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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20년 12월중 설교

jbhimr by  조회 수:41 2021.02.07 15:11

2020년 12월6일 주일아침 예배 설교  고후 3:12-18  하나님 앞에서 민낯


신종 코로나19바이러스 감염증으로 마스크 착용은 필수가 되고 있습니다. 마스크는 외부 공기나 비말을 차단하고 걸러주는 장치로 위생과 건강에 중요한 발명품입니다. 특히나 지금처럼 바이러스가 확산될 때 꼭 필요한 의료 장비 중에 하나입니다. 하지만 100년 전만해도 마스크 없이 의사들이 수술을 하고 온갖 전염병이 유행하여도 마스크를 전혀 몰랐습니다.
크리스토스 린터리스 세인트앤드루스 대학 교수는 의료전문 인류학자입니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예방용 마스크를 대거 보급해 쓰게 한 것은 110년 전 청나라 때 만주 지역에서였다고 합니다. 1910년 가을 만주에는 마르모트 사냥꾼들을 통해서 시작된 폐렴 흑사병이 들불처럼 번져서 6만 명이상이 사망하였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그 유행병이 돌아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서양의학을 거부하던 청나라 정부는 다급하게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한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의사 우리엔테(우롄더 伍連德)를 초빙하여 치료를 의뢰했습니다.

현장에 도착한 우리엔테는 폐렴은 쥐가 전염하는 게 아니라 공기 전염이라고 주지시키고 수술용 마스크를 모든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청소원에게까지 착용토록 명령했습니다. 또 환자와 그 보호자는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보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현장의 일본인과 중국인 의사들은 그의 조치에 회의적이었지만, 마스크를 쓰지 않고 환자를 돌보던 프랑스 의사가 죽으면서 마스크의 위력을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발병하고 24시간 안에 모두 죽어 나가는 이 전염병은 5개월 만에 수그러 들었습니다. 마스크가 더 큰 재앙을 막은 것으로 알려졌고, 그 이후 전염병이 창궐하는 세계 곳곳에서 그의 이름을 딴 우씨(俉氏)마스크 착용이 일반화되었습니다.
의사 우리엔테가 개발한 최초의 방역 마스크를 우리나라에서 사용되기는 ‘조선일보’에 따르면 1921년부터 라고 합니다.
    
    〈페낭에 남아있는 우리엔테 의사의 동상 - 출처: '더스타'〉

〈우리엔테 의사가 개발한 최초의 방역 마스크 - 출처: 넥스트샤크〉

마스크(mask)의 어원은 라틴어 마스카, Masca인데요, 요즘 코로나19바이러스 감염 예방을 위한 의료용 마스크를 연상하지만, 본래는 연극 배우들이 얼굴을 가리고 화려하게 보이기 위해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공연에서 배우가 쓰는 가면을 지칭하는 이탈리아어의 마스케라타(mascherata·가면무도회)로 스페인어는 마스카라르(mascarar·얼굴을 칠하다), 속눈썹을 돋보이게 하는 화장인 마스카라도 이 단어에서 파생되었다고 합니다.
마스크종류는 그 사용용도에 따라 여러 가지입니다.
방한 마스크 : 추위를 피하기 위한 마스크로 면 소재로 제작하며  식약처 미허가 제품이며 미세먼지 차단 효과는 거의 없습니다.
황사 마스크 : 황사와 미세먼지가 호흡기로 유입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마스크로 부직포로 제작되며 특수 필터가 적용되어 있고 식약처 허가 제품입니다.
보건용 마스크 : 호흡기 질병의 감염과 매연 등으로부터 호흡기를 보호하며 천이나 부직포로 제작되고 식약처 허가 제품이며 미세먼지 차단 효과는 미미합니다.
방역용 마스크 : 전염병 질병의 감염으로부터 호흡기를 보호하며 식약처 하가 제품으로 미세먼지 차단 효과도 있습니다.
수술용 마스크 : 의료 기관에서 진료나 수술 시에 감염을 예방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부직포로 제작되며 미세먼지 차단 효과는 거의 없습니다.
산업용(방진) 마스크 : 각종 산업현장에서 미세분진으로부터 호흡기를 보호해 주며, 부직포 소재로 제작, 특수필터가 적용되어 미세먼지 차단 효과가 있으며 식약처 허가 제품입니다.
그밖에 범인용 마스크, 군사용 마스크, 얼굴 커버용 마스크, 미용효과 마스크, 연극용 마스크  등 마스크 그 쓰임세가 아주 다양합니다. 

13대 대선이 임박한 1987년 12월15일  오후 2시 김포공황에 KAL858 폭파 사건의 주범으로 김현희(일본이름 하치야 마유미)가 흰색 마스크를 쓰고 안기부 호송요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게 남아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승무원 20명과 탑승객 95명의 생사여부가 전혀 알려지지 아니하였고 기체의 부속품하나 발견되지 않은 미스테리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최근에 코로나19마스크가 세계적으로 유행하므로 많은 기업들이 홍보용으로 마스크를 제작하여 판매 내지 무료로 배포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샤넬과 디오르가 마스크 제조에 나섰는데 한정판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소장용으로 구입하기 위해 줄을 서는 모습도 있습니다. 프랑스의 한 유명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필터가 장착된 마스크는 70만 원이 넘는 가격에 팔리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마스크)
이스라엘의 보석회사 이벨Yvel은 보석과 금으로 장식한 마스크를 제작하여 150만달러(약18억원)로 어느 중국인에게 판매하였습니다. 18캐럴 백금 3천6백개 백색과 흑색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N99 필터 마스크입니다. 그 무계는 270g으로 수술용 머스크의 약 100배 무겁습니다.
어떻든 코로나19바이러스가 세계적으로 대 유행하고 있는 이 시대에 가장 확실한 예방법은 바로 마스크를 쓰는 것이라고 합니다. 세계보건기구에서도 처음에는 회의적이었지만 지금은 열심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남 말하기 좋아하는 진중권씨는  "마스크 착용, 감염방지 효과 입증 안돼…사회학적 현상 가까워" ( 2020년 3월 5일 아시아경제 임주형 인턴기자)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마스크 품귀 현상에 대해 "사회학적 현상"이라며 "마스크 착용이 감염방지에 효과가 있다는 과학적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혹 지금도 그는 마스크를 사용하지 않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코로나19바이러스를 예방하는 완전한 방법은 아닐지라도 마스크를 쓰고 거리두기를 통해 90%는 예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회가 예방당국의 방침을 잘 지키는 것도 믿음의 한 역사입니다.


