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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20년 7월 26일 주일아침예배  요 11: 38-44  “라자레, 듀로 엑소”
 

예수님이 복음을 선포하러 다니실 때에 바리새인들이나 율법사들,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이 예수님에게 붙여준 별명이 있습니다.  “음식을 게걸스러게 먹는자, 술고래,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하였습니다.(눅7:34 이두 안스로포스 파고스 카이 오이노포테스, 필로스 텔로논  카이 하마르톨론.)  무론 이런 별명은 억지로 예수님을 비난하려고 부르는 별명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평소에 세상에서 소외되고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을 찾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하고 또 그중에 그런 사람들을 제자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찾아 나온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병들고, 그중엔 사람들이 기피하는 나환자들도 있고, 사람들이 가장 미워하는 세리같은 사람들과 함께 식사도 하고 격식 없이 그들을 대하시는 예수님을 그들은 좋게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막2:17)”고 말씀하시었고 “나는 잃어버린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하여 왔다(눅18:10).”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예수님이 찾아가신 베다니의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의 가정은 사회적으로 환영받을 그런 집이  아니였습니다. 베다니(베다니아: 베트 아니 가난한자의 집)는 빈민촌락으로 예후살렘에서 이십오리 정도 떨어져 있는 마을입니다. 아마도 이 동리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노동일을 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달동네라고 하겠습니다. 교회에 전해온 이야기는 마르다의 남편이 예수님으로부터 나병을 고침 받은 시몬이었다고 합니다(막14:3~9, 요12:1~8).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유대사회에서 나환자 자신은 물론이요, 그 가정 또한 극심한 고통 속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 누가 그 집을 찾아 갈 것입니까? 그 누가 그 가족들과 가까이 사귀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시몬의 병을 치료해 주셨고 그 집에 들어가 식사를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실 때는 으레 베다니 시몬의 집에 머무르셨습니다. 마르다는 비록 가난하지만 예수님만 오시면 최선을 다하여 음식을 장만하고 예수님을 모셨습니다. 사실 그 극진한 대접이라 해도 무슨 잔치상 차리듯 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벌써 20년 전입니다만 인도에 국제회의가 있어서 한 열흘간 머물었습니다. 회의가 오래 계속되니 매우 지루하여 어느 날 마음먹고 회의장을 탈출하여 여행을 하였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 부터 꼭 가보고 싶었던 버킷리스트(Bucket list) 100가지 중 하나인 타지마할을 보고 싶었습니다. 타지마할은 옛날 인도의 샤자한왕이 왕비 뭄타즈 마할이 죽자 엄청나게 큰 대리석 궁전을 짓고 그 속에 왕비의 무덤으로 삼았는데 세계 7대불가사의 하나로 불려 집니다. 그 크기가 월명체육관보다 훨씬 큰 건물인데 전체를 유리알 같은 천연 대리석과 루비 사파이어 홍옥석 고악석 터키석등 각종 보석과 황금 500kg으로 건축한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아름다운 건물인지 짐작하시겠지요. 그 타지마할을 가기 위해 아그라라는 도시까지 기차를 타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 역에서 오토바이를 개조한 작은 차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 차를 타고 가다가 운전수인 인도인에게 물었습니다. 오늘 저녁 당신의 집에서 저녁밥을 먹고 싶은데 초청해 주겠느냐고 물었더니 그 인도인이 대단히 기뻐하며 환영하였습니다. 얼마만큼 가더니 자기 동생에게 운전대를 맡기고 자기는 집에 가서 저녁준비를 하겠다고 갔습니다. 저는 타지마할을 구경하고 또 인근의 관광지를 구경한 다음 아그라의 빈민들이 살고 있는 마을로 안내를 받아 갔습니다.  가던 길에 사탕을 한 봉지를 사고 마실 음료수도 사가지고 갔습니다. 그 집에 도착하니 동리 아이들 수십 명이 나를 구경 하기위해 몰려 왔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누어 주고 그 집에 들어갔습니다. 집이라야 흙벽돌로 지어진 한 칸 집으로 바닥은 흙바닥 그대로 이고, 한 구석에 나무판대기로 얽기 설기로 만든 침대가 있고, 담요로 덮여 있습니다. 손님이 왔다고 흙바닥에 멍석 같은 것을 깔고 부엌은 집밖에 검게 그을려진 화덕이 있을 뿐입니다. 손님이 왔다고 하니 무슨 특별한 인도 음식을 준비했을까 기다리고 있는데 접시에 안남미 밥에 카레를 얹어 가지고 왔습니다. 그것을 손으로 집어먹게 됩니다. 인도인들은 숟가락 젓가락 없이 이 세손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먹습니다. 그 카레 밥을 손으로 집어 먹었습니다. 냄새가 인도 음식 향 때문에 역겨웠지만 억지로 먹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손님이 왔다고 해서 특별식으로 준비한 것이 그 카레에 양고기를 넣어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그냥 카레 국물에 밀가루 난을 찍어 먹었는데 그날은 특별히 안남미쌀밥에 양고기 카레로 손님을 대접하였던 것입니다. 그게 다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2000년 전 예수님 당시 가난한 베다니 마을 시몬의 집 역시 가난한 사람들의 움막집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슨 대접을 거하게 받으셨겠습니까? 그러나 비록 음식은 소찬이지만 사랑이 가득한 음식을 밀,디 가족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함께 나누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에는, 이 가정에서 일어난 엄

