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10일 주일아침예배 막 4:1-9 옥토 마음
인공위성에서 보내온 우주의 별들의 사진을 보면, 달이나 화성의 지표면의 사진을 보면 우리 지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진만 보면 지구인지 달인지 화성인지 구분이 안 됩니다. 심지어 2004년 유럽우주국에서 로제타 탐사선이 혜성67이란 우주를 떠돌고 있는 혜성에 도착하여 사진을 찍어 보냈는데 바로 이 사진입니다. 지구의 어느 땅 모습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실 때에 세쨋 날에 땅을 창조하셨는데 우주 안에 있는 대부분의 별들은 다 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지구와 다른 점은 그 땅들은 죽은 땅이라는 것입니다. 인공위성을 타고 우주에 나가 지구를 바라보면 에멜라드보석 같기도하고 비취보석 같이 파랗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구가 푸르게 보인다는 것은 살아있는 별이기 때문입니다. 청색은 오행설에서 보면, 木을 의미하며 동쪽에 해당되고 만물이 생성하는 풍성한 봄의 색을 의미합니다. 창조 생명 신생을 상징하여 요사스러운 귀신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색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지구를 덮고 있는 흙은 생명을 간직한 살아있는 흙입니다. 흙 1g 속에는 흙의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약 10억-30억 마리로 일천 만에서 3천만 종류의 미생물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어마 어마하지요? 이런 흙에 의해서 풀이 자라고 나무가 자랍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이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창 3:19에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아파르 앝타 웨엘 아파르 타슈브)”고 말씀하였습니다. 사람 몸의 서분과 흙의 성분이 같다고 합니다.
2013년 12월 제68차 국제연합(UN) 총회에서 2015년을 '국제 흙의 해'로 정하고, 2014년부터 12월 5일을 '세계 흙의 날'로 기념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한국에서도 흙의 소중함과 보전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2015년부터 매년 3월 11일을 법정기념일 '흙의 날'로 지정하였습니다. 왜 3월 11일을 흙의 날로 정한 까닭은 숫자 3은 농업, 농촌, 농민의 3農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11은 한자 십(十)과 일(一)이 합쳐저서 흙 토(土) 자를 말합니다. 흙의 날은 흙의 귀중함을 알고 흙에 고마움을 가지고 흙이 유실되거나 오염되지 않도록 본존하자는 의미로 기념일을 정하였습니다. 최근 조사를 보면 한국 토양의 환경적 가치는 약 281조 원에 달합니다. 전국 농경지의 수자원 함양량은 약 39억 톤입니다. 이는 팔당댐 16개 크기의 물을 저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작물을 키우면 약 7000만 톤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합니다. 이것은 약 171개의 지리산 국립공원이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먹는 식품의 95%가 흙에서 온것입니다. 식품뿐만 아니라 의약품 화장품 건축자재를 공급하고 홍수를 조절하고 대기를 정화시키고 기후를 순화시킵니다.
그런데 전 세계적으로 매년 경작지가 줄어들고(2050년에는 1960년 대비 1/4수준으로 감소) 흙의 질적 저하를 가져와 병해충이 흙을 오염시켜 작물 생산이 점점 감소되고 있다고 합니다.
통계청의 '2018년 경지면적조사 결과'를 보면 지난해 전국에서 경작에 사용된 논밭의 면적은 만 5,960㎢로 전년보다 250㎢, 1.6% 줄었습니다. 이는 서울시 면적의 41%에 해당하는 경지가 감소한 것입니다. 경지가 감소한 주요 원인은 건축물 건설과 공공시설물 설치, 유휴지 전환 등이었습니다. 통계청 관계자는 도로와 건물, 공공시설물 설치 등 토지를 다른 용도로 사용하려는 수요가 많아 경지가 전반적으로 감소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유휴지가 늘어나는 것은 고령화와 인력 부족으로 인한 경작 포기 때문이라고 통계청은 분석했습니다.
