에서 발췌하였으니, 복음교회 교역자들과 복음 성도들에게 소개하며 우리의 정체성을 새롭게 하고자 하는 일은 매우 뜻깊은 일이라 사료된다.

 

이 ‘영적 기독교론’을 펴내도록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결정한 총회장 이 동춘 목사님과 임원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영과 진리’에서 본 론을 뽑아 컴퓨터 작업을 통해 책으로 펴내는 작업은 결코 쉽지가 않았다. 총회신학대학원 학생인 김 옥주씨가 몇 날밤을 새가며 작업해 줌으로 책을 펴내게 되었음을 그 수고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2015110일 목사 전 병 호

 

| 차 례 |

 

 

인사의 글                                  4

 

신앙 혁명가                                            8

 

Part 1. 영의 태동

1. 영과 육의 차이를 분별하라               10

2. 영과 진리를 분별하라               19

3. 영으로 새로워져라                 21

4. 영적 싸움을 싸우라                 25

5.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라                 31

 

Part 2. 하나님의 본질의 계시와 기독교의 신 해석

1. 영적 기독교 (1)                              34

2. 영적 기독교 (2)                             36

3. 영적 기독교 (3)                              43

4. 영적 기독교 (4)                               46

5. 영적 기독교 (5)                              53

6. 영적 기독교 (6)                              59

7. 영적 기독교 (7)                              66

 

 

이 글의 원문 작성시기상 성경은 1920년대 성경본문입니다. 착오없으시기 바랍니다.

 

Part 3. 예수 그리스도

1. 영적 기독교 (8)                              75

2. 영적 기독교 (9)                              80

3. 영적 기독교 (10)                              84

4. 영적 기독교 (11)                              88

5. 영적 기독교 (12)                              94

6. 영적 기독교 (13)                              97

7. 영적 기독교 (14)                      103

 

Part 4. 신앙과 신앙생활

1. 영적 기독교 (15)                              110

2. 영적 기독교 (16)                               118

3. 영적 기독교 (17)                              122

4. 영적 기독교 (18)                              127

5. 영적 기독교 (19)                              133

6. 영적 기독교 (20)                             139

 

Part 5. 영적 기독교 종료                        145

Part 6. 영적 기독교 생활관                      146.

Part 7. 영적 기독교 재고                       156

 

Part 8. 100호 기념 강연

1. 기독교의 과제와 그 현재적 개정 (1)  170

2. 기독교의 과제와 그 현재적 개정 (2)  184

3. 영적 기독교의 신앙 생활관                197

 

  신앙 혁명가

                                                                                최종선

 

1.

! 신앙 혁명은 가까웠구나.

! 신앙혁명은 이르렀구나.

현대에 생명 없는 교회들아

허위에 날뛰는 교우들아

말라진 교리만 붙잡아 있고

근본 된 신앙은 내어버렸구나.

 

2.

! 신앙 혁명은 가까웠구나

! 신앙 혁명은 이르렀구나.

속죄와 부활 믿고 신앙 막혔다.

윤곽과 터만 닦고 신앙 막혔다.

생명의 신앙은 사각이 되고

현하의 교회는 고목이 되었네.

 

3.

! 천국 나라는 가까웠구나

! 진리 세계는 전개됐구나.

음침한 골짜기를 벗어나서

광명한 하늘 길을 밟아가자.

환란 핍박에 순종하며

늘 기도하면서 힘써 싸워라.

 

 

 

 

 

4.

! 하늘나라는 땅에 있잖고

! 우리나라는 하늘에 있다.

영원히 솟는 샘 구주 예수니

생명수 마실 자 용맹 다하여

신앙 신앙에 혁명적으로

늘 기도하면서 힘써 나가세.

 

1930년 봄 삼례 가시밭에서(『영과 진리』제21호에서 전재)

 

  1. 영과 육의 차이를 분별하라

 

 

(1)

육은 진리가 아니요 영이 아니다. 육은 언제까지든지 육으로 남아 있어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 성결이라 하여 靈化(영화)라 함은 영의 강한 일이요, 육 그것의 聖變(성변), 또는 靈變(영변) 은 아니다. 성결하였다 하여 육의 질이 변한 것이 아니요, 육이 영에 삼킨바 될 만큼 영이 강하게 일한 것이다. 고로 영의 일이 있어 나는 거룩하며, 참되고 영이 가시, 육은 그 육으로 남아 있어 하늘도 모르고, 진리도 모르게 되는 것이다.

신앙 후, 즉 구원받은 후의 영육의 관계는 극히 자연스러운 상태에 있는 것이다. 때에는 영이 강하게 일하여 나에게 비상한 하늘 권능과 영광이 행하고, 또한 때에는 평범하여 수상한 것이다. 그러나 영이 충만할 때나, 영이 떠났을 때나, 주는 나를 그의 안에 두셨고, 나는 또한 그를 믿으며 따라, 그의 안에 있는 것이다.

예수의 육에 때에는 영이 한량없이 일하여 비상한 변모의 광채가 나타났고, 때에는 육으로 겟세마네의 어두운 골짜기에서 “만일 할 수만 있사옵거든, 이 잔을 나에게서 면하여 달라”는 기도하신 것이다.

