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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21년 2월 중 주일아침 설교

전병호 by  조회 수:16 2021.04.04 14:03

2021년 2월 7일 주일아침 예배  막 1:16-18  지금 아니면 언제 עכשיו או מתי

 

오늘 봉독한 마가복음 말씀은 기독교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내용이죠, 시몬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마4:18-22과 눅 5:1-11에서는 여러 상황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는데, 마가복음에서는 간단히 “나를 따라 오너라(듀테 오피소 무 Δευτε οπισω μου)”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갔다(에콜루데산, ήκούθησαν‘아콜루데오’의 동직1과능3복)는 내용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이 예수님을 따르는데 그냥 따른 것이 아닙니다. ‘버리고’ 따랐습니다. ‘버리다’는 ‘아훼시스(ἄφεσις)’에서 온 말로 ‘해방’, ‘자유(눅4:18)’, ‘죄 사함’(마26:28, 막 1:4, 눅1:77)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버림’ 속에는 1장 15절의 ‘회개하고 믿으라’(메타노에이테 카이 피스튜에테µετανοεῖτε καὶ πιστεύετε)의 의미가 녹아 있습니다. 회개는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는 일을 포함합니다. 우리는 이 어부들에게서 버림과 따름이 회개와 믿음 곧 구원 받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마가복음에 ‘곧, 즉시(οἱ δὲ εὐθέως ἀϕέντες τὰ δίκτυα ἠκολούθησαν αὐτῷ )’입니다.  ‘곧’은 즉각적인 순종을 말합니다. “앞으로 그렇게 할 게요”가 아닙니다, 지금 행동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순종에는 다른 때가 없습니다. 다른 때는 이미 늦습니다. 내일은 늦으리 입니다, 지금이 아니면 순종이 아닙니다. 순종은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내가 망한다는 분명한 응답입니다 그러므로 도전입니다. 천국은 지금 침노하는 자가 얻게 됩니다. 모세가 홍해바다를 향해 지팡이를 내 밀까 말까, 아니면 말고가 아니라, 곧 지팡이를 앞으로 내 미는 그 즉시로 홍해바다가 갈라졌습니다. 가나 혼인잔치에 항아리에 물을 부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터무니없다고 순종하지 아니하였다면 맛있는 포도주를 잔치 손님들이 맛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곧 순종하여 항아리에 물을 부었습니다. 열두 해 혈루증으로 고통당하던 여인이 곧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만질까 말까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즉시 만졌더니 고침 받았습니다. 여리고 맹인 바디메오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군중들의 소리를 듣고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잠시라도 지체하면 일생일대의 기회를 잃게 될 것입니다. 곧 소리 질러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바디메오는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이방 선교를 위하여(ἵνα εὐαγγελίζωναι αὐτὸν ἐν τοίς ἔθνεσιν. 갈 1:16)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다메섹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에 즉각적으로 순종하므로 말미암아 마침내 세계 구원의 역사가 출발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세계 선교의 분기점이 된 것입니다. 다메섹 사건 이후에 바울은 “내가 곧(εὐθέως)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갈 1:16)” 예수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역사는 현재형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즉각적인 순종이 내 인생의 변곡점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물’(디크튀아, δίκτυα: 그물 전반을 가리키는 말)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여기서 그물은 자신의 전체 인생을 말합니다. 그들의 전 재산을 말합니다. 그들의 미래가 그 그물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예수님께 의탁하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고 말씀하신 것은 당시 랍비들이 제자들을 부르는 방법입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을 선생으로 모시고 예수님으로부터 복음(율법)을 배우고자하는 일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하는 잠언의 말씀을 그들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미래를 앞날이 어찌 될 것인가에 대해 그 어떤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지금, 그를 따르는 것이 현재의 최선의 삶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제자가 선생을 찾아 나오는 다른 종교와는 달리 선생이 제자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왜 하필이면 어부들인가? 그들이 누구이든지 상관없습니다. 예수님은 즉시 예수님 부를 때 따를 사람들을 찾아 부르신 것입니다. 한 바리새부자청년에게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 말씀하시니 재산이 많은 고로 따르지 못했습니다. 어느 명문거족이던 어느 종파이던 상관없습니다. 예수님이 따르라고 말씀하실 때 곧 따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 어부들이 곧 예수님을 따라가니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열심당 시몬도, 엣세네파 니고데모도, 세관원 마태나 세관장 삭개오도 즉시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 그들이 어떤 사람이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그들의 미래를 보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금 곧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지 못한다면, 미래의 가능성이란 없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지금 예하고 대답하는 자가 필요했습니다. 가능성을 미리 보시고가 아니라 지금 순종하는 그를 보신 것입니다.

주님은 저의 장래 가능성을 보고 저에게 목사로의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의 저의 순종을 보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벌써 58년 전이네요. 반세기 전 저를 신학대학으로 부르신 예수님이 오늘의 전병호목사를 보시려고 저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때 저는 불순종자였고 불충한 존재였지만 사울을 부르듯 저를 택하셨습니다. 역설적이지만 불순종한 당시의 저는 그 누구보다 하나니 앞에 진실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등학교 1학년 때 비몽사몽간에 주님의 부름심에 예, 신학대학에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주님의 종으로 사역함은 신학생으로 부르심에 순종하여 온 날들이 지금 까지 이어 58년이 되었던 것입니다.     
현재 내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진정한 현재라는 시간은 죽은 시간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순종하는 오늘은 바로 영원가운데 있는 영원한 오늘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아니면 언제? 오늘의 설교 제목입니다. 지금 주님 부르시는데 따르지 않는다면 언제? 내일은 늦으리 입니다. 내일 내일 하다가 이미 구원의 길에 멀어져 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구원(σωτηρία)이란 말은 전인적인 치유(治癒 Healing)를 말합니다. 영혼의 치유로 우리는 죄 사함 받고 천국백성이 됩니다. 마음의 치유를 받고 세상의 모든 근심으로부터 자유 입니다. 육체의 치유로 우리는 건강한 몸입니다. 영 육 혼이 죄와 마귀와 죽음으로부터 치유함을 받고 해방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가 구원함을 받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능력 지혜 명철 지식을 받게 되니 새로운 인생을 삽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 사도처럼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외치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할 수만 있으면 내 병을 고쳐 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기도하였다면 “주여, 지금 제 병을 고쳐 주심을 감사드립니다.”라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지금 고침 받지 않으면 언제 고쳐질 것이라 생각합니까?
“내 소망을 이루어 주시리라 믿습니다.”가 아니라, “내 소망을 이루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의 믿음은 현재형입니다. 그래서 이미 구하는 것을 받은 줄로 믿으라(막11:24)고 예수님이 말씀 하십니다.
과거에 잘 믿은 것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미래는 불확실 합니다. 확실한 것은 지금 내가 여기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여기 있다. 내가 지금 너희와 함께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내일 잠에서 깨어 새날을 맞이한다면, 또 오늘 현재입니다. 우리는 항상 오늘 현재 여기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믿고 그 하나님께 순종하여, 오늘을 행복하고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이 행복하지 않은 날이 된다면 언제 행복할 것 입니까? 오늘이 기쁨의 날이 아니라면 내일은 어둠속에 묻힐 날이 아니라고 어찌 장담 할 것입니까? 오늘 아니면 언제? 오늘 행복하고, 오늘 기쁜 날이어야 합니다. 

이제 다시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구원이 전인적인 치유라 함은 한 개인의 문제만 아니라 전 지구적인 치유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은 죄 가운데 있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그리고 죄 가운데 있는 인간들로 말미암아 오염되고 죽어가는 피조물까지 구원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이웃 간에 어렵고 힘들어하는 인생들을 치유하는 것이 곧 나를 치유하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 와 함께 이 지구 땅에 살고 있는 모든 피조물들을 치유하는 일이 곧 우리 인간을 치유하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코로나시대로 말미암아 우리가 발견한 한 가지는 지구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비록 코로나로 연결되어 있는 그래서 관계된 공공의 인류인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인류는 모두 한 통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너와 나 그리고 그 모든 사람이 서로 얽혀져 있는 존재입니다.

얼마 전 102세 대신 김형석교수님이 기자들과 만나 한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김형석교수가 젊은 교수시절 아마도 6,25전쟁 직후에, 아내와 더불어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 가니 교수들이 싱글벙글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런가 알고 보니 월급이 조금 올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김 교수님도 기분이 좋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그때 일을 생각해 보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고 회고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길거리에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하루 먹거리도 없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자기 월급 몇 백 원이 올랐다고 기분좋아했던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피차 어렵게 살던 때인지라 부끄럽게 생각할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은 형편이 다릅니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그리고 우리 이웃나라에는 가난하고 병들고 어렵게 인생을 살아가는 수천 수억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그들을 돕지 않으면 그들은 곧 세상을 떠날지도 모릅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어렵고 힘들고 병들어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치유하는 일이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일입니다. 지금 아니면 언제 할 것입니까?