그래서 점점 죽음의 땅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점점 사람들은 흙을 떠납니다. 무슨 말입니까? 농촌을 버리고 도시로 갑니다. 도시에는 흙을 보기 어렵습니다. 온통 시멘트 콘크리트 집으로 가득합니다. 시멘트길이거나 아스팔트 길 입니다. 한마디로 도시는 죽음이 가득한 도시입니다.
물론 시멘트의 원료는 흙에서 나옵니다. 석회석 규석 점토 산화철 알루미네이트 등으로 만드는데 이것들을 1500도이상 불에 녹여 합석시킵니다. 여기에 생명이 다 죽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시멘크 집에서 사람들은 흙에서 나오는 생명을 호흡할 수 없습니다. 또 아스팔트는 프라스틱쓰레기, 버려진타이어나 고무제품등 온갖 쓰레기로 만들어 집니다. 아스팔트공장은 그야말로 쓰레기 집합장입니다. 그런 아스팔트길을 자동차가 달리면 여기서 시멘트나 아스팔트에서 온갖 미세먼지들이 날아오릅니다. 도시의 미세먼지는 이런 집과 길에서 날아오르는 먼지들과 뒤엉켜져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흙을 버리고 도시로 나옵니다. 시골의 땅들이 점점 도시화되고 황폐화되고 있습니다.
1973년 홍세민의 노래가 있습니다. ‘흙에 살리라’는 노래입니다.
“ 초가삼간 집을 지은 내 고향 정든땅, 아기염소 벗을 삼아 논밭 길을 가노라면
이 세상 모두가 내 것인 것을 왜 남들은 고향을 버릴까
고향을 버릴까 나는야 흙에 살리라
부모님 모시고 효도하면서 흙에 살리라
물레방아 돌고 도는 내 고향 정든 땅, 푸른 잔디 벼개 삼아 풀 내음을 맡노라면
이 세상 모두가 내 것인 것 왜 남들은 고향을 버릴까
고향을 버릴까 나는야 흙에 살리라
내 사랑 순이와 손을 맞잡고 흙에 살리라”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씨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씨 뿌리던 방법은 참으로 독특합니다. 밭에 골을 내어 그 골에다가 씨앗을 잘 뿌리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바람에 날리면서 한 주먹 씨앗을 쥐고 아무데나 확확 뿌렸습니다. 구멍이 있는 양가죽으로 만든 씨앗자루를 나귀등에 싣고 나귀를 밭에서 몰고 다니면서 씨앗이 밭에 떨어지게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씨앗들이 바람에 날려가서 어떤 것들은 길 가에도 떨어지고, 어떤 것들은 돌밭에도 떨어지고, 어떤 것들은 가시떨기 위에도 떨어졌습니다. 우리들의 오늘날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멀리서 농부가 씨뿌리고 있는 모습을 바라 보셨습니다. 그 모습에 예수님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 비유로 말씀하실 생각을 하신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을 까요? 예수님이 그 비유의 말씀을 알기 쉽게 다시 말씀하시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실 때에 주변을 돌아 보니 여러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의 마음 상태는 다 제각각 이었음을 보시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 상태를 4가지로 구분하시어 말씀을 듣는 사람의 마음 자세를 가리키신 것입니다. 네 종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보시니 길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길은 사람이 다니는 곳이기 때문에 씨가 뿌려져도 사람에게 밟히거나 새들이 와서 쪼아 먹어 애시당초 씨가 자랄 수 없는 곳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말씀을 들어도 사탄이 그의 마음 안에 들어와 말씀을 밟아버리므로 전혀 듣지 않는 사람입니다. 말씀 중에 딴생각을 하고 있거나 말씀에 아예 귀문을 닫고 있는 望夫石 같은, 아니 망할亡자 부폐할 腐자 돌石자 亡腐石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왜 예수님 주변에 얼쩡거리고 있는지, 완전히 사단의 하수인으로 지금 예수님이 말씀 전하실 때 주변에 지켜 서서 시비 거는 바리새인 율법사 같은 사람을 말합니다. 왜 그런 사람이 교회에 나왔는지, 그런 사람 대부분이 교회 분쟁을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로 지금 예수님 주변에는 흙이 얕은 돌밭 같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아 좋은 말씀이야 하고 고개를 끄덕이지만 곧 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겉으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전혀 말씀의 뿌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교회 단니지 10년이 넘도록 성경을 들고만 다녔지 펴서 읽어보지 않은 사람입니다. 겉은 기독교인인데 속은 세상 사람과 똑같습니다. 그의 마음이 돌밭이라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소귀에 경 읽기라 그 마음속에 말씀이 심겨져 있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지금 예수님 주변에 있어 예수님 십자가 지실때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고 도망쳐버린 사람들이라고 하겠습니다. 3년 반 동안 예수님 제자로 있던 베드로도 에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으니 그간 그의 마음은 돌밭 같았던 것입니다.
