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24일 주일아침예배 설교 갈 5: 16-26 라온 코이노니아의 성령의 매임
사랑의 포로가 되어 보세요
- 김 옥림 -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포로가
되어도 좋습니다
그 울타리에서
마음껏 풍요로운 인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만 생각하게 되어
더욱 사랑이 깊어지고 값지게 됩니다
사랑의 구속은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사랑의 포로가 되십시오
아름다운 구속은
더 깊은 사랑을 낳고,
진정한 자유로움을 알게
해 줄 것입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포로가 된다는 것은
구속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인생을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 안에서
사랑의 포로가 되는 것을 주저하지
마십시오
사랑의 포로가 되는 것은
당신의 인생을 풍요롭고 멋지게 만드는
아름다운 구속입니다
누군가 미치도록 사랑할 때가 있습니다. 앉으나 서나 사랑하는 사람만 생각납니다. 만나고 헤어진 지 한 시간도 안 되었는데 또 보고 싶다면 그는 확실하게 사랑에 포로 되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우리의 뇌에서 단계적 사랑의 감정을 만들어 내는 여러 가지 호르몬이 분비가 됩니다. 처음 상대에 호감을 가지며 괜히 그 사람을 만나면 친절해지고 대화가 즐거워지게 되면 도파민 호르몬이 나옵니다. 그러다가 아드레나린과 세로토닌 호르몬이 나오는데 눈에 콩깍지 증상이 나옵니다. 그 사람을 만나면 가슴이 뛰고 얼굴이 빨개집니다. 아드레나린이 분비된 증거입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해도 예뻐 보이는 것은 세로토닌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사랑의 증상이 좀더 깊어지면 페닐에틸아민(pea)이 나옵니다. 초코릿에 있는 물질이기도 한데 우리의 중추신경을 자극하는 천연 각성제입니다. 사랑을 제어하기 힘들어지고 부르르 가슴이 떨리고 터저버릴 것 같다면 페닐에틸아민 때문입니다. 이 때에 이런 고백 편지를 보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보고픈 건 당신의 얼굴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듣고 싶은 건 당신의 사랑 노래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기쁜 일은 당신의 환한 미소를 바라보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은 당신을 알아 가는 일입니다.”사랑이란 열병을 앓게 합니다. 아침에 눈이 뜨면 그 집 앞으로 달려가고 싶고 그가 내 곁에 있어도 그립다는 단계입니다. 이럴 때 이런 노래를 부릅니다. “오가면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띌까 다시 걸어도 되 오면 그 자리에 서졌습니다.(이은상 작사 현재명 작곡)”이러다가 옥시토신이란 호르몬이 나오는데 일명 cuddling hormon이라고도 하는데 껴안게 만드는 홀몬입니다. 이어서 엔돌핀이 분비됩니다. 마약과 같은 성분으로 즐거움과 환희를 느끼게 하는 호르몬입니다. 이제 사랑하는 사람과 마냥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라는 말이 그의 입술에서 터져 나옵니다. 사랑이란 두 글자는 생각만 해도 기쁘고, 황홀하고, 마치 입 안에서 상큼한 박하사탕이 깨지는 것처럼 싱그러운 맛입니다. 마치 온 우주에서 가장 행복한 동화의 주인공이 됩니다. 세상에 그 사람처럼 멋지고 아름다운 이가 어디 있을까?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도 없고, 못 갈 곳도 없고, 못 줄 것도 없고 죽어도 좋다고 느껴집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너무 너무 간사스럽습니다. 다윗의 큰 아들 암몬의 다말사랑과 같습니다,(삼하13장). 매우 유감스럽게도 이 미칠 것 같았던 사랑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미국 코넬대 인간행동연구소의 신디아 하잔 교수팀이 사랑의 유효기간을 연구하였는데 18-30개월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설명하기를 “사랑의 감정은 뇌의 화학작용이며 남녀가 만나 2년 정도 지나면 대뇌에 항체가 생겨 더 이상의 화학물질이 생성되지 않는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꿈같은 사랑의 시절이 지나면서 그 넘치게 흘러나오던 호르몬들의 샘이 마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드디어 사랑이 원수가 되어 헤어지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영국의 에드워드 8세는 왕위를 포기하면서까지(1936년 12월11일) 이혼 경력이 있는 심슨부인과 세기의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결혼생활 35년이 지난 어느 날 그들은 성격차이로 별거를 하였습니다. 