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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8년 8월 26일 주일아침예배 마 7: 13-14 其門窄 其路挾

 

1950년대 말, 60년대 초 남일해라는 가수가 인기를 끌고 있었습니다. “솔솔솔 오솔길에 빨간구두 아가씨 똑똑똑 구두소리 어딜 가시나 한번쯤 뒤돌아 볼만도 한데 발걸음만 하나둘 세며 가는지 빨간구두 아가씨 혼자서가네” 이 노래가 유행하던 때입니다. 이때에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도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말자 미련일랑 두지말자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없이 흘러서간다”1966년 김석야(金石野.김형근.1929.10.16∼2000.10.1)작사 김호길작곡 최희준의 노래입니다. 최희준이란 서울대 법대출신 가수가 나타나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최희준은 이미 <진고개 신사> <맨발의 청춘>을 불러 큰 인기를 얻고 있었으나 최희준의 대표곡은 하숙생이라고 하겠습니다. 영원한 하숙생 최희준씨가 지난 8월24일 구름이 흘러가듯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화여대 총장인 고 김활란 박사가 1970년 2월10일 임종 때 이 노래를 불러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삶의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되 애착이나 미련을 두지 말라”고 말하면서 <하숙생>을 나지막하게 부르다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벧전2:11에 나그네와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인생은 나그네라는 최희준의 노래는 다분히 기독교적인 가사입니다. 그래서 이 노래가 미국의 어느 교회에서는 영어로 번역하여 찬송가로 불려 졌습니다.

 

A Student Boarder - Choi, Hee-joon

 

Life is a journey. Where did it come from and Where does it go?

Like clouds flow, On my roaming way.

Never leave love, Never leave lingering attachment.

Life is a journey.Like clouds flow, Aimlessly, it flows.

Like rivers flow,Silently, it flows.

 

나그네 인생길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가는 이 길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궁금하지 않는가? 한때 하숙생 노래를 흥얼거리며 친구들과 밤새 인생을 논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며 사모께서 하숙생 노래를 올갠으로 잠시 들려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에는 8개의 성문이 있었습니다. 이 성문들은 크고 넓어 출입이 편안합니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낮에만 열려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밤에 급한 일이나 피치 못할 일로 출입을 해야 할 사람들을 위해 비상문 하나를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것이 소위 “바늘 문”이라고 하는 문입니다.

 

이 문은 다른 성문들과 비교해 볼 때 바늘 귀처럼 작다고 해서 바늘 문이라 불렸습니다. 실제로 이 문은 말을 타거나 짐을 지고는 통과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겨우 고개를 숙이고서야 출입할 수 있을 정도로 좁은 문입니다. 그래서 이 문은 드나들기가 힘이 들고 고생스럽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 좁은 문을 생각하시면서 인생을 올바르게 살려면 어느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은가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크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지 말고 작고 비좁은 이 바늘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쉽고 편한 길을 가지 말고 어렵고 힘든 길을 가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마태복음 5장 6장 7장으로 이어진 산상설교의 결론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를 다 마치신 후에 “들은 말씀대로 살 것인가? 아니면 그냥 듣는 것으로 끝내고 말 것인가?” 선택하라고 제자들에게 요구하셨습니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서 넓은 길을 걸어갈 것이냐? 아니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좁은 길을 걸어갈 것이냐?”의 선택하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세상 논리대로 사는 것은 넓은 문 넓은 길을 선택하는 것이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요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라, 그것은 좁은 문 좁은 길을 선택하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생명을 얻을 수도 있고, 멸망에 이를 수도 있다고 경고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당신의 설교를 들은 제자들이 좁은 문, 좁은 길을 선택함으로 생명을 얻게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가롯 유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 이 예수님 말씀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가기로 결단하여 모두 다 생명을 얻는 복을 누렸고, 또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넓은 문과 넓은 길, 좁은 문과 좁은 길은 각각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삶의 태도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세상에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 넓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는 각기 다른 결과가 기다리고 있는데, 넓은 길 끝에는 멸망이, 좁은 길 끝에는 생명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십니다. 어째서 좁은 문에 좁은 길로 가야만 생명을 얻게 되는가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양의 문이라고도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문이며 생명의 길인 것을 말씀하시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좁은 길을 걸어가는 일임을 말씀하시었습니다. 반대로 예수를 구주로 인정하지 않는 모든 세상의 물질과 풍속만을 따라간다면 이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 넓은 길을 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냐? 사람들은 모두 세상에 귀하게 태어났지만, 헛되게 살다가 죽어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넓은 문으로 들어가고 넓은 길을 찾아가다가 취생몽사(醉生夢死) 마치 술에 취해 살아가듯 인생을 비틀거리며 헛되고 헛된 인생을 살면서 망해가고들 있습니다.

