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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20년 7월 12일  이사야 41장 10절-13절 SodonnotfearforIamwithyou


두려워말라내가너와함께함이라놀라지말라나는네하나님이됨이라내가너를굳세게하리라참으로너를도와주리라참으로나의의로운오른손으로너를붙들리라.
SodonnotfearforIamwithyou;
donobedismayed,forIamyourGod.
Iwillstrengthenyouandhelpyou;
IwillupholdyouwithMyrighteousrighthand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여러 가지 어렵고 힘든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은 흔들리고 어찌하면 좋을까? 여러 가지 생각에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무엇인가 짓눌리는 것 같고, 밥맛이 떨어지고, 의욕이 사라지고, 죽고 싶은 생각이 나기도 하고, 이럴 때 우리는 성경을 찾아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요? מה יאמר לי אלוהים

 

첫 번째로 ‘낙심하지 마십시오’
갈 6장 9절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메 엥카코멘)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낙심하지 마십시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영국의 한 부자는 날마다 큰돈을 벌 생각만 했습니다. 하루는 아프리카에 금광이 숨겨져 있다고 소문을 듣고는, 곧 광물학자를 초빙해서 탐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금이 있을 법한 광산 한 곳을 찾아내고 즉시 채취하러 갔습니다. 두 달을 팠지만 아무 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영국 부자는 낙심하였습니다. 파고 파도 금이란 보이지 않고 단단한 암석만 파고 들어가니 부자의 마음도 암석 갈라지듯 갈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의욕이 떨어져 광산을 한 청년에게 팔고 귀국하였습니다. 광산을 헐값에 산 청년은 부자가 파다 만 광산을 계속해서 파 나갔습니다. 그리고 1미터를 다 파기도 전에 대량의 금맥을 발견하고 청년은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2년 후 청년은 영국에 돌아와 그 부자를 만나서 1미터를 더 판 덕에 대량의 금광을 발견했다고 말했습니다. 부자는 후회막급이라 분통해하다가 병들어 죽었습니다.

 

세상에 낙심하는 사람치고 성공한 사람이 없습니다. 더욱이 신앙생활에 낙심은 절대 안 됩니다. 우리는 금맥을 1미터 앞에 두고 낙심했던 부자와 같이 기도 응답 1미터 앞에서 주저앉아 기도를 끝내는 일은 없는지요. 낙심은 사탄이 주로 사용하는 무기입니다. 큰 죄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데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찬송과 기도하는 신앙인이 낙심한다면 틀림없이 마귀의 낙시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낙시에 걸린 마음이 落心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우리의 기본신앙심은 어떤 어려움에도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둥이 부러지고 지붕이 내려앉는다 해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고, 바다의 파도가 넘쳐 덮치는 것 같은 일이 있다 해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마음이 덜커덕 내려앉는 落心하면 사단의 낙시가 심장에 꽂혔기 때문입니다. 작은 낙심은 큰 낙심을 낳게 하여, 절망의 나락으로 자신을 떨어지게 하는 마귀의 책략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 바울은 “메 엥카케오 - 낙심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피곤해도 낙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다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때때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잘하다가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시험에 들었다’면서 교회에 발을 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다가 낙심하는 사람들 중에는 다른 교인들의 잘못과 실수를 보고 신앙생활을 그만 두는 사람이 가장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천사 같은 의인만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자신도 천사는 아니지 않습니까? 환자들이 병원에 가는 것같이 교회는 죄인들이 와서 영적으로 치유 받고 회복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변에 참으로 악하고 더러운 죄 많은 인간이 잘살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부러워합니다. 똑 같은 악을 따라 봅니다. 그래서 그들도 잘 먹고 잘사는 그런 사람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보면서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낙심하지 마십시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생각하십시오, 결국 그들이 가는 길은 망하는 길이요 지옥으로 가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문제는 그들을 보고 낙심하는 신앙인이 있다면 똑같이 마귀에게 코가 꾀어 지옥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엄정하고 재빠르고 확실합니다.
잠24:1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알 테칸네 뻬이네쉬 라아)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시 37:1, 2에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그러므로 예수님만 바라봅시다. 그 곳에 생명이 있고 소망이 있고 기쁨이 있고 축복이 있고 승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로 “울지 마십시오”라고 말씀 하십니다.
눅 7장 11절-17절에 죽은 외 아들의 장례행렬에서 슬피 울며 따르는 과부엄마를 보신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사(에스프랑크니스데), 울지 마십시오(메 클라이에)”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은 아들을 묻으러 가는 행렬 뒤에 슬피 우는 과부 엄마를 보고 불쌍히 여기시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시었다는 말은 단순히 동정하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불쌍히 여기다의 헬라어 원어로 ‘스플랑크니조마이’란 말로 이 의미는 너무나 애통히 여기시어 ‘장자가 뒤틀리듯 아파하시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과부엄마의 애통함이 그대로 예수님에게 전이되어 예수님도 똑같이 아파하시었다는 것입니다. 동정과 동감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과부엄마와 동감이셨습니다.

