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0일 주일아침 예배 빌 4: 10-13 상대적 박탈감을 극복하는 믿음
감각 박탈(sensory deprivation)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지속적으로 귀로 눈으로 마음으로 긍정적인 자극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부정적인 자극이거나 비 정상적인 자극을 계속 받게 된다면 사람의 감각이 마비되고 박탈현상이 일어납니다. 아름다운 꽃을 보고 참 아름답다라고 느낀다면 정상적인 감각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전혀 아름답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감각이 박탈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위험한 장소에 가서 위험을 느낀 다면 정상적인 감각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위험을 느끼지 못한다면 감각이 박탈된 사람입니다. 상대적 박탈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상대적인 박탈감을 가지는 것을 부정적으로 나쁘게 말합니다. 지난 한끼줍쇼라는 TV 프로그램에 부산해운데 77층 아파트에 사는 젊은 부부의 집을 강호동씨가 방문을 하였습니다. 아파트 실내도 훌륭하지만 아파트에서 내려다보이는 밤경치가 아마 세계 어느나라 보다도 아름다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흔히 밤 야경을 보려 홍콩을 여행가는 사람이 있는데 홍콩의 야경은 해운데 77층에서 내려다보는 경치에 조족지혈이라 델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야 이곳이 살고 있는 젊은이는 얼마나 돈이 많아 이런 아파트에서 사나 그런데 나는 평생 무얼하고 살았기에 내 모양이 처량하구나 이런 박탈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럼 이런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것이 잘못된 생각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상대적 박탈감은 사람이 가지는 정상적인 감정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박탈감을 느끼지 말고 더 부지런히 노력해서 너도 그런 잘사는 사람이 되라 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면 더 부지런히 노력하면 남부럽지 않게 잘 살 수 있습니까?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부지런히 일합니다. 꼭두새벽에 길거리에 나가 폐지와 공병을 줍는 노인들이 있습니다. 열심히 길거리를 빗자루로 쓰는 청소하는 아저씨들을 봅니다. 그들은 아무리 부지런히 일해도 가난을 면하지 못합니다. 요즈음 TV 드라마에 회사 설립한 창업자의 아들이 회장이 되어 호화로운 사무실에서 하는 일도 없이 빈들대며 연애할 생각이나 하며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많은 젊은이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것입니다. 요즈음은 개천에서 용 나는 법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부모 잘 둔 사람들 밑에서 욕먹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대한항공 자녀들의 갑질 논란을 보며 상대적 박탈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상대적 박탈감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요 오히려 없다면 이는 감각이 박탈된 사람입니다.
오늘이 서울대 학생 박종철 물고문으로 죽인 사건에서 비롯된 6월 민주 항쟁(六月民主抗爭) 기념일입니다. 1987년 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저도 그 날 부산에서 수십 명의 목사님들과 함께 그 운동대열에서 주도적으로 이끌었습니다. 부산 서면 일대에서 시위를 하는데 경찰 들이 포위를 하여 잡아가려고 오고 있어 인근에 있는 부전교회라는 곳으로 밀려가게 되었습니다. 부전교회 철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 목사님에게 연락을 하여 그 문을 열어달라고 요청을 하였습니다. 지금 문 앞에는 체루탄 가스를 맞아 눈을 뜨지 못하고 눈물 콧물을 줄줄 흐르는 수십명의 목사님들이 길바닥에 쭈구리고 있는데 그 교회 목사님이 나와서 목사님들을 죽 흝어 보더니 왜 목사님들이 쓸데없는 짓들을 합니까? 그리고 한다는 말이 장로님들과 당회를 해서 허락이 나야 문을 열수 있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기가차서 말도 안 나왔습니다. 곧 경찰차가 달려와 모조리 경찰서로 연행 당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감각이 박탈되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같은 생각이 아닌 다른 뜻을 가질 수는 있지만 목사가 목사님들을 문전박대 하며 쫒아내다니 감각이 박탈된 적이 있습니다.
