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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21년 4월 중 주일아침 예배 설교

전병호 by  조회 수:36 2021.05.11 15:46

2021년 4월 11일 주일아침예배  시편 8:1-9   끝은 끝이 아니다,

 

지난 부활주일 TV에서 명성교회 부활주일아침예배를 중계방송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수만 명이 모여 예배드리는 교회당에 소수교인 거리두기로 예배를 드리고 다른 교인들은 TV나 다른 온라인 중계로 예배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김하나목사가 “부활은 끝이 아니다”란 제목으로 부활절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김목사는 설교 중 다음과 같은 미국장기(체스)두는 그림에 관하여 예화를 소개 하였습니다.

‘체크메이트(checkmate, 외통수)’라는 제목의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프리드리히 레취(Friedrich Retsch)라는 화가가 그린 것으로서 괴테의 “파우스트”의 주인공인 파우스트가 악마메피스토펠레스(히브리어로 메피츠+토펠 세케르 거짓말을 퍼트리는 자, 헬라어 메:아니다+포스:빛+필리스:사랑=메포스필리스:빛을 사랑하지 않는자라는 설이 있습니다.) 와 체스를 두던 중 외통수에 몰린 모습을 그렸습니다. 파우스트는 깊은 고뇌 가운데서 고민하고, 악마는 그런 파우스트를 보며 미소 짓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악마와의 싸움에서 마지막까지 몰리고 길이 없는 인간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의 복사본이 미국에 한 집에 걸려있었는데, 어느 날 그 집에 미국의 체스 챔피언 폴 모피가 저녁을 먹으러 왔습니다. 식사 후 이야기를 나누는데 모피가 유심히 그 그림을 보고 며칠 후에도 와서 또 보더니 “저 그림은 틀렸어. 아직 위기를 벗어날 한 수가 있어!”라고 소리쳤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난 주인은 그 이야기를 미국체스협회지에 실었고 이후 오랫동안 그 그림에 대해서 체스 동호인들 사이에 논쟁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림은 이제 다 끝났다고 말하지만, 다시 보니 아직 신의 한 수가 남아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피는 당시 체스 실력자들거ㅣ 그 체스그림 그대로 옮겨 시합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신의 한수로 모피가 이겼습니다. 

 


김하나 목사는 이 예화로 부활사건을 설명하며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사탄과의 체스게임에서 외통수에 걸린 것처럼 보이지만 부활하심으로 마침내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시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은 사탄이 영원히 패배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의 복음적 삶은 끝났습니다. 분명히 성경에서 운명하시었다고 하였습니다.(호 데 예수스 아ㅎ페이스 ㅎ포넨 메갈렌 엨세프뉴센. :에크프네오 동직1과능3단. 막15:37) 그러나 끝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봉독한 시편 8편은 창조시편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편입니다.  
1절 9절.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야훼 아도네이누, 마 악디루 쉬메카 뻬콜 하아레츠 아쉐르)
 
 1절에서 영탄적 호격(呼格)을 이용하여 주의 이름의 아름다움을 강조하였습니다. 1절과 9절에 수미상관법(首尾相關法)을 이용한 양괄식(兩括式) 수법이 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1절과 9절의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는 주의 이름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설의법(設疑法: interrogation)의 수사입니다.

시인은 짧으면서도 아름다운 서정시가 시작과 끝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여기에 하나님의 이름의 장엄함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교만한 마음으로 눈이 가려진 하나님의 원수들은 그의 영광을 보지 못합니다. 그들은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찬사를 듣고 어리둥절해 합니다.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들이 성전에서 호산나를 부르면서 그에게 찬사를 보낼 때에 이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그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분개하여 화를 냈습니다(마21:15,16). 하나님은 지금도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십니다(마11:25,26;고전1:26∼29).

오늘 설교의 말씀은 시편 9편의 내용을 말씀하려는 것이 아니라, 1절 시작절과 끝절이 같은 것처럼 하나님의 창조역사를 보면 시작과 끝이 결코 다르지 않은 보시기에 아름다운 역사라는 것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었을 때 모든 창조물들이 보시기에 아름다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요즈음 저희 집 뜰에 각종 꽃들이 울긋불긋 피어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신기하고 놀라움이 그지없습니다. 요즈음 철쭉꽃이 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침 태양을 향하여 그 붉은 얼굴을 들고 미소를 보내는 철쭉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그 아름다운 꽃은 지금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수천 년 수만 년 하나님의 창조 때 그때부터 아름다운 그대로입니다. 즉 우리는 창조 때의 아름다움 그대로를 지금 저 꽃 속에서 보는 것입니다. 수천수만 년 해가 바뀌고 역사가 바뀌었어도 저 꽃의 아름다움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단군이 철쭉나무 지팡이를 집고 다녔다는 말도 잇습니다. 비록 잠시 피었다가 진다고 끝이 아니라 다시 새 봄에 그 꽃은 아름다움 꽃으로 피어나기에 끝이지만 끝이 아닙니다. 그 아름다운 꽃은 창조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름을 증거하여 오고 있습니다.

얼마 전 2020-2021여자배구경기가 끝이 났습니다. 흥국생명팀에 김연경선수가 있습니다. 김연경선수는 세계적인 선수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김선수가 세계적이라 해도 함께 뛰는 선수들의 실력이 떨어지면 승리하기가 어렵습니다. 김연경 선수가 전력을 다하였고 다른 선수들도 최선을 다하였지만 결국 GS칼텍스 상대팀에게 패배하여 2위에 올랐습니다. 이름다운 2위였습니다. 그러나 본래 흥국생명 팀이 1위할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하였었는데, 팀 내에 여러 악재가 거듭하여 있음으로 2위도 대단히 잘한 일입니다. 두말할 것 없이 이번 여자 배구의 최고 인기선수는 김연경선수 입니다. 김 선수는 부상으로 도저히 경기를 계속할 수 없는 몸 컨디션이지만 “끝날 때 까지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란 명언을 남기며 온몸을 경기장에 불사르듯 하였습니다. 김연경선수의 배구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국가대표 선수로 다시 국제대회에서 훨훨 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배구역사는 앞으로 그가 경기에서 뛰지 못할 그런 날이 오더라도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여자 배구역사에 그의 이름이 계속 아름답게 신화처럼 끝날 때까지 끝이 아닌 배구 인생으로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끝이 없는 삶입니다. 우리가 그 어떤 인생을 살고 있던지 간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창조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름답게 보십니다. 인생의 배구장에서 김연경 선수처럼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 아름답게 보시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끝은 없습니다. 기독교인의 인생은 그러므로 영원한 인생입니다.

