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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20년 9월 13일   주일아침 예배 설교   시 80: 1-7    믿음의 회복 탄력

 

지난 금요일 현재 세계 코로나 확진자수가 누적 22,789,772명이고, 사망자가 누적 795,410명이었습니다. 우리나라 경우에는 확진자수가 누적 21,918명이고 누적 사망자는 350명입니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확진자 수가 76위입니다. 참으로 세계적으로 그 바이러스재앙이 휘몰아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각 나라마다 정치가 소용돌이치고, 경제가 사상유래 없는 추락을 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로 인해 이웃 간의 심리적 거리가 더 멀어지고 있습니다. 최근 '심리적 방역(Psychological prevention)'이라는 말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불안감으로 인해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로 심리적으로 지친 사람들을 위해 쓰는 단어입니다. 자가 격리(self-isolation)가 끝난 사람들 중에는 사람들의 눈총이 무서워 심리적으로 위축돼 예전만큼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스스로 자존감이 낮아졌다는 사례도 있습니다. 또 같은 동네에 확진 자가 나오면 혹시나 하는 걱정에 잠을 잘 이루지 못하거나 작은 자극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불안감이 두통이나 소화불량 같은 통증이 있는 증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기독교만 아니라 모든 종교의 공공 의식이 중단되어 올 라인 예배를 하고 있으며,  마스크 없이는 밖으로 나다닐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보이는 문제만 아니라 사람들은 불안, 우울, 분노, 죄책감, 당혹감(수치심) 등의 심리 문제로 더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어떤 약효에 불신 하가나 부작용에 대한 염려가 있다면 실제로 그 약을 쓸 때에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나는 현상을 노시보 효과 (Nocebo Effect ‘당신을 해칠 것이다’라는 라틴어)라고 하는데, 지금 사람들에게 매사 부정적인 믿음으로 내가 걸리지나 않을까 노심초사 불안, 염려, 슬픔과 공포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고 있습니다.