우리도 그 장례행렬을 보고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장례행렬을 따라가며 울고 있는 한 여인을 보게 됩니다. 그녀는 나인성이라는 동네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나인성은 나사렛 남동쪽 9.6km지점이고, 가버나움 남서 40km지점에 위치한 갈릴리 지방의 한 성읍입니다

 

아마 젊었을 때에는 과부 엄마는 행복한미래를 꿈꾸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식을 올린 후 그녀에게도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아마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때였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로마와 대항하는 혁명군에 들어가 싸우다가 로마 군인들에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 여인은 그만 과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 당시 여자가 과부가 되었다는 것은 미래를 보장할 수 없는 가난과 고난의 사람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 희망이 있다면 자라가고 있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녀는 정성을 다해 고생을 樂삼아 아들을 키웠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이 아들을 놓고 “청년아!(네아니스케)”라고 부른 것을 보면 18,19세 정도의 나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다 성년이 된 아들을 보면 얼마나 대견스러운지 그 아들 보는 일이 곧 삶의 위로였습니다. 그런데 무슨 운명의 작난인가? 인생이 이처럼 모질 수 있겠습니까? 이 아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눈물을 흘리고 하루 종일 흘려도 눈물의 샘은 마를 길이 없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이 아들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여인의 집에 모여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수군대며 ‘이 여자, 무슨 죄가 많아서 이렇게 팔자가 사나울까? 남편을 먼저 보내더니, 이제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마저 보내다니….’ 그러면서 장례 준비를 거들었을 것입니다. 그곳 날씨는 무더워 하루가 지나면 벌써 시신이 부패하기 때문에 하루를 더 보내지 않고 오후 5시쯤 죽은 자를 메고 나갑니다. 유대인들의 하루는 저녁 6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과부 엄마가 앞쪽에 서 갑니다. 그 뒤를 남자들이 관을 메고 따라갑니다. 그 뒤에는 돈을 주고 불러온 호곡꾼이 피리를 불고 곡을 하면서 뒤를 잇습니다. 장지라고 해봐야 동네에서 한 20~30분이면 도달할 수 있는 곳에 있습니다. 이제 장례행렬이 나인 성 문 밖을 막 동네를 빠져나갑니다.
슬픔 장례 행렬입니다. 그렇다고 이 모습을 보는 우리들의 마음이 동정으로 가득하다할 지라도 창자가 꼬이듯 아픔을 느끼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처음 보는  사람들이라 그저 동정 하는 정도일 것입니다.

 

박원순 시장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그 소식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 하였습니다. 한 순간 멍멍한 기분으로 어찌 이런 일이 있는가? 그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서울 시장을 이끌어 오늘의 서울시를 만들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차기 대통령감으로 지목받던 그가 그처럼 아무도 없는 깊은 밤 산 중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인생의 감회를 품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창자가 꼬이듯 하지는 않았지만 잠시간 가슴이 아파 왔습니다. 그가 어떤 죄를 범하였는지 모르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보다 더 더럽고 추잡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런데 그런 결단을 하였다는 것은 오히려 그가 사람들에게 비난 받을 만한 인생을 살았다고는 볼 수 없다는 반증이기도 한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고 박원순시장의 죽음을 애도해 마지않습니다. 
              