로마의 황제 씨저 아우구스투스는 이런 유언을 남기었습니다. 
“Acta est fabula, plaudite.(이야기는 끝났다. 박수를 쳐라)”
의역을 하면 "내가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나의 역할은 끝이 났다. 그러니 박수를 쳐다오."
우리의 인생은 마치 영화의 한 편의 영화같습니다. 대부분 영화는 주인공이 천신만고 끝에 살아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로 끝이 납니다. 간혹 주인공이 희생적인 죽음으로 영화가 끝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다음에 이야기에 대해 관심이 없어 영화가 끝나는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혹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고 제작자가 생각하고 후편을 촬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금 미국에서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미나리라는 영화 윤여정씨가 조연으로 열연을 하고 있는데 마지막 장면이 윤여정씨가 집에 불을 내고 정신나간채로 걸어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다음 윤여정씨가 집으로 돌아왔는지 죽었는지 영화는 알려주지 않은 채 영화는 끝이 납니다. 영화의 마지막 엔딩곡OST Rain song을 여주인공 한예리씨가 부르는데, 잔잔한 노래 소리가 영화관 안에 퍼지면서 관객들은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그 노래 마지막 가사가 “겨울이 가는 사이 / 봄을 반기는 아이 / 온 세상과 숨을 쉬네 / 함께 맞이하는 / 새로운 밤의 품.”입니다.

한 계절의 끝은 겨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북풍한설이 세차게 몰아친다 해도 마침내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는 따스한 봄이 온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생의 겨울이 오면 그 겨울로 끝나는 줄 알고 낙심 절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추운 겨울을 견디며 살아가는 철쭉꽃나무 같은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비록 나뭇가지는 추위에 떨고 있지만 그 나무 깊은 속에서는 봄을 기다리며 꽃꿈을 꾸다가 봄을 반기게 됩니다. 누가 인생에 끝이 있다고, 연극이 끝났다고 박수를 치라고 말합니까?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끝이란 말이 없습니다. 다만 ‘아이오니오스 조에 영생’이 있을 뿐입니다. 요1. 5:13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휘민 히나 에이데테 호티 조엔 에케테 아이오니온”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영생을 소유한 사람은 끝이 끝이 아닙니다. 요셉이 애급의 노예로 팔려 가고 감옥에 갇히고 요셉의 인생을 끝으로 치달았습니다. 그러나 끝이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인도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뒤에서 애급의 기마병들이 쫒아 올 때 이제 끝났다고 아우성을 치며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홍해바다를 갈라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바벨론의 침략으로 예루살렘성이 무너지고 수많은 유대인들이 포로로 끌려 갔습니다. 하나님의 백서이라고 강한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유다나라는 망했습니다. 지구상에 유다라는 나라는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끝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다시 돌라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침내 70년 후 그들은 다시 돌아왔고 다시 성전과 성벽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시리아의 에피파네스4세 그리고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돌 위의 돌 하나도 남지 않을 만큼 철저히 이스라엘은 파괴되었습니다. 끝장입니다. 2000년 동안 유다사람들은 나라 없이 세계를 방황하며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끝났다고 아주 끝난 것이 아닙니다. 1948년 이스라엘은 다시 살아났습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을 둘러 싼 중동 이슬람 국가들이 만만히 볼 그런 나라가 아닌 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역사만 아니라 나라와 세계, 자연의 끝 날이 다가오고 있다고 말합니다. 봄바람 속에 파괴와 죽음의 바람이 지구 땅 곳곳에 불고 있습니다. 코로나19바이러스는 그동안 인간의 승리를 비웃으며 마치 요한계시록의 6;8에 나오는 청황색 기사(힢포스 클로로스)처럼 죽음의 안개를 피우고 있습니다. 비록 백신을 맞았다 하더라도 또 죽지 않고 건강해 졌다고 하더라도 세상은 코로나 이전의 세상이 아닙니다. 14세기 유행한 흑사병(黑死病, 영어: Black Death, Pestilence, Great Plague, Plague, Black Plague. 페스트)은 유럽에서 7,500만~2억 명의 목숨을 앗아간 인류사상 최악의 유행병이었습니다. 이때 흑사병으로 유럽 총 인구의 30~60%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흑사병 이전의 세계 인구는 4억 5천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14세기를 거치며 3억 5천만 명~3억 7,500만 명 정도로 거의 1억 명이 줄었습니다.  1347년 상선 함대 하나가 시칠리아의 메시나항에 당도했습니다. 이 배의 선원들은 이상한 전염병에 걸려 있었으며 당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부 사망하였습니다. 이것이 유럽에 흑사병이 전파된 첫 계기였습니다. 이 때의 바이러스 일종인 흑사병도 코로나19바이러스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발원하여 실크로드를 따라 전파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중세가 끝났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인본주의가 대두되었습니다.  봉건주의가 끝났습니다. 농노들이 병으로 다 죽으니 자연히 봉건 귀족들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 페스트유행병으로 천년 중세가 끝난 것입니다.

코로나19바이러스로 인해 인간의 성장시대 대 부흥의 문명시대가 끝나가고 있습니다. 성장시대는 끝났습니다. 하인버그(Richard Heinberg)는 "성장은 예외적이며 한순간의 섬광일 뿐"이라며 "현재의 경제 이론들은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던 예외적인 시기에 확립됐기에 성장이 종말을 맞이하고 있는 지금 현실에는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국제 관계가 달라질 것입니다. 민주주의 공산주의란 이념들이 사라질 것입니다. 좌파 우파라는 논쟁이 개그화 될 것입니다. 그들을 꼰대라 부를 것입니다. 정치 경제 교육 의료 문화들이 달라질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윤리 도덕 인간다움의 질서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꼰대시대는 가고 청년시대가 도래 하도다.  아- 어떤 시대가 올는지 두렵고 가슴 떨립니다.