청나게 슬프고 기쁜 사건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어서 무덤에 묻히었다는 것은 엄청나게 슬픈 일인데 예수님이 그를 살려주시니 엄청나게 기쁜 일입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에게도 역시 엄청나게 좋은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7장에서,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시어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셨습니다. 누가복음 8장에서는 가바나움에서 “아이야 일어나라”하시어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처음 두 번의 경우는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의 경우는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그의 몸은 이미 부패가 시작되어 냄새가 날 정도였습니다. 그러한 나사로를 예수님은 다시 살리셨습니다.

요11: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아라테, 톤 리돈)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에 가셨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 오신 예수님은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이와 같이 명하셨습니다. “돌을 제거하십시오” 그 당시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생긴 굴이나 또는 인공적으로 만든 굴을 가족묘로 사용했습니다. 무덤 입구를 큰 바위 돌로 막았습니다. 부자들은 수레바퀴 모양의 둥근 돌로 무덤의 입구를 막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간단하게 굴을 파 시체를 넣고 바윗돌로 막았을 뿐입니다.  아마도 나자로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공동묘지로 굴을 기게 파서 굴 좌우로 시체가 들어갈 마한 작은 굴을 파 그곳에 나자로의 시신을 놓았을 것입니다.
 

요11:41, 42에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서는 먼저 돌문을 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직접 여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 돌문을 열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위해선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큰 능력을 받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 나의 마음 문을 열어야 합니다. 마르다는 이미 나흘이 지나, 냄새가 나니 열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단지 자기 생각일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무덤에 갇혀 이제 나는 가망이 없어 열어도 냄새만 날 뿐이야 하면서 자신의 마음 문을 열려하지 않습니다. 이때에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오늘 우리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 하더라도 또 세상 돌아가는 형편에 마음이 쇠약해지고, 아무런 희망도 가져보지 않는다하더라도,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산을 움직여 바다에 던져지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얄팍한 지식에, 또 나의 실없는 경험에서 닫혀 진 마음의 돌문을 “아라테” 제거하십시오!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라테’라는 말은 다만 ‘옮겨 놓으라’가 아니라, ‘완전히 치워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왜 돌문 속에 갇혀 나는, 열수 없어, 열고 싶지도 않아, 안 열거야! 열려는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자신의 인생을 썩은 시체로 내버려 두고 있는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닫혀 진 마음 문을 열어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면 썩어가는 인생이 다시 소생하는 기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시편 16:9.10에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르다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마르다는 평소에 예수님이 실없는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이야기도 벌써 듣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비록 시신이 썩고 있다 해도 예수님이라면 나사로가 살아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사람들에게 돌을 옮겨 달라고, 아주 치워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눈을 들어 우러러 하늘을 보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시었습니다. 하늘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께 시선을 보내는 기도의 태도이시었습니다. 무덤 문이 열리니, 아마도 마르다는 굴에 갇혀있는 나사로를 들여다보고,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을 흘리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덤 안에 있는 나사로를 바라본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산자의 주가 되시는 생명의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은 자를 바라봅니다. 죽은 사상과 이념을 바라봅니다. 죽은 물질을 바라보고, 죽은 지위를 바라보고, 죽은 권력을 바라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죽은 것들입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그 모든 인간의 영화들이 들의 꽃같이, 시들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낙엽처럼 죽어버렸습니다. 1000년의 로마도 허망하게 끝났습니다. 500년 조선의 역사도 죽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인간 역사는 모든 죽은 역사입니다. 그 죽은 인간 역사에서 우리는 하나님만이 영원한 생명이 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우러러 보시며 기도하시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셨습니다. 마르다 처럼 우리도 죽은 나사로를 바라보지 맙시다. 아무리 쳐다보아도 죽은 나사로는 살아나지 않습니다.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우리의 눈을 들어 예수님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바라보시는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41절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려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감사가 빠진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아닙니다. 감사가 없는 믿음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감사는 그 어떤 경우에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감사는 절대로 죽은 자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덤 문에 갇혀있는 자는 감사할 수 없습니다. 감사하는 자는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 못한 채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그의 마음이 죽어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음식점에서 음식을 서빙 받을 때 우리는 감사하다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버스를 탈 때 버스 기사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극장 입구에서 표 받는 알바생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나는 살아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아직 살아나지 않은 나사로가 이미 살아났다고 믿고 감사의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사로를 살려 주실것임을 아신 것입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라 하였습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의심치 않고 믿으면 이미 받은 줄로 믿는 믿음임을 예수님이 말씀하시었습니다(막11:24). 이미 살아날 줄 믿으신 예수님은 다만 감사의 기도만 하신 것입니다.

