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11일 주일아침예배 마23:1-13 혼네, 다테마에 (本音と建前)
오늘 설교제목을 부득이 일본말로 혼네 다테마에라고 붙인데 양해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 이유를 설교중에 말씀 드리겠습니다. 혼네란 본심 곧 속마음을 말하고 다테마에는 꾸밈 마음 겉마음을 말합니다. 일본 사람들의 대인관계에서 이 두마음을 절묘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국인은 속마음이나 겉 마음이 다르면 믿을수 없는 인간으로 상대하기를 꺼림니다. 그러나 일본 사람은 속과 겉이 같으면 남에게 자기의 속을 들여다보게 하는 어리석은 일로 여깁니다. 옛날 일본사람들은 막부가 막부의 절대 권력 밑에서 살았습니다. 만일 번주의 마음에 들지않은 말을 하였다가는 당장에 목이 날아갈판입니다. 그래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애매모호한 말을 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제가 딱히 그렇다고 말하지는 않았고, 그런 것 같다고 말했을 뿐이지만 생각해보니 그렇다는 것도 아니었고, 아니라고 했던 것도 아닌....”뭔말인지 모를 두리뭉실 자신의 속마음을 철저히 숨기었습니다.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증오의 칼을 갈았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1,000여년을 지내왔으니 겉과 속이 다른 일본의 심성을 가지고 있으니 겉으로 세계에서 가장 친절하다는 평을 듣는 일본 사람들이지만 그 속은 구렁이 살무사가 또아리를 틀고 있다는 것을 세계 사람들이 어찌 일본인들의 열길 물속을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속아 넘어가거나 그만 당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세계인들이 알아야 할 것은 그들은 강자 앞에서는 손을 비비며 허리를 굽신거리지만 상대가 약자라고 생가가면 여지없이 공격본능 사무라이 칼을 휘두릅니다. 일본인들은 약자에대한 배려나 돌봄이 없습니다. 그러나 강자에대해서는 속으로는 아니지만 겉으로는 무한한 종경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계인들이 알아야 할 것은 결코 일본인에게 약하게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약하게 보이는 순간 사무라이 칼을 그들은 휘두릅니다. 옛날 프로레슬러 김일선수의 빠치기를 당할 때면 링구석에 안자 손을 삭삭 비는 시늉을 하던 일본 선수들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등을 보이면 여지없이 달려듭니다. 이런 일본 앞에 만일 문재인정부가 아베에게 약함을 보인다면 그들은 1875년 12월 일본군함 운양호를 앞세워 고종을 겁박한 것처럼 그렇게 더 악랄한 억압을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일본과의 경제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할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일본의 거짓 곧 표리부동(表裏不同)하고 외식(外飾)에 쩌들은 혼네와 다테마에를 분명히 밝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을 ‘외식하거나 표리부동한 신앙인이 되지 말자’라는 강한 의도로 일본어 혼네와 다테마에란 말을 쓴데 대해 양해를 바랍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무리와 제자들을 향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 특히 위선을 지적하고, 그들을 본받지 말도록 경계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시 유대인들과 제자들에게 이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본받지 말라고 당부한 말씀하시었습니다.