많은 주부들이 최근 부쩍 가슴이 답답하고 무기력함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코로나19바이러스 감염증 사태로 외출을 자제하던 상황에서 최근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돼 2주 가까이 집에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도 학교에 가지 못해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서로 부딪히는 일이 많아지면서 우울함은 커졌습니다. ‘내가 걸리면 가족 전부에게 큰일이라는 생각에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외출을 하지 않고 있다’면서도 ‘집에서 코로나19 뉴스만 보고 있으니 우울해진다‘고 말합니다. 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일상생활의 제약이 커지면서 우울감과 불안감을 호소하는, 이른바 '코로나 블루(corona blue 보통 정신의학에서 포스트파튬 블루Postpartum Blue라고 하는데 산모가 출산 후 겪는 산모우울증 같은 것)'로 두통, 소화불량, 어지러움, 두근거림, 불면증 등을 많은 사람들이 호소하고 있는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매우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어렵고 힘들면 그럴수록 이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회복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제의 식민지시대의 억압을 경험하였고, 6.25 한국전쟁의 피난민 시대 그리고 그 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던 시대를 이겨내 오늘에 이른 우리나라사람들은 코로나19의 세기적 비극(pandemic)을 극복해 나갈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힘을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라고 말합니다. 이 용어는 심리학, 상담학, 정신의학, 교육학, 언론학, 사회학, 경제학 등 매우 다양한 분야에서 두루 사용되는 개념입니다.  회복탄력성은 원래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반동력을 일컫는 말로서 심리학이나 상담학에서는 주로 시련이나 고난을 이겨내는 긍정적인 힘을 의미하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즉 비록 실패하더라도 역경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어느 교회 여 권사에게 하나의 트라우마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 번 낙심하면 몇날 며칠이고 그 낙심에서 일어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인과 말다툼을 하면 며칠이고 그 교인을 찾아가 시비를 가려야 성이 풀리는 성격인 것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옆자리에 있던 짝꿍과 싸우게 되었는데 그 때 그 짝꿍의 부모가 유지급이라 선생님이 짝꿍은 돌려보내고 자기만 야단을 치고 반성문을 쓰게 하였습니다. 그는 이 충격에 헤어 나오질 못하였습니다. 그는 너무 억울해 3일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고 울고 있었습니다. 결국 담임선생님이 와서 달래서 다시 학교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고등학생 1학년 때 왠 남학생이 며칠이고 뒤를 따라와 만나자고 사정하여 빵집에 가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본 한 친구가 학교에 소문을 내 급기야 연애대장이란 별명이 붙었습니다. 이런 소식이 아버지 귀에 들려 아버지한테 머리를 깍이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 후로 한 번 충격에 휩싸이면 헤어 나오질 못하고 그래서 교회에 교인들 간에 “안권사를 열나게 하면 일 년  열두 달 안권사의 욕설을 들어야한다” 그래서 “안권사 건드리지 마라, 괜히 곤혹을 치르게 될 거다”는 말이 은연중 돌아 사람들이 안권사와는 말을 섞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사람이 달라졌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여권사가 달라지 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독교인은 결코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무리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사람입니다. 붙잡아주시는 하나님의 손이 있기 때문입니다.
잠언 24:16에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는 말씀은 매우 적절하다.
하나님의 손은 우리가 아무리 넘어져도 또 다시 일으켜 주시는 능력의 손입니다. 물론 시간상 차이는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곧바로 오뚝이처럼 일어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몇 시간 며칠 몇 달이 가기도 하지만 반드시 다시 일어납니다. 이번 코로나19 감염사태는 분명 '재앙'입니다. 그런데 규모가 큰 재앙에는 반드시 영적 메시지가 있기 마련입니다. 더욱이 국지적 전염병에서 글로벌 역병(Global Pandemic)으로 번질 때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하나님을 찾으라! 하나님의 손을 붙잡으라!” 그 영적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내가 너를 붙들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은 그 역병을 이기게 됩니다. 역병으로 인한 어떤 심리적 압박에서도 마음을 평안하게 가지게 됩니다. 그 여권사가 불행이도 코로나바이러스에 걸렸습니다. 그는 죽으면 죽으리라 치료받는 시간을 오로지 기도의 시간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얼마나 믿음 없는 사람이었는가를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여권사는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가를 깨달아 회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안권사는 자신의 인생을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 생각하며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되었다는 말씀처럼 새사람이 되어 완치를 받고 퇴원을 하였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병원에 입원하던 시간은 여권사가 껍질을 깨고 다시 태어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여권사는 누구에게나 친절한 권사가 되었습니다. 퇴원 후에 방역하는 간호사들을 위해 봉사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녀에게는 트라우마는 사라졌습니다. 코로나19바이러스로 인한 고난이 여권사에게는 맏음의 탄력성을 가지게 한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부터 약 200 여 년 전 영국에 로빈손(Robert Robinson1735~1790) 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믿음이 참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우리 예수님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여 은혜스러운 찬양곡을 여러 개 작사 작곡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의 찬양 곡으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인가부터는 그가 주님을 점차 멀리하더니 교회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타락한 길로 빠져들어 가더니 결국은 술주정뱅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거의 매일을 술로 살면서 우울증에 빠진 채 아무런 소망도 없이 자포자기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오늘날 마을버스처럼 그 당시에는 마차가 있었는데, 그 날도 여느 때처럼 술에 취한 채 집으로 오는 마차를 탔습니다. 그런데 마차에 탄 사람들이 무엇이 좋은지 기쁨에 넘친 채 손뼉을 치면서 힘차게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들어도 참으로 은혜스러운 찬송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듣던 곡 같았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보니 과거에 자신이 작곡한 찬송가였습니다. 그 사실을 발견한 그는 술에 취한 상태였는데도 정신이 버쩍 들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그는 타락하고 초라한 자신을 바라보며 주님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는 “오 주님! 그들은 내가 작곡한 찬송으로 은혜를 받고 저렇게 기쁘게 살아가는데 정작 그 곡을 작곡한 나는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라며 통곡을 하였습니다. “주여, 이 죄인을 용서해 주옵소서.  주여 이 죄인이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난 지금까지 주님을 잊고 있었다가 이제야 찾았습니다. 탕자처럼 돌아온 이 죄인을 주여 용서하옵소서“ 하며 그는 깊은 회개를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다시 쓴 찬송가가 우리가 즐겨 부르느 찬송가 28장 “복의 근원 강림하사”입니다. 이처럼 기독교인들은 낙심과 절망가운데 있다가도 다시금 믿음에 회복탄력성이 일어나 새롭고 더욱 강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 집니다.

 

고린도후서 4:7-9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말씀을 기억합니다.

