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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6년 4월 10일 주일아침 예배  고전 1:26=31 라온 코이노니아의 선택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기까지 우리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두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출생과 죽음 일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이 세상에 출생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영어로 출생을 Birth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생은 죽음으로 삶을 이 땅에서 마무리하게 됩니다. 죽음을 영어로는 Death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출생과 죽음사이에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그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서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 보겠습니다. 영어 알파벳 B와 D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 대답은 쉽습니다. C입니다. 그러면 B와 D 사이에 있는 C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다시 말하면 출생과 죽음사이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 대답을 영어권에서는 선택 곧 Choice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끊임없는 선택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소크라테스에게 한 제자가 물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을 데리고 사과나무 숲으로 갔습니다. 숲 끝까지 걸어가며 각자 가장 마음에 드는 사과를 하나씩만 골라오너라. 한번 선택한 뒤에는 되돌릴 수 없으며 다시 되돌아가는 것도 안 된다. 선택은 단 한번 뿐이다. 제자들은 유심히 사과를 관찰하며 가장 크고 좋은 것을 고르려 노력했습니다. 숲 끝에 도착하자마자 소크라테스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모두 제일 좋은 사과를 골라왔겠지? 하지만 학생들은 서로의 것을 비교하더니, 말했습니다. 선생님 다시 한 번만 고르게 해주십시오. 저는 숲에 막 들어섰을 때 정말 크고 좋은 걸 봤습니다. 그런데 더 크고 좋은 걸 찾으려고 따지 않았습니다. 사과나무 숲 끝까지 왔을 때에야 제가 처음 본 사과가 가장 좋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른 학생이 말했습니다. 전 숲에 들어가자마자 제일 크고 좋다고 생각되는 사과를 골랐는데, 나중에 보니까 더 좋은 게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껄껄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게 인생이다. 인생은 언제나 단 한 번의 선택으로 이루어진단다.

이처럼 인생은 선택입니다. 물론 어린 시절은 부모님이 선택권을 가지지만 장성한 부터는 나 스스로 모든 것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 길 입니다. 이제 우리는 앞으로 4년의 국정을 맡아 정치를 할 국회의원들을 선택하는 선거를 하게 됩니다. 이미 사전 투표를 하신 분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여러 번 투표를 하였지만 언제나 그 후에 내가 그 후보를 선택한 것이 잘했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번번이 국회에 들어간 그 사람들은 우리를, 국민들을 실망시켜왔기 때문입니다. 실상 누구를 선택하던 크게 달라질 것이 없는 것이 우리나라 정치 판도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누구를 뽑을 것인가 고민할 것도 없이 나중에 후회를 할 만정 마음가는대로 손가락 닿는 후보에게 투표하게 됩니다.
선택에는 일상적인 선택이 있고 영적인 선택이 있습니다. 일상적인 선택은 우리가 아침에 눈떠서 밤에 잠잘 때까지 순간순간 하는 그런 선택들입니다. 오늘 무엇을 할까 어디로 갈까 누구와 만날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을 일상적인 선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선택을 잘 하는 선택이기도 하고 잘 못된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엔 그 선택으로 큰 손해를 입기도 하고 심지어 생명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잘한 선택이라고 해도 나중에 다시 돌아보면 아주 잘못된 선택을 하였다고 섭섭하게 생각할 때도 있고 後悔莫及할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선택이라 할 지라도 그 선택에 대해서는 자신의 책임이 따르게 됩니다.  사람이 선택하는 것과 짐승이 선택하는 것의 차이가 뭐냐? 사람은 선택한 후에 그 책임을 져야 합니다. 짐승은 자기가 선택만 했지 책임이라는 게 없습니다. 사람은 선택에 대한 결과에 대해서는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일단 보암직스럽고 먹음직스럽고 탐스러운 것을 선택합니다. 기왕이며 다홍치마(同價紅同裳)라고 이왕 골라서 택할 치마 가운데 우중충한 치마나 거무칙칙한 검은 색이 아닌 붉고 밝고 고운 색깔이 든 치마를 택하는 것이 人之常情입니다.

