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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20년 6월 14일  주일아침예배  렘 31: 15-20  多情도 십자가련가?
 

 

1728년(영조4냔) 김천택(金天澤)이란 분이 그 때까지 전해 오고 있는 시조 580수를 수록한 청구영언(靑丘詠言)을 작성하였습니다. 이 책에 고려 말 매운당 이조년(李兆年:1269-1343)의 시조 한 수를 전해 주었습니다.(형제들의 이름이 흥미롭습니다.맏형 이백년李百年, 둘째 이천년李千年, 셋째 이만년李萬年, 넷째 이억년李億年, 다섯째 이조년李兆年) 입니다.

“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은 삼경인 제
  일지 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자규제(子規啼)’라는 제목의 한시로 자하(紫霞) 신위(申緯:1769~1845)가 이조년의 시를 번안한 시가 또한 잘 알려지고 있습니다.
梨花月白三更天(이화월백삼경천) 배꽃이 피고 달은 밝아 밤도 깊은데
啼血聲聲怨杜鵑(제혈성성원두견) 피를 토하며 우는 두견이 원망스럽네
儘覺多情原是病(진각다정원시병) 다정함이 병인 줄을 이제야 깨달으니
不關人事不成眠(불관인사불성면) 세상일에 무심해도 잠이 오지를 않네)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한국 사람들의 본성에 情이란 것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의 의식 속에 그리고 생활 속에 이 情이 녹아져 있습니다. 이 한국인의 情을 이해 못하면, 한국인의 언어와 역사 정치 문화 그리고 인간관계 등 사회 제 반 깔려 있는 일상의 모습들을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한국 사람에게 情은 단시일에 형성된 감정상태가 아니라 5,000년이란 길고 긴 시간대에 쌓여지고 전해오는 한국인의 유전자DNA라고 하겠습니다. 이를테면 한국인들은 ‘우리’‘라는 말을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my house’가 아니라 ‘우리 집’이라 하고, ‘my father’가 아니라 ‘우리 아빠’라고 말합니다, 오랜 만에 길에서 만난 친구에게 ‘우리 집에 가자’라고 말합니다. 한국인들은 모두 ‘우리’리는 울타리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 울타리 안에 살아온 우리들 간에 얽히고 섥히어 어울려 이루어진 DNA가 情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국인의 정을 외국인들이 이해하기는 쉽지 않으며 그 어떤 외국어로도 번역하기 어렵습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情은 일본인들이 중요시 여기는 기리(義理)와 다릅니다. 일본인들은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다고 합니다. 야쿠자(Yakuza, ヤクザ)조직이 그 한 예입니다. 그러나 한국인은 정에 살고 정 때문에 죽기도 합니다. 신라의 화랑도 정신도 그 한 예라고 하겠습니다. 일본인들의 기리 정신은 제도화된 체계 속에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지키는 것을 중요하다고 하면 한국인들의 情은 자생적이고 깊은 동질적 감성을 우선으로 중요시여깁니다. 그래서 고향사람, 학교 동창생, 심지어 해병대출신 이런 점에 서로 동질적 유대감을 가집니다. 그래서 고량 사람이 어려울 때에 조건 없이 도와주거나, 비록 동창생이지만 오랫동안 친밀한 관계도 없었다 하더라도 허물없이 도와주고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한국인들은 결혼식이나 문상 가는 일에 방문하여 축의금과 조의금을 내며 함께 즐거움과 슬픔을 나눕니다. 2000년 12월 7일 태안 앞 바다 기름유출사건 때 전 국민들이 팔을 걷어 부치고 몰려와 바닷가 바위 틈 사이에 묻은 기름을 닦아내는 일도 바로 한국인의 情의 발로 이였습니다. 일본 아베수상이 경제보복 선언을 하자 전 국민이 일본 상품 불매운동을 벌리거나, 금년 코로나19바이러스에 사재기현상이 없었던 일도 한국인의 情적인 사회관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情은 마치 김치 맛입니다. 우리가 먹는 김치는 일본인들이 먹는 김치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즉 우리의 김치는 숙성된 깊은 맛을 내는 반면에 일본의 김치는 겉절이처럼 숙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는 한 마디로 표현하면 깊이 숙성된 맛이 납니다. 반만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숙성되어 온 한국인의 심성이 情인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반세기 정치문화와 경제적 급변기를 거치면서 ,경제는 세계 10위권에 이르렀지만 한국인의 여유만만 유유자적한 모습은 사라지고 빨리빨리 속도전을 벌리며 생활이 기계화되고 자동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음식문화 역시 고유한 맛이 아닌 인스턴트 마트가 대형화되어가고 있습니다. 고유한 장맛이 사라지고 밥상에 김치가 사라지면서 가족 간에 이웃 간에 한국인의 고유한 DNA 情마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와 다른 문화인 일본, 중국, 미국 유럽문화가 더 우수한 문화처럼 생각하고, 매사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우리의 情의 문화를 저급한 것처럼 생각하는 일부 사회 지도층인사들, 지식인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내면에는 따뜻한 情이, 이미 가슴속에, 온 몸에 돌고 있는 피 속에 녹아 있어 쉽게 없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나라의 情문화는 역사적으로도 불교와 유교의 영향이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같은 유 불교 문화권에서 반만년 이상을 함께 해온 중국과 일본에 우리와 같은 情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情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흉내 내기도 쉽지 않은 한국인의 심성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오천년 문화의 향기라 하겠습니다. 이 향기를 맡아 본 외국인들은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을 떠날 수 없다고 이구동성 말하기도 합니다.

