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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8월중 주일아침 예배 설교

전병호 by  조회 수:23 2021.08.29 10:20

8월중 주일아침 예배 설교

 

2021년 8월 1일 슥14장 07절 - 8절  여름은 축복의 계절             1

2021년 8월 15일  삿 9: 14-15  가시나무 인생에서 해방              6

2021년 8월 22일 고후 12:10  작은 기쁨 큰 행복                      17

2021년 8월 28일  시39:1-13  夢幻泡影                                 24

 

 

 

 

 

2021년 8월 1일 주일아침 예배  슥14장 07절 - 8절  여름은 축복의 계절

 

 

어떤 철학자는 “인간은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지 않는다.”고 했는데 저는 여름에서 교훈을 배웁니다.

“여름”을 히브리어로 “카이쯔”라 부릅니다만 이 말에 변화를 주면 “케쯔”가 되어 “종말”이라는 뜻이 됩니다. 여름은 곧 종말이고 종말은 곧 여름입니다. “카이쯔”, 여름이 동사로 바뀌면 “카바쯔”가 되는데 이 말은 “벌벌 떨다. 시들다. 죽다”의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른 아침부터 햇빛이 쏟아 부어 사람들을 공포와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3,4월부터 여름이 시작되면 5월경에는 이미 모든 풀들이 죽습니다. 성경 이사야40:6-7절입니다.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마6:30절에는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질 들풀도 하나님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여기서 “아궁이에 던질 들풀”이란 말이 나옵니다. 엊그제 하늘에서 비가 올 때만 해도 그렇게 생기발랄하던 풀들이 뜨거운 여름 햇빛에 누렇게 죽어갑니다. 그러면 농부들이 그것을 거두어 아궁이에 넣고 태웁니다. 어떻습니까? 이번 여름도 대단히 더울 조짐입니다. “아, 이렇게 날씨가 더워도 힘드는 데 하나님의 심판의 불속에 빠지면 얼마나 더울까?” 여름을 통해 앞으로 오게 될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해 본다는 것이 여름이 주는 축복입니다.

 

이스라엘의 여름은 더웁지만 한 가지 좋은 것은 그늘로만 들어가면 시원하다는 것입니다. 시편121:5-6입니다. ”여호아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아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에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리라“. 이스라엘의 그늘은 우리의 그늘과는 다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더울 때 그늘 밑으로 가나 그늘밖에 있으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푹푹 찌는 더위는 그늘이라도 해서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다릅니다. 그늘만 들어가면 시원합니다. 이번 여름, 더울 때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아, 인생은 덥지만 하나님께로만 가면 시원하다.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시다“. ”피난처 있으니 환란을 당한 자 이리오라. 땅들이 변하고 물결이 일어나 산위에 넘치되 두렵잖네“. 무더운 여름 하나님의 그늘을 찾아 교회에 하나님이 시원케하시는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 말 “여름”의 뜻을 아십니까? “여름”은 “열다”라는 동사의 명사형입니다. 여름은 곧 “열음”입니다. 왜 그래요? 여름은 열매가 맺히는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바치라고 말씀한 첫 열매는 모두 여름의 뙤약볕을 받고 자란 식물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포도가 맛있는 것은 그 뜨거운 햇빛 때문입니다. 햇빛이 뜨겁기 때문에 잘 익고 답니다. 포도보다는 약간 높은 지역에서 자라는 감람열매는 포도보다는 약간 늦은 9월 경에 수확됩니다. 무화과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이른 무화과는 유월, 늦은 무화과는 팔,구월에 수확됩니다. 종려나무도 여름에 수확됩니다. 석류나 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모두 땅에 뿌리를 박고 뜨거운 여름의 햇빛을 받아 아름답게 익어 갑니다. 하 여름에 수박을 쪼개어 화재를 해먹으면 얼마나 시원하고 맛있습니까? 
저는 마당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잡초를 뽑고 있었습니다. 나는 너무 힘들어서 투덜대며 말했습니다. “이 지긋지긋한 잡초가 왜 있을까? 하나님은 왜 이런 필요없는 잡초를 만드셨을까?” 그때 뽑혀진 잡초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나를 필요 없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나는 매우 유익한 존재입니다. 나는 흙속에 뿌리를 내려서 흙을 갈아주고 있습니다. 또 비가 오면 물을 품어 필요할 때 공급해 줍니다. 건조할 때는 먼지가 날리지 못하도록 막아줍니다. 그리고 비가 오면 흙이 휩쓸려가지 않도록 붙잡아 줍니다”. 저는 잡초의 말을 듣고  잡초를 소홀히 여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에 이유가 있습니다. 잡초가 불필요한 것이 아니듯이 여름도 만가지 열매들이 믹어가는 우리의 생활에 필요하고 중요한 계절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사계절이 뚜렷합니다. 계절에 따라 전혀 다른 옷이 필요해서 옷 사는데 돈이 필요하지만, 사계절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은 대단히 큽니다. 생활이 단조롭거나 지루하지 않고 변화가 있어 다양해서 좋습니다.

 

여름은 곤충에게도, 식물에게도 사람에게도 필요한 계절입니다. 여름은 무덥고 지루하지만 여름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계절입니다. 여름의 강열한 햇빛은 과일을 익히고 가을을 준비하게 합니다. 여름의 뜨거운 햇빛은 사람들의 얼굴과 등에 땀이 나게 하지만 그래야 몸 안에 쌓여 있던 노폐물이 제거됩니다. 여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첫 번째는 땀을 식혀주는 부채일 것입니다.

여름에 우리가 살아가는데 부채보다 백배나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물일 것입니다. 열대야와 같은 더위로 밤에 잠 들기가 쉽지 않은데, 자다가 일어나 냉장고 문 열고 시원한 물 한 컵 마시고 다시 누우면 온몸이 시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다로 계곡으로 수영장으로 물을 찾아 떠나는 것 같습니다. 더운 여름철에 우리에게 시원한 물이 필요합니다. 생명체가 살아가는데 공통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곧 물입니다. 물은 생활과 생명의 근원입니다.

오늘 말씀에 하나님이 생수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생수(生水, living water)는 말 그대로 살아있는 물입니다. 물에는 죽은 물이 있고 살아 있는 물이 있습니다.
죽은 물에서는 물고기가 살 수 없습니다. 죽은 물에는 산소가 없고 죽은 물을 마시면 죽습니다. 그러나 생수는 살아 있는 물입니다. 그 안에 산소가 들어 있고 그 안에 먹이가 들어 있고 그 안에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생수는 우리의 육신에 생명을 부여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수는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생수가 됩니다. 무더운 여름,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피곤하시고 갈증이 나시고 햇볕은 내리 쬐고... 예수님께서 수가라는 동네 우물가에 피곤에 젖어 앉게 되셨습니다. 때 마침 어느 여인이 두레박을 가지고 물을 길러 왔다가 예수님 만나게 되었습니다. "마실 물을 좀 달라"는 주님의 말에 어색해 하고 의아해 하는 여인을 향하여, "내가 생수의 근원이다. 내가 곧 우물이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지 않을 것이고, 그 속에서 영원토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생수가 되시고 생수의 근원이 되십니다. 생수는 살아 있는 물이고 살리는 물입니다. 생수는 곧 말씀입니다. 생명에 생기를 주는 것은 말씀의 은혜입니다. 생수는 기쁨과 평안의 은혜입니다. 생수는 축복과 희망의 선물입니다.

 

오늘 말씀가운데 이 생수에 대하여 세 가지 진리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상징합니다.
생수는 성경적인 표현으로는 말하자면 솟아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물이 없어 목마르다고 불평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반석을 통해 물을 주시고자 하였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쳤더니 물이 솟아 나왔습니다.

 

시편에서는 말씀하시기를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하감하였도다" (시 85:11)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 마다 그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는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라고 하였습니다. 솟아난다는 것은 깨끗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솟아난다는 것은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지독한 가뭄에 저수지의 물은 줄어들고 흘려 내보내는 물의 양은 줄어들지만, 주님에게는 가뭄이 없습니다. 주님의 저수지에는 생수가 가득하고 언제나 솟아나는 샘물이 있기 때문에 가뭄이 없습니다. 주님이 없어서 혹은 부족해서, 모자라서 못 주시는 경우는 없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예수님의 말씀의 생수가 흘어 넘치게 됩니다. 저는 50년 동안 설교를 하였지만 한 번도 똑같은 설교를 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새로운 생수로 영혼의 메마름을 적시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영적인 가뭄이 없습니다. 목사님이 어느 집사에게, "집사님, 요즘 경기가 어때요?"라고 물었습니다. 대답하기를 "목사님, 말도 마세요. 가뭄이에요. 오랜 가뭄이에요"라는 것입니다. 의미를 잘 몰라 "가뭄이라니요?"라고 했더니, "돈 가뭄이에요. 많이 말랐어요"라는 것이었습니다.

 

가물고 마르면 땅이 푸석거리고 먼지가 날립니다. 메말라집니다. 가뭄을 만난 사람은 그 마음 밭에 먼지가 날립니다. 푸석거리고 먼지 나는 곳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주님에게는 가뭄이 없습니다. 주님에게는 솟아나는 사랑과 은혜가 있습니다. 무한한 저수지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코로나가뭄 때에 더욱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나와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그 생수의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흘러간다고 했습니다. 여름철에 사람들이 동해안으로 가고 서해안으로 가는 것처럼, 생수가 동해와 서해로 흐른다는 것입니다. 세상각처로 골고루 흐른다는 것입니다. 세상 어디로나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나 은혜는 사람이나 여건이나 환경을 초월합니다. 복음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별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든지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흐르는 물은 낮은 곳일수록 잘 흘러 들어갑니다.
낮아지고 가난해진 여러분의 심령에게 여름날의 축복이 강물과 같이 흘러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생수가 여름에도 겨울에도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연중 강우량이 부족합니다. 그나마 여름에는 건기입니다. 땅이 마릅니다. 물냉면을 참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여름에 먹어도 겨울에 먹어도 감칠맛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생명수는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한 역사를 일으킵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날, 몸도 마음도 지치기 쉬운 계절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요즈음 일본에서 열리고 있는 올림픽에 우리 선수들이 땀 흘리며 열심히 경기를 하고 있습니다. 무더위로 힘들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생수가 흘러 그들의 육신을 시원하게 하고 그들의 영혼을 생기 있게 해주심으로 올 여름에 하나님의 축복을 풍성히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라온 코이노니아 여러분들도 여름이 무덥다고 짜증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의 계절임을 알아 풍성한 인생의 복락의 생수가 넘쳐흐르는 8월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021년 8월 15일  8.15 광복절 기념 주일아침 예배   삿 9: 14-15  가시나무 인생에서 해방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 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30여 년 간 나무들을 돌보며 아픈 나무들을 살려내는 나무 의사라는 별명을 가진 우종영씨가 펴낸 책입니다.(2001년 첫 출간하여 10만권이상 베스트셀런. 재판2021.2.8. 메이븐) 이 책은 30여 개의 나무들을 소개하고, 연리지와 해거리, 곡지 등 나무의 특성과 생존법을 통해 배운 단단한 삶의 지혜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 소개된 나무들을 읽어가는 동안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항상 우리 주변에 있었지만 무관심하게 여겼던 나무와 다시 친구가 되어 녹색 빛 여유로움을 되찾기를 바라는 마음이 책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사는 게 힘들다는 생각이 들면 속는 셈치고 나무를 찾아가 보기를 권합니다. 나무는 분명 당신의 지친 마음을 가만히 위로해 줄 겁니다.” 그는 나무와 함께 살면서 나무에게서 배운 인생의 지혜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겨울이 되면 가진 걸 다 버리고 앙상한 알몸으로 견디는 그 초연함에서, 아무리 힘이 들어도 매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그 한결같음에서, 평생 같은 자리에서 살아야 하는 애꿎은 숙명을 받아들이는 그 의연함에서,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생명체와 더불어 살아가려는 그 마음 씀씀이에서 나는 내가 정말 알아야 할 삶의 가치들을 배우고 있습니다.”
회양목을 소개하면 서 “"나무의 직경이 한 뼘 정도 되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까. 회양목이 그 정도의 직경을 가지려면 최소 50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느림보라는 별명이 꼭 어울리는 회양목. 그러나 그렇게 더디게 성장하는 동안 회양목은 그 속을 다지고 또 다져 그 어떤 나무와도 비교할 수 없는 단단함을 지닌다. 그리고 이 단단함은 귀한 가치를 지녀 도장을 만드는 훌륭한 재료로 쓰인다."