어떻게 선택을 하여야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선택을 잘 할 수 있느냐 이것은 지식이 있느냐 없느냐와 상관이 없습니다. 그가 부자이냐 가난하냐 와도 관계가 없습니다. 그가 대통령이냐 말단 공무원이냐 와도 관계가 없습니다. 잘하는 선택은 오직 지혜가 있느냐 없는냐 지혜의 문제입니다.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자기에게 좋은 것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가 얼마나 지혜로운가에 의해서 그의 지혜의 유무와 정도의 차에 선택이 차이가 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비록 어쩌다 선택이 잘못되었다 해도 잘못된 선택을 오히려 잘한 선택으로 바꾸기도 합니다.  두 사람이 길을 가다가 웅덩이에 빠져 심하게 다쳤습니다. 이 사람들은 일부러 그 길을 선택하거나 웅덩이에 빠지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우연히 사고가 그들에게 일어났을 뿐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사고의 경험을 고통으로, 또 다른 사람은 감사함으로 받아들여 살기로 선택했습니다. 즉 한사람은 고통을 선택하였고 다른 사람은 감사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감사를 선택한 것은 그의 지혜였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새로운 목사님을 청빙할 때에 여러 가지 조건을 제시하였습니다. 목회 경력! 목사 안수 받은 지 10년-20년 된 사람, 나이!  ‘45~50세 미만’. 학력은 미국에서 박사학위 받은 사람은 가산점 20점, 이력서에 저서와 상벌을 기록하고, 대학병원에 발행한 건강 증명서, 가족은 사모와 아이한명, 그리고 목회철학에 대한 소견서, 설교테이프, ‘반드시 최근 3개월에 찍은 명함판 사진 제출’ 등입니다. 목사님을 청빙하는 것인지 아니면 회사사장을 고용 할라고 하는 것인지 한국교회의 비난 받는 여러가지 문제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목사님들 가운데는 가짜박사들이 많고 가짜 책들을 출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사람을 선택하셨습니까?
성경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의 말씀들을 읽게 됩니다. 하나님은 당시 백성들에게 왕땅을 당하고 있는  노아를 택하셨고, 히브리 나그네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형의 장자권을 속여 뺏은 야곱을 선택하셨고, 애굽의 보디발 장군의 노예인  요셉을 선택하셨고, 광야로 쫒겨난 모세를 선택하셨고, 베들레헴 목동인 어린아이 다윗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그들은 다같이 당시대에 소시민들이고 어리버리(기)한 사람들이였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아브라함은 서쪽 산지를, 요셉은 감옥을, 모세는 광야를, 다윗은 물맷돌을 선택하였습니다. 이들은 바보같이 사람들이 조롱하는 일들을 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들이 인생 최고의 선택을 하였음이 증거 하였습니다. 하나님도 당시 서민들 보통사람들 또는 사회 하층민들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심도 세계에 가장 작고 연약한 민족을 선택하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번도 이들을 선택하신 것에 후회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선택이 잘하신 것임을 우리에게 증겋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선택하심도 하나님과 똑 같이 당시 어부나 세리 같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제자로 선택하시였습니다. 당시 사람들 중에 예수님의 일행을 갈릴리의 거지들이라고 비난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선택하신 일에 후회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제자들에 의해 마침내 기독교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고전 1:26이하에 이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가 오순절날 성령 받은 후 예루살렘 길거리에 나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놀라서 하는 말이 행전 1:7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들이 아니냐!” 이 말은 본래 배운바가 없는 무식한 어부인데 어떻게 저렇게 말을 잘하느냐? 그러니까 기독교는 처음부터 무식한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고린도교회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우리 중에는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않잖느냐? 문벌 좋은 자도  많지 않다고 했습니다. 귀족출신, 양반가문, 권세 있는 자, 혹은 부자 이런 계층의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경우는 이제 기독교 문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요즘에는 무슨 행사를 하거나 하면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이 오히려 소외될 만큼 기독교 문화는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나 몇 십 년 전만해도 시골 교회에 어쩌다 그 동네 이장님께서 한번 교회 나오시면 이장님이 간판스타입니다. “이장님이 우리 교회 다 나오셨다!” 어쩌다 파출소 순경 한 사람이 시골 교회 나오면 그 교회는 얼마나 목에 힘을 주고 전도를 하는지 “순경이 우리 교회 나온단 말이야!”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문벌, 학벌 아주 낮은 수준의 비천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처음에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별로 대우받지 못하였던 사람들이 교회 나왔는데 얼마 후에  그 사람들이 점점 세상적으로도 인정받는 그런 인물들로 사람들이 추앙하여 보았습니다.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은 아마도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있는 목사님중의 한분입니다. 