그러나 코로나 19바이러스로 인한 두려움은 기후변동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간들의 무분별한 성장발전으로 지구가 요동을 치고 있습니다. 환경오염 대기오염 사람들은 점점 숨쉬기가 어려워지고 물마시기가 힘들어집니다. 아마도 지금은 마스크를 쓰지만 몇 년 후에는 방독면을 써야 할 것입니다. 기후 변동으로 점점 북극과 남극의 얼음이 녹아져 바다의 높이가 올라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평균온도 섭씨2도만 올라가면 일본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우리 군산 대부분도 물에 잠길 것입니다. 화산과 지진이 일어날 것입니다. 말세의 현상이 나타날 것입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3,400만 명이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점점 그 상황선이 북으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스런 후손들 시대는 식량부족으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곧 식량전쟁의 도가니에 복아 질 위험성이 많습니다. 지금 전략과 전술이 논의 되어야 합니다. 해가 갈 수록 가뭄과 한재가 지구를 뒤덮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호남평야가 호남사막이 될 런지도 오릅니다. 인간들의 인심은 흉흉해져 난폭해지고 여기저기 테러와 살인 사건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앞으로 한 세대 안에 일어날 가능한 일들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인류가 지금 한마음으로 손에 손 잡고 이 지구적인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지금 하지 않으면 함께 끝장 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정치인들이 자기 당파 이익을 위해 싸울 때가 아닙니다. 어느 누가 대통령이 되고 어는 정당이 집권당이 되어도 오늘의 우리나라 난국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라고 애국가를 부르는데, 동해가 치솟아 오르고 백두산 화산폭발이 시간문제입니다. 오늘이라도 오늘 밤이라도 화산이 터질 런지 모릅니다. 김정은이 핵무기 몇 개 가지고 의시될 일이 아닙니다. 남북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민족의 내일을 의론해야 합니다. 싸움 질 하는 여당과 야당이 없어져야 합니다. 박정희 때 유신 독재정권이 아닌 자유민주적으로 기능적 다변화되고 구조적으로 integral한 하나의 당으로 나라를 다스리도록 해야 합니다. 수많은 당에서 대통령 후보로 나온다는 것 자체가 나라가 끝장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1945년 후 5년이 이를 증거 합니다.

한마디로 지금 문명의 종말 인류의 끝이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먼 미래가 아닌 우리 살아생전에 그 끝을 볼 수도 있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마치 높은 낭떠러지 끝으로 다가가듯이  자신들의 인생 그 끝 날에 하루하루 연장선상에 살고 있으면서 곧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질 운명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세가 끝나가듯이 한시대가 끝나가고 있습니다. 21세기 초 지금 시대는 현대가 끝나는 분기점 입니다. 수많은 어렵고 힘든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대통령문제가 아니고 여당 야당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 때문에 중국 때문에 일본 때문에 북한 때문에 아니라, 온 지구 곳곳이 온통 미처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세대 말 현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엄청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코로나 한가지로 이렇게 시끄럽고 어지러운 데, 앞으로 수많은 세대 말 현상을 어찌 견딜 것입니까? 나문희씨 말대로 6.25때 난리는 난리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러나 끝은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의 끝을 누가 인도하고 있는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세계 인류 역사를 이끌고 계십니다. 이 나라도 우리의 인생도 하나님이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끝을 붙잡고 있는데 어찌 끝이라고 말할 것입니까?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는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장조의 세계를 아름답게 하십니다. 마치 장인의 솜씨처럼 잘못된 것은 고치고 다시 아름다움을 회복시키십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가 어지러워지고 부서지고 사람들에 의해서 더러워진다면 하나님은 다시 이 지구 땅에 대 청소를 하시듯 새롭게 아름다운 세계로 만드실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이 행복하게 살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면 행복해야 합니다. 행복하십니까? 아직 행복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말한다면 아직 구원이 무엇인지 모른 다는 말입니다. 십자가 아래는 행복의 자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자리에 마귀가 물러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원리 세 번째는 정의와 공평입니다. 비틀어지고 구부러지고 헝클어진 세상에는 의가 없습니다. 마귀가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 종교입니다. 정정당당해야 합니다. 올바르고 굽어짐이 없어야 합니다. 믿음은 명명백백 뼈 속까지 환히 보여 지는 깨끗함입니다. 아름다운세상 행복한 인생 의롭고 진실한 창조의 세계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세기말 끝은 더 아름다운 세계로 더 행복한 인생으로 더 정의와 공평한 세상을 시작하는 처음입니다. 망할 사람들은 끝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그 말대로 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요 구원의 반려에서 영생을 소유한 사람들은 새로운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를 바라봅니다.  그 아름답고 행복하고 정의와 공평이 봄꽃 피어나듯 피어나는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러므로 끝은 끝이 아닙니다.  

목련꽃이 끝나니 수선화가 피고 수선화가 끝나니 튤립이 피어오릅니다. 요즈음 빨간 철죽 꽃이 활짝 피어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인생은 하난미이 그 끝을 붙잡거 계시므로 그 끝은 끝이 아닙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생복락을 누릴 것입니다. 여러분, 끝이라고 비관할 것인가요? 세상이 시끄럽다고 비관할 건가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끝이 끝이 아닙니다. 끝 날에 우리는  기도하고 찬송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그 끝에서 새롭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변혓r의 손길을 보게 됩니다.

오늘 시편 8편에서 1절 9절.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야훼 아도네이누, 마 악디루 쉬메카 뻬콜 하아레츠 아쉐르)”
아무리 마귀가 우리의 인생을 가로막고 훼방하고 어지럽히고 힘들게 한다하여 우린 인생길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 끝난 자리를 자세히 살피면 욥의 길이 보일 것입니다. 비록 괴로운 인생길이지만 온 땅에 아름다운 주의 이름을 부르며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을 축복하십니다. 끝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모든 이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021년 4월19일  주일아침 예배  딤전 2:1-4  習靜養拙

 

 

우리나라 역대 학자중 5대 학자를 말하면 신라시대 원효대사(617-686 본명:薛思), 고려시대 목은 이색(1328.6.17.-1396.6.17.), 조선시대에 이퇴계(1502.1.3.-1571.1.3. 본명:李滉), 이율곡(1536.12.26.-1584.2.27. 본명:李珥) 그리고 茶山정약용(丁若鏞·1762.8.5.-1836.4.7)이 있습니다.(**제가 임의로 택하였습니다,) 어느 날 이 정약용선생이 그의 처남 이승훈(李承薰·1756~1801 최초 천주교 영세자)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런 글을 썼습니다. 
“요즘 고요함을 익히고 졸렬함을 기르니(習靜養拙), 세간의 천만 가지 즐겁고 득의한 일이 모두 내 몸에 '안심하기(安心下氣)' 네 글자가 있는 것만 못한 줄을 알겠습니다. 마음이 진실로 편안하고, 분하고 시기하며 강퍅하고 흉포하던 감정도 점점 사그라듭니다. 기운이 차분히 내려가자, 눈앞에 부딪히는 일들이 내 분수에 속한 일이 아님이 없더군요. 눈은 이 때문에 밝아지고, 눈썹이 펴지며, 입술에 미소가 머금어집니다. 피가 잘 돌고 사지도 편안하지요. 이른바 여의치 않은 일이 있더라도 모두 기뻐서 즐거워할 만합니다.”
近日習靜養拙, 覺世間百千萬快樂如意事, 總不如自己上有安心下氣四字.
心苟安矣, 氣苟下矣, 方知眼前櫻觸, 無非吾分內事. 忿嫉愎戾之情, 漸漸消滅.
目爲之瞭, 眉爲之展, 脣爲之單辰, 血脈爲之和暢, 四肢爲之舒泰.
而凡有所謂不如意事, 皆怡然可樂.(道不遠人정운종 고전공부에서. 원로기자)