 

결국 부활 전까지는 육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영이 일하는 것이니, 영의 강한 일로 육에 있어 거룩하며 참된 것이다. 고로 우리는 항상 육을 거룩히 다스릴만한 영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즉 육의 변화를 위하여 기도할 것이 아니라, 악에 젖혀진 육을 거룩히 다스릴 영의 분량을 주시기를 구할 것이니라. 육의 악은 별로 문제 삼을 것이 없다. 영만 충만히 받으면 거룩하며, 참되어지는 것이다. 주 예수여 이 죽을 몸을 다스릴 영을 충만히 주시옵소서!

(2)

육은 영이 아니요, 진리가 아니다. 그러나 믿는 자는 육에 있어 영임을 요구하며, 진리임을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자주 빠지는 오해가 있다. 이는 어찌하여 육이 영으로 변하지 않았는가? 어찌하여 육이 진리가 되지 않는가 함이다. 그러나 현 配定下(배정하)에 있어서는 육은 영일 수 없고, 육은 진리일 수 없는 것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 하였음과 같이 육은 육이요, 영은 영이다. 육에 영의 일이 있음은 영이 육에 일함이요, 육이 영이 된 것은 아니다. 육이 영 그것일 법은 없나니, 육이 변치 않았었다고 생각하여 괴로워하는 것은 진리를 알지 못하는 마음이다.

 

영이 떠났을 때에 육에 남아 있는 진리는, 진리 그것(the truth)이 아니다. 이는 진리의 남은 흔적이요, 진리는 아니다. 그러나 이 남은 흔적은 또한 진리의 형식으로 가한 것이다. 그러나 영이 떠난 진리는, 생명이 있는 진리는 아니니라.

우리가 때에는 광명 중에서 진리와 확신으로써 행하나니, 이는 영이 임하신 때이다. 때에 또한 당치도 않은 우매를 행하나니, 이는 영이 떠나신 때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영의 왕래가 있는 것이니, 이는 사실의 느낌이다. 그런데 영이 임하심은 광명 중에 알되, 영의 떠나심은 그 자취를 조속히 인식하지 못함과 같이 보인다. 그런고로 지금 진리 중에 행하던 내가 또 진리인가 하고 행하여 놓고, 후에 영의 광명에 비춰보면 이는 온전히 우매로 나타나는 일이 있다. 고로 동일한 사람에게서 자주 광명, 암흑의 별세계의 일이 행하는 것이다.

 

영이 임하면 진리를 광명 중에 분별하고, 영이 떠나시면 어두움에 있어 진리를 분별치 못하게 되나니, 영은 곧 빛이라. 빛이 비췸에 만상을 보는 것과 같이 진리가 분별되며, 확실한 느낌이 되고, 빛이 떠남에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신앙에 주야가 있나니, 영이 임하면 광명의 낮이라. 하늘이 환하여 진리가 확실한 느낌이 되고, 영이 떠나면 암흑의 밤이라. 어두워져서 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임하는 영의 주야, 이는 우리의 완성을 위하여 있는 것이니, 주야의 도가 더할수록 영의 技工(기공)이 더하고 더하여 화려한 생명의 에덴을 이루어 가느니라. 하나님의 뜻은 이 많은 주야를 통하여서야 나타나나니, 이는 오묘가 극한 조화니라.

영육의 관계는 이런 오묘에 있나니, 우리가 영에 있을 때에는 충만하여 기뻐하며, 찬미에 넘치고, 우리가 육 안에 있을 때에는 공허를 느끼며, 사망의 권세에 압박되어 괴로워하며, ()을 오해함에 이르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지금은 육에 있어 영을 부절히 요구하고 있는 것이니, 더 많은 영을 위하여 항상 기도할지니라.

육이 거룩치 않다고 너무 괴로워하지 말라. 육은 원래 거룩치 못하니라. 육이 거룩함에는 영을 요하나니, 영의 강한 일로 육이 거룩하니라. 그러면 육의 성결 여부에 착안치 말고 차라리 영을 위하여 기도할지니, 가장 근본적인 기도는 “영을 주시옵소서” 이니라.

 

 

(3)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3:6)

육의 생각은 죽음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이요, 평강이니라.(8:6)

살게 하시는 자는 영이니, 육은 쓸 데 없느니라.(6:63)        (이상 다 자역)

 

영육의 의의를 아는 데에 우리의 신앙의 지식은 있다. 영육의 의의를 바로 해석치 못하여 우리는 혹은 매우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다,  진보된 신앙은 진리의 지식이다.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신령한(성령이 밝혀주시는) 지식, 이것이 생명이요, 결실인 것이다. 홀로 하나이신 참 하나님과 그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앎은 곧 영원한 생명이라(17:3)는 의미를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영육의 의의를 아는 지식은,  우리의 신앙에 치명적 관계를 가졌느니라.(우리가 말하는 지식은 그냥 머리에서 왕래하는 이지적 지식이 아니다. 이는 성령으로 말미암아서만 밝혀지는 영적 지식(enlightened by the Holy Spirit), 생활력이 충만하여 열매를 산출하는 실제적 지식을 말하는 것이다)

 

σαρξ –사르크스-는 원래 몸의 연한 부분을 말하여, 여기에는 신경, 혈관이 가득하여 생리적 감각이 있는데 이다. 그래서 고락의 느낌에 지배를 받는 것이 인생인즉, 필경 육이라 하여 인간의 전 존재를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즉 데살로니가전서 523절의 몸(body), (soul), 신 또는 영(spirit)의 총체를 가리켜 육이라 한다.(고데, 요한복음 주석 p.360 참조) 그래서 육이란 말 그대로는 우선 반드시 죄를 의미치 않는다. 우리는 육의 감각으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예배하여,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경건에 나아갈 수 있음이다. 그러나 떨어진 아담의 후손인 우리 인간의 육은 온전히 악한 원칙에 지배를 받아, 죄에의 경향이 그 본성임과 같이 되어 있다. 그래서 육은 영의 원수가 되는, 멸망할 것으로, 또한 성경에 나타났다. 인간은 육이니, 곧 죄라, 멸망할 것이니라.

