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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20년 6월 27일 주일아침 설교  고후 5:17-21 이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1950년 당시 서울 한강에는 용산~동작동을 잇는 한강인도교와 용산~노량진을 잇는 한강철교가 있었습니다. 6월 25일 북한공산군이 기습 남침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전쟁 일어 난지 불과 사흘 만에 북한공산군은 서울 홍릉방면으로 탱크 2대를 앞세우고  진격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27일 오전 11시 긴급 소집된 육군본부 참모 및 재경(在京)부대장 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채병덕(蔡秉德) 육군총참모장의 지시에 따라 한강다리 폭파계획을 수립한 공병감 최창식(崔昌植) 대령이 그 개요를 설명하였습니다. “적이 서울시내 돌입 두 시간 후면 모든 교량을 동시에 폭파할 것입니다. 지금 전황으로 볼 때 예정시간은 오후 4시가 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설명을 들은 수도경비사령관 이종찬(李鍾贊) 대령과 2사단장 이형근(李亨根) 준장 등은 “시민들이 피란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며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채병덕 총참모장은 공병감에게 “만약 실패하면 총살에 처한다”는 엄명까지 덧붙였습니다. 회의가 끝나자 채병덕은 육본의 서울 철수를 극비에 부치도록 지시한 뒤 오후 1시쯤 육군본부를 시흥으로 옮기라고 명령했습니다.
육본에는 작전참모부장 김백일(金白一) 대령과 장도영(張都瑛) 정보국장, 정래혁(丁來赫) 작전과장을 비롯해 정보와 작전국 요원들만 남아 있었습니다. 신성모(申性模) 국방장관도 오후 2시쯤 수원으로 내려가 수원역장실에 임시로 장관집무실을 차리고 있었습니다. 육본이 서울에서 철수하고 한강인도교를 폭파할 것이라는 중차대한 계획은 군내에서조차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었습니다.

27일 오후 창동 저지선이 무너지면서 수도서울은 풍전등화(風前燈火)가 됐다. 이날 오후 5시쯤 북한 인민군은 미아리를 넘었고, 28일 새벽 1시쯤에는 길음동을 돌파, 시내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이때 채병덕 총참모장이 공병감에게 전화를 걸어 “즉시 한강으로 가서 한강인도교를 폭파하라. 나는 시흥을 거쳐 수원으로 간다. 곧 실시하라”며 작전명령을 하달했습니다.
명령을 받은 최창식 공병감은 즉시 한강으로 가서 대기하고 있던 공병대에 폭파를 명령했습니다. 이때가 6월 28일 새벽 2시 20분쯤이었습니다. 작전국 소속인 장창국(張昌國) 작전국장, 정래혁 작전과장 등이 한강인도교로 향했습니다. 동기생 유근국 대위도 함께 지프에 동승(同乘)했다. 이날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이미 내려진 한강교 폭파계획을 중지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폭파중지 명령은 이응준(李應俊) 5사단장이 내린 것이었습ㄴ니다. 그는 이날 육본에서 김백일 작전참모부장으로부터 폭파지시 사실을 보고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예하 부대가 도강(渡江)한 이후에 다리를 끊어야 한다”며 장창국 작전국장에게 폭파중지를 지시하였던 것입니다. 이때 채병덕 총참모장은 육본을 떠나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채병덕을 비롯한 육군본부 참모들에 이어 이시영 부통령이 한강 인도교를 넘자마자 새벽 2시 30분 경 폭음과 함께 한강 다리가 폭파 되었습니다. 하지만 5개의 교량 중 3개의 교량만이 폭파됐고 임진강 철교, 춘천 모진교, 서울 한강 철도교량이 인민군의 수중에 넘어가게 됐습니다. 다리 폭파 소식을 접해들은 6개 사단, 4만 4천명 가량의 병력들은 중장비는 물론 소총까지 모두 버리고 후퇴를 해야 했습니다. 교량을 폭파하자 서울은 완전히 인민군에게 점령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폭파로 50대 이상의 차량이 물에 빠지고 당시 한강 인도교에 있던 4,000여 명의 피난민 가운데 500~800명 정도가 희생되었습니다. 군 작전상 이루어졌던 한강 인도교 조기 폭파는 결과적으로 서울 시민의 발을 묶어놓게 되었고 군 작전에도 큰 타격을 입혔던 것입니다. 이후 국민들 사이에 폭파에 대한 책임 소재를 묻는 여론이 일어 나게되자, 이승만 정권은(8월 28일) 당시 폭파 책임을 맡았던 공병감인 대령 최창식을 '적전비행죄'로 체포해 9월 21일 사형을 집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최창식은 12년 만에 재심을 거쳐 1962년 무죄 판정을 받아 사후 복권되었다. 폭파를 명령한 채병덕장군은남해안을 돌아 공격하여오는 적을 저지하기 위해 7월 27일 하동 고개에서 인민군 6사단의 매복작전으로 전사하였습니다.
훗날 들리는 말들은, 한강 철교의 폭파는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이 지시했지만, 총리 이범석이 건의하였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1962년 재심에서 폭파 명령의 책임은 채병덕에게 있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지만, 최창식 공병감의 고문이었던 미군 크로포드 소령은 "당시 폭파명령을 내린 것은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의 고문으로 있던 미군 장교"라고 증언하였습니다. 당시 지휘계통상 채병덕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던 사람은 하우스만 대령이이었습니다.