20세기의 최고의 여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8번 결혼과 17번 연애로 유명한데 그녀가 결혼할 때마다 “이제야 진정한 사랑을 찾았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두 얼마 못가 헤어졌습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사랑의 유효기간은 매우 짧았던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예수님의 사랑에 포로 된 사람들입니다. 김옥림 시인의 말처럼 예수님의 사랑의 포로가 되는 것은 주저할 일이 아니요 우리의 인생을 풍요롭고 멋지게 만드는 아름다운 구속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사랑도 그렇게 2, 3년의 시효에 불과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에는 시효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사람의 뇌에서 생겨난 호르몬 작용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 안에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성령 안에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은 최고의 사랑이며 영원한 사랑이며 그 사랑 때문에 기꺼이 순교도 하게 됩니다. 이 사랑 없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천국은 오직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받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완고한 율법주의자였던 바울은 예수님을 죽기까지 사랑하였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사랑에 포로 돤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씀할 수 있었던 것은 행 20:22에서 “나는 성령에 매여 있다.(데데메노스 에고 토 프뉴마티)”라고 하신 말씀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포로 된 사람은 따라서 성령에 매여 있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매여”라는 말은 원어로는 “데데메노스”(dedemevno")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문법적으로 “데오”(dew)라는 동사의 ‘수동태 제 1 완료분사 남1 단수’입니다. 그래서 데오라는 동사가 “묶다”라는 뜻으로, “데데메노스”라는 말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묶여 있다.”라는 뜻입니다. 기독교인은 죽기까지 성령에 계속 매여 있음으로 죽기까지 예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죽기까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죽기까지 충성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성령에 묶여 살아야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그 사랑이 변하지 않고 그 소망을 잃어버리지 않고 끝까지 충성하게 됩니다.
그러면 성령에 매여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봉독한 16절에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성경 원어의 말씀은 “푸뉴마티 페리파테이테(동 명 현 응 2복)”라는 말입니다. 자주 제가 여러분들이 잘 이해 할 수 없는 성경 원어를 말씀드려서 아마 속으로 “목사님은 어째서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원어를 설명하시는가” 하고 속으로 불만스런 마음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목사로서 여러분이 성경말씀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살찐 꼴을 먹는 일이요 그래야 영생의 자격을 온전히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경에서 구약성경은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2,000년 전 고대 이스라엘 말입니다. 그리고 신양성경도 2,000년 전 고대 그리스 언어입니다. 그런데 그런 고대 언어로 씌어 진 성경을 현대 우리 한글로 번역하자니 제대로 번역이 안 된 구절이 너무 많습니다. 그것도 우리 성경은 수십 년 전 선교사들이 중심으로 미국 영어성경과 일본어 성경과 중국의 한문성경을 참고로 번역하였기 때문에 고대 언어로 씌어 진 성경의 하나님 말씀을 정확하게 전해주지 못하는 구절들이 상당수가 됩니다. 저의 전공이 구약성경이고 신학교에서 고대 히브리어 와 그리스어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조금은 살찐 꼴로서 성경말씀을 전해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신학대학을 졸업해도 전공이 아니면 히브리어나 그리스어를 모르는 목사님들이 대다수입니다. 그 목사님들은 그냥 여기 우리 성경으로 오해할 수 있는 번역된 성경으로 설교를 하심으로 교인들에게 올바른 말씀을 전해드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가끔 원어에 대하여 소개할 때도 더 정확한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려고 하는구나 라고 생각하셨으면 합니다.