세 번째는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에 가시덤불 같은 마음의 소유자들이 주변에 있었습니다. 가시덤불(아칸다스)이라고도 하지만 다른 말로 더러운 풀 즉 잡초 같은 풀도 포함됩니다. 땅을 경작할 때 아주 골치 아픈 풀이 잡초거나 가시덤불 같은 풀입니다. 아침이면 이 잡초제거가 일입니다. 하루라도 내버려두면 어느새 여기저기 잡초들이 땅을 점령해버립니다. 그래서 좋은 작물들이 자라는 것을 훼방합니다. 지금 예수님이 돌아보니 어떤 사람들의 얼굴에 세상의 근심이 가득한 사람들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집 걱정, 자식걱정, 먹을 양식걱정, 이러 저런 걱정이 가득한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 걱정, 사업걱정 빚걱정 이런 경제적인 걱정으로 가득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데일 카네기라는 사람이 “근심이여 안녕(기독교문서선교회 현대신서 65. 1979)” 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근심, 곧 염려와 싸우는 방법을 모르는 사업가는 일찍 죽는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세계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들의 50%는 염려와 근심 때문에 죽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잡초가 이 염려입니다. 현실은 전혀 비관적이지 않는데 가만히 앉아 있다 보면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스쳐갑니다. 염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메림나’인데 ‘나뉘다’란 단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염려는 생각과 마음이 나뉘고 분산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이 시간에도 여러 염려들로 우리 마음이 분산되어 말씀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혹 지금 이 시간에 먹을 것에 대한 염려, 일에 대한 염려, 자녀에 대한 염려, 건강에 대한 염려, 미래에 대한 염려 이런 잡초들이 여러분의 마음안에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염려가 많은 우리들을 향해 바울선생님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메덴 메림나테 엔 판티빌4: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염려가 무익하기 때문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마6:27) 염려는 쓸데없습니다. 쓸데없는 이유는 염려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염려는 습관입니다. 그것도 아주 잘못된 습관이고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악한 것입니다. 염려는 무엇입니까? 현실을 현실 그대로 보지 않고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인데 미리부터 걱정하는 태도입니다. 염려는 우리 마음이 만들어내는 허상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매우 중요한 것처럼 마음을 씁니다. 너무나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인생에 성공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마음 안에 이 잡초들을 뽑아내야 말씀이 나의 생명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돈을 벌까? 어떻게 하면 좀 더 좋은 집에서 살까? 어떻게 하면 누구의 돈을 빼앗아 가질까 그런 욕심이 얼굴에 씌어져 있는 것을 예수님이 보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불안 초조 염려 가난과 병고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보셨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 앞에 나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이런 저런 일들이 그의 마음 안에 잡초처럼 자라고 있었고 가시덤불처럼 뒤 엉켜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받지만 그 말씀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한 부자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부자 청년은 성경도 많이 알고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하나님을 믿는 다고 하였지만 구원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예수님 곁을 떠났습니다.