수원중앙침례교회 교인 중에 코로나19에 확진된 교인 3명이 발생하였고 그들이 1-3회에 걸처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이 코로나에 걸린 줄도 모르고 있었지만 모두 예배 당시 마스크를 착용했고, 같은 예배에 참석했던 다른 교인들도 모두 마스크를 썼던 것으로 역학조사 과정에서 확인하였습니다. 해당 교회는 층별로 마스크 착용 관리 담당자를 둬 모든 교인이 마스크를 제대로 착용하도록 관리해 온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교회 건물에 입장할 수 없게 했고, 마스크가 없는 교인들에게는 별도 지급까지 하였습니다. 이 같은 조처로 교인 700여명에 대한 전수 진단검사에서 추가 감염자는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얼굴에 쓰는 마스크를 말하지만, 원래 인간은 각종 마스크를 마음에 쓰고 살고 있습니다. 인간을 영어로 person이라고 하는 데, 이 말은 헬라어 가면이란 의미인 Περσόνα(persona)라는 말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고대 헬라에서 가면을 쓰고 배우들이 연극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영어로 본래 인간은 가면 쓴 존재라는 의미로 person이라고 말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인생극장에서 주연배우로 살아가는 것이 그의 인생이라고 하겠습니다. 인간이 쓴 가면도 여러 가지입니다. 가정에서는 아버지 가면을 쓰고, 부모 앞에서는 아들이란 가면을 쓰고, 직장에서는 말단 직원이란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중국의 고대 극중에 3대 연극이 있는데 베이징(北京)의 경극(京剧), 쑤저우(宿州)의 곤극(昆剧) 그리고 쓰촨(四川)의 천극(川剧)이 있습니다. 아직 저는 본적은 없습니다만, 이 쓰찬 지방의 천극은 다른 전통극에 비해 연출기법이 다양하고 생활의 정취가 풍부하게 묻어나며, 춤이나 노래보다 연기에 더 중심을 둔다고 합니다. 천극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 변검(變脸)이라고 하는데 얼굴에 쓴 가면이 순식간에 바꿔집니다. 연극 중에 가면이 바꿔지면서 인물의 특성에 따라 연기하고 표현하는 것이 중요한 공연 예술입니다. 배우가 몸과 고개를 돌릴 때마다 순간순간 각가지 서로 다른 표정이 나타납니다. 불안, 분노, 희열 등 각양각색의 얼굴이 순식간에 바뀌어 보는 이의 입에서 감탄이 절로 흘러나온다고 합니다.

사람이 인생을 지혜롭게 사는 방법도 어떤 가면을 쓰고 살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성공과 실패가 어떤 가면을 쓰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중국 인사관리 전문가인 무거(木格)라는 분이 “왜 가면을 쓴 사람이 인정받을까?(류방승역 청림출판사 2014)”란 책을 발표하였는데, 이 책에서 말하기를, 대부분 사람들은 가면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하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냉혹한 정글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사람들은 여러 가지 편법이나 권모술수를 쓰고 다른 사람을 딛고 올라서려고 하지만, 그런 모습은 결국 자신을 실패인생으로 망해가는 일이고, 오히려 자기의 위상에 걸 맞는 그리고 그때그때 닥치게 되는 문제 앞에 적절한 가면을 쓰므로 위기와 문제를 긍정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페르소나 이론을 주창한 칼 융의 말을 빌려 “사람이 가면을 쓰는 이유는 남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고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으며 심지어 싫어하는 사람과도 화목하게 지내 개인의 목적을 실현하려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어차피 인생은 자기 나름대로 가면을 쓰고 살고 있음으로 다른 사람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해 스마일 가면을 쓰고 친절과 평화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이 이렇게 스마일가면을 쓰고 친절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느냐 하면 그러지 않음으로 세상이 죄와 어둠의 혼란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가면 쓴 존재로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간이 가면을 쓰게 된 맨 처음은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사탄의 유혹에 빠짐으로 하나님 앞에 죄라는 가면을 쓰기 시작할 때부터라고 하겠습니다. 그 후 사람이 가면 쓴 존재가 된 것은 죄악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는 죄적인 몸짓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가면을 쓸 필요가 없는데, 죄 가운데 사는 죄인의 모습이기 때문에 그 죄를 가리기 위해 본능적으로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죄적인 존재요 가면 쓴 존재라는 것을 베드로에게서 보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오늘밤에 너희 모두가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실 때, 베드로는 모두 주님을 버릴지라도 자기만은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말하였던(마26:33) 제자였습니다. 이 때에 베드로는 충실한 제자의 가면을 썼었습니다. 그런데 몇 시간 후 예수님이 가야바 대제사장 뜰에서 재판을 받게 될 때에는, 베드로는 예수님을 전혀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배신의 가면을 썼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朝夕變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베드로의 가면이 쓰찬성 변검처럼 순식간에 바뀔 수 있는 것은 놀랄 일입니다만, 그러나 놀랄일도 아닌 것은 본래 인간의 본능적 죄적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어찌 베드로 뿐 이겠습니까? 이 베드로의 가면이 세상 모든 사람들도 쓰고 있는 가면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정치권에서의 가면 쓴 수많은 정치인들을 보지만 교회 안에서도 이런 가면 쓴 베드로를 많이 보게 됩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그러나 탓 할일이 아닌 것은, 바울선생님도 말씀하시기를, 롬7:19에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않는바 악을 행하려한다”고 탄식하였습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탈라이포로스)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건저내랴?(티스 메 ㅎ뤼세타이? 롬7:24)”라고 실존적인 질문을 하였습니다.

어쩌면 어떤 기독교인들은 믿음이란 가면을 쓰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 받았다고 하지만 성령도 성령이란 가면을 쓰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처럼 보이려 합니다. 성령의 열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떤 기독교인들은 이 성령의 열매도 성령 받은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가면처럼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사랑의 가면을 쓰고 어떤 때는 화평의 가면을 쓰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쓰찬성 변검처럼 순식간에 미움의 얼굴로 바뀌고, 교만의 얼굴로 바뀌어 지기도 합니다. 

그것은 믿을 때에 처음부터 믿음의 원리를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아주 기초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얼굴에서 모든 가면을 벗고(판테스 아나케칼륌메노 프로소포) 주의 영광을 보라’고 오늘 봉독한 고후 3:18에서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이란 가면을 쓰고 자신들이 율법을 잘 지킨다고 착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많은 가면을 쓴 채 하나님을 만나려 하지만 모두 거짓된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인생이 속일 수 없습니다. 로마서 8:27에 하나님을 “마음을 살피시는 이(감찰하시는 이, 호 에라우논-에라우나오-타스 카르디아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눈을 피할 것입니까?

일본 도쿄에 나카무라 유키오라는 한 괴팍하고 약삭빠른 도둑이 있었습니다. 이 도둑은 워낙 행동이 민첩하고 교활해 몇 년 동안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변장술로 사람들을 속였습니다. 그런데 이 도둑에게 한가지 이상한 습관이 있었습니다. 도둑질을 하다가 훔쳐 갈만한 물건이 없으면 집에 있는 간장과 된장 통을 집어 들어 마당에 쏟아 부으며 심통을 부렸습니다. 그런데 나카무라가 한 평범한 경찰에 체포 되었습니다. 그 경찰은 범인을 체포한 비결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에게서 풍겨나는 역한 간장냄새가 단서였다. 내 코가 그를 붙잡았다" 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인간이 쓰고 있는 그 가면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때론 사람 잘 못 보았다고 원망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눈을 탓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마음을 속속들이 꾀 뚫어 살피십니다. 이 말씀이 바로 ‘살피다, 감찰하다 에라우나오’의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서 풍기는 죄악의 냄새를 그의 마음 속 깊은 곳까지 살피시고 맡고 계십니다. 지금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의 냄새 맡으신다면 무슨 냄새를 맡으실까요? 어쩌면 우리의 저 깊은 곳 마음속에서 썩어가고 있는 죄의 비린내를 맡으시지는 않으시겠죠?
 