 

바로 오늘이 70년 전 사전에 아무런 소식도 알지 못한 채 인도교를 통해 남으로 피난가던 수백 명의 사람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인도교 폭파의 날입니다.

6.25한국전쟁은 공산주의자 김일성이 소련의 스타린의 사주(使嗾) 하에 남한을 침략하므로 지난 70년 민족분단의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미국; 전사자 33,665, 비전투 희생자 3,275..총 36,940 명이 젊은 목숨을 한국전쟁에 바쳤다. 총 103,284 작전에서 92, 134 전상자를 냈으며,총 1,789, 000명의 미군이 1950, 6.25부터 1953, 7.27일까지 한국전에 참전하였고, 아직도 8, 176명의 실종자를 남기고 있다. 한국군은 전사자 415, 004명을 포함한 1, 312, 836명의 희생자를 냈으며, U.N은 전사자 3, 094명을 포함 총 16,532명이 한국전쟁에서 희생되었다.)       

우리는 전쟁으로 죽은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유족들을 위로하고 훈장도 주고 위로금도 주고 그분들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고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 6.25기념식에서도 문재인대통령의 6.25전쟁으로 희생당한 국군자영과 죽음을 당한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하며 비장한 각오로 다시는 전쟁 없는 남 북 간의 신뢰와 평화의 시대를 어서 속히 이루자는 훌륭한 명연설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70년 전 인도교 다리를 건너 남으로 피난 가던 수백 명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 그 누구도 기억하지 않고, 물론 국가로부터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죽음으로 인한 가족들의 슬픔과 그들이 겪었을 그 후의 비참한 삶을 아무도 위로해 주고 있지 않습니다. 전쟁에 흔히 있을만한 사건의 하나로 잊혀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여러 문제 중 하나는 물론 북한과의 준전시상태에 있기는 하지만, 나라 아에 벌어지고 있는 남남 갈등이 더욱 심각하다고 하겠습니다. 새로운 국회의원이 선출 된지 한 달이 되어 가는데 국회가 운영되지 않고 있습니다. 국정이 마비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이것은 여당 야당 간의 의견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망국의 부패한 분당정치의 말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패한 분당정치의 특징으로 정권장악을 위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도 있지만, 국민들을 안중에 두지 않고 당의 이익이 국민의 안위보다 우선이라고 하는 당정책자들의 생각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당리당략을 위해서 국민들이 죽던 말던 한강다리를 끊어버리는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지금 코로나19바이러스로 만여 명이 이 병에 걸렸고 2백여명이 죽었습니다. 경제는 곤두박질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섰고, 국가의 빚이 눈덩이처럼 늘어나고 있습니다. 중소상공인들이 죽는다고 아우성치고 있습니다. 북한과의 갈등과 미 중간의 알륵으로 인한 등터지는 소리들이 들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국민들을 불안해하는 일들이 안팍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아 두려움과 고통의 나날을, 마스크를 쓰고 살아가는 국민들을, 저 정치인들은 안중에 없습니다. 이 Mask People들이 숨넘어가는 있는 판에  일부 정치인들은 인도교를 폭파하려는 마음뿐입니다. 북한은 남한과의 그동안의 평화적 관계를 개성연락사무소를 폭파하므로 모든 평화적 더리를 폭파시켰습니다. 통합당은 자기에게 법제사법위원회위원장을 주지 않는다고 모든 상임위원회의 위원장자리도 포기하므로 국정의 모든 다리를 폭파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지난 2013년 제2차 국민대통합 심포지엄에서 박준 삼성경제연구원 수석연구원은 “2010년 한국의 사회갈등의 수준은 OECD 국가 중 종교분쟁을 겪고 있는 터키에 이어 두 번째로 심각하다”고 하였습니다. 