김삼혼 목사님이 늘 간증삼아 말씀하기를 자신은 경상북도 영양군 산골에서 자랐는데 하도 가난하여 신발도 없이 맨발로 학교에 다녔다고 합니다. 그런 시골아이가 자라 오늘날 10만명이 넘는 교회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사회적으로 사업적으로 성공하였다는 사람들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많은데 그중에 많은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가난한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에게서 무엇이 다른 사람과 특별히 다른가?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말로 말하면 그들이 일찍이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택하여 섬기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섬기었다고 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선택한 그들이 또한 성령의 인치심 곧 선택하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엡1:13)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선택하였다고 하지만 성령의 인치신 선택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를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선택받은 사람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어부 베드로는 예수님을 잘 선택하였습니다. 그는 후에 교회의 머리가 되고 천주교회에서는 베드로를 1대 교황으로 받들고 있습니다.  역시 어부였던 요한도 예수님을 잘 선택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평생 모셨고 요한복음서를 기록하는 위대한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세리 마태도 예수님을 잘 선택하였습니다. 후에 훌륭한 사도가 되어 마태복음을 기록하였습니다.  똑같이 예수님의 사도로 선택받았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나무에 목매달아 자살하여 죽었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니 강도 바라바 대신 예수님을 선택하여 골고다에 못 박으니 천추에 그 악명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하여 교회를 다닌다면 성령의 인치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선택합니다.  어떤 이는 병 고침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선택합니다. 어떤 이는 사업상의 문제 해결을 받기 위해,  어떤 이는 가족의 권고로 또 어떤 이는 자신의 상사가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선택하였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야 합니다.  곧 성령의 인치심을 받는 선택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나라 교회에 교인이 되는 방법 중에 세례 받기 전 학습이란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성경이나 다른 나라에는 없는 제도입니다.  한국에 와서 복음을 전했던 초기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보니까 한국 사람들의 믿음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하며 교회에 오는 사람들에게 밀가루를 나눠주고, 구제물자를 나눠주다 보니 너도 나도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받은 사람, 신앙 고백하는 사람에게만 밀가루를 주겠다고 하자 너도 나도 세례 받고, 신앙 고백은 했지만 밀가루가 떨어지니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의 세례도 신앙고백도 믿을 수가 없게 되자 선교사들이 고안해 낸 방법이  배우고 익히는 과정을 만들어 ‘학습’을 받게 한 것입니다. 여러 사람 앞에 나와 ‘이 사람들이 예수 믿기로 정했으니 잘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하며 6개월, 1년 지난 후에 세례를 주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학습 받고 세례 받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 믿음을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기 마련입니다. 문제는 그런 제도 방법이 아니라 영적 변화로 인한 성령의 인치심을 받을 때 비로소 거듭 나 새사람 되는 참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녀들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어떤 선택을 할 때에 세 가지 기준을 세웁니다.
첫 번째 기준은 성령의 열매에 해당되는 것이냐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성령이 내안에서 나의 생각과 판단을 주장하시기 때문에 아무리 마귀가 먹음직스럽고 보암직스럽고 탐스러운 것으로 유혹한다 해도 그런 미끼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은 영적분별력으로 하나님의 지혜주심에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을 하게 됩니다.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곧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렇게 사는 것이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사람들이 선택하며 행하는 일입니다.(갈 5:22-25) 주안에서 사랑하는 일이 아니라면 미워하는 일이라면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선택하는 일이 주안에서 기쁜일이 아니라면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선택하는 일이 화평과 반대되는 사람들과 갈등과 분쟁의 소지가 있다면 선택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기준으로 분별하여 합당하다면 선택하게 됩니다.