명심보감’에
“種瓜得瓜(종과득과)요 種豆得豆(종두득두)니 天網(천망)이 恢恢(회회)하여 疎而不漏(소이블루)”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이를 심으면 오이를 얻고, 콩을 심으면 콩을 얻는다. 하늘의 그물은 넓고 넓어서 구멍이 성글어 보이지만 결코 새는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성경에도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둔다(갈6:7)’고 말씀하였습니다.
애초에 인간은 원죄로부터 태어나 죄를 심으면서 인생에서 죄를 거두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죄의 씨앗을 버리고, 의의 씨앗을 심는 사람들입니다(호10:12).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설 때에 가면을 벋어야 하나님께서 내안에 죄의 씨앗을 뽑아내 주시고 의의 씨를 심어 주십니다. 그런데 그 가면을 벗지 않으니 백년을 교회 나온들 여전히 그의 인생 밭에는 죄의 씨가 자라고 있고, 그 죄의 열매를 가리기 위해서 자기는 의인인냥 믿음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 가면을 벗어야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데 벗지 않으니 여전히 인생의 곤고와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의 수건을 벗게 하셨습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죄의 가면을 쓰고 살아 괴롭고 고달픈 인생길을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 죄의 가면이 벗겨지니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되고, 인생의 소망이 활짝 피어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고발하려 다메섹으로 가던 율법사 사울이 길에서 빛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잠시 눈이 멀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계시로 다메섹 아나니아로 부터 눈을 뜨게 되니 눈에서 비늘이 벗겨졌다고 하였습니다(행9:18). 백내장 수술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사울의 마음의 가면이 벗겨져 바울이 되는 순간입니다. 
어떤 영국 사람이 아프리카에서 시계방을 차렸답니다. 한 흑인이 큰 괘종시계를 보고 너무 신기해 하며 사갔습니다. 얼마 후 흑인이 시계 바늘을 갖고 와 시계방 주인에게 "바늘이 고장나서 시계가 가지 않소 고쳐 주시오" 라고 했습니다. 주인의 말입니다. "바늘이 고장 난 것이 아니라 시계 속이 고장 났으니 시계를 가져와야 고칠 수 있습니다."
내게서 보이는 잘못됨은 겉의 고장이 아니라 마음속의 고장입니다. 눈이 잘못 보는 것은 마음이 잘못 되어 있음입니다. 바울의 눈의 비늘은 바로 마음의 가면이 벗겨져 새로운 사람으로 탈바꿈하였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보라 새것이 되었다’고 환호성을 질렀던 것입니다(고후5:17).

얼마 전에 제 아버님(전용섭구세군사령관역임)이 1934년9월 25일 구세군사관학교(신학교) 입학하시던 때 기념사진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어디 있었는지 찾지 못하였는데 우연히 책장에 감춰져 있었던 것을 발견하여 보게 되었습니다. 작은 낡은 사진입니다. 그 사진에는 외할머니와 외삼촌 그리고 믿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신 부모님을 찍은 사진입니다. 제 아버님은 그 2년전 만 해도 강력하게 기독교를 반대하고 교회나가시는 어머님을 핍박하던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우연히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그 좋아하던 술을 끊고 열심히 교회를 다니시고 마침내 신학교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죄의 가면을 벗으니 아버님은 목사로 거듭나시어 목회생활 44년을 충성하시다가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시었습니다.

중국의 무거선생이 성공하기 위해서 적절한 가면을 쓸 줄 알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아니요, 우리 기독교인은 예수님을 믿으니 하나님 앞에서 가면을 벗고 예수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과 겸손과 기쁨을 가지게 되는, person이 아닌, 본래의 사람(The Adam)의 모습인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뀐 내 얼굴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친절한 가면을 쓰고 사람을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가면을 벗으니 예수님 닮은 참 사람(The Adam)으로 살게되기 때문에 자연히 친절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랑의 가면을 쓰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닮은 참삶이 되므로 사랑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동안 어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다고 하면서 친절의 가면을 쓰고 사람을 대하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려 버린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한 그런 교인들과 목사들이 있습니다. 참 사람은 민낯의 사람입니다. 민낯이 무엇입니까? 얼굴에  그 어떤 화장도 하지 않은 보디 얼굴 모습을 말합니다. 그 어떤 가면도 쓰지 않았고 그 무슨 가식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 어떤 가면도 벗어 버리고 가식도 던저 버리고 그야말로 하나님 앞에 민낯이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가면을 벗은 민낯의 얼굴이 되어야 성령의 열매를 보여 줄 수 있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코로나19바이러스가 유행하던 초기에 마스크를 시중에서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인천 남동구 서창동에 있는 '백송교회'가 있습니다. 정부의 공적 마스크 공급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마스크 구매에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 백송교회 교인들이 직접 필터를 장착한 수제 마스크를 만들어 무료로 보급하였습니다. 2020. 3.13.일 부터 지금까지 만든 수제 마스크가 수천 장에 이릅니다.  다양한 색상으로 어른뿐만 아니라 어린이용도 제작되었습니다.  서창동 주민 사이에서 교회에서 만든 이 수제 마스크 쓰지 않은 사람이 한사람도 없을 전도입니다.  '사랑의 수제 마스크'를 나눠준다는 플래카드가 교회 앞에 붙자 주민들은 줄을 서며 받아갔고 이내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졌습니다. 이 교회 이순희 목사님은 "마스크 확보 전쟁 속에서 어르신들이 마스크를 사기 위해 긴 줄을 서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며 "부족하지만, 우리가 만든 면 마스크가 코로나 19 극복을 위해 작은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하였습니다. 백송교회는 코로나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재봉틀을 계속 돌릴 계획이라고 말합니다. 매주 1천장 이상 만들어진 수제 마스크는 월·목요일 오전 10시 30분부터 지역 주민 등에게 무료로 배급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인들입니다. 이분들은 마스크를 만들고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마음에 마스크를 벗어버리고 오직 민낯으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 라온코이노니아는 가면 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민낯의 믿음으로 오직 그리스도만 나타내는 신앙공동체입니다. 이제 2020년도 20일 조금 더 남아있는 이 때에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오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진정한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020년 12월 13일 주일아치 예배  시 146:1-10 我生存時 必頌揚主


시편 146편은 시편 전체의 결론으로 볼 수 있는 마지막 단락(146~150편) 중 첫 번째 시이며, 이 단락의 시는 모두 '할렐루야'로 시작하고 '할렐루야'로 끝나는 찬양시 입니다. 이 시편은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이 유대인들을 돌려보내며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라고 하였다가 중도에 이웃나라들의 반발로 인해 중단을 한 정황 속에서 기록되었습니다. 이 일로 유대 백성들은 낙심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맞서 싸울 수 없던 그들은 두려움 가운데 성전을 재건하고자하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시인이 백성들에게 외쳤습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 그들은 다 소멸할 존재일 뿐이고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며 그가 우리의 소망을 이루어 주실 것이다”라고 찬양을 하나님께 올립니다. 당시 학개 선지자는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격려에 힘입어 마침내 586년 이스라엘이 망한지 70년만인 516년 예루살렘 성전이 완공되었습니다. 이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감격은 엄청났을 것입니다. 그들은 도처에서 할렐루야를 외쳤습니다.