 

자작나무를 소개하면서 “밤 새워 연애편지를 썼었습니다.-자작나무의 하얀 수피를 조심스럽게 벗겨 내 그 위에 때 묻지 않은 연정의 편지를 써서 보내면 사랑이 이루어진단다. 이루지 못할 사랑일수록 자작나무로 만든 편지가 힘을 발휘한다나...겉보기와는 달리 자작나무의 수피는 살을 에는 듯한 강추위를 어떻게 견뎌 낼까 싶을 정도로 무척 연하고 부드럽다. 추위를 잘 견디기 위해 수피 밑에 지방을 잔뜩 비축해놓다보니 그리 된 것인데 그 덕분인지, 아니면 정말 전설이 효험이 있어서인지 자작나무는 오래 전부터 사랑의 매개체 역할을 해 왔다. ” 저자의 다른 책 “바림”에서는 “태풍이라도 불어오면 자작나무는 발광하듯 흔들어 대지만 결코 부러지는 법은 없다. 자작나무 가지는 낭창낭창하기 때문에 바람이 불면 마치 먹을 가득 머금은 붓끝이 화선지 위를 미끄러져 가듯 부드럽게 휜다.(146쪽)”

 

대나무에게서도 배웁니다. 다른 나무들은 살면서 수십 번, 많게는 수천 번까지 꽃을 피우지만, 대나무는 단 한 번 꽃을 피우고 즉시 생을 마감한다. 그래서 대나무에게 있어서 꽃은 아픔이요, 고통이다. 단 한 번 개화한다는 운명도 애달픈데 거기에 목숨마저 내놓아야 하는 대나무의 삶. 그러나 대나무는 죽는 그 순간까지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죽음의 순간, 조금이라도 삶을 연장하기 위해 발버둥 친다거나 다음 해를 기약하며 땅 속 줄기를 지키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제대로 된 꽃을 피우기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다. 그런 대나무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이런 기원을 하게 된다. 내 남은 삶이 대나무처럼 주어진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용기 있는 모습이기를.(“받아들이는 용기를 가르쳐 준 나무” 중에서)

저자는 고달픈 삶을 포기하려던 젊은 날, 나무로부터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은 뒤로 나무를 치료하는 의사가 되었습니다. 아픈 나무들을 돌봐 온 지도 벌써 30여 년,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티는 도심의 아픈 나무들부터 아주 오래된 고목까지, 그의 손을 거쳐 되살아난 나무만 해도 수천 그루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아직도 나무에게 받은 것이 더 많다고 말합니다. 나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나이 많은 생명체이자 그 무엇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지금 이 순간을 현명하고 지혜롭게 살아 내는 존재로서 배울 점이 너무나 많은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우종영씨는 오리나무에게서는 삶에도 휴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회양목에게서는 왜 남들보다 느려도 자신만의 속도로 살아야 하는지를, 대나무에게서는 받아들이는 용기를, 은행나무에게서는 얻기 위해서는 잃어야 할 것도 있다는 사실을, 전나무에게서는 더불어 산다는 것의 의미를 배운다고 합니다. 이밖에도 나무에게서 배운 육아의 지혜, 기다림의 미학, 가까운 사이에도 적당한 거리가 필요한 이유 등 나무의 특성과 생존법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얻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제는 살 날 보다 살아온 날이 더 많은 나이가 되었다. 남은 날들을 무엇으로 채울 겁니까? 누군가 나에게 물어 온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 꼭 나무처럼만 살고 싶다.”(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책 소개에서 참고)

 

이처럼 나무는 우리 사람들에게 여로가지 혜택을 주는 친구 같은 나무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유독 가시나무에 대해서만은 좋게 여기지 않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창조하신 동물들 가운데 뱀처럼, 예수님의 제자가운데 가룟유다처럼, 나무들 가운데 가시나무를 저주스러운 나무로 취급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가시나무’는 죄와 저주, 형벌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사용됩니다.(창 3:18, 잠언 15:19, 히 6:8) 특히 오늘 아침 봉독한, 사사시대 요담의 비유에서 가시나무는 사악한 왕 아비멜렉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기드온 사사가 죽은 다음 아들 중 한 사람인 아비멜렉이 왕의 자리를 탐내어 70명의 이복형제를 살해하고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의 아들 중 딱 한 사람 요담이 아비멜렉의 칼로부터 도망쳐 그리심 산(해발855m, 평지에서310m) 꼭대기로 가서 세겜 백성들에게 소리쳐 말하기를, 아비멜렉은 가시나무 같아서 나라가 어지럽게 하고 백성들이 심한 고통을 당할 것이란 말을 마무우화를 통해서 말합니다. 이 우화를 요담의 나무우화라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를 다시 들어 봅니다. 어느 날 나무들이 왕을 세우고자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를 찾아가 자기들의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하나 모두로 부터 겸손히 거절당합니다. 그래서 나무들은 가시나무에게 왕이 되어 줄 것을 청하였고, 가시나무는 주저도 없이, 아니 오히려 오만하게 수락을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 정치권에서는 내년에 있을 대통령선거 때문에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인가? 후보자들이 제각기 자기가 되겠다고 큰 소리들을 치고 있는데, 문제는 가시나무같은 아비멜렉이 대통령이 되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지역에서 가시나무가 환영 받지 못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잎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늘을 만들지 못합니다.  또한 나무가 어느 정도 자라 약간의 그늘이 있어 가시나무 아래로 들어간다 해도 잘못하여 가시에 찔리기 때문에 편안함을 주지 못합니다. 둘째는 열매가 없습니다. 땅을 차지하고 수분과 영양분을 빼앗아 가지만 그늘도 열매도 없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싫어버림을 받고 있는 가시나무입니다. 그런 가시나무가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스러운 나라의 장래가 위태로워 질 수 있는 일이라 할 것입니다. 만일 기준을 정한다면 하나는 남을 찌르고 해치고 교만한 가시나무 아비멜렉 같은 사람은 대통령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통령 후보감으로 감람나무 같은 사람이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감람나무는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감람나무(올리브나무)는 열매, 기름뿐만 아니라 목재로도 귀중하게 사용되는 나무로서 이스라엘 지방에서 가장 귀한 나무 중의 하나입니다. 감람유는 소제를 드릴때(레2:1,2), 제사장, 선지자, 왕을 세울 때(레8:12, 삼상16:13, 왕상19:16) 붓는 의식용 기름으로 요긴하게 사용되었고, 연료(마25:3), 의약(눅10:34), 음식(대하2:10)으로도 유용하게 쓰여 졌습니다. 감람나무는 왕의 자격 충분한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감람나무는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라고 말하면서 싫다고 거절합니다.  “요동하다”라는 말은 ‘라누아’라는 말로 ‘뒤흔들기 위해서’라는 뜻입니다. 권력을 마구행사하며 백성들을 제 멋대로 뒤 흔드는 왕이 되기 싫다는 말입니다. 이승만 대통령 당시 한경직 목사님께 사회부 장관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한 목사님은 “각하, 저는 목사입니다. 설교를 해야 하고, 심방을 해야 하며, 기도를 해야 하기 때문에 장관이 될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다음으로 나무들은 무화과나무에게 가서 우리의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무화과  나무는 “나의 단것, 나의 아름다운 실과를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라고 말하며 거절합니다. 무화과나무 열매는 설탕이 없던 고대 근동에 당분을 제공했고, 식용(삼상30:12,렘5:17), 치료약(왕하20:7)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성경에서 많은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는데 포도나무와 더불어 번영과 평화를 나타내기도 하고(왕상4:25), 소출이 적어지거나 없으면 곤궁이나 심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렘5:17, 시10:33) 또한 무성한 잎은 사람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 쉼터가 되기도 했습니다(요1:48). ‘아름답다’라는 히브리어의 ‘핫토바’는 ‘좋은(good)’ ‘유익한(profitable)’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맛이 좋고, 영양가가 풍부하여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주는 것을 뜻합니다. 무화과나무가 왕이 되었으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나무들은 이제 포도나무에게 가서 부탁을 합니다, 포도나무는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나의 새 술을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라고 역시 거절합니다. 포도나무는 성서에 은유적으로 매우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는 나무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선민을 상징했고(시80:8-14), 전제로 드려졌으며(레23:13), 치료제였고(눅10:34), 잔치 때는 물론(요2장), 주요 음료수로도 사용되었습니다(창27:25,28). 까닭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 나무였습니다. ‘기쁘게 하는(함메솸메아흐, 쌈메아흐의 piel part. s. m. dec)’는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함에 있어 지속적으로 엄청나게 즐겁게 한다라는 의미입니다. 포도는 유대인들에게 철분과 여러 가지 미네랄을 제공하는 중요한 식료품이요, 기호품인 동시에 하나님께 전제로 드려지는 제물이었기에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나무였습니다. ‘내가 어찌 버리고’라는 히브리어 ‘헤호달르티(원형: ㅋ하달)’는 ‘중단하다’ ‘단념하다’라는 의미로 본절은 ‘결코 그럴 수 없다’라는 반어적 표현입니다.
감람나무, 무화과 나무, 포도나무, 이 나무들은 왕으로서의 자격을 충분히 갖추었건만 모두가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 직분이 왕의 자리와 결단코 바꿀 수 없는 귀하고 중요한 것임을 강조하며, 겸손히 왕의 자리를 사양하였습니다.
결국 나무들은 성 밖 절벽 가장자리 벼랑을 차지하고 있는 가시나무에게 왕이 되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위에 왕으로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가시나무’라는 ‘아타드’는 ‘찌르다’라는 어근에서 유래한 이름이며, 황폐(사32:13), 파멸(사34:13), 고통(잠26:9),등에 비유되고, 본문에서는 포악한 아비멜렉을 상징합니다. ‘와서...피하라’는 히브리어‘뽀우 하쑤’는 ‘위험을 피해 보호를 받으라’는 의미합니다. 가시나무는 열매도 없고, 기름도 없으며, 허다 못해 태양을 가릴만한 넓은 잎조차도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날카로운 가시로 찔러 상처투성이를 만들고, 주위에 해만 끼치는 무가치한 나무입니다. 그런데 자기 그늘에 보호를 받으라함은 말이면 다하나 터무니없는 말입니다.  ‘불이...사를것이니라’는 히브리어 ‘에쉬...에토칼’은 ‘불이 모조리 태워 소멸시켜 버린다’ 라는 뜻으로 세겜사람들이 자기(아비멜렉)를 왕으로 세우지 않으면 모조리 불태워 죽일 것이라는 말입니다. ‘백향목’이란 높은 지위에 있던 이스라엘 방백들을 의미합니다. 이 우화는 아비멜렉의 포악함을 비꼬고,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움이 참으로 어리석은 것임을 풍자함입니다. 분수를 모르면 오만하고, 패역한 말과 행동을 하면서도 그것이 죄악인 줄을 모릅니다. 주제 파악을 못하고, 다만 권력에 탐을 내어 너도 나도 대통령 후보에 이름을 내미는 사람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요담의 우화에 나오는 가시나무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해질 무렵 한 마리 여우가 광야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저녁 때 황혼의 빛에 길게 늘어진 자기 그림자를 보며 여우는 말했습니다. “내가 이처럼 큰 몸을 갖고 있으면서 호랑이를 무서워하다니... 말도 안 돼! 내가 이렇게 큰데 짐승의 왕이 되는 것쯤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잖는가? 내가 왕이 됨은 시간문제다” 때마침 사자가 그 곳을 지나다가 여우를 보고 중얼 거렸습니다. “아니, 생각지도 않은 곳에 내 밥이 있다니...” 여우가 사자에게 잡혀 죽으면서 지른 비명입니다. “자기 분수를 모르고 우쭐거리는 것이 나의 불행의 씨앗이다.”
 