두 번째 기준은 십자가지는 일입니다. 제가 어떤 일을 선택할 때에 나에게 어려움이 되고 고난이 될 수도 있는 일이 있습니다. 손해도 입게 되고 몸도 힘들게 될 것이라 여겨지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내 몫에 태인 십자가라면 결코 마다하지 않으리라 기꺼이 선택하여 가리라고 다짐을 합니다.
특히 목사생활 44년간 목회하여 오는 동안 내 아내와 더불어 목회는 내 몫에 지워진 십자가 이였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이 십자가 짐을 벗어 버리고 싶었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는 내가 스스로 짊어진 십자가가아니라 하나님이 저를 선택하여 이 십자가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심으로 짊어진 십자가라 하나님이 그만 내려놓으라 하실 때 까지는 별수 없이 짊어질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십자가를 짊어지라고 선택받은 성도 만이 진정 하나님의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난 십자가가 없다라고 말한다거나 나는 십자가 지기 싫어 라고 말한다면 아직 그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한 분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반려 은혜와 축복의 반려에 벗어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그 어떤 십자가를 지고 계십니까? 구원의 백성들은 반드시, 의무적으로 이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의무를 망각한 채 기쁨과 번영만 찾고 있습니다. 눅 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말씀처럼,  어제 따랐으니 오늘은 쉬는 것이 아닌 오늘도 내일도 꾸준하게 십자가를 져야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억해야할 것은 스스로 자원하여 십자가를 져야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누구도 나를 대신하여 내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나 스스로 그 십자가를 지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고난을 참아야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중심이 되던 인생이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하며 자기 만족으로 살던 인생이 하나님 만족으로, 스스로를 의지하던 마음이 이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으로 변해야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령의 인치심은 때로는 나에게 고난이요 슬픔이요 아픔이기도 하지만 아니요 그것은 은혜요 기쁨이요 축복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잘 부르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이 복음 성가는 제 목회의 십팔번 복음성가이기도 합니다.

