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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21년 3월중 주일아침 설교

전병호 by  조회 수:34 2021.04.04 14:07

2021년 3월 7일 주일아침예배  왕하 4:17-37  엔 샬롬, 앤 샬롬

 

북 왕국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악한 왕들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때때로 예언자들을 세워 왕들과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라오라는 말씀을 선포하도록 하시었습니다. 특히 가장 악한 왕이었던 아합왕 시절에는 엘리야 선지자를 세우셨고 다음 요람왕 시절엔 엘리사 선지자를 세우셨습니다. 요람왕은 아합의 아들로 전왕 아하시야가 아들 없이 죽자 사마리아에서 왕위에 올라 12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는 아버지 아합이 만든 바알의 기념 기둥을 치우기도 하였지만, 여로보암 1세의 죄에는 사로잡혀 벗어나지 못함으로 예후의 반란으로 죽었습니다.(열왕기하 9;14-26)

엘리사는 일종의 순회 목회자였습니다, 이 도시 저 마을 찾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백성들을 위로하였습니다. 엘리사가 가끔 수넴이라는 지역을 방문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북부 갈릴리 지역에 다볼산과 갈멜산 사이에 수넴이라는 곳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길보아산 근처에 있습니다. 사무엘상 28장 4절의 블레셋의 군대와 사울왕의 군대가 전쟁을 치른 곳이 바로 수넴입니다. 사울왕은 결국 이 길보아산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자기 칼에 엎드려 죽었습니다. 또 이곳은 미인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말년의 다윗왕을 시중 들었던 아비삭이라는 여인도 바로 이 곳 출신이었습니다. 아가서에 나오는 아름다운 술라미는 수넴여인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방무ㄴ하실 때 베다니 삼남매 집에서 지내셨듯이, 엘리사 선지자와 그의 사환인 게하시는 이 지역을 지날 때마다 수넴에 거주하는 한 여인의 집에서 음식을 먹고 설교 준비도 하고 숙박을 해결하였습니다. 수넴 여인의 집은 그 지역의 부요한 가정이었습니다.  남편과 의론하여 엘리사가 오면 집에 머물 수 있도록 작은 방을 마련하여 식사를 대접하고 휴식을 취하도록 배려하였습니다. 물론 이 여인은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존경하며 선지자를 대접하면 또한 복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시었습니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마10:41)
13절에 “엘리사가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너는 그에게 이르라 네가 이같이 우리를 위하여 세심한 배려를 하는도다 내가 너를 위하여 무엇을 하랴 왕에게나 사령관에게 무슨 구할 것이 있느냐 하니 여인이 이르되 나는 내 백성 중에 거주하나이다 하니라”.
이러한 엘리사의 질문은 그가 궁정에서 얼마간 영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적으로 우리는 6:9-12, 21-23;8:4-6에서 엘리사가 왕궁으로부터 받은 총애와 존경을 봅니다. 그래서 이렇게 나를 잘 대접하는 이유가 '무슨 구할 것이 있느냐?'는 엘리사의 말은 '남편에게 무슨 군대의 직책이나 직위를 주기 원하느냐?' 아니면 '내가 너를 위하여 중재할 어떤 訟事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넴 여인은 “내 백성 중에 거주 하나이다 하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엘리사선지자는 여인의 정성된 섬김에 보답하기 위하여 그녀에게 도움을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궁중에 있는 왕에게나 권력을 가진 군대 장관에게 청을 넣을 일도 없고 무슨 재판에 도움을 바라는 일도 없으며, 이곳의 사람들과 더불어 잘 살고 있을 뿐이요, 자신이 엘리사를 대접한 것은 무슨 보답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섬기고자 하는 일이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이 여인의 섬김에 감사하여 무슨 도움이라도 주기를 원했습니다. 사환 게하시가 말하길 ‘이 여인의 남편은 늙었는데 슬하에 자식이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엘리사는 여인에게 ” 내년 이맘때에 아들을 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하나님의 은혜로 늙어서 아들을 얻은 것과 같이 수넴 여인에게도 동일한 은혜가 베풀어 진 것입니다(창 18:10). 여인이 말하길 “아니로소이다. 내 주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의 계집종을 속이지 마옵소서 하니라.(알...알 테캊제브)”  문자적으로는 '속임수의 헛된 소망을 나에게 일으키지 마옵소서'(Lange) 혹은 '나를 어떤 거짓 소망으로든지 흥분시키지 마옵소서' (Keil & Delitzsch)라는 의미로 선지자의 말을 도리어 헛된 꿈만 부풀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처럼 수넴여인은 욕심이 없고 담백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
니다. 제갈량이 아들에게 한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 非澹泊無以明志, 非寧靜無以致遠.(비담박무이명지 비영정무이치원) : 마음이 넉넉하고 담백하지 않으면 뜻이 밝을 수가 없고, 고요하지 않으면 큰일을 도모할 수 없다. >  흔히 澹泊明志 寧靜致遠이라 말하고 조선 시대 선비들이 좋아하는 문장이 되었습니다.
(안중근선생이 여순 옥중에서 쓰신 글)
저는 이 말을 淡泊明信 平安致遠으로 置換하여 “마음이 담백하지 않으면 온전한 믿음을 얻을 수 없고 평안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원한 은혜를 받지 못한다“로 바꾸어 말하고 싶습니다. 바로 이 여인은 淡泊明信 平安致遠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후 한해가 지나자 여인은 정말 아들을 낳아 품에 안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애지중지 아들을 키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곡식 베는 때 이 아이가 아버지와 함께 밭에 나왔습니다. '아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어가 '어린 아이', '아이'를 의미하는 '옐레드'와 '나아르'(29,30)로 사용되었고 이 아이가 아버지에게 머리가 아프다고 말하는 것을 보아 아마도 서너 살 정도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아이가 머리가 아프다고(로쉬 로쉬) 하니 아버지는 일꾼에게 어머니에게 아이를 데려다 주라고 말합니다.  수넴 지방은 옥수수 재배로 유명한 곳이기 때문에 곡식을 벤다(카짜르: 수확하다)는 말은 옥수수를 베는 것, 혹은 옥수수를 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가 곡식 베는 곳에 있었던 것은 그가 직접 추수를 했다기보다는 추수하는 일꾼을 감독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꾼들이 일하는 것을 보던 아이가 갑자기 일사병에 걸린 것 같습니다. 아침이라 해도 볕이 매우 뜨거웠기 때문에 햇볕에 오래 쬐고 있으면 자주 아이들에게 일사병에 걸린다고 합니다. 아침부터 낮까지 어머니 무릎위에 앉아 간호를 받던 아이가 그만 죽었습니다.

우리는 다음 이야기에서 수넴여인의 슬기로움과 믿음을 보며 참으로 놀라게 됩니다. 아마 일반적으로 아이가 죽었다면 울고불고 난리를 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들에 나간 남편에게 알렸을 것입니다. 그러면 남편 뛰어와 온 집안이 슬픔으로 가득찼고 여인은 패닉상태 억장이 무너져 내려 망연자실하여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수넴여인은 아이를 침상에 눕힌 다음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누가 보았다면 아이가 자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갈멜산에 계신 엘리사선지자님을 뵈러 나귀 한 마리와 사환을 데리고 가겠다고 말합니다. 남편은 초하루도 아니고 안식일도 아닌데 어찌 선지자님을 만나러 가려고 하느냐고 묻습니다. 엘리사선지자는 매일 같이 지방을 순회하다가 초하루와 안식일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갈멜산 성소로 가기 때문에 그때야 만날 수 있지 않을 것인가? 왜 선생님을 만나려고 하느냐 무슨 일이 있느냐고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수넴 여인은 “평안합니다(토메르 솰롬).”라고 대답하고 급히 떠났습니다.  이 말은 흔히 안부의 물음에 대한 대답(26절)으로서 '아무 일 없다', 또는 '걱정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수넴 여인은 남편에게 아이가 죽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엘리사선지자님께서 반드시 아이를 살려내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수넴여인은 평안하지 않습니다. 근심과 걱정, 슬픔과 불안이 가슴에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평안하지 않습니다, 一刻如三秋입니다. 지체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서두르지 않고 평안히 다녀오겠다고 말합니다. 평안하지 않으나 호들갑스럽지 않습니다. 평안한 자세를 잃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편 곁을 떠나자 일꾼을 재촉하여 엘리사에게 달려갑니다.

엘리사 선지자가 수넴 여인이 멀리서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성지순례차 이 갈멜산 엘리야 제단에 가서 보니 아래가 훤히 내려다 볼 수 있었습니다. 엘리사선지자가 내려다보니 수넴여인이 급히 오는 것을 보고 무슨 일인가 궁금하여서 게하시를 내려 보내며 무슨 일이 있는가 물어보라고 합니다. 4장 26절에 “너는 달려가서 그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하샬롬 라크) 네 남편이 평안하냐(하샬롬 레이세크) 아이가 평안하냐(하샬롬 라얄레드) 하라”  게하시에게 여인은 “평안 합니다(샬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인은 평안치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달려오면서 여인은 평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곧 엘리사선지자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넴 여인이 엘리살 발 앞에 엎드려 엘리사의 발을 두 팔로 안았습니다. 게하시가 그 모습을 보고 말리려하니 엘리사선지자는 “가만 두라 그녀의 영혼이 괴로워하지만, 나는 그 연유를 모른다. 여호와께서 내게 숨기시고 이르지 아니하셨도다.” 라고 말합니다.
여인이 선지자의 발을 안은 것은 간절한 어떤 도움을 요청하는 심정을 보여주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게하시는 선지자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막으려 하였던 것입니다.
 