얼마 전 우리나라의 가장 존경받는 지식인중 한분이신 이어령(1934년생)교수가 CBSTV방송에 나와서 간증을 하였는데 그 내용 중에, 역시 6.25 전쟁 직후 너무 어렵게 살던 때를 회상하였습니다. 당시 신혼살림을 단칸방에서 살던 때입니다. 겨울철 구공탄을 사용하던 때입니다. 비록 어렵지만 방 한 구석에 작은 어항에 금붕어 몇 마리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금붕어들이 어항 속에 헤엄치는 모습을 보고 가난한 생활 속에 기쁨을 얻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추운 겨울밤 아침에 깨어보니 구공탄 불이 꺼지고 방안은 냉방이 되어 그야말로 영하10도를 방불할 만큼 추었습니다. 그런데 어항을 보니 어항물이 꽁꽁 얼어 금붕어들도 냉동상태가 되어 있었습니다. 더 생각할 것 없이 얼른 얼른 불을 펴 물을 끓여서 어항의 물을 녹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항의 얼었던 물이 녹으니 붕어들의 얼었던 몸도 녹아저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얼음덩이가 된 금붕어를 다시 살려낸 것처럼, 지금 생각하니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죄로 얼어 버린 나의 마음과 영혼을 녹여 구원해 주셨다고 이어령 교수님이 간증하였습니다. 인간들로 오염되고 살해당하고 있는 동 식물들을, 금붕어 한 마리를 보호하듯이 지금 보호하지 않으면 지구상에 동 식물의 씨가 사라질 것이고 결국 모든 인간도 다 같이 망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을 서로 연결시키셨고 피차 결속시켜주셨기 때문에 환경보호는 지금 해야 할 자연 구원입니다.  지금 아니면 언제 할 것입니까?
 
(*** 지난 21일 칭화(淸華)대학교 생명과학대학 리싸이(李賽)실험실과 오스트리아 나노그래픽스(Nanographics)社, 사우디아라비아 킹압둘라과학기술대학(KAUST) 이반 비올라(Ivan Viola) 연구팀이 협력해 제작한 고해상도의 코로나19 바이러스 이미지가 세상에 공개됐습니다. 나노미터(nm·10억 분의 1m) 크기의 이미지에서 평균 지름이 채 10nm도 안되는 코로나19 바이러스는 기이한 별 모양을 하고 있으며 표면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돌기 형태의 스파이크 단백질 ‘촉수’가 분포해 있습니다. ‘별’ 내부를 살펴보면 질서 있게 배열된 리보핵산단백질(RNP) 위에 길쭉한 리보핵산(RNA) 사슬이 치밀하게 휘감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를 비롯해 온 지구 사람들이 코로나 19바이러스로 인한 엄청난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2월4일 현재 세계 코로나 확진자 수가 3151만 7087명이고, 사망자가 96만 9541명입니다. 우리나라는 2만3216명 확진자에 388명아 죽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전염병입니다. 백신이 개발되어 얼마 후면 우리나라에서도 면역주사를 맞을 수 있다고 합니다만, 지금 고통당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만 있으니, 우리 모든 국민들은 속이 타들어가는 듯한 마음입니다. 변이 바이러스까지 생겨나서 어쩌면 좋은지 속수무책입니다. 마스크 쓰고 거리두기하고 집에 콕 박혀 있어야 하는데 그럴수만은 없으니 이 또한 속상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고난이 올수록 서로 사랑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hudling하여야 합니다. 허들링이 무엇입니까? 남극의 겨울은 무섭게 춥습니다. 그런데 이런 추위가 오면 황제 펭귄들은 더 추운 곳을 찾아갑니다. 왜요? 비록 추운 곳이지만 영하 40도 그곳에는 무서운 짐승들이 없는 펭귄들에게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극한의 고난의 장소가 가장 안전한 곳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무서운 추위를 어떻게 이겨낼 것입니까? 무섭게 추운 바람이 불어오는 그 얼음 땅 위에 그들은 서로 뭉처 있듯이 밀착해 모여 있습니다, 그래서 집단 체온을 유지 합니다. 그러면 가장 밖에 있는 펭귄은 그 추운 바람을 견뎌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시간이 지나면 자리를 바꿉니다. 안에 있던 펭귄이 밖으로 나오고 밖에 있던 펭귄이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의 발 위 털 속에 작은 새끼 펭귄들이 있습니다. 서로 서로 이 어린 새끼 펭귄들을 자기 발등 털 속으로 보호해 줍니다. 이렇게 자리 바꾸는 것을 hudling이라 합니다. 하나님이 작은 황제 펭귄에게 허들링의 지혜를 주신 것처럼 우리 인간들도 비록 고난을 당하지만 고난 속에 함께 어울려 도우며 따뜻한 마음으로 사랑하면은 고난은 고난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고난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은 온 인류를 따뜻하게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이 코로나시대 마귀를 이기는 비결은 따뜻한 허들링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비대면 거리두기 시대 우리는 마음의 허들링, 영혼의 허들링, 비록 몸은 조금 떨어져 있지만 서로 이런 고난 중에 이웃과 기쁨을 나누고 사랑하는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예배입니다. 그리고 이 예배에 빠질 수 없는 일이 감사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서로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지금 아니면 언제 감사할 것입니까?

무엇보다 더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아직은 우리가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감사하지 않으면 언제 할 것입니까? 병에 감염된 다음 감사 할 것입니까? 사소한 일인 것 같지만,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지금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입니다. 지금 감사하지 않으면 늦으리 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감사하며 오늘을 사는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습니다. 자가 좋을대로, 자기 생각대로 살지 않습니다. 오늘을 살게 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을 기쁘게 살고, 행복하게 살고, 착하게 살면서 오늘을 잘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저녁을 맞이하고 잠을 자는 사람은 또 다시 행복한 오늘을 살아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찬송하는 일, 지금 아니면 언제?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 지금 아니면 언제? 오늘 사랑을 펼치며 사는 일, 지금 아니면 언제?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 지금 아니면 언제?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따르는 일, 지금 아니면 언제?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그리고 여러분, 우리는 오늘 주님으로부터 ‘나를 따르라’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곧 모든 것을 버리고, 나의 자만심과, 나의 욕망과, 나의 이기심 나의 허영된 마음들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우리가 사랑하며, 감사하며 사는 일, 지금 아니면 언제? 우리의 최선을 다하여 주님의 구원의 역사를 따라갑시다.

오늘에 우리의 가정 오든 이웃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021년 2월14일  주일아침 예배  요 9:35-41  십자가의 눈


9장 앞 절인 8:59를 보면 “그들이 돌을 치러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 나가시니라.” 여기 ‘숨어(에크뤼베: 크륖토의 동직2과수3단)’는 아무도 모르게 숨어서 가셨다는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자신을 돌로 쳐 죽이려하는 유대인을 피해 아무도 모르게 성전을 떠나가는 길이었습니다. 요9: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예수님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 앞을 지나가시다가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숨어 가시던 예수님이 이 맹인을 보고서는 자기를 사람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어디서 돌이 날아올지 모르는 그 시각에도 예수님은 이 불행한 사람을 보고 자신의 위험을 챙기지 않았습니다.

요 9장 1절부터 41절까지 전체의 말씀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에 관한 말씀으로 이어졌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눈을 뜨게 하셨고 구원하신 내용입니다. 맹인 앞을 지나갈 때에 제자들이 평소에 궁금하던 것을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던 문제와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맹인 된 이유가 무엇인가? 첫 질문은 맹인 자신의 죄 때문인가? 그렇다면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이 사람은 태아 때 죄를 지었단 말인가? 그것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하다면 두 번째 질문은 그의 부모가 지은 죄 때문으로 보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마 그럴 수 있지만, 부모가 이 맹인을 잉태한 후 죄를 지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죄를 지었다면 태어나기 전 속죄제를 지냈을 것이고 그러하다면 맹인으로 태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설사 부모가 죄를 지었다 해도 그 죄 값을 자식이 짊어지지 않는다고 에스겔서 18:20에서 말씀하였습니다. 그래서 궁금합니다. 궁금하면 선생님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학생들이 모르면 모르는 것을 선생님에게 물어야 하는데 묻지 아니하고 그냥 모른 채 지나가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질문하는 것도 지혜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 간단합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ㅎ파네로데: ㅎ파네로의 동가1가수3단 ‘명백하게 보여주다’) 이 맹인이 받고 있는 고난과 불행은 하나님께서 일하시게 되는 기회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맹인의 눈에 흙을 침으로 이겨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씻으라하시니 그대로 하니 그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이 맹인은 매일 같이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던 사람이라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눈을 떠 성전에 들어오니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사람들은 놀라움 가운데 도대체 누가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고 질문들을 하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예수라는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어 그대로 하니 눈이 떠졌다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바리새인들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사람이 눈을 뜨게 한 사람이 안식일에 행하였으니 안식일을 범한 죄인이라 하고, 다른 바리새인은 죄인이 어떻게 이런 이적을 행할 수 있느냐고 말들하며 서로 분쟁들 하였습니다. 그래서 부모를 불러 정말로 네 아들이 맹인이었던 것이 분명한가? 하고 물으니 분명히 맹인이었다라고 말 하면서 어떻게 누가 눈을 뜨게 하였는지 나는 모른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맹인이었다가 눈을 뜬 이 사람은 바리새인들이 오히려 당신들이 알아야 할 사람을 모른다니 이상하다고 그들을 비웃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를 쫒아 냈습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은 그 다음에 일어난 내용의 말씀입니다. 

