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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20면 6월 21일  눅 16: 19-31    불편한 진실 (Incommodum veritas)

 


KBS2 TV에서 1999년에 시작한 ‘개그 콘서트’ 개그 프로가 그동안 많은 사람들을 웃겼습니다. 그러나 지난 5월 19일에 프로 21년 만에 폐지되었습니다.  폐지 이유 중 가장 큰 이유가 3%의 낮은 시청률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불편한 진실은 억지와 저질로 사람들을 웃기는 시대가 지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그콘서트에서 인기를 끌었던 개그가 바로 ‘불편한 진실’입니다. 
첫 멘트가 이렀습니다. “안녕하세요, 불편한 진실의 황현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알고 계시던 진실이 모두 진실이 아닌 거짓으로 밝혀진다면 여러분은 어떠하시겠습니까?” 내가 지금까지 알고 믿었던 것이 참이 아닌 거짓으로 드러날 때 우리는 불편한 진실 앞에 당황합니다.  우리 주변에 음식점을 보면 방송이나 일간 신문매체에 소개되었다는 간판이나 사진을 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 이 집은 방송에 소개된 맛 집이네’ 기대를 하고 찾아갑니다. 물론 다 그런 식당은 아니지만 개중에 불편한 진실이 있습니다. 어느 식당 주인이 자기 식당을 맛 집 방송에 소개하려고 방송국 관계자와 접촉합니다. 그리고 맛 집으로 방송에 소개되기까지의 전 과정을 몰래 카메라로 취재합니다. 그 실체는 충격적입니다. 돈 1천만 원만 주면 아무리 맛이 없는 집이라도 방송에 소개됩니다. 방송작가가 모든 시나리오를 만들어 줍니다. 음식의 이름과 제조법까지 친절하게 써줍니다. 그리고 촬영을 위해 인터넷에 손님을 모집합니다. 맛있게 먹고, 정말 맛있는 것처럼 연기를 잘하는 사람을 뽑습니다. 그리고 방송에 그 음심점이 소개됩니다. 결국 이것을 본 시청자들은 방송매체에 소개된 것을 믿고 찾았다가 낭패를 보는 불편한 진실을 경험합니다.

세상에 어디 이런 불편한 진실뿐이겠습니까?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 이런 불편한 진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특별히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설 때마다 불편한 진실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면 말씀이 꿀송이 보다 더 달게 느껴집니다. 말씀의 샘물을 먹고 마시며 기뻐하며 감격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있어서 진리의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볼 때 불편합니다. 여전히 내안에 욕심이 도사리고 있고 교만과 미움과 욕심이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옛사람은 지나가고 보라 새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지만 옛 모습보다 더 사악한 모습을 감추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은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인가?  과연 저 사람이 세상을 떠나 예수님이 환영해 천국으로 들어갈 사람일까? 하는 불편한 진실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이아침에 봉독한 말씀은 예수님의 비유말씀으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교회를 다닙니다. 왜냐면 말씀의 내용이 우리에게 불편한 진실을 지적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 앞에 서면 과연 나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가하는 의심을 가지게 됩니다.

본문에서 부자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지옥에 가면 이름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천국에 갈 사람은 그의 이름이 천국의 생명책에 기록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거지 나사로의 이름은 알려지고 있습니다.


눅 10: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라자로는 그리스어로 ‘도움 받을 길이 없다’ - 그러나 히브리어로 쓰면 엘사라르 또는 엘리제르가 되는데 ‘하나님이 도우신다(El-azar)뜻입니다.