어느 일본 유학생이 한국인의 정에 대해 경험한 이야기를 인터넷에서 읽었습니다.
< 한국에 있으면 난 외국인이니까 어느 경우든지 많은 질문을 받는다.
이름은 기본. 그리고 나서 나이, 현재 직업, 고향, 학력으로 질문은 계속 이어져 간다.
내가 우선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한국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묻고싶다 묻고싶다' 라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 같은 뭔가를 분발하게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하지만 기본적으로 한국 사람은 호기심 왕성이다.
지금까지 DVD대여점, 세탁소, 식당, 술집, 슈퍼, 목욕탕, 헬스장, 비행기, 열차 안 등 셀 수 없는 정도의 곳에서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나는 아낌없이 자기 개인 정보를 드러내고 왔다.
일본에서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문화 때문인지 친구끼리도 조심해야 해서 개인적인 질문은 거의 받아 볼 수 없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절대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도 처음 만난 사람한테 나는 속속 발가숭이가 되어가는 것이었다.(-_-)

한국에 온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한가한 일요일 이야기.
나는 집에서 할 일도 없어서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DVD대여점에 가보기로 했다.
'처음이 가는 대여점이다. 뭘 빌릴까~~' 라고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가게에 들어갔다.
가게에 들어가자마자 카운터 쪽에 있던 잡지를 보고 있던 주인 같은 젊은 아줌마가 말을 걸었다.
"어서 오세요? 어? 아가씨 못 본 얼굴이네요 처음 오셨죠?" 라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는 "(친절한 사람 같다 휴~ 다행이네) 네.. 처음이예요" 라고 대답했다.
아줌마는 처음 오면 회원증을 만들어야 한다고 가르쳐 줬다. 아줌마가 준 종이에다가 이름을 적기 시작했다. '고마츠 사야까' 라고. 그러자 아줌마는 내가 쓰는 한 글자 한 글자를 내가 쓰는 것과 동시에 읽기 시작했다.
"고......마......츠.....사......야......까"
"어! 혹시 일본 사람??" 아줌마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물어봤다.
"네 일본에서 왔어요" 나는 일단 대답했다.
근데 아줌마의 당신이 궁금하다, 궁금해 죽겠다는 광선이 정면으로 나와 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카운터에서 한 걸음 뒷걸음질 쳐 버렸다.
근데 아줌마는 더 카운터에서 상반신을 내밀어서 도망 갈 수도 없고 그대로 아줌마의 질문이 시작했다.