영 πνευμα -프뉴마-는 우선 하나님이다. 요한복음 424절에 “하나님은 영이시니라”고 말하였다. 영인 것은 하나님인 자의 성질인즉 성자, 성령도 또한 영인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성령을 다만(관사를 붙여서) “영” το Πνευμα -토 프뉴마-이라고 한다. 受肉(수육)한 성자는 저 자신이 영의 양식이고, 그는 그의 말씀을 “영이라”고 말씀하셨다.(6:63) 그리하여 대개 영이란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께 있고, 타에 있지 않는 것, 절대 영, 이것이 영의 제1의 뜻인 것이다. 그 다음에 “우리의 영”이라 하여, 미래의 심판에 책임을 졌던 존재가 사람에게 있음을 우리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 의미의 영보다도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 “영”은 前記(전기)의 절대 영과의 관계로써 부활된 “우리의 영”이다. 이는 그리스도를 紀元(기원)으로 하는 새 생명인 영이다. 이 영은 그 존재의 원인, 그 생활의 방향, 그 종국의 목표를 다 절대 영에 둔다. 크리스천은 절대 영과의 새로운 관계로써 새 생명의 생활을 하는 영적 존재인 것이다.

 

이상 영육의 의의를 종합하여 생각하여, 우리는 더 명료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즉 육이라 함은 절대 영과의 관계가 없는 인간의 전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다. 성령의 일을 받지 못한,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지 못한, 아버지 하나님을 예배함이 없는, 인간의 전 존재는 육이다. 그리하여 육의 도덕적 노력, 그 종교 신앙, 그 진리 탐구, 이는 아무리 하여도 영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높은 도덕의 사람, 깊은 신앙의 사람, 맑은 진리의 사람이라도 그들은 영일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의 괄호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창조자와의 관계에서 끊어져서, 인간은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그 영 자리를 회복치 못할데에 떨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영적 생명, 영적 생활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곧 우리의 영에 올라가는 유일한 길이다. 영원한 하나님인 자, 말씀이 육이 되어, 육에 충분한 영의 교통을 주어, 육을 영에 취하여 육을 영에 화한 자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하여 그의 생명의 영(the spirit of life)이 일하는 데에 영의 새 생명은 일어난다. 사람 안의 깊음에 임한 생명의 새 원칙은 그 근원과의 부절의 교통으로 그의 전 존재를 정복하면서 있다. 그에게 영을 거스르고, 죄에 이끌리는 육이 있지만 이를 이기려는 신생명의 운동에 그의 가장 중요한 생활은 있다. 그렇게 그의 안에 영의 생활이 있어 그는 벌써 영의 나라, 즉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요, 또한 그는 영으로 사는, 하늘 생활을 하는 자이다. 미리 완성된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가면서 그는 영의 최후의 승리인 부활을 목표로 하고 달음박질하는 것이다.

신앙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영이 되려는 노력이다. 우리의 목표는 ()이 아니요, 사랑이 아니요, 영이다. 하나님이 영이심과 같이 우리도 영에 이르지 않으면 아니 된다. 영이 되려 함에 신앙의 목표는 있다. 그런데 육은 영일 수 없는 것이다. 그 몸, 그 혼, 그 신()을 다하여서도 영일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영임을 얻는 일은 우리에게 있지 않고, 위에서 온다. 절대 영에서 온다. 성령의 교통이 있어서만 우리와 영의 생활이 있다. 영적 생활의 효력은 온전히 우리에게 있지 않고, 위에 있는데 우리는 때때로 이 요령에서 떠나 미련한 생활에 빠지는 일이 있다. 우리가 때에 영의 충만을 얻었던 기억을 가지고, 우리 자신이 영의 생활을 하려고 하여 그 되지 아니함을 깨달을 때, 실망하고, 괴로워한다. 보라, 그때는 성령이 臨(임재)치 않은 밤이니, 너의 노력으로써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느니라. 마땅히 일체를 다 그에게 맡기고, 움직이지 말고, 영을 구하여 기다릴지니, 영이 와서 충만한 때에 우리 안에 율법의 의도 충만 하여지는 것이다.(8:4) 즉 영에서 차여저서 또한 모든 선행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영의 권능으로 우리는 우리의 지체를 선에 쓸 수 있다. 그러나 이로써 우리의 육이 성을 이룬 것이 아님을 주의치 않으면 아니 된다. 육이 영에 변한 것이 아니다. 영이 강하게 일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선이 육을 정복한 영의 힘입음을 분명히 알 것이니, 육이 변함과 같이 생각하여서는 아니 된다. 부활의 전에는 육은 끝까지 죄의 육이다. 부절히 죄에 경향한다. 다만 진보한 신자는 더 많은 영력을 얻어 더 강하게 육을 이겨, 선한 열매를 맺는 것뿐이다.