2절에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모세의 자리’란 원래 회당에서 서기관들이 율법을 가르칠 때 앉았던 자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보다는, 모세의 위치와 권위를 나타내는 의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전수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모세의 신앙과 능력에 비하여 이스라엘 역사상 모세를 능가할 사람은 없었기 때문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존경받고 있는 신앙조상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시기 전에,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랍비, 즉 선생이라고 자처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입만 열면 나의 스승은 누구고, 그 스승의 스승은 누고이고 하면서, 마치 조선시대 양반들이 자신들의 조상을 자랑하듯이 모세를 언급하면서, 자신들이 모세의 정통 후계자라는 사실을 강조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이렇게 자신들을 모세와 연결시키며 스스로를 높이는 데 열심이었으면서도, 그들에게는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자로서의 책임 있는 삶을 보여 주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조선시대 자신들이 공자의 후예라고 자랑하면서 그 가르침에 따른 말과 행동을 보여주지 못하고 당파 싸움에만 몰두 하였던 사대부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율법을 말하면서도 그 율법에 따른 삶은 보여주지 않고 있음을, 그들의 겉과 속이 다른 위선을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책망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만 지적하신 말씀은 물론 아닙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는 좋아하면서도, 그에 합당한 의무와 책임은 잊어버리는 것이 보통입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란 말이 있습니다. 프랑스어로 "귀족은 의무를 갖는다"를 의미합니다. 보통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이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지위와 직분이 높아지면 특권이 많아지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지위와 직분에는 그에 따른 행동과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이름이 앞에 나타나기를 바라고 자기 얼굴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명인들이 있으면 그 뒤에라도 있어서 자기가 그 유명인들과 가깝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은연중 자랑하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전에 서울에서 어떤 유명한 목사님이 와서 여러 목사님들과 함께 사진을 찍게 되었는데 보통 그 유명인사가 가운데서면 대표되는 목사님이 그 옆에 서거나 연세가 높으신 분이 서게 되는 데, 한 젊은 목사님이 어디선간 다가와서, 그의 옆에 설만한 위치에 있는 분도 아닌데, 굳이 그 분 옆에 찰싹 붙어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를 나무라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 사진을 뽑아 보니 마치 자기가 그 모임에 아주 중요한 인사인 냥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은 속은 그럴만한 위상이 아닌데도 겉으로는 그럴듯한 모습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위선이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이렇게 자기를 나타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은 그 자리에 있을 만한 실력이나 자격도 없는데도 자리싸움에 혈안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좌우간 우리 사회에 평화가 없는 최대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저마다 높은 자리에 앉아 큰일만을 하겠다고 날뛰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데 있다고 봅니다. 덮어 놓고 높은 것 큰 것은 좋은 것이야하며 탐하는 것이 사람의 어쩔 수 없는 천성이라는 것을 시인하게 됩니다. 면사무소의 서기는 낮고 시장은 높은 사람이 아닙니다. 만일 면서기가 없으면 시장도 자기의 일을 제재로 할 수 없습니다. 면 서기는 면의 서기로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높은 사람이고 시장은 시장으로 최선을 다하는 높은 사람입니다.
저희 집에 뒷담이 담 밑으로 빗물이 스며들어 조만간 무너지지 않을까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옆집을 보니 몇 해 전에 시에서 축대를 쌓아주었는데 우리 집만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시장을 찾아가 부탁하여 우리 집 담을 고쳐달라는 부탁을 물론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시장은 제 청을 거절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모든 일에는 공과 사가 있고 순서와 질서가 있습니다. 그 일을 나포면에 있는 공무원에게 부탁을 하였습니다. 면 공무원이 저의 집에 나와 조사를 하고 돌아가 시에다 청원을 하였지만 시청에서 예산이 없다고 거절하였습니다. 저의 집 사정을 알고 있는 어느 분이 시의원에게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 시의원을 저는 알지 못한 분입니다. 일면시고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의원이 찾아와 집을 돌아보고 추경예산을 세워 꼭 고치도록 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돌아갔습니다. 이제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일 제가 면 공무원을 제치고 바로 시장이나 시의원에게 부탁하였다면 그 면 공무원은 무시를 당한기분이 들것입니다. 저는 그 공무원에게 결코 시의원에게 말한 적이 없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면 공무원은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저는 시장보다 시의원보다 나에게 더 소중한 분은 바로 우리 마을을 살펴주는 면 공무원인 것입니다. 면 공무원의 지위가 시장보다는 낮지만 나에게 높은 이는 바로 그 면 공무원입니다. 요즈음 내년에 국회의원이 되고자하는 국회의원들을 보면서 그들의 입에서 ‘국민을 위한다 또는 나라를 위한다’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서, 그들의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을 국민들은 알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국민을 위한다고 하지만 실상 내년에 국회의원 다시 재선되어 계속 권력을 누리겠다는 그들의 욕망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언행이 다르고 겉과 속이 다른 위선을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직분에는 거기에 알맞은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라에서나 어느 기관에서나 가정에서도 생활과 언행에 모범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특히 기독교인들이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자리 곧 높은 자리만 탐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경계하면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하고 행하지 아니하며”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본받지 말아야 할 이유로서, 저들이 전해주는 율법의 말씀은 지키되, 말만 하고 행치 않는 그들의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을 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언행이 불일치하는 사람을 가리며 표리부동한 자, 겉과 속이 다른 僞善者라고 부릅니다.