안톤 브루크너(Anton Bruckner, 1824~1896)        

 

 오스트리아 안톤 브루크너의 초상이 새겨진 1,000실링 지폐


오스트리아의 3번째로 큰 도시로 린츠시가 있습니다. 이 시에 있는 성당의 프란츠-요젭 루디기어 주교는 새로운 대성전인 ‘성모 마리아 대성당(Mariä-Empfängnis-Dom)’을 세우려고  1855년부터 계획하고 준비하여 드디어 기공식을 화려하게 집행하려합니다. 그 건립 기공식을 축하하는 칸타타를 젊은 작곡가 안톤 브루크너(Anton Bruckner, 1824~1896)에게 부탁합니다. 22살 브루크너는 신학자인 막시밀리안 파메스베르거의 글에 음악을 붙여 칸타타 〈주님을 찬양하라〉(WAV 16)를 작곡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1862년 5월1일 착공식에 초연을 하였습니다. 그 이후 1924년에야 이 성당은 완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62년에 걸쳐 건축한 이 성당은 2만석 규모를 갖춘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큰 성당이 되었습니다. 이 성당은 프랑스 고딕 양식으로 아름다운 스테인글라스가 유명합니다


이 칸타타는 관악앙상블과 합창의 장엄한 외침으로 ‘주님을 찬양하라’(Preiset den Herrn)라는 가사로 시작합니다. 옥타브를 도약하는 인상적인 선율이 점차 한 계단씩 올라가면서 분위기를 고조시킵니다. 이러한 모습은 헨델의 〈메시아〉 중 ‘알렐루야’ 합창을 연상케 하지만 이 곡의 오프닝 합창(Opening choir) ‘주님을 찬양하라’는 오히려 헨델보다 더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모차르트의 Laudate Dominum은 조용한 멜로디 가운데 흐르는 찬양으로 감동을 주지만, 이 합창곡을 듣고 있으면 저 높으신 하나님을 만백성이 찬양하는 엄청난 감동과 희열을 느끼게 됩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는 내내 이어폰을 귀에 꽂고 계속 듣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말씀주시는 감격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조형미술을 하는 권길중 박사라는 분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며 작품 활동에 몰두하면서 그의 탁월한 능력이 인정을 받아 세계 100대 조형건축가로 선정되는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이제 돈도 벌만큼 벌었고 명예도 얻은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위치에 섰을 때 그만 불행하게도 식도암이라는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점차 음식을 제대로 섭취할 수 없다보니 자리에서도 일어나지를 못할 정도로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갔습니다. 겨우 코로 호스를 끼워 미음을 공급받으며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덧 의사들도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손을 들었습니다. 가족들도 장례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죽음의 손아귀가 계속 자기 목을 바짝 바짝 조여 매는 것을 느끼면서 그는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한 생을 살면서 하나님을 위해 산 것이 무엇인가? 내가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솔직히 나의 예술과 명예를 위해 산 것밖에 없고, 신앙생활이라고는 고작 주일에 교회에 나가는 정도였으니,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뭐라고 답해야 하지?' 이렇게 고민에 빠져있을 때, 어느 날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연변 과학기술대학의 총장인 김진경 목사가 미국에 와서 설한 설교 테이프를 가지고 와서 한번 들어보지 않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병상에 누워 이 테이프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삶이 무엇인지 압니까? 복음을 모르는 사람에게 복음을 음으로 양으로, 직접 간접으로 전하는 것을 구심점에 두고 인생을 설계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만약에 여러분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복음을 위해 살고 싶다면, 연변과학기술대학으로 오십시오. 중국의 젊은이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장래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은 한 알의 썩는 밀 알이 될 수 있습니다."

연변과학기술대학

이런 내용의 도전과 초청의 설교였습니다. 그는 이 설교를 들으며 가슴을 후벼내는 듯한 아픔을 느꼈습니다. '하나님, 제가 진작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나 지금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병든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차갑고 메말랐던 손이 갑자기 따뜻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무언가 먹고 싶은 생각이 자꾸 들었습니다. 그는 가족들에게 자신을 앉혀달라고 한 후 몸에 달린 호스를 빼버리고 정신없이 미음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는 의사들도 깜짝 놀랄 정도로 몸이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의사들도 이구동성으로 어떻게 이런 기적이 일어나는지 연구대상이라고 놀라워했습니다. 어느 정도 거동이 가능해지자 가방을 싸들고 부인과 함께 연변으로 갔습니다. 그는 연변 과학기술대학의 건축과 교수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한 그에게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날마다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 하나님을 위해 남은 생을 봉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외해 살면 하나님도 그 인생을 책임져주십니다. 그리고 정말 행복한 삶이 무엇인가 깨닫게 됩니다. (**권길중 박사: 삶의 기적적인 이야기. 작성자바다 해|작성시간12.05.15)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살아갑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공장에 기계가 돌아갑니다. 공장의 기계는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존재합니다. 만일 기계가 고장이 나면 곧 관리자는 고장 난 기계를 고쳐 다시 잘 돌아가게 해 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행복하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도록 지켜주시고 인도하십니다. 우리 인생이 고장 나면 하나님이 고쳐 주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합니까? 무엇을 하던지 어디에 있던지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한양대학교 음대를 졸업하고 이태리 베르디 음악원을 졸업한 테너 배재철(裵宰徹, 1969년 - , 대구광역시)씨는 유럽에서 오페라 가수로 활동하던 성악계 기대주였습니다.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로 부터 극찬을 받았습니다. 2003년 영국 신문 ‘더 타임스’ 에서 ‘100년에 한 번 나올 만한 목소리’라는 극찬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독일 사르브르켄 자를란트Saarland 주립극장에 주역가수로 발탁된 2005년 비극이 찾아왔습니다. 갑상선암을 선고받은 것입니다. 갑상선암 적출 수술을 받았는데 암세포가 넓게 펴져있어 결국 성대신경까지 절단해야 했습니다. 그의 테너 가수로서의 화려한 앞날은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목소리를 잃은 것입니다. 식구들의 걱정과 근심이 컸지만 감사한 것은 그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오히려 성대는 잃었지만 그동안 등한히 하였던 신앙을 찾았습니다. 그는 기도하던 중 은혜를 체험하였습니다. 그는 2005년 갑상선 암과 횡경막 신경을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로 오른 쪽 폐의 기능이 사라졌습니다.  2006년 4월 25일 교토에서 세계적인 성대회복 수술 전문의사인 잇시키 노부히코 교수로부터 수술을 받고 2008년 12월 무대에 복귀했습니다.

테너 배재철

12월 도쿄에서 재기 콘서트를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중요한 무대로 부르셨습니다. 전도 목적으로 열린 ‘요코하마 러브 소나타’ 집회였습니다. 6천명이 참석한 무대에 섰을 때 그는 전율을 느끼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집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간절히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가 부른 곡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와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이었습니다. 그는 찬양을 하면서 스스로 ‘장하다!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노래할 수 있다니 힘을 내자!’ 라며 목소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배재철씨는 말합니다.
“크리스천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께 가야 한다는 인생의 방향이 정해져 있습니다. 쓰러지고 넘어지고 진흙탕에 빠졌다가도, 다시 나와서 그 길을 가는 것이 기독교인의 인생입니다. 굴곡진 인생이 신앙인에게 힘들 수 있지만, 또 그것을 보고 힘을 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 나도 할 수 있어’, ‘힘들다고 포기하지 말자’라고. 가장 힘들 때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와 주셔서, 소망을 품을 수 있었고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늘 고백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 예전의 모습은 늘 제가 주인이었어요. 그러나 이제 제가 주인 됨을 내려놓고 주님의 종으로서 살겠습니다.’ 이것이 저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통해 나의 목소리를 바꾸신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이전까지는 세상에서 유명해지는 것이 목표였고 열심히 했기에 재능을 인정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목소리를 잃은 후 목소리는 내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어디든, 어느 무대에서든 설 수 있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다시 노래할 이유를 찾은 것입니다. 평생에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 것입니다. 목소리가 언제 완전히 회복될지 모르지만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는 명성과 찬사로 인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내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나님이 주신 평안으로 인한 것입니다.”

2014년 12월 31일 배재철씨를 모델로 한 영화 “더 테너: 리리코 스핀토》가 개봉되었습니다.