이 말에서 정약용선생이 "습정양졸(習靜養拙)"이란 말을 하였습니다. 이 말은 “고요함을 익히고 옹졸함을 기른다”란 말입니다. ‘옹절함을 기른다’란 말의 이해가 되지 않아, 흔히 졸을 옹졸하다 치졸하다라는 말에 쓰여지는 말입니다. 그러나 한자 사전엔 拙을 ‘소박할 졸’이라는 말도 있기 때문에  ‘소박함을 기른다’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졸을 한자사전에 또한 자신을 비하하는 말로 ‘나 졸’로 쓰고 있기 때문에 저는 한학에 무식한 그야말로 拙한 존재로 ‘나 졸’로 해석한 사람은 저 뿐일 것입니다. 즉 ‘고요함을 익히며 나의 부족함을 기른다', 로 해석하려 합니다.
오늘 아침 정약용선생의 습정양졸이란 말을 인용하여 習靜養拙의 믿음을 가지자라는 말씀의 제목으로 말씀을 하려고 합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고요함을 익히고 나 자신의 부족함을 살펴 말씀으로 기른다란 의미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영국의 비평가인 토머스 칼라일은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 (Speech is silver, silence is gold)"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인터넷상에는 '고대 그리스의 정치가 데모스테네스가 한 말로서 당시엔 은이 더 값어치가 있었다'는 의견도 있지만 낭설이라고 합니다. 데모스테네스는 저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이 명언은 구약성경 잠언 17장 28절의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기우고 그 입술을 닫히면 슬기로운 자로 여기우느니라." 말씀을 새롭게 표현한 말이라 하겠습니다.(나무 위키 참고) 그런데 沈黙은 잠길침 잠잠할 묵으로,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위에서 소개한 정약용이 말한 習靜은 다만 입 다물고 조용히 있는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고요함은 몸의 침묵만이 아니라 정신과 영혼의 고요한 상태 그래서 아무 흔들림이 없고 털 애기 먼지 한 올도 떠있지 않은 맑은 太古의 靜寂이 흐르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習靜은 천지창조이전의 상태, 그 엄숙하고 진정이 흐르며 어마어마한 고요함이 천지에 가득한 상태 곧 하나님의 거룩하신 Numinose 상태에 이름을 의미합니다.  

알리 루소가 그린 “잠자는 집시” 그림을 잠시 보게습니다.

 

“잠자는 집시”는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요?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사자는 눈을 부릅뜨고 무엇인가 주시하고 있는데 잔뜩 긴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자의 꼬리가 빳빳하게 올려 있습니다. 집시는 사자가가 자기 옆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모르니 공포심도 없습니다. 오히려 입가에 엷은 웃음이 묻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그림을 보며 마치 시간이 멈추어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완전한 고요함이 화면에 가득합니다. 뭔가 움직이는 것 같고 긴장감을 주고 있는데 물병이 흔들림 없이 서있는 모양이 바람이 전혀 없는 그래서 움직임이 없는 고요함이 화면 전체에 흐르고 있습니다. 사자가 버티고 서있고 폭풍우가 모라쳐 오고 있지만 두려움을 느낄 수 없는 것은 이 완전한 고요함속에 우리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완전한 고요함속에 있는 일을 習靜이라 합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 중에 2:2을 보면 경건한 생활을 위해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에레몬 카이 헤쉬키온’으로 문자대로 말하면 ‘고요하고 고요한’입니다. 에레모스와 헤쉬키오스는 ‘고요하다’는 同意異語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번역한다면 고요하고 고요한 생활이라 하겠습니다. 완전한 고요함을 말합니다. 

기독교의 경건한 생활에서 중요한 요소는 침묵(沈黙)입니다. 그래서 영성훈련 중에 침묵훈련이 중요한 영성훈련의 과정으로 삼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안합니다. 그러나 말을 안하는 것이 영성이 아닙니다. 머릿속에서는 별의 별 생각과 잡다한 말을 하면서 입 밖으로는 나오지 않고 있으니 오히려 영성이 훼손되게 됩니다. 침묵이란 말은 적절한 말이 아닙니다. 정약용선생의 習靜이란 말이 영성 언어로 합당하다고 하겠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고요함속에 더 깊은 고요함을 체험 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고요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고요함 속에 있음을 말합니다. 완전한 고요는 불교에서 말하는 無我地境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와 통전하는 일입니다.

이 習靜의 중요성을 예수님께서 알고 계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習靜으로 받아드리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깍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 그리고 마태 27:12-14에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시면서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심으로 성취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단지 침묵하심이 아니라 십자가상에서 하나님의 고요함속에 들어가시니 육체의 괴로움이 오히려 習靜을 도와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시편 22편을 찬송하시였습니다. 누구눈 예수님이 육체적 고통으로 부르짖었다고 말합니다만, 에수님은 운명하시기 직전 조용히 스스로 조가를 부르시듯, 시편 22편송, 본인에 대한 시편의 예언을 완성하시듯, 시편 22편을 찬성하시면서 세상을 떠나신 것입니다.


사이키델릭psychedelic ⓒ dexterous simpson/Shutterstock.com

인간 세상의 특징은 시끄러움 입니다. 끊임없이 소리를 재생산합니다. 소리를 계획하고 소리를 강요합니다.  가끔 록 가수나 트롯가수들이 노래 중에 ‘소리질러!’라고 청중들에게 요구합니다. 유명 가수들의 콘서트를 보면 가수들의 노래 소리가 청중들의 환호소리에 묻혀버려 무슨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시끄러움에 중독이 되어 더 시끄러움을 찾아다닙니다. 젊은이들이 찾아다니는 밤의 카페라는 곳은 귀청이 떨어질 듯한 노래 소리가 들려 나오고 사람들은 마치 확성기 속에 빨려 들어가 듯 소리에 취해 비틀거립니다. 도시는 소리들로 꽉 차 있습니다. 요즈음 정치인들의 시끄러움은 온 나라를 뒤 흔들고 있습니다. 미국사회는 총소리와 함께 더욱 시끄럽습니다.  말과 말 사이에 또 말이 있습니다. 말이 쉴 틈이 없으니 정신이 혼돈하고 가슴 안에 어둠이 가득하고 그들의 살이 마치 파도치는 바다위에 있는 듯 흔들리고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 있으며, 인생이 우주비행기 부속보다 더 복잡합니까? 소리에 묻혀 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소리는 심성을 파멸시키고 인간의 영성을 부패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홀로 있는 시간이 많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시거나 여러 이적을 행하신 후에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시끄러운 사람들을 피하여 자기를 숨기시고 고요한 가운데 習靜하시였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모시려고 할 때 예수님은 뒤로 물러나 숨으셨고, 병자들을 치료하신 후에는 그들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도록 하기 보다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그러나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은, 예수님은 고독을 좋아하셨다거나, 침묵의 수도승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이 홀로 계심은 고요함 속에 게시는 하나님과의 교제하기 위함이요, 그 깊은 하나님의 고요함과 함께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눈을 보십시오. 그 속에 너무 깊어 고요함의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習靜의 기도입니다.