이럴 때 예수님께서는 많은 무리를 이끄시고 나인성을 향해 걸어오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성 가까이 이르렀을 때 마침 장례 행렬이 성문을 빠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한번 그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지금 예수님이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인성을 향해서 오고 계십니다. 그런데 성문 입구에 이르렀을 때 반대편에서 다가오는 죽음의 행렬과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안으로 사탄이 마치 자신의 전리품인양 한 젊은이의 시신위에 앉아 죽음의 사신처럼 의기 양하게 성을 나오고 있음을 보신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이 사람들과 함께 다가오고 있습니다. 생명과 죽음의 대 접전이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의 사람들의 죄를 없이하고 사단의 세력을 꺽어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키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으니 이 오만하게 앉아 장례행령을 마치 죽음의 마차를 타고 오고 있는 사단을 구경만 할 수 없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장례행렬을 가로막고 시체를 만지는 것은 유대의 율법(민 19:21~22, 민5:2~3,민 19:11~20)을 아주 전면적으로 어기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정결례(미크베)에 의하면, 관에 손을 대면 하루를, 시체에 손을 대면 일주일 동안 부정하게 됩니다. 유대에는 관에 뚜껑이 덮인 관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시체로 인해 바로 부정해 지는 것인데, 유대교의 의식 가운데 가장 부정함이 큰 것 이었으며,  그러므로 시체를 만질 수 있는 사람은 고인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만이 이런 부정을 받게 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부정함에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끌고 오는 사단과 정면으로 대결해 나가셨습니다. 그래서 유대의 관습에는 다른 사람들 보다 관에 앞장서서 어머니가 걸어야 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슬퍼하는 과부엄마를 먼저 보셨을 것입니다.


관 앞에 오면서 슬피 울고 있는 과부엄마에게로 주님은 눈을 고정시켰습니다. 과부엄마를 보셨다고 말씀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주님은 그 과부엄마를 주목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항상 먼저 보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슬픔을 당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버림받은 자들, 실패한 자들, 병든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보셨다’는 말이 40여 번 나옵니다. 주께서 마9:36에서 ‘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이돈 데 투스 오크로우스 에스프랑크니스데)’라는 말씀도 그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무리-오크로스’는 어렵고 가난하고 힘들게 인생을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눈이 가는 곳은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 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을 보실 때에는 주의 깊게 관심을 가지고 마음에 깊은 애정으로 보습니다. 그러므로 고난당하는 자를 가장 먼저 주목하시고, 그 아픔에 동참하는 심정을 느끼셨습니다. ‘과부엄마가 얼마나 슬퍼할까? 과부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질까?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을까? 얼마나 자기 팔자를 놓고 탄식하고 있을까?’ 주님은 설명을 듣지 않아도 다 알고 계시고, 그 과부의 고통과 아픔이 예수님의 마음 안에 들어와  한 마음이 된 것입니다. 그러닌까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셨다는 표현은 다만 동정하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과부엄마 마음이 예수님에게 轉移되어 함께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고 창자가 뒤틀리듯 아픔을 겪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과부엄마를 보시고 “메 클라이에-울지 마세요”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슬픔 당하는 사람을 볼 때, 위로한다며 “울지마, 울지마” 하고 말하지만 대부분 빈말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빈말로 “울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도 우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에도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마치 예레미야를 통해 대언하시던 그 말씀을 지금 예수님이 과부엄마에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가 통곡하며 전하는 말씀이,
렘31:16-17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울음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어라 네 일에 삯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의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의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지경으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관에 손을 대시자 걸어가던 자들이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이어서 주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네아니스케 소이 레고 에게르데티; 에게이로  마11:5‘죽은자가 살아나며’) ‘일어나라가 아니라 예수님은 ‘살아나라’라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해방시키는 명령이었습니다.  그 청년이 일어나 앉았습니다. 청년을 죽음으로 끌고 가던 사탄이 혼비백사 도망쳤습니다. 과부엄마는 다시 살아난 아들을 부여안고 이제는 기쁨의 눈물을 펑펑 흘렸습니다. 예수님은 실제적으로 그 과부를 위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위로는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해 주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위로는 성령의 능력의 행사이시기 때문에 그 어떤 문제라도 예수님의 위로로 해결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울지 마세요. 예수님이 마음아파 하십니다. 예수님의 위로로 모든 아픔과 슬픔은 사라질 것입니다. 슬픔이여, 안녕입니다.  Bonjour tristesse