신앙 생활의 비결은 영을 받는 데에 있다. 영을 더 받는 데에 있다. 우리의 일체를 다하여 부르짖을 것은 오직 영을 주시옵소서!

 

2. 영과 진리를 분별하라

 

아마 이 말씀을 알아 이 구절을 바로 해득하여 가지고 있는 신자가 조선 교회에 몇 사람 없으리라. 요한에게서 나타난 성령의 말씀인 “영”과 “진리”는 이러한 것이다.

 

영을 πνευμα -프뉴마-, 진리를 αληθεια -알레데이아-라 하여 요한복음은 이 말씀들에 특별한 의미를 포함시켰다. 이는 하나님 안에 있고(in God), 하나님께로 나오는 것이다. (proceeds from God) 고로 피조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으며,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이며, 지금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새로 오는 것이다. 즉 영과 진리는 하늘이요, 다른 일체는 다 땅이다. 그리하여 땅에 하늘의 영과 진리의 일이 임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하여 영과 진리는 동일한 것에 관한 다른 방면의 말이다. 즉 영과 진리는 동일한 것이요 그 나타낸 방면이 다른 것이다. 고로 “영은 곧 진리”이다. το Πνευμα εστιν η αληθεια -토 프뉴마 에스틴 헤 알래데이아- 조선어 성경은 “영은 곧 진리니라”(요일 5:7)고 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영과 진리는 다 육화하였다. 그래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요일 1:1~2 참조), 영과 진리가 곧 예수이었다. 하나님은 영이요 진리이다. 그래서 영과 진리는 예수에게서 육을 이뤄 나타났다. 그리하여 영과 진리가 육으로 나타난 이것이 곧 생명 ἡ ζωὴ -헤 조에-이다. 영원한 생명이다. 고로 예수가 “나는 생명이요”(14:6) 하였다. 그래서 또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양식이요”(6) 하였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신을 받은 자마다 그도 또한 그 육에 있어 영이요, 진리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명이 되는 것이다. 하늘 것이 와서 육의 사람이 영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는 것이다. 신앙은 이렇게 지음을 받는 일이다. 신자는 이렇게 되는 일이다.

, 진리, 생명의 지성소에서 살아라. 이 영역을 바라보아라! 이것이 교회 문제, 세속적 紛擾(분요) 분란 에서 얼마나 먼 것인가? 신앙은 이런 것이요, 크리스천이 되는 일은 이런 일이 되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중도에서 헛되이 그 번잡한 데에 잡혀 있느냐?

신앙 혁명의 소리는 외쳐 가로되, “조직의 교리, 제도의 교회에 초월하여 영, 진리, 생명의 그리스도 자신에게 와서 영이 되어라. 진리가 되어라. 생명이 되어라!” 한다.

 

 

 

3. 영으로 새로워져라 

 

신앙은 성령와 역사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신앙생활은 성령의 계속적. 교통으로 영위된다. 그리하여 성령의 역사는 우리에게 진리를 묵시함에 있다.

진리는 하나님의 뜻이요, ()眞理(진리)이니, 이를 모아서 한 추상의 절대 진리로 하여 하나님 자신, 또 그리스도 자신(14:6), 또 성령 자신(14:17 요일 5:7)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그러나 또한 이것이 나뉘어 여러 가지의 진리, 즉 요한복음 1613절에 있는 모든 진리로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진리이신 자는 와서 모든 진리로 우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사람은 진리를 배운다. 그가 하늘에 올라가는 일은 그가 진리를 배워 나아가는 일이다. 그런데 인류가 진리를 배워 나아가는 역사를 생각하여 우리는 많은 可悲(가비)할 –슬퍼할-  사실을 본다. 유대인도 진리를 배워 넘어졌다. 로마교회도 진리를 배워 넘어졌다. 프로테스탄트 교회도 진리를 배워 넘어졌다. 진리는 많은 경우에 인류가 부딪혀 넘어지는 跳石(차석)-밟을 돌-이요, 떨어져 깨뜨려지는 반석이다. 진리를 인하여 인류는 멸망하면서 있다. 그러나 진리가 아니면 그들이 살 길은 없는 것이다.

 

이제 개인의 경험으로 진리를 배우는 일을 생각하건대 우리가 암흑에 있고, 혼돈에 있고, 고투에 있다가 진리의 한줄기 광명이 쪼여 그 암흑을 깨뜨리고, 그 혼돈을 정리하고, 그 고민을 기쁨으로 바꿀 때, 이에 우리는 진리 중에 몰입하였고, 진리는 우리의 전 존재에 통한다. 인간의 행복스러운 ecstasy(극도의 환희)가 이에 있다 하리로다. 그래서 우리가 배운바 명료하고, 확실한 금강석 같이 빛나는 한 개의 진리, 우리는 이것으로써 만물을 해석하고, 만물은 다 이것으로 포괄된다. 그리하여 나는 그 진리로 살고, 그 진리는 나의 전부로 되어 있다. 그 진리는 나의 생활의 원칙이라, 나의 말에, 나의 행위에, 그 진리가 반영된다. 나를 본 자는 곧 그 진리를 보는 것이다.

우리는 그 배운 바 진리로써 산다. 얼마 동안을 그 진리로 산다,  그러나 이 진리 생활에 긴 시일을 줄진대 아, 이상한 일이다. 우리는 필경 그 진리를 부패시키고 만다. 진리의 영은 떠나고, 진리는 그 형식만 남아 있고, 진리에 순종하노라고 하는 일이 도리어 진리를 거역하는 큰 죄가 되고 만다. 이 구체적인 예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맞는 유대인에게서 본다. 그들은 하나님께 충실코자 하는 생각으로 엄밀히 율법(거기에 더 장로의 유전의 세칙을 가하여)을 지키고 율법에 충실코자 하여 예수를 죽이는 것이었다.