이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요즈음 일보의 총리 아베에게서 봅니다. 일본의 아베 – 그야말로 표리부동한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에 경제 보복을 하면서 경제보복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의 속은 한국의 부흥과 발전을 가로막고 일본의 세력을 확장시키려는 것입니다. 그의 속마음은 그러기위해서 먼저 일본이 군사 대국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재 일본의 헌법은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에 의해 제정된 평화헌법으로 남의 나라를 침략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군대를 양성하지 못하게 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아베는 이 평화헌법을 전쟁도 가능한 나라로 만들고 싶은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 도 그랬고 100여년 우리나라를 강제로 병탄시켜 일본의 식민지로 삼았던 것처럼 다시 야망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군대를 양성하고 무력도발을 일으켜 어쩌면 독도를 무력으로 빼앗자는 혼네 속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려면 일본헌법인 평화헌법을 고쳐야 하는데 그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그 명분을 한국이 조약을 지키지 않는 신뢰할 수 없는, 믿을 수 없는 나라다. 그러므로 한국에 자기들의 기술을 수출할 수 없다고 해서 이번에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 경제침략을 하는 것이 아베의 다테마에 겉마음 입니다. 100년 전에는 이처럼 겉과 속이 다른 일본의 정치인들에게 넘어간 을사오적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 같은 친일파들이 이등박문에게 나라를 넘겨주었고 ,지금은 아베에게 사죄하라 용서를 구하라고 목청을 높이는 엄마부대(주옥순)와 전 서울대 친일교수 이영훈 와 그런 친일파 교수들이 있습니다. 또 사랑 침례교회 김동수목사 외 여러 기독교 목사라는 사람들과 추종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으로부터 표리부동하고 위선이 가득한 사람들이라고 비난을 받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훼손하면서 모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은 믿음이 좋다고 하면서 실상은 사단의 졸개들이 되어버렸으니 우리는 그들의 말과 행위를 본받지 말라고 예수님은 오늘 본문 3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언제인가 국민일보에서 교계 지도자 100명을 대상으로 “한국 교회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라는 설문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습니다. 그 기사에 의하면 <한국의 초대 기독교는 사회 변화는 물론, 교육 의료 문화 복지 경제 등 모든 분야의 발전 주역이었으며, 사회통합의 주체였다. 이 전통은 오늘날에도 사회 전반에 걸쳐 도도한 물결을 형성하고 있다. 사회 약자들을 위한 사회시설은 대부분 기독교인이나 기독교 단체에서 운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대한 사회 전반의 목소리는 냉소적이고 냉혹하다. 우리 사회에 기여한 한국 교회의 공로에 비해, 그 평가는 인색한 편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 성장 둔화의 1차적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란 질문에 응답자의 35%가 ‘성도들의 신앙과 삶의 불일치’를 꼽았습니다. 즉 신앙인들의 겉과 속이 다른 표리부동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진실하시니 만큼, 하나님의 백성들도 진실하기를 원하십니다. 삼상 12:24에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고 했고, 시51:6에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라고 했습니다. 전킨선교사의 선교사역을 살피면서 이구동성 당시 선교사들이 그를 “진실한 목사 였다”라고 말한 것을 들으면서 저는 많은 감동과함께 제 자신을 돌아 보게 되었습니다. 과연 나는 진실한 목사로 살고 있는가? 언제인가 네가 세상을 떠난 후에 사람들이 저를 기억하기를 “그는 진실한 목사였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겠는가 과연 하나님께서 저에대한 평가가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너의 진실함을 내가 알고 있도다. 나와 함께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어라!”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을까? 그래서 저의 기도의 제목중 하나가 “주여 저를 진실하게 하소서”입니다. 저는 늘 입으로 흥얼거리는 복음성가가 있는데 바로 ‘주여 진실하게 하소서 오늘 하루 하루 순간을 주가 주신 힘으로 승리하기 원하네 주여 나를 진실하게 하소서’이 노래를 하루에도 수십 번은 흥얼거리고 있습니다. 제가 이 노래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노래의 원 영어가사의 의미가 더 마음에 들기 때문입니다.