여기 16절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한 말씀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면, 여러분 혹시 사치기 사치기 사뽀뽀라는 흉내 내기 게임을 아십니까? 앞 사람이 하는 그대로 따라 흉내를 내어야 한데 만일 내지 못하면 지는 놀이입니다. 성령께서 무슨 일을 하시면 사치기 사뽀뽀하며 그대로 따라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어로 쓰여 진 말씀의 본뜻은 그러지 않습니다. “따라 행하라”는 그리스어 원어로 “페리파테이테”라고 하는데 이 말은 “함께 동행하다, 걸어가다”란 의미입니다. 영어로 “walk”입니다. 다른 성경을 보면 “인도하는대로”라고 번역하였는데 18절에 “성령의 인도”라는 말씀이 있음으로 잘못된 번역입니다. 부모님과 함께 걸어가는 아이는 두렵지 않습니다. 걱정 근심이 없습니다. 즐겁습니다. 세상이 다 내 것처럼 생각이 듭니다. 무엇하나 아쉬움이 없습니다. 부족함이 없이 만족스럽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육체의 욕심 부릴 일이 없습니다. 성령에 매여 살고 있는 사람은 매 순간 순간 어디서나 일마다 성령과 함께 걷고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역대 미국 대통령가운데 훌륭한 대통령을 뽑는다면 프랭크린 루즈벨트 (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30 ~ 1945.4.12.) 대통령입니다. 미국이 경제적을 매우 어렵던 시절에 미국민들에게 비젼과 용기를 심어주었고 오늘의 미국으로 성장하는데 그 기틀을 마련해준 대통령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느날 그는 하반신 불구라는 장애자가 되었습니다. 휠채어를 타고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꼼짝 할 수 없었습니다. 루즈벨트는 부인 엘레나에 물었습니다. “내가 이런 불구자가 되었는데 지금도 나를 사랑하시오?” 엘레나는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나는 당신의 다리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당신의 전부를 사랑하고 있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은 나의 일부분을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나의 전부를 사랑하십니다. 내 다리도 나의 팔도 나의 심장도 나의 오장육부 육체뿐 아니라 나의 마음도 나의 영혼도 나의 생명전체를 사랑하십니다. 이 세상에 이처럼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령을 떠나 산다는 것은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생명을 버리는 사람입니다. 바울사도께서는 일거수일투족 그렇게 성령에 매여 성령과 동행하므로 예수님을 향한 변함없는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18절 말씀에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성령에 매인 사람은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역시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이 말씀이 그리스어 원어로 “푸뉴마티 아게스테”라고 합니다. 아게스데는 ‘아고(동사 직성법 현재 수동태)’라는 말에서 온 말로 “이끌려가다, 데리고 가다, 끌려가다”란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 21:2에서 나귀새끼를 “끌고 오라”고하신 말씀과 같은 말입니다. 행5:21에 제사장들이 사도들을 “잡아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하신바가 된다는 말씀은 성령께서 우리를 적극적으로 이끌어 가시고 우리는 수동적으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끌려간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에 매여 있는 사람 즉 성령에 포박된 사람은 성령께서 끌고 가시면 그냥 끌려가야 합니다. ‘아니요? 난 그렇게 갈수 없소’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누가 이처럼 성령에 매여 끌려갑니까? 바로 성령충만한 사람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밤이면 불기둥으로 낮이면 구름기둥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원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난안 땅을 인도해 가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의지의 발로였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충만한 사람을 성령의 줄로 묶어 하나님 나라 영생복락을 누리도록 하시기 위해서 오늘도 우리를 이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냥 딸아만 가면 됩니다. 역시 그렇게 못가겠다고 뒷걸음질 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뒷걸음을 치는 사람은 이 광야 인생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한 사람은 오히려 성령의 매인바 되어 성령의 끌어 주시는 대로 따를 때 안심하게 되고 평안이 있고 죄와 마귀의 권세에서 보호받게 되는 것입니다. 한평생 세상은 평화롭게 만족스럽게 살아갑니다.
오래 전에 사모가 캄캄한 밤에 피아노를 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방안에서 멋진 피아노가 아내의 손끝에서 연주되고 있었습니다. 마치 아내의 손끝에서 음악이 폭포수같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아내의 몸 그 속에 음악이 충만하게 채워져 있어 손끝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내 안에 성령이 충만하면 내 안으로부터 성령의 열매가 흘러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이 흘러나오고 희락이 흘러나오고 화평이 흘러나오고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이 흘러 나오고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흘러나옵니다. 성령의 매인바 되어 성령의 이끌려 가는 사람에게 이처럼 사랑이 희락이 화평이 뚝뚝 흘려 나오게 됩니다. 걸음 걸을 때마다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성이 줄줄 새어 나옵니다.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성령에 이끌려 가는 곳마다 줄줄줄 흘러나옵니다.
여러분, 한번 뒤돌아 오세요. 여러분이 디딛고 온 인생길에 그렇게 성령의 열매들이 넘쳐 나와 있는지요.