「한국행정연구원」의 ‘2018년 사회통합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진보.보수간의 이념갈등이 87%로 가장 높게 나타났고, 다음은 빈부갈등 82%, 노사갈등 76%, 세대갈등 64%, 종교갈등 59%, 남녀갈등 52%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나라의 사회갈등은 눈에 보이지 않는 엄청난 비용을 소모하고 있습니다. 세대, 남녀, 노사, 빈부, 지역, 이념, 종교, 교파, 남북, 국가, 인종 등 사람이 사는 곳마다 서로간의 이어진 다리들을 폭파시키고 있습니다.

 

1950년 한강다리의 폭파사건은 국가와 국민간의 신뢰와 존중을 폭파시킨 일로서, 그 후 70년 동안, 영남이다 호남이다라는 지역 간의 다리, 여당과 야당 간의 다리, 사업주와 근로자들 간의 다리, 사회 각 집단 간의 다리, 가정 안에서 가족들 간의 다리, 심지어 교회내의 성도와 성도 간의 다리,  교회와 교회 간의 다리 등 이 모든 관계의 다리들이 폭파되는 그 첫 번째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한강 인도교는 다시 복구가 되었지만 사람들 간의 끊어진 다리는 아직 보구되지 않을 뿐 아니라, 더욱 훼손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이 다리들이 폭파되어 끊어져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온갖 찔레와 엉겅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데 그 누구도 폭파되어 끊어진 다리를 다시 보구시키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한 남자가 길을 가다가 정말로 낡아서 부서질 것 같은 다리를 만났습니다. 밟으면 부서질 것  처럼 보이는 다리 앞에서 자신을 가장 사랑하며 신뢰할만한 사람의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다리는 이미 몇 백 년 전 부터 이 모양이었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부서지지 않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 다리는 튼튼합니다. 내가 책임집니다.' 그 남자는 그분의 설명을 듣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 그렇구나. 이 다리는 보기에는 위험해 보이지만 건너 갈만하구나.'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고, 남자는 그 다리를 건너지 않고,  다리 저편으로 가기 위해서 아주 먼 길을 찾아 떠납니다.
지금 우리는  끊어진 다리 앞에서 그 다리를 다시 복구시킬 생각은 하지 않고 무슨 다른 길이 없는가하고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아마도 우리 생전에는 다른 길은 없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사회에, 사람과 사람사이에 신뢰와 존중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아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지만 신뢰하지 않습니다. 다른 방도를 머리 굴려 생각하고 다른 길을 찾아갑니다.
아주 쉬운 방법은 폭파된 인도교를 보구하듯 끊어진 인간 계의 다리를 다시 이으면 되는데, 이어야 한다고 이구동성 말하고는 있는데, 다음날 그들은 또 다른 말을 합니다. 보구시키기 위해서 날밤을 세우면 코론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폭파시키거 더 간격을 넓혀 갈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여 야 국괴 대표가 강릉에서 만났다고 합니다. 뉴스에 서로 웃으면서 끓어 안고 있는 사진이 실렸습니다. 그런데 국회에 돌아 온 그들은 여전히 끊어진 다리입니다.  이 끊어진 다리로인해 우리 사회는 6.25때 난리는 난니도 아닌 혼란 혼탁混濁 한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으니 이 얼마나 우수운 일입니까? ‘야 친구야!’하면서 손잡으면 되는데 여당과 야당이, 노사 간에, 남북 간에, 가족 간에, 손 내밀면 되는데 왜? 손 내밀지 못하는 것입니까?