제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하던 때입니다. 각 교단의 총회장들과 다른 우리나라의 내노라하는 큰 교회 목사님들과 연합으로 예배를 자주 드리었습니다. 어떤 때는 국회의원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제가 설교를 담당하였습니다. 그 국회의 예배 장소에 가려면 고속버스를 타고 올라가 전철로 가라타고 한 20분 걸어가야 합니다. 어깨에 가방을 매고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옆으로 총회장이나 큰 교회 목사님들이 기사가 운전하는 고급승용차를 타고 씽씽 지나쳐 갑니다. 좁은 길에서 운저사가 빵빵 길을 비키라고 하면 잠시 옆으로 비켜서기도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유리창을 내리고 타시죠? 하며 말하기도 합니다. 그럼 저는 걷는 것이 좋습니다. 하고 사양을 합니다. 그러면 씽 하고 앞으로 달려갑니다. 저는 그런 목사님들을 볼 때 상대적 박탈감을 가집니다. 그러나 그것뿐입니다. 아무리 당신들이 잘나봤자 내가 회장이고 오늘 당신들은 나의 설교를 들으러 온다라고 속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는 아무 생각도 안합니다. 그들은 그들이고 나는 나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 방법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하나님의 종으로 일한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문제는 상대적 박탈감을 가진 사람이 스스로를 실망하고 자신이 사회적으로 낙오되었다고 생각하며 虛脫感 喪失感 疏外感 乖離感 違和感 自愧感에 빠져 허우적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다가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자신의 인생을 비관하다가 극단의 처신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반대로 자신에게 박탈감을 주는 사람들이나 집단을 행해 분노 미움 시기 질투 보복심 이런 부정적이 감정으로 최근에 미국에서 일어나는 총기 난사사건이나 사회적 테러 같은 스스로 自滅的인 행동을 보이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 사람들은 부정적인 상대적 박탈감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까? 그 원인의 하나가 불평등이란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가 가난한 것은 불평등한 사회 구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가난한 것이 불평등한 사회구조 때문 만일까요? 행복은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냐 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빈곤문제는 사회적으로 해결할 문제 이지만 상대적 박탈감은 자기 자신이 감당해야할 문제입니다.
버트런드 러셀이 “가난뱅이는 백만장자를 질투하지 않는다. 더 잘 나가는 다른 가난뱅이를 질투한다.”란 말을 하였습니다. 많이 버는 사람이 더 많이 버는 사람을 행해 상대적 박탈감을 가집니다. 한 달에 백여만 원 가지고 살지만 수천만 원 씩 쓰고 사는 사람보다 더 불행하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록 12년 된 중고차 서울시내에는 들어갈 수 없는 차를 타고 다니지만 결코 억대의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가수 배우들을 향해 상대적 박탈감을 가지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의 집에 긴 각기목(角木)으로 만든 나무 사닥다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별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보니 오래된 것 같고 사용하기에 부러질 것 같아 위험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말하듯이 세상의 부귀공명이란 언젠가는 꺽여지기 마련인 나무 사다리 입니다. 도살장으로 소를 실어 나르는 트럭을 보았습니다. 그 차에는 소들이 가득 타 있습니다. 그 소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아무리 부귀공명으로 갑질 하면서 산다하더라도 그들은 지금 어디로 갑니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스스로 자멸하는 자신들입니다. 왜 자멸해 가는 그들을 부러워하며 상대적 박탈감을 가져야 합니까? 전혀 부러워 할 것 아닙니다.