 

십여년 전 뉴욕에서 북한에서 온 목사들과 또 미국에 있는 한인교회 목사들과 연합예배를 드렸습니다. 북한 목사 한사람이 사회를 보고 제가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때 설교 중에 저는 “ 우리가 이처럼 남과 북이 함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이미 우리는 주안에서 통일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통일 시켜주셨습니다.” 고 말씀한바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아직 갈라져 있지만 주안에서 믿음으로 우리는 통일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당시 예수님 주변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있었지만 믿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광경에 아마 입을 다물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능력을 자랑하시려고 나사로를 살리신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들에게 보이시려는 그 목적이셨습니다.

이미 요11:4에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휘페르 테스 독세수 투 데우)“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만일 우리의 믿음의 역사로 어떤 놀라운 일이 있게 된다면 이는 나의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요,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된 것에 우리는 다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으로 축구선수가 국제 축구시합에서 골을 넣으면, 먼저 무릎을 꿇어 하나님께 감사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어떤 탈렌트가  주연 여우상을 타게 되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길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중에 가장 보람된 일은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일이요, 또한 이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입니다. 만일 일평생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도 없고, 이일로 감사하는 일도 없다면 그 인생은 부족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유명한 철학자 키엘케고르가 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은 그 첫머리에 예수께서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하신 말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우리의 질병, 우리가 겪는 모든 고난에 대한 우리 주님의 진단입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다. 이 사업은 실패할 일이 아니다. 이 일은 실망할 일이 아니다“ 그 병은 고쳐집니다. 그 사업은 성공합니다. 그 일은 비죤이 있습니다. 그리스를 믿는 믿음 안에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찬송가 258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 피로다”라는 찬송은 윌리암 카우퍼(William Cowper)라는 분이 작사한 곡입니다. 윌리암 카우퍼는 1731년 11월 26일 영국 허트포드셔에서 태어나 1800년 4월 25일 세상을 마친, 영국의 대표적인 낭만파 시인이었습니다. 여섯 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지만 인정받는 변호사가 되어 영국 의사당 앞에다 사무실을 냈고 남보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더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명성은 얻었지만 일에 대한 부담이 가중되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자기만 낙오되었다는 생각, 기회를 다 놓치고 이러다 폐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강박감 때문에 정신착란 증상이 일어났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절망적인 삶에 처하자, 주변의 친구들이 그에게 전도를 했고 33살 때 18개월 동안 정신병원에서 요양하고 있던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로마서 3장 25,26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를 읽고 그는 그 자리에서 거듭났고,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카우퍼가 자살을 시도한 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는 데는 무려 10여년이라는 긴 세월이 필요했고, 변호사로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을 발견하고서 18세기 영국문학사에서 존경받는, 유명한 고전 문학가이자 훌륭한 시인이 되었습니다.
카우퍼는 주님의 은혜로 다시 사는 기쁨을 얻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오늘까지 많은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요11: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예수님은 큰 소리(포네 메갈레 엨라우가센)로 나사로야 나오라(라자레, 듀로 엑소)“고 부르셨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라자레 듀로 엑소 !“ 예수님은 마술 부리듯 어물어물 하거나 중얼거리지 않았습니다. 큰 소리로 명백하게 살아있는 사람 부르듯 불렀습니다. ‘메갈레 크다’는 이 말은 대단히 아주 큰 소리라는 말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그 묘지에서 "나사로"란 이름을 부르시지 않고 그저 "나오라"고 하셨더라면, 묘지에 묻혔던 모든 시체들이 다 일어나 나왔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큰 목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외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의 이름을 부르며, 마지 죽은 자를 산 자 처럼 불러내신 것입니다.(롬 4:17; 요 5:28 참조) 교회는 헬라어 원어로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입니다. 에클레시아란 ‘밖으로 불러내다란 말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시어 밖으로 불러낸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지옥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복음 16:18) 예수님께서 지옥가지 않도록 불러내신 자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는 세상이란, 죄악이란, 마귀의 손아귀에서 ”아무개야 나오라“라고 불러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죽은 자의 세상에서 다시 산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는 자들을 거듭난 자라고 하는데 ,원어로 ‘겐네데 아노덴’이라고 합니다. ‘태어나다’ 의미인 ‘겐나오’가 신약성경에 97번 나옵니다. 아노덴은 13번 나오는데 ‘다시’, ‘위로부터’의 뜻인 부사어로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즉 ‘위로부터 다시 태어난다’란 의미가 됩니다. 