 

왜 끊어진 다리를 이으려, 왜 서로 신뢰하지 못하고 존중하지 못합니까? 왜 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것은  하나님과의 다리는 이어져 있는가? 의 대답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끊어진 다리를 잇는 일을 성경은 和睦, 和解라고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5:20에는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은 성경적 명령입니다. ‘화목’이란 말이나 ‘화해’라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화목이란 말은 천자문에 上和下木이란 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화목하다’는 성경 헬라어는 ‘카탈라소’입니다. 이 말은 적대 관계에서 우호적 관계로의 변화를 뜻하는 동사입니다.
***(신약성서에서 사도바울만 이 용어를 4번 사용하며(롬 5:11,15; 고후 5:18,19), 그 동사 “카탈라소”(katallasso)는 6번 사용된다(롬 5:10[2번]; 고전 7;11; 고후 5:18,19,20). 어원학적으로 카탈라게는 ‘완전히’라는 뜻의 “katav”(kata)와 ‘변화하다’, ‘변경하다’, ‘교환하다’는 뜻의 “ajllavssw”(allasso)가 합성된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용어의 어원적 뜻은 ‘양자 간에 불편했던 관계가 어떤 대가를 서로 교환함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변화되어 그 불편했던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영어로는‘Reconciliation’이다. 고대그리스의 결혼문서들을 보면, 결혼한 부부의 별거를 ‘아팔라소’(apallasso)라 부르며, 그들이 다시 합친 화해를 ‘카탈라소’라고 기록했다. 이러한 전승을 따라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 11절에서 별거한 아내는 ‘그 남편과 다시 화해하도록 하라(카탈라소)’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천자문을 보면 上和下睦하고 夫唱婦隨라 한 글과 유사한 의미를 보게 된다)

 

이 단어는 또한 ‘변화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개선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라고 말합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이사야 59:2에는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라고 합니다. 죄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다리를 폭파시켰다는 말입니다. 사탄이 쓰는 폭탄이 바로 죄의 폭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탄의 폭탄을 대신 맞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이어진 다리가 끊어지지 않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5:10에는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이라고 합니다. 사도신경에서 우리가 고백하기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여기서 ‘교통’이란 코이노니아의 또 다른 번역입니다