엘리사선지자는 여인에게 어떤 괴로움이 있을 것이라 생각은 들지만 무슨 근심이 있는지는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내게 숨기셨다” 즉 여호와께서 내게 알려주지 않으셨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엘리사에게 미리 알려주시지 않으신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선지자들에 임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말씀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따라 말씀을 주십니다. 예수님도 가나안 혼인 잔치 때에 아직 내 때가 아니라는 말씀을 하시었습니다.(요2:4) 아무 때나 선지자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흔히 어떤 목사님들은 항상 자기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다고 착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하는 말은 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라고 착각합니다. 그것은 착각이 아니라 忘却아닌 망할 망자 亡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지도 않은 말씀을 주셨다고 떠들어대는 망할 사이비 목사들이 있습니다. 구약시대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고, 신약시대는 이단자들, 그리고 오늘날 사이비 가짜목사들이 거짓 증거 하는 죄들을 범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음은 완전히 악한 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수넴 여인이 말하기를 “내가 내 주께 아들을 구하더이까? 나를 속이지 말라고 내가 말하지 아니하더이까?” 엘리사선지자에게 항의조로 말하지만 말속의 의미는 우리 아이를 살려낼 책임이 선지자에게 있으니 아이를 살려달라는 탄원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선지자는 속이는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도 속이시는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에 아들을 주셨다면 죽은 아들을 다시 살려내어야 속이신 것이 아니란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엘리사선지자는 무슨 말인지 알았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빨리 살려내기 위해 젊은 게하시에게 선지자의 지팡이를 주고 아이에게 달려가 아이 얼굴에 대라 그런데 도중에 누구하고도 인사도 하지 말라라고 말합니다. 게하시는 달려가 아이 얼굴에 지팡이를 놓았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살아나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아이가 살아나지 않았을까? 그 이유에 대한 성경의 설명은 없습니다. 그러나 미루어 짐작하건데 게하시는 어디서나 잘난 척하기 잘하는 사환입니다. 그는 지팡이를 흔들며 만나는 사람에게 인사를 하며 자기가 선지자로부터 지팡이를 전수받았다고 자랑하였을 것입니다. 지팡이를 받았다는 것은 후계자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축하하며 인사하였을 것입니다. 선지자의 당부를 저버린 게하시는 그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실패하였음을 게하시로 부터 전해들은 엘리사선지자는 주저하지 않고 수넴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방안에 들어가 죽은 아이와 단둘이만 있었습니다. 엘리사는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고 아이 몸 위에 올라가 엎드려 입과 입, 눈과 눈, 손과 손을 마주 대었습니다. 그러자 몸에 점점 따뜻해졌습니다. 엘리사는 다시 일어나 방안을 왔다갔다 하다가 다시 아이 몸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러자 죽은 아이는 재채기를 일곱 번 하고 눈을 떴습니다. 아이가 살았습니다.   
이 같은 장면은 왕상 17:21에서 엘리야선지자가 과부의 아들을 살릴 때보다도 훨씬 더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 다 예수님이 행한 이적에 비하면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신 분임으로 말씀으로 병자도 고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었습니다.(막 5:39-42;눅 7:13-15;요 11:43,44). 그러나 엘리야와 엘리사선지자는 자신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고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어린 아이를 살렸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동일한 기적이 행하여졌지만 예수님과 차이는 비교가 안 됩니다. 왜 엘리사는 방안을 이리저리 다녔습니까? 을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한편 엘리사가 내려서 집안에서 문자적으로 '한번은 이쪽으로, 또 한 번은 저쪽으로(아카드 헨나 웨아카드 헨나)'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아이의 몸이 따뜻해진 것은 자기의 몸으로 인해 따뜻해 진 것인지 확실치 않음으로 다시금 기도하면서 왔다 갔다 하는 동안 아이의 몸이 식어져서 다시금 아이의 몸에 엎드리니 그제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선지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아이를 안고 방안을 나갔습니다. 비로서 수넴 여인은 진정한 평안을 얻었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집안 모두 평안 하였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엔 샬롬 앤 샬롬”이라고 였습니다. 처음 엔 샬롬은 히브리어로 앤은 “에인”이란 말로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럼으로 엔샬롬은 ‘평화가 아니다’란 의미입니다. 후에 앤 샬롬은 앤은 헬라어로 “...안에”라는 말로 “평안합니다”란 의미입니다.(헬라어로 평안은 에이레네입니다. 그러나 샬롬은 히브리어이지만 만인 공통어로 하나님의 평화라는 말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이 여인은 평안하지 않았지만 평안을 말하니 평안이 왔습니다. 이 여인의 믿음은 참으로 큰 믿음이었다고 하겠습니다.  말한대로, 그 믿음대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진 이 스넴여인을 4:8에 “귀한 여인”이라고 번역하였지만 히브리어 원어는 “가돌”이란 말로 “위대한” “큰”이란 말로 위대한 믿음을 가진 여인 큰 믿음의 소유자라고 하겠습니다.

여러분, 환경이 좋아야 평안한 것이 아닙니다. 실로 우리 인생은 고난과 역경, 불안과 근심, 아픔과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어느 때 우리가 평안한 적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고난 속에서 그 불안 가운데서 평안을 찾을 수 없는 그 환경 속에서 “나의 마음 평안해”를 고백할 수 있다면 그는 위대한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그 역경 속에 평안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큰 믿음의 사람인 것입니다. 그의 인생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언제나 승리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지난 금요일 밤 조선Tv에서 미스트롯 2차 결선경연이 있었습니다. 양지은씨가 ‘붓’이란 노래를 불러 진으로 1등을 하였습니다. 양지은씨는 어린 시절부터 신동소리를 들으며 창을 불렀습니다. 앞날이 창창한 국악인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런데 20살 되던 2010년 어느 날 아버지가 신장염, 당뇨 합병증 으로 시한부 선고 판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때, 양지은양은 자신의 왼쪽 신장을 기증하고, 기증 이후 수술의 후유증으로 배에 힘이 안 들어가 창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음악을 포기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양지은씨는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아버지는 간암이 발생하여, 간을 절제하고 당뇨 합병증으로 발가락 절제수술을 하였습니다. 이제 남은 생애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 아버지에게 소원이 있다면 딸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던 중 조선Tv에서 미스트로2차경연대회가 있다는 말을 듣고 별 연습도 없이 양지은씨는 참여를 하였습니다. 1등을 하리라는 생각은 전혀 없었고 아버지에게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는 생각으로 지원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준결승전에서 떨어져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준결승전에 오른 한 사람이 갑자기 경연을 포기하였으니 당신이 대신 와서 참여 하라는 주최 측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야말로 생각도 못했던 기회기 다시 왔습니다. 준결승전 경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불안한 가운데 있었지만 최선을 다해보자 하며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마침내 결선에 오를 7명에 뽑히었습니다. 그리고 2주에 걸쳐 결승전을 하는데 당당히 眞 일등을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데렐라가 탄생했다고 칭찬을 합니다. 국악계의 기린아로 자랄 사람이 목소리를 잃는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매일의 인생에 평안을 모른 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평안한 인생을 위해 두 아이의 엄마로 아버지의 효녀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나라에서 가장 노래를 잘 부르는 진짜 가수로 나타난 것입니다. 사회자가 1등 상금을 어디에 쓸 것입니까? 하고 물으니 아버지께서 아파트 5층에 살고 계시는데 아파트 1층에 사시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말을 했습니다. 엔 샬롬이지만 마침내 앤 샬롬, 평안이 없는 인생에서 평안한 삶을 사닌까 평안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이런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까? 1등을 할 때 부른 노래가 “붓”이란 노래입니다. 이 노랫말을 소개하려 양지은씨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힘겨운 세월을 버티고 보니  / 오늘 같은 날도 있구나  / 그 설움 어찌 다 말할까
이리 오게 고생 많았네 / 칠십년 세월  / 그까짓 게 무슨 대수요
함께 산 건 오천년인데  / 잊어버리자 다 용서하자 / 우린 함께 살아야 한다
백두산 천지를 먹물 삼아  / 한 줄 한 줄 적어나가세
여보게 친구여 / 붓을 하나 줄 수 있겠나 / 붓을 하나 줄 수 있겠나

칠십년 세월 / 그까짓 게 무슨 대수요 / 함께 산 건 오천년인데
잊어버리자 다 용서하자 / 우린 함께 살아야 한다
한라산 구름을 화폭 삼아 / 한 점 한 점 찍어나가세
여보게 친구여 / 붓을 하나 줄 수 있겠나
여보게 친구여 / 붓을 하나 줄 수 있겠나 / 붓을 하나 줄 수 있겠나

이 노랫말은 남북한 사람들이 지난날의 원수 된 일들 겨우 70년이지만 우리는 5,000년 함께 살아온 겨레가 아닌가? 그럼으로 옛 원수 된 사정일랑 잊어버리고 용서하도 함께 살자. ‘여보게 친구여 붓 하나 줄 수 있겠나“ 총이 아니라 핵무기가 아니라 붓을 서로 나누는 무력이 아닌 붓으로 평화라는 글씨를 한반도에 쓰자 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 희망을 이룬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잊어버리자 해서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용서하자고 해서 용서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친구가 붓을 달라하는데 핵무기를 들여 밀면 어찌 평화가 이루어 질 것인가?  세상은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고 있으니 우리의 인생이 언제나 평안할 것입니까?

문제의 답은 아모스예언자가 말씀하십니다. 북 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 시대 하나님께서 아모스예언자를 통해서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평안하기 위해선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으면 지난날의 원수됨을 잊어버리고 용서하고 평안해 집니다. 전심으로 찾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시 42:1),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왜 평안하지 못합니까? 수넴 여인처럼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버지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9-13) 하나님을 찾으면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러면 평안하지 않은 환경 가운데 평안을 얻게 되고 마침내 평안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평안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평안하지 않으나 평안을 말하며 성령 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믿음입니다.