 

찬송가 9장을 작사한 김정준목사님은 폐병 말기로 마산 결핵요양소에 들어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의사는 6개월 시한부인생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는 생각하기를 6개월 후에 죽는다하니 죽을 때는 죽더라도 세 가지 원칙으로 사는 날 까지 행하자. 하나는 모든 사람들을 기쁨으로 대하자. 죽으면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것이니 기쁨으로 살고 웃으면서 사람들은 대하자. 두 번째는 성경을 암송하자. 그래서 창세기부터 성경을 암송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자기는 6개월 후에 죽을 몸이니 주변의 다른 환자들을 위해서 내가 도울 일을 하자고 하여 간호시들도 꺼리는 폐병환자들의 가래나 변을 치우는 일을 하였습니다. 병실마다 다니며 청소해주고 찬송을 불러주고 기도도해주고 그래서 환자들이 천사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6개월이 지났는데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그는 계속 성경을 암송하고 환자들의 뒤치다꺼리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죽지 않았습니다.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그의 폐병이 사라졌습니다. 완치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가 9장 찬송 가사를 작사하였습니다. 물론 그때는 성시로 쓴 시였습니다.
“하늘에 가득찬 영광의 하나님, 온 땅에 충만한 존귀하신 하나님
생명과 빛으로 지혜와 권능으로 언제나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1967년 연세대학교 음대학장을 지낸 곽상수교수가 작곡을 하였습니다.
김정준 목사님은 믿음의 회복탄력성으로 완전히 페병으로 부터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후에 연세대학교 신학대학교수가 되었고 대학원원장도 하였으면 한신대학교 총장도 하였습니다. 바로 저의 지도교수님이시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기록되어있는 그의 ‘고난의 목록’을 보면 정말 기가 질릴 정도입니다. 어떻게 그토록 어려운 고난들을 극복해낼 수 있었을까... 그것도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무려 다섯 번이나 맞고, 태장(笞杖)을 세 번이나 맞았습니다. 돌에 맞아 죽음의 고비를 당한 일도 있습니다. 바다 한 가운데서 세 번이나 파선의 경험을 한 적도 있습니다. 이 외에도 형언하기 어려울 정로도 숱한 심신의 고초를 겪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실망해서 고향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떨치고 일어나 다시 전도의 길을 달려갔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믿음 회복탄력성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강함을 자랑하는 대신 굳이 자랑하라면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겠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비록 자신은 질그릇처럼 연약하지만 “내게 능력주시는 하나님”(빌립보서 4:12)의 도우심으로 이 모든 고난과 역경을 믿음의 회복탄력성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37:23-24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기독교는 회복의 신앙입니다. 신앙 안에서는 어제의 상처가 오늘의 감사가 되고, 어제의 고통이 오늘의 행복이 되며, 어제의 죄인이 오늘의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형 에서의 장자권을 훔친 야곱에서부터, 다윗을 시기하여 사위인 다윗을 죽이려고 찾아다니던 사울왕과 그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는 다윗, 그리고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뒤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피해 도망 다녔던 바울, 예수님을 모른다고 거짓말한 죄를 통회하였던 베드로와 예수님을 팔아넘긴 뒤 자책감에 시달려 자살한 가룟 유다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회복의 가능성 여부로 하나님의 백성인지 아닌지를 분별합니다. 사울왕과 가룟 유다는 회복하지 못하였고 멸망에 빠졌습니다. 구약의 많은 사람들 중에는 회복한 사람도 있었지만, 어떤 이는 회복하지 못하고 죽음으로 마감했습니다. 회복하면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요, 회복하지 못하면 지옥으로 가게 되니 회복할 것인가 회복하지 않을 것인가의 갈림 길이 곧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이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달려 나온 이들은 모두 회복탄력성으로 믿음을 회복하고 인생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갑니다.

 

회복탄력성은 시련과 역경을 딛고 다시 튀어 오르는 믿음의 힘(靈力)입니다.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은 역경에 맞닥뜨렸을 때 원래 자신이 있던 자리로 되돌아올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높이 튀어 오릅니다. 회복탄력성은 몸의 근육과 많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긴 하지만 꾸준히 단련하면 더욱 탄탄해질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대략 인구의 3분의 1정도가 선천적으로 회복탄력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체계적인 훈련이 뒷받침된다면 누구든 회복탄력성을 높일 수 있습니다.