부자는 좋은 집에서, 좋은 옷에, 좋은 음식을 먹고 살았습니다. 날마다 잔치를 벌이며 살았습니다. 세상에서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거지입니다. 늘 배가 고프고, 병이 들었습니다. 아파도 돈이 없어서 병원에 갈 형편이 못됩니다. 자기 몸 하나 쉴 곳이 없습니다. 생존을 위해서 하루하루 구걸을 하면서 연명합니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진 밥풀을 먹으려고 개와 함께 다투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한마디로 개만도 못한 인생입니다. 그런데 부자는 이런 가난한 거지를 보고도 불쌍히 여기지 않습니다. 어쩌면 나사로를 보면서 자신의 부유함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회적인 약자를 사랑으로 돌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사디즘(sadism)같은 부자는 거지 나사로의 비참한 상황을 즐겼습니다. 이 땅에서 부자는 최고의 부귀영화를 다 누립니다. 반대로 나사로는 지옥 같은 삶을 삽니다.

1590년 바사노 부자와 병든 거지


그러나 세월이 지나 마침내 모든 사람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부자도 떠나고, 가난한 거지도 떠납니다. 배운 사람도 떠나고, 배우지 못한 자도 떠납니다. 병든 사람도 떠나고, 건강한 사람도 떠납니다. 그런 후에 떠나면 어디로 갑니까? 귀신을 믿는 사람들은 죽으면 귀신이 되어 세상을 떠돌아다니다가 자기 제삿날 제사 밥 먹으로 찾아온다고 합니다. 이런 불효막심한 생각을 하다니요 자기 아버지 어머니가 귀신이 되어 거지귀신이 된다고 믿으니 이런 허황된 거짓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이 한국의 정통 예법이라고 믿으니 참으로 불편한 진실입니다. 이 세상 떠나면 반드시 우리는 심판이란 진실의 관문을 거처야 천국엘 갑니다.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지옥으로 가라는 판결을 받고 지옥으로 떨어지던 부자가 언뜻 고개를 들으니 천국에 거지 나사로가 앉아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옥 불이 너무 뜨거워 참기 힘든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부탁을 합니다. 천국에 있는 나사로를 통해 그의 손끝에 물을 찍어 자신의 혀를 잠시 시원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말합니다. ‘살았을 때, 너는 좋은 것을 다 누리고 살지 않았느냐? 반면에 나사로는 비참한 삶을 살았다. 설령 나사로를 보내고 싶어도 건너갈 수 없다.’ 그러자 부자는 간절히 한 가지를 더 부탁합니다.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서 내 다섯 형제들에게 나타나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내 형제들이 다시 살아온 나사로를 보고 나처럼 지옥의 고통을 경험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죽은 부자의 형제들도 자기 배만 채우는 자들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부자가 자기 형제들이 죽으면 자신처럼 지옥에 온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와 선지자들, 구약 성경을 통해 그렇게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그들의 삶은 변함이 없다. 심지어 죽은 자가 다시 살아온다 할지라도 그들은 자신의 삶을 회개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너처럼 지옥에 올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여기서 끝이 납니다. 예수님의 이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이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불편한 진실이 숨겨져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반드시 있습니다. 불교는 극락왕생을 말하여 우리 기독교의 천국영생과 같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불교의 사상은 극락왕생이 아니라 윤회사상입니다. 죽으면 또 다른 생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착한 사람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지만 악한 사람은 개나 돼지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윤회에서 벗어나 無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에 보면 어린 양 혼인 잔치 집에 들어갈 자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자들은 거룩한 세마포 옷을 입고, 천국잔치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던 자들은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집니다(계19:20). 계시록 20장에 보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아 믿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는 자들은 둘째 사망에 이릅니다. 곧 불 못에 던져집니다.(계20:15)

사랑하는 여러분!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 받고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미 여러분은 천국에 갈 운명으로 택함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예수를 믿지 않는 가족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영원히 죽을 수도 없는 불 못에서 고통 받는 모습을 지켜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먼저 예수님을 믿으며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은 상관없지만 아직 우리 가족들 가운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경우라면 심각한 일입니다. 나는 천국에 갔는데 내 남편이, 아내가, 자식들이 지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물론 천국에는 슬픔이나 고통이 없다고 말씀하셨지만 우리의 가족들이 친구들이 지옥의 고통 속에 소리 지르게 될 것이라고 생각만 해도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불편한 진실이 아닙니까? 우리가 가족들을 사랑한다면 지옥 가는 것을 막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나만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고, 내 가족은, 친구들은 활활 타는 불 못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을 받는 것을 믿는다면 잠이 오겠습니까? 그래도 잠이 오면 개콘에서 유행시킨 말 “사람이 아니무니다.”