코로나 19바이러스로 사람들은 평안하지 못합니다. 엔 샬롬입니다. 또 백신때문에도 더더욱 평안하지 못합니다. 마져야하나 안 맞아야 하나?  코로나 보다 더 무서운 것이 불안이란 병입니다.  진정 우리의 평안은 하나님 안에서의 앤 샬롬 평안입니다.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기간입니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를 지시면서도 평안하시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평안하시었습니다. 허리에 창을 맞으며 그 생명 다해 가시면서도 평안하시었습니다. 왜요? 용서와 사랑의 성령이 예수님 안에 가득하셨기 때문입니다. 엔 샬롬 평안하지 못하는 것은 마귀의 역사요, 앤 샬롬 평안한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마귀가 역사하지 않도록 우리가 평안을 말하면 우리는 성령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괴롭게 하고 불안케 하고 평안을 뺏어가는 사탄마귀가 범접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 사순절 기간 열심히 예수님을 찾아 그 십자가의 길을 따라갑시다. 수넴 여인이 갈멜산에 게시는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 기적을 체험하고 평안을 회복하였던 것처럼 그 어떤 일에도 평안을 잃어버리지 말고, 그 평안을 빼앗기지 말고,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리고 우리 라온코이노니아 가족들은 사순절 기간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 평안하지 못한 엔샬롬 시대에 앤샬롬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안이 우리와 모든 가족간에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021년 3월 14일  막 12:28-34  나 자신을 사랑하라

 

달리기를 잘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서 자기보다 더 잘 달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럽니다. "야! 너보다 더 잘 달리는 건 아무개 집 개다." "그래?"  그래서 그 개하고 달리기 시합을 했습니다. 그런데 개하고 달리기 시합에서 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는 말이 "개보다 못한 놈이네." 합니다. 또 열심히 연습을 해서 "여러분, 오십시오. 제가 이번엔 개를 이길 수 있습니다."  열심히 달렸는데, 골인 점에 똑같이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하는 말이 "개 같은 놈이네."합니다. 더 열심히 연습을 해서 이번엔 개보다 먼저 결승점에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하는 말이 "개보다 더 한 놈이네."그랬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나의 능력의 기준이 무엇인가? 입니다. 우리 인생의 기준을 개에게 둔다면 개(犬)人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나의 기준을 둔다면 시8:5 말씀처럼 비록 하나님 보다는 조금 못하지만,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엡5:1,롬 8:14)

마태복음 22장 39절과 누가복음 10장 25-37에도 질문하는 사람은 다르지만 같은 내용이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큽니까?"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입니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온 율법과 선지자들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너 자신을 사랑하라  
월터 트로비쉬 저 / 이현모 역  | 생명의말씀사 | 2002년 09월 30일)


오늘 중점적으로 말씀드릴 구절은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여라.(아가페세이스 톤 플레시온 수 호스 세아우톤) '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너의 이웃’ 다음의 말씀에  “너는 사랑하라 네 자신을(아가페세이스:동명현능2단....세아우톤)”입니다. 트로비쉬(Walter Trobisch 1923-1979 Missionaries to Cameroon and family life counselors)는 이 구절을 "자기 사랑의 명령"이라고 부르면서, "자기사랑은 그러므로 우리 이웃을 향한 우리의 행동의 전제 조건이자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대부분 목사님들이 본문을 설교의 주제로 말씀을 전할 때에, “이웃을 사랑하라”를 주제로 설교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주제는 이웃 사랑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을 잠시 음미하면 이웃을 사랑하는 주체는 바로 나 자신이며, 나 자신을 사랑해야한다는 전제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네 자신처럼 사랑’하듯이-나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웃도 사랑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먼저 배우지 않고는 우리의 이웃들을 제대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최대환신부라는 분이. 그의 책 <나 자신부터 돌봐야 합니다.  행복한 삶을 위한 자기 배려의 철학 아우름>( 샘터| 2020, 12월 18일 출간)에서  “나를 돌본다는 것은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여정입니다. 자신을 올바르고 충만하게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될 때 비로소 우리 삶에 열매가 맺게 됩니다.” 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현재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가수가 바로 우리나라 방탄 소년단입니다.

2018.9.24.에 방탄소년단의 한 가수인 RM(김남준)이 뉴욕 유엔 본부에서 열린 ‘유엔 제너레이션 언리미티드 파트너십(Generation Unlimited Partnership)’ 행사에서 7분간 영어로 연설해 화제를 모았습니다. 그 연설의 첫 부분에서 말하길 “제 이름은 김남준입니다. 그룹 BTS의 리더 RM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날의 젊은 세대를 이야기하는 중요한 자리에 초대되어 대단한 영광입니다. 작년 11월, 방탄소년단은 유니세프와 함께 ‘진정한 사랑은 자기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는 믿음’이라는 의미가 있는 Love Myself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전 세계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유니세프의 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 ”로 시작해서 마직말의 말로 “..............저는 아이돌이자 동시에 아티스트입니다. 저는 제 삶을 살아가며 많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저는 결점이 많고 두려움도 많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저 그대로를 사랑하고 포용하며 나아갈 겁니다. ”라는 말로 연설을 끝마쳤습니다. 수 많은 각국 대표들과 세계 많은 나라에서 이 연설을 들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방탄 소년단은 “Love Myself?"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그 첫 소절에서  “눈을 뜬다 어둠 속 나 / 심장이 뛰는 소리 낯설 때 ? 마주 본다 거울 속 너 / 겁먹은 눈빛 해묵은 질문 / 어쩌면 누군가를 / 사랑하는 것보다 / 더 어려운 게 나 자신을 / 사랑하는 거야 .”라고 노래를 부름으로 전 세계에서 8번째 베스트셀러로 발매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두 계명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이것이니...이(들) 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메이존 투톤 알레 엔톨레 우크 에스틴).“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이 보다 더 큰 계명이 없다고 하십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계명에 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사랑을 사랑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전 세계가 코로나 19바이러스로 인간의 본성이 여실히 들어났는데, 특히 미국을 비롯한 자유 민주 국가에 살고 있는 그들을 보면서 왜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퇴폐적이고 파괴적인가? 그 답은 진정 자신을 사랑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웃도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사탄의 모습은 무엇인가 자기파괴의 모습입니다. 모든 죄악의 모습은 바로 자기를 사랑하지 못한 자신을 무너뜨리는 모습입니다. 사탄이 살고 있는 공간이 어느 다른 곳이 아니라 파괴된 내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균이 내 몸 안에 있듯이, 사탄과 죄악의 모습이 파괴된 내 인격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교회에서 이웃을 자기를 사랑하듯 사랑하라고 전하지만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자기를 파괴 하고 있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할 수 없으며 오히려 이웃을 파괴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노동 사회 의료 심지어 교회까지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는 파괴된 인격의 정치인들을 보면서 암담한 정치 현실에 가슴이 아픕니다. 파괴된 인격의 공직자들 기업인들 심지어 가정과 교회를 보면서 무너져가는 우리나라를 슬퍼합니다. 코로나19바이러스가 언제 끝날는지 참으로 무서운 전염병이라고 말하지만 사람들의 파괴된 인격 때문에 여전히 끝날 줄 모르고 유행하고 있습니다.

지난 3월 13일 제주시 애월읍 봉성리 새별오름 일대에서 에서는 '코로나19 종식 기원' 제주들불축제를 개최하였습니다. (제주=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참으로 애절한 소원이 들불처럼 코로나 바이러스가 다 타버리길 바램이 있엇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백신은 바로 파괴된 인격을 치유하고 건강한 자기사랑을 확실히 한다면 그 어떤 전염병도 이길 수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마음에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합니다. 상대방이 좋아하고 행복한 방향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은연중에 자기 상처가 발현이 되어 상대방을 미워하거나 병든 사랑(Pathetic Love)을 하게 됩니다. 병든 사랑이란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제로 자기욕구를 채우려는 잘못된 관계를 말합니다. 이런 모습들이 TV연속극에 자주 등장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역기능가정(逆機能家庭, Dysfunctional family)’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어린 시절 사랑을 받지 못하고 상처를 주는 가정환경을 말합니다. 아버지가 술이나 일이나 도박이나 중독에 빠져 있고 여기에 폭력까지 사용한다면 행복의 요람인 가정이 왜곡된 인간들을 만들어내는 산실이 되고 맙니다. 이럴 경우 어머니는 그 분노를 자녀들에게 쏟아 붓는 방향으로 해소하려 합니다. 아이들에게 집착하고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기 쉽습니다. 또는 아이들이 아버지에 대항하여 어머니를 보호하기 위해서 과도한 책임감을 갖기도 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자아는 사랑받지 못하여 성장하지 못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성인 아동’이라고 합니다. 성인이 되었지만 상처받은 자아는 어린 시절 그대로입니다. 이런 사람이 성인이 되어서 사랑을 할 때 온전한 사랑이 어렵습니다. 지나친 책임감이나 또한 무책임함으로 상대방을 장악하려 하거나 반대로 방치해버립니다. 어린애 같은 욕구가 남아 있기에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던지, 때로는 유치한 모습을 보이고 성숙한 사랑을 하지 못합니다. 다 자기 좀 사랑해달라는 암묵적 호소이자 비명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면 결국 부모가 걸었던 길을 다시 걷게 됩니다. 유전적인 기질도 있고 배운 게 그것이기 때문에 술이나 일이나 도박이나 다른 어떤 중독에 빠지고 맙니다. 그것을 통해 대리 만족을 취하거나 자기 안의 상처를 외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맥원에 아동들이 40여명이 있는데 그중 부모나 어른들로부터 폭력과 학대로 인해 오게 된 아동들이 많이 있습니다. 며칠 전 일맥원 이사회에서는 피학대 아동을 위한 쉼터를 원내에 세우기로 결의 한바 있습니다. 왜 우리 사회에 끔직한 가정피해 사건들이 많은가 그 원인은 부모들이 자기 사랑을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처럼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유리는 우리 자신이 충분한 사랑을 받아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셨던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들은 죄로 말미암아 상처받고 무능력한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우리들에게 어떤 요구도 하지 않으시고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10) 주님은 화목제물이 되시고 이것이 예수님의 자기 사랑방법입니다. 예수님의 자기사랑이 곧 우리를 죄에서 구워하시는 이웃 사랑으로 보여주시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짐을 요구하지 않으셨고 대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심으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시었습니다. 그러시고는 다만 너희는 행복하여라, 풍성한 생명을 누리라는 말씀이 곧 예수님의 이웃 사랑 방법입니다.  요 10:10에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이 얻게 하려는 것이라” 이것 예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신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신 방법인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만찬에서 너희도 이같이 행하라고 하십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종교 개혁가인 루터는 그의 갈라디아서 강해(1519)에서 ‘즐거운 교환’(fröhlibher wechsel 성 버나드의 결혼신비주의적인 비유를 들어 영혼과 그리스도의 하나됨을 설명한다. )’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시어 우리들의 것(nostrum)을 자기 것으로 삼으시고 자기의 것(suum)을 우리에게 분여하시고 본질상 그의 것(guod suum erat nafura)을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것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릴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십자가가 있는 곳에 잠 자유가 있고 구원이 있기에 십자가의 자리는 나의 거짓과 자만과 욕심과 더러운 죄, 이것들은 자기를 미워하게하는 마귀의 역사인, 병든 심령 파괴된 자아와 예수님의 생명과 평안과 기쁨과 능력과의 “즐거운 교환”의 장소가 됩니다. 
우리가 가진 죄와 사망이 예수님 것이 되고 예수님이 가진 자유와 행복이 우리 것이 됩니다. 예수님이 가진 능력과 지식은 우리 것이 되고, 우리가 가진 무능력과 무지는 예수님의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무엇입니까? 자기 사랑은 바로 예수님 사랑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이 곧 자기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최상의 자기 사랑입니다. 세상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를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를 파괴하여 지옥가게 하는 일이 아닙니까?