본문 2절“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我生存之時 必頌揚主 歌頌我上帝 支於終身)” 이미 말씀드렸듯이 우리 인생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며, 우리 인생의 방향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일본역사에 유명한 세 사람의 영웅이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이 울지 않는 새(두견새)에 대한 질문에 각각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鳴かぬなら 殺してしまえ ほととぎす(울지 않으면 죽여버릴 터이니 두견새야) -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년 6월 23일 - 1582년 6월 21일)
•鳴かぬなら 鳴かせてみせよう ほととぎす(울지 않으면 울려 보이마 두견새야) - 토요도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
 •鳴かぬなら 鳴くまで待とう ほととぎす(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리마 두견새야) -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幕府 1603~1867]
이 이야긴 일본의 세 영웅의 성격을 묘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혈질이고 성질이 급한 노부나가는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죽여 버리고, 꾀가 많은 히데요시는 새를 어떻게든 울게 만들려 하며, 느긋하고 신중한 이에야스는 새가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울지 않는 새를 품에 안고 사랑을 합니다. 왜냐면 울지 않는 새는 병이든 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 그 어느 날이 있다면, 그 날은 건강하게 사는 날이 아닙니다. 울지 않는 새는 병든 새인 것처럼 찬양 없는 인생은 병든 인생입니다. 우리가 건강하다는 증거는 하나님을 찬양 드리는 데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찬양하는 날은 주께서 인도하시는 날인데 찬양이 없다면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았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1절과 2절에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구절이 세 번 나옵니다. 시인은 삼중적으로 찬양을 강조합니다. 자기의 겉몸이 찬양하고, 속마음이 찬양하고 더 깊은 나의 영이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안톤 부르크너의 ‘주님을 찬양하라’(Preiset den Herrn)에서 첫 번 나오는 가사가 “프레셑 덴 헤름”이 세 번 웅장하게 반복되어 나옵니다. 나의 몸과 마음과 영이 함께 하나님을 찬양할때에 하나님으;l 영광이 나타나게 됩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찬송에서 마지막으로 강조하여 찬송하는 가사는 3절 마지막 귀절이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 인도 하셨네(This my song through endless ages: Jesus led me all the way.)”라고 하였습니다. 영영 부를 이란 끝없이 세상 끝날 까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를 끝날 까지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찬송 중에 계시기 때문입니다(시22:3 아타 카도쉬 요세브 테힐로드).

그러므로 언제나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그 입에서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미소리가 넘쳐흐르게 됩니다.
그래서 3절에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라고 노래합니다, 지금 왜 나라가 뒤숭숭하고 정치계가 시끄럽게 돌아가고 있습니까? 사람을 의지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는 민주당을 의지하고, 누구는 국민의 힘 야당을 의지하고, 누구는 태극기 휘두르는 사람들을 의지하려 합니다. 국민들이 의지할 사람은 권력을 가지고 있어야하기 때문에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분쟁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ㅎ산 권력이 있다 해도, 4절에 ‘흙으로 돌아가 소멸되는‘ 인간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특히 어렵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생각해 보세요, 누굴 의지해야 합니까? 흙으로 돌아갈 사람입니까? 아니면 영원히 우릴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할 것입니까?


 
영국 런던 케이 미술관에 프레드릭 왓츠 (G. Frederic Watts)의 명화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작품의 이름은 희망(Hope)입니다. 이 그림을 보면 둥그런 지구 위에 약하게 보이는 소녀가 남루한 옷을 입고 앉아 있습니다. 얼굴을 자세히 보니 눈을 수건으로 싸매고 있는 소경입니다. 그리고 소녀의 손에는 낡은 하프가 들려져 있는데 자세히 보면 그 하프의 줄도 소년의 머리털입니다. 그런데 그 여섯 줄은 끊어지고 단 한 줄만 남아 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소녀는 남은 한 줄에 희망을 가지고 하프를 연주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줄 밖에 없으니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소녀의 뒤에 보일 듯 말 듯 작은 별 하나가 희미하게 비취고 있는데 희망의 빛을 뜻하는 것입니다. 찾아보세요, 별이 보입니까? 10년 전에 여의도 국회에 가서 몇 번에 국회의원 신우회원들의 예배에 설교할 때에가 있었습니다. 한 번은 이 왓츠의 그림을 반엽서 크기카드로 만들어 나누어 주며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우리나라에 희망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란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놓친 장면이 있었습니다. 이 그림의 위쪽에 한 별이 아주 희미한 빛을 내고 있는데 대개 알려진 그림에는 이 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별을 증거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이 그림을 크게 확대하여 자세히 관찰하니 거기에 별이 있었습니다. 왓츠가 이 그림의 제목을 희망이라고 한 것은, 우리에게 바로 이 별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였던 것입니다.  이 눈먼 소녀가 한줄 비파로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어떤 고난과 역경가운데서도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릴 지켜주고 계신다는 믿음 이 있기 때문입니다. 암담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불안해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현실을 직시하고 역사를 뚫어 보면 거기에 분명히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여전히 하나님은 여기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제 책상 앞에 작은 쪽지가 붙어 있습니다. 거기에 이런 말이 적혀 있습니다. 主果在此 而我不知(주님이 여기 계시는 데 나는 지금까지 알지 못 하였다. 창28:10“”란 야곱이 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여기 계시는데 눈에 안 보인다고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닙니까? 믿음은 하나님이 여기계심을 보게 하는 근시안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반드시 써야 할 안경입니다.  

그래서 시인 5절에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上帝扶助 仰望上帝 斯人有福)”라고 큰 목소리로 찬양하고 있습니다.
왜 시인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 하지 않고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였을 까요? 창47:8절 9절을 보면 애급의 바로가 야곱에게 몇 살이냐고 물으니, 야곱이 대답하기를 130살밖에 안 되어 조상들 보다 오래 살고 있지는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살아 왔다고 말합니다. 그 험악한 세월 속에 야곱은 오로지 하나님께만 희망을 두어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과 함께 살아 왔습니다. 시인은 바로 이 험악한 세월 속에 살아온 야곱을 인도 하시어 마침내 잃었던 아들 요셉을 만나게 하시고 애급 땅에서 가장 좋은 고센 땅에서 살도록 하신 하나님을 자기 도움으로 삼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노래한 것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어떤 인생을 살든지 그 근본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하며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올려야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찬송가에 지금까지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찬송이 있을 것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484장 찬송일 것입니다. 우리 찬송가 가운데 가장 오랜 찬송시중의 하나입니다. 지금부터 1200년전 아일랜드의 고대어로 된 찬송시 입니다. 이 시를 고대언어를 전공한 엘리노아 헨리에타 헐(Eleanor Henrietta Hull 1860-1935)이라는 분이 1912년 아일랜드 어로 번역하였고, 번(M. E. Byrne) 여사가 긴 산문시를 영어로 짧게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 데비드 에반스(David Evans 1874-1948)가 고대 아일랜드 민요곡을 편곡하여 우리의 찬송가에 있게 되었습니다. 

1. 내 맘의 주여 소망 되소서 / 주 없이 모든 일 헛되어라
   밤에나 낮에나 주님 생각 / 잘 때나 깰 때 함께 하소서

4절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4. 영원한 주님 내 승리의 주 / 하늘의 기쁨을 주옵소서
   어떠한 고난이 닥쳐와도 / 만유의 주여 소망 되소서
                                                  아멘

영어 원어 가사로 4절은 더욱 분명합니다. 아마도 아침 태양 햇살이 비추는 모습을 바라보며, 어둠을 제치고 새날이 밝아 오듯, 동녘의 환호성처럼 소망이 만군의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있다는 큰 기쁨가운데 있음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High King of Heaven, my victory won 나로 이겨 승리하게 하신 높으신 하늘의 왕이시여
May I reach heaven’s joys, O bright heaven’s Sun ! 오, 찬란한 하늘의 태양이시여, 나로 하늘의 기쁨에 이르게 하소서,
Heart of my own heart, whtever befall, 무슨 일이 있든지 간에, 내 마음의 마음이시여,
Still be my Vision, O Rulerof all. 변함없는 나의 소망이 되옵소서, 만물의 통치자이시여.