18절의 “성령의 인도하신바가 되면” 이 말씀은 성령에 매인바된 성령충만한 성도들이 날마다 성령의 이끌림을 받으며 살아간다는 말씀입니다.
25절에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할지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성령으로 행할지니“ 이말씀의 그리스 원어로 ”프뉴마티 카이 스토이코멘“입니다. ‘스토이코멘’이란 말은 ‘스토이케오(동 가 현 능 1복)’로 ‘나란히 서다, 한줄로 가다, 행렬에 발맞추어 가다’란 의미입니다. 우리 성경에 ‘성령으로 행할지니’인데 원어를 직역하면 ‘성령으로 그리고 발마추어 가자!’라고 하게겠습니다. 영어로 “let us also walk in the Sirit” “let the Spirit also direct our course”입니다. 군인들이 국군의 날에 행진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12줄이 줄을 맞추어 발을 맞추어 손 움직임도 똑 같이 맞추어 행진을 합니다. 아주 믿음직스럽고 용맹스럽게 보입니다. 군대에 입대하면 먼저 훈련하는 것이 제식훈련을 합니다. 앞으로 갓 뒤로 갓 하며 줄을 맞추어 갑니다. 줄이 틀리고 발인 손이 틀리면 기압을 받게 됩니다. 처음에 제대로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엔 씩씩한 군인의 모습으로 보무도 당당하게 줄맞추어 행진을 합니다. 소대장이 구령을 부치면 그 구령에 따라 연습을 합니다, 하나 둘 셋 넷 “ ” 구령 맞춰 갓 “ ” 그러다가 “진짜 사나이” 노래를 부르면서 갑니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하나 둘, 너와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전투와 전투 속에 맺어진 전우야, 산봉우리에 해뜨고 해가 질적에, 부모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 3절이 재이 있습니다. “3. 겉으로만 잘난체해 사나이라드냐? 너와나 진짜사나이 명예에 살았다. 멋있는 군복입고 휴가간 전우야, 새로운 나라 세우는 형제들에게, 새로워진 우리생활 알리고 오리라. “
군복을 입은 군인은 군대에 매여 있는 사람입니다. 군대에 매여 있는 사람은 군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성령에 매여 있는 사람은 성령님의 구령에 맞추어 성령의 노래를 신나게 부르며 씩씩하게 살아야 합니다. 때로는 성령님과 발맞추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범합니다. 그것이 육체의 일입니다. 19절부터 음행과 더러움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등등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님과 발맞추지 못하면 죄를 짓게 됩니다. 그만 인생길에서 넘어지고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서로 발을 묶고 뛰는 게임이 있지요. 그런데 두사람이 함께 발 맞추어 뛰다가 한 사람이 넘어지면 그 경기에서 지게 됩니다. 우리 심령 안에 다툼이 있습니다.
롬 7:21 이하에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나의 심령이 성령과 함께 매여 뛰어야 하는 데 그렇지 않고 악한 것이 나의 발에 묶여 있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의 인생길을 살아갈 것입니까? 그러므로 우리 안에 일어나는 선과 악의 싸음에서 이겨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지금 내가 성령에 매여 성령과 발맞추어 살고 있는가 우리는 스스로 나의 믿음을 검토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라온 코이노니아는 교회적으로 보면 걸음마 단계입니다. 자칫 첫 번 다짐이 해이해 지고 성령과 매여 있는 믿음의 줄이 느슨하게 풀려 지기 쉽습니다 오늘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여 다시금 우리가 성령에 매여 있어 성령께서 행하시는 대로 따라 행하고 있으며 성령의 인도하시는 대로 성령 충만하여 성령의 열매들을 맺어가고 있으며 성령과 발을 맞추어 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아니하고 날마다 선과 악의 싸움에서 승리하며 살고 있는지 스스로 살펴 경성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 선생님처럼 우리도 “나는 성령에 매여 있다(푸뉴마티 에고 토 푸뉴마티)”라고 분명히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라온 코이노니아로서 새로 거듭난 교회적 사명을 올바르게 감당하려면 이전의 느슨한 그런 신앙태도로는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 너무 크고 엄중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린아이처럼 그러므로 처음부터 다시 걸음마를 걷는다는 심정으로 성령과 매어 있는 이 성령의 줄을 다시 붙잡고 성령과 함께 열심히 믿음생활 하기를 소원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우리 모두 성도들의 가정위에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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