레오 버스카롤리아 교수가 있습니다. 이 교수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 시대의 문제 중의 하나는 자기자신을 건강하게 사랑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데 기인한다" 이 시대의 문제중의 하나, 원인 중의 하나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데 건강하게 사랑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데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쓴 책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는 미국 사람에게 가장 많은 영향력을 미친 100권의 책 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그의 지론을 담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자신을 발견하고, 남을 사랑하며,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추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자신을 발견하여 발전시키고 봉사함으로 즐거움을 누리려는 그의 건전한 자기사랑, 건강한 즐거움은 사실 가족공동체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레오교수의 어느 젊은 날에, 레오의 아버지가 사업에서 파산하였다는 사실을 가족에게 알렸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놀랍게도 그날 자신이 지닌 보석 목걸이를 팔아서 저녁에 성대한 잔치를 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망한 집이 잔치를 여는 것을 보고 비난했지만, 나중에 그 소식을 전해들은 어머니는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저녁이야말로 우리가족에게는 다른 어떤 때보다도 기쁨이 필요한 저녁이었지." 그 아버지는 그들이 소유한 보석보다도 가족구성원 자신이 더욱 소중 한 보석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건강한 기쁨은 레오 교수의 가정으로부터 분명히 샘솟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즐거움과기쁨을 좇지만, 그것이 진정한 기쁨을 가져다주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이 육신적 즐거움을 버리고 학문을 추구하였지만, 그것도 기쁨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플라톤의 철학을 깊이 공부하고 주변에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는 로마 황제 발렌시아누스를 칭송하는 웅변원고를 적어 내려가면서, 비참함과 곤고함에 빠져들었습니다. 술에 대취하여 길가에서 크게 웃고 즐거워하는 거지보다도 못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거지가 진정한 만족을 얻은 것은 아닙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야 진정한 기쁨을 누렸다고 고백한다. 그는 "하나님 안에만 진정한 소망과 기쁨이 존재 한다"고 말한다. 행복의 절정, 즐거움의 절정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너는 사랑받아야 한다. 왜?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사랑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건강하게 사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건강하게 사랑하는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 곤 나의 육체(몸)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 몸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세상에 남쁜 개는 없다는 TV프로그램이 있는데 본질적으로 세상에는 나쁨 사람이 없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안치환의 ‘사람이 꽃 보다 아름다워’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가사 중에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 이 모든 외로움 이겨낸 바로 그 사람 / 누가 뭐래도 그대는 꽃보다 아름다워 / 노래의 온기를 품고 사는 / 바로 그대 바로 당신 / 바로 우리 우린 참사랑.‘

봄이 와 산수유 노랑꽃이 피고 동백꽃 매화꽃이 피기 시작하였습니다. 조금 있으면 개나리가 꽃을 피우고 목련꽃이 꽃 봉우리를 하얗게 열어 재 칠 것입니다. 수선화 튜립 백합화도 피어 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꽃도 그 꽃을 돌보는 아내의 얼굴이 꽃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누가 뭐래도 꽃 중의 꽃은 제 아내입니다. 바로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그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에서 구원하신 당신과 나, 사람은 이세상의 그 어떤 꽃보다 아름답기에 충분히 우리는 나 자신 곧 내 몸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일은 먼저 자신을 건강하게 해야 하고 병들었으면 치료받기 위해 병원도 가고 약도 먹어야하고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고 몸을 움직여 온몸 구석구석이 기름칠 한 듯 잘 움직여야 합니다. 음식을 먹다가 목에 무엇이 걸리면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면 쉬게 걸린 음식이 빠져 나올 수 있다고 합니다. 왼 발에 쥐가 나면 오른 손을 번쩍 올리 쉽시오. 걷다가 어지럽고 숨이 가빠오면 두 손을 번쩍 올리고 심호흡을 하십시오. 건강을 상하는 일을 피하고 몸을 보호하십시오. 내 몸을 내가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켜 줄 가요. 세상에 나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고장 나면 얼마나 아프고 괴롭습니까? 내 몸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나 나를 사랑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내 영혼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몸이 잘됨 같이 영혼이 잘되어야 합니다. 내 몸을 아무리 가꾸고 보호해도 하나님이 지정하신 년 수가 있습니다. 내 몸의 모든 장기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약해지고 어쩔 수 없이 힘들어 집니다. 언제가 딱 끝 날이 옵니다. 그러나 영혼은 영원히 청춘입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는 영혼도 끝 날이 있습니다.  영혼이 병들면 끝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을 건강하게 지키는 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지금 자기 영혼을 사랑하지 못한 사람들이 세상에 너무 많아 이처럼 세상사는 일이 고통스럽게 됩니다. 영혼이 병들면 평화가 없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사랑도 없습니다. 왜 사람들은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있지 못합니까? 죄 가운데 살고 잇기 때문입니다. 우리 영혼이 죄로 마귀의 종노릇하고 있지 않는지. 우리 영혼을 사랑하기 위해선 우리는 마귀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하심을 마땅히 받아야 합니다. 나의 영혼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북유럽에 흰 담비라고 하는 동물이 있습니다(작년 6월 춘천 야산에서 발견 멸종위기애생동물). 털이 너무나 희고 이뻐서 늘 사냥꾼들의 표적이 되는 짐승입니다. 지금은 멸종위기 야생동물로 보호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에는 사냥꾼들이 이 흰 담비를 많이 잡았다고 합니다. 이 흰 담비의 본성은 더러운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아주 더러운 것 하면 기겁을 하고 늘 깨끗하게 하고 있는데, 이러한 흰 담비의 본성을 알기 때문에 사냥꾼들은 이 담비를 잡기 위해 총이나 칼을 쓰지 않습니다. 이들은 담비의 굴 앞에 새까맣게 숯검댕을 칠해 놓습니다. 낮에는 담비들이 숲에 나가서 먹이도 찾고 놀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냥꾼들은 그 굴인 담비의 집 입구를 새까맣게 칠해놓고 난 다음 숲속에서 노는 담비를 쫓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숨는 곳은 어디겠습니까? 숨는 곳은 자기 집 동굴입니다. 쫒아서 동굴 앞에 갔는데, 온통 입구가 더러워 있으니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흰담비는 굴 앞에서 내가 내 몸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겠다 그래서 사냥꾼들에게 순순히 잡히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그 깨끗한 영혼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나 자신을 죄에서 나 자신을 지키고 있습니까? 나의 영혼을 죄에서 건지는 것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면서 내 몸만을 지킨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 것입니까? 또 내 영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천국에 갈수 없으니 천국에 가지 못하는 몸둥아리를 위한다고 한들 땅에 썩어지고 그 영혼 지옥 갈 것이니 그게 무슨 자기 사랑이겠습니까?  그만 인생 땡입니다.  내 영혼을 사랑하기에 그래서 깨끗한 영혼이야말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에 수많은 순교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순교자들은 자기의 영혼을 사랑하기에 기꺼이 순교를 받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천국에 못 들어가는 사람은 그러므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 아무리 좋은 음식 먹고 좋은 옷 입고 좋은 집에 살고 비싼 자동차 타고 다니고 보약을 물마시듯 마시고 먹고 하지만 영혼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망장 황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 갈 자기를 구원 못하면서 자기 몸 보호하고 치장하는 것이 무슨 자기 사랑입니까?

이렇게 자기 사랑 못하는 사람에게 이웃 사랑하라 백백 이야기 한들 소귀에 경 읽기요 청개구리 눈물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 하기 앞서 자기 몸 사랑하듯 이란 조건부 말씀을 예수님이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라온코이노니아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귀한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충분한 사랑받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주안에서 자기를 건강하게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자기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자기 의를 구하는 것은 자기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진정 자기사랑인 것을 분명히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크신 축복이 여러분과 온 가정에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2021년 3월 21일 주일아침예배 고전 2 : 2 기독교인의 五德

 

저는 식사할 때에 찌개를 좋아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여러 가지 찌개가 있지요. 부대찌개 김치찌개 청국장찌개 두부찌개 순두부찌개 계란찌게 비지찌개 고추장찌개 북어찌개 산나물찌개 뒤죽박죽찌개 그런데 찌개 중 제일 좋아하는 찌개는 된장찌개입니다. 호박된장찌개, 돼지고기 된장찌개, 김치된장찌개, 조개된장찌개 된장찌개 중 강된장찌개를 좋아합니다.... 아무튼 된장이 들어간 찌개는 무조건 좋아합니다. 이 세상에 된장찌개 없으면 무슨 맛으로 밥을 먹을까?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반찬 중에서도 발효 식품인 된장을 무척 사랑해 온 것 같습니다. 한국음식의 간을 맞추고 맛을 내는 기본 식품이 된장이고 간장입니다. 된장을 언제부터 먹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신문왕의 결혼 예물에 장과 시가 포함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중국의〈삼국지〉‘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는 “고구려가 장양(贓釀: 장 담그기·술 빚기) 등의 발효성 가공식품 제조를 잘 한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런 기록으로 봐서 삼국시대 이전부터 된장·간장을 담가 먹기 시작했고 삼국시대에 들어오면서 장 담그기의 기술이 점점 발달하였습니다. 된장의 종류는 재래식 개량식 된장 이외에 짧은 시간에 익혀 먹는 청국장 담북장 무장 막장 시금장(보리장) 토장 청태장 등이 있습니다. 지역에 따라 독특한 제법이 전해오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된장도 다섯 가지 덕德이 있다고 옛날부터 전해오고 있습니다.