 

버지니아대학교의 임상심리학자이며 교육학 교수인 멕 제이(Meg Jay) 박사는 “슈퍼노멀(Supernormal)이라는 책에서 평범한 자들이 특히 어린 시절의 역경을 헤치고 회복탄력성을 길러 인생에 성공한 사례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루이 암스트롱, 프리다 칼로, 파블로 피카소, 엘리너 루스벨트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어린 시절에 가난, 결손 가정, 부모의 학대, 알코올중독, 장애, 질병 같은 불운에 시달렸다는 것입니다. 누구의 삶이든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련은 생각보다 우리 삶 속에 흔하게 나타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고난의 시기는 지독히도 운이 나쁜 몇몇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짐이 아니라 유명 인사나 영웅적인 인물을 포함해 무수히 많은 평범한 사람들에 삶 속에서 흔히 발견되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과거에, 주로 어린 시절에 여러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무너지거나 굴복하지 않고 그런 역경이 그들이 크게 일어 설 수 있게 회복탄력성을 함양하는 토양임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의 믿음의 회복탄력성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믿음의 탄력성으로 다시 일어 설 것입니까? 기독교인들은 믿음의 회복 탄력성은 십자가지고 가는 믿음 생활입니다. 이 십자가의 길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는가? 믿음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바울이 간단한 방법으로 이 자세를 알려 주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恒常喜樂),  쉬지 말고 기도하라(祈禱不已),  범사에 감사(凡事感謝)하고 고 말씀하시었습니다. 희.도.사喜禱謝 이 세 가지를 실천하면 믿음의 탄력성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역경(불행한 사건adversity) 그 자체보다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역경을 겪습니다. 하지만 동일한 역경을 겪었는데도 어떤 사람은 그대로 넘어지고, 어떤 사람은 훌훌 털고 일어나 더 강해지고 성장합니다.
대응 방식도 어떤 사람은 역경을 해소하고자 음주, 도박 같은 건강하지 못한 습관에 빠져드는 반면, 또 어떤 사람은 운동이나 여행 또는 심리적 강화 교육을 취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세상적인 방법으로 잠시 마음의 힘을 키워주는 경우도 있지만 역시 일시적일 뿐입니다. 인터넷에 들어가 찾아보면 회복탄력성을 얻게 되는 수많은 방법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 일시적일 뿐입니다. 이 시대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의 회복탄력성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영이 잘된 것 같이 범사가 잘되고 육신이 강건해 진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왜 사람들은 번번이 넘어지는가? 영력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영력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먼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항상 기뻐하십시오.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의 하나는 그 얼굴에 늘 기쁨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슬퍼하거나 괴로운 모습을 얼굴에서 벗어버리고, 기쁨의 얼굴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십시오. 이는 하나님의 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루에 단 오분이라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5분이 아니라, 하루 종일, 길을 갈 때나 일을 할 때나 심지어 잠을 잘 때도 기도하십시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은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시간이 하나님과 대면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비대면 시대에 하나님까지 비 대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는 24시간 대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 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기도의 주제는 감사이어야 합니다. 나의 모든 것은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때에 우리의 삶은 더욱 풍성한 감사의 제목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이 희. 도. 사. 이 세 가지를 실천 할 때에 성령께서 우리에게 회복탄력성을 은혜로 주시니 코로나19바이러스시대에 나의 인생을 도약시키는 기회로 삼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내 인생의 회복탄력성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힘이 아닙니다. 체육관에서 길러지는 육체의 힘이 아닙니다.
“나를 지으신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이도 하나님
나의 나된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내 인생을 새롭게 하기 위한 내 영혼을 새롭게 회복시켜 주시는 예수님이 나를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믿음의 회복탄력성은 놀라운 은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날도 갈릴리 바닷가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세관 앞을 지나갔습니다. 그 때 마태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사람은 몰라도 예수님은 마태의 마음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의 고독한 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의 憂鬱한 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의 목마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오시어 불러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내가 어렵고 힘들 때, 그래서 스스로 소외된 마음으로 외로움 속에 빠져있을 때, 예수님은 내 모습을 보고 계십니다. 나의 고통을 알고 계십니다. 나의 외로움, 나의 고민, 나의 아픔, 나의 부족함을 아십니다. 알고 계실 뿐 아니라, 우리의 문제를 해결시켜주시고자 끊임없이 우리 영혼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우리를 부르십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가 있습니다.((金春洙, 1922. 11. 25 - 2004. 11. 29)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1]


만물의 찌끼처럼 취급받던 마태,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받았던 마태를 주님께서 불러주시기 전에는 하나의 죄인의 몸짓으로 살아간 마태 이였습니다. 주님이 불러주셨을 때, 드디어 그는 꽃이 되었습니다. 의미 있는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생명의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주님께서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 영혼이 살아나고, 그 영혼이 힘을 얻고, 그 영혼이 생명을 얻었습니다. 마태는 상한 영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비록 육신적으로는 모자람이 없었고, 돈도 넉넉하였지만 그 삶은 그렇게 자랑스럽거나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한 심령을 주님께서 부르시고 만져주시고 고쳐주시어 회복시켜주심으로 예수님의 제자 되게 하셨습니다.