“I will be true, Lord Jesus, I will be true!
I will be true, Lord Jesus, I will be true!
There is a race that must be true,
There is victory to be won
Every hour, by Thy I will be true.
주 예수여 나는 진실하리다. 나는 진실하리다!
주 예수여 나는 진실하리다. 나는 진실하리다!
달려가야 할 경주가 있아옵고
싸워서 이길 승리가 있나이다.
매 순간 주님으로 진실하리이다.
‘Every hour, by Thy I will be true 매 순간 주님으로 진실하기를’이 말이 저의 간절한 기도의 제목입니다. 제가 이 세상 떠난 후 혹 저를 기억하는 분이 있다면 ‘그는 진실한 목사였다’란 말을 듣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진실한 권사였었다.’고, ‘그는 진실한 집사였었다.’고, ‘그는 진실한 신자였었다.’ “그는 참으로 진실한 사람이었다.”라는 말을 듣도록 언행이 일치하는 삶을 살도록 힘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진실(구약:에메드, 신약: 알레데이아)’ 이것이 우리 믿음의 대종(大宗 the main item)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꼭 살아야 할 필요는 없으나, 진실해야 할 필요는 있다.” 그 무엇 보다 더 진실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꼭 살아야 하고, 꼭 성공하고, 꼭 건강하고, 꼭 장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꼭 진실하지 않으면 인생을 헛되게 사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주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경문’은 히브리어로 ‘테필린(Teflin 經文)이라 불리며 상자를 의미합니다. 쉐마 성경구절인 신6:4-9)을 양피지에 적어 그 작은 가죽 상장 보관합니다. 또한 ‘옷술(치치트)’이란 민 15:38-41절에 근거하여, 옷단 귀에 술을 붙인 것을 말하는데, 이는 유대인이 자신들을 이방인과 구별된 하나님의 선택백성으로 사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지금도 안식일이면 팔에 경문을 차고 길게 옷술을 늘어뜨린 특유의 거정 옷에 흰 가운을 입고 자랑스럽게 예루살렘 거리를 돌아다니곤 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유대인의 행동에는 어떤 잘못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들이 경문을 차는 것과 옷술을 달고 다니는 것 자체가 잘못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앞서 살펴보았듯이 경문이나 옷술 자체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었기에, 그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경문이나 옷술이 의미하는 본질 자체를 망각하고, 이를 오히려 자기들을 과시하는 자랑거리로 변질시키고 만 그들의 정신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말씀을 잊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경문과 옷술은, 모두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accessory장식품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목에 십자가 목 거리를 달고 다닌다고 다 진실한 기독교인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예수님은 13절에서 외식(外飾)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외식하는 자(hypocrite)란 단어의 본래 뜻은 ‘연극배우’입니다. 고대 극장에서 연극 연습을 할 때면 배우들은 오랫동안 연기할 대상들을 표현하기 위해 분장 대신에 가면을 쓰곤 했습니다. 배우들을 지켜보는 이들은 그 배우들의 생활을 보고 진짜 배우의 삶인지 아니면 배우가 역할하는 사람의 생활인지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상에 외식하는 연극배우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은 누구인가 알아맞히어 보십시오. 여러분도 잘 아는 분입니다. <그는 오사카 조선인 부락에 살면서 목장 인부로 일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4남 3녀중 3남으로 태어 났습니디. 