그러나 비록 상대적 박탈감에 부정적인 관심이 없다 해도 이 상대적 박탈감은 결코 나에게 좋은 감정이 아니기 때문에 벗어나야 합니다. 벗어나기 위해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미루는 버릇(procrastination)을 고치는 것입니다 그러닌까 미루는 버릇이 없는 사람은 결코 상대적 박탈감을 갖지 않습니다. 옛 말에 뛰면 서있고 싶고, 서있으면 앉아있고 싶고, 앉아있으면 눕고 싶고, 누워있으면 자고 싶다는 속담처럼 사람은 본성이 편한 것을 추구합니다. 미루는 버릇은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감정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으로 상대적 박탈감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남과 비교해서 더 가지고 싶고 높아지고 싶고 더 잘살고 싶다면 상대적 박탈감을 가지지 말고 할 일을 뒤로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시중에 ‘느림의 미학’이라 해서 좀 천천히 느리게 살자라는 말이 유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게으르게 살자라는 말이거나 꾸물거리며 살자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프랑스의 피에르 상소(Pierre Sansot, 1928-2005) 교수가 썼다는 『느리게 사는 것의 의미』라는 책에 그의 느림의 철학을 읽을 수 있는데 어쩌면 저와 생각이 하나 빼고 꼭 같다고 하겠는데, 1. 날마다 산책을 하라. 2 남의 말을 경청하라. 3, 심심한 걸 즐겨라. 4. 계속 인생을 꿈을 꾸어라. 5. 묵묵히 기다려라. 6. 고향의 추억을 떠올려라. 7. 틈틈이 글을 쓰라. 8. 와인을 음미하며 마셔라. 9. 모데라토 칸타빌레. 보통속도로 노래하라.( Beethoven - Piano Sonata No.31 in A♭ major, Op.110 1st mov. Moderato cantabile molto espressivo (piano) Cyprien Katsaris -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31번 내림가장조, 1악장 모데라토 칸타빌레 몰토 에스프레시보, (피아노)시프리앙 카차리스를 감상해 보세요.)
느리게 살자 라는 말은 다른 말로 미루지 말자라는 말입니다. 영어 procrastination은 '앞으로'를 뜻하는 라틴어 접두사 'pro'와, '내일'을 뜻하는 'crastinus'가 결합된 단어로 "지연, 지체, 미루는 버릇"을 뜻합니다. "Never put off till tomorrow what can be done today(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라)"는 속담이 있는데, 이 말을 압축해 표현한 고대 로마어 procrastinatio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나폴리온 힐은 프로크래스티네이션은 그저께 했어야 할 일을 모레로 미루는 나쁜 버릇이다
에드워드 영은 프로크래스티네이션은 시간 도둑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제프리 콤(Jeffrey Combs)이 『굿바이 미루기(The Procrastination Cure)』(2011)에서 "미루는 습관은 지구상에 인류가 등장한 이래로 계속 있었다. 원시사회에서 수확을 미루는 것은 굶어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에 일을 미룬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기원전 8세기경 그리스의 시인 헤시오도스는 미루는 습관을 죄악이나 나태와 동일시했다. 하지만 산업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기계 덕분에 일손을 덜게 되자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일을 미루기 시작했다. 테크놀로지 시대인 오늘날 미루는 습관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고 말한바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기독교 신앙인들은 어떻습니까? 상대적 박탈감을 가지는 일이 있습니까?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일이 있습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우리 기독교 신앙에는 상대적 박탈감이란 말도 미룬다란 말도 없어야 합니다. 아니 없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상대적 박탈감이란 전혀 없습니다. 당시 유대교 율법사들은 대부분 부자로 살았습니다. 당시 유대나라는 로마의 식민지로 있었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은 가난한 생활을 하였지만 제사장이나 율법사들은 로마의 보호아래 풍족하게 살았습니다. 바울은 당대의 최고 율법학자인 가말리엘 문하생이었습니다. 요즈음 말하며 우리나라 최고 법학박사의 수제자인 것입니다. 특히 다른 사람도 가지지 못한 로마 시민권을 가진자 입니다. 그는 얼마든지 부를 축적할 수 있고 가는 곳마다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율법과 학문에 능한 사람입니다. 인기 있는 율법학자가 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노년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집도, 가족도, 따르는 사람도 없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한 4년이 된 것 같습니다. 상대적 박탈감은 심각했을 것입니다. 상대적 빈곤감, 절망감에 사로잡힐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떤 태도를 가졌습니까?