 

안식일의 규칙에 고집하여 안식일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이고자 함을 우리는 요한복음 5장의 기사에서 본다. 같은 모양의 일이 언제든지 누구에게서든지 행한다. 개인으로, 단체로, 사람은 한 가지 진리를 배워 그것으로 얼마 동안을 살고 있으면, 필경 그 진리를 부패시키고, 그 진리에 넘어져 망하고 그러한 것이 역사의 증명이다.

물론 여기에 깊은 뜻이 있다. 신앙생활은 생명이다. 여기에 생명의 delicate(섬세한)한 것이 있다. 생명은 한군데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한 가지 것으로만 족한 것이 아니다. 한 식사는 그에게 어떤 기간의 생기만 줄 뿐이다.

생명의 특색이 그 생장에 있음과 같이, 영원한 생명은 항상 새로운 양식을 요하는 것이다. 가령 우리의 눈이 어떤 경치를 새로 볼 때, 그 처음에는 탄미의 신선한 감이 있어 저기 있는 봉우리, 여기 놓인 바위, 저기 떨어지는 폭포, 여기 흐르는 계곡수, 이것은 다 우리의 마음에 시를 주고, 노래를 일으킨다. 그러나 한 가지 것을 보고 또 보아 어떤 기간에 걸칠진대 필경은 그 경치와 나와의 산 관계는 없어져서, 저 봉우리는 공연히 높고, 이 폭포는 시끄럽게 떨어지는 것이 되고 만다.

같은 모양으로 한 가지 진리에만 우리가 머물러 있으면 필경(畢竟)은 우리는 그 진리와의 산 생활을 잃어버리고 마는 지경에 들어간다. 대개 생명의 양식은 병화가 많음을 요하여 우리의 영적 생명의 양식을 위해서는, 성령은 모든 진리를 갖춰 가지고 계신 것이다.

 

우리는 무한히 생장할 영의 생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둠을 받았다. 이 세상은 변화무상하다. 우리는 여러 가지 색색의 환경을 이 세상에서 당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한 환경의 해결에 우리는 위로부터의 한 진리를 배운다. 이 경험의 축적은 곧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부이다. 모든 진리를 배워 이를 영원한 생명의 내용으로 하면서, 우리는 무한을 향하여 진보하는 것이다.

부절히 진리를 묵시하는 성령의 일, 때때로 이를 받아 새로워지는 우리의 영적 생명, 나는 이 관계를 청하여 “영의 새로움”이라고 한다. 신앙생활은 영의 새로움의 생활이다. 영의 새로움이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근원과의 산 관계에 있지 아니하여 이는 죽은 신앙이다. 속죄를 믿는 자가 신자가 아니요, 재림을 믿는 자가 신자가 아니요, 부절히 영의 새로움을 경험하는 자라야 신자이다. 산 관계에 있지 아니한 바른 신경,  이는 사각이니, 사각을 잡고 있으면서 신자인 체하는 자는 더욱 가증한 자이다. 잘 믿는 자라 하여 바른 신경을 믿는 자를 의미함이러니, 생명 신앙의 입장으로 보아 바른 신경을 가진 자도 죽은 자이다. 영의 새로움을 가진 신자라야 산 신자이다. 네가 고백하는 바른 신경, 네 이름 위에 쓴 교회의 직명, 이것에도 불구하고 네 영혼은 성령이 묵시하는 모든 진리로써 새로움을 받고 있느냐?

 

4. 영적 싸움을 싸우라

〇 신앙 생활은 영의 싸움이다. 우리는 구원을 얻어 영의 세계에, 우리의 존재는 나타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의 영적 생명은 영계의 많은 원수를 이김으로써 생장하며, 강하여지는 것이다.

 

 

〇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한 자에게서 구하옵소서”(6:13, American Standard Version 참조) 하고 택함을 받은 자는 기도한다. 이 기도에 응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악한 자의 시험을 허락지 않으심을 우리는 믿는다. 그런데 이 시험은 우리가 온전히 멸망할 시험을 의미하여, 이런 시험을 택함을 받은 자가 당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마귀를 제어하여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일이 여기까지 미치지 않는 한도 안에서 마귀는 성도를 시험한다. 그 위계를 다하여 시험 한다.

 

대개 하나님은 마귀의 일을 변환하여 선한 결과로 성도를 유익케 하실 수 있으므로 이런 종류의 시험을 그들에게 허락 하심이다. 사탄은 그 성질대로 일하여 택한 자라도 될 수만 있으면 미혹 타락케 한다. 그러나 택한 자를 잃지 않으시고자 지키시는 자는 전능하다. 그는 그의 기도에 충분히 응하고 계시다. 그들은 기도한다.

“우리를 악한 자에게서 구원하시 옵소서!” 하고.