아줌마 질문은 기억나는 것만 해도 대충 이랬다.
한국에 왜 왔어요?  (뉴질랜드있다가 한국친구보고 호기심 때문에 왔어요)
한국생활은 어때요?  (아주 좋아요)
어디에서 왔어요?  (일본 나가노현에서 왔어요)
지금 어디서 살아요?  (학교 앞 원룸에 살아요)
누구랑 살아요?  (혼자 살아요)
지금 학생? 아니면 회사원?  (어학당 다녀요)
여기 와서 얼마정도 됐어요?  (이제 막 3달 정도 됐어요)

부모 어느 쪽이 한국인예요?  (아니요. 모두 일본인이에요)
한국은 어디서 배웠어요?  (어학당에서 지금 배우고 있어요)
한국 여행은 어디어디 가 봤어요?  (아직 부산 근처와 서울밖에 못 가봤어요)
한국 음식 좋아해요?  (네..아주 좋아해요)
김치는 먹을 수 있어요?  (매워서 물에 씻어 먹어요)
개고기 먹어 봤어요?  (못 먹어봤어요)
.....등...일본이었다면 반년 걸려도 물어볼 수 없는 질문을 아줌마는 딱 10분도 안 걸리는 스피드로 물어봤다.

아줌마는 상당히 시원하고 만족스러운 얼굴을 짓고 있었는데 나는 그 질문에 답하는 것에 지쳐서 그대로 아무것도 빌리지 않고 조금 구경하는 척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혼자서 근처에 있는 목욕탕에 갔다.
몸을 씻고 사우나에 들어가자 그 대여점의 아줌마가 앉아 있었다. 내가 들어가자마자 바로 아줌마는 또 눈을 동굴하게 해서 "그 때 일본 사람이죠??" 라고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나는 그 때 무서워서 '아닙니다' 라고 말할 뻔했지만 "네 맞아요 안녕하세요" 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아줌마는 "그때는 미안해요..여러가지 물어봐서" 라고 뜻밖인 말을 했다.
나는 좀 안심 되어 "아. 괜찮아요" 라고 나도 아줌마도 한 걸음 가까이 간 느낌이었다.

근데 그것도 어느새 아줌마는 또 '궁금하다' 광선을 나한테 보내기 시작했다.

여기 처음 와 봤어요?  (아니요, 자주 와요)
일본은 목욕탕이 있어요?  (네. 많아요)
피부가 하얗다.. 일본인은 다 하얗나요?
(아니요. 한국여자가 더 하얗던데요?)
화장품 뭘 쓰고 있어요?  (뭐뭐뭐뭐 써요)
때미리 밀어 봤어요?  (네. 우동이 나왔어요)
다이어트하는 젊은사람들 많는데 아가씨도 해요?
(전 보시다시피 실패한 몸이에요-_-)
무슨 다이어트 하고 있어요?  (현재 포기중이에요)
생식이 좋은데 먹어 봤어요?  (아니요)
운동하고 있어요?  (가끔해요)
아가씨도 배가 좀 나왔있는데 이 복근 운동 알아요?
(ㅠ.ㅠ처음 봐요)
(복근 운동을 할 방법을 보여주고 있는 중)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가씨 몸무게 몇키로예요? (헉~!! 드디어 올것이 왔구나)
"으..................그거는 좀......."
아줌마의 호기심은 끝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질문이 없자 아줌마는 물어보지도 않은 자신의 이야기를 다 해주었다.
그렇게 약 30분 이상 알몸으로 사우나에서의 정상회담(?)은 계속 되었다.ㅋㅋㅋ

나는 사우나에서 이렇게 숨이 끊어질 듯 헐떡이며 이야기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질문하는 아줌마도 땀을 뚝뚝 떨어지면서 질문하기 때문에 나도 대답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아줌마는 사우나도 오래했고 궁금증도 풀고 얼마나 시원한 상태일까..
나는 벌써 알몸인데도 불구하고 마음까지 발가숭이가 된 기분으로 좀 묘했다.
한국에 오기 전에 책에서 본 한국의 솔직한 교제는 이러한 일을 말하는 것 같았다.
약간의 저항은 있었지만 나를 알고 싶어 하는  아줌마의 순수한 마음은 매우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정도면 언제든지 나는 발가숭이 될 각오는 돼있다.

근데 한 가지. 몸무게는 물어보지 않았으면 나도 시원하게 사우나를 나갈 수 있었는데...