너무나 오랫동안 전염병이 돌아 모든 세계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중환자실에 있고 격리시설에 있으며 그리고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마디로 환난이 극한 시대입니다. 이러한 때에 예배도 온전히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번도 들어본 적도 없는 올 라인 예배를 드립니다. 사람들의 믿음이 떨어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 저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가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때요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더욱 돌려야 할 때입니다. 결국 믿음 떨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왓츠의 그림에서 본 그 마지막 비파의 줄까지 끊어져 버리는 절망의 자리로 떨어져 버리게 됩니다. 그 밑에는 사단이 독사의 혀를 낼름거리며 입을 딱 벌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지금까지 믿어 온 그 믿음을 사단의 뱀 아귀 속으로 집어넣어 버릴 것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이 환난의 시대를 극복하고 승리하기위해서 “어떠한 고난이 닥쳐와도 만유의 주여 소망되소서라고 우리는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우리 라온 코이노니아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찬송으로 영광 돌리는 신실한 성도들의 신앙공동체입니다. 여러분의 입술에 찬양이 메들리처럼 세상 끝날 까지 계속 불려 지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항상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020년 12월 20일  주일아침 예배  삿 6:11 - 16  Teeny Belief Big Faith

티니(teeny)라는 말은 ‘아주 작은’이란 의미입니다. ‘티니’라는 말을 묵상 하던 중에 남태평양 사이판섬 옆에 있는 광주시의 1/5정도 되는 ‘티니안(Tinian)’이란 섬나라가 생각이 납니다. 미국 통치령으로 인구는 약 3,000명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작은 섬나라가 우리나라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인구의 45%가 한국계 사람들인 것입니다. 

본래 일본이 이 섬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막바지, 많은 조선인들이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일대로 강제로 끌려가서 전쟁 노동자, 전투병이 되었습니다. 이 섬에 끌려온 조선인들은 일본군에 의해 온갖 학대를 받으며 전쟁터에 총받이 역할을 하였고 후퇴하던 일본군에게 학살을 당했습니다. 일부 조선인들이 숲속으로 도망을 가 원주민 차모로족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귀국하지 못하고 차모로족 여인들과 결혼하여 그 후손들이 오늘 이 섬에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성은 King, Shing, Kiosshin이라고 합니다. 원래는 김 씨,신 씨, 강 씨였는데 미군들이 그들의 신상조사를 할 때 영어를 못하는 조선인들의 성씨 발음을 잘못 알아듣고 그렇게 기록한 것이라 합니다.
미군이 이 섬을 점령하자 조선인들은 적극적으로 미군을 도왔고 성금을 모아 미 대통령에게 감사 편지와 성금을 보냈습니다.  또 미국의 이승만박사에게 독립자금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 그 후손들에게 민족애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미 공군의 보잉 B-29 슈퍼포트리스 폭격기 에놀라 게이가 이 섬에서 이륙하여 2,531km를 날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떨어트려 일본의 항복을 하게 하였습니다. 이 섬엔 일본인들에 의해 학살당한 조선인들의 위령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 한국계 사람들은 자신들이 한국인이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에 방문하기도 합니다. 남 태평양 작은 섬 티니안에 우리나라 후손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그들이 당하였던 아픔의 역사에 함께 아련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 아침 예배 설교 제목이 Teeny Belief Big Faith 작은 믿음 큰 신앙이라 하였습니다. 믿음과 신앙은 異語同意입니다. 말은 다르지만 뜻은 같습니다. 믿음은 순수한 우리말이고 신앙은 한자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과 신앙을 구별 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좀 다릅니다. 영어로도 belief, faith로 다른 의미로 쓰고 있습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대부분 faith를 사용하고 belief는 한곳만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믿음이 대부분이고 신앙으로 번역하기는 두 번 정도입니다.
그러며 굳이 구별하자면 belief는 교리나 말씀에 대한 확신이나 지식으로의 믿음을 말합니다. ‘나는 예수님이 메시야 이심을 믿습니다.’에서 belief 믿음입니다.  ‘나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구속을 믿습니다.’에서 belief믿음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말씀에 대한 순종과 그 말씀을 따라 고백하며 살아가는 행위로의 faith신앙입니다. ‘나는 죽도록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살겠습니다. 이것이 나의 신앙입니다’에서 faith신앙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belief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faith신앙생활은 보기 어렵습니다. 

당신은 지금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Do you believe the God?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하나님을 believing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마귀들도 가지고 있는 믿음입니다.
야고보서 2:19 “네가 하나님은 한분이신 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Thou believest that there is one God; thou doest well: the devils also believe, and tremble.(Ja.mes 2:19, KJV)
믿음은 하나님의 계심을 존재론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적인 믿음입니다,

당신은 지금 하나님께서 주신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Do you have a faith?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하나님의 주신 faith 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신앙은 사람이지식적으로 believing 해서는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위로부터 주실 때에만 가질 수 있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 어떤이들은 성령께서 주신 이 faith는 없이, 스스로의 believing 만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신은 지금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을 가지고는 있지만 행함은 없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죽은 믿음 (dead faith)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2:20, 26)
한글로는 모두 믿음이(믿는다) 이지만, 영어로 봤을 때는 서로 다른 믿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이 believing 하는 belief 를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신 faith 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faith는 living faith 입니까? 아니면 dead faith 입니까?

기독교인들에게 물어보면 성경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신학적 지식이나 교리적인 상식도 가지고 있지 못한 교인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볼 때 매우 열심을 다해 주님을 섬기며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언젠가 총회에서 보는 장로 고시에 시골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60대 후반 노인이 교회의 추천으로 신청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 중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이 어느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그리고 객관식으로 1. 요한복음  2. 레위기  3.  창세기  4. 로마서 이렇게 되어 있는데 답이 틀렸습니다. 그래서 직접 만나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나이가 들어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믿지만 성경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신앙심은 투철하시어 교인들이 추천하여 장로고시에 임하였던 것입니다. 작은 믿음이지만 큰 신앙을 가진 분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신학적인 질문을 하면 모른다고 말할 것입니다. 천국은 신학을 많이 아는 사람보다 신앙심이 깊은 성도를 환영합니다.  안셀름이란 중세 신학자는 알기 위하여 믿는다고 말한바 있습니다. 그랬더니 아퀴나스란 분이 나는 믿기 위하여 안다란 말을 하였습니다. 물론 신학도 잘 알고 성경말씀도 잘 알면 錦上添花 좋습니다. 하나님이 칭찬하실 것입니다. 실례되는 말입니다만, 신학자들 가운데 성경과 신학에 대해서는 세계적인 신학박사이지만, 신앙으로 따지면 여기 할머니만 못할 그런 분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칭찬하실 분은 누굴 것입니까? 물론 Big belief Big faith 많이 알고 크게 신앙해야 하지만, 적게 알지만 크게 신앙한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고 칭찬하시고 큰 은혜와 복을 주실 것입니다. 