이 우화 내용을 조금 다르게 이해를 해 봅니다. 감람나무를 왕으로 세우려 했을 때에 반대 파들이 있었습니다. 항상 좋은 사람에게는 나쁜 사람들이 수근 거리며 유언비어 가짜뉴스를 퍼트리기 마련입니다. 온갖 욕설과 모함을 하기 마련입니다.  몇 년 전 감람나무 열매가 맛이 없었다는 것을 트집 잡습니다. 왕이 되면 왕 노릇에 바빠서 열매를 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무화과나무는 다메섹무화과 보다 맛이 없다고 유언비어를 퍼트립니다. 포도나무는 사람들에게 밤낮 포도주만 마시게 하여 술중독자들이 많아 질것이니 왕이 되게 하면 안 된다고 모함 합니다. 그러나 가시나무는 가시가지로 나라를 둘러치면 외적이 처 들어오지 못할 것이니 국방이 튼튼하고 백성들이 평안하게 살 것이라고 선전합니다, 사람들이 가시나무를 적극지지 하였습니다. 가시나무는 잎이 없어 자신을 다 내어 보이는 청렴한 나무이고, 열매를 필요로 하지 않으니 부정축제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시나무에 미쳐 힛틀러가 독일 총통이 되고 스타린이 러시아 수상이 되었습니다. 일본천왕이 우리나라를 잘 보호할 것이라 이완용은 적극 일본을 지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가시나무가 왕이 됩니다. 백성들이 알아야 할 것은 지금 대통령 후보들과 그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간의 오고가는 말들은 모두 가시돋힌 말들입니다. 조선시대 정양용을 유배를 보내고 가시나무를 담으로 둘러쳤습니다. 이것을 위리안치라 합니다.  가시나무 지도자는 백성들을 가시나무로 둘러쳐 圍籬安置시켜 제멋대로 정치할 것입니다. 전두환씨가 대표적인 가시나무 대통령이였습니다. 광주를 공수부대로 탱크로 둘러치고 기관총을 갈겨 댔습니다. 감람나무 같은, 무화과나무 같은, 포도나무 같은 인격의 사람이 대통령후보로 나오기가 어려운 나라입니다. 왜냐면 가시나무들이 여기저기서 있는 말, 없는 말로 마구 찔러 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가시나무 같은 대통령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의 어렵고 힘든 세상살이에 그들의 심사에도 가시가 돋아 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간에 대화에도 가시돋친 말들이 사납게 오고 가다가 그 때문에 화내고 다투고 합니다.  지금 신문에, tv 뉴스나 패널 토의에서 그런 가시돋친 말들이 오고가는 것을 보고 듣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우리는 몇 가지 이상한 장면을 보게 됩니다.

 

모세가 처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데 불붙는 가시떨기나무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출 3:2, 눅20:37에서 이 기사가 기록되어 있는 부분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the passage about the bush)'이라 하였습니다.(*눅 6:44에서는 같은 원어가 '찔레'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가시나무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셨을까요? 앞으로 모세가 애급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게 될 터인데 그곳은 마치 온통 가시떨가나무가 꽉 들어찬 곳이며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 것은 그 가시덤불 가운데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가시와 찔레가 욱어져 있는 세상입니다. 우리의 인생가운데 온갖 가시들이 찔러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말 것은 하나님은 저 평평한 곳에 편히 쉬고 게시지 아니하시고 우리와 함께 이 가시넝쿨 세상 가운데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이 가시넝쿨을 헤치고 능히 이기며 살아가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주목하여 볼 것은, 십자가상에 예수님께서 가시관을 쓰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 없이 조롱과 멸시의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그 머리에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로마 빌라도법정에 예수님이 기왕에 채찍에 맞아 피투성이의 모습으로 서 있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십자가형을 선고하자 로마 군인들은 자색 옷을 예수님에게 입히고 관저 마당에서 자라고 있던 가시나무를 꺾어 관을 만들어 씌웠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 하여 조롱과 학대하는 일로 가시관을 만들어 씌웠던 것입니다. 마 27 : 29에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요19: 1-3에서도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 예수님의 이마는 바늘처럼 날카롭고 단단한 가시에 찔려 붉은 피가 주루루 흘러내렸습니다. 십자가 위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팻말이 붙었습니다.

 

수난과 고통, 모욕의 상징이기도 한 가시면류관은 어떤 나무로 만들어졌을까. 성경은 가시면류관을 어떤 나무로 만들었는지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학자마다 의견도 분분합니다. 이스라엘 부근에는 10여종의 가시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대추나무입니다. 대추나무 히브리명은 아타드, 영어명은 Christ thorn입니다. 스웨덴의 식물학자인 린네가 예수님의 가시면류관을 만든 식물이라고 믿고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나무의 가시는 바늘처럼 날카롭고 예리합니다. 길이는 짧은 편입니다. 나무의 가지는 길게 자라면서 늘어지는 성질이 있습니다. 로마 병사들이 칼로 쉽게 잘라서 가시관을 엮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초대 그리스도교는 대추나무로 가시면류관을 만들었다고 믿었습니다.

 

미국의 작가이자 목사인 맥스 루케이도(Max Lucdo 1955- 美 오크힐스교회목사) 는 저서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마음은 한 번도 죄의 가시에 찔리신 적이 없지만 우리를 위해 가시면류관을 쓰신 이유에 대해서 각각 장에 말하고 있습니다.

1장 바로 너를 위해 한 일이다: 선물에 담긴 하나님의 약속
2장 너의 어두운 면을 감당하겠다: 군병들의 침에 담긴 하나님의 약속
3장 너처럼 될 만큼 너를 사랑했다: 가시 면류관에 담긴 하나님의 약속
(**  4장 너의 잘못을 용서한다: 못에 담긴 하나님의 약속
5장 너의 언어로 말하겠다: 죄패에 담긴 하나님의 약속
6장 너에게 선택권을 주겠다: 두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약속
7장 너를 결코 버리지 않겠다: 갈보리 길에 담긴 하나님의 약속
8장 나의 옷을 너에게 주겠다: 옷에 담긴 하나님의 약속
9장 나의 임재로 너를 부른다: 찢긴 몸을 통한 하나님의 약속
10장 너의 아픔을 다 이해한다: 포도주 적신 해면에 담긴 하나님의 약속
11장 너를 구원한 내가 너를 지키겠다: 물과 피에 담긴 하나님의 약속
12장 영원히 너를 사랑하리라: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의 약속
13장 너의 비극을 승리로 바꿔주마: 수의에 담긴 하나님의 약속
14장 나는 승리했노라: 빈 무덤에 담긴 하나님의 약속
15장 십자가에 무엇을 내려놓겠는가: 모든 순간을 책임지신다는 하나님의 약속)

 

예수님은 왜 그런 끔찍한 고난을 당하셔야 했을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군중들은 비아냥거렸습니다. 누가복음 23:35에서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의 외침대로 예수님이 단번에 십자가에서 내려오셔서 로마군인들과 조롱하는 군중들을 잠잠하게 만드시기를 바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못 박히기를 택하셨고 가시관을 머리위에 콱 눌러 쓰셨습니다. 아니 머리에 쓰신 가시관만 가시가 아니라 팔과 다리에 박힌 大못도 큰 가시입니다. 로마군인이 예수님의 심장에 찌른 창도 큰 가시입니다. 이래서 마치 예수님의 몸은 가시들로 고슴도치처럼 뒤 덮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고난과 피 흘리시고 죽으심은 바로 그렇게 예수님을 죽게 만든 우리의, 바로 나의 죄 때문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루케이도 목사님은 분명히 증언하시길, “죄의 열매가 가시라면 그리스도의 이마에 얹힌 가시면류관은 그분의 마음을 찌른 우리들의 죄의 결과에 대한 상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 수치심 두려움 치욕 낙심 불안 우리의 마음은 가시덤불에 얽혀 있지 않은가?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그분은 한 번도 죄의 가시에 찔리신 적이 없다…. 그분은 하나님의 임재를 떠나신 일이 없다. 천국의 면류관을 버리고 가시 면류관을 쓰신 그분의 가장 멋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가? 그분은 당신을 위해 그렇게 하셨다. 바로 당신을 위해.”

 

그렇습니다. 나를 위해 흘리신 피. 나를 위해 머리에 쓰신 가시관, 나를 위해 찔리신 창. 나를 위해 박히신 못. 나를 위해 목말라하심. 이처럼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 그리고 마침내 죽으심그리고 더 나아가 그분의 일생 자체가 우리를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시는 예수님이 십자가 아래에 고통, 아픔… 우리의 나쁜 순간부터 내려놓으라고 권합니다. 그리고 그분께 모든 걸 맡길 때 죄의 가시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인생의 고난과 고통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를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흡니다. 불교는 고통의 문제에 대해 운명론적 입장을 취합니다. 이 운명론은 석가모니의 개인적 체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인도의 한 부족의 왕의 아들로 태어난 석가모니는 어릴 때부터 고통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어머니가 그를 낳다가 죽은 것은 그가 경험한 첫 번째 고통이었습니다. 9살 때 부족의 축제를 보러 나갔다가 땅에 내동댕이쳐진 곤충들, 애벌레들, 새들에 의해 죽어가는 많은 미물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힘 있는 세상에 짓밟혀 죽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밖에 나가 보니 또 늙은 사람, 병든 사람, 죽어가는 사람, 죽은 시체들을 보았습니다. 그에게 사람들은 모두 고통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 같았습니다. 고통은 예비 된 것이요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석가모니가 이 고통에 대하여 고민하다 내린 결론은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고통이 있는 세상으로부터 초연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초연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속에 있는 욕심을 죽이고 집착과 고집으로부터 벗어나야 했습니다. 그래서 집을 나가 보리수나무 밑에서 득도했습니다. 드디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불교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절간은 깊은 산중에 있습니다. 불교는 이 세상에 고통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고통은 물리 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고통을 주는 세상과 중생들로부터 떠나 초연하게 자기를 비우며 산속에서 염불을 외며 사는 것이 진정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산다면 뒤뜰에 매어 논 암소의 여물은 누가 줄 것 입니까?

 

그러나 이러한 입장과 전혀 다른 입장이 하나 있습니다. 성경적 입장입니다. 성경은 먼저 고통이 우리 삶에 당연히 있는 요소라고 보지 않습니다. 고통은 우리에게 당연히 있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우리에게 침투한 존재입니다. 마땅히 있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없어야 할 존재입니다. 석가모니가 어머니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하여 많은 고통을 보았지만 그는 고통이 있는 현실만 보았지 왜 고통이 왔나를 묻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만일 물었다면 고통이 마음의 욕심에서 왔을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세상의 고통의 원인은 마음의 욕심보다 훨씬 큽니다. 고통은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밖에서 온 것입니다. 고통은 본래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있어야 할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임의로 밖에서 들어온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죄가 있기 전에 에덴동산에는 고통이 없었습니다. 고통은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밖에서 온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법 침입자입니다. 고통은 죄에서 오고 마귀에게서 왔습니다.

누구도 코로나19 바이러스를 걸리고 싶어 해서 걸린 사람은 없습니다. 바이러스가 누구의 허락받고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의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한 질병도 아닙니다. 그것은 죄의 가시입니다. 예방 당국에서 예방법으로 마스크를 써라 손을 깨끗이 하라 술집이나 관광지로 여기저기 놀러 다니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예방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전히 해수욕장에 놀러 갔다가 코로나에 걸리고, 밤 10시 이후 술집을 가지 말라했는데 술집 문을 걸어 잠그고 방공 연습하듯 커틴으로 창문을 가려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게 하고 술을 마시다가 코로나에 걸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세속적인 풍속을 타락시키는 퇴폐적인 마귀가 쏘아대는 죄악의 가시들이 무섭게 사람들의 육신에 박혀있습니다. 생각하는 것이 죄요 행하는 것이 악하여 코로나바이러스가 유행하는데도 피차에 가시나무가 되어버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Easy! 우리는 좀 더 순전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겸손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조용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절제하고 서로 사랑으로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적 면역력을 높여야 합니다. 그래야 코로나 시대 사탄의 가시들을 막아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한 평생 살아오면 서 온갖 세상이 주는 가시에 찔려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바로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가득한 곳(창2:18)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었습니다. 누가 이 세상의 가시덤불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을 것입니까?