               주의 길을 가리(복음96장)
       1.비바람이 갈 길을 막아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눈보라가 앞길을 가려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이 길은 영광의 길 이 길은 승리의 길
          나를 구원하신 주님이 십자가 지고 가신 길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

 

       2.험한 파도 앞길을 막아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모진 바람 앞길을 가려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이 길은 고난의 길 이 길은 생명의 길
          나를 구원하신 주님이 십자가 지고 가신 길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


세 번째 기준은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마 5장 13절 이하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소금은 썩는 것을 방지 하는 것이요 빛은 어둠을 밝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사람은 결코 세상의 썩어짐에 같이 썩어져서는 안되고 세상의 어둠속에 같이 어두워져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 날 목사로서 유신체제와 군사독재시대에 저항하고, 민주주의 회복과 민족의 평화와 통일운동에 조금이나마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하여 왔습니다.
그러므로 썩어지는 세상을 썩지 않게 하고 어두워진 세상을 밝혀 나가는 삶을 살아가는 일이 바로 하나님의 성령이 인치신 선택받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586장 “빛과 어둠 사이에서 선택하여 살리라” 입니다.

라온코이노니아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하였으니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처럼 모든 일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인침을 받은 성도로서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선택의 기준으로 삼고 내 몫에 태인 십자가 지고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선택하며 산다면 이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축복주시는 확실한 선택입니다.

요단강 계곡의 경사면에 세 그루의 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이들 나무는 저마다 나름의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나무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세공(細工)을 받아 하나님의 성전 재목이 되고 싶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경배하는 하나님의 성전의 한 부분이 됨으로 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를 소원하였습니다. 두 번째 나무는 바다로 가고 싶었습니다. 곧 범선(帆船)이 되어 가지고 사람들의 왕래를 도울 뿐만 아니라 온 세계를 다니면서 소중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쓰임받기를 원하였습니다. 세 번째 나무는 "나는 여기 남고 싶다. 높이 높이 자라나 하늘을 향해 가지를 쳐들고 있겠다. 그리하여 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내 그늘에 앉아 쉬면서 하나님을 사모하게 해 주겠다"고 소원하였급니다.  수백년 세월이 지났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고 싶어하였던 나무는 찍혀서 베들레헴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세공을 받아 작은 구유가 되었습니다. 나귀가 핥아먹고 개가 핥아 먹고 하는 먹이통이 되어 마굿간 한 귀퉁이에 팽개쳐지는 슬픈 신세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나무는 큰 배가 되어 대양(大洋)으로 나가고 싶었는데 서글프게도 찍히고 깎이어 조그마한 조각배가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갈릴리 호수로 가게 되어, 꾀죄죄한 어부들이나 올라타고 비린내 나는 물고기나 싣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뿐입니까? 일없을 때는 쓸모없이 버려진 채 호숫가에서 따분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세 번째 나무는 그 자리에 그냥 있고 싶어한 소원과는 달리 어느 날엔가 웬 사람들이 와서 결국은 찍어버렸고, 그리고 다듬어져서 엉뚱하게도 저주받은 죄인들을 매달아 죽이는 형틀, 십자가가 된 것입니다.
 '아, 나는 왜 하필이면 이렇듯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단 말인가?'하고 그는 탄식해 마지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만백성을 구원하시고자 만왕의 왕으로 오시는 아기 예수께서 태어나 숱하게 좋은 처소를 다 놔두고 하필이면 그 천덕꾸러기 말구유에 첫 번째로 누우셨으니 그 첫 번째 나무였던  말구유가 결국은 더할 수 없이 큰 영광을 입은 것입니다. 다시 세월이 더 흘러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에 오셔서는 그 보잘것없는 조각배에 올라앉으시고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어서, 두 번째 나무였던 그 조각배가 그렇듯 주님께 강단을 드리는 뜻밖의 영광을 입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3년쯤의 세월이 더 흘렀습니다. 세 번째 나무였던 그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못 박혀 달리심으로 길이길이 만백성의 추앙을 받는 거룩한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두란노 출판-세그루의 나무 중에서)

라온 코이노니아 성도 여러분, 세그루의 나무는 비록 각자의 꿈은 깨어졌지만 결국 깨어진 꿈속에서 다시 주님께 쓰임을 받도록 선택을 받았습니다. 우리 라온 코이노니아는 비록 여기 작은 공간이지만 예수님은 이 곳을 당신이 누울 말구유로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타신 작은 배처럼, 예수님이 못 박힌 십자가처럼 천국 복음을 선포하시려 우리 라온 코이노니아를 선택하여 주신 줄 믿습니다. 이제 이곳 작은 라온 코이노니아 공동체는 주님의 십자가가 세워져 주님을 위해 쓰여지는 우리를 선택하여 주셨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자랑할 것 없는 작은 공동체로 하나님이 우리 같은 작은자들을 선택하실 것인가? 아니요, 낙심할 것 없습니다. 오히려 작은자를 선택하여 높이시는 우리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수백 수천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와 똑 같이 그 이상으로 사랑하여 주심을 믿으시고, 우리의 남은 생애를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행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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