사물을 바라보는 두 가지 태도를 말하는 漢字 말이 있습니다. 하나는 볼 見이고,  또 한자는 볼 觀입니다. 見과 觀 모두 우리말로는 ‘본다’라는 의미입니다만, 구별하자면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견이 평면적으로 보는 것이라면 관은 입체적으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견은 겉을 본다면 관은 속을 들여다보는 것이고, 견은 슬쩍 지나쳐 본다면 관은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고, 견은 아무 생각 없이 보는 것이라면 관은 자기 생각을 분명히 하고 보는 것을 말합니다.
        
觀관이란 글자는 황새 관雚 과 볼見이 합쳐진 글자로 황새가 물속에 있는 물고기를 잡기 위해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형상을 말합니다.

미국에서 40년 가깝게 살고 있는 한 분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을 찾아온 친구에게 한국의 발전상을 칭찬하니 그 친구는 말하기를  "너는 외국에 살아서 모르나 본데, 사태가 심각해. 이렇게 심각한 적은 일찍이 없었어." 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분은 말하기를, 한국에서 온 친구들이 나라가 전보다 좋아졌다는 말을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단 한 번도! 이 前 대통령, 그 이 前 정부도 지금처럼 나쁘지는 않았다고 말 할 뿐입니다. 그러닌까 대한민국은 건국 이후 대통령과 정부가 바뀔 때마다 점점 나쁜 대통령, 점점 나쁜 정부가 나오고, 점점 위험한 사태가 발생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분은 “참 이상하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이 안 망하고 이렇게 발전하다니, 기적이 아닌가!” 라는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또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될지는 몰라도, 이 분이 예언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는데, 다음 대통령은 현재 대통령보다 나쁜(?) 대통령일 것이고, 다음 정부는 현재 정부보다 나쁜(?) 정부일 것입니다.  왜냐고? 그 때가 되면 사람들은 또 이렇게 말할 테니까: "이 전 어떤 대통령이나 정부도 지금처럼 나쁘지는 않았어!"

어떤 인물이나 역사나 사건들을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 합니다. 현재 있는 그대로를 보(見)느냐? 그러면 우리는 항상 내 맘에 차지 않거나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세상이 결코 나를 만족시켜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대통령도 어떤 정부도 나의 기대만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 장담 할 수 없습니다.  풍랑일어 나는 바다를 보면 두렵습니다. 그러나 그 바다 속은 조용합니다. 사람들의 눈은 풍랑을 볼 뿐 바다 밑은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두려움과 걱정 근심이 떠날 날이 없고 시비와 분쟁이 끝일 날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그리고 역사를 좀 들여다보면(觀) 우리가 이해할만한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지난 5000년 동안 얼마나 파란만장한 시대를 겪어 왔습니까? 삼국시대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 삼국이 이 좁은 한반도 위에 얼마나 많은 전쟁을 하였습니까? 통일신라가 망하고 고려시대 최씨 군사정권이 100년동안 계속되었고, 또 원나라가 쳐들어와서 100년 동안 많은 조공을 바치고 공녀들이 붙잡혀 갔습니다.  조선 나라를 세울 때 태조 이성계는 군사 반란을 일으켜 고려왕을 쫒아내고 수많은 고려의 충신들을 죽였습니다. 조선 세 번째 왕인 된 이방원은 포은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죽였습니다. 세조는 자기가 왕이 되려고 어린 조카 단종을 죽였습니다.  연산군은 얼마나 패륜정치를 하고 충성스런 많은 신하들을 죽였습니까? 그래도 나라는 망하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 왜놈들이 침략해 오고,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 뙤놈들이 쳐들어와 우리 삼천리강토를 쑥대밭을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우리 조상들은 그 아픔의 세월 참고 이기고 살아 나라를 지켜왔습니다.  조선 말, 일본 중국 러시아가 우리나라에서 싸움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이기고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고종황제가 미국과 불란서 등 세계 여러 나라에 칙사를 보내어 우리나라를 구해달라고 호소를 해도 고개들을 돌렸습니다. 그 어떤 나라도 우리나라를 구해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35년간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해방 후 나라는 미국과 쏘련이 임의로 두 토막을 내어 70년 동안 분단국가로 있습니다. 3년 동안 남 북 동족 간에 전쟁을 해서 수백만이 죽고 1000만 명 이산가족이 생겼습니다. 전쟁 후 필리핀이나 에티오피아로 부터 원조 받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는데, 2020년 현재 우리나라는 세계 10대 선진국가로 발전하였습니다. 전 세계 한국을 사랑하는 한류동호회가 1843개 9천만 명 이상이 있습니다. 우리의 한글을 세계 각국이 제2외국어로 정하고 다투어 배우고 있습니다. 2019년도 세계혁신국가의 1위이고 2위가 독일이고 미국이 8위이고 일본이 9위입니다. 세계 각국에 파송된 해외 봉사단원이 미국이 7376명으로 1위이고 우리나라가 4153명으로 2위입니다. 그런데 일부 정치인들은 마치 지금 우리나라의 경제가 망해 필리핀 같은 나라가 될 것이라고 선거운동을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망할 지경에 있습니까? 지금 우리나라가 북한보다 중국보다 세계에서 독제국가로 알려지고 있습니까? 지난 2월2일 영국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이 발표한 '민주주의 지수 2020(Democracy Index 2020)'에서 우리나라가 조사 대상 167개국 중 23위를 기록했습니다. '완전한 민주국가(Full democracy)' 평가하였습니다. 미국은 25위이고 북한은 167위라고 발표하였습니다. 아직 미흡한 점도 있고 더 민주주의가 발전해야 하겠지만, 일부 정치인들은 마치 우리나라가 엄청난 독제국가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습니다. 지금 과연 불의와 부패한 정권으로 나라가 쑥대밭이 되어 망해가고 있습니까? 그럴 수 없고 그렇게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다음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될는지 혹 야당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면 우리나라가 지금 보다 더 좋아질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을 장담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세계에 가장 못사는 나라인 북한에게 세계 10대 부강한 나라인 우리나라가 먹힐까봐 그렇게 벌벌 떨고 있습니까?  북한이 핵무기를 서너 개를 가지고 있다고 그렇게  두렵습니까? 그러면 북한 사람들은 어떨까요? 그렇게 미국을 욕하고 있는데, 미국이 핵무기 수 만개를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 미국이 가지고 있는 전략핵무기 B41 (=MK 41)은 열핵융합, 원자핵융합(Thermonuclear Weapon) 방식의 폭탄으로 히로시마에 떨어진 핵폭탄의 1666배의 위력을 가지고 있어 그것 하나만 북한에 떨어지면 북한 전체가 한꺼번에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이 소식을 이미 듣고 있는 북한사람들은 두려워 모두 까무라 쳐 죽어버려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은 전혀 두렵게 여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북한의 그 몇 개 핵무기가 두렵다고 무서워요, 벌벌 떨고 있어야 합니까?  지금 코로나 시대에도 우리는 세계의 모범적으로 잘 방역해 오고 있는데, 못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야당 정치인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치료약이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고, 러시아에서 개발된 백신을 개발은 하였지만 다량으로 생산하지 못해 우리나라에 의뢰해서 수억 개의 백신을 만들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

우리나라 백성들은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인터넷 들어가 보면 이구동성 외국인들이 깜짝 놀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IQ가 제일 높은 사람들입니다. 며칠 전 아랍에미리트가 화성에 인공위성을 보내 현재 착륙하는 사진을 보내왔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한국에서 그 기술을 전수받았다고 발표 하였습니다. 영화 음악 체육 그리고 과학 기술 문화의 발전이 세계 최고로 더욱 성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젊은이들이 우리나라를 크게 발전시키고, 더 크게 발전시켜 나갈 만한 훌륭한 성품과 자질과 실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현재 모습을 겉에 들어난 일에 見만하지 말고 우리나라의 실체를 觀해보면 우리나라는 꽤 좋은 나라이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꽤 잘난 사람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기독교인들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국회의원 중 기독교인들이 불의 하지 않고 믿음으로 정치를 해야 하고, 대통령 장차관 공무원 중 기독교인들이 부정하지 않고 바르게 나라를 이끌어가고, 기업가들 중 기독교인들이 불법을 저지를지 않고 정당한 이익을 추구하고,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 해야 합니다. 그런데 빛을 잃고 믿음에서 벗어나 있는 모습들이 여기저기 백성들에게 보이니 얼마나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아직 우리나라가 하나님의 축복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그리고 만일 나라가 어렵고 정치인들이 비난을 받는 다면, 이는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이 주신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임을 깨닫고 회개 하여야 합니다.  