 

어느 목사님이 미국의 어느 묘지공원을 우연히 지나는 데 거기 씌여진 묘비명을 보게 되었슴니다. 그레이스 스미스란 사람의 이름 밑에 태어난 날짜도, 죽은 날짜도 없이 남편의 이름과 함께 다음과 같이 덜렁 새겨져 있었습니다. “잠들었으나 안식하지 못하는 이. 사랑했으나 사랑받지 못했던 이. 남을 행복하게 했으나 자신은 행복하지 않았던 이. 살았을 때와 같이 외롭게 죽다”. 목사님은 한참동안 묘비 앞에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이 고통가운데 사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은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로 나에게 지워 진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었습니다. 어떻게 그 고난의 십자가를 감당할 것입니까? 그다음 이것을 아십니까? 예수님이 받아 주신다는 것을, 우리가 짊어진 나의 고난의 짐을 예수님이 받아 한꺼번에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신다는 것을, 이것이 우리 주님의 대속의 은혜요 구속의 은총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머리에 가시관을 쓰셨는데 실상 예수님의 온 몸에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심으로 인간의 온갖 죄의 가시가 촘촘이 박히시었구나! 예수님의 몸은 인간의 죄의 가시들로 마치 고슴도치 예수님이 되시었구나!  그럼에도 예수님이 무엇이라 외치셨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지금까지 인류가 살아오면서 고통의 가시에 찔리지 않는 개인이 누구며, 고통 없이 행복하게만 살았던 민족이 어느 민족입니까?  인류 역사는 가시에 찔려 고통과 슬픔의 비극의 역사 이였습니다.  앞으로 20년 후 세계는 어떻게 달라질까? 번영일까, 퇴락일까? 2022년에는 어떤 지도자가 나타나 우리나라의 정치사회를 변화시킬까? 이 문제를 다룬 책 중 하나가 필립 보핏(Philip Bobbit)이란 사람이 쓴 『아킬레스의 방패 The Shield of Achilles』입니다. 보핏은 이 책에서 말하기를 “1914년부터 1990년 사이(76년동얀)에 대략 187,500,000명이 사람의 손에 목숨을 잃었고, 이 숫자는 1900년 전 세계 인구의 약 10퍼센트에 해당한다”고 하였습니다. 캄보디아의 폴 포트는 자기 나라 국민의 4분의 1인 200만을 죽였고, 스탈린은 1,300만을, 모택동은 650만 명을, 히틀러는 600만을 죽였습니다. 역사가 윌 듀런트(William J. Durant1885~1981)는 인류 역사상 3421년 동안 세계에서 전쟁이 없었던 기간은 268년에 불과했다고 말하였습니다. 지난 2년도 안되어 이 지구에서 코로나 19바이러스로 수백만 명이 고통을 당하고 수만 명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점점 더 무서운 변이 바이러스 가시가 되어 계속해서 인류를 찌르고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누가 이 사망의 바이러스 가시로부터 인류를 구원할 것입니까? 인간에게 이 고통의 가시는 어쩔 수 없는 운명적인 것인가? 우리가 피한들 피할 수 있습니까? 산속으로 도망을 간들 거기에는 고통이 없겠습니까?

인간은 본래적으로 죄라는 가시가 박힌 채 세상에 태어난 것이기에 인간 스스로 이 죄의 가시를 뽑아내지 못합니다. 석가모니는 훌륭한 성인이시지만 이 죄의 가시를 뽑아내지 못하였습니다. 공자선생님도 훌륭한 선생님이지만 역시 죄의 가시에 아파하며 살다가 기원전 479년 4월 18일 세상을 떠나시었습니다(기원전 551년 9월18일출생). 그러므로 영원한 인간의 궁극적 문제 ultimate concern는 이 죄의 고통의 가시를 뽑아내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몸소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고난당하심으로 죄의 가시를 인류의 몸에서 쑥 뽑아내시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악을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벧전 2:24).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이제 우리는 ‘모든’ 죄의 가시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셨습니다(요일 1:7). 죄의 가시는 더 이상 우리를 아프게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사이를 막고 있던 죄의 담이 허물어졌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기억조차도 하지 않으십니다(렘 31:34하).

 

그래서 우리는 새 피조물,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고후 5:17)다고 선언 하였습니다. 우리는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엡 2:1). 죽음에서, 질병에서, 저주에서, 가난에서, 절망에서, 불안에서, 다툼과 전쟁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는 자유자입니다(요 8:36). 그러므로 우리는 죄책감과 절망으로 생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악을 대신 담당하셨기에, 우리의 모든 죄의 가시는 뽑혀졌습니다(사 53:6). 질병 앞에서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인생의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인해 염려할 것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습니다(사 53:5). 가난으로 좌절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난해지심으로 우리를 부요케 하십니다(고후 8:9). 또한 우리에게는 때를 따라 도우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히4:15-16). 언제나 성령께서 우리를 철장권세로 지켜 주시고(시2:9) 이끌어 주십니다. 하나님이 내편이시니 누가 나를 넘어트릴 것입니까(시118:6)?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당당하게 인생을 살아가면 됩니다. 노래하며 즐겁게 살아가면 됩니다. ‘아이고 죽겠다’는 말은 가시박힌 인생의 신음소리요, 할렐루야 아멘 인생은 구원받은 기독교인들의 인생입니다.


(*예루살렘 순례자들은 예수님이 재판 받으셨던 빌라도 관저에서 골고다 십자가까지 이르는 비아 돌로사라고 하는 길을 가는 데 첫 번째 머무는 장소가 “채찍질교회(The chaple of the flagellation)”입니다.  채찍질 교회 안쪽으로 들어가면 제일 앞쪽에 스테인드 글라스에 빌라도가 손을 씻는 장면, 예수님께서 기둥에 묶여 있는 장면, 바라바가 놓임을 받는 장면등이 그림으로 묘사되어 있고 천장에는 가시 면류관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


아비멜렉이 세겜성을 공격하고 모든 주민들 까지 죽이려하였습니다. 이때에 망대 위에 있던 셈겜의 한 여인이 아래로 던진 멧돌 윗짝에 머리를 맞아 두개골이 깨졌습니다. 아비멜렉은 죽어가면서 옆에 있는 부하에게 여인에게 죽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자기를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부하는 칼을 들어 그에게 죽음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자기 형제 70명을 무참히 살해하고 왕이 된 아비멜렉은 가시나무처럼 나라를 다스리다가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세상에 가시나무는 불땔감 외에 쓸모가 없는 나무입니다. 가시나무 같은 남을 찌르고 해치는 나라나 독재자나 정권이 나라를 발전시키었다는 역사가 없습니다. 가시나무 같은 독재자와 나라는 다 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 잡히면 쓰임새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막의 울타리에 가시나무(조각목)를 사용하도록 하였습니다. 사람들 중에 가시나무 같은 사납게 다른 사람을 찌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은 믿음 아래에 두어 그들의 가시를 통제하시는 사랑의 의도를 보여 주십니다. 일제시대 김익두는 평양의 가시나무 같은 조폭두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김익두를 부르시어 목사되게 하셨습니다. 가시나무 같았던 김익두목사님은 이제 마귀를 물리치는 교회의 울타리 역할을 하였습니다.
 
오늘은 8월 15일 일본 제국주의로 부터 우리나라가 해방 된지 76년 되는 광복절입니다, 그처럼 악독하게 가시나무 역할을 하던 일본은 아비멜렉 같이 동양을 보호하겠다고 큰소리치며 전쟁을 일으켰으나 원자폭탄 두 방 맞고 항복을 하였습니다. 아직도 그들은 제 버릇 개 못준다는 속담처럼 가시나무 같은 못된 짓을 우리나라에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부터 칼로 목숨을 건 사무라이 문화이지만 우리나라는 연한 붓으로 글을 쓰는 문인의 나라 이였습니다. 잠시 무력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었지만 점점 우리나라는 일본을 따라 마시고 있습니다. 이번 도꾜 올림픽에 일본은 경제적으로 천문학적인 엄청난 손해를 보았지만, 우리나라는 큰 이득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일본이 올림픽을 준비하는데 막대한 예산으로 여러 가지 우리나라 전자기술을 도입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다만 일본으로부터 경제적 이익만 아니라 선진국이라는 나라들로부터 우리나라의 기술이 인정받게 되어 각국으로 진출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바드 대학교 한 교수는 앞으로 10년 안에 경제적으로, 과학 기술 그리고 문화적으로 일본을 능가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요담의 우화에 나오는 가시나무 같은 사람은 결코 행복하게 살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으로 모든 인생으로부터 죄의 가시가 다 제거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온유하고 겸손한 사랑과 감사와 기쁨이 늘 충만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특히 우리 라온코이노니아는 사람들이 아무리 인생이 가시밭이라 말들 하지만 우리 중에는 가시나무 같은 사람이 없으며, 백합화 같은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생으로 하나님께 영광이요 하나님의 축복받으며 날마다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년 8월 22일 주일아침예배  고후 12:10  작은 기쁨 큰 행복

 


오늘은 우리나라 24절기 중 백중百中이라고 합니다. 백중은 음력 7월 15일로 백종(百種)·중원(中元), 또는 망혼일(亡魂日), 우란분절(盂蘭盆節)이라고도 합니다. ‘백종’은 이 무렵에 과실과 소채(蔬菜)가 많이 나와 옛날에는 백가지 곡식의 씨앗(種子)을 갖추어 놓았다 하여 유래된 명칭입니다. 불교를 위시하여 우리나라 전통 종교에서는 허벌지게 백중 제사를 하고, 각 가정에서는 첫 과일을 따서 조상의 사당에 천신(薦新)을 한 다음에 먹는 천신 차례가 있습니다. 백중은 농업인의 축제입니다. 옛날 농가에서 이날 즐기는 풍속으로 '호미씻이'가 있는데 이 호미씻이는 지방에 따라서 초연(草宴), 풋굿, 머슴날, 장원례(壯元禮)로도 불립니다. 그해에 농사가 가장 잘된 집의 머슴을 뽑아 얼굴에 검정칠을 하고 도롱이를 입히며, 머리에 삿갓을 씌워 우습게 꾸민 다음 지게 또는 사다리에 태우거나 황소 등에 태워 집집마다 돌아다닙니다. 그때 집주인들은 이들에게 술과 안주를 대접합니다.  또 마을 어른들은 머슴이 노총각이나 홀아비면 마땅한 처녀나 과부를 골라 장가를 들여주고 살림도 장만해주는데, 옛말에 "백중날 머슴 장가간다"라는 말이 여기서 생겼습니다. 농가에서는 백중날이 되면 머슴을 하루 쉬게 하고 용돈을 줍니다. 그러면 머슴들은 그 돈으로 장에 가서 술도 마시고 음식을 사먹고 물건도 삽니다. 그 마을에 가장 모범적인 머슴을 뽑아 소에 태워 마을을 돌며 위로와 축하를 합니다. 그래서 백중날은 머슴들의 축제의 날이라 하겠습니다.
백중날엔 백중장이 열리는데 그 어느 장날 보다 흥겨운 축제가 벌어집니다. 취흥에 젖은 농군들은 농악을 치면서 장터를 휘젓고 다니며, 장 터 한쪽에는 씨름판이 벌어지며 또 광대들이 들어와서 각 종 묘기를 부리며 사람들의 감흥을 한껏 높이어 줍니다. 최근 들어 이장이 중심이 되어 마을잔치 노인잔치를 벌리거나, 청년회가 주동이 되어 노래자랑 하는 일이 있습니다. 점점 옛날의 백중일 소소한 즐거움이 사라지고 있어 아쉬움을 줍니다,

 

점점 농촌 문화가 사라지고 도시화 되어 가면서 사람들의 생활은 바빠지고 여유도 없고 소소한 재미도 잊은 채 마치 다람쥐 채 바퀴 돌 듯 시계 바늘 쫒아가듯 살아가고 있습니다. 24절기를 찾아 축제를 가진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요 그런 절기 이름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과연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들은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지요. 한번 생각해 봅니다. 오늘 나는 무엇 때문에 즐거움을 가지게 되었고, 행복을 아주 작은 행복이라도 느껴 보았는가? 100년 전 사람이 그날도 음력 7월 15일 보름달을 보며 흥겨운 백중날을 보내었던 그들의 100년 후 후손들이 백중일도 모르는 오늘 우리들이란 것을 아신다면 아마 크게 실망하실 것입니다.