 

어느 왕이 어느 신하를 왕궁으로 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신하는 왜 왕이 나를 오라고 하는가? 언젠가 사석에서 왕에 대해 비난한 말을 누가 고자질  하였는가? 겁이 났습니다. 그렇다면 자기는 당장 목이 달아날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너무나 두려워서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세 친구를 찾아가서 동행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첫 번으로 가장 친한 친구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같이 갈 수 없다고 냉정하게 잡아떼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 째는 그 보다 조금 덜 친한 친구를 찾아 갔더니 그는 그 동안의 우정을 보아 왕궁 앞까지 동행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세 번 째 친구를 찾습니다. 그 친구는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어쩌다가 한번 씩 만나는 친구였습니다. 별로 기대를 가질 수 없는 친구 같았는데 그는 말했습니다.
“내가 자네와 같이 왕 앞에 가서 자네를 위하여 변호하여 주겠네. 죄를 지었지만 뉘우치고 있고 다시는 그러지 않을 터이고 내가 보증을 설 터이나 살려 달라고 요청하겠네.”
이 친구는 너무 기쁘고 놀랐습니다.
첫번 친구는 돈과 재산이었습니다. 죽을 때 하나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고스란히 남겨 두고 가야 합니다. 돈으로는 영생을 살 수가 없습니다. 영혼이 가는 곳에 재산을 짊어지고 갈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친구는 세상에서 같이 사랑하며 살던 사람들입니다. 아내나 남편, 그리고 자식 그리고 친지들입니다. 그들은 아무리 친하다고 하지만 대신 죽을 수 없습니다. 함께 살고 있지만 끝까지 함께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친구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는 영원히 우리와 동행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죽음이후에도 같이 가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와 같이 서주시고 탄식하여 주시고 변호하여 주실 분입니다.

 

부자는 땅에서 살 때 최상의 삶을 살았습니다. 지금 부자의 5형제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자기가 한번 내려가서 5형제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지옥이 있다고 호소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지옥문에 꽁꽁 잠겨서 들어 올 수는 있어도 나갈 수는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부탁하는 장면이 애처로워 보입니다.
“그러면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 지니라.”

이미 구원의 도리를 모세를 통하여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리고 이 세상의 수많은 교회의 목사님들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어느 곳이나 구원의 진리가 충분히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지 않고 있습니다. 들어도 들은숭만숭입니다. 소귀에 경 읽기입니다. 들을 귀가 없습니다.

지금 북한의 김정은 정권은 문재인 대통령의 진심어린 말에 들을 귀가 없기 때문에 억하심정( 抑何心情)으로 뒤통수를 치듯 하고 억지를 부립니다. 정치인들 중에도 이런 억하심정으로 권력의 욕망과 패역함이 단단히 굳어버린 녹 쓴 철판으로 그들의 심령을 가둬버렸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농사야 한번 실패하면 내년에 다시 지으면 됩니다. 대학이야 한번 떨어지면 재수하면 됩니다. 사업도 한번 실패하여도 다시 일어나면 됩니다. 그러나 지옥은 한번 들어가면 나올 출구가 없습니다.

 

악명 높았던 이차대전당시 독일이 유대인을 학살한 폴란드의 오시비엥침에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습니다. 유대인이 그 곳에 들어가면 독일군이 첫 날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너희들은 수용소에 들어왔다. 이 수용소를 나갈 수 있는 길이 하나가 있다. 죽어서 시신을 불태울 때 연기가 되어 굴뚝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지옥은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는 곳입니다. 나가려고 발버둥 쳐 보아야 영원히 나갈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세상에 사는 동안 기회가 있는 동안 모세와 선지자 말을 이 땅에서 듣지 않으면 끝장입니다.