역사를 見만 하지 말고, 觀하여 자세히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보호해 주시고 축복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고 애국가로 부르는데 이 말씀대로 믿지 못합니까? 하나님이 보우하시는 나라, 우리나라는 어렵고 힘들던 고난의 시대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시대의 경륜에 따라 우리 민족을 축복해 주시었습니다. 그러므로 여 야 정치인들 특히 기독교인들 소위 기독교 지도자라고 말하는 사람들, 여러분들의 믿음 없음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회개하며 다투지 마십시오. 좌익이니 우익이니 사상논쟁들 마십시오. 진보니 보수니 편 가르기 하지 마십시오, 그런 사람들은 역사에 눈이 멀고 진리에 눈이 멀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비록 눈이 멀었지만 영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수많은 찬송시를 쓴, 우리 찬송가에도 21곡이나 있는, 화니 크로스비의 찬송 중에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 하시니, 내 주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 하시니 어려운 일 당할 때도 족한 은혜 주시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그의 사랑 어찌 큰지 말로 할 수 없도다......영영 불러 나의 찬송 예수 인도하셨네” 라고 우리는 찬송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 인도하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세상을 바라보고 두려워 말고 나에게 주어진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하나 더 세상을 보는 눈이 있습니다.

기원전 4세기 중국 정나라에 유명한 列子라는 학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젊은 시절 그의 스승인 호구자(壺丘子)와의 대화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열자가 여기저기 다니며 여행하길 좋아 하였습니다. 열자는 사람들은 여행하면서 겉모습만 보고 좋다 나쁘다라고 말하지만, 자기는 겉모습이 아니라 그 내면을 살펴보고 거기서 의미를 찾는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런 말을 들은 호구자 선생은 겉만을 보는 사람이나 그 속만을 들여다보는 사람이나 다 똑같다고 말합니다. 겉만 보고 안을 못 보는 것이나, 속만 보고 겉을 보지 못한다면 다 똑같다는 것입니다. 둘을 같이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자는 이 가르침을 받고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도다!游其至矣乎(유기지의호)!游其至矣乎(유기지의호)라고 하였습니다.

한꺼번에 안도 보면서 겉도 보고, 오른쪽을 보면서 왼쪽도 보고, 위를 보면서 아래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한쪽만 치우쳐 보고, 다른 쪽은 보지 못한다면 이는 한쪽 눈이 멀었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 눈을 주시고, 마음은 하나로 주심은 양쪽을 함께 하나로 바라보라. 그래서 둘이 한 마음으로 하나 되어 보는 것이 정확하게 본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두 눈을 가졌지만 한쪽만 바라보기 때문에 마음들이 서로 다르고 무엇이 옳은지를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두 눈으로 볼 때  다른 것 같이 보이지만 마음으로 하나 되게 하는 것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눈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에서 바라보는 눈입니다. 서로 다른 것을 폐하여 하나 되게 하시고, 서로 벽을 쌓아 나누어진 것을 터서 하나로 통일 되게 하시며, 서로 끊어진 것을 이어지게 하시고, 서로 다른 길로 가는 길을 하나로 한길로 가게 하시는 일이 곧 예수님의 십자가위에서 보는 십자가의 눈입니다. 십자가의 눈은 곧 하나님의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는 눈입니다. 십자가의 눈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자연의 피조물까지 안팎으로 integral하여 보는 同感의 눈(a sympathetic eye)입니다. 십자가의 눈으로 관통(貫通)하여 본다면 세상이 이처럼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이사야가 바라본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사65:25 cf.사11:6-9)” 없는 세상인 것입니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 수 있다.”라는 시를 쓴 정호승이란 시인이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라는 시에서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 꽃잎에도 상처가 있다
너와 함께 걸었던 들길을 걸으면 / 들길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보면
상처 많은 풀잎들이 손을 흔든다 / 상처 많은 꽃잎들이
가장 향기롭다

여러분, 풀잎의 상처를 봅니까? 꽃잎의 상처를 볼 수 있다면, 내 옆 사람의 마음의 상처, 영혼의 상처도 보며 사랑으로 보듬어주고 위로해주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참 아름답습니다. 이웃이 그처럼 좋을 수가 없습니다. 이리가 양과 함께 누울 수 있는 세상이 얼마나 정의로운 세상일까요? 얼마나 살기 좋은 행복한 나라일까요? 상함도 해함도 없는 우리나라로 이루어나가는 일이 기독교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눈이 있으면서 보지 못하는 어둠의 인생이 아니라, 십자가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자연을 보고 이웃을 보고 내 가정을 보면서, 언제나 햇빛아래 환하게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 기쁨으로 살아가는 복된 하루하루 2021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021년 2월 21일 주일아침 예배  딤전 4;6-9  믿음 연습


아마도 세계 대부분의 피아니스트와 현재 피아노를 배우는 많은 학생들이 처음 피아노 앞에 앉아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할 때 바이엘 피아노교본 1권에서 4권까지를 1년간 배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이엘을 끝나면 체르니 100번 30번 40번 50번 하농 바흐평균율 인벤션 부르크뮐러 소나티네들을 배웠을 것입니다.  무엇 보다 체르니 연습을 부지런히 해야 그 후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됩니다. 물론 학생들이 얼마나 연습하느냐, 피아노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열심을 다하느냐에, 보다 빨리 체르니를 마치게 될 것이지만, 대체로 초등학교 1학년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였다면 6학년 쯤 되어야 아마도 체르니 공부를 마치게 될 거라고 합니다.
체르니는 사람 이름입니다. 그는 1791년 2월20일 태어나 1857년 7월1일에 세상을 떠난 피아니스트이고 작곡가이였습니다. 그는 3살 때 부터 아버지로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7살 때 작곡을 하였고 10살 때 모차르트의 대부분 피아노 곡을 암보하여 연주하였다고 합니다. 체르니는 10살 때 베토벤을 제자가 되어 3년간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후 체르니는 학생들을 위한 피아노 교본을 만들어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그중에 유명한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가 있습니다. 리스트는 8살 때 체르니의 제자로 들어와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피아노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들을 보면 얼마나 존경스러운지요. 그 경지에 이르기 까지 보통 하루에 10시간 이상 적어도 10년 이상 피아노 앞에 앉아 연습을 하여야 피아노 좀 치는구나 하는 말을 듣게 됩니다. 모르지만 사모도 피아노를 배울 때 엄청난 연습을 하였을 것입니다.
어찌 피아니스트 뿐 입니까? 그 어떤 음악가도, 운동선수도, 화가도, 배우나 가수도 심지어 게그맨도, 시인도, 법률가도, 과학자들도 자기의 분야에서 엄청난 연습을 하므로 실력이 늘고 기술이 늘어 자기 분야에 전문가가 되고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며 문화와 사회를 발전시킨다고 하겠습니다. 성경은 그런 분들을 호크마(구약 180회 잠언 45회)라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지혜자라고 번역하였지만 자기 분야의 전문가들을 말합니다. 그런 전문적인 분야에 최고가 된다는 것은 본인의 노력과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서양음악의 아버지라 불리 우는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가 자신이 작곡한 모든 악보 처음에 J.J.라 쓰고 마지막에는S.D.G. 또는 I.N.J.라는 암호같은 그라를 적었습니다.  그런 이 글자는 암호가 아니고 J.J.는 Jesus Juva란 말로 ‘예수여 도와주소서“란 말이고, S.D.G는 "Sola Deo Gloria" 이 말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이고, I.N.J.는 “In Nomune Jesus" 이 말은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글자입니다.