세 번째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염려하지 마십시오’입니다.
마 6장 25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메 메림나테)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어떤 일을 있어도 ‘염려하지 마십시오’고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念慮’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지레 겁을 내는 일입니다.  ‘혹시 암에 걸리지 않을까’, ‘혹시 자동차 사고가 나지 않을까’, ‘혹시 실직하지 않을까’, ‘혹시, 자식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찌하나’, ‘혹시 그럴지도 모른다. It may be so’ ‘아직도 오지 아니한 시간과 장소에 그 어떤 것으로 사람들은 염려를 합니다.
이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입니까?  이처럼 ‘혹시...’ ‘아마도...’  내 마음에 염려가 자꾸 일어나면 불안과 두려움 조급함, 의심, 탐욕이 우리의 정신을 혼돈 시킵니다. 지금 우리사회에 그리고 사람들 간에 분쟁과 다툼, 비난과 저주가 만연한 까닭은 바로 이 염려가 그들 마음에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누가 어떤 사람을 마구 비난한다면 그것은 그가 염려하는 무엇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야합니다. 문제는 비난받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비난하는 사람에게 무언가 염려가 있기 때문에 “나는 지금 어떤 염려가 있다. 어떤 염려가 내 마음에 가득하다”고, 그래서 소리 지른다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염려’에 해당하는 헬라원어는 ‘메림나오(μεριμνάω)’이고, 이 말은 ‘나누다(μερίζω)’라는 뜻의 동사 ‘메리조’와 ‘마음’이라는 명사 ‘누스(νους)’가 합쳐진 말입니다. ‘염려하면 마음이 나뉜다’는 의미입니다. 염려는 우리의 생각을 갈라지게 하고, 정신을 오락가락 하게 합니다.  염려는 우리의 심령에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무엇이 옳은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합니다.  영어로는 ‘Worry’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Worry’의 어원에는 ‘목을 조르다’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또 ‘짜증나게하다 annoy’ ‘귀찮게하다bother’ 성가시게하다 vex’란 뜻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침에 눈이 뜬 이후 밤에 눈을 감는 그 시간까지 염려라는 이 한 마디 말과 함께 살아갑니다. 목숨에 대한 염려를 하고, 의복에 대한 염려를 하고, 음식에 대한 염려를 하고, 미래에 대한 염려를 하고, 생활과 세상의 일에 대한 염려를 합니다. 재리의 유혹 때문에 염려하고, 결혼을 해도 염려하고, 안 해도 염려합니다. 학생들은 입시에 떨어질까 염려하고, 청년들은 이성에 대한 염려하고, 남편들은 직장에서 퇴직하는 문제로 염려하고, 부인들은 ‘어떻게 하면 자식들을 잘 키울 수 있을까’, 노인들은 ‘늙어 보이지는 않는가’, ‘노후를 누구에게 의탁할까’ 염려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염려, 근심과 걱정은 우리의 마음을 질식시키고, 결국 영과 육을 파멸시키는 독소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메 메림나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마6:34에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메 메림네세테)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 오늘 염려할 것 있습니까? 내일 염려 하십시오. 그러면 내일이 또 오늘이 되니 다시 그 염려 내일하십시오. 그러면 평생 염려 없는 오늘을 살아가게 됩니다.

 

염려하는 것은 불신앙의 표시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시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나를 향한 은혜가 얼마나 크다는 것을 모르는 信仰天癡입니다. 만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무시하는 일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죄입니다.