10절에서 슬퍼하지 않습니다. 우울해 하지 않습니다. 크게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11절에서는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합니다. 스스로 만족한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처한 환경에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12절에서는 비천한 자리애도 처할 줄도 알고 풍부한 자리에도 처할 줄도 알아, 잘 먹을 때도 있지만 배를 쫄쫄 굶을 때에도 불만하지 않을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말 합니다. 왜 이런 脫 剝奪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13절에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판타 이슿퀴오 엔 토 엔뒤나문티 메)“
더 배운 사람과 비교해서 상대적 박탈감을 가지거나 더 좋은 집을 가진 사람에게 상대적을 박탈감을 가지고 만일 부정적 감정을 가진다면 이는 범죄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죄를 지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은 해결방법으로 스스로 자신의 목표를 얻기 위해 수단방법가리지 않고 달려나가거나, 불교의 방법대로 모든 욕심을 버리고 마음 수행을 하거나 하는 법도 있지만 수행이 끝나면 여전히 박탈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17세기의 파스칼은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어져 있다. 그 구멍은 세상적인 쾌락이나 물질로, 명예나 권세로 채울 수 없다. 그럴 경우 오히려 실망과 불만족과 허무만이 남게 된다. 오직 그 구멍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끝없이 부어 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실 때에만 진실한 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 하지 않고 채워지는 비결이 있습니다. 바로 주안에서 자신의 바램을 채우는 일입니다. 어떻게합니까? 주님이 능력을 주십니다. 내가 채우려고 아등바등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다 자기 주머니에 채워져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주신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바울은 비록 로마 감옥에 갇혀 있지만 그는 기쁨이 충만합니다. 그래서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로 슬퍼하고 감각 박탈을 당하고 있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카이레테 엔 퀴리오, 판토테 팔린 에로 카이레테)”고 권면 하십니다.
항상 기뻐하라 항상이 언제 입니까? 기쁠때나 슬플때나 좋을 때나 나쁠때나 잘될 때나 잘 안될 때나 하루 24시간 1440분 86400초 또딱또딱 매 초마다 기뻐하라입니다. 만일 세상에서 내 욕구가 채워져 기뻐할 때도 있지만 그 기쁨은 곧 사라지고 또다시 박탈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주머니에 돈이 가득하면 즐거워 하지만 주머니가 비면 다시 슬퍼집니다. 건강할 때 즐겁지만 건강이 나쁠때는 슬퍼집니다. 자식이 성공하면 기뻐합니다. 그러나 자식이 실패하였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머니의 가슴은 찢어지듯 아픕니다. 돈이, 명예가, 학식이 우리에게 만족을 준다면 그것들이 있으면 만족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불만가운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만족의 대상을 바꾸면 간단합니다. 주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 안에 있으면 그 어떤 경우에도 만족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주어지든 주어지지 아니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소유가 많든 적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의 있음과 없음에 관계없이 우리는 만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은 변하지 않으신 분이시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만족한 삶을 살도록 각자에게 필요한 것을 주셨습니다. 바울에게는 아내도 없습니다. 자식도 없습니다. 얼굴도 잘생기지 못했습니다. 재물도 없습니다. 건강치도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명예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끝없는 복음 증거로 육체는 피곤한 상태입니다. 복음을 전하고도 배신을 당하는 정신적인 갈등이 있습니다. 때로는 강도들에게 죽을 고비를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제 노년에 기약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감옥생활 입니다. 그런데 그는 무엇을 보며 만족해합니까? 그의 눈의 초점은 항상 주님만 바라보았고 그의 마음의 중심은 항상 주님 안에 있고 그의 생활은 항상 주님과 동행하고 있으니 어찌 상대적 박탈감을 가질새가 있으며 남과 비교하여 괴로워 할 때가 있었을 것입니까? 그럴 짬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갈 2: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주안에 사는 한 만족하지 못하는 불가능한 환경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상상도 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 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안 되지만 전능하신 주님께서 나에게 힘주시고, 불가능한 환경도 극복케 해 주신다는 것을 분명히 믿고 있다면 그 삶은 만족한 삶입니다.