오늘 말씀드리려는 요점은 인생은 나름대로 온갖 연습을 통해 성장하며, 자신의 인생을 승리로 성공으로 이루어 가기를 원한다면, 모든 인생 연습의 기본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연습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연습과 함께 자기 분야에 최선을 다해 노력하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칼 구스타프 융이라고 하는 스위스의 유명한 의사요, 심리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지그문트 프로이드와 알프레드 아들러와 함께 사람이 꼭 알아야 할 3대 심리학자중 한 사람입니다. 이 분은 심리학자이면서 정신과의사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예를 들면 정신분열증, 인격 파탄증, 그런가하면 히스테리에 걸린 사람을 치료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약물로 치료를 해봤더니 3개월에서 6개 월 이전에 다시 재발을 합니다. 약물을 투여할 때는 깨끗이 나은 것 같았는데 약의 효과가 떨어지고 나면 다시 재발을 합니다. 그 때 그 사람들의 모든 원인을 연구하고 살펴보니 모두 자신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하는 영혼의 욕구불만에서 얻은 병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만족을 주고 믿음으로 치료했더니 깨끗이 나았답니다. 이렇게 해서 자기가 고친 병은 재발한 일이 없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영국의 BBC 방송에서 보도를 했습니다.
1940년대 미국에서 백만장자로 이름이 있는 밀톤이라고 하는 사람이 비행기를 타고 찾아왔습니다. 늘 불안하고 초조하고 그러다 보니 잠을 못 자는 불면증에 걸려 있었습니다. 사람이 미치고 돌아버릴 지경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약을 써도 듣지를 않습니다. 별일을 해봐도 효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칼 융을 찾아갑니다. 칼 융이 이야기를 듣더니 "이것은 내가 고칠 병이 아닙니다. 내가 한 분을 소개할 터이니 소개서를 가지고 찾아가십시오"하면서 소개장을 써 주는데 모스크바 변두리에 있는 수도원 원장에게 보내는 글이었습니다. 수도원 원장이 받아 들더니 "당신, 내가 하라는 대로하겠오?" "하려고 생각했기에 찾아 온 것입니다" "그래요, 그러면 예배당에 가서 꿇어 엎드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300번만 외우십시오. 아무 뜻 없이 외우는 것이 아니라 한 마디 한 마디 그 말씀의 뜻을 새겨 가면서 300번을 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병을 고칠 수 있다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 다음날 원장님을 찾아가 "어떻게 할까요?"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이번에는 300번에 300번을 더해서 600번을 하십시오" 그래서 600번을 했습니다. 셋째 날도 원장님을 찾아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이번에는 600번에 300번을 더해서 900번을 하십시오"라고 합니다. 매일 300번씩 늘어갔습니다. 그러다가 6,000번을 해야 되는 20일째 되는 날이 되었습니다. 우리처럼 그냥 줄줄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6,000번째 외우는 그 날 외우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정신 없이 자고 깨어나니 머리가 맑아지고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녁때가 되면 깊은 잠에 들고 아침에는 깨우는 것이 싫을 정도로 잠을 잘 잤습니다. 결국에는 깨끗이 나아서 돌아갔습니다.
융은 밀톤을 상담하면서 그에게서 영적인 영양실조를 발견했습니다. 융은 영적인 영양실조를 ‘영적 욕구’라로 불렀습니다. 융은 영적 욕구로 인해 병을 앓는 환자들에게 이 욕구를 강하게 채워줄 수 있는 신앙적인 방법들을 제시해주었습니다. 그는 밀톤의 불면증을 치료하는 처방으로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수도원의 수도원장에게 보낸 것입니다. 수도원장은 밀톤의 불면증에 대한 원인을 융의 소개서를 통해서 알고는 밀톤에게 주기도문을 반복해서 외우는 일을 시킴으로 그의 영적인 영양실조를 회복시켰습니다. 밀톤이 수도원에 거하며 주기도문을 외우는 과정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서 영적인 고갈로부터 찾아온 불면증으로부터 자유 함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수도원장이 밀톤의 불면증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선택한 것은 주기도문을 반복하는 영적인 반복 학습이었습니다.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왜 수도원장은 밀톤에게 주기도문을 반복해서 외우게 하였는가 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대부분의 영역에서 반복적인 연습과 노력 없이 어떤 성과를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영혼이 새로워지는 연습도 믿음의 반복에 있다는 것입니다. 체르니의 반복적인 피아노 연습이 그를 유명한 피아니스트 되게 하는 기본인 것처럼 반복적인 믿음의 행위가 나의 영혼을 새롭게 하고 성장시킵니다. 신앙의 반복적인 연습과 훈련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성숙한 신앙이 될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다운 삶을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내 삶에서 신앙의 열매가 맺혀지고 신앙이 성숙해 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반복적인 믿음의 연습과 훈련의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왜 체르니를 연습하던 학생들이 도중에 피아노 배우기를 그만두게 됩니까? 그들은 말하기를 지루하다, 재미가 없다라는 말을 합니다. 믿음 반복훈련에 실패하여 교회를 나오지 않거나 믿음생활을 버린 사람들이 말을 들어보면 재미없다 예배시간이 지루하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6년제를 구분해서 유년학교 3년제 소년학교 3년제로 구분하여야 하면 좀더 어린이들의 학습능력이 향상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그리고 대학교도 4년제가 아닌 3년제로 하고 반면에 대학원을 2년제에서 3년제로 늘려야 한다고 봅니다. 즉 교육의 3의 법칙입니다. 학교에서 교육시간도 3시간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택하여 3년간 훈련시키셨습니다. 신앙훈련에서 3년이면 족합니다. 대부분 신학공부에서 MDiv코스를 3년제입니다. 그러나 일반 학교 교육과는 다르게 믿음의 교육에 필수적인 과목은 바로 거듭남입니다. 즉 성령을 받아야 배워지는 과목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3년간 훈련을 받았지만 성령을 받지 못해 거듭나지 못하니 예수님 십자가 달리실 때 다 도망가 버리고 절망과 두려움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가의 다락방에서 전혀 기도에 힘쓰던 중 성령을 받아 거듭나니 두려움이 없어지고 온 땅을 다니며 전도하다가 순교함으로 기독교의 초석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전혀 기도에 힘썼다는 말은 기도의 반복을 말합니다.  기도를 계속 반복하던 중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반복된 연습을 통해 익숙해지고 마침내 눈감고도 화살을 쏘아 날아가는 새를 마치는 경우까지 이르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귀가 열리는 연습을 반복해서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에서 설교말씀을 귀담아 듣는 연습입니다. 3년간만 그렇게 연습한다면 귀문이 열려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재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꿀보다 더 단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눈이 열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성경책을 읽는다는 것은 재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책을 열심히 3년간 읽게 된다면 영안이 열려 하늘의 보좌위에 앉아계신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입이 열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기도하기를 뜨겁게 3년간 하게 되면 우리의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어 땅에서 메이면 하늘에서 메이고 하늘에서 풀면 땅에서 풀리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손의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이웃을 위한 봉사를 3년간 하게 되면 인생을 사는 기쁨과 보람을 얻게 될 것입니다. 발의 훈련을 열심히해야 합니다, 이우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3년간 전한다면 하늘의 상급이 클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구원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훈련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용서와 배려의 마음을 3년간 열심히 하면 매일같이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모처럼 함께 호숫가를 산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꽥꽥하며 거위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아내가 “어디서 닭이 우네요”라고 말을 합니다. 남편은 아내가 잘못 들었는가하여 “닭이 아니고 거위야”하고 말합니다. 아내는 “거위가 아니고 닭이에요.” “닭이 아니고 거위라닌까”하고 말다툼을 합니다. 다시 꽥꽥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 봐 거위 소리지” 남편이 의기양양하게 말하니, “아니 어찌 거위에요, 닭이구먼”. 그래서 하두 기가차서 남편이 아내의 얼굴을 보니, 아내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남편은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렇구먼, 내가 잘못 들었소, 이제 들어보니 거위가 아니고 닭이구먼”하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내의 얼굴이 금방 밝아졌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손을 붙잡고 가면서, “거위냐 닭이냐 그게 뭐가 중요한가? 우리 부부가 행복한 게 좋은 것이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배려의 연습을 하지 않음으로 행복을 모른 채 살고 있습니다.
이제 가장 중요한 반복연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범사가 잘되고 강건해지는 영혼이 건강해 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봉독한 말씀에서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유세베이아 프로스 판타 오ㅎ펠리모스 에스틴)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에서 깨닫게 됩니다.

거듭난 영혼, 성령 충만한 인생을 위한 반복 연습은 바로 경건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경건을 헬라어로 ‘유세베이아’라고 합니다. ‘유’는 좋은, 잘 이란 의미이고, 세베이아는 ‘경외함으로 서다’입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올바르게 서 있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히브리어로 ‘할락 리페네 야훼’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여호와 앞에서(리페네) 걷다, 행한다(할락)을 말합니다. 그러면 신구약에 말씀한 경건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해하라는 의미입니다.  
경건한 사람이란?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르게 정직하게 진실한 행동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새기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언제나 자기의 설자리를 조심하고 자기의 앉을 자리를 바르게 합니다. 기독교인 걷는 모습이나 앉은 자세가 믿음에서 흐트러져서도 안 되고 세상풍조에 흐느적거려도 안 됩니다.
시 16: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 139: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를 감출 수 없으며 멀리 도망칠 수도 없으며 어차피 짧은 한 평생을 사는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내 신상에 좋은 양약이 되고 하나님 앞에서 짝짝궁 예수님 앞에서 짝짝궁 성령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 내 영혼을 평안케 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건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연습을 반복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6절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은 무엇입니까? 요한 1서 5:3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매일 같이 반복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계명이 무엇입니까? 십계명이 있습니다. 그 밖에 성경에 수많은 계명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인들은  성경의 온갖 계명을 철저히 지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없으니 하는 척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망령되고 거짓된 바리새인들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었습니다. 