첫째로 꼽는 것이 단심丹心입니다. 결코 변치 않을 정성 어린 마음을 단심이라고 합니다. 된장은 다른 음식과 섞여도 결코 자기 맛을 잃지 않습니다. 제 맛을 잃지 않는 첫 번째 된장의 덕이 단심입니다.
둘째로 지적하는 것이 항심恒心입니다. 변함없이 늘 지니고 있는 떳떳한 마음입니다. 즉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습니다. 된장은 오래 두어도 맛이 바뀌거나 섞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래 둘수록 더욱 깊은 맛을 냅니다. 논산 명재고택(구 윤증고택)이 있는데 숙종시대 학자인 윤증(1629-1714)이 살았던 집으로 이 집에 많은 장독대가 있는데 그 중에 300년 된 된장과 간장이 있습니다. 항심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덕을 말합니다.
셋째로는 무심無心이 있다고 합니다. 세속적인 욕망이나 가치 판단에서 벗어난 마음 상태가 무심입니다. 된장은 각종 병을 유발시키는 기름기를 없애 줍니다. 이렇게 좋지 않은 기름기를 조건 없이 없애주는 덕을 된장의 무심이라고 합니다. 된장은 항암제에 속함으로 암환자는 된장을 꼭 먹으라고 권장합니다. 5년된 된장이 가장 항암효과가 좋다는 연구발표가 있었습니다.
넷째는 선심善心이 있습니다. 선심은 착하고 선량한 마음을 말하는데, 된장은 매운 맛을 부드럽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맵고 독한 맛을 부드럽게 만들어 주는 된장의 덕을 선심이라 합니다. 무더위로 많은 땀을 흘린 사람에게 냉수에 약간의 된장을 풀어 마신다면 더위가 싹 가시고 몸이 가쁜해 집니다.
다섯째로 지적하는 것은 화심和心입니다. 화심이라 함은 화목한 마음으로 어떤 상대와도 잘 지내자는 의미입니다. 인간 사이의 세상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하는 것은 사람끼리 화합하고 협동하는데 근본 이치입니다. 이렇게 된장도 어떤 음식과도 조화를 이룰 줄 압니다. 어떤 것과 어울려도 조화를 이루어낼 줄 아는 덕이 화심입니다.

5 다섯이란 수가 우리 생활에 많이 말해지고 있습니다.
손가락 5개, 간장, 심장, 폐장, 비장, 신장과 같은 오장(五臟), 동, 서, 남, 북, 중앙의 오방, 木, 火, 土, 金, 水등과 같은 오행, 寒, 暑, 燥, 濕, 風등과 같은 五氣, 쌀, 보리, 조, 콩, 기장을 가장 중요한 양식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五穀, 신맛, 쓴맛, 짠맛, 매운맛, 단맛등과 같은 五味, 독사, 두꺼비, 지네, 전갈, 도마뱀의 독과 같은 五毒, 色, 聲, 香, 味, 觸의 五妙 , 그리고 수 부 귀 다자 고종명을 五福, 신라시대 화랑도정신으로 事君以忠, 事親以孝, 交友以信, 臨戰無退, 殺生有擇인 世俗五戒이지요. 금강산, 묘향산, 백두산, 한라산, 삼각산을 일컬은 五岳, 우리나라의 靑, 赤, 黃, 白, 黑)다섯 가지 기본색을 五方色이라 합니다. 올림픽 5륜 마크, 5성 장군, 시골 장터인 5일장이 있고요,  유교에서 말하는 (三綱:父爲子綱,君爲臣綱,夫爲婦綱)五倫인 父子有親, 長幼有序, 君臣有義, 夫婦有別, 朋友有信과 仁, 義, 禮, 智, 信괴  불교신자가 지켜야 할 다섯 계율로 不殺生戒, 不偸盜戒, 不邪淫戒, 不飮酒戒, 不妄語戒가 있습니다.

그러면 기독교의 五德은 무엇일까요? 기독교에서 삼위일체 신앙이 있고, 10계명이 있고, 예수님께서 8복을 말씀하시었고, 바울사도께서는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말씀하셨습니다. 사도요한은 요한 계시록에서 일곱교회를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에서 자주 사용하는 숫자로 이렇게 2, 8, 9, 10이 있는데 5는 생소한 숫자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다섯 5라는 숫자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구약의 모세오경 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가 있습니다. 다윗은 돌 다섯 개를 취해 골리앗 앞으로 갔습니다.
마태 14: 21 다섯 개의 빵으로 오천 명을 먹이셨다는 이야기.
마태 25: 1-13 다섯 명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잔 기름을 준비하고 신랑이 오기를 기다렸으나, 게으른 다섯 명의 어리석은 처녀들은 혼인 잔치에 못 들어갔다.
마태 25: 14 -30 다섯 달란트를 종에게 맡기고 길을 떠난 주인 이야기. 베데스다 솔로몬 행각 다섯 개 기둥이 있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습니다.
오순절은 한 주간 7을 일곱7번 지난 다음 날로 마가의 다락방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강림을 받았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5를 삼위일체3과 남자 여자 곧 사람수 2를 합한 수라고 하여 완전수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 기독교(개신교)에 다섯 개의 ‘오직 Five Solas’가 있는데, 이를 기독교의 5덕이라 말합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를 말합니다. 이 다섯가지 솔라를 저는 기독교의 5덕이라고 말하려 합니다.
오늘 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교회가 부패하여가도 있다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마치 중세기의 천주교회와 비슷한 타락한 모습들을 한국교회에서 보여 주고 있다고 안타까워합니다. 비 기독교인들의 비난의 소리가 높습니다. 특히 코로나19바이러스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물론 일부 교회에서 입니다만, 교회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코로나를 전파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교회의 목사들과 교인들의 금전욕심, 열광주의, 우상숭배적인 행태들, 분쟁, 거짓 복음, 일부목사들의 제왕적 모습, 형식화된 예배, 신학에 대한 무지와 무식, 종말론적 내세주의 등등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개선하고자하는 의식도 없고 개혁하고자하는 노력도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같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입니까? 누구는 성경으로 돌아가자, 누구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타락한 로마카토릭 교회를 개혁한 루터의 ‘다섯가지 오직’ 곧 五德을 실천하는 것이 먼저 중요한 개혁의 정신이라 하겠습니다.  
 
기독교의 一德은 ‘solus Christus오직 그리스도’입니다.
교회의 중심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어떤 건물이 교회가 아닙니다. 호화롭고 우람한 교회당이 교회의 중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예루살렘 성전을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는다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전에 어떤 목사님은 교회를 건축하는데 800억 원이 드는데 1000억 원이 들어왔다고 자랑합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자랑입니다. 지금 1000만원 전세방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난한 교회에서 부르는 가난한 사람들의 찬송을 하나님은 더욱 기뻐하실 것입니다. 목사가 교회의 중심이 아닙니다. 물론 장로도 그 어떤 사람도 교회의 중심이 아닙니다, 머릿돌 되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자로 올라가신 그리고 죽으신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 교회의 중심이요 그 모든 사람은 변죽에 불과 합니다. 어느 교회는 예배당 내 앞 벽에 십자가를 떼고 커다란 빔 프로젝트 화면을 달았습니다. 그리고 설교하는 목사의 얼굴이 마치 큰 거인의 얼굴로 나타났습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목사가 다만 대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작아지고 하나님이 크게 보여 져야 합니다. 그런데 화면에 비친 목사의 얼굴은 크게 보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작게 들려집니다. 목사의 얼굴을 보려고 교회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함입니다. 교회마다 그 프록젝트 화면을 달면서 부터 교회는 정체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십자가가 사라진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어느 목사님 설교 중에 예수그리스도 이름은  단 한번 나오고 온통 잡담으로 가득하기도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증언하지 않는 설교는 설교가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가 교회의 중심이시고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목사님들은 증거 하여야 만하며 교인들은 교회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는 교인들은 그날 예배는 헛걸음을 하였을 뿐입니다. 오늘 아침 봉독한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오작 예수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첫 번째 一德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입니다. 