 

사람들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러면 뭐가 생각나요? 대체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생각합니다. 좁은 문은 고난의 길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좁은 문은 답답하고 좁은 길은 험하다고 겁을 먹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사탄에게 속아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좁은 문이 고난의 길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좁은 길은 생명의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좁은 문은 생명의 문이고 넓은 문은 멸망의 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오해할 까봐서 예수님이 자세하게 설명하셨습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넓어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마귀에게 속아 가지고 좁은 문은 고난의 문이래. 좁은 문은 힘들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좁은 문은 신비가 있습니다. 좁은 문은 계속해서 좁은 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종종 역설적입니다. 10년전에 베들레헴에 간적이 있습니다. 베들레헴에 가면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자리에 아주 큰 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로 들어가는 문이 아주 작은 허리를 굽혀야 들어 갈만한 좁은 문이었습니다. 왕이던 대통령이던 그곳을 들어가려면 허리를 굽혀야 합니다. 그런데 그 좁은 문을 들어가면 거기에는 넓은 마당이 있습니다. 이처럼 좁은 문은 처음에만 좁은 문이에요. 좁은 문 안으로 들어가면 그곳에 광장이 나옵니다. 좁은 길을 가다보면 그 길이 좁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우리 지구가 우주 안에서는 아주 작은 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작은 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앙인들에게는 좁은 길이 넓은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처음신학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신학은 성경만 공부하는 줄 압니다. 그러나 그 성경 안에 세상의 모든 학문이 다 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놀라게 됩니다. 저는 그래서 국문학 역사학 철학 교육학 심리학 심지어 의대에 가서 정신분석학도 공부를 하였습니다. 신학의 문은 좁은 것 같지만 문안에 들어서니 엄청나게 큰 학문의 광장을 보게되었습니다.

믿음의 길은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우주보다 넓은 하나님의 나라가 펼쳐져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세상적인 관점으로 보면 좁은 문이요 좁은 길이지만, 아니요 그 좁은 문안에 들어서면 좁게 느껴지지 아니하고, 그 길을 가면서 우리는 좁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세상은 그곳이 좁은 감방 안이라도 세상보다 넓은 방이요, 좁은 골목길을 걷는다 해도 5차선 고속도로보다 넓은 길이 됩니다.

 

스탠리 존스 목사님이라는 분이 인도의 어느 오지에서 선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울창한 밀림 지역에 있는 마을로 들어가서 전도하고 돌아오다 그만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길을 찾아 아무리 헤매어도 길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배는 고프고 지칠 대로 지쳐 더 이상 걷기도 힘든 상황이 되었습니다. 사나운 짐승이 곧 달려들 것 같은 무서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숲 속에서 헤매다가 나무를 베고 있고 있는 원주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기뻐, 존스 선교사는 그에게 달려가며 소리쳤습니다. “길을 잃었습니다. 나에게 길을 좀 가르쳐 주십시오.” 나무를 베던 그 원주민은 길을 가르쳐 줄 생각은 하지 않고 “거기 앉아 좀 기다리시오.” 라도 말하고는 하던 일을 계속했습니다.

존스 선교사는 조급한 마음으로 안절부절하며, 그의 일이 끝날 때까지 무려 8시간을 앉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그제야 그 원주민은 일을 끝내고 존스 선교사에게 “나를 따라오시오” 라고 말하면서 성큼 성큼 앞서 가기 시작했습니다. 주위는 벌써 어둠에 잠겨 캄캄해 졌습니다. 길이라고 짐작할 만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선교사는 놓칠 새라 틈을 주지 않고 그를 뒤따랐습니다.