성경의 모든 계명을 지키는 일이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모든 계명이 단 한글자로 요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계명을 새 계명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사랑의 계명은 낮선 계명이 아닙니다. 그런데 새 계명이라 하심은 이 전의 사랑의 계명은 하나님의 사랑을 모른 채 인간이 주체가 되어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은 때때로 미움으로 변질합니다. 사랑을 말하면서 속으론 미음의 칼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옛 계명의 사랑은 율법적 계명이요, 외식하는 바리새인적인 계명입니다. 예수님의 새 계명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십자가의 사랑의 계명입니다. 새 계명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심으로 우리가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사랑의 도구로 삼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나는 그를 미워합니다. 그러나 내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를 사랑하라 하십니다. 믿음은 이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원수라도 사랑하게 됩니다, 세상을 아무리 뒤져 봐도 하나님이 미워하실 그런 사람이 없기 때문에 세상에 하나님의 원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원수를 사랑으로 구원하시고 막혔던 것을 뚫어 소통하게 하시고 닫혀졌던 것을 활짝 열 개 하셨으니,
요한1서 3장 23, 24에서 “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

여기 24절에서 이렇게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 안에 성령이 계신 줄 안다고 말씀하시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주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사랑의 연습을 반복적으로 하면 성령 충만하심이 내안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아버지의 은혜와 축복하심으로 아름답고 귀한 천국백성으로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경건은 하나님의 사랑을 반복적으로 연습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반복적으로 연습하면 성령충만하게 됩니다. 체르니를 반복적으로 열심히 연습해서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듯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생활 속에서 반복적으로 연습하면 성령충만하여 하나님 기뻐하시는 경건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할단이란 새를  기억하십시오. 히말리야 산 밑에 있는 작은 나라 네팔의 카트만두에는 전설적인 '할단(鶡鴠할단새 할, 산박쥐단. 애기박쥣과의 포유동물 산박쥐?)'이라는 새가 살고 있다고 전해집니다.
밤에 우는 새라 하여 일명 야명조(夜鳴鳥)라고도 불리는 이 할단 새는 추운 히말리야 산에서 집짓고 살고 있는 독수리와는 달리 둥지도 없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 새는 밤이 되면 「날이 새면 집을 지으리라」고 하면서 운다고 합니다. 네팔 말로 그 새의 울음소리가 그렇게 들린다고 합니다. 이 새는 아침 햇살이 감미롭게 비치는 오전부터 석양이 붉게 물들며 히말라야의 수많은 산봉우리 속으로 숨어드는 오후까지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일몰이 되어 히말라야의 차가운 눈발이 날리는 밤이 찾아오면 그토록 아름다운 목청을 뽐내던 그 새도 죽음처럼 다가오는 히말라야의 혹독한 바람 사이를 방황하며 울어 댄다는 것입니다. 「아아 날이 새면 집을 지으리라」

독일의 심리학자 ‘헤르만 에빙하우스(Hermann Ebbinghaus, 1850, 1,24 – 1909,2,26)’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은 학습 후 10분이 지나면 망각이 시작되어 1시간 후에는 기억의 절반을 잊어버리고, 하루가 지나면 70%를 한 달 후엔 기억의 80%를 잊어버린다고 합니다. 할단 새처럼 여러분은 경건의 연습 곧 하나님 사랑의 반복을 한 시간 후에 잊어버릴 것입니까 아니면 오늘 밤에 잊을 것입니까? 한 달 후에는 아마 그런 설교가 있었던가? 다 잊어버릴 지도 모를 일입니다. 경건의 연습이 없으면 천국의 길은 멀고 하나님의 사랑의 반복적 훈련 없이는 천국문은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
망각률(%) = (처음 학습에 소요된 시간-복습에 소요된 시간)÷처음 학습에 소요된 시간×100

 
그러므로 조금은 지루하고 재미없어도 열심히 예배에 나오고 열심히 믿음의 연습 경건의 연습 하나님 사랑의 연습하면서 살아갑시다. 그러면 비록 코로나 위기시대이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크신 사랑가운에 우리 모두 복된 인생을 살아갈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저와 여러분 모두 위에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021년 2월 28일  주일아침 예배  눅 15: 8-10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가던 초등학생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걸어가는 어린 꼬마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린 꼬마가 갑자기 넘어져 아이스크림이 땅에 떨어지자, 꼬마가 길바닥에 누워 울기 시작했습니다.  초등학생은 얼른 자전거에서 내려 꼬마를 일으켜 세워 다친 데가 없는지 살피며 달랬습니다. 마침 그때 멀리서 꼬마 어머니가 달려왔습니다. 초등학생은 꼬마 어머니에게 "다친 데가 없으니 안심하라"며, "내가 잘 보살펴 주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꼬마 어머니는 눈을 부릅뜨고 초등학생을 쏘아보며 "네가 자전거를 주의해서 타지 않아 내 아들과 부딪쳤다"며 "다치지 않아 다행이지만, 너 때문에 아들이 넘어져 아이스크림이 땅에 떨어졌으니 아이스크림 값을 내 놓으라"고 호통 쳤습니다. 중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중국말에 펑츠(碰瓷ㆍ자해공갈 사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외국인이 중국에서 가장 많이 듣는 조언 중 하나는 “모르는 사람을 도와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의로 도와줬다가 봉변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중국 언론에는 펑츠(碰瓷ㆍ자해공갈 사기) 관련 기사가 끊이지 않습니다. 길에서 쓰러진 노인을 도와주려다 되려 가해자로 몰리거나 교차로에서 고의로 차에 뛰어들어 다친 척하는 사람 때문에 곤욕을 치른 사례 등입니다. 인터넷엔 수많은 ‘펑츠 예방법’ 관련 글이 항상 인기순위 상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렇다 보니 중국 사회에는 ‘外面 문화(Outward culture)’라는 게 퍼져 있습니다. 실제로 길거리에서 차량 접촉사고가 났을 때 목격자가 나서거나 노인이 발을 헛디뎌 넘어졌을 때 부축해주는 일은 극히 드물다고 합니다. 중국 정부가 길거리에 그토록 많은 CC(폐쇄회로)TV를 설치하는 이유가 외면 문화 때문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올 정도입니다. 그런 문화현상으로 중국 뉴스에는 펑츠 관련 기사 못지않게, 제 때 도움을 받지 못해 결국 사망에까지 이르게 된 사람들의 소식도 자주 나오고 있습니다.

외면 문화로 인한 최대 피해자는 노인들입니다. 중국 국가통계국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의 최다 상해사망 건수는 실족사입니다. 길을 걷다가 쓰러져 사망하는 일이 차에 치여 사망하는 일보다 더 많은 것입니다. 지난해 중국의 대표 SNS인 웨이보(微博)에선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에 사는 한 20대 청년이 올린 참회의 글이 화제였습니다. 그는 “교차로 건너편에서 한 노인이 쓰러지길래 다른 길로 돌아갔는데, 그 노인이 나의 어머니였더라”면서 “다시는 어려운 노인을 외면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글을 올린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애선 펑츠 피해를 염려해 도움이 필요한 노인을 외면하는 사람들을 위한 보험도 생겼습니다. 알리바바그룹은 2015년 10월부터 화안보험과 제휴해 ‘노인돕기 보험’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3위안(약 510원)을 내고 보험에 가입하면 노인을 돕다 손해배상청구 등의 피해를 볼 경우 2만위안(약 340만원)까지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보험은 출시 일주일만에 6만건 넘게 팔렸다고 합니. 그만큼 펑츠 피해가 많았고 이에 대한 두려움이 컸음을 짐작케 합니다.

뒤늦게 중국 정부도 ‘하오런(好人)법’을 내놓았다. 지난해 10월부터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우려다 뜻하지 않게 피해를 주더라도 민사책임을 지지 않도록 하는 법 조항이 발효되었습니다. 하지만 소송에 휘말리면 그 자체로 정신적ㆍ물질적 피해가 클 수밖에 없고 CCTV 증거나 목격자의 진술 등이 없으면 법률의 구조를 받기가 어렵다는 점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중국 사람들은 주위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했는데, 나중에 예상하지 못한 난감한 상황에 부닥칠까 봐 무관심에 익숙해집니다. 그런데 이런 무관심은 나에게 직접 이해관계가 없는 세상 모든 일에 무관심해지는 단계로 발전합니다.

중국 어머니가 자식에게 인생교훈을 알려주기 위해, 어린이에게 읽히는 <중광현문>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증광현문>에 나오는 많은 글이 중국 초등학교, 중학교 교과서에도 나옵니다. 중국 책 <증광현문>은 이스라엘 <탈무드>처럼 중국에서 어린이 필독서입니다. <증광현문> 구절에 나온 글입니다.  

"무슨 일을 생기더라도 관여하지 말고, 누가 어떤 일을 물어도 모른다고 해라. 나와 관계없는 쓸데없는 일에는 관여하지 말고 집에나 일찍 돌아가라."(见事莫说,问事不知; 閑事休管 ,无事早归).

나와 이해관계가 없는 일에는 절대로 관여하지 말고 무관심 하라는 의미입니다.

이 구절에서 한사휴관(閑事休管)이라는 사자성어의 유래가 재미있습니다. 중국 고대 시기에는 고양이가 없었기 때문에 집에서 키우는 개가 쥐를 잡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한나라(기원전 202년~기원후 220년) 시기 고양이가 인도에서 중국에 전래한 후부터, 비로소 중국에서도 고양이가 쥐를 잡기 시작했답니다.

그래서 집에서 기르던 개가 할 일이 없어졌는데, 빈둥거리던 개가 옛날 버릇대로 쥐를 잡자, 개 주인이 할 일 없는 개가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개를 잡아먹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개처럼 쓸데없이 남의 일에 참견하다 낭패당하지 말고, 할 일이 없으면 집에 돌아가 쉬는 게 낫다는 고사성어인 것이지요.

그래서 중국 사람은 자신과 이해관계가 없는 일에는 철저히 무관심합니다. 남이 잘못되어 어려움에 부닥쳐도 무관심하지만, 남이 잘되어 돈이나 명예를 얻어도 무관심합니다. 중국에는 한국의 '사돈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같은 속담이 없습니다.