기독교의 二德은 ‘sola gratia 오직 은혜’ 입니다.
고전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세상의 창조 때부터 세상 끝날 까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시고 행하시니 그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와 찬양 드리는 종교입니다.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무슨 결과물을 얻게 되면 자기의 열심과 노력으로 얻은 것이라고 고개를 높이 세웁니다. 그러나 가끔 연말 영화연예계의 시상식을 보면 상을 타는 사람 중에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은 은혜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라고 감사하는 모습을 봅니다. 물론 그는 기독교인입니다. 기독교인의 인생은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인도하심으로 살아간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면 아무것도 모르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세상에 유명한 과학자들 예술가들 사상가들 중에 그들이 이룬 업적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았다면 마른 웅덩를 팔 뿐이요, 눈구덩이에 나무를 심는 일에 불과 합니다. 그들의 연구와 업적이 지금은 아무리 놀라운 일이라 하더라도  미래에 있게 될 새로운 일에 비하면 초보에 불과할 뿐입니다. 1985년 처음 286컴퓨터가 나와 보석글이라 프로그램으로 설교문을 작성하였습니다. 그때 참으로 신기하였고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 와서 보면 참으로 유치한 컴퓨터였습니다. 그러므로 학문의 발달이나 기술 문명의 발전은 인간의 자랑거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겸손히 감사하며 은혜를 더욱 사모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 더욱 인류사회는 더 좋은 방향으로 향상 될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거나 잊어버리기 시작한 그 때로부터 나라나 민족이나 사회나 개인이 얼마나 더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요. 그러하지 않습니다. 불행과 비극만 높이 쌓아갈 뿐입니다. 사람은 사람에 대한 이리(homo homini lupus B.C195 아시나리아, 에라스무스, 토마스홉스)라고 말하는 警句가 있습니다만, 사람들은 서로 싸우고 다투고 죽이고 서로 서로 늑대가 되어 세상은 요지경이 되어 가고 지옥으로 만들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잊으면 사탄이 찾아옵니다. 며칠 전 한 미국인이 총을 마구 쏘아 우리 한인교포 여성들 여러 명을 살해하였습니다. 미국은 청교도 신앙으로 세워진 나라라고 말들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 때 미국은 세계 최강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미국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가고 있습니다. 잠자리에서 어머니가 읽어주면 잠이 들던 어린 시대가 지금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점점 지옥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美國이 아니라 부끄러울 恥國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53:4-6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인하여‘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고’ ‘찔리고 상하시고.’ 또 ‘예수님이 징계를 받으신’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이 우리가 당해야 할 질고, 슬픔, 허물, 죄악을 대신한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공로로 평화와 치료를 얻고 죄사함을 받으며 자유하게 되었음을 마음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종교개혁가 루터는 이것을 즐거운 교환(fröhlicher Wechsel)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런데 오해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 하여 가만히 놀고먹는 일이 아닙니다.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바울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한 사도였습니다. 진실로 그는 '옥에 갇히기도 했고 매도 죽을 정도로 수없이 맞았고 잠도 못 잤으며 주렸으며 목마르며 헐벗었고 사방이 위험들로 우겨 쌈을 당하는 삶'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기독교의 열심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과 즐거운 교환을 하였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열심히 할 일은 예수님의 은혜를 성취하여 가는 일입니다. 이 은혜를 성취하는 일이 기독교인들의 매일의 삶입니다. 그러나 이 은혜를 모르면 그는 살았다하지만 죽은 자 같다고 하겠습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를 보면 살았다 하지만 죽어가는 소입니다. 이 즐거운 교환, 사랑의  은혜를 모르면 인생을 산다고 하지만 그 종착역은 지옥일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 안에 은혜로 사는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지만 결국 그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한 계단 더 올라가고, 한걸음 더 앞으로 나가며, 한치 앞을 더 내다 보면 천국을 향해 간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二德은 오직 은혜입니다.  

기독교인의 三德은 ‘sola fide오직 믿음’입니다.
롬 1:17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디카이쉬네 데우)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호 데 디카이오스 에크 피스테오스)”고 말씀하였습니다. 의인은 누구를 말합니까?
‘믿음으로 산다’라는 말씀을 많은 기독교인들이 오해하는 말이 있습니다.“믿으면 능치 못함이 없다”는 말씀을 만능의 마술처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사에 I can! 불가능은 없다라고 전가의 보도(傳家의 寶刀)처럼 사용하여 왔습니다. 한국 교회는 그동안 예수님을 믿으면 온갖 소원이 다 이루어진다라고 말하며, “믿습니다. 믿습니다. 병이 고쳐 질 줄 믿습니다.”라고 주문 외우듯 하다가 어느덧 예수는 사라지고 다만 자기 욕망에 빠지는 모습들을 볼 때가 많습니다. 본문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복음은 예수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또 하나님의 의도 예수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당시 바리세인이나 에세네파 사람들은 율법으로 의인이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께서 갈3:11에 “또 하나님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은 의인이 되셨습니까? 롬5: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예수님께서 만인이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의 의가  되시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의인의 첫 아담이 되시어 영생에 이르게 하시었습니다.(롬5:21) 롬10:9.10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여기서 시인한다는 말은 순종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믿음은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순종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일입니다. 이런 순종의 믿음으로 의로다 함을 얻은 사람이 하나님의 의인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게 됩니다.  시 34:15. 17. 19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의인이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하고 말씀하시었습니다. 그래서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야고보서  5:16에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믿음은 무엇을 이루기 위한 수단 방편이 아니라, 신자의 됨됨 곧 믿음은 신자의 본질입니다. 믿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르는 바른 신자의 됨됨이 믿음이 나에게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만일 교회들이 분쟁하고 교인 간에 다툼이 있다면 이는 십자가가 없는, 믿음의 됩됨이 없다는 것으로 이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말은 말짱 황이라 하겠습니다. 다툼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날아다닐 뿐입니다.(눅17:37)  눅18:8에 예수님께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參德은 ‘sola fide오직 믿음’입니다.

기독교의 四德은 ‘sola scriptura오직 성경’
여기서 말하는 성경은 신구약 66권 정경을 말합니다. 그런데 천주교회에서는 66권외에 외경들을 포함하여 성경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몇 권이냐 가 중요하지만, 성경을 어떻게 해석 하는냐가 더욱 중요합니다. 천주교회에서 성경 해석의 최고 권위는 교황이라고 말합니다. 교황만이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와 츠빙글리는 오직 성경만이 성경을 해석한다(scriptura sui ipsiu interpres)고 주장하였습니다.
루터 종교개혁을 반대한 에라스무스(1469-1536)는 성경에는 어둡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고, 심지어 서로 모순되는 부분도 있기 때문에 정확한 해석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부들의 해석, 교회의 전통, 교황의 가르침, 그리고 철학과 건전한 이성을 통해서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루터는 성경은 명료한데, 단지 우리의 어두워진 눈이 이것을 보지 못할 뿐이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므로 알게 되는 것이지 교황이나 전통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알리시기 위해 성경을 주셨습니다. 비록 사람이 성경을 기록하였으나,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서 기록하였으므로, 성령의 감화 감동 없이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비밀이 하나님 나라의 비경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지만 아무나 그 비밀을 알 수 없고 그 비경을 볼 수 없습니다. 성경 한 구절에도 헤아릴 수 없는 천국 보화가 담겨져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옛날 아프리카 원주민 아이들이 반짝거리는 돌들을 가지고 노는 것을 본 영국인들이 사탕을 몇 개 주고 돌들을 주어 왔습니다. 바로 그 돌들은 다이아몬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그 가치를 몰랐습니다. 성경 안에 천하보다 귀한 보화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냥 글자로만 알고 있습니다. 누가 성경을 알아 볼 것입니까?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문제는 성령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누구냐인 것입니다. 초등학생 아이가 성령 받으면 알아보느냐? 알아봅니다. 다만 초등학생 수준으로만 알아 볼 뿐입니다. 그래서 신학교육이 필요하고 신학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성령을 받아 성경의 秘意를 발견하고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것이 바로 설교입니다. 그가 찾아 낸 만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목사는 죽을 때 까지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왜냐면 그가 아는 만큼 성령께서 성경의 비경을 보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세상에 무능하고 신학에 무식하며 성경에 무지하지 않는가? 도대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얼마나 되는가? 저울에 달아 보지 않아도 짐작 반입니다. 이래서 이단들이 횡횡하고 가짜 목사들이 대로를 활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문제는 성령 받았다고 하지만 그 받은바 성령의 眞僞를 어찌 가름 할 수 있는가? 입니다. 자기를 비우고 겸손히 십자가를 지고 겸손히 주님을 따르며, 성령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단 한 걸음도 나가지 못 함을 알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철저히 하나님께 순종하는 그에게 성령이 함께하시어 성경의 아름다움을 보게 해 주십니다. 그런데 과연 고급외제 세단자가용을 타고, 수십억 원 아파트에 살며, 수억의 사례비를 받으며, 호의호식하는 그런 이들에게 성령이 임하신다면 그런 성령은 성령이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교만하며 억압적이고 그 입에 욕설과 불만이 가득한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시었다면 분명히 이는 가짜입니다. 한국교회는 좀 더 가난해 져야 합니다. 낮아져야 합니다. 한국교회 목사들은 좀 더 자기를 비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설령을 사모하여 상령의 가르침으로 오직 성경을 사람들에게 증거 해야 합니다. 지금 한국교인들은 너무나 성경말씀에 목말라하고 성경의 아름다움을 보기를 원하는데 목사들이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고 입이 닫혀 전하지 못하므로 한국교회가 비난받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四德은 ‘sola scriptura오직 성경’입니다.

마지막으로 기독교의 五德은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시115:1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200년에 걸쳐 50명 이상의 유명 음악가를 배출한 유럽의 음악가 가문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음악가가 서양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요한 세바스찬 바하(J. S. Bach; 1685-1750)입니다. 그의 음악은 고전주의 음악뿐만 아니라 현대음악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최근 카이스트와 미국 텍사드대 연구팀이 지난 20년간 발매된 CD 빅데이터를 분석하여 바하가 가장 대중적인 클래식 작곡가하고 밝혔습니다. 
그의 음악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그의 생애는 결코 순탄치가 않았습니다. 바하는 10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그래서 맏형인 크리스토프에게 맡겨졌지만 따뜻한 돌봄을 받지 못했습니다. 바하는 하프시코드 작곡가들의 음악을 배우고 싶어 형이 보관하고 있던 악보 필사본을 6개월이나 몰래 베끼다 들켜서 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사촌이자 첫 아내인 마리아와 결혼하여 7자녀를 낳았지만 셋을 잃었고, 외국연주 여행을 다녀와 보니 아내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안나 막달레나와 재혼하여 13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일곱을 잃었습니다. 그중 한 아이는 정신박약아였습니다. 우리는 베토벤의 말년에 귀가 먹어 듣지 못하였다고 안타까워 하는데, 바하는 노년에 장님이 되었고 뇌출혈로 반신불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하가 불러 주는 데로 다른 사람이 악보를 썼다고 하니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을까 가슴이 메워집니다. 그는 빈곤했습니다. 아내 안나 막달레나가 죽었을 때는 장례치를 돈이 없어서 빈민 구제위원회에 장례를 맡길 정도였습니다.
그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의 음악은 프리드리히 왕을 제외하고는 공식적으로 사람들로부터 거의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비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교회용 음악이 음악회용이라거나 너무 자유스럽다고 비판받았습니다. 당대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던 헨델마저 바하와 인사조차 나누려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바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도 자신의 음악이 인기가 없는 것도 크게 개의치 않았습니다. 사람들에 대하여도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재능을 의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음악 초보자들에게 친절했고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도 너그럽게 용서했습니다. 그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불평 없이 살아간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의 삶의 태도는 그의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독실한 루터교 신자였고 그의 음악은 그의 고난과 아픔을 배경으로 한 그의 신실한 신앙에서 나온 것들이었습니다. 그는 연속되는 어려운 삶 속에서도 하나님만 생각했고, 사람들이나 시련 때문에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음악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했습니다.
그가 남긴 악보에는 그의 깊은 신앙의 흔적들이 남겨져 있습니다. 오라토리오나 칸타타 악보에는 S.D.G.(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가 적혀 있습니다. 오르간 곡에는 I.N.I.(In Nomine Jesu; 예수의 이름으로)가 적혀 있습니다. 다른 악보에는 J.J.(Jesu Juva; 예수님 도우소서)가 들어 있습니다. 그의 음악과 삶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순절기간에 흔히 바하가 작곡한 마태의 수난곡을 연주하고 듣게 됩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유명한 수난곡이 있는데 마태수난곡보다 6년 전 1724년 바하는 ‘요한 수난곡’을 작곡 하였습니다.  루터의 신학을 음악으로 표현하였다는 평을 받습니다. 이 대작은 제목처럼 신약성경 요한복음 18장과 19장에 적힌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의 수난을 2부 68곡으로 작곡하였습니다.
1부는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예수를 결박해 끌고 가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예수의 제자 베드로는 결박당한 예수의 뒤를 따르지만 예수의 제자임을 세 번 부인하지만 통곡의 눈물을 흘립니다.
2부는 결박당한 예수가 빌라도에게 심판받는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풀어주려고 하지만, 끝내 십자가에 못 박는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십자가를 메고 골고타 언덕으로 간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고, 예수의 제자가 예수의 시신을 내려 무덤에 모시는 이야기로 수난곡은 끝을 맺습니다.