선교사님은 원주민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 때 원주민이 선교사에게 말했습니다. “이곳에는 길이 따로 없습니다. 내가 발 딛는 곳이 곧 길입니다.” 대답하고는 쉬지 않고 갔습니다. 마침내 선교사는 원주민을 따라 마을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길을 잃고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선교사는, 그제야 왜 그 원주민이 길을 가르쳐 주지 않고 따라 오라 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욱 실감나게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구원의 문은 좁은 문입니다. 그 문은 십자가의 문으로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구부리고 무릎을 굻어야 겨우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쉽게 교회 나오지 못합니다. 여기 세상에 넓은 문 놔두고 구태여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구원의 문을 한 번 들어가면 생각이 바뀝니다. 인생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따르는 믿음 생활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복된 길임을 알게 됩니다. 좁은 문을 들어서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구원 받는 것입니다. 평생 짊어지고 살 무거운 죄 짐을 내려놓으니 얼마나 시원합니까? 고개를 들을 수 있습니다. 허리를 펼수 있습니다. 그 무엇에게도 무릎을 꿇어가며 살지 않습니다. 의롭다하심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런데 좁은 문에 들어서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좁은 길을 걸어가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처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말씀이 가르치는 대로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산상 보훈 말씀만 두고 생각한다면, 산상보훈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을 들었으면 순종하고 실천하는 길이 좁은 길입니다. 쉬운 길은 아니지만 뒤돌아서면 안 됩니다. 처음부터 기능 공이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열심히 실습하므로 마침내 기능공이 됩니다. 기능공이 될 때까지는 좁은 길을 가야 합니다. 지금 아시아 경기대회를 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선수들이 열심히 하여 금메달을 많이 획득하였습니다. 김서영이란 수영선수가 있습니다. 수영종목은 아시아에서 우리선수들이 금메달 따기가 매우 어려운 종목입니다. 그런데 김서영은 이번 200미터 수영에서 중국선수보다 0.33초 빠른 금메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김서영 선수가 수영이란 어려운 좁은 문으로 들어와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연습하였겠습니까? 밤낮없이 훈련이란 좁은 길을 걸었기 때문에 오늘에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되고 온 국민들로부터 잘했다고 박수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실천한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아 축복을 받는 인생을 살게 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좁은 문과 좁은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지혜롭고 현명한 선택을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이 가는 넓은 문과 넓은 길을 선택하는 게 겉으로 보면 잘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 길의 결국은 멸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넓은 문, 넓은 길을 선택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에게는 좁고 협착하여 찾는 사람도 별로 없는 좁은 문과 좁은 길을 선택하는 것이 어리석게 보일 것입니다. 주일마다 교회로 가는 아내를 보면서 어리석다고 보는 남편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아내를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남편과 가족들에게 은혜와 축복을 가져다 주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좁은 문, 좁은 길을 선택하는 것이 나와 가족들 자자손손이 복 받는 정말로 지혜롭고 현명한 일입니다. 교회에 나와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는 부모님과 집안에서 TV를 보거나 낚시하러 가는 부모와 비교하면 누가 더 자녀들을 사랑하는 부모입니까? 교회에 나와 부모님을 위해 가정을 위해 기도하는 아들과 산으로 들로 놀러가는 아들과 비교하면 누가 더 인생을 올바르게 사는 아들입니까? 좁은 문 좁은 길을 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가장 보람 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육적인 본능은 힘든 쪽 보다는 힘이 안 드는 편한 쪽을 선택하려고 합니다. 내가 손해 보더라도 옳은 길에 서겠다고 선택하기 보다는 가능한 내가 손해 안 보는 쪽으로 선택하려고 합니다. 땀 흘려 교회가기 보다는 시원한 커피숍에 앉아 냉커피 마시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기준으로 선택한다면 자신의 인생에 과연 행복한 결과를 가져 올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에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온 가족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일과 방안에 앉아 TV오락프로를 본다거나 세상 사람들과 세상이야기 나누며 사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지혜로운 일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옛날 어떤 마을에 마늘도둑이 한 사람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마늘을 훔치다가 그만 그 집 주인에게 발각이 되었습니다. 그는 관가로 끌려왔습니다. 고을 원님은 안 그래도 그 즈음에 집집마다 마늘도둑이 들어서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마늘도둑질에 대한 뿌리를 완전히 뽑아야 되겠다고 생각하고서 아주 엄한 벌을 내리기로 작정했습니다.