나와 이해관계만 없다면 남이 잘되든, 못되든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나와 이해관계가 없는 일에는 아주 작은 관심도 없으므로, 주위에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이 아무리 잘 되어도 내가 괜히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오(好)라는 말을 중국인들이 자주 사용합니다. 이 말은 ‘좋다’라기 보다는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으니 당신이 뭘하든 내 알바가 아니다라는 의미입니다.
'하오(好)'는 '그러든지 말든지'(Whether you do or not. What does it matter? 무슨 상관이야?   I don't care 나는 상관 없다.)입니다. 그러므로 중국 사람들과 대화 할 때 좋다는 말로 하오를 말하면 싫다는 말로 들리게 됩니다.

왜 이런 중국말을 소개하는 가하면 기독교인들 가운데 중국사람들의 펑츠 습관이나 하오라는 말의 의미 같은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듣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바리새인들에게서 이런 펑츠의 습관과 하오의 의미를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이어 잃어버린 돈의 비유를 말씀하시었습니다..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 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James Tissot(French 1836-1902) The Lost
  Drachma(La dradhme perdue),1886-1894

은전 한 닢을 찾은 기쁨 도메니코 페티, <잃어버린 은전 한 닢의 비유>, 1618-22, 패널에 유채, 55x4cm, 드레스덴 국립미술관, 독일.
한 여인이 잃어버린 은전 한 닢을 열심히 찾고 있다. 은전 한 닢은 한 데나리온의 가치가 있는 돈이다. 예수님 시대에는 보통 일꾼의 하루 품삯에 해당한다. 잃어버린 은전은 비통해할 정도로 물질적인 가치가 크지 않지만 여인은 주의 깊게 찾고 있다. 이탈리아의 바로크 화가 도메니코 페티(Domenico Fetti, 1589년경-1623)는 종교적인 이야기를 작은 그림 속에서 탁월한 색채 감각과 분위기로 섬세하면서도 정제된 묘사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페티가 당시 로마에서 활동하던 카라바조와 아담 엘스하이머의 명암법과 섬세한 빛의 효과를 공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페티는 로마에서 태어났지만 주로 이탈리아 북쪽 도시인 만토바에서 페르디난도 곤차가 가문의 궁정화가로 일했고, 베네치아로 이주한 후, 자유로운 화면구성과 빛, 독특하고 화려한 색상을 중심으로 하는 베네치아 화가들의 회화 전통을 따랐다. 또한 그는 초상화가로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지만, 특히 종교적 주제가 녹아 있는 소형 풍속화를 주로 그렸다. 작품 <잃어버린 은전 한 닢의 비유>도 추기경 페르디난도 곤차가의 요청으로 그의 생애 말년에 제작된 것이다. 이때 페티는 기념비적인 그림에서 벗어나, 일상생활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담은 작은 그림을 그렸다. 방 안에는 잃어버린 은전 한 닢을 혼자 찾고 있는 여인이 있다. 부서진 벽에 여기저기 흩어진 물건들로 방 안은 혼란스럽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자는 손에 등불을 든 채, 허리를 깊게 굽히고 은전을 찾고 있다. 왼쪽 아래 쓰러진 의자 위에 은전 아홉 개가 놓여 있다. 화가는 루카 복음에 나오는 열 닢의 은전 가운데 한 닢을 잃었다는 기록을 성실히 따르고 있다. 잃어버린 한 닢은 그녀의 바로 앞바닥에 떨어져 있다. 여자는 금이 간 바닥 사이에 끼어 있는 은전 한 닢을 발견한다. 여자의 시선과 동작은 잃어버린 은전을 발견한 후, 허리를 숙여 주우려는 것이다. 아래에서 등불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고요하면서도 생기가 느껴진다. 잃어버린 것을 찾고자 하는 여자의 강한 욕구와 의지가 있었기에 발견의 기쁨도 그만큼 컸을 것이다. 사실, 잃어버린 은전 한 닢을 물질적 가치로 계산해 본다면 그 가치는 그다지 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잃어버렸던 은전 한 닢을 찾은 여자는 기쁨으로 묘사되고 있다. 은전의 물질적인 가치도 있지만, 감정적인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은전 열 개 중 한 개를 잃어버렸다가 도로 발견했으니 여자는 기쁨이 가득했을 것이다. 아홉 개에서 열 개로 은전의 조화롭고 완전한 통일성을 찾은 그녀는 가까운 친구들과 잔치를 벌일 것이다. 잃어버린 은전 한 닢은 회개한 죄인을 가리킨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며 자비를 베푸신다. 여자가 잃었던 은전 한 닢을 찾은 기쁨으로 잔치를 벌인 것처럼, 하느님도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그 기쁨으로 은총의 잔치를 벌이실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우리 주님의 은총이 넘쳐흘렀습니다.”(1티모 1,13-14) [2016년 9월 11일 연중 제24주일 인천주보 3면, 윤인복 소화 데레사 교수(인천가톨릭대학교 대학원 그리스도교미술학과)] * 그림 파일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은 것입니다. (원본 : http://www.wga.hu/art/f/feti/parable.jpg)


평범한 서민층의 가정주부였으리라 생각되는 이 여인이 잃어버린 은전 “드라크마”는 희랍 동전으로 그 당시 노동자의 하루 임금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원래 이 여인이 소지했던 드라크마는 열 개였는데 그 중 하나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열 개의 은전은 그녀가 결혼할 때 남편으로부터 받은 목걸이거나 머리 장식일 것입니다. 당시 이런 결혼 풍속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드라크마의 가치 보다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 여인은 이 드라크마를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찾느냐가 문제입니다. 누가 훔쳐갔다면 은전 하나만을 가져갈 리가 없으니 분명히 집안 어딘가에 있을 테지만 그것을 발견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 시절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흙 벽돌로 집을 지었는데, 특별히 창문은 없었고 천정 가까운 곳에 벽돌 몇 개를 떼어놓는 구멍이 환기통과 창문 구실을 했습니다. 바닥은 그냥 흙바닥입니다.  집안은 대낮에도 컴컴했습니다. 흙바닥에 떨어진 이 작은 물체를 찾는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우선 어두운 집안을 밝히기 위해 등잔불을 켰습니다. 등잔불이라 하여도 오늘날 촛불만도 못할 밝기 입니다. 그런 후 그때 사용하던 종려나무 가지로 만든 빗자루로 집안 구석구석을 쓸었습니다. 바닥 구석구석에 쌓인 흙먼지를 쓸어냈습니다. 눈으로 찾는다기 보다는 귀를 기울이며 혹 은전 쓸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쓸었습니다. 초조한 마음으로 땀을 흘리며 방안을 쓸던 중 빗자루를 통해 느낌이 와요 와요 오매 좋은 거, 조심스럽게 빗자루를 쓸던 중에 빗자루 끝을 타고 뭔가 닿은 느낌이 손에 전해 왔습니다, 그래서 흙먼지를 뒤져 마침내 잃었던 한 드라크마를 찾았습니다. 얼마나 기쁜 일인지 “찾았다. 드라크마를 찾았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이웃들을 불러 그 기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어쩌면 그 드라크마의 가치 보다 이웃들에게 기쁨을 나누는 값이 더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만일 이 여인이 한 드라크마 은전을 잃어버리고 “하오” 어떻게 이 은전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할 수 없지 내 버려둬 여기 아직도 9개의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오하오(好好) 내 알바 아니다 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옛날 중학교 다닐 때 미제 새 연필을 책상에서 떨어뜨렸는데 이 연필이 마루 틈새로 빠져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당시 미제 연필은 매우 귀할 때입니다. 그냥 버려 둘 수 없었습니다. 방과후 마루 밑 바람구멍을 텅해 기어들어 갔습니다. 머리가 마루 밑바닥에 닿았지만 간신히 기어 들어 갈만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내 책상 아래 밑에서 연필을 찾았습니다. 그 때 기쁨은 너무나 컸습니다. 그것은 내 연필만 아니라 그 밑에서 무수한 연필 지우개 자 칼 각도기 책바침 같은 것들을 잔뜩 주어가지고 나왔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마루 밑으로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집에 와서 어머님에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중학생 교복이 잔뜩 먼지로 더럽혀 졌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날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잃어버렸던 물건들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모두들 기뻐들 하였습니다.  잃었던 물건을 다시 찾았다면 그것이 비록 사소한 것이라도 기쁨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 까요?
10절 말씀에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 사자들 앞에서 기쁨이 되느니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여기서 죄인이라는 사람들은 흔히 말하는 흉악한 죄를 지은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15:1, 2의 말씀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보기에 율법적으로 합당하다고 여길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을 오클로스(οχλος)라고 부르는데 감히 바리새인들의 무리에 들어갈 수 없는 오클로스는 누구인가? 가난한 서민, 율법을 지키지 못할 사람들, 매춘하는 여성, 세리, 과부와 고아, 병자 등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바리새인 사두개인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업신여김 받는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을 보면서 펑츠 외면하고, 하오하오 우리와는 상관없는 그런 사람들이라고 보았습니다. 나와 이해관계가 없는 일에는 절대로 관여하지 말고 무관심하라. 그래서 그들과 가까이 하는 것을 금하고 그들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조차 죄인 취급을 하였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 죄인이라고 무시한 이 사람들을 믿음으로 이끌어 줄 사람도 없고 영적으로 돌보아 줄 사람이 없는 갈 길 잃은 양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이런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비아냥하는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비아냥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이 이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보기에는 죄인이지만 예수님 보기에는 모두 찾아서 구원 할 대상이요 사랑받을 사람들인 것입니다. 