12제자를 선택하실 때에도 따로 가서 기도하셨고(눅 6:12-13), 세례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따로 가서 기도하셨습니다(마 14:13). 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문둥병자를 고친 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했는데 어느새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몰려오니까 예수님은 물러가셨고(눅 5:16), 5천 명을 먹이신 후에도 따로 산에 올라가셨고(마 14:23),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도 혼자 기도하셨습니다(마 26:36-48). 예수님의 모든 말씀 선포와 이적을 행하심은 예수님의 고요함 속에서 이루어진 習靜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의 기도문은 바로 習靜을 위한 기도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기도문을 예배 때 주문기도같이 인용합니다만, 실은 은밀하게 골방에서 習靜을 위한 기도로 기도한다면, 더 갚은 고요함을 體得할 뿐 아니라 깊은 고요함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끌 듯이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와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율법은 돌로 치라 명하였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을 받고 예수님은 허리를 굽히시고 땅에 무어라고 글을 쓰셨습니다. 잠시간이지만 예수님은 고요함속에 게셨고 사람들은 그 고요함이 길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한8:7) 예수님은 잠시 習靜에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침묵함, 무슨 말을 할까 궁리하고 생각을 굴리다가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習靜에 있으면 하늘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앞에서 말씀한대로 예수님은 시간이 나시는 대로 혼자 있으셨습니다. 때로는 광야에서, 때론 산으로 오르시어 習靜에 계셨습니다. 고요함속에 하늘의 소리가 예수님 심령가운데 충만하였던 것입니다.

習靜할 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침묵이 아니라 고요함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을 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주 삼라만상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곳곳에서 들려오는데 그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메카니즘이 習靜입니다. 그 고요함을 깊이 느낄 줄 아는 사람이  깊은 고요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꼭 아무도 없는 그런 장소만 아니라 사람들이 많은 번잡한 거리에서도 나만의 고요함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옛날 수도사들은 수도원 골방에서만 고요함을 체험하였지만, 하나님은 어디에서도 계시고 어느 때라도 만나실 수 있기 때문에 무슨 특정한 장소나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習靜의 믿음입니다. 
 
엘리야는 아합왕과 이세벨왕비에게 도망치다가 호렙산 동굴에 까지 쫒겨 가 숨어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 듣고 싶었습니다. 산이 흔들리고 불이 활활 타오르며 천둥우뢰소리가 들렸는데 그중에 하나님의 음성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한 세미한 음성(콜 떼마마)이 들려왔습니다. 여기서 세미한 음성 곧 ‘떼마마’ 고요한 음성-소리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닙니다. 그 소리는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심령 속에 그 소리는 힘과 용기 희망과 기쁨을 안겨 주는 소리였습니다. 고요함속에 고요함, 곧 習靜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여러분, 어린 아기가 자라는 소리를 듣습니까? 창문 밖 철쭉꽃이 화창하게 피어나는 소리가 들립니까? 그러나 분명히 어리 아이는 성장하고 철쭉 꽃 봉오리는 꽃 입을 활짝 엽니다. 하나님의 창조 역사는 고요함속에 고요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내 귀에 들리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가만히 게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움직임은 고요함 속에 고요히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것을 느끼는 것이 習靜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하나님과 달리 시끄럽게 소리치며 움직입니다. 약장수 나팔 불듯이 사람들이 듣지 못할 까 악의 확성기 볼륨을 높힘니다. 그래서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아니면 말고 한번 지러나 보자 하듯, 온갖 영적인 음담패설, 정신적 난잡한 소리들로 사람들을 현혹시킵니다.  이단사설이 그와 같습니다. 거짓 선지자, 가짜목사들의 소리가 크게 들립니다. 목소리 크면 위선도 큽니다. 정치인들 중에 목소리를 높혀 말하는 소리는 내말은 거짓말이다하는 소리로 들으면 됩니다. 사람들을 현혹시키기 위해 악은 거짓을 소리칩니다.