머슴들에게 백중 날 하루는 참으로 즐거운 오늘입니다. 오늘은 어떤 날입니까? 우리 일생 가운데 아직 한 번도 살아 본 적이 없는 오늘 하루입니다. 오늘은 우리 일생에서 지금까지 살아 온 날들의 마지막 날이기도 합니다. 우리 하순녀 집사님은 90여년을 살아 오셨지만 오늘은 처음 맞이한 날이 아닙니까? 어저께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오늘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아주 기쁘게 행복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오늘을 산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요 기적 같은 일입니다. 산다는 것은 좋은 일이고 기분 좋은 일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축복이요 선물입니다. 이 귀하고 복된 오늘을 우리는 결코 허송세월로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하루, 나에게 주신 이 귀한 선물을 어떻게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생각만 해도 기쁘고 행복하지 않습니까? 왜냐면 아직 내가 전혀 살아 본적이 없는 미지의 시간 동굴을 마치 탐험하는 듯 하지 않습니까?
저는 좁은 길을 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자동차를 타고 가도 큰 길 보다는 좁은 길을 다니는 것을 흥미롭게 생각합니다. 왜냐면 좁은 길에는 인간 냄새가 납니다. 사람들의 살아가는 냄새를 맡을 수 있습니다. 제가 외국에 여행을 가도 외국의 좁은 길을 찾아갑니다. 시장 골목을 찾아갑니다, 전에 캄보디아를 갔었는데 그 나라 서울인 프놈펜 시장골목을 몇 시간 헤메고 다녔습니다. 거기서 캄보디아 사람들의 인생을 보게 되고  그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먹고 무엇에 즐거워하는지를 보는 것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다만 그 나라의 말을 할 줄 몰라 답답하였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인간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을마다 골목길을 다니시었습니다. 그 골목길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보셨고 무슨 일을 하셨을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로를 잘 다니지 않았습니다. 대로에는 로마의 기마병들과 창병들이 열을 지어 다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골목길을 다녀 봤습니다. 겨우 두 사람 걸어갈 정도로 좁았습니다. 그 골목길을 다니신 예수님에게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신 일에 만족하시었고 즐거워하셨을까요?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셨다는 말씀이 성경에 있지만 웃으셨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고 다니셨을 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의 하루는 즐거움이 계속되는 날이었습니다. 성령께서 그와 하께 하시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하루는 많은 괴로운 날들 중에 어쩌다 하루 기쁜 날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혀 괴로운 날은 단 하루도 없는 모든 날들이 예수님에게 기쁜 날이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심으로, 아버지 하나님이 기뻐하심이 곧 아들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도 예수님에게는 기쁨이었습니다.
기독교에서 “환난 중에 기뻐합니다(롬5:3).”라고 말합니다. 만일 기독교인으로 고난이 없다면 그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일을 세상에서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 세상적으로 괴로움이 있고 근심과 염려가 있다하더라도 기독교인은 즐거워해야 합니다. 고난을 당하냐?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고 말씀하시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고난 중에 즐거워해야 합니다. 바울 선생은 “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세상에서 기독교인을 살아가게 하는 힘은 바로 기쁨 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예수님은 로마 군인들에 의해 끌려가시기 전, 제자들에게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15:11)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귀는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지만,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이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예수님 안에는 기쁨이 충만 하시었고 언제나 기쁨가운데 살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의 삶을 살지 못한 채 마귀의 그 얄팍한 계략에 빠져 기쁨을 잃고 얼굴을 찡그리고 마음 안에 온갖 염려와 걱정을 가득히 채운채  오늘을 괴로워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요 주님이 명령하셨으니 오늘 나는 기뻐하며 살아야 합니다. 왜요? 그래야 예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하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하늘의 상급이 크기 때문입니다.

 

제 아내 사모는 아침 6시부터 뜰에 나가 잔디 사이 사이에서 잡초를 캐냅니다. 화단 꽃들을 살핍니다. 채소밭을 갈무리 합니다. 그러면 나는 뽑아낸 잡초들을 거두어 모읍니다. 수례 차 가득하게 잡초 나뭇잎 나뭇가지들을 모아 싫어서 산 아래에 가서 버리고 옵니다. 참 귀찮은 일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일 때문에 귀촌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는 거기서 작은 기쁨을 가집니다. 소소한 행복을 발견합니다. 아내가 말합니다. 마당에 개똥 치우라고요. 저는 두 말 않고 집게와 비닐봉지를 들고 화단 사이사이에 질러 논 개똥을 주어 봉지 안에 넣습니다. 아, 여기에도 즐거움이 있습니다. 삼일만 안 치워도 화단이 개똥밭이 됩니다. 개똥 주워 담는 일에 소소한 해복을 느낍니다. 마당 의자에 앉아 잠시 하늘을 처다 봅니다. 방안에서 아내가 치는 피아노 소리가 들립니다. 저는 느낍니다. 오늘은 행복한 날이라고.  소소한 기쁨이 제 몸 안에 돌고 있음을 느낍니다. 딸이 퇴근해 전주에서 달려와 문을 열고 마당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랑이와 로미가 반갑다고 컹컹대며 딸에게 달려드는 것을 보면서 소소한 기쁨과 행복을 가집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야! 그래서 “우리 집 즐거운 하루 하루”라고 노래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많은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불평과 불만 괴롭고 힘든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세상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든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짜증내고 불안해하고 탄식합니다. 저는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세상에 서 내가 제일 잘났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심지어 교수님들도 눈 아래 볼 정도 이였습니다. 지식으로나 신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나는 누구보다 잘났다고 자신 만만하였습니다. 연세대학교 도서관의 책들을 다 읽었다고 할 만큼 도서관에 파묻혀 살았습니다. 혼자 길거리에 나가 가로 전도를 하였습니다. 창녀촌 뒷골목이나, 양아치 천막을 찾아다니며, 방직공장에 노동자로 들어가 전도를 하였습니다.  어린이 주일학교 선생을 10년을 하였습니다. 우리 주일학교는 전국감리교회에서 모법 주일학교로 이름나 매 주일 전국 교회에서 방청하는 많은 선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회 40년을 넘어가면서 마침내 나는 심히 부족한 자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울 선생님이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씀하는데, 그러면 나는 그 괴수의 똘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나의 부족함을 하늘과 땅 사이에서 여기서도 부족이요 저리 가서도 부족이었습니다. 내 인생이 온통 무지와 盲地임을 깨달았습니다. 더군다나 두 번에 걸친 敎亂을 거치고 나의 교만과 자신감은 사라졌습니다. 자신에 대한 비참함과 무력감에 빠지었습니다. 몸에 이상이 오고 설사가 멈추질 않았습니다. 몸은 88kg에서 70kg으로 줄었습니다. 저는 기도하였습니다. 다만 ‘주여, 이 턱없이 부족한 죄인이 무엇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나도 세상에서 기뻐하며 살 자격이 있습니까?’하고 주님께 물었습니다. 지난번 오산리기도원에 저는 그런 기도로 밤을 지세웠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부족함과 약함과 모자람을 기뻐하노라. 넌 너의 부족함으로 나를 기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약함을 아시니 나의 약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기쁨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의 육체의 가시가 바울 사도처럼 나를 괴롭히나 그런 것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오늘을 산다는 것이 나에게 얼마나 기쁨이요 행복인 것을, 어찌 마귀에게 단 한시간이들 빼앗길 것인가? 그래서 저는 하루의 삶에서 마귀에게 시간을 빼앗기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여기저기에서 소소한 기쁨이 발견됩니다.  나뭇가지를 정지하다 사닥다리에서 떨어졌는데 그것도 기쁨 이던군요.  사닥다리에서 떨어져 엉덩방아를 찌고 아! 이것도 행복이구나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다리에 나뭇가지에 찔리고 할켜 진 상처가 시커멓게 난 것을 보고 행복의 자취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의 뒷부분 무엇이라 말씀 하였습니까?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하) 저는 이 강함을 행복으로 해석합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문제를 보는 시각입니다. 문제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하는 것은, 그 문제 자체보다 더 중요합니다. 만일 사람을 볼 때에 뒷 모습만 보고 그 사람은 뒷머리가 길더라 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옆모습만 보고 그 사람은 귀가 크더라고 말합니다, 앞모습만 본 사람은 무엇이라 말할 것입니까? 사람들은 각기 자기가 본 그대로 그 사람을 인식합니다. 문제는 내가 어떻게 보고 어떤 판단을 하고 어떻게 생각하는냐는 그 생각과 주장들을 믿을 수 없다 입니다. 부족한 인간들의 판단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생각은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에게는 옳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 주장은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가 아니면 내 생각은 자칫 마귀의 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족한 인간들의 판단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나의 부족한 생각에 의존하지 말고, 완전하신 예수님께 맡기는 일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생각 때문에 고민합니다. 왜 고민합니까? 하나님께 맡겼으니 나는 자유입니다. 그래서 기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문제가 생겼을 때, 문제 자체만 보고 낙심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의 사람들이라면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 속에 하나님의 기회가 감추어져 있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조용한 가운데서 기도하면서 문제를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문제가 기회로 변하게 되기 시작합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문제만 보고 당황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내 안에 거하시는 주님과 함께 기도로 아뢰면서, 그 문제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기회를 발견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창조적 발전의 기회가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넘치는 부요의 기회가 되기도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것들 중의 하나가 기쁨과 웃음입니다. 기쁨과 웃음은 그것 자체로서도 좋고, 체내에서 생성되는 엔돌핀이라는 물질이 있어서 더욱 좋습니다. 사람에게 기쁨과 웃음이 없다면 그건 삶의 동력을 잃었다는 얘기이기도 할 터인데, 어렵고 힘
든 삶 속에서도 누구에게나 기쁨과 웃음의 여지는 있는 법입니다. 

프랑스 양조회사 '쓰리배럴브랜디'는 성인 3천명을 대상으로 삶을 밝히는 소소한 기쁨들에 대한 설문조사를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 노부부가 다정히 손잡은 모습 보기, 맑은 날 풀 밭을 달리기, 꽃이나 초콜릿 깜짝 선물하기, 살 빠졌다는 말 듣기 등 다양한 응답들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응답자 대부분은 바쁜 일상 속에 일주일 7일 중 절반에 상당하는 3일 동안엔 이런 소소한 기쁨들을 전혀 느끼지 못하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몇 가지 생활 속에 소소한 기쁨을 찾아보면, 오래된 낡은 바지를 버리려고 주머니를 뒤져보니 주머니 속에 만원 한 장을 찾을 때, 깨끗한 이블을 덮었을 때, 아침에 해 빛을 받으며 심호흡을 하였을 때, 5000원 복권이 당첨되었을 때, 만원 버스에서 어느 젊은 아주머니가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을 보았을 때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에게 일어나고 있는 소소한 기쁨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무심히 지나치거나 오히려 화를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부족한 것, 약한 것, 어리석은 것 이런 것은 결코 불행의 원인이 된다거나 불평거리가 아닙니다. 왜냐면 그 때가 하나님의 은혜 받을 때요 돌아보면 온통 소소한 기쁨 속에 있음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앙드레 지드의 ‘전원교향악(La Symphonie pastorale)’이란 소설에 눈이 실명돼 세상을 보지 못하는 소녀가 나옵니다. 소녀를 가엾게 여긴 목사가 소녀를 집에 데려와 키우게 됩니다. 목사의 가족과 함께 살며 성장하게 된 그녀는 어느 날 목사와 함께 연주회에 가서 전원교향곡이란 연주를 듣고 무한한 즐거움을 느낍니다. 연주회로 황홀경에 잠겨 있는 듯한 그녀는 목사에게 말합니다. “보지 못하는 저는 듣는 행복을 알아요”라고. 그녀는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없음에도 음악을 들으며 기쁨을 만끽할 줄 아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듣고 귀에다 이어폰을 꽂고 두 눈을 감고 베토벤 전원교향곡 5악장을 들었습니다. 작은 행복이 귀안으로 솔솔 들어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베토벤의 나이 38세때 작곡한 <전원 교향곡>은 병으로 자신감을 잃고 절망해 있을 때 자연으로부터 받은 감명을 표현한 곡이라고 합니다. 절망감으로 유서까지 쓴베토벤이 얼마나 큰 감명을 받았기에 전원교향곡을 작곡했을까요? 바람소리 물소리 자연의 소리가운데 목동들의 노래소리가 들으면 마음의 위안과 기쁨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사방에 불행이 널려 있습니다. 여기저기 불평불만이 쓰레기 더미처럼 싸여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믿음 안에서 바꿔 생각해 보면 그것은 불행이 아니라 기쁨이요 쓰레기가 아니라 행복더미 이였음을 알게 됩니다. 역설적으로 생각하세요. 세상은 하나님이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믿음 없는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온통 고통과 번뇌로 세상을 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은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개 됩니다.  고통을 파고 들어가면 그가 얼마나 기쁨을 탐구하는지, 기뻐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고통이란 껍데기를 벗어 버리니 안에 있는 기쁨이 자유함을 얻게 되어 춤을 추며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온통 세상은 기쁨으로 가득하고 행복의 꽃이 가득한 것을 보게 됩니다. 