원님은 마늘도둑에게 세 가지 벌을 제시하면서 그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하라고 일렀습니다. 첫 번째 벌은 마늘을 훔쳤으니까, 그 원대로 마늘 100개를 날로 먹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벌은 곤장을 100대 맞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 벌은 벌금으로 100냥을 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늘도둑은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선 곤장 100대를 맞으려고 하니까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벌금으로 100 냥을 내려고 하니까 너무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마늘도둑은 벌로 마늘 100개를 먹겠다고 아뢰었습니다. 처음에 한두 개 먹을 때는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10개쯤 먹으니까 입안이 얼얼하고 속도 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이왕 먹기 시작한 것이니까 끝까지 먹어야 되겠다고 작정했습니다. 그는 마늘을 20개나 먹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온 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습니다. 눈알도 빠져나오는 듯 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먹을 재간이 없었습니다.

그는 원님에게 마늘을 먹는 대신에 차라리 곤장을 맞게 해달라고 사정했습니다. 그의 사정이 받아들여져서, 그는 곤장을 맞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10대를 맞았더니 엉덩이가 터지고 살갗에서 피가 배어나오기 시작했습니다. 15대를 맞았더니 정신이 까물까물해지기 시작했습니다. 20대를 맞았을 때 그는 완전히 정신을 잃고서 까무러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한참 뒤에 정신을 차렸습니다. 더 이상 맞다간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금 원님에게 곤장을 맞는 대신에 벌금을 내게 해달라고 사정을 했습니다. 결국 그는 마늘을 20개나 먹고, 곤장을 20대나 맞고, 그리고 나서 벌금으로 100냥을 내고 난 후에 간신히 풀려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처음부터 선택을 바르게 했어야 했습니다. 잘못 선택하는 바람에 온갖 곤욕을 다 치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처럼, 선택의 결과가 금방 나타나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몇 년, 몇 십 년 뒤에 그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잘못된 선택의 심각성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넓은 문이라 들어가고 넓은 길이라 가다가 온갖 인생의 역경을 수없이 넘어가다 인생의 낭떨어지 앞에서 아 내가 헛 살았구나 깨닫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국의 역사 속에는 서부 개척 시대라는 게 있습니다. 서부에 가면 금을 캘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사람들은 너도 나도 서부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에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서부로 가는 길목에 ‘죽음의 계곡’이라고 불리는 계곡이 있었다고 합니다. 용감한 개척자들과 탐험가들이 서부로 가기 위해서 이 계곡으로 들어갔는데, 이상하게도 이 계곡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한 사람도 돌아오지를 못했습니다.

한 젊은이가 그 이유를 알아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다 그를 말렸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는 굽히지 않았고, 계곡을 향하여 말을 달렸습니다. 죽음의 계곡에 도달했을 때에 굽이지는 곳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한쪽 길은 사람이 지나기에 넉넉하고 편한 길이었고, 다른 쪽 길은 가시넝쿨이 무성한 험한 길이었습니다.

조심성 있었던 젊은이는 무턱대고 편한 길로 말을 몰지 않고, 서서 넓은 길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 넓은 길이 넓어진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가니 점점 넓어져다는 것을 발견 하였습니다. 그런데 좁은 길은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아니하고 들 진승들이 지나다니는 길이었습니다. 그래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널은 길을 갔던 사람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지만 이 좁은 길을 다니던 들짐승들은 자유로이 왕래를 하였다면 이 좁을 길이 생명의 길이 아니겠는가? 그 젊은이는 넓고 편한 길을 버리고, 칼을 꺼내어 좁은 길을 막고 있는 가시넝쿨을 헤치고 길을 만들어서 가다보니 그곳에 넓은 평야가 보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젊은이는 미국 캘리포니아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후에 어째서 사람들은 그 넓운 길을 가다 돌아오지 못하였는가를 조사해 보니 그 넓은 길에는 엄청난 모래 웅덩이가 있어 그것으로 갔던 사람들이 다 모래 속으로 빨려 들어가 죽었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인생에 두 길이 있습니다. 넓은 문, 넓은 길 인생이 있고 좁은 문, 좁은 길 인생이 있습니다. 인류 역사이래 수많은 사람들이 넓은 문으로 들어가고 넓은 길로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인간역사를 연구해 보니, 그 넓은 문으로 들어간 사람들 치고 망하지 않은 사람들이 없습니다. 넓은 길로 가던 사람치고 죄 가운데 멸망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그 넓은 문을 들어가고 넓은 길로 갔다가 다 망했습니다. 민족이건 나라던 단체이던 개인이던 다 망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과 롯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입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롯을 아브라함은 아들처럼 키워주었습니다. 롯은 아브라함과 함께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왔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점차로 재산이 늘어 아브라함도 롯도 가축이 많아지자, 풀밭으로 두고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게 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롯에게 제안을 합니다. “피붙이끼리 다투는 모습이 보기 좋지 않으니, 현실적인 선택을 하자, 이제 서로 헤어져 더 넓은 땅으로 나가자. 네가 먼저 선택을 해라. 네가 좌측을 선택하면, 나는 우측을 선택하고, 네가 우편을 선택하면, 나는 좌편을 선택하겠다.” 그랬더니 롯은 말로라도 양보함이 없이, 얼른 초장이 풍부한 소돔과 고모라가 있는 요단 들 쪽을 선택합니다.