누군가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염려하려면 두 가지만 염려해라. 지금 아픈가, 안 아픈가? 안 아프면 염려하지 마라
아프면 두 가지만 염려해라. 고칠 병인가, 못 고칠 병인가? 고칠 병이면 염려하지 마라
못 고칠 병이면 두 가지만 염려해라 죽을 병인가? 안 죽을 병인가? 안 죽을 병이면 염려하지 마라. 죽을병이면 두 가지만 염려해라 천국 갈 것인가, 지옥 갈 것인가? 천국에 갈 것 같으면 염려하지 마라
그러므로 염려는 멸망의 주범입니다. 지옥가는 급행열차를 타는 일입니다. 이래도 또 염려하실 것입니까?
베전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파산 텐 메람넌 휘몬 에페리판테스: 에필흐립토에서 온 말로 벗어 던지다,)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네 번째로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두려워 마십시오”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아프고 슬프고 답답하고 괴로운 일들을 만나게 될 때 성경 이사야 41:10을 펼쳐 보십시오. 그리고 이말 을 기억 하십시오!
 “SodonnotfearforIamwithyou, 두려워말라내가너와함께함이라, 알티라키임메카아니” 영문25자, 한글 14자, 헬라어 9자 단어를 띠워 쓰기 하지 않고 붙여 썼습니다. 전 이 말씀을 한 단어로 봅니다. ‘쏘낫피폴암위쥬.’  ‘두려워말라내가너와함께함이라.’ 띠어 쓸 필요 없습니다. 한 낱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길다고 하면 다섯자로 줄여서 ‘두말내너함’으로 기억합시다.

 

사람들이 음식을 먹을 때에 고민 하는 게 있다고 합니다.
(불고기 고민)- 소고기를 구어 먹을 때에 바삭바삭하게 굽는 게 좋은가?- 야들야들하게 굽는 게 좋은가?
(물밥 고민)- 밥그릇에 믈을 붓는 게 나은가?-물그릇에 밥을 마는 게 나은가?
(탕수육 고민)- 탕수육을 소스에 찍어 먹는 게 맛있나- 소스를 전부 부어 먹는 게 맛있나?
여러분은 무엇이 더 좋습니까?

 

살다 보면 별 것 아닌 일에 주춤거리고 고민하고 갈등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떤 것을 기준으로 결정을 하십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삶의 기준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탕수육을 드셨다면, 탕수육 소스를 부어서 드셨을까? 고기를 소스에 찍어 드셨을까?’
우리들의 생활 속에 어떤 두려운 일에 대해서 어찌할까하는 고민이 새길 때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삶에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보다 편리한 세상 보다 안전한 세상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여 왔습니다. 그래서 과학을 발달시키고 문명을 이르켜 왔습니다. 그러나 편안하기를 바라면 바랄수록 세상은 점점 더 두려운 세상으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온 세상은 코로나19바이러스에 대한 어청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온통 사람들은 마스크를 써야합니다. 버스를 탈 때도 마스크를 써야 합니다. 식당에 들어갈 때도, 은행에 들어갈 때도 마스크를 써야 합니다. 온 세계사람들이 마스크노이로제에 걸릴지경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계십니까?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두려움은
-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약하게 합니다. (민 13:30~33)
- 불안하게 합니다. (신 28:67)
- 절망하게 합니다. (수 5:1)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게 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 집니다. 여러분은 기억하십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에게 가장 먼저 하셨던 말씀은 “평안들 하십니까?(카이레테 마 28:9)”였습니다.
또 “무서워하지 말라(메 포베이스데;두렵게하다. 도망가다 마 28:10)”고 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의 기준은 예수님이시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말씀에 귀 기울이십시오. 
가정에서 여러분을 낙심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메 엥카코멘. 여러분을 슬프게 울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메 클라이에. 여러분을 염려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메 메림나테. 두렵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SodonnotfearforIamwithyou, 두려워말라내가너와함께함이라, 알티라키임메카아니”
줄여서 기억할 다섯자를 무어라 하였습니까? ‘두말내너함’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평안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울지마십시오. 염려하지 마십시오 두려워마십시오. 카이레테, 평안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언합니다.’

 

우리 라온코이노니아는 언제나 우리 주님이 오시어 “여러분, 평안하십시오”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들의 신앙공동체입니다.
낙심 때문에, 슬픔 때문에, 염려로 인해서, 두려움 때문에 문을 닫고 잠그는 삶이 아니라, 닫은 문을 믿음으로 열고 주님 앞에 나와서, 평안의 예수님을 증거하고, 평안의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넉넉히 살아가는 축복의 인생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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