하지만 다 밝히고 난 후 나는 그 대여점 아줌마와 엄청 친해졌고 아줌마는 내가 갈 때마다 외국에 혼자 나와 있어서 고생한다고 공짜로 DVD를 빌려주기도 하고 음료수를 주기도 하고 같이 짜장면을 시켜먹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였다.
내가 서울로 간다니까 눈물을 글썽이던 그 대여점의 아줌마를 난 잊을 수가 없다.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고 하는 한국인의 교제방식.
여러분은 아시나요? 한국인의 정(情)은 이런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출처: https://sayaka.tistory.com/65 [내 눈으로 본 한국, 한국인....])>

 

이처럼 한국인은 정이 많 사람들입니다. 결혼한 신혼부부는 사랑으로 살지만 늙으신 부부는 정으로 산다고 하였습니다. 미운정도 정입니다. 그래서 정 때문에 산다고 말하는 할머니들이 많습니다.

情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사랑과 어떤 관계인가? 情과 사랑을 비교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情이 많은 사람은 사랑도 많다고 하겠습니다. 사랑 없는 사람이 情이 있을리 만무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일반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사랑은 첫 눈에도 사랑하게 되지만, 情은 시간이 지나가면서 조금씩 쌓이게 됩니다.  사랑은 한 순간에 미움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나 情은 미워도 다시 한 번 情은 남아 사랑을 회복하게 합니다. 사랑이 아무리 크다 해도 돌아서면 남남이지만, 情은 돌아서도 너와 나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김소월의 시인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을 나보기가 역겨워 가시는 님의 길에 뿌리겠다는 마음이 한국인의 심성인 情입니다.
 
어느 할머니가 온갖 정을 준 손자에 대한 섭섭한 마음을 적은 시가 있습니다.
“ 정주고  사랑주고  마음줬는데 / 이제는  그사랑이  변심을하네
씻기고  업어주고  이뻐했는데 / 이제는  할미보다  할배가좋아
할부지  차태워서  드라이브로/ 한바퀴  돌아주고  과자사주니
인사를  조폭처럼  구십각도로/ 주방에  들어오면  씽크대열어
안된다  말하면은  쌀통손넣고/ 그것도  하지마라  냉장고열고
그것도  말려보면  씽크대올라/ 까스불  위험해서  내려놓다가
그것도  안되면은  주방문잠궈/ 그러니  이할미를  좋아하겠나
그래도  지넘위해  그러는 것을/ 과자도  할비주며  나는안주네
정주고  마음주고  사랑주어도/ 모두가  필요없네  필요가없어
차있고  과자사준  할비가최고/ 어떨땐  정말미워  꿀밤을주네 .

우리는 이 할머니의 시에서 손자에 대한 깊은 情을 일을 수 있습니다. 비록 손자가 할아버지를 더 따르는 것을 보고 섭섭한 마음이지만 그 섭섭함을 손자에 대한 깊은 情으로 소화 시키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150년 전 어떻게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오자 한국인들이 복음을 여과 없이 받아들였는가? 세계선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한국의 기독교 선교는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어째서 중국이나 일본에 우리나라 보다 먼저 기독교가 전파되었는데 전도가 안 되고 있는지를 연구하지만 다만 일본은 일본의 신을 믿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중국은 공산주의이기 때문이라고만 말할 뿐입니다.   
그러나 선교학자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오래전에 한국인의 마음에 情이란 유전자DNA를 심어주셨다는 것을 모릅니다. 우리민족은 어쩌면 유대인들과 여러 가지로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는 아비라 하고 어머니를 어미라고 합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 엉덩이를 보면  파란점 몽고반점이 한국인에게도 유대인아이 에게도 몽고반점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여호와 유일신앙처럼, 본래 한국인들도 고유한 하나님(하늘님) 유일신앙을 가졌습니다. 하나님 신앙으로 유대인들에게도 情의 문화가 그들의 생활에 녹아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구약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한국의 情문화위에 기독교의 사랑이 덮어지므로 한국에 기독교가 폭발적으로 전파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반으로 한 기독교는 예수님의 심정 가운데서 샘솟아 나오는 사랑 곧 情의 정화(精華.the Quintessence)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情의 精華의 종교입니다. 情의 情, 가장 순순한  최고 최상 그 이상 표현할 수 없는 情을 情의 精華라 하겠습니다.