(막19:22) 예수님을 믿고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변화를 경험해야 합니다. 새로워 져야 합니다. 신앙이 성장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의 여러 문제들이 잡초처럼 그의 마음 안에 자라고 있으니 믿음이 자라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는 말씀이 그의 영양분이 되고 생명력이 되도록 이 잡초들을 제거하고 가시덤불을 뽑아내야 합니다. 무엇이 잡초입니까? 믿음으로 심지 않은 것이 잡초입니다. 무엇이 가시덤불입니까? 말씀에 순종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시덤불입니다. 말씀은 진리요 힘이요 생명입니다. 말씀이 나의 인생을 든든한 나무처럼 자라게 하는 자양분입니다. 우리 집 담 밑에 있던 감나무 한 구루가 말라 죽었습니다. 그 이유는 지난여름 땅 밑으로 물이 흘러 땅의 자양분을 따 쓸어가니 뿌리에서 양분을 끌어 들이지 못해 죽은 것 같습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나의 생명이 되도록 할 때에 나의 인생은 온전히 자라고 튼실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잡초들을 뽑고 가시덤불을 제거하고 땅을 좋은 땅 옥토(텐 겐 텐 칼렌)로 만들어야 합니다. 경작하기 좋은 마음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좋은 땅에다 씨를 뿌려야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인간적 욕구를 다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욕구를 얻기 위해선 앞서 말한 세 가지 마음 밭을 갈아 좋은 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좋은 마음의 밭을 만들 것입니까?
본문 4:20에 “좋은 땅에 뿌려 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배나 육십배나 백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을 ‘듣고 받아(이쿠우신 톤 로곤 카이 파라데콘타이)’ 라는 말씀에서 ‘받아’라는 말은 ‘파라데콘타이’란 말인데 이 말은 ‘두 손을 벌려 아주 기쁜 마음으로 환영한다’란 뜻입니다. ‘어서 오세요 환영합니다’란 말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맹숭맹숭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기쁨이 가득하여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말씀을 환영해야 합니다. 듣기 싫은 말을 듣는 것처럼 얼굴을 외면하여 듣는다면 이는 길가의 마음입니다. 말씀이 귓가를 흘어 지나가듯 멍하니 있다면 이는 돌밭 같은 마음입니다. 말씀을 듣지만 세상염려가운데 얼굴을 찌푸리고 듣는 다면 가시덤불이 잔뜩 자란 마음입니다. 옥토마음을 가진 사람은 말씀을 환영합니다. 말씀을 듣게 되어 너무 기쁩니다. 얼굴에 그 기쁨이 가득해야 합니다. 그의 마음에 기쁨이 가득한 사람은 옥토마음입니다. 감사가 가득한 사람은 옥토마음입니다. 소망이 가득한 사람은 옥토마음입니다.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 따라 살아야지 하는 믿음이 가득한 사람은 옥토마음입니다. 이런 사람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마음 밭이 옥토가 되면 모든 일이 옥토로 바뀝니다. 가정도 옥토가 되고 사업도 옥토가 되고 인생이 옥토로 바뀝니다. 인생이 옥토가 되니 무엇을 하든지 30배 60배 백배의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3월 11일 내일 흙의 날, 한 줌의 흙이 가져다주는 풍요로움과 농업 농촌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해보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봄철은 땅 가꾸기에 바쁜 때입니다. 요즈음 우리 가족은 작은 땅이지만 좋은 땅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새롭게 땅을 갈고 퇴비를 뿌리고 이엠을 뿌려 앞으로 고추도 심고 가
자도 심고 토마토도 심고 감자도 심고 여러 채소들을 심으려고 합니다.
오늘부터 사순절 절기가 시작됩니다. 40일 후 부활주일입니다. 앞으로 40일간 우리는 무엇을 가꿀 것입니까? 우리의 마음 밭을 새롭게 갈아 옥토마음으로 만드는 일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잘 듣고 말씀을 환영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세상방법대로 살려 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이 옥토 인생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라온코이노니아는 옥토를 가꾸는 사람들의 신앙공동체입니다. 우리들의 인생 밭에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거두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