 

 

 

〇 마귀는 성도를 시험한다. 부절히 시험한다. 우리의 영적 안령, 영적 진보를 막는 모든 일은 다 마귀에게서 오는 것이다. 그를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6)고 한다. 그는 우리의 하늘과의 교통을 막아 차단할 수 있는 자이다. 그는 혹은 영계의 오묘한 이치로써 혹은 물계의 사정으로써 우리의 신앙을, 혹은 그르치려고 하며, 혹은 막으려고 하는 것이다. 혹은 私慝(사특)한 어긋난 이치로써 우리의 그리스도와의 가까운 교통을 방해하며, 혹은 어려운 세상 사정으로써 우리를 낙망케 하여 신앙치 못하게 하는 것이다. 악마의 일은 너무 복잡 錯亂(착란)하여 이를 일일이 세기 어렵다. 혹은 유혹하며, 혹은 공갈하며, 혹은 칭찬하며, 혹은 질책하며, 혹은 열심케 하며, 혹은 낙심케 하며, 혹은 성공케 하며, 혹은 실패케 한다. 매우 희락케 함도 마귀의 일이다. 매우 悲愁(비수)케 함도 마귀의 일이다. 매우 혈기를 동케 함, 매우 懊惱(오뇌)가 있게 함, 이것이 다 마귀의 일이다. 요컨대 그의 일의 요령은 사람을 하나님께 가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께 離絶(이절)-인연을 끊음-시키고자 함에 있나니, 그가 이 목적을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일하며(이 세상은 우선 그의 왕국이니 그들이 세상 임금이라(12:31, 16:11)고 부른다. 세상의 것은 그가 자유로 쓰게 되어 있는 것이다.) 종종 잡다한 사정을 만들어 사람에게 주어 그 사정에서 그 마음이 영향 받아 필경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부정하게 함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즉 사정이 이와 같으니 어찌 하나님의 뜻에만 맡겨 순종하리요, 사정대로 처치할 수밖에 없다고 그의 마음에 결론을 짓게 하는 것이다. 수없이 복잡한 이 세상의 사정, , , , , 가정, 사회, 병약, 재난, 모든 對物(대물) 관계, 대인 관계, 이런 사정 속에 사람은 마귀에게 시험을 받기 위하여 둠을 받은 것이다.

 

〇 네 신앙을 유지할 수 없는, 견딜 수 없게 어려운 사정을 당하였느냐? 너는 먼저 알아라. 그 사정이 그 보이는 대로 物物(물물) 人人(인인)간에서 생겨 온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임금 또는 이 세상의 ()(고후 4:4) 마귀에게서 온 것임을. 고로 그 보이는 물적 사정을 처리코자 힘써서는 무익한 것이니라. 그렇게 힘쓰면 힘쓸수록 사정은 더 착란하여져서 너를 얽매리라. 너는 먼저 그 사정의 말미암아 온 원인으로 더불어 싸워라. 공중에 권세 잡은 자로 더불어 씨름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이 씨름에는 혈기는 무용하다. 이 싸움의 선수는 말하였다. “우리들이 전투하는 기계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로라”고.(고후 10:4) 악령을 향하여 싸우는 것이니 영으로써 싸우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이는 영과 영의 싸움이다. 영과 영의 씨름이다. 어떻게 이 세상의 임금, 악마를 씨름하여 이길까? ! 우리의 이 싸움에 절대로 필요한 것은 마귀보다 강한 자와의 교통이다. 하나님과의 교통으로써 그의 힘을 힘입어 우리는 우리에게 당한 魔軍(마군)을 싸워 이긴다. 우리에게 붙잡힌 그 놈을 씨름하여 지운다. 그리하여 우리는 승리자가 되었다. 마귀를 이김으로 우리가 자랐다. 위로부터의 힘을 더 힘입었음이다

 

〇 무엇이 영의 싸움이냐? 이는 흔히 기도이다. 기도로써 우리는 영의 싸움을 싸운다. 우리의 이 싸움은 혼히 기도 중에 행한다. 기도로써 우리는 위로부터의 도움을 부르짖어 구하고, 위로부터의 응답을 얻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탄아 물러가라”고. 그리하여 마귀는 패하여 퇴각치 않을 수 없다.(이렇게 하는 싸움인고로 우리는 우리가 당한 마귀만을 싸워 이길 뿐 아니라 우리의 형제들을 괴롭게 하는 마귀로도 싸워 이길 수 있다. 고로 우리는 원방에 있는 형제들을 위해서도 싸울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마귀를 이기면 우리를 괴롭게 하던, 자칫하면 우리가 멸망을 당할 수도 있던 우리의 사정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그대로 낙원으로 화하여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귀가 무서워하는 것은 신자의 기도이다. 그는 될 수만 있으면 신자의 기도를 막으려 한다. 기도가 되지 않거든 이것이 마귀의 일인 줄로 알라. 그리하여 싸워라. 위의 도움을 구하라. 기도가 되기까지 싸워라. 어찌하든지 네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유롭게 유통하는 기도만은 네게서 끊어지지 않도록 하여라. 기도 못하면 망하느니라.

〇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하여 멸망할 시험은 이를 意識(의식)에 관계없이 당신 편에서 제어하여 주신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시험은 우리에게 이것을 당하게 하신다. 우리는 그 시험중에 있어 충분히 괴로워하여 고난으로 영의 요구를 느껴 하나님의 도움을 얻어 이김으로 그 시험의 해결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앎에 나아간다. 고로 1(1)의 마귀의 시험은 신자의 충분한 의식으로, 심각한 기도로 승리의 관계로 처결되는 것이다. 우리가 시험을 당함은 유익하다. 마귀의 위계는 아무리 공교하더라도, 세상의 사정은 아무리 錯亂(착난)하더라도 우리는 이를 이김으로 유익하게 된다.