전에 허리가 아프다고 하는 분들을 보면 허리 아프다고 하는데 어떻게 아픈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어느 날 제 허리가 아파 꼼짝 못하게 되었습니다. 아 허리가 아픈 것이 이런 것이구나. 허리 아픈 사람의 아픔을 나에게 알게 해주시려고 하나님이 나의 허리를 아프게 하시는 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허리 아픈 것이 기쁨이었습니다. 두 목발을 사서 양 옆에 끼고 병원엘 가는데 그것도 소소한 기쁨이었습니다.

 

김용섭집사가 하루에도 대 여섯 번 전화를 저에게 할 때가 있습니다. 요즈음은 좀 뜸합니다. 한참 바쁜 일을 하는데 전화기가 울립니다. 그래서 이제 전화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마 하겠다고 말하고는 또 5분후에 전화를 합니다. 그러나 저는 김용섭집사가 전화 해 주는 것이 기쁩니다. 솔직히 하루 종일 저에게 전화 오는 일은 많아야 한 두 번입니다. 은퇴 후 전화 한 통 없는 하루를 보낼 때 인생무상을 느낍니다. 그런데 김용섭집사가 전화를 해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요. 그러나 전화 받을 때 마다 슬퍼집니다. 안부 전화를 듣는다면 나는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런데 대부분 마음 아픈 이야기, 고단한 영혼의 괴로운 이야기를 들을 때 슬퍼집니다. 김용섭집사가 매일 소소한 기쁨을 알고 아내와 두 아들과 언제나 행복하기를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나 저는 전화기가 울릴 때 마다 김용섭집사가 전화하는가 하는 기대를 가지고 핸드폰을 들게 될 때 소소한 기쁨을 가집니다.  김용섭집사는 저에게 소소한 기쁨을 주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 같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올라가실 때 12번이나 넘어지셨습니다. 채찍을 맞아 온몸이 피로 물들었고 얼굴은 가시관으로 부터 흘러내린 피로 범벅이 되었습니다. 어제 밤 간단한 식사를 하셨기 때문에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언덕을 오른 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너무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차셨습니다. 행복하시었습니다. 나의 이 길이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길이라 생각하니 어찌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고통은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주안에서 성도의 고난과 질고도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만이 부활의 기쁨을 가져 올 수 있기 때문에 오늘의 나의 아픔이 주님으로부터 고침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골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높힘을 받았다거나 만족감에 취하여 기뻐한다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더해가는 전도의 핍박이 오히려 기쁨이 되고 축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삶이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한다고 괴로워하지 마세요.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오히려 거기에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기쁨을 아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흔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하지만 이 기쁨을 모르고 행복을 모르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감사 할 수 있겠습니까?  상에 차려진 음식이 지극히 소찬이라도 감사하며, 샤워를 마친 뒤 마친 뒤 상쾌함에 감사하며. 여름엔 춥지 않음에, 겨울엔 덥지 않음에 감사하고. 걱정 근심을 잊고 달콤한 잠에 빠질 수 있는 밤이 있음에 감사하고. 어떠한 불행한 일이라도 이 또한 지나가리 하며 감사한다면 이런 일에 감사하는 사람은 항상 그 사람은 기쁨과 하나님 주시는 행복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어떤 무거운 십자가라도 나도 지고 감사와 기쁨과 행복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백중날 시절음식으로는 밀전병, 밀개떡, 호박부침, 100가지 나물을 먹습니다. 특히 애호박을 송송 썰어 넣어 부친 부침개를 만들어 마을 어귀 느티나무 밑에서 이웃과 나누는 모습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함께 행복을 나누는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누구든지 어려운 일을 겪으면 그 불행에 열중하게 되어 기쁨을 잃어버리고 행복을 찾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 라온코이노니아 여러분은 날마다 부족한 중에 기뻐하고 모자란 중에 행복을 채우는 작은 신앙공동체입니다.  비록 코로나19바이러스로 인해 우리의 인생이 심히 어둡고 답답한 세월을 살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 소소한 기쁨으로 행복하게 살아가시기를 우리에게 축복해 주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년 8월 28일 주일아침 예배  시39:1-13  夢幻泡影

 


아방가르드 작곡가 존 케이지가 1952년 작곡한 피아노 연주곡 〈4분 33초〉를 연주 하였습니다. 〈4분 33초〉는 세 개의 악장으로 되어 있고, 각 악장의 악보에는 음표나 쉼표 없이 TACET(연주하지 말고 쉬어라)라는 악상만이 쓰여 있습니다. 악보에는 음악의 길이에 대한 지시가 따로 없다. 처음 연주했을 때에는 시간을 무작위로 결정하여 1악장을 33초, 2악장을 2분 40초, 3악장을 1분 20초씩 연주하였습니다. 그동안 피아노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습니다. 4분 33초가 지나자 피아니스트는 조용히 피아노 뚜껑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연주가 끝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음악을 그림자 음악이라 부릅니다.

그는 라우셴버그의 <흰색 회화>(White Painting 1951, Oil on canvas, 182.9x320cm. 동일한 크기의 흰색 캔버스 7개)에 영향을 받아 '4분 33초'라는 작품을 제작할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그림은 아무 그림도 그려있지 않은 하얀 천만 걸려 있었을 뿐입니다. 이 그림은 다만 관람객들의 그림자가 그 천에 있었을 뿐입니다. 그 관람객이 떠나면 그 그림자는 사라집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그림자가 있게 될 것입니다. 이 흰색회화에 실험 예술가 백남준씨가 영향을 받아<영화를 위한 선(1962~64)>이란 그림자 영화를 제작하기도 하였습니다. 희 스크린에 영사기에서 빛을 보내니 화면 위에 그림자가 보였습니다.

백남준<영화를 위한 선(1962~64)

모든 사물에 빛을 비추면 그 사물이 빛을 가로 막아 그림자가 생깁니다. 그러나 빛이 통과 한다면 그림자가 없습니다. 그림자는 그 사물의 모양에 따라 그림자를 형성합니다. 빛이 어데서 비추는냐 가까이 멀리 오른 쪽 왼 쪽 방향에 따라 그림자 모양이 바꿔지기도 합니다. 그림자를 그리려면 검정연필만 있으면 됩니다. 그림자의 색깔은 항상 검정색입니다. 칼러 그림자는 없습니다. 붉고 푸르고 노랑 그림자는 없습니다. 언제나 검정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림자는 빛이 꺼지면 그림자는 숨어버립니다. 그런데 그림자가 있음으로 사물의 존재가 증명됩니다. 그림자 없는 인물화는 진실성을 상실한 그림입니다. 그림자 없는 사람이야기가 있습니다.   

 

프랑스 작가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Adelbert von Chamisso 1781∼1838)가 쓴 ‘그림자를 판 사나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가난한 슐레밀은 함부르크의 부잣집 파티에서 회색 옷을 입은 사내를 만납니다. 사내는 금화를 쏟아내는 마법 주머니와 슐레밀의 그림자를 바꾸자고 제안합니다. 가난에 싫증을 느낀 슐레밀이 얼떨결에 승낙하자 사내는 마법 주머니를 주고 그림자를 돌돌 말아 자루에 넣고는 사라졌습니다. 마법 주머니를 소유한 슐레밀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그림자가 없다고 사람들이 놀리고 심지어는 유령이라며 두려워했습니다. 슐레밀은 낮에 밖으로 나올 수 없었습니다. 고립된 채 살다 사랑하는 약혼자도 떠나보냅니다. 홀로 방황의 길을 떠나게 된 슐레밀이 마지막에 친구에게 말합니다. “사람들 틈에서 살려면 무엇보다 먼저 그림자를, 그 다음에 재물을 사랑해야 하네.”

어렸을 때에 그림자밟기 놀이를 재밌게 한 적이 있습니다. 남의 그림자를 밟으면 내가 이깁니다. 반대로 나의 그림자를 밟히지 않기 위해 이리 저리 도망을 칩니다. 그림자는 그 사람의 실존을 증거 해 줍니다. 우리가 해아래 사는 한 그림자는 항상 우리를 따라다니고 우리의 실존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림자는 실체가 아닙니다. 세세하게 실체의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실체와 떨어 저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실체와 연결되어 항상 실체와 동행합니다. 그러다가 빛에 노출되면 잠시 숨어버리고 어둠 속에서는 어둠에 동화되어 버립니다.

이제 말씀드리려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대해서입니다.

 

그림자의 영적 의미로 두가지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첫 번째 그림자에 대한 영적 의미는 인생은  그림자 같다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17에서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다’고 하심은 세상은 회전하는 그림자(無遷移之影)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한 때의 그림자들로 있다가 없어집니다. 정치 경제 사회 세계사에 이름 석자라도 나온 사람들 한때 세상의 회전하는 그림자들이였습니다. 지금 대통령 되겠다고 나온 사람들 다 역사의 그림자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고,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도 그런 그림자들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그림자들이 여기저기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세상의 각가지 일들이 그림자처럼 있다가 사라집니다. 얼마 전까지 최신 과학 기술이라고 소개하던 제품들이 회전하는 그림자처럼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더 넓은 아파트, 더 좋은 자동차, 더 많은 부동산을 가지려고 경쟁하고 목숨을 걸기도 하는데 아파트도 자동차도 부동산도 주식도 다 그림자입니다. 요즈음 성형수술하며 예쁜 얼굴 만드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예쁜 일굴도 곧 그림자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한 작품인 맥베스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가 있습니다.

“인생이란 걸어 다니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을 뿐,
무대 위에 있을 땐 잠시 동안 뽐내고 떠들어대지만,
시간이 지나면 아무 말 없이 사라지는 가련한 배우에 불과할 뿐:
인생이란 아무런 의미도 없는 헛소리와 분노로 가득한,
바보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뿐.
(Life's but a walking shadow, a poor player
That struts and frets his hour upon the stage
And then is heard no more: it is a tale
Told by an idiot, full of sound and fury,
Signifying nothing.)”

 

오늘 설교 제목이 몽환포영夢幻泡影이라고 했습니다. 지역하면 이 세상은 ‘꿈과 환상이요 거품과 그림자’란 말입니다. 이 말은 불교의 경전으로 유명한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이른바 약칭(略稱)하여 금강경(金剛經)에 나오는 말로, 그 경전속의 다이아몬드같은 진리라고 여기는 '사여게(四如偈)'란 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一切有爲法 (일체유위법) 이세상의 모든 일체의 유위법은
如夢幻泡影 (여몽환포영) 꿈과 환상이요, 거품과 그림자와 같다.
如露亦如電(여로역여전) 해가 뜨면 사라지는 이슬 같고 번개 같나니,
應作如是觀 (응작여시관) 응당 이 세상사는 이렇게 보는것이 마땅하다.
“수보리야, 어떤 사람이 한량없는 아승기 세계에 7보를 가득히 쌓아 두고 보시하더라도 다른 선남자와 선여인으로서 보살 마음을 낸 이가 이 경에서 사구게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남을 위하여 일러 주면 그 복이 저 보시한 이의 복보다 더 나으리라.”라고 부처님이 설법하니 모두 듣고 기뻐하면서 믿고 받들어 행하였다고 합니다.
(*** 부처님이 제자 須菩提(수보리)에게 한 설법이 주된 내용이라 하고 주석서만 600여 종에 이른다는 그 경전이다. 끝부분 32장의 화함은 진리가 아니라는 應化非眞分(응화비진분)에 나온다.
應化非真分第三十二『應現設化,亦非真實』
「須菩提!若有人以滿無量阿僧祇世界七寶,持用布施;若有善男子、善女人, 發菩薩心者,持於此經,乃至四句偈等,受持讀誦,為人演說,其福勝彼。 云何為人演說,不取於相,如如不動。何以故?