여호수아 6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리고서 정복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에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명령합니다. 수6:10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들리게 하지 말며’ 이 말이 개역 성경에는 '둘레지 말라'로 번역하였습니다. 참으로 멋진 우리나라 고유어입니다. 그냥 하는 말소리가 아닙니다, ‘둘레다’란 말은 “아주 어수선하고 시끄럽게 떠들다”란 의미입니다.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어는 '로 타쉐미우 에드 콜켐'로, 이 말의 의미는 '마음이 들 떠 잡담을 하거나 소란을 피우는 행위를 금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음성을 들리지 말게 하며”라는 번역보다는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라고 번역한 개역성경의 번역이 더 멋진 번역입니다. 하나님이 이 명령을 하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여리고 성을 돌면서 온갖 잡담들을 하며 별별 소리를 다 지꺼렸을 것입니다.
'야, 성이 매우 높네, 여리고 성 사람들이 성위에서 우리에게 돌을 던지거나 활을 쏘면 우리는 죽을 텐데 어떡하지, 성을 이렇게 돈다고 해서 견고한 여리고 성이 과연 무너질까?'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서로들 부정적인 말들을 뱉어 내며 누구는 겁을 잔뜩 먹었을 것이고 누구는 여호수아의 무모함을 비난하였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여리고 행진 대열은 拙者들의 행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拙者가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의 명령대로 움직였습니다. 그냥 조용히 숨죽여 여리고성을 돈 것이 아닙니다. 고요함 속에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비록 조용한 그들이지만 그들은 習靜의 발걸음으로 걸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다음 아이성 전투에서는 실패를 하였습니다. 왜 실패를 하였을 까요? 習靜을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卒개들이였습니다. 그들은 여리고성을 점령한 후 氣高萬丈하였습니다. 마지 자신들의 능력으로 점령하였던 것처럼 驕慢放恣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고요함속에 거하지 못했습니다. 習靜을 잃어버렸습니다. 아이성의 전투에서 그들은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拙者가 卒개가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너무 말이 많습니다. 물론 코로나 19바이러스로 인해서 우리는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또 문재인대통령 정부와 민주당의 국가 통치에 대한 비난이 한반도 하늘에 가득 찬 듯 합니다. 물론 질병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정부의 정책실패로 인한 백성들의 고난은 말할 수 없이 큰 현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소리의 크고 작음에 의해 해결되지 않습니다. 아우성을 치고 소리질러하므로 문제가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하나니은 리고성을 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듯이 “둘레치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고요함속에 우리 기독교인들은 習靜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앞에서 拙者가 卒개되었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졸개란 남의 부하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졸개-사탄의 졸개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부족함과 어리석음과 죗 된 모습을 부끄러워 하며 회개하며 겸손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태도를 養拙이라 합니다.
중국 당나라 시대 3대 시인하면 이백(太白. 701-762), 두보(712-770), 백거이(낙천. 772-846) 를 말합니다. 백거이의 시에 養拙(양졸: 졸렬함을 기르리라)이란 시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보처럼 살리라”입니다. 그 처음에 :
쇠가 무르면 칼이 되지 못하고 나무가 굽으면 수레의 끌채 되지 못하네.
이제 나도 이와 같으니 어리석고 몽매하여 입문(入門)도 못하겠네.
달갑게 명리의 유혹을 뿌리치고 자취를 감춰 전원으로 돌아왔네“
(鐵柔不爲劒(철유불위검),木曲不爲轅(목곡불위원)。
今我亦如此(금아역여차),愚蒙不及門(우몽불급문)。
甘心謝名利(감심사명리),滅跡歸丘園(멸적귀구원))
백거이는 스스로는 아무 일에도 쓸모없는 무른 칼이라 하며 스스로 모든 명리의 자리에서 떠나 고향으로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들어내고 약점을 밝힌다는 것은 오히려 그의 인격이 어떠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일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들어내고 자신의 부족함을 나타내며 자신의 모자람을 말한다는 것이 바로 자신의 인격을 드높이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養拙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자신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의 가진 것을 자랑하고 자기의 능력을 자랑하고 자기의 잘난 것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무한히 자신의 가난함을 아파하며, 자기의 부족함을 부끄러워하며 자기의 못난 것을 나타내지만 그렇다고 뒤로 숨거나 침울에 빠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고요함 속에 게시는 하나님이 그 고요함속에서 나를 위해 일하시고 말씀하고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養拙의 믿음입니다. 

비록 세상이 어둡고 시끄러워 우리의 정신이 쇠하여 지고 우리의 영혼이 무너져 내리듯하지만, 성도여러분, 하나님을 바라십시오, 고요함 속에 깊은 고요 속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習靜養拙의 믿음을 가집시다. 고요한 마음 고요한 영혼을 기르며 나의 부족함 때문에 오히려 더욱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믿음을 키워 나갑시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2021년 4월 25일  주일아침예배  잠언6:16-19  싸네 야훼(하나님이 嫌惡하시는 것) 1.


잠 6:16에 ‘여호와의 미워하시는...육칠 가지니’ 육칠가지란 상징적 수를 이용하는 문학 형식으로 중동의 문학에서 자주 나타나고 있는 숫자 잠언입니다. 아굴의 잠언(30:7-9, 24-28)에서 이러한 형식을 보여 주나 잠언서의 다른 곳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본문에 열거된 악 중, 앞의 여섯 가지보다도 일곱 번째 악을 하나님께서 특별히 미워하시는 것이라고 구분하나, 여기 서의 '육칠'은 수사학적 병행의 의도로 쓰여 진 표현일 뿐입니다. 곧 본문에 나열된 일곱 가지 악행 모두는 동일하게 여호와께서 미워하심을 강조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예: 육칠일이 지난 후, 육칠년이 흐른 뒤, 육칠일 만에, 육칠 명을 척후병으로 보냈다. 여섯 일곱 가지 음식. 67세 노인을 “육칠옹(六七翁)”이라함)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악이 무엇입니까?
잠6:17 곧 교만한 눈(에나임 라모트- 문자적 의미는 '높은 눈' 30:13;욥 21:22;40:11;시 18:27;131:1)과 거짓된 혀(레손 솨케르 시 5:6;120:3, 4:호 4:1-3;계 21:8)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6계명을 어기는 자)과
잠6:18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잠6:19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야피아흐 케자빔 에드 솨케르 문자적 의미는 '거짓을 호흡하는 거짓 증인'이다. 14:5, 25;19:5,9)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

이것뿐만 아닙니다. 잠언서에는 이 외에도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 예닐곱 가지가 더 있습니다.

잠언8: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잠언11:1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잠언11:20  "마음이 굽은 자는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행위가 온전한 자는 그의 기뻐
           하심을 받느니라
잠언12:22  "거짓 입술을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하게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
           을 받느니라
잠언15:8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
          니라
잠언15:26  "악한 꾀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선한 말은 정결하니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은 히브리어로 “사네 야훼”라 합니다. ‘사네’는 ‘미워하다 싫어하다. 혐오하다‘를 의미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요즈음 많이 뉴스에서 사용하는 嫌惡라는 말을 인용하여 “야훼 사네-여호와께서 혐오하시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사네 야훼,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것 중에 두 가지만 말씀드리고 나머지는 다음주일에 말씀드리려 합니다.

최근에 미국에서는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테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중국에서 코로나19바이러스가 시작되어 미국에까지 전염된 것이라 생각한 미국사람들이 중국인에 대한 묻지마 테러를 시작하였는데,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을 구별해 알아보자 못함으로 한국인들도 테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급기야 아시아 전체에 대한 혐오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어 아시아 여성 노인 어린 학생들을 주로 대상으로 테러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는 소위 민주주의 나라라고 하며 기독교신앙의 나라라고 하는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지금 미국이 얼마나 비도덕적이고 불의한 나라인가를 그리고 마치 정신분렬의 모습들을 보는 것 같습니다.
급기야 아시안 혐오범죄 방지법안을 민주당 소속인 메이지 히로노 상원 의원과 그레이스 멩 하원 의원이 공동 발의하여 미국 상원에서 94대 1의 압도적 찬성 속에 이 법이 통과 되었습니다. CNN등 외신에 따르면 4월 22일, 미국 상원은 아시아계 혐오범죄에 대응하기 위한 법안을 찬성 94표, 반대 1표로 가결했다.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진 의원은 공화당 소속 조지 홀리였습니다. 그리고 민주당이 다수당인 하원에서도 법안이 무난히 통과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혐오방지법이 있다고 해도 미국인 심성 속에 뿌리박혀 있는 인종차별사고는 벗어지기 어려울 것입니다. 
지난 6월에 실시된 퓨(Pew)사 조사에 따르면, 아시아계 미국인 3분의 1이 코로나19 대유행이 시작된 이후 이와 관련된 언어폭력이나 신체적 위협을 당했다고 응답했다. 또한 설문 대상의 25%가 "갑자기 공격당하지 않을까 불안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고 전했습ㄴ니다.