바하의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은 넉넉하고 평안한 삶 보다는 고난과 시련 가운데서 더욱 빛이 났습니다.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 부활이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순절 기간에, 우리는 바하의 음악과 함께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며 살았던 바하의 일생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현재 어떤 고난의 역경 속에 살아간다 하더라도 낙심하기보다는 오히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五德은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된장에 五德이 있듯이 우리 기독교에도 구수한 五德 Five Solas가 있으니,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경Sola Scriptura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을 기억하시며 오늘 저녁 식사에 구수한 된장찌개를 바글바글 끌여 잡수시면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021년 3월 28일  주일아침 예배  요2:1-11  변화와 성취

 
요한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게 됩니다. 1-12장까지와 13장-21장입니다. 예수님께서 일반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며 여러 가지 표적을 보여주는 부분과 당신의 제자들을 대상으로 집중적으로 말씀을 전한 후 십자가와 부활사건이 있는 부분입니다.
 
요한복음 전빈부에서 예수님은 일곱 표적을 버여주셨습니다. ①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표적입니다.(2장) ②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표적입니다.(4장) ③ 베데스다 연못가의 병자를 고치신 표적입니다.(5장) ④ 5천명을 먹이신 표적입니다.(6장) ⑤ 바다 위를 걸어가신 표적입니다.(6장) ⑥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표적입니다.(9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⑦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입니다.(11장)

요한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표적(σημεῖον)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왜 기적이 아니고 표적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우리말로 이적, 기사라고도 번역하였는데 이해가 불분명합니다. 표적이란 예수님의 이적사건에 대한 목적과 의미를 말하고, 기적이란 기적사건을 단순히 소개 하는 용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적사건들은 다만 기적사건을 보여주려고 하는 일이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해 제시하고자 하시는 어떤 목적과 의미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표적이라고 함은 그 표적에 감추어 있는 비밀을 알아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비밀은 믿는 자들에게는 들어나 있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감추어져 있습니다. 눅 8:17에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사흘째 되던 날’이란, 요한복음 1장 마지막 부분을 보면, 예수님이 베다니(요1:28요단강 건너편가다라 지방)에서 빌립과 그의 친구 가나 사람인 나다나엘을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시었는데, 그날부터 사흘째 되는 날이란 말씀입니다. 베다니에서 갈릴리 가나까지는 약 35km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을 만난 직 후 그의 고향인 가나로 가셨는데, 베다니에서 2박 3일 간 걸어서 가나 혼인잔치 집에 가셨습니다. 이처럼 정확한 날자 계산은 사도요한의 기록이 정확한 사실임은 증명합니다.

갈릴리 가나의 혼인집에 예수님의 어머니가 먼저 가 계셨습니다.  1절에서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할 때의 헬라어 동사의 시제는 미완료형 입니다. 이는 마리아가 처음부터 그곳에 와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마리아는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손님들을 접대하고 있는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또 마리아는 그 집에 있는 하인들에게 명령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 볼 때에 마리아는 그 혼인집과 매우 가까운 관계에 어ㅓ면 친인척 관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일찌감치 그 집으로 가서 혼인잔치 준비를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혼인잔치 참여하심도 그 같은 맥락을 볼 때 손님으로 초대 되었다기 보다는 가까운 친척의 일원으로 참석하시었습니다.

그런데 “포도주가 모자란지라”고 했습니다.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 졌다는 것은 혼인잔치가 끝나게 되는 사건입니다. 지금 한참 혼인잔치가 무르 익어가는 데 갑자기 포도주가 떨어졌으니 ‘혼인잔치가 끝났습니다.’라고 한다면 이는 매우 실례되는 일이요 동리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될 일입니다.

6절에 “거기 유대인의 정결예식을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보통 한 통에 40리터의 물이 들어가는데 두 세통이라면 240리터가 들어가는 돌 항아리 여섯이 있었습니다.  대체로 혼인잔치에 참석하는 사람은 문 입구에서 손과 발을 씻게 됩니다. 돌 항아리가 여섯이라면 참석자가 엄청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성경에 번역한 정결예식이라 함은 다만 발만 씻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로 미크바 (또는 미크베 מִקְוָה)라 하는 유대교에서 정결 의식으로 몸을 물에 완전히 담그게 됩니다. 그래서 부자들은 집에 큰 목욕탕 같은 미크바 시설을 갖추었습니다. 그런데 돌 항아리 물은 정결예식에 쓰여 지는 물일 수 없습니다. 다만 손발을 씻을 정도로, 원어에 ‘카타리스모. 청결, 깨끗게 하다’로, 정결 예식이라고 함은 오역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여인이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부었을 때에 바리새인 시몬에게  “내가 네 집에 들어 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눅7:4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나 표적사건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마리아가 하인들에게 한 말입니다.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든지 그대로 하라!”  순종하기를 수동적으로 하지 말고 능동적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일이 마지못해서 소극적으로 수동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변화와 성취는 그대로 행함으로 시작 되기 때문입니다.

공자의 75대 직계후손으로 공건(孔健)이란 분이 ‘인간존중경영(지식여행편)’이란 책을 썼는데, 그 책에서 TDK(Tokyo Denki Kagaku 동경전기화학)의 대표이사였던 모토노 후쿠지로씨의 좌우명이  ‘수(修)’ ‘파(破)’ ‘리(離)’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이 수. 파. 리는 문학 예술을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좌우명이기도 합니다. 수. 파. 리란 ‘수’는 학습과 연구, ‘파’는 돌파와 혁신, ‘리’는 과거의 경지를 벗어나 새로운 경지를 들어간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수), 나를 버리고, 말씀을 그대로 따르며(파), 지금과는 전혀 다를 새로운 경지에 이른다(리)라는 말로 해석하겠습니다.

7절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말씀에서,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는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어쩌면 하인들은 반신반의하였으나 말씀을 듣고(수) 물을 길어 항아리에 물을 채웠을 것(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변화를 경험 하였습니다(리). 그 물은 맹물입니다. 그냥 우물에서 퍼 온 물입니다. 그런데 그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 변화는 물리적 변화도 아니고 화학적 변화도 아닙니다. 이 변화는 초자연적 변화입니다.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전혀 세상에서 있을 수 없는 혁신적 변화로 이룬 성취입니다. 혁신이란 기존에 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뭔가가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급진적 혁신, 점진적 혁신 과정의 혁신 (process innovation)이 있습니다. 그러나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일은 초 차원의 혁신입니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일입니까? 인류 역사 이래 오직 처음 있는 초 차원의 혁신적 변화로 성취된 사건입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다하더라고 앞으로 수백년 미래세계에서도 가능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국의 셀리, 킷츠와 함께 3대 낭만파 시인의 한 사람인 바이런은 오직 한사람에게 만 가능하다고 말 하였습니다. 시인 바이런의 이야기입니다. 케임브리지대학 재학시절, 종교학 과목 기말고사 때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서 논하라”는 문제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바이런 학생은 시험 시간 내내 바깥의 풍경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를 지켜보던 시험 감독관이 “네가 한자라도 쓰지 않으면 낙제할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시험 시간 내내 쓰지 않던 바이런이 그적그적 단 한 줄의 답을 작성하였습니다. 그 글은 “물이 ‘주인’을 만나니 얼굴이 붉어지더라.” 이였습니다. 이 답안은 교수님으로부터 최고의 점수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물을 창조하시었습니다. 그 물이 예수님을 만나니 너무 부끄러워 포도주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바이런의 간단한 말은 초 차원의 혁신적인 변화와 성취를 나타낸 詩語입니다.
사람들은 기적이 나에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기적은 어느 특qf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예수님을 만나면 초 차원적인 혁신 곧 변화와 성취가 일어납니다. 그것을 기적이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나에게 누시는 주님의 표적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표적으로 변화와 성취를 주시는데 사람들은 다만 기적만을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나면 무슨 변화와 성취가 일어날 까요? 일어나야 합니다.

8절부터 10절에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내었도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전에 먹던 포도주가 좋았으나, 대개 후에 나오는 포도주는 질이 떨어진 포도주를 내오는 게 상식적인데. 오히려 훨씬 맛이 뛰어난 포도주를 내왔으니 사람들이 찬탄하고 기뻐하였다는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교회목사님들이 가나혼인잔치 표적을 설교하실 때 주제로 예수님의 메시야이심을  증거 하는 말씀이라 하십니다. 물론 그런 의미도 합당합니다. 그러나 이 표적에서 보여 주시고자 하는 의미는 (초 차원의 혁신적인) 변화와 성취입니다. 변화는 십자가를 의미하고 성취는 부활을 상징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죄인이 변화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부활을 통해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성취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예수 믿으면 맹탕 인생이라 하더라도 변화 되어 탁월한 하나님의 자녀로의 인생을 성취하게 됩니다. 우리는 수많은 그와 같은 이야기를 예화로 말 할 수 있습니다.