 

요11: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루사테 아우톤 카이 아페테 아우톤 휘파게인)”
나사로는 무덤에 장사될 때의 모습 그대로 나왔습니다. 수족은 베로 동인 채였습니다. 얼굴은 수건에 싸여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시신 전체를 베로 두르지 않고, 얼굴은 수건으로 동이고 수족은 따로따로 쌌습니다. 따라서 나사로는 스스로 걸어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로 수족을 동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자연스럽게 움직이기는 불편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얼굴은 전체가 수건에 싸여있어서 앞을 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신앙은 묶은 것을 푸는 일입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각가지 문제로 묶여져 있습니다. 요즈음 우리나라는 코로나19바이러스로 묶여져 있습니다. 여당과 야당은 여러 가지 정치적인 문제들로 묶여져 있습니다. 남한과 북한간, 미국과 중국간 너무나 단단히 묶여 져 있어서 풀 방도가 없습니다. 요즈음 세계적인 이슈는 기후변화입니다. 남극과 북극의 빙산이 녹아져 내리고 있습니다. 현재 녹는 속도로 나간다면 5년 후 샌프란시스코가 물에 잠기고, 일본 열도의 많은 도시들은 태평양 바다 물결이 넘실거릴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미굮은 국제 기후협회를 탈퇴하였습니다. 묶인 상태로는 발전이 없습니다. 결국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세계 인류가 비극을 초래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십시오” 이 말씀은 “풀으시오 그러면 내가 풀어주겠습니다”는 말씀으로 바꾸어 봅니다. 묶여진 모든 문제들을 풀려는 인간적인 노력이, 그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주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풀려하기 보다 더 묶으려고 매일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더욱 문제덩어리가 단단히 얽혀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그 어느 누구도 풀길이 없습니다. 결국 自繩自縛 꼴이 되어 피차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그러나 베다니 사람들은 나사로의 묶여진 줄을 풀고 그를 감쌌던 수의 들을 벗겼습니다. 그의 몸은 죽기 이전의 건강한 모습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어느 한 곳이라도 죽음의 그림자는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돌을 제거하십시오.” “풀어 놓아 다니게 하십시오.” 예수님은 그들을 살리는 일에 우리가 쓰여 지길 원하십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그들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만일 응답이 없다면 여전히 무덤을 벗어나지 못하고 무저갱(無底坑 아뷧소스 눅8:31. 계9:1)으로 빠져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역사는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나오라 하실 때 나오고, 풀으라 할 때 풀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듯이, 우리도 살아 날 것입니다. 우리의 온갖 얽혀진 문제들이 풀어 질것입니다.

 

교회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라자로와 마리아와 마르다는 노 없는 배를 타고 표류하다가 프랑스 남서부 골 지방에 도착하였는데, 그들은 이곳에서 복음을 전하여 수많은 신자들을 얻었으며, 마침내 나사로는 마르세이유의 첫 주교까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도미시안의 크리스챤 박해 때에 순교하였습니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그는 여동생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다가, 기적적으로 치프루스에 도착하여, 키시온의 주교로서 30년을 복음을 전하다가 그곳에서 운명하였다는 것입니다.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는 그의 다리 하나와, 같은 로마의 예수 성당에는 그의 팔 하나를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 6월 26일은 카토릭교회에서 성 나사로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마르다는 처음에 아비뇽에서 살다가 이어 타라스콘으로 옮겨 정착했다고 합니다. 타라스콘 마을에는 무서운 용이 있어서 주민들을 공포에 떨었는데, 이 용을 마르다가 제압하여 복종케 했다고 합니다. 타라스콘에는 마르다가 살았던 것을 기념하여 성마르다교회가 건설되었습니다.

 

우리 라온코이노니아는 예수님께서 각각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어 이곳에 성교회를 이룬 신앙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일에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면서 주의 일 특별히 영혼 구원의 일에 더욱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과 생할의 푹복이 우리 모든 가정에 가득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 사진은 레헴하임 12014. 3.3일 블로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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