흔히 목사님들이 이 비유로 설교하시기를 세상에 구원받지 못한 세상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하기 위해 열심히 전도하라는 비유말씀으로 전하십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회개와 구원은 하나님을 향한 바른 믿음을 회복하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무엇이 옳은지 어떤 것이 잘못된 것인지 전혀 모르고 있음으로, 갈 바도 모르고 할 바도 모르는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복음의 말씀을 전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생을 살아가도록 하는 일이, 무엇이 문제인가하고 바리세인들에게 대답하신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에 유명한 발명가가 있었습니다.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입니다. 그가 발견한 것 중에 가자 유명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르키메데스의 원리입니다. BC220년  어느 날 목욕탕에 들어갔다가 자기 몸의 부피만큼 물이 흘러 넘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너무 기뻐서 탕 속에서 뛰쳐나오며 '유래카(εὕρηκα) 유래카'하고 외쳤습니다. 이 말은 '나는 찾았다 나는 찾았다라는 뜻입니다. 그때 찾은 것이 바로 “액체나 기체 속에 있는 물체는 그 물체가 차지한 액체나 기체의 부피만큼의 부력을 받는다는 법칙” 아르키메데스의 원리입니다.
비록 드라크마 하나이지만 이 여인은 “유레카 유레카” 찾았다고 기뻐하였습니다.
이 하나가 없다면 나머지 9개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비록 하나를 일어버렸지만 전부를 잃어버린 것 같기에 이 여인은 그 하나를 열심히 찾았고 그래서 열 개를 채움으로 전부를 찾은 것 같음으로 기뻐하고 동네잔치를 열었던 것입니다.

기독교의 믿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가 무엇입니까? 여인은 남편으로 붙 결혼 선물을 받았는데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무슨 선물을 받았습니까? 사도행전 2장 38절에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다(렘프세스데 텐 도레인 투 하기우 프뉴마토스)”고 말씀하였습니다.

어떤여자가 자기 부엌에 들어가 보니, 웬 도둑이 그녀의 주방에서 물건들을 훔쳐서짐을 꾸려 놓고 있었습니다. 도둑을 겁줄만한 무기를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지라, 그녀는 한 손을 들고, "사도행전 제 2장 38절"이라고 말하고 나서 그 성경구절을 암송하였습니다.
그 순간 도둑은 두 손을 반쩍 들고 그 자리에 얼어 붙은듯 꼼짝 못 하였습니다. 그 여자는 911을 불렀는데, 경찰이 와서 도둑이 선 자리에서 여전히 꼼짝도 못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뭐라고 하셨기에 저 사람이 움직이지 못 하는 건가요?" 경찰이 여자에게 물었습니다.
그녀는 그냥 '사도행전 2장 38절'이라고 말하고 성경을 암송했을 뿐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경찰은 낄낄 웃더니 도둑을 데리고 나가서 순찰차에 태웠습니다. "그 여자가 성경을 암송한것이 어째서 당신에게 그렇게 엄청난 겁을 준 거요?" 그들이 물었습니다.
"성경이라고요?" 도둑이 말했습니다, "난 그 여자가 도끼 하나와 38구경 권총 두 자루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줄 알았어요!" 영어로 사도행전을 엑스라고 하는데 이 말은 도끼라는 말과 발음이 비슷하고, 38장은 투써티에잍스라는 말을 38구경 권총으로 들었던 것입니다. 강도는 이 여인의 말을 크게 오해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강도가 오해하게 된 그 배후에 성령의 역사가 있었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Acts 2:38
A woman went into her kitchen to find a burglar loaded down with a bunch of stuff he was stealing from her kitchen. Not having any kind of weapon to scare him off, she raised her hand and said "Acts 2:38," and proceeded to quote scripture.
The burglar froze in place and didn't move. The woman called 911, the police arrived and were amazed to find the burglar still frozen where he stood.
"What did you say to him that kept him from moving?" they asked the woman.
She told them that she had simply said Acts 2:38 and quoted scripture.
The police chuckled and escorted the burglar out to the patrol car. "Why did the woman's quoting scripture scare you so much?" they asked.
"Scripture?" said the burglar, "I thought she said she had an ax and two 38's!")

우리가 믿을 때 우리는 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다.(cf.행8:17, 19:2) 그러면 그 성령을 지금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심령가운데 성령이 게십니까? 글세요. 잘 모르겠는데요. 한번 찾아보십시오. 성령은 아홉 가지 보물이 목걸이처럼 이어져 있습니다. 그 아홉 가지 보물이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 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 아홉 가지 중 잃어버린 것이 몇 개입니까? 어떤 이는 한 개 또 누구는 두 개 아니 아홉 개 모두 잃어버린 분도 있지 않을까요?  우리의 심령은 방입니다. 이 방안에서 일어버렸습니다. 하오하오 내버려 두어 나와 무슨 상관이야! 이렇게 모른척할 것입니까? 아니면 열심히 찾을 것입니까? 이 열심히 찾는 행위가 회개의 행위요 구원받을 행위요 하나님이 기뻐하실 우리의 행위입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이 하나님의 기쁨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우리 주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며 기뻐합니다. 우리를 세며 기뻐하십니다. 우리를 만지며 기뻐하십니다. 기쁨이 넘치면 즐거이 노래를 부릅니다. 그래도 기쁨을 이기 못하면 춤을 춥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춤을 추십니다. 그만큼 우리는 하나님 앞에 너무나 큰 기쁨의 대상입니다.

그렇다면 열심히 잃어버린 성령의 열매를 찾아야 합니다. 사랑을 잃었다면 사랑을 찾아야 합니다. 충성을 잃었다면 충성을 나의 마음 방의 죄의 먼지를 쓸어내어 찾아야 합니다. 절제를 잃었다면 우리 마음 죄의 먼지를 털어내어 찾아야 합니다. 


독일의 무자비한 독재자가 누구입니까? 힛틀러 입니다. 그런데 이 히틀러가 청년시절에는 화가지망생이었습니다. 그의 그림을 보면 매우 감성적이고 조용한 자연이나 한적한 도시풍경을 많이 그렸습니다. 그는 1907년 빈 예술대학을 입학하려고 두 번이나 시험을 보았지만 떨어졌습니다. 그는 매우 가난하여 자기가 그린 그림을 팔려고 하였지만 단 한 점도 팔지를 못했습니다. 절망한 나머지 군대에 입대했습니다. 그리고 세계 1차 대전에 나가 전쟁을 하여 훈장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도 바뀌고 성격도 바뀌고 세계 역사도 바꾸는 독재자가 되었습니다. 만일 그가 계속 화가의 길을 갔었다면 세계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히틀러는 어렸을 적에 교회도 잘 다니고 찬송도 잘 부르고 성경 요절도 절 외웠습니다. 그런 그가 예술대학을 떨어지자, 하오, 그림이 나와 무슨 상관이야, 하고 화가의 길을 포기하였을 뿐 아니라 신앙의 길을 떠남으로 그의 심령 안에 성령의 열매를 모조리 잃어버리니 역사의 악마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잃어버린 성령의 열매를 열심히 찾아야 합니다. 찾지 못하면 사탄 마귀가 우리의 심령을 더욱 어지럽혀 놓을 것입니다. 우리의 잃어버린 성령의 열매가 심령의 방 어느 구석에 있을 것입니다. 죄의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순종의 비로 쓸고 말씀의 비로 쓸고 기도의 비로 쓸어 찾아내어 온전한 성령이 내 심령 속에 게시도록 해야 합니다. 

어저께 중동교회 서종표목사님이 펴낸 “추명순전도사”란 책 출판기념예배에 참석하였었습니다. 당시 중동교회 고 김용은 목사님이 52세되신 추명순전도사를 고군산섬들의 전도사로 파송하였습니다. 그래서 고군산 섬을 비롯해 말도섬까지 섬마다 전도하여 교회들을 세웠습니다. 여인의 몸으로 바닷바람과 싸우며 무엇보다 섬사람들의 미신신앙과 싸우며 마침내 무속을 몰아내고 교회들을 세운 것입니다. 말도에 사는 사람들은 이제 교회는 안 나와도 고기 잡으러 가기 전에 추명순 전도사의 기도를 받고 갔다고 합니다. 추도사님을 대신해서 이 섬으로 오고자하는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이 없어 73세 될 때까지 섬 교회들을 지켰다고 합니다. 이제 추전도사님을 천국에 가시고 고인의 기념관을 말도에 세우고 있습니다. 사진을 보니 키도 작으시고 몸도 매 마른 한 섬 여인의 모습이지만 그분의 안에 성령께서 충만하시니 고군산 섬마다 교회들을 개척하시었던 것입니다. 얾나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인가 미루어 짐작하게 됩니다.  

​우리가 진정 성령을 선물로 받았다면 이 성령을 잃어버리지 말고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중 하나도 잃어버리지 말고 잘 간직하여 하나님 기뻐하시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오하오가 아닙니다. 중국인들은 그런 말을 하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으로 성령의 사람 되어서 세상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우리의 인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의 모든 가족들과 하는 일들 위에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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