 

 이런 秘義(비의)가 있는 고로 하나님께서는 이런 配定下 (배정하)에 우리를 두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담대히 세상에 처하여 살 것이다. 마귀를 두려워하지 말라. 그를 언제든지 이길 수 있는 자로 알라. 크리스천아 담대 하라! 육으로 싸우지 말고 영으로 싸워라. 혈기로 대적치 말고, 기도로 싸워라. 너에게 환란이 임하였고, 견디지 못할 경우가 다 닥쳤느냐? 네가 가는 길에 있는 장애물을 너는 네 손으로 집어 치우려고 하기보다 먼저 이를 영으로 붙여 정복하라. 기도로써 영의 싸움을 싸워 너의 원수를 지극히 높은 자에게 호소하고, 위로부터의 권능의 응답이 너의 원수를 제거하게 하라. 이렇게 너는 환란을 이기고 경우를 정복하라. 너는 환란, 역경을 통하여 장부로 남아 서리라!

 

(일기 중에서)

 

5.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라

사람이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느니 라고 인류의 구주는 말씀하셨다.

난대로의 생명을 가진 인간아,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생활을 보라. ()을 잡지 못한 () 생명으로 통일을 모르는 잡다 중에 살아, 영구한 목표가 없이 헛된 것들에 속아 이리저리 방황하니, 가졌던 힘을 다 허비하고, 기진맥진하여 죽어버리고 마는 것이 아니냐?

 

그렇다. 생명의 대변환을 통하지 않아 인생은 아직 어떤 근본적 결함에 있다. 그는 아직 받을 바 영의 생명을 받지 못하였느니라. 그는 아직 살 바 영원한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였느니라. 사람에게 이 높은 생명을 주고, 이 영원한 생명이 있게 되리라. 그리하면 너는 네 안의 깊음에 생긴 깊은 생명으로써 이 ()의 잡다한 세계를 헤치고 들어가 그 중심 조화에 관계하여 살게 되리라. 만물의 창조자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과 하늘로써 오는 성령을 받아, 다른 더 높은 생명을 받아 높은 세계에 들어오라.

새로 난 생명을 가진 크리스천아, 네 안에 영원한 생명의 萌芽(맹아)는 생겼다. 그러나 汚塵(오진)-더러운 먼지-이 휘날려, 불신이 가득한 공기 중에 산다. 때에는 기가 막혀 질식할 형편도 당한다. 오진이 너의 심령을 두텁게 가려, 너는 하늘 광명을 보지 못한 것이 얼마간이었느냐? , 너는 성령을 받아라. 그가 와서 너의 오진을 소제하리라. 그가 너의 육의 죄를 태우시리라 그가 너의 영적 생명에 활기를 더하시리라 그가 너의 하늘 생활을 회복하시리라.

이 불신의 세계에서 신앙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마귀는 이중삼중 우리를 둘러싸고 모든 고난과 유혹을 한다. 우리를 만일 우리대로만 내어 버려 둘진대, 우리는 아무리 충실한 크리스천이 되고자 하여도 얻지 못하고 반드시 패망하여 없어지리라. 그러나 來世(내세)聖德(성덕)을 위하여 성령이 계시다. 그는 때를 맞춰 우리를 방문하여 주신다. 고로 이 불신의 대세계를 환경으로 함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은 산다. 승리로 산다. 너의 영적 생명, 영적 생활의 부흥을 위해 너 크리스천아 성령을 받아라!

 

기독교는 단순하다. 대단히 단순하다. 이는 성령이다. 기독교는 성령교이다. 성령이 있어 사람에게 기독교는 있다. 시끄러운 성경의 비판적 연구, 복잡한 神學說(신학설)들이 만일 사람 영의 구원에 요구된다면, 기독교는 사람을 화 있게 할지언정 사람을 구원치는 못하리라. 神學說(신학설), 성경연구, 이것들을 없이하라. 그리고 참된 기독교는 여기에 있다. 어디든지 성령이 임하여 사람의 영혼을 붙잡고 있는 데에 진리가 있고, 생명이 있고, 하늘은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는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모여서 ()에 있고, 어디든지 성령이 임재 하여 계신 데에 기독교가 있으면 아, 이는 얼마나 단순한 것인가? 사람 영은 이로써 구원되리라. , 인간들아 성령을 받아라.

 

영적 기독교 (1)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하는 바리새 교인의 물음에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하나님 나라는 보이는 것으로 오지 아니하여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말하지 못하리니 대개 하나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느니라.(17:20~21, 자역)

 

영은 위의 것이요, 사람의 것은 아니다. 위로부터의 영에 접하여 사람은 영을 알고, 이에 접하지 못하여 사람은 영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기독교는 영이다. 기독교의 일체는 위에서 온다. 위로부터 오는 것을 받지 못하여, 사람은 기독교를 알지 못하며, 기독교와 상관이 없는 것이다.

사람의 회한(悔恨)이 아니라, 위로부터의 책망을 받아 회개하며, 사람의 새 결심이 아니라, 위로부터의 영에서 새 생명이 생기며, 사람의 깨달음이 아니라, 위로부터의 밝힘으로써 진리를 알며, 사람의 걸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는 자람은 자라나니, 이것이 참 기독교이다.