죄의 특색은 관계를 끊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구약성경 전체에 나타난 죄의 특성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지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이 관계를 끊어지지 않게 하라고 외쳤지만 사탄의 죄의 폭탄에 맞아 나라는 망하게 되고 민족들이 세계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사탄은 마치 죄의 폭탄을 사람들에게 쏟아 붙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수류탄 같은 죄를 어떤 사람에게는 원자폭탄 같은 죄를 떨어트립니다.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이라 했습니다. 결국 죄는 인간을 멸망케 합니다. 국가 간에 멸망케 합니다. 정치권을 멸망케 합니다. 국민들을 멸망케 합니다. 교회도 멸망케 합니다. 이스라엘의 그 아름다운 성전도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는 파괴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죄의 폭탄을 다 막아 대신 맞으시니 우리가 살게 되었습니다. 그럼으로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로널드 롤하이저(Ronald Rolheiser 캐나다 서스캐처원 대학교 토마스 모어 대학교수) 는 ‘성찬의 영성’이란 책에서 “일상의 삶 속에서 솔직한 사과가 상대방과의 화해를 이끌어내듯이 솔직한 회개는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끌어낸다”고 하였습니다. 회개는 하나님과 화목하는 길입니다. 인간의 회개가 하나님과 화목하는 방법입니다.
누가복음 5:21에는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라고 합니다. 탕자인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죄를 짓기 전에 하나님께 이미 죄를 지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 죄를 지은 사람이 사람에게도 죄를 짓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먼저 화목해야 사람과도 화목이 가능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화목은 아주 간단합니다. 돌아오면 갈등이 끝나고 화목하게 됩니다. 회개하면 하나님과의 갈등이 끝나고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손 내밀면 다리가 이어집니다.

 

회개가 어려운 일인가? 아닙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에 의지하여 구하옵나니 저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그러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죄 사함 받고 하나님과 다리가 이어집니다. 긴 시간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한 편의 강도는 평생 하나님을 멀리 했을 것입니다. 예배하지 않았을 거십니다. 기도도 해 본적이 없습니다. 감사헌금도 십일조를 드려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선행이란 말도 몰랐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봉사해본 적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생에 마지막으로 말한 그것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라는 한 마디를 말만 하였을 뿐입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그의 진정한 속죄의 회개의 내면의 진실을 아셨습니다. 그는 한 번의 회개로 영원한 나라를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낙원에는 하나님과 다리가 이어진 화목한 자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인도의 영웅이라는 간디가 영국에서 공부하던 대학 시절, 그에대해서 매우 좋지 못한 편견을 가진 피터스란 교수가 있었습니다.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 학생을 영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간디가 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가서 피터스 교수 옆 빈자리에 앉았습니다. 교수는 간디에게 “여보게, 아직 잘 모르는 모양인데 돼지와 새가 함께 식사하는 경우는 없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간디는 “걱정마세요. 교수님, 제가 다른 곳으로 날아갈게요.”라고 하였습니다. 복수심에 불타던 교수의 과목이 시험을 치르게 되었는데 간디가 만점을 맞았습니다. 교수는 분을 삭이며 질문하였습니다. “길을 걷고 있다가 두 개의 자루를 발견했다네. 한 자루에는 돈이 가득하고, 다른 한 자루에는 지혜가 가득한데 하나만 차지할 수 있다면 자네는 어떤 쪽을 택할 건가?” 간디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야 당연히 돈 자루죠”라고 했습니다. 교수는 비웃듯 웃음을 흘리며, “나라면 지혜를 택했을 거네”라고 하였습니다. 간디는 “뭐, 각자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택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히스테리 상태에 빠진 피터스교수는 간디의 답안지에 만점 점수를 주는 대신 신경질적으로 ‘idiot’(멍청이)라고 갈겨써서 간디에게 주었습니다. 자신의 답안지를 본 간디는 교수에게 “교수님, 제 시험지에 점수는 안 적혀 있고, 교수님의 서명만 있네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피터스교수가 간디에게 손 내밀지 못함으로 영국은 인도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간디는 영국에 대한 불만을 가지게 되었고 후에 영국으로부터 인도의 독립투쟁의 지도자가 되어 마침내 인도의 독립을 쟁취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4:9에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예수님 따라 그리고 바울사도를 따라 다리 놓는 사람들입니다. 누가복음 12:58에는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고 합니다. “힘쓰라”는 말은 ‘에르가시안’이란 헬라어로 노력하다는 의미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try hard to be reconciled”이라고 합니다. 화목하려고 열정적으로 노력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는 열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일의 효율성을 증가시키고 합당한 결과에 만족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최선을 다해 열정을 다해 끊어진 다리를 놓아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일이나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나 거기에는 우리의 열정이 필요합니다. 화목케하는 일에는 열정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이 열절을 십자가를 지심으로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영어로 열정을passion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passion을 The Passion of Crist에서 ‘그리스도의 열정’이라고 번역하면 안 됩니다. 이 passon은 라틴어 passio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말은 고난, 고통, 아픔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프랑스를 거처 영어로 편입되면서 열망 열정으로 쓰여 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최고의 열정이었습니다. 그 열정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십자가의 다리를 놓은 것입니다. 이 십자가 다리를 놓기 위해서 예수님은 엄청난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끊어진 다리를 복구하는 일은 십자가 지는 열정이 뒤 따라야 합니다. 남 북 간의 끊어진 다리를 잇는다는 것은 민족의 십자가를 열정을 다해 지는 일입니다. 6.25전쟁 때, 수십만의 병사들의 죽음을 바로 민족의 다리를 놓는 십자가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십자가 없이 화목케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 열정 없이 어찌 다리가 놓여 질 것입니까? 여당과 야당의 다리는 십자가 지는 열정 없이 놓여 지지 않습니다. 이웃 간에, 가족 간에, 교회 안에서 끊어진 다리들을 다시 이어지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지는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 열정 때문에 십자가를 진 사람이 먼저 손을 내 밀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열정을 가지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의 열정이 있음으로 화목의 역사가 있게 됩니다. 사탄이 던진 죄의 폭탄을 예수님이 막아 주기기 때문입니다,