해방후 고햐에 돌아와서도 여전히 아버지는 목자의 인부로 기독교인인 어머니는 시장에 채소를 팔았습니다. 너무 집안이 가난하여 이 사람은 서울로 올라와 야간 상고를 다니념서 수레를끌고 다니며 뻥티기, 과일행상으로 생활하였습니다. 고교를 졸업후 일당노동자로 합숙소에 다니면서 밤에는 서울 청계천 헌 책방에서 구입한 책으로 공불ㄹ 하면서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에 합격을 하였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신앙을 이어받아 교회생활과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대학을 졸업힌 후에도 새벽 4시면 이태원 시장에 나가 쓰레기를 수거하여 반포댁 인근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는 일을 하여습니다. 그것은 한일국교반대시위를 한 전력 때문에 취직이 안되었던 것입니다. 어는ㄹ 작심하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자신이 당한 부당한 대우에대해 편지를 보내었습니다. 박정희가 그를 인정해주고 현대건설에 취직을 시켜 주었습니다. 그는 현대건설에서 사장까지 올라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교회에서도 그의 신실한 신앙생활을 인정받아 장로로 장립이 되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더욱 갈구하며 서울시장이 되고 마침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는 대통령 조찬 기도회 때 부인과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므로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매일같이 청와대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는 불도저같이 국정을 밀어 나갔지만 그의 욕망은 끝이 없었습니다. 국민들의 신망을 잃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내 대통령 퇴임 후 여러 가지로 연루되어 뇌물수수, 횡령등의 혐의로 구속되고 재판부는 그에게 징역 15년 벌금 130억 원을 선고 받았습니다. 지금도 그는 옥중에 갇혀 있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 입니까? >
아마도 누구나 이 사람을 알것입니다. 이 명박대통령입니다. 그는 장로교회 장로로 독시한 기독교인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말년에 수감생활을 하여야 했습니까?
아직 저는 그를 탓하거나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겉으로는 기독교 장로였지만 속사람은 진실하지 않은 외식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오늘의 모습은 바로 이 외식한 바리새인과 같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종교적인 대통령이였습니다. 하지만 내적인 실제는 전혀 없었던 외식과 거짓으로 가득 찬 마귀의 사람이 아니었겠습니까? 왜냐하면 진실이 결여된 사람은 바로 마귀의 자식으로 전락이 되 버립니다. 진실이란 이름을 겉으로 낸 진실하지 않은 한 여인을 우리는 또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진실이 결여 되면 마귀가 틈타 그를 자신의 수하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아베는 많은 일본인들에게 지지와 박수를 받는 일본의 총리입니다. 그는 일본인들의 신사에 들어가 경건한 포즈를 짖고 경배를 합니다. 그는 일본을 위해 군사대국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는 중국과 북한의 핵무기 위협으로부터 일본인들을 그리고 동아시아 평화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개발하고 군대를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소리는 옛날 일본 제국주의가 하던 소리나 똑 같습니다. 결국 그들은 태평전쟁을 일으켰고 마침내 원자폭탄 두 방을 맞아 수십만 일본인들을 죽게 하고 무조건 항복하였습니다. 지금 진실하지 않은 혼네와 다테마에가 다른 아베가 가는 길은 일본이 망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일본 아베총리가 하는 일은 결국 일본 자신들에게 엄청난 화가 되어 돌아갈 것입니다.