<코로나 창궐 이후 아시아인을 향한 혐오범죄의 위험을 느끼는 비율 - 출처 : 캐나다 통계청 자료, 그래프 created with Datawrapper>

미국만이 아니라 캐나다 내에서도 아시아인 인종차별과 외국인 혐오심이 증가되고 있는데, 최극 웹사이트 ‘Fight Covid Racisim’에 따르면, 3월 17일 자정 현재 캐나다 전역에서 891건의 아시아인을 대상으로 한 증오범죄 사건이 보도되었다고 알렸습니다.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대상으로 한 증오범죄가 오타와의 경우, 작년 대비 600%, 밴쿠버의 경우 717% 등으로 증가했고, 이 수치는 아시아 1인당 아시아 혐오범죄 신고 건수가 미국에 비하여 캐나다가 더 많았습니다.

다양성의 가치를 가장 큰 우선순위로 두고 정책을 세워가는 캐나다이지만, 극단적인 상황에서 보여주는 반아시아 정서는 어쩌면 평소 현실 생활 속 인종차별이 어쩌면 도리어 은밀했고, 의도적으로 은폐되어 오다가 코로나 사태로 외부로 나타났다고 하겠습니다. 칼레톤 대학 신문에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아시아인들에 대한 성공신화가 도리어 인종과 성차별, 폭력을 숨기는 역할을 했다는 글이 실려 눈길을 끌었습니다.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 반대 시위에 아시아인들이 동참하였음에도 정작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이나 테러행위들이 흑인들에 의해서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나라와 일본인간의 민족적 혐오감은 좀처럼 가라않지 않습니다.


(위 표는 일본에서 조사한 한국을 혐오하는 사람들의 연령별 분포 통계.)

한국인들이 혐일 하는 것은 이해할만 합니다, 예부터 왜구들이 처들어 와 한국인들을 살해하고 재물을 빼앗아 갔습니다. 특히 임진왜란의 침략해위와 강압적이고 야바위꾼들이나 할 법한 한일병탄으로 인한 민족적 감정은 결코 잊을 수 없음으로, 혐일은 한국인의 DNA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한국에 대한 혐한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한국의 3배 이상 발전된 나라입니다. 예부터 한국으로부터 덕을 받았을지언정 욕을 받지 않았습니다. 한국에 대한 고마워할 그들이 잘하는 고개 숙이고 고맙다고 인사는 안 할 지언 정 혐함 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말하자면 그들은 한국인에 대한 열등감이 그들의 역사적 DNA에 胎生的으로 스며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국 한국이 일본을 능가할 것이란 막연한 두려움도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과 한국 사이는 가깝고도 먼 나라입니다. 이웃보다 못한 사촌이라 할 까요? 그러나 미래에 우리나라가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협동함이 매우 유리하기 때문에 과거에 연연하여 혐일 하기 보다는 미래의 열린문으로 함께 나아갈 동반자 나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한강의 기적을 이룬 우리나라에 대한 세계 각국으로부터 혐오적인 시선들이 있음을 알고 적적하게 협친의 관계를 맺어가야 합니다. 외교가 국력입니다.
   
(반한 감정(反韓感情)이란 한국 문화·한국인 등을 싫어하는 감정으로,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상 많은 충돌이 있었던 주변국(일본 및 중국 등)과의 사이의 전통적인 감정적 마찰과 더불어 근대 이후 서구의 여러 나라와 교류를 시작하면서 생긴 문화적 편견이나 오해 때문에 발생한 한국을 싫어하는 감정이다. 근래에는 대한민국의 경제적 발전과 더불어 국내에 유입된 개발도상국 국가 출신의 이주민들에 대한 차별 등 복합적인 이유에서 온 것도 있으나 일본의 혐한세력들이 날조해 외국에 퍼뜨려서 오해를 사는 경우도 굉장히 많다.)

 

하나님이 혐오하는 첫 번째 사람은 교만한 눈을 가지 사람입니다.
眼下無人 벨기에 대사 부인이 옷가게 직원을 폭행한 일로 뉴스 톱을 이루고 있습니다. 서울 용산경찰서 등에 따르면 해당 사건이 일어난 것은 지난 9일 서울 용산구의 한 옷가게에서입니다. A 씨는 당시 해당 옷가게에서 여러 벌의 옷을 입어보다 구매하지 않고 약 1시간 여 만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A 씨가 매장 내 옷과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던 탓에 오해한 직원 B 씨는 그를 따라 나가 옷의 라벨을 확인하려하였습니다. 결국 이남을 알게 된 직원 B 씨는 A 씨에게 사과했지만 자신을 도둑으로 의심한 것에 화가 난 A 씨는 매장으로 다시 돌아와 직원들과 다툼을 벌리다가 이 과정에서 말리던 C 씨는 A 씨에게 뺨을 맞았습니다.  4월22일 공개된 당시 CCTV 영상에는 피터 레스쿠이에 벨기에 대사의 부인 A 씨가 신발을 신은 채 옷을 입어본다거나 자신을 쫓아와 옷의 구매 여부를 확인한 직원 B 씨에게 삿대질하고 이를 말리는 C 씨를 폭행하는 장면이 담겨 있었습니다.  아무리 면책특권을 가진 외교관 부인이라지만  안하무인으로 옷가게 점원에게 폭행을 하며 욕설을 한다는 것은 외교관 이전에 평소 그의 인격이 교만한 성격임을 말해주는 장면입니다. 외교관이라함은 주재국 국민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일이 외교의 제일 원칙일 것입니다. 어찌 외교관 뿐이겠습니까? 사람은 이웃과 친절한 관계를 가지는 일이 행복한 인생을 사는 제일 원칙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예수님께서 피 값을 주고 사탄의 죄의 사슬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 나라 백성이요 따라서 주안에서 형제요 자매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함께 기뻐하는 일이 행복한 인생을 사는 비결입니다.