400년전, 1623년 영국이 어지러울 때였습니다. 시골에서 농부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우리 민족에게는 지금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선한 지도자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위대한 일꾼이 필요합니다. 보내주옵소서!” 이 때 하나님의 음성이 생생하게 들려 왔습니다. “강한 인물, 선한 사람, 위대한 일군이 바로 너다.” 그는 거절하였습니다. “하나님! 저는 농부에 불과합니다. 나는 아닙니다.” 그리고 성경을 들었습니다. 펼쳤습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이 말씀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그는 엎드려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예수님의 나의 주님이 되시면 할 수 있습니다. 나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강력한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가 바로 청교도 지도자가 되어 영국을 이끌어 간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입니다. 비록 시골의 농부로 그는 처음에 Teeny belief 이였지만, Big faith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Teeny belief 이였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Teeny faith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받은 이후 그들은 Big faith가 되어 죽도록 충성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바울은 본래 율법사(노미코스)로 Big belief이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의 사도가 된 이후 자기의 아는 모든 것을 분토만도 못하다고 하면서 스스로 가장 작은 자(고전 15:9 엘라키스토스)라 말하였지만, 그는 위대한 Big faith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가능한 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많이 알고 믿어야 합니다. 왜냐면 세상에 너무 많은 이단들이 횡횡하여 미혹하기 때문에 스스로 좋은 신앙인이라 한 사람들이 그들에게 사로잡혀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근에 평신도신학이 필요합니다. 평신도들도 신학을 공부해야 합니다, 우리 총회신학교는 평신도들이 들어와 공부하기를 권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학비도 무료입니다. 그러나 만일 공부하기가 여의지 않으면 담임목사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가르침을 잘 배워 big belief는 되지 못하다 하더라도 얼마간의 신학적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이단의 미혹을 물리칠 수 잇습니다. 그러나 무엇 보다 Big faith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 때에 사경회를 통해 교인들에게 성경과 교리를 가르쳐 믿음을 공고히 하였습니다, 큰 신앙인은 잘 배우는 사람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롯된다고 하였습니다(롬10:17).  호 6:3에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내드아 니르데파 라다아트 에드 야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렘 9:24 “자랑하는 자는 ...나를 아는 것(라다 오디)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지식적 믿음도 커야 합니다. 그래야 이단과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적 믿음도 Big faith가 없다면, 그 아는 믿음belief은 아무것도 아닌 바울의 말씀처럼 헛것(케네)이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보면 비록 Tinny belief이지만 하나님께서 크게 복을 주시고 큰일을 맡기신 경우들이 많이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큰 신앙인이 아니였습니다. 그는 작은 믿음과 그의 신앙도 부족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점차 아브라함의 신앙이 성장해 가는 것을 보시고 마침내 그에게 약속의 축복을 주시었습니다. 모세의 처음 믿음은 아주 작았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믿음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구하라는 큰 사명을 주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그에 준 사명을 실행해 가면서 위대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에서 기드온의 믿음은 매우 작았습니다. Tinny belief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택하시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주 힘들게 살던 때였습니다. 추수 때만 되면 미디안 군대들이 쳐들어와 추수한 곡식들을 빼앗아 가버립니다. 7년 동안 미디안이라는 나라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들에게 농토를 빼앗기고 산으로 쫓겨나 살았습니다. 산에서 굴을 파고, 구멍을 뚫고 살았습니다. 상대방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감히 싸워볼 생각도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두려움에 빠져있습니다. 기드온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두려움의 출처입니다. 두려움은 어디서 나옵니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결핍에서 나옵니다. tinny belief입니다. 왜 믿음이 작아졌습니까?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다면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대한 염려가 있다면 이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대한 근심이 있다면 이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불신이 어디서 온 것입니까? 자기의 작은 믿음 tinny belief에서 온 것입니다. teeny belief 이면서 tinny faith가되면 겁쟁이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크시고 강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작은 믿음을 하나님의 큰일을 위해 쓰십니다. 그러므로 비록 teeny belief라 할지라도 Big faith 라면 골리앗을 물리칠 용기가 납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도 작은 믿음의 소유자 였습니다. 물론 지금도 tinny belief입니다만, 하나님께서 그런 저를 주님의 종으로 부르시고 50년 동안 한 눈 팔지 않고 오직 주님의 일만을 하도록 붙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ㅈ어진 사명을 감당하고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 기드온이 어느 날 밀을 타작하고 있을 때입니다. 적이 알면 다 빼앗아 가니까 조용히 포도즙 틀에 숨어서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났습니다.
 6:12절 “큰 용사여(깁뽀르 하ㅋ하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14절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스스로 겁쟁이라고 여기고 사는 기드온에게 ‘큰 용사여!’라고 불렀습니다. 가문으로 따져 보면 명문 집안도 아닌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학달:비리비리하고), 나는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핮자이르: 미미한)니이다.(15)”입니다.
하나님의 사자의 말을 들은 기드온은 귀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황당한 말입니다. 전혀 가당하지 않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번지수를 잘못 찾아온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더욱이 기드온의 믿음은 형편없었습니다. 13절에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모든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또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급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 손에 우리를 넘겨주셨나이다.“ 기드온은 하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아주 tinny brief 이였습니다. 그는 불평불만을 하나님의 사자를 보자마자 폭포수 같이 쏟아냈습니다. 그의 가슴 속에 하나님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자기를 큰 용사로 불렀고 미디안의 손에서 민족을 구하라고 말씀하시지만 믿을 수 없었었습니다. 하필 나 같은, 보잘 것 없는 힘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미미하기 짝이 없는 존재를 택하신 것부터 하나님을 믿을 수 없고, 미디안의 손에서 민족을 구하려 하신다면 유다족속이나 에브라임지파의 용맹 있는 자를 택하지 않고 세력이 미미한 므낫세 지파의 자기를 부르셨다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은 일입니다.

왜 하나님이 기드온을 택하셨을까요? 저도 이상합니다. 굳이 말한다면 하나님 마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마음이 이상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강한 자를 택하시지 않으시고 약한 자를 부르십니다. 부요한자를 부르지 않으시고 가난한자를 택하십니다. 명망 있는 자를 부르지 않으시고 세상 사람들이 별로라고 말하는 사람을 택하여 하나님의 일을 맡기십니다.  사사 중에 입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기생의 아들이고 사람들에게 왕따 당해 광야를 쏘다니며 비루한자들을 모아 분당 질을 치는 깡패대장이었습니다. 에훗이란 왼손잡이 사람이 잇었습니다. 키도 작아 사람들에게 놀림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사사로 택하시었습니다. 에글론 왕을 죽이고 민족을 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이같이 비천한자를 높이시어 권세 있는 자를 내리치게 하셨으며, 약한 자를 택하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었습니다. 하나님 마음은 작은 믿음을 가지었지만 그의 큰 신앙의 가능성을 보신 것입니다.

우리는 큰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약한 자가 강하게 되고, 가난하자 부요하게 되며, 어리석은 자가 지혜로운 자가됩니다. 천힌 자가 귀한 자가 됩니다. 서울에 승동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1908년 이 승동교회에 박성춘이란 백정이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교회 다니던 양반들이 백정을 장로님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교회를 분립해 나가 연동교회를 세웠습니다. 이 박성춘장로는  본래 이름 없는 백정이었으나 무어 선교사가 세례를 주기 위해 성춘이란 이름을 지어 준 것 입니다. 그는 예수를 믿은 이후 우리나라 노예철폐운동을 하여 고종황제로부터 노예해방을 선언하게 하였으며, 당시 민족의 선각자들과 함께 민족의 개화운동가에 동참하였습니다. 1898년 10월 28일 독립협회가 종로거리에서 만민공동의회를 할 때에 첫 연사로 등단하여 신분차별 철폐를 연설하여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의 아들 박서양은 세브란스의전 1회 졸업생으로 의사가 되었고 의학교수가 되었습니다. 박성춘은 처음에는 작은 믿음이었지만 하나님은 그의 큰 신앙을 보시고 이름도 없던 백정을 우리나라 선각자로 세우셨고 그의 후손들을 영화롭게 하시었습니다.