「一切有為法,如夢幻泡影,如露亦如電,應作如是觀。」 
佛說是經已,長老須菩提及諸比丘、比丘尼、優婆塞、優婆夷、 一切世間天、人、阿修羅,聞佛所說,皆大歡喜,信受奉行。)

옳은 말씀입니다. 몽환포영 인생 꿈꾸는 인생이요 환상에 불과한 인생이요 물거품 인생이요 그림자인생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열심히 암송하면 복을 받는다하니 여기서 기독교와 전혀 다른 가르침이 됩니다.


人生, 그림자 인생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림자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기독교는 영원함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림자처럼 사라지는 인생이 아니라 永生의 비밀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고후 5:1에서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모든 사람은 해 아래에서 그림자같은 인생을 삽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이 예배 때 마다 암송하는 것은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입니다.   몽환포영을 암송하라는 부처님의 설법과는 전혀 다른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미 부활과 영생에 대한 그의 믿음을 힘주어 반복적으로 말씀합니다. 고전15:21-54 사이에서 몇 절을 읽으면  21-22절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인생은 夢 꿈이 아니다 입니다. 42-44절에서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幻환상도 아니란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51-54절에서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인생은 泡影물거품도 그림자도 아니라는 것 입니다. 무엇이 비밀입니까? 그모환포영 인생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원히 산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비록 힘들고 어려운 고단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자랑스러운 것도 없고 잘난 것도 없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어리석고 바보같은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은 그림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부활의 은총에 힘입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 해같이 빛나는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될 터인즉 지금 세상에 살아가는 삶은 헛되거나 환상에 젖은 인생이 아니요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소망과 바램을 가지게 하는 소망이 넘치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사는 동안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환난 중에라도 기뻐하며 살아야 합니다. 실패와 낙심이 우리를 슬프게 하더라도 찬송가운데 계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두 번째 그림자의 영적의미는 그림자는 죄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늘 빛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그런데 반대쪽에 불신앙의 그림자가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면 그림자 불신앙은 점점 작아집니다. 그러나 점점 멀리 떨어지게 되면 불신앙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지게 됩니다. 뒤를 돌아보십시오 나의 불신앙의 그림자가 얼마나 길어 저 있는 지. 그 불신앙 그림자는 죄악의 그림자이기도 합니다. 그 그림자는 온갖 죄로 꽉 차 있습니다.

 

인간의 그림자 속에 어떤 죄들이 들어 있습니까? 죄의 4대 요소로 ① 불순종(不順從) ② 불법(不法) ③ 불의(不義) ④ 불신(不信) 으로 여기서부터 수 많은 죄가 파생됩니다. 어느 목사님이 성경에 나오는 죄의 종류를 분석해 보니 295가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찌 그뿐이겠습니까? 육신의 정욕(갈5:19-21).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의해서 수천 수만가지 죄가 발생되어 우리의 그림자를 꽉 채우고 있습니다. 즉 우리의 그림자는 우리 육신과 마음과 영혼 속에 들어 있는 죄악들의 그림자라 할 것입니다.