왜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혐오합니까? 잠언 18:12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성경에 교만이란 구절이 132구절이 나옵니다. 교만은 망합니다, 겸손은 삽니다. 교만은 마귀의 영이고 겸손은 주님의 영입니다. 사탄의 역사는 교만자로부터 오고 성령의 역사는 겸손한자로부터 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가장 혐오하는 자는 사탄의 세력을 의지하는 교만한자요, 하나님은 이 교만한자를 심판하십니다.
사 2:12,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날이 모든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리니 그들이 낮아지리라.”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는 모든 교만한자들 개인과 그들의 사회와 그 나라와 그 권력자들  결국 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망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라졌습니다. 나라가 망한다거나 회사가 망한다거나 한 개인이 망하는 원인 중 그 한 요소는 꼭 교만이란 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혐오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는 교만한자로 있지 말고, 더 늦기 전에  예수 믿어 구원받는 겸손한자 되는 일이 성공적인 인생이 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구원 역사는 하나님의 혐오자인 교만한자들이 예수를 믿어 겸손한 자가 되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혐오감을 주는 두 번째 사람은 거짓된 혀를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신이십니다, 그러므로 거짓을 혐오하십니다.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을 미워하신다고 했습니다. 증인은 정직하고 진실해야 하는데 거짓을 말하여 진실을 왜곡하니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요즈음 이 세상이 어찌된 일인지 진실이 거짓이라 뒤집어씌우고,  가짜가 진실로 둔갑하는 가짜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가짜뉴스가 세상을 가짜세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특히 진실을 말해야 하는 기독교인들 가운데 이 가짜뉴스에 편승하여 아니 그 중심에서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극우 기독교발 가짜뉴스, 한국교회의 타락"이라는 포럼이 있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위기와 과제’에 대해 발제를 한 변상욱 CBS 대기자는 “현재 기독교는 보수에서 우파로 이제는 극우로 쪼개져 이슬람, 종북, 동성애 등 반대를 외치고 있다”며 “멀쩡한 문재인 대통령을 간첩이라고 하면서 끌어내려야 한다, 참형에 처해야 한다 등의 파시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참전용사에게 고개를 숙이는 대통령의 사진을 두고, 대통령이 북한군에게 인사를 하는 빨갱이, 간첩으로 내모는 가짜뉴스도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안진걸(상지대 초빙교수) 민생경제연구소장은 “개신교 내 일부 목회자들과 세력들이 보여주는 극우 극단적 입장과 공격적·수구적인 태도가 너무나 걱정이 되고 무섭기까지 하다”며 “막말 뿐 만아니라 허위 조작의 말까지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가짜뉴스는 결국 한 인간의 삶을 끊게 하고 한 사회와 국가를 멸망케 하는 사탄의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고 소리친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은 예수가 이스라엘 왕이 되려 한다고 가짜뉴스로 고발하였습니다,  로마 시대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를 당하였는데 그중에 기독교인들은 자기 선생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야만인들이라고 가짜뉴스를 퍼트리고 결국 이런 야만인이 로마에 살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며 기독교인들을 잡아 사자 밥이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아마도 역사상 가장 극악한 가짜뉴스를 퍼트린 사람들은 일본사람들입니다. 1923년 9월1일 일본 도교일대 7.9의 대 지진이 발생하여 수십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 혼란 속에 일본인들의 대규모 조선인 학살을 자행하여 6,000여명을 학살 하였습니다. 그 학살의 원인은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일본 정부는 가짜누스를 퍼트려 일본인들로 하여금 혼란으로 인해 자칫 정부에 대한 반발을 조선인에게 돌리게 한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100년이 되  오는 지금까지 일본은 아무런 사과문도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가짜뉴스는 일본인들에게 아직도 진실로 받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독도가 자기 거라고 가짜뉴스를 일본 자국인들에게 퍼트리는 일본이야 말로 가짜뉴스의 본거지라 할 만합니다.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사람중에 거짓을 퍼트리는 사람에게 엄중한 심판을 내리십니다. 결국 거짓은 진실 앞에 들통이 나버리기 마련입니다. 진짜와 가짜는 결국 들어나기 마련입니다. 솔로몬왕의 지혜의 에피소드에서 한 아기의 진짜 엄마와 가짜 엄마가 누구인가 판별하므로 솔로몬왕이 지혜의 왕이라고 알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진리가 이깁니다. 진실은 밝혀지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엄정하시고 하나님의 백지는 너무나 희기 때문에 조금의 티 검불이라도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가짜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거짓 선지자, 가짜뉴스를 어떻게 분별합니까? 사탄의 가장은 너무 교묘하여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찾아낼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진실과 공정을 평소에 실천 하며 사는 성도들의 눈에는 가짜가 보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지만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에 대해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설교는 자기교만과 자랑으로 치장되어 있고 예수님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설교 본문을 보면 예레미야나 아모스 미가서에 대한 본문은 거의 없습니다. 그들은 순교를 말하지만 거짓선지자들이 복으을 전하다가 순교하였다는 역사는 없습니다. 그들은 축복을 말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구원을 말하지만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이가를 회개하기를 더디 합니다. 결국 거짓의 마귀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면서 거짓을 예언합니다. 그들이 장차 심판대 앞에서 숨을 곳은 오직 사탄의 등 뒤일 뿐입니다. 

예레미야 23장 25-32절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내가 꿈을 꾸었다 꿈을 꾸었다고 말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 그들은 그 마음의 간교한 것을 예언하느니라  그들이 서로 꿈 꾼 것을 말하니 그 생각인즉 그들의 조상들이 바알로 말미암아 내 이름을 잊어버린 것 같이 내 백성으로 내 이름을 잊게 하려 함이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꿈을 꾼 선지자는 꿈을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가 어찌 알곡과 같겠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여호와의 말씀이라 그러므로 보라 서로 내 말을 도둑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그들이 혀를 놀려 여호와가 말씀하셨다 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거짓 꿈을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령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은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거짓 선지자들이 자기 마음에서 나온 꿈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가짜 설교입니다. 오늘날 이런 가짜 설교를 하는 목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도덕질 하여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므로 사기죄에 해당됩니다. 어찌 하나님이 그들을 모른척 하실 것입니까?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위에 서 이에 대한 준엄한 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결국 가짜설교로 백성들을 현혹시키고 진리의 말씀을 왜곡하므로 참 선지자 예레미야를 박해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렘 29: 18 “내가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그들을 뒤따르게 하며 그들을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어 학대를 당하게 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쫒아낸 나라들 가운데에서 저주와 경악과 조소와 수모의 대상이 되게 하리라.” 얼마나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입니까?
그리고 이같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은 바로 거짓 선지자뿐 아니라 가짜뉴스를 전파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히 일컬어 말씀을 사기치는 목사들과 그 추종자들에게도 해당되는 심판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혐오하시어 가장 큰 징벌을 이 ‘거짓 혀를 가진’ 사람들에게 내리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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