 

1941년 에 태어난 동갑나기 고등학교 동창생인 폴 프레데릭 사이먼(Paul Frederick Simon)과 아서 가펑클(Arthur Garfunkel)이란 젊은이들이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Bridge Over Troubled Water)라는 노리를 지어 불렀습니다. 1970년 7개의 그래미상을 수상하였고 10주 동안 미국에서 1위에 오르면서 1300만장이나 팔렸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대 유행이 되었고 저도 참으로 좋아하는 팝송입니다. 그 가사는 이렇습니다.

When you're weary feeling small    당신이 의기소침해 있을 때나
When tears are in your eyes          당신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힐 때
I'll dry them all I'm on your side     나 당신 곁에서 눈물을 닦아주리다

Oh when times get rough             고난이 몰아쳐 와
And friend just can't be found       친구들도 찾지 않을 때면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I'll lay me down                          나를 당신께 바치리다
Like a bridge over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troubled water                            나를 당신에게 바치리이다
I'll lay me down                     
    
***( When you're down and out      당신이 자신을 잃고
When you're on the street             낯선 거리에 서 있을 때나
When evening fall so hard             고통의 밤이 오면

I will comfort you                         당신의 짐을 받아 주고
I'll take your part                          편히 쉬게 하리다
Oh when darkness comes               어둠이 밀려와 불안해 할 때

And pain is all around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Like a bridge over                         나를 당신께 바치리다             
troubled water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I'll lay me down                             나를 당신께 바치리다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ll lay me down

Sail on silver girl,                            은빛 소녀여 노 저어 가세요
sail on by                       
Your time has come to shine             빛이 당신을 비추고 있어요
All your dreams are on their way        당신의 꿈들이 이루어집니다

See how they shine                         저 빛나는 것을 보세요
Oh if you need a friend                    당신이 친구를 원한다면
I'm sailing right behind                     나 또한 노 저어 당신께 가겠소

Like a bridge over
I'll ease your mind                           당신의 맘을 편하게 해드리겠소)


오늘의 말씀인 고후 5:18에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안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케하는 직분을 주셨으니....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우리 라온코이노니아는 단절된 민족, 분열된 나뉘어진 이웃 간에 그리고 가족 간에 끊어진 다리를 이어 하나님과 화목하고 서로서로 화목을 위해 위해 기도하며 열정을 다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 주변에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전하는 다리가 되어 항상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받으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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