이처럼 외식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그럴 듯 속이는 것 같으나 하늘의 하나님을 속이지 못하고 또 땅에 사는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이니 속이는 자는 자기를 속이는 일로 스스로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기위해서 진실해야 합니다. (Thou shall be true to thyself.)
세상에서 사업하는 사람들 중에 이런 외식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 중에도 입으로 국민을 위하고 새로운 개혁 정치를 위한다고 하지만 다 뻥이요 스스로의 외식하는 자임을 자인하는 일일뿐입니다. 누가 지옥에 갑니까?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옥은 오직 진실을 외면한 외식자들만 갑니다. 지옥은 외식자들의 천국입니다. 외식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지금 이 세상이 지옥 같기 때문에 이렇게 혼란하고 분쟁과 다툼이 끊일 새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우리의 믿음을 온전히 지켜야 합니다. 외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절대로 닮아가서는 안됩니다. 혹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교회에 나오지 않고 예수님께 순종하지 않는 이유가, 위선자들을 싫어하기 때문이라면, 그러한 분은 지금 이 시간 자신의 거울을 들여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외식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모든 거짓과 허위는 설 곳이 없게 되고, 우리의 참된 모습대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은 척 하는 사람이 가장 큰 외식하는 사람입니다.
요즈음 정치권을 보면 대표자리를 내려 놓으라 못 내려 놓겠다 그러면 우리는 탈당하겠다하는 자리다툼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국민들은 눈살을 찌프립니다.
그런데 이렇게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이냐를 놓고 다투는 우리 인간들에게, 주님께서는 참으로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즉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낮고 천하다고 싫어하는 십자가를 바라보시며,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실 일을 가리켜 “내가 높이 들릴 것이다”라고 하셨고, 가룟 유다가 주님을 팔기 위해 슬그머니 자리를 떠날 때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다.”고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주님은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고 따르기도 힘든 말씀이지만, 아니요 우리 기독교인들이 반드시 있어야 할 자리는 그 높은 자리가 아닌 낮은자리 입니다. 왜 국회의원이 되려 합니까? 금뺏지 달고 1등석 비행기를 타고 의시되려는 것이지 진정 국민을 주인으로 섬기는 종복의 자세는 그 어느 국회의원에게서도 볼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어째서 회당과 잔치의 상석이 진정한 상석이 아니고, 가장 낮고 천하며 수치스러운 십자가가 최고의 상석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런데 당시 여러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높은 자리만 탐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과연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의 바람대로 실제 높아졌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성과 함께 죽었고 오늘날 겉과 속이 다른 외식한자들을 바리새인 같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바리새인들의 눈치를 보던 빌라도총독은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비겁한 빌라도라는 비닌을 듣고 있습니다. 하지만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오셔서 아무도 지지 않으려는 치욕과 고난의 십자가를 지셨던 주님께서는, 영광의 보좌에 앉으셔서 영원토록 만물의 찬양 받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과연 “십자가 없이는 영광도 없다”(No Cross, No Crown)는 말은 영원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영안을 떠서 과연 어느 자리가 진정한 상석인가를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자리가 상석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앞이 가장 앞자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자리가 상석입니다, 왜 그렇습니꺼? 예수님과 함께 하는 가장 영광스런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 땅의 상석으로 달려가는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십자가로 향하는 삶을 살아서, 세상의 헛된 영광을 구하던 자들이 가슴을 치며 후회할 때, 우리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쓰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대통령과 국회의원들 정치인들이 혼네 다테마에가 속과 겉이 다른 아베를 닮지 말고 진실한 정치인들이 되기를 바라면서, 우리 기독교인들도 겉과 속이 다른 바리세인이나 서기관이 아니라, 이세상의 그 어떤 외식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내 자리를 펴지 말고 언제나 하나님 앞자리 곧 하나님의 눈으로 보시는 Coram Deo 그 진실한 자리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라온 코이노니아는 이처럼 시종여일 신실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축복의 자리로 이 자리에 계신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풍성한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