 

성경에는 情이란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정을 다른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바로 ‘긍휼’이란 말입니다. 히브리어로 긍휼을 ‘라하밈’이라고 합니다. 그 어근은 ‘불쌍히 여기다(레헴)’로 어머니의 자궁, 모태(레헴)를 상기시켜,  결국 여인을 통해 표현되는 내면적인 부드러운 감정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므로 情이라 번역하여도 잘못된 번역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은 곧 하나님의 情의 다른 표현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렘31:20에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자코르 애즈케렌누 생각하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메네:내장. 자궁, 창자 태중 마음) 들끓으니(하마:고함치다.요동화다 흉용하다),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라헴)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자식의 잘못을 책망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자식에게 매를 들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 창자가 틀어지는 듯 아픔을 느낀다면 이는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지극한 情을 말해주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情의 精華입니다.
시편 86:15,16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라훔)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내게로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

145:8.9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라훔)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하나님은 정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多情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갖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목이 곧은 백성이라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다하더라도,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면 多情하시어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인자하심이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多情하심은 하나님의 情의 精華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시고 인자가 많으시며 은혜가 풍성하신 다함이 없는 사랑을 하나님의 情의 精華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이 죄와 사망과 사탄에 붙들려 지옥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보시고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심으로 하나님의 情의 精華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게 하심이 바로 하나님의 情의 精華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그 모든 베풀어 주신 긍휼(라훔)하신 언행심사는 情의 精華이였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바로 情의 精華로서 복음이었습니다.
눅 6: 27-31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들으면서 그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성경의 해석을 서구인들의 사고방식으로 논리적 이성적 로고스적으로 분석하고 판단하여 왔기 때문에 설명은 하되 실행은 유보입니다. 한국인들은 이 말씀을 예수님의 정의 복음으로 듣기 때문 깨닫고 실천하게 됩니다. 왜? 그러면 한국교회가 실천하지 못하는가? 바로 서구 신학의 주석에 따라가는 성경해석을 하여 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情의 복음은 한국인의 情(굳이 비스름하게 따지자면 파토스+에토스)으로 이해하고 따라야 합니다. 다만 예수님의 복음은 情의 精華이기에 우리는 열심히 예수님의 情을 따라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모든 전도 활동은 情의 精華이였습니다.

마14: 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스프랑크니조마이)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눅 7:13  나인성 과부의 외 아들의 장례행렬을 보시고,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스프랑크니조마이)울지 말라 하시고” 죽은 아들을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마9:35-36 “ 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스프랑크니조마이)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위에서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셨다’ 이 말의 헬라어는 ‘스프랑크니조마이’라는 동사로 ‘스플랑크논’이라는 명사에서 파생된 말인데, 이 말은 창자, 내장. 심장을 의미합니다. 우리말로 ‘애간장이 타다’란 말로, 예수님이 병들고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보시고 마치 심장 멎은 듯, 창자가 끊어지듯 함께 아프고 같이 고통을 겪으셨음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애간장을 태우시면서 병자들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심정은 다만 연민이나 동정심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이어 받은 情의 精華라 하겠습니다.