1956년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해 1월 8일 휘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짐 엘리엇(Jim Eliot 1927-1956)을 비롯한 다섯 명의 크리스천 젊은이들이 복음을 전하러 에콰도르의 아우카족에게 갔다가 모두 창에 찔려 죽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이 아우카족은 매우 난폭한 족속이 되어서 접근하는 모든 사람을 다 죽였습니다. 그들이 타고 간 경비행기는 산산조각이 났고 그들은 내리자마자 그들을 사랑한다고 손을 흔드는 그들에게 달려와 창을 찔러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미국 신문에 이것을 충격적인 보도로 다루면서 “이 무슨 낭비냐?”라고 하는 그러한 기사가 나왔습니다.  짐 엘리엇의 부인 엘리자베스는 남편의 일기를 다 보관하고 있었는데, ‘이 무슨 낭비인가’라고 하는 기사를 쓴 기자에게 남편이 쓴 일기장을 보여주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러한 글이 있었습니다.
“영원한 것을 얻고자 영원할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자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그들의 순교는 낭비가 아니었습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일입니다.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과 영원한 생명과 관련된 것이고, “지킬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육체의 목숨과 관련된 말입니다. 짐 엘리엇은 28 살의 젊은 나이에 아마존 정글에서 순교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해보지도 못하고 죽었는데 미망인이 된 부인들이 모여 기도했습니다. 남편들이 못 이룬 꿈을 우리가 이루게 하여 주옵소서. 짐 엘리엇의 부인 엘리자베스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그리고 다른 부인들과 함께 에콰도르 아우카족이 있는 마을로 갑니다.
아우카족은 아주 강하고 잔인한 족속이었지만 여자들은 해치지 않았습니다. 여자들은 연약한 존재라고 생각해서 해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들어가서 그들을 사랑으로 섬기고 아픈 사람을 치료해주고 그들에게 주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아우카 족 사람들이 그들의 희생과 헌신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잠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추장이 와서 물었습니다. 도대체 당신들은 누군데 와서 우리를 이렇게 도와주고 우리를 사랑으로 보살펴 주십니까. 그때 짐 엘리엇의 부인 엘리자베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편들은 하나님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당신들이 그들을 죽여 뜻을 이루지 못했지요. 우리는 남편들이 그렇게도 당신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을 들려주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 말이 무엇이냐고요?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입니다.”
짐 엘리옷 의 일기장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이 쓸모없는 나뭇개비에 불을 붙여주옵소서. 제 삶을 주의 영광을 위해 태워주옵소서. 저는 오래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위해 풍성한 삶을 살게 하여주옵소서.”

아우카족이란 물이 어떤 포도주로 변하였습니까? 짐 앨리엇과 친구들을 찔렀던 다섯 명의 아우카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 영접하고 그 중에 네 명이 목사가 되었습니다. 온 마을이 예수 믿게 되었습니다. 20세기 선교 역사의 위대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순종이, 그들의 죽음이 온 마을을 변화시켰습니다. 초 차원의 혁신적인 변화와 성취가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서진 것들을 사용하신다.(God Uses Broken Things)”는 말이 있습니다. 짐 앨리옷과 친구들은 부서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부서진 파편들로 에콰도르 아우카 족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순종은 먼저 자기가 부서져야 합니다. 깨어져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고 했습니다. 하루만 죽어서는 안 되었으며, 한번만 깨어져서는 안 되었으며, 한번만 부서져서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날마다 부서지고, 깨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변화와 성취가 일어납니다. 짐 엘리옷이 깨어졌습니다. 그리고 부인 엘리자베스 역시 아우카족을 위해 자신을 깨트렸습니다,

복음성가에 ‘부서져야 하리’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부서져야 하리 부서져야 하리
무너져야 하리 무너져야 하리
깨져야 하리 더 많이 깨져야 하리
씻겨야 하리 깨끗이 씻겨야 하리
다 버리고 다 고치고 겸손히 낮아져도
주 앞에서 정결타고 자랑치 못할 거예요
부서져야 하리 무너져야하리 깨져야 하리
깨끗이 씻겨야 하리 깨끗이 씻겨야 하리

사람들은 매일 힘들게 살고 괴로운 일생 길을 삽니다. 왜 힘든 인생이냐고 물으면 살기위해서 라고 말합니다. “나는 날마다 사노라”고 말하니 날마다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인생을 바꾸고 싶지만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 막막합니다. 물은 물이지 포도주로 바꿔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초 차원의 변화와 성취를 원하면 인생의 관점을 바꿔야 합니다.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든지 그대로 하라”.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따르기 위해 예수님 앞에 자기를 부서 버리세요. 무너지세요. 좌절감에 죽고 싶을 때가 있고, 가난과 병고로 슬픔이 가슴에 가득하며,  불쑥 혈기로 주체할 수 없는 분노 미움 원망 짜증 답답하고 우울해지고 남에게 상처를 안겨줘야 화가 풀리는 그런 인생을, 무엇이 좋다고 그런 인생을 평생 붙들고 삽니까? 그런 인생을 예수님 앞에서 부서 버리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변화와 성취가 우리의 인생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됩니다.

카디지 윌리암스라는 노숙자 어린 소녀가 있었습니다. 카디지의 어머니는 14살 때 차갑고도 더러운 쓰레기 더미 속에서 카디지를 출산하였습니다. 카디지 어머니는 어린 아이를 데리고 뉴욕의 거리를 전전했고 무료급식과 쓰레기를 뒤지며 굶주림을 해결했습니다. 카디지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렇게 길거리에서 키워 졌습니다. 값싼 모텔과 노숙자 쉼터를 찾는 일은 굉장히 드물었고, 대부분 차가운 길바닥과 냄새나는 뒷골목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카디지의의 집 주소는 언제나 뉴욕 어느 동네의 식당 뒷골목 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카디지를 ‘노숙자’라고 불렀습니다.

어린 거지 소녀 카디지는 자기의 인생을 변화시키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물이 포도주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수많은 흑인들이 좌절 속에 자신의 인생을 허물어지게 하는 일들을 카디지는 보면서 나는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다라고 자신의 인생을 변화시키려 하였습니다. 카디지는 먼저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인생을 예수님에게 맡겨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인생을 변화시켜 노숙자란 말을 듣지 않게 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노숙자들이 모여 사는 텐트촌에서 어머니와 카디지는 감수해야 할 위험한 시선을 참아 내며 필사적으로 학교를 다녔습니다 .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12곳의 학교를 옮겨 다니며 공부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카디지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여섯 돌 항아리에 물을 길어 붓듯이 한 달에 5권의 책을 읽었고 뉴욕의 모든 신문을 정독하였습니다. 거리의 길바닥은 카디지에게 세상에서 가장 넓은 공부방 이었습니다. 밤거리 가로등 밑에서 책을 읽고 학교 숙제를 하였습니다. 카디지의 꿈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남들의 비웃음을 받지 않아도 되는 떳떳한 인생을 사는 꿈. "노숙자 주제에 대학은 꿈도 꾸지 마라."고 비아냥거리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들어도 카디지는 노숙자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항상 머리를 단정하게 했고, 옷도 언제나 깨끗하게 입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학교에 갔고 밤 11시가 되어서야 돌아 왔습니다. 여러 동아리에도 참여하고 다양한 학교 활동에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마침내 복지단체들, 여러 사회단체에서 장학금으로 카디지를 도와주기 시작 했습니다. 결국 브라운과 컬럼비아, 암허스트 등 미 전역의 20 여개 대학으로부터 합격통지를 받아냈습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그녀를 합격시키지 않는다면 당신들은 제2의 미셸 오바마를 놓치는 실수를 하는 겁니다." 카디자 윌리엄스는 하바드 대학교를 4년 장학생으로 입학하였습니다. 더 이상 사람들은 카디지를 노숙자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바드 대학교 졸업식에서 졸업생 대표로 연설을 하였습니다. 카디지의 인생은 완전히 부서지고 무너지고 버려진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카디지에게만 있는 특별한 경우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누구나 변화와 성취가 있게 됩니다.
 
혼인잔치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은 더 좋은 포도주라고 이구동성 칭찬하며 잔치의 분위기는 더욱 즐거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전에 노숙자라고 비웃던 사람들이 이제 하바드 대학교를 졸업한 어엿한 카디지를 칭찬하고 함께 축하해 주었습니다.

인생을 아름답게 보람 있게 성공적으로 변화시키고 성취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서점에 가보면 많은 성공비법에 대한 소개서들이 나와 있습니다. 대부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재벌을 창설한 고 정주영씨를 닮아 가라던가, 애플사를 창건한 스티브잡스(Steven Paul Jobs)에게서 배우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성공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공일까요? 불행의 시작은 아닐까요? 변화와 성취는 하나님이 축복하심 가운데 이루어지는 행복한 인생입니다.

앞에서 소개한 바이런의 시 가운데 이런 시가 있습니다. “길 없는 숲에 기쁨이 있다. 외로운 바닷가에 황홀이 있다. 아무도 침범하지 않는 곳 깊은 바다 곁, 그 함성의 음악에 사귐이 있다. 나는 사람을 덜 사랑하기보다 자연을 더 사랑한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저는 길 없는 곳으로 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외로운 바닷가에서 파도소리를 들으며 기도하기를 좋아합니다. 그 함성 속에서 세미하게 말씀해 주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람을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고 변화시키시고 성취시켜주시는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변화와 성취를 위해 여러분의 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는 주님의 말씀 그대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초 차원적인 혁신으로 변화와 놀라운 성취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오늘부터 예수님의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이 고난 주간에 예수님의 표적으로 나의 삶의 그간의 어렵고 힘든 그리고 이루고 싶은 소망이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체험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흘리신 보혈로 나를 힘들게 한 모든 죄가 사라지고 나의 욕심과 불만과 괴롭고 힘든 일들이 부서지고 부활의 아침에 새롭고 행복한 나로 성취의 기쁨을 누리는 체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우리 모두 위에 임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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