롯의 선택은 물질 중심의 선택이었습니다. 롯이 선택한 요단들에 있는 소돔과 고모라는 당대 최고의 환락의 도시였습니다. 롯은 도덕적이고 영적인 차원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결정을 내렸던 것입니다. 그는 점차로 소돔 성 쪽으로 옮겨가다가 결국 소돔 성에 들어가 자리 잡고 살게 됩니다. 롯은 소돔에서 큰 부를 축적하고, 상당한 지위도 얻습니다. 거기서 두 딸을 출가시키려고 사위감도 구해 놓았습니다. 롯은 성공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너무도 컸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두 도시를 심판하여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롯과 그의 가족을 구원해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겨우 몸만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며 평생 모았던 물질은 소돔과 고모라와 함께 유황불에 다 불 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는 여호와의 사자의 명을 어기고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는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는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모든 일을 믿음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에 조카에게 양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조카 롯이 그를 떠나갔을 때에 그의 마음은 매우 허전했고, 서운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위로해 주셨습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온전히 성취되었고, 아브라함은 영 육 간에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언제나 아브라함처럼 물질 중심이 아니라 신앙 중심으로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최희준씨의 노랫말처럼 인생은 나그네 길입니다. 이 나그네 인생길에서 우리는 매일 매 순간의 선택과 결단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좁은 문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좁은 길을 선택하여 가야 합니다. 세상의 안일함과 편한 문보다는 진실하고 정의로운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물질 중심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어떻게 사는 것이 내 영혼에 도움이 될 것인가? 신앙 중심으로 사는 좁은 길을 선택하여야 합니다.

좁은 문, 좁은 길은 어렵기는 하지만, 불가능한 길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 길을 가기로 결심하고 첫 발자국만 떼면, 그 다음부터는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지혜와 권능을 부족함 없이 베풀어 주셔서 능히 좁은 문을 넓은 문 들어가듯 들어가도록 하시며, 우리가 가는 좁은 길이 괴로운 길 같지만, 성령님이 함께 하심으로 기쁨과 평안이 넘치며, 감격과 감사가 넘치는 천국길가도록 인도하여 주실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박근혜, 최순실, 김기춘, 우병우, 이런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처음부터 넒은 문으로 들어가 넓은 길을 가려한 잘못된 선택을 하였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이런 잘못된 선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들이 택한 그 문밖에 무엇이 있을까요? 그들이 가는 그 넓은 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왜 예수를 믿지 않는 것입니까? 넓은 문으로 들어가려 하기 때문입니다. 왜 교회를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까? 넓은 길을 찾아가려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교회에 장관이 출석하니 갑자기 교인이 100명이 늘었다고 합니다. 그 100명의 사람들은 교회에 들어오는 문을 자신의 출세를 위한 넓은 문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문은 좁은 문입니다, 교회로 오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축복인생은 모두 좁은 문을 선택한 사람들이었고, 지난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수많은 축복받은 사람들이 믿음의 좁은 길을 선택하였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믿고 구원의 좁은 문은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구원의 좁은 문을 통과했다면, 이제 우리는 날마다 말씀에 순종하고 실천하는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좁은 길로 보이지만 ,이미 좁을 길을 가는 우리들은 예수님과 함께 가는 이 길이야말로 이 길이 가장 안전한 길이요, 이 길이 평강의 길이요, 이 길은 영생의 길을 가고 있다고 분명히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라온코이노니아로 들어오는 문은 어느 큰 교회의 문보다 아주 작은 문입니다. 라온코이노니아의 우리는 비록 작지만, 여기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우주보다 넓은 천국시민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좁은 문을 넓은 문처럼 들어오고, 교회로 오는 좁은 길을 넓은 천국길 가는 것처럼 믿음 생활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어 평가의 복을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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