(*** 성경이 나오는 죄에 어떤 것이 있는가? 참고하여 보십시오;
1. 지혜의 나무의 열매를 먹은 것. ( 창 3장 )
2. 일반적인 죄악성. ( 창 6:5 ~ 7 )
3. 술취함 (창 9:21, 19:33 ~ 38, 고전6:9, 갈5:19 ~21)
4. 하나님을 무시함 (창 11:1 ~ 9)
5. 기만성 ( 창 12:12~ 13, 20:2, 26:7~ 8,27:14~ 27)
6. 증오 ( 창 27:41, 갈 5:20)
7. 동성연애 ( 창 19장, 롬1장)
8. 근친상간 ( 창 35:21~ 22, 고전5장 )
9. 남을 이용 하는 것 ( 창25:29~ 34,27:35~ 36,29:23~ 25)
10. 거짓말 하는 것 (창 26:7~ 8, 27:19~ 21)
11. 질투 (창 31:1~ 2, 삼상 18:8~ 11 )
12. 강간 ( 창 34:2, 삼하 13장 )
13. 살인을 음모 하는 것 (창 37:18~ 22 )
14. 시 기 ( 창 37:11, 롬1:29, 고후 12:10 )
15. 비웃음 ( 창37:19, 잠 17:5 )
16. 납치 하는 것 (창 37:27~ 28, 딤전 1:10 )
17. 간 음 (창 38:13~ 18, 삼상 11:4 )
18. 불평 하는 것 ( 출 3:11의 주들 , 5:19절 주들)
19. 반 항 (출 6:9절의 주들 , 민16장 )
20. 거짓 증거 하는 것 (출 20:16, 잠 35:11 )
21. 우상 숭배 ( 출 32:1~ 6, 삿 2:11~ 13 )
22. 하나님을 모독 하는 것 ( 레24:10~ 23 )
23. 하나님을 멸시 하는 것 ( 민11:20 )
24. 안식일을 어기는 것 (민 15:32~ 36 )
25. 하나님을 화나게 하는 것 (신9:7~8,22, 32:16~21)
26. 탐욕 (수 7장, 왕상 21:1~ 4 )
27. 도적질 (수 7:21, 고전 6:9)
28.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 (삿 2:11~13)
29.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 (삿 2:16~19)
30.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는 것 (삿 2:1~20)
31. 이방인들과 동맹 하는 것 (삿 2:2)
32. 제단들을 파괴 하는 것을 거절 하는 것 (삿 2:2)
33. 우상들에게 비도덕적인 행동을 하는 것 ( 사 2:17)
34. 신들에게 절하는 것 (삿 2:17)
35. 쉽게 탈선 하는 것 (삿 2:17)
36. 계명들을 어기는 것 (삿 2:17)
37. 자신들을 부패 시키는 것 ( 삿 2:19)
38. 신들을 섬기는 것 (삿 2:19, 3:6)
39. 이 기 심 (삿 2:19)
40. 고 집 (삿 2:19)
41.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 (삿 3:7)
42. 사람들로 하나님을 미워하게 하는 것 (삼상 2:17)
43. 법체를 들여다보는 것 ( 삼상 6:19~20)
44. 부정한 이득을 따라 빗나가는 것 (삼상 8:3)
45. 뇌물을 받는 것 (삼상 8:3)
46. 재판을 왜곡되게 하는 것 (삼상 8:3)
47. 피를 먹는 것 (삼상 14:32)
48.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 하는 것 (삼상 15:23)
49. 술수를 행하는 것 (삼상 28장)
50. 제사장의 사무실에 침입 하는 것 (삼상 13:1~14)
51.사람들을 소유된 기업 과 참된 예배에서 꾀어내는 것 (삼상22:1~4)
52.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파당을 일으키는 것 (삼상 22:1~4)
53. 증오의 씨를 뿌리는 것 (삼상 22:7)
54. 남편을 멸시 하는 것 (삼하 6:16~23)
55. 다른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것 ( 삼하 11:12~13)
56. 참된 예배를 모방 하는 것 (왕상 12:28~33)
57. 높은 곳 들을 짓는 것 (왕상 14:22)
58. 형상을 만드는 것 (왕상 14:23)
59. 숲을 이루는 것 ( 출 34:13)
60. 다른 신들을 두려워하는 것 (왕하17:7)
61. 신들에게 분향 하는 것 (왕하 17:11)
62. 이방신의 우상 가운데를 거니는 것 (왕하 17:8)
63.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 (왕하 17:14)
64. 강 팍 한 마음 (왕하 17:14 , 겔 3.7)
65. 허무한 것을 좇음 (왕하 17:15)
66.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것 (왕하17:17)
67. 점치는 것 (왕하 17:17)
68. 사술을 부리는 것 (왕하17:17)
69. 천체의 혹성들을 섬기는 것 (왕하 17:16)
70. 때를 지키는 것 (왕하 21:6)
71. 귀신을 맞아들이는 것 (왕하21:6)
72. 신접한 자에게 문의 하는 것 (왕하 21:6)
73. 죄로 유도 하는 것 (왕하 21:9)
74. 자신을 겸손하게 하지 않는 것 (대하 7:14)
75. 교 만 (대하 26:16)
76. 거룩한 것들을 파괴 하는 것 (대하 28:24)
77. 예배하는 곳을 폐쇄 하는 것 (대하 28:24)
78. 신들에게 제단을 지어 바치는 것 (대하 28:25)
79.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것 (대하 29:6)
80.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 하는 것 (대하36:16)
81. 불경건한 것 (대하 36:16)
82. 종족간의 결혼 (스 9)
83. 하나님의 영광을 수치로 떨어뜨리는 것 (시 4:2 )
84. 허무를 사랑 하는 것 (시 4:2 )
85. 신실치 못한 것 (시 5:9, 7:57 )
86. 내적인 사 악 성 (시 5: 9 )
87. 악한 말 (시 5: 9 )
88. 아첨하는 것 (시 5: 9 , 12:2~3)
89. 잔해와 궤휼 (시 7:14)
90. 난 폭 (시 7:16)
91. 가난한 자를 박해하는 것 (시 10:2)
92. 의인에게 올무를 놓는 것 ( 시 10:2)
93. 악한 상상 들 (시 10:2)
94. 오만 성 (시 10:3)
95. 다른 사람을 해치려고 음모 하는 것 (시 10:8)
96. 다른 사람을 이용해 먹는 것 (시 10:8)
97. 잔 인 성 (시 10:10)
98. 이중적인 말을 하는 것 (시 12:2)
99. 교만하게 말 하는 것 (시 12:3, 17:10)
100. 압 박 (시 12:5)
101. 부패한 것 (시 14:1, 73:8)
102. 선을 악으로 갚는 것 (시 35:12)
103. 다른 사람의 역경을 시뻐하는 것 (시35:15)
104.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결여된 것 ( 시 36:1)
105. 자신에 대하여 허풍 떠는 것 (시 36:2)
106. 악에 맡기는 것 (시 36:3)
107. 해독을 퍼뜨리는 것 (시36:4)
108. 악을 사랑 하는 것 (시36:4)
109. 평안한 생활을 거절하는 것 (시 55:20)
110. 언약을 어기는 것 (시 55:20, 딤후 3:3)
111. 악을 행하는 것 (시58:2)
112. 거짓말을 즐겨 하는 것 (시 62:4)
113. 다른 사람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 (시 64:1)
114. 마음속으로 죄의식을 깨닫는 것 (시 66:18)
115. 하나님을 시험 하는 것 (시 78:18, 41,56)
116. 구원을 거절 하는 것 (시 78:22)
117.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것 (시 78:40)
118.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 (시 78:41)
119. 어리석은 짓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 ( 시 85:8)
120. 강팍한 말을 하는 것 (시 94:4)
121. 죄악을 행하는 것 (시 94:4)
122. 성도들을 죽이는 것 (시 94:5)
123. 하나님의 선민을 괴롭히는 것 (시 94:5)
124. 율법을 악용 하는 곳 (시 94:20)
125. 무죄한 자를 멸망시키는 것 (시 94:21)
126. 하나님의 기적을 무시 하는 것 (시106:7)
127. 긍휼을 잊어버리는 것 (시 106:7)
128. 하나님의 사업을 잊어버리는 것 (시 106:13)
129.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 (시 106:13)
130. 육을 위한 정욕 (시 106:14)
131. 합당하지 않은 제물을 먹는 것 (시 106:28)
132. 죄를 생각해 내는 것 (시 106:29,39)
133. 아이를 마귀에게 바치는 것 (시 106:37)
134. 까닭 없는 증오심 (시 109:3)
135. 선한 사람의 사랑을 멸시 하는 것 (시 109:4)
136. 선을 악으로 갚는 것 (시 109:5)
137. 사랑을 증오로 돌려주는 것 ( 시 109:5)
138. 저주 하는 사람 ( 시 109:17~19)
139. 선한 사람들을 비난 하는 것 ( 시 109:20)
140. 계속 전쟁을 하는 것 (시 140:2)
141. 죄인들과 함께 걷는 것 (잠 1:10~19)
142. 종교를 고소하는 것 (잠 1:22)
143. 지식을 싫어하는 것 (잠 1:24,29)
144. 자문 받는 것을 제쳐 놓는 것 (잠 1:25,30)
145. 책망을 거절함 (잠 1:25,30)
146. 아버지의 훈계를 저버리는 것 (잠 2:17)
147. 패역한 자 (잠 3:32)
148. 눈짓을 하는 것 (잠 6:13)
149. 교만하게 보이는 것 (잠 6:16~17)
150. 방황하며 돌아다니는 것 (잠 7:11~12)
151. 완 패 하는 것 (잠 7:11)
152. 이웃을 멸시 하는 것 (잠 14:21)
153. 부모를 멸시 하는 것 (잠 15:32, 23:22, 30:17)
154. 거짓된 입술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잠 17:4)
155. 악한 자를 정당화 하는 것 (잠 17:13)
156. 의인을 정죄 하는 것 (잠 17:15)
157. 하나님에게서 잘못을 찾아내려는 것 (잠 19:3)
158. 방 종 (잠 23:30~35)
159. 미친것과 어리석음을 알려고 마음을 쓰는 것 (전 1:17, 2:3)
160. 죄악스런 쾌락과 즐거움을 알까 하여 마음을 쓰는 것 (전 2:3)
161. 술과 취하는 것에 마음을 두는 것 (전 2:3)
162. 재물에 마음을 쏟고 노래하며 방탕 하는 것 (전 2:8)
163. 절제 없는 정욕과 욕정에 자신을 맡기는 것 (전 2:10)
164. 미련한 악과 미친 어리석음에 마음을 쏟는 것 ( 전 7:25)
165. 자기가 만든 것을 경배 하는 것 (사 2:8)
166. 하나님의 일을 무시 하는 것 (사 5:12)
167. 뉘우치지 않는 것 (사 9:13~16, 22:12~14)
168. 불의한 법칙을 만드는 것 (사 10:1)
169. 불 의 (사 10:2)
170. 위 선 (사 9:17, 마 6:1~8,23:1~33)
171. 어리석게 말 하는 것 (사 9:17)
172.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 하는 것 (사 30:12)
173. 악을 의지 하는 것 (사 30:12)
174. 완악한 것 (사 48:4)
175. 무녀에게 중독 되어 있는 것 (사 57:3)
176. 자기의 생각대로 행하는 것 (사 65:2)
177. 부정한 음식을 먹는 것 (사 65:4)
178. 개인적인 거룩을 뽐내는 것 (사 65:5)
179. 허된 것을 찾아다니는 것 (렘 2:5)
180. 하나님께 문의 하는 것을 거절함 (렘 2:5)
181. 바알에 의하여 예언을 받는 것 (렘 2:8)
182. 무익한 일을 따라 가는 것 (렘 2:8)
183. 창녀와 노는 것 (렘 2:20)
184. 잡신을 번식 시키는 것 (렘 2:28)
185. 죄악을 가르치는 것 (렘 2:23)
186. 바르게 하는 것을 거절함 (렘 5:3)
187. 거짓신들 로 맹세 하는 것 (렘 5:7)
188. 배신적인 관계 (렘 5:11)호 5:7, 6:7
189. 우준하며 지각이 없는 것 (렘 5:21)
190. 죄를 지으려고 기다리며 누워 있는 것 (렘 5:26)
191. 악한 사람을 용납 하는 것 (렘 5:26)
192. 다른 사람이 죄짓게 하려고 덫을 놓는 것 (렘 5:26)
193. 거짓 신들을 따라가는 것 (렘 6:9)
194.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하는 것 (렘 6:10)
195. 하나님께 응답 하는 것을 거절 하는 것 (렘 6:10)
196. 속이는 것 (렘 6:13)
197. 거짓을 신뢰 하는 것 (렘 7:8)
198. 거짓 맹세하는 것 (렘 7:9)
199. 죄에 대한 의무를 주장 하는 것 (렘 7:10)
200. 고의적인 무지 (렘 8:7~8)
201. 불 순종 (렘 9:13, 11:8)
202.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는 것 (렘 9:13)
203. 자기 마음의 상상을 따라가는 것 (렘 9:13)
204. 하나님을 대항하여 음모 하는 것 (렘 11:9)
205. 거짓 신들에게 많은 제단을 지어 바치는 것 (렘 11:13)
206. 음탕한 짓을 범하는 것 (렘 11:15)
207. 허물을 기뻐하는 것 (렘 11:15)
208.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을 금하는 것 (렘 11:21)
209. 하나님의 말씀에 의문을 갖는 것 (렘 17:15)
210. 자신의 방법대로 따라 가는 것 (렘 18:12)
211. 불 명예롭게 하는 것 (렘 20:10)
212. 양들을 망치고 흩어지게 하는 목자들 (렘 23:1)
213. 사람을 미혹 하는 것 (렘 23:13)
214. 죄를 추가 하고 자원 하는 것 (렘 23:14)
215. 거짓 예언하는 입술 (렘 23:25)
216. 거짓 선지자 들을 용납 하는 것 (렘 29:8)
217. 선전 하는 입술 (렘 29:25~29)
218. 반항을 선동 하는 것 (렘 29:32)
219. 참된 선지자로 가장 하는 것 (겔 13:1~10)
220. 자기의 아름다움을 의지 하는 것 (겔 16:32)
221. 자기 친구에게 정직 하지 못한 생활 (겔 16:32)
222. 의에서 돌아섬 (겔 3:20, 18:16~24, 33:12~18)
223. 안식일을 더럽히는 것 (겔 20:16~21)
224. 고아와 과부를 괴롭히는 것 (겔 22:7)
225. 거룩한 것을 멸시 하는 것 (겔 22:8)
226. 이자돈을 받는 것 (겔 18:8, 13:6~17, 22:12)
227. 다른 사람에게서 착취 하는 것 (겔 22:12)
228. 하나님을 모독 하는 것 (겔 22:26)
229. 경도 있는 여자와 동침 하는 것 (겔 18:6)
230. 서약을 보류 하는 것 (겔 18:7, 12:16~17)
231. 대접 하지 않는 것 (겔 18:7, 12:16)
232. 하나님을 멀리 몰아내는 것 (겔 23:35)
233. 자기의 의를 의지 하는 것 (겔 33:13)
234.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 것 (겔 34:2~6)
235. 하나님의 집을 더럽히는 것 (겔 44:7)
236. 거룩한 그릇들을 불결하게 하는 것 (단 5:23)
237. 속제 제물을 먹는 것 ( 호 4:8)
238. 죄에 마음을 두고 있는 것 (호 4:8)
239. 우상에게 문의 하는 것 (호 4:12)
240. 막대기로 점치는 것 (호 4:12)
241. 기도가 없는 것 (호 7:7, 10:14)
242. 무관심 (호 7:2, 16:12)
243. 약 탈 (호 7:13)
244. 억측 하는 것 (호 7:15)
245. 길들이지 못한 혀를 가진 것 (호 7:16)
246. 과거만 생각 하는 것 (호 7:11)
247. 완악 한 것 (호 7:10, 14, 11:5)
248. 자기 의지에 집착 된 것 (호 8:4, 10:13)
249. 미혹되게 자신을 혀용 하는 것 (호 9:7~9)
250. 거룩지 못한 동맹을 하는 것 (호 12:1)
251. 자멸 시키는 것 (호 13:9)
252. 지혜롭지 못하게 행동 하는 것 (호 13:13)
253. 사람을 파는 것 (욜 2:6)
254. 온유의 길을 벗어남 (욜 2:7)
255. 나실인에게 술을 준 것 (욜 2:12)
256. 전파하는 것을 금지 하는 것 (욜 2:12)
257. 말씀 전파자들을 미워 함 (암 5:10)
258. 의인을 괴롭히는 것 (암 5:12)
259. 가난한 자들에게서 권리를 빼앗는 것 (암 5:12)
260. 심판이 없다고 자신을 속여 믿게 하는 것 (암 6:3)
261. 사치와 죄 가운데서 사는 것 (암 6:4~6)
262. 양심을 강팍케 하는 것 (암 6:5~6)
263. 우상을 기뻐하는 것 (암 6:13)
264. 가난한 자를 삼키는 것 (암 8:4)
265. 가난한 자를 실패하게 하는 것 (암 8:4)
266. 죄를 갈망 하는 것 (암 8:5~6)
267. 보상대신 심판 하는 것 (미 3:11)
268. 삯군 사역자 (미 3:11)
269. 돈을 받고 점치는 예언자 (미 3:11)
270. 선을 미워하고 악을 사랑 하는 것 (미 3:2)
271. 심판을 싫어하는 것 (미 3:9)
272. 모든 공의를 왜곡 시키는 것 (미 3:9)
273. 약탈 하고 횡포를 부리는 것 (합 1:3)
274. 만족 하는 것 (합 1:3)
275.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 (말 1:2)
276.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 하는 것 (말 1:6)
277. 더러운 제물을 드리는 것 (말 1:7~8)
278. 주의 상을 경홀히 여기는 것 (말 1:7)
279. 하나님의 거룩을 모욕 하는 것 (말 2:11)
280.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는 것 (말 3:10~13)
281. 죄를 덮는 것 (말 2:16)
282.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는 것 (말 2:17)
283. 하나님을 대항 하는 것 (말 3:13)
284. 아이들을 대량 학살 하는 것 (말 2:16)
285. 기도를 과시 하는 것 (마 6:5)
286. 헛된 말로 되풀이 하는 것 (마 6:7)
287. 용서 하지 않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 (마 6:14~15)
288. 근심과 걱정 (마 6:25~34)
289. 성령의 역사를 사탄에게 돌리는 것 (마 12:24~32)
290. 복수 하려고 하는 것 (마 13:24~30)
291. 거짓 교훈을 가르치는 것 (마 16:6~12)
292. 주님을 책망하는 것 (마 16:22~25)
293. 불쌍히 여기지 않는 것 (마 18:23~35)
294. 재물을 숭배 하는 것 (마 19:16~35)
295. 품삯에 대하여 투덜 거리는 것 (마 20:20~23)  )


하박국 1:13에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신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바울 선생님은 롬7:24에서 “오호라,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l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하였습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나는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내 몸과 혼과 영이 죄 덩어리라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온갖 죄악의 쓰레기장garbage dump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 누가 나에게서 이 쓰레기를 치워 깨끗게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바울 사도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모든 죄가 다 씻어질 것임을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감사 찬송을 하였습니다.

원리는 간단합니다. 죄의 그림자는 빛 가운데서는 사라집니다. 시119:105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我足之燈 我路之光)” 곧 말씀이 빛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살 때에 온갖 죄의 그림자가 사람 집니다. 죄의 그림자는 말씀의 빛이 가려질 때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379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 데에 빛 되신 주,  저본향 집을 향해 가는 길 비추소서
 내 가는 길 다 알지 못하나 한 걸음씩 늘 인도 하소서’

 

23세의 젊은 나이로 목사가 된 존 헨리 뉴만(Newman John Henry, 1801ㅡ1890)이 이 찬송을 작시 하였습니다. 그는 목회에 너무 무리한 나머지 몸을 상하게 되어, 32세 때에 요양 차 이탈리아의 시실리섬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열병에 시달려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고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래서 귀국하기 위하여 배를 타고 가던 중 폭풍을 만나 돛대가 부러지는 등 파선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한 때 뉴만목사는 기도하던 중 시상을 떠올라 쓰기 시작한 것이 379장의 찬송시였습니다. 그 시를 쓰던 중 구름 사이로 별 빛이 비추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뉴만목사는 하나님께서 자기 인새의 전체적인 계획을 알려 주는 밝은 태양빛을 비춰 주시기를 갈망했으나, 하나님께서는 한 번에 한 걸음씩의 길을 보여주시는, 즉 부드러운 별빛을 비춰 주시는 분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매일 같이 햇빛처럼 비추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따라 하루하루 한 걸음 한 걸음 살아나갈 때에 죄의 그림자가 벗겨지고 평안과 기쁨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라온코이노니아 신앙공동체는 영적으로 죄의 그림자를 벗어 버리고 헛되게 흘러가는 夢幻泡影그림자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 받고 영생의 약소가운데 오늘도 예수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실존의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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