 

신풍교회에서 목회할 때입니다. 우리 교회에 염복동 집사라는 분이 있는데 그분은 본시 무당이었습니다. 그런데 손녀가 우리교회 어린이 선교원을 다녔습니다. 그리고 어린이교회핫쇼도 잘 나왔습니다. 이 어린 손녀가 밥 먹을 때마다 기도하기를 우리 할마니 예수 믿고 천덩가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처음에는 흘러 보냈지만 자꾸 들으니 듣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기도하지 말라고 계속 그런 기도하면 귀신이 너를 잡아간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손녀아이가 하는 말이 “귀신은 예수님이 무서워 도멍가니 나는 무섭지 않아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무당할머니는 손녀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예수님 무서워 도망가는 귀신을 위해 산들 결국 지옥에 갈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후 어린 손녀의 손을 잡고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집사도 되고 구역장도 되었습니다. 그분이 세상 떠날 때 염집사님의 장례식을 인도했습니다. 염집사님은 어린 손녀의 말을 듣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 땅의 모세와 선지자 그리고 전도자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 품안에 안길 수 있습니다.

부자는 이 땅에 살고 있는 5 형제에게 복음을 전하여 주고 싶었습니다. 지옥이 있음을 알려 주고 싶었습니다. 저렇게 좋은 천국으로 가게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안타까워서 다시 말하였습니다.
“그렇지 아니 하나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 하리이다.”
죽은 자가 살아나서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말하면 회개하고 믿을 것이라고 부자가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 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믿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 살아나서 말해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적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홍해가 갈라져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매일 만나가 내려도 하나님을 의심하였습니다. 반석에 물이 나와도 그 때뿐이었습니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서 말해도 믿지 않는 사람은 믿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너무 육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제 영적인 것에 전혀 무관심하고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에 한 여인이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으면 그들을 무조건 증오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자기 집까지 저당 잡혀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웃 사람들이 좋은 것을 살 때마다 그녀는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을 사야 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이웃집에서 텔레비젼을 구입하고 지붕 위에 안테나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녀는 이웃집 사람에게 지붕 위에 있는, 저 나무같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그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장 텔레비젼을 사고 싶은 욕구가 충동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빚이 산더미 같으니 그 빚을 갚기 전에는 아무 것도 살 수 없소."하고 딱 잘라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의 욕망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다음 주가 되자 또 다른 이웃이 안테나를 지붕 위에 설치했습니다. 이제 주위에 텔레비젼이 없는 집은 그녀의 집 뿐 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대리점으로 가서 안테나만 사서 지붕 위에 설치했습니다. 그러나 돈이 없어서 텔레비젼 수상기는 사지 못했습니다. 수상기는 없었지만 안테나만 꽂아도 그녀의 마음은 좀 가라앉았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텔레비젼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테니까요. 불편한 진실입니다.

오늘 안테나만 신자인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 정작 텔레비젼은 없고 안태나만 가진 교인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진실한 믿음을 가지지 못한 신자입니다. 교인인 척하지만 천국못 갈 교인입니다.  불편한 진실입니다.

 

우리라온 코이노니아는 언제나 영생의 길을 가는 성도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 아직도 이 영생의 길에 함께하지 못한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하려 그 고난을 참으시고 마침내 우릴 지옥에서 건지어 천국으로 인도해 주고 계십니다. 언제까지 불편한 진실을 내버려 둘 것입니까? 우리 가정이 우리나라가 저 북한 동포와 온 세계가 하나님을 믿고 구원에 이르는 진실이 숨 쉬는 이 세상이 되기 위해 기도합시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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