예수님의 방법은 세상 경제 원리로는 이해가 안 됩니다. 포도원 비유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데, 포도원에 일꾼이 일하는데 아침 아홉시에 와서 일한 사람이나 정오에 와서 일한 사람이나 저녁 다섯 시에 와서 한 시간 일한 사람이나 똑같은 액수로 임금을 주었습니다. 그러니 자연 오래 일한 사람이 상대적 박탈감으로 불평을 하게 됩니다. 나는 9시간 일하였는데 왜 1시간 일한 사람과 똑같이 임금을 주느냐 라고 불평합니다. 당연한 불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점은 일의 시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한 사람에게 있습니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에게 가족이 있다면 다 저녁때 온 사람에게도 가족이 있습니다. 다 저녁때 일하러 온 사람은 인력시장에서 자신을 불러주는 사람 없어 하루 종일 불러줄 사람을 기다리며 아 오늘은 공치는 날이구나 오늘 저녁 우리 자식들은 굶어야 하겠구나 걱정하고 있을 때에 포도원에 불려 왔으니 그의 마음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주인은 한 시간의 일당이 아니라 하루의 일당을 주어 그의 가족들을 부양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공의경제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바라볼 때 주님은 나의 모든 것을 아시고 나의 모든 것에 대책을 세워 주시어 세상에서 기뻐하며 살게 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없다고 상대적 박탈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없어도 나누는 기쁨을 가집니다. 흐르는 시내물은 흘러도 여전히 채워져 흐르는 것처럼 기독교인의 삶은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차여져 흐르는 인생이라 누구를 비교하고 무엇이 부러워 박탈감을 가질 것입니까? 그런 것들은 우리가 부러워할 깜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에게 주님의 사랑과 능력과 은혜가 날마다 차고 넘친고 있다는 것을 기뻐하며 또한 이웃과 이 기쁨을 함께 나누게 됩니다.
욕심꾸러기인 의류 제조업자인 장로님이 있었습니다. 돈이 많아 어떻게 장로가 되었는데 겨우 하는 것은 교회에서 체면상 할 수 밖에 없는 의무만 했답니다. 어느 날 죽었답니다. 천사 앞에 섰답니다. "어째서 너는 자신이 천국에 들어가야 된다고 생각하는가?" 라고 물었답니다. "나는 길거리의 불쌍한 장님에게 백 원을 준 적이 있습니다." "그 뿐인가?" "아뇨, 물론 또 있어요. 지난주에 산책 나갔다가 구두닦이 소년을 보았습니다. 그는 얼어 죽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나는 또 백 원을 주었습니다!" 천사는 옆에 있는 기록 담당자에게 물었답니다. "기록되어 있나?" 기록 담당자는 장부를 뒤적여 그런 사실이 있었음을 확인하여 주었답니다.
천사는 질문을 계속하였다. "그 밖에는?" "저, 그게 전부라고 생각합니다만..." 천사가 기록담당자에게 물었답니다. "이 사나이를 어떻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나?" 그러자 기록 담당자가 대답하였답니다. "이 백 원을 돌려주고, '지옥으로 가라!' 고 말씀하십시오!"
남으로부터 도움만 받고 사는 것 같고 자신에게는 남을 도울 만한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생각해 보면 남을 도울 만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주는 삶은 자신과 이웃을 함께 행복하게 합니다. 세상에 모든 것을 주고 가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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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은 어떻게 상대적 박탈감을 극복할 것입니까? 나눔으로 상대적 박탈감을 해소시켜 주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가진 것이 비록 많지 않다 할지라도 나에게 있는 조그마한 것부터 나누는 삶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승리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 라온 코이노니아는 주안에서 주님의 능력을 받는 신앙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부러울 것 하나도 없습니다. 어느 큰 교회보다 하나님은 여기 작은 당신의 자녀들을 더욱 사랑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기뻐하며 항상 만족한 마음으로 풍성한 축복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