히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이 예수님의 눈물이야말로 예수님의 情의 精華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예수님의 情의 精華 기도 이였습니다
십자가를 지시던 그 전날 새벽에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 에서 엉엉 우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 아니면 인류의 죄로부터 마귀와 죽음으로 부터 구원해 낼 다른 방도가 없음을 너무 잘 아시기 때문에, 당신에게 닥칠 그 무서운 형벌임에도 불구하고, 그래야만 구원해 낼 인간들이 당하고 있는 질고가 너무 불쌍하고 마음이 아파 “그러나(오직)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플랜 우ㅎ크 호스 애고 델로 알 호스 쉬. 마26:39)”라고 기도 하시었던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기도는 바로 情의 精華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시고 그들의 고통을 해결해 주신 情이 넘치신 예수님은 마침내 온 인류의 죄를 해결하시고 마귀에게 사로잡힌 영혼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었습니다. 이 십자가야 말로 예수님의 情의 精華를 보이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情의 精華를 보여주신 일입니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의 情의 精華이란 증거요, 얼마나 세상을 사랑하신가를 알려주신 예수님의 情의 精華라는 표징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보여주는 情의 精華는 곧 예수님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한복음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 15: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한마디로 多情한 목자이셨습니다.
찬송가 567장은  메리 던카(Mary Lundie Duncan 1814-1840)여사가작사한 찬송으로“다정하신 목자 예수 어린양 돌보사 캄캄한 밤 지낼 동안 나를 품어 주소서.”
함께 1절만 찬송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사명은 바로 예수님의 情의 精華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롬 5:8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바울은 상당히 이지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율법고정주의자로 기독교인들이 율법에 어긋났다고 생각하고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바울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情의 精華에 그의 심령이 녹아져 그도 情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의 복음을 이성적인 논리적인 이념적 신앙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바울을 적대시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분쟁이 일어날 때에 그는 고전 13장 2절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아가펜 데 메 에코, 우덴 에이미)”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多情한 사람 이였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의 사랑 곧 십자가의 사랑 이였습니다. 사랑하라 다시 말하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情의 精華로서 복음을 믿고 따르는 일입니다. 한마디로 기독교인은 情을 주고 나누는 사람들입니다. 그 情는 무엇입니까?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예수그리스도의 情의 精華로서 사랑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기억하십니까? 多情도 십자가련가? 이조년의 시조를 바꿔서 제목으로 정했습니다. 이조년은 多情도 병이련가? 하였는데,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주신 예수님의 情의 精華를 널리 전파하는 多情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기독교인의 생활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情의 精華를 실천하기 위해 多情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 군인들 특히 훈련병들이 제일 좋아하는 과자가 무엇입니까? 그 과자의 이름이 무엇이지요? 지금 한 개씩 나누어 주겠습니다. 그리고 예배 후에 한 곽씩 선물하겠습니다.
바로 초코파이입니다. 회사이름은 광고가 되므로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 초코파이 이름이 情입니다. 자 뜯어 한입만 먹어보십시오. 단 것을 싫어하는 분도 있지만, 조금만 맛을 보세요. 음, 달콤하죠? 인생은 쓰디쓴 게 아니라 달콤하게 살아야 합니다. 요셉은 처음 쓴 인생을 살았지만 그는 하나님의 情의 精華를 믿어 단 인생을 산사람입니다. 여기 하얀 속이 마시멜로입니다.  관목 식물인 마시멜로(Althaea officinalis)의 뿌리즙으로 설탕을 넣어 만드는데 이 뿌리즙은 호흡기 질환을 완화하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노래를 불러보겠습니다.
“초코파이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장미꽃 넝쿨 우거진 그런 집을 지어요.
메아리 소리 해맑은 오솔길을 따라/ 산새들 노래 즐거운 옹달샘 터에
초코파이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다정한 사랑 엮어갈 그런 집을 지어요.“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이웃과 더불어 함께하는 情은 우리의 인생을 뷰티플 라이프, 달콤한 인생(La Dolce Vita)으로 행복하고 즐거운 집으로, 세상으로 만들어 줍니다. 다정은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다정한 사랑 엮어갈 그런 인생 살아요.”

그러므로 코로나19 바이러스 시대에 이 답답하고 삭막한 세상에서 이웃 간에 가정에서 가족 간에, 성도여러분, 우리는 情을 회복해야 합니다. 情주고 나누는 多情(스플랑크니조마이)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情주고 마음 주고 하였다가 배신당하고 미워하게 되는 그런 情이 아닙니다.  자기들끼리 만의 情이고 자기편을 만드는 情은 情이 아닙니다. 그런 정은 흉악할 정猙(猙獰 개털)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의 情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情의 精華 사랑을 증거하는 그런 情입니다.
고전 16:14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판타 휘몬 엔 아가페 기네스도,)”
“너희는 모든 일을 십자가 사랑의 情의 精華로 행하라"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든 일을 정으로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 라온코이노니아는 多情한 사람들의 신앙공동체입니다. 多情도 십자가련가? 함께 십자가의 사랑의 정으로 날마다 일마다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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