 

어느 날 무심히 앉아 있는 나에게 예수님 오시어 나의 이름을 부르며 나를 따르라 말씀 하실 때를 생각 해 보십시오, 바로 그 때가 내 인생이 꽃으로 피어나는 때가 될 것이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거절하였다면, 꽃을 피우기전에 시들어 버린 꽃망울을 보신 적 있습니까?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입니다. 고쳐주시는 예수님 손길입니다. 그런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십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오늘도 나의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나의 상한 심령을 만져주십니다. 나의의 연약함을 치유해 주십니다. 니를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오늘도 이 예수님의 손길을 통해서 치유되고 회복탄력성이 나의 인생을 새롭게 하여 주고 계십니다. 


마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 특히 세리친구들을 자기의 집으로 초대하여 송별파티를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그 자리에 초대되었습니다. 세리 마태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어찌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가 하고 비난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주님이 대답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9:12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9:13b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이 ‘의인’은 참 의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의인인체 하는 바리새인들을 거짓 신앙인들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의인인체 하지만 바리새인들이야말로 영적으로 보면 병이 들었으면서도 자신이 얼마나 중병에 걸려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건강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치료가 불가능합니다. 이들에게는 회복탄력성이 사라졌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의인인체 하는 율법주의자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스스로 건강하지 못한 것을 알고 겸손히 영혼의 의사이신 예수님께 무릎을 꿇어야 하는 사람들인데 그렇지 아니하니 회복탄력성으로 치유와 소망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신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시대에 어떤 사람은 정부의 방침을 어기고 자기 멋대로 행동합니다. 마스크도 안 쓰고, 거리두기도 안 하고, 반정부 시위에도 참여하고,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개인이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던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가 다른 사람에게 불행을 가져다준다면 그것은 큰 죄입니다.  술울 취하도록 마시고 차를 운전한다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가 자기에게 큰 불행을 가져다주고 다른 사람에게 씻을 수 없는 인생의 비극을 안겨다 준다면 그는 엄청난 죄인인 것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죄인들의 이름을 부르시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인생의 회복탄력성을 부여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따르는 사람은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따르지 않는다면 자기 인생에 그런 불행은 없는 일입니다. 그는 넘어지나 다시 일어설 수 없으며 꾸부러지나 다시 펴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회복탄력성을 받은 사람은 남에게 기쁨이 되고 도움이 되고 희망이 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마태는 바로 그것을 깨닫고 경험한 것입니다. 마태는 주님의 부르심과 치유를 통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본래 마태는 육신도 건강하고, 물질적으로도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만족과 기쁨과 감사가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것은 전혀 행복하지 못한 삶이요, 회복할 길이 없었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 믿음의 회복탄력성으로 치유되고 회복되었습니다. 아마도 그 생활이 전에 세관에 앉아 있었던 때처럼 편안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주머니가 두둑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동행하는 생활은 날마다 감동이요, 기쁨이요, 감사였습니다. 그래서 그 감동을 기록한 것이 마태복음입니다.

앞서 인용한 김춘수 시인의 꽃 시의 뒷부분을 다시 감상하면,.....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그에게 가서 그의 꽃이 되고 싶다는 시인의 말처럼 믿음의 회복탄력성으로 새롭게 일어선 우리는 우리 주변의 아직 힘들어하고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꽃으로 다가서야 합니다. 그들에게 꽃을 선물해야 합니다. 믿음의 꽃 회복의 꽃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존 맥스웰의 위대한 영향력 마음을 움직이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란 책에  이런 기도문이 있습니다.
'오늘이 가기 전 내 삶은 수십 명과 만나겠지요.
저녁 해가 지기 전 좋고 나쁜 수많은 흔적을 남기겠지요.
내가 항상 바라는 소망, 내가 항상 간구하는 기도가 하나 있습니다.
주여, 제 삶이 도중에 만나는 다른 삶을 돕게 하소서.'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19바이러스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도 그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회복탄력성을 부여받았습니다. 우리는 ‘희.도.사’-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며 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신 이 믿음의 회복탄력성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힘이 되어주는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희. 도. 사.를 생활화 하며 살아갑시다. 이것이 내가 믿음의 회복탄력성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 라온코인니아는 희. 도. 사.를 통하여 믿음의 회복탄력성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의 신앙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오늘에 주신 말씀을 기억합시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시80:7)
이 말씀이 우리나라와 우리 가정에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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