 

그래서 어디에서든지 위로부터의 영은 와서 일하여 사람 안의 깊음에 회개는 일어나고, 새 생명은 시작되고, 그 생명이 자라는 데에 기독교는 있다. “기독교는 보이는 것으로 오지 아니하여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리니, 기독교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이 기독교와 소위 기독교의 그 다름이 얼마나 큼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소위 기독교는 신경이다. 교회이다. 이는 보이지 않는 것(invisible)으로 오지 아니하고, 보이는 것( visible)으로 온다. 이는 사람 안의 깊음에서 행하는 생활이기보다, 모이는 일이나 의식을 행하는 일이다. 우리의 영혼은 교회로써 참 기독교라고는 도저히 승인할 수 없다. 교회가 만일 기독교일진대, 우리의 영혼은 타에서 구하지 않을 수 없다. 행복스러운 일은 교회가 기독교가 아닌 일이다. 교회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 안의 깊음에서 일하여 영원한 생명을 산출하면서 있다.

그리스도를 본 우리의 영혼은 타에 아무것도 요구할 것이 없다. 우리는 우리의 시험으로써 말한다. 교회가 없고, 교직이 없고, 의식 예배가 없어도, 어디에서든지 영적 생명이 있는 데에 기독교는 있다고.

 

영적 기독교 (2)

하나님의 본질의 계시와 기독교의 신 해석

그러나 때는 오나니,  지금도 그 때라. 즉 진정한 예배 자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할 때이니, 이는 아버지께서 그렇게 자기를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심 이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를 예배하는 자들도 마땅히 영과 진리로 예배할 지니라(4:2324)

1.

인류는 하나님을 아는 데에 그 최고 생명을 가졌다. 그리고 그 생명 생장은 그 하나님 지식의 진보에 있다. 지금까지 인류는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진보하여 왔다. 지금도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이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서 그들에게 생명은 없음이다.

생명은 그 자신의 운동과 그 둠을 받은 바, 사회의 변화와의 유기적 관계로 인하여 종종 잡다한 경우에 우연히 만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각각의 경우는 각각 거기에 상응한 하나님 지식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그 하나님 지식이 그 경우의 해결을 지음이다.

 

지금까지 인류는 하나님께 대하여 가르침을 받아왔다. 하나님의 전능 전지함, 그의 거룩함, 그의 의로움, 그가 사랑임을 배웠다. 그래서 그것은 다 그때에 가한 것이었다. 그러나 금일의 종교계의 혼돈은 이것이 전시대의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한 한 경우인데 이것은 지금까지의 하나님 ()을 가지고는 해결하여지지 않는 것이다. 이제 인류의 영적 생명은 일단계의 생장을 이룩한 후에 정체하여 있어 그 요구되는 바는 더 근본적인 것이다. 금일의 우리는 하나님의 한 속성을 이해하여 현재의 우리 경우를 해결할 수는 없다. 금일의 우리 경우의 해결에는 하나님의 본질,  그것의 지식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 구주인 하나님은 그 본질을 계시하여서 우리 경우를 해결하게 하고, 우리를 살리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본질의 계시란 무엇이냐? 가로되 “하나님은 영이라” 함이다,

 

하나님은 영이라 함이 무엇이냐? 이 대답은 이 책 전편이 이것을 보여 주려고 하는 바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의 이론을 진보시키기 위하여 우리는 영이 무엇임을 총괄적으로 말하여 보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러면 영이란 무엇이냐? 영이란 창조자, 절대자의 본질로 이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영은 또 설명되는 것이다. 이는 영은 진리로서 자기 현현을 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진리란 우리의 이해를 위하여 영이 구체화한 것이다. 즉 진리는 영이란 언표이다. 사람은 영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진리를 계시 받음으로 영을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진리는 사람이 이해한 영이다. 사람 안에 영이 임하면 그것은 진리로서 그에게 이해되는 것이다. 또 사람은 그 받은바 영을 진리로서 언표하는 것이다. 고로 사람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하는 진리 주장, 이는 곧 영인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인 영, 그 사람에게 있어서 언표인 진리, 이것이 기독교의 근본 원리인 것이다. 이 근본 원리가 기독교 일반에 대하여 더 근본적이고, 새롭고, 그리고 바른 해석을 우리에게 주고, 그리고 현재의 기독교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고, 그리고 우리 신앙과 신앙생활을 살리는 것이면 이것은 20세기의 우리를 구원하는 복음인 것이다.

 

여기에 쓴 지식, 이해 등의 말은 결코 그것이 인간의 사색, 연구로써 되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이는 영에 관한 앎이니 성령이 주는 앎,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기능이 지각하는 앎이다. 주 예수가 “영원한 생명은 곧 이것이니, 홀로 하나이신 참 하나님인 당신과, 당신이 보낸 예수 그리스도를 앎이니이다”고 말씀하신바 “생명은 즉 앎이라”는 의미의 앎 이다. 바울의 “하나님의 지식”, επιγνωσιs του θεου -에피그노시스 투 데우- 또는 “하나님의 뜻의 지식” επιγνωσιs του θελήματος αὐτοῦ -에피그시스 투 델레마토스 아우투-도 같은 의미의 앎이다. 고로 내가 종교는 앎이라 하여서 이것이 나의 독단은 아닐 것이다.

 

2

이에 우리는 영과 진리의 근본 원리를 가지고 성서의 종교를 살펴보기로 하자. 그 중요한 문제만을 살펴보면 다른 세세한 문제는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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