스 8: 11, 12절 “베배 자손 중에서는 베배의 아들 스가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이십팔 명이요 아스갓 자손 중에서는 학가단의 아들 요하난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백십 명이요”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이 이름들의 뜻을 알려고 합니다. 베베라는 이름의 의미는 ‘아버지 간은 , 자애로운“이고,  아스갓의 이름은 ’갓은 강하다‘입니다. 요하난”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 자비로우신 여호와, 여호와는 인자하심”입니다. 그런데 요하난의 아버지의 이름은 학가단으로 그 뜻은 ’작은, 미미한, 하찮은‘이란 의미입니다. 아스갓은 강하다란 의미를 가졌는데 왜 자기 아들의 이름은 ’작다‘라는 이름으로 지었을까? 그 대답은 성경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역대상 17:17을 참고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작게 여기시고(타캐탄)  또 종의 집에 대하여 먼 장래까지 말씀 하셨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를 존귀한 자들 같이 여기셨나이다.” 다윗의 감사기도에 한 말씀입니다. 다윗은 작은 자 이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귀한 자가 되게 하시었던 것입니다.

학가단이 살던 당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베벨론에서 살다가 에스라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귀국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돌아와 보니 파괴되고 무너진 예루살렘과 그 땅의 형편이 황량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백성들은 매우 낙심하였습니다. 하루하루 먹고 살아가기가 어려웠습니다. 삶이 궁핍하면 사람들은 믿음이 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불신이 생깁니다.
이때에 제3 이사야의 한 예언자가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사야 60:1 “일어나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어둠이 가득한 땅에 새로운 영광의 빛이 비추인다고 말씀하십니다. 흩어진 자녀들이 돌아오고 온갖 재물이 돌아오며 너희를 괴롭히던 자들이 몸을 굽혀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60:22에서 “그 작은 자가(학가탄)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핯차이르)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이 말씀을 원문에 마게 번역하면, ‘가장 작은 자라도 천을 이루고 가장 약한 자라도 강국(르고이 아춤)을 이룬다’입니다. 여기서 가장 작은자가 히브리어로 학가단 입니다.
에스라에서 아스갓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을 학가단으로 이름 지은 것이 어쩌면 당시에 활동하던 제3이사야의 말씀을 들었던 것은 아닌지, 그래서 다윗과 같은 큰 인물로 성장하기를 원한 마음이 있지 않았겠는가? 작은 이름이지만 큰 꿈을 가지 이름이라고 할 거입니다.


문지영, 위그모어홀 데뷔 [한예종 제공]

아마 문지영(1995- ) 피아니스트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26살로 세계적으로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로 핫하게 활동하고 있는 피아니스트입니다. 문지영은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와 아시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서울시향, KBS교향악단 등 국내외 유수 오케스트라들과의 협연과 세계적인 무대에서의 독주회를 통해 가장 주목받는 젊은 음악가이자 피아니스트로 세계적인 명성을 쌓고 있습니다.
문지영양은 전남 여수에서 태어났는데 부모가 지체장애 2. 3급으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한 달에 80만원씩 정부가 주는 보조금으로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지영이는 여섯 살 때부터 피아노 치는 것을 좋아해서 피아노를 쳤는데 집에는 피아노가 없어서 동네 교회나 학원을 돌아다니며 하루 8시간씩 피아노 연습에 몰두하였습니다. 서울에 있는 예술 중학교에 합격통지서를 받았지만 돈이 없어서 입학을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저소득층 지원 행사에서 한국예술종합학교 김대진 교수(피아니스트)를 만나 일주일에 한 번씩 개인지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중 2008년 설립된 한국예술 영재교육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그곳은 수업료를 전액 국비 지원하는 곳입니다. 다행이 수업료 걱정은 덜었지만 지영이는 교통비를 아끼기 위해 KTX대신 무궁화호를 타고 5~6시간 걸려 새벽에 도착하곤 했습니다. 이틀 연속 서울에서 공부할 때는 찜질방에서 잔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지영이를 지도한 김대진 교수는 '연습이 싫다고 투정부리기 쉬운 나이인데도, 지영이는 음악에 대한 갈증으로  목말라 있었다'고 말햇습니다. 어머니가 '부모로서 뒷받침을 제대로 못해 줘 언제나 미안한 마음뿐인데  아이는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 문지영이가 2012년 독일에서 열린 제 13회 에틀링겐 국제 청소년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 대회는 1994년 중국의 스타 연주자 랑랑, 2000년에 한국의 손열음, 2004년에는 김선욱 등이 이 대회에서 우승하여 세계적인 연주자로 발돋움한 유명한 대회입니다. 2014년에는, 1971년 정명화씨가 첼로부문에 우승한 적이 있었던, 제69회 제네바 국제콩쿠르에서 우승을 하였습니다. 이 연주한 1위곡인 베토벤 피아노 협주고 4번을 인터넷으로 감상하였는데 대단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연주실력 이였습니다. 그 다음해 2015년에는, 1969년 백건우가 우승한 적이 있는, 제 60회 부조니 국제콩쿠르에서도 연이어 우승을 하였습니다. 그간 60년 동안 한국인으로 우승한 적이 없었고 작년에는 아무도 1, 2를 하지 못했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경연대회입니다. 그런데 금년 문지영양이 피아노부문 1등을 하였습니다. 당시 부조니 콩쿠르의 심사위원장인 외르크 데무스는 “이 시대에서는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음악성의 자연스러움을 그녀에게서 발견했다.”는 극찬을 하였습니다.
그밖에 2009년 폴란드 루빈스타인 국제 피아노 콩쿠르등 다양한 콩쿠르에서 우승을 하며 국제 무대에서 실력을 입증 받아 왔으며, 정명훈을 비롯해, 리오넬 브랑기에, 알렉산더 셸리 등 세계적인 지휘자와도 호흡을 맞춘 바 있습니다.
며칠전 지난 17일 오후 7시 30분, 네이버 V-LIVE를 통해 피아니스트 문지영과 함께 하는 136회 아트엠콘서트, ‘크리스마스 콘서트’를 개최하였습니다. (**의학신문 김영주 기자  yjkim@bosa.co.kr 인용)
우리는 이 문지영 같은 소녀가 자기의 열악한 환경, 부모의 무능력함 등을 탓하지 않고 도리어 그런 약한 것들을 꿋꿋하게 딛고 일어서서 승리한 본보기를 보게 되었습니다.
문지영은 작은소녀 이였습니다. 아무도 지영이의 존재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영이의 신앙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는 축복받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지영이는 반드시 자신을 하나님께서 피아니스트로 크게 쓰실 것이라는 신앙으로 열심히 피아노를 쳤습니다. tinny belief 이지만 지영이의 심령 속에 big faith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어부로 살아가고 있는 두 형제 곧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4:18-19)고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tinny belief였습니다. 그들을 부를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심령 속에 big faith의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후 시몬에게 베드로(바위)라는 이름을 주시고 장차 그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6:17-18) 물론 그때만 해도 아직 tinny belief였지만 마침내 Big Faith로 교회의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자기의 작은 믿음tinny belief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쓰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누가 자기의 믿음을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까? 바울선생님도 자기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태어난 자(고전15:8 엨트로마 유산, 조산)같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모자란 사람이라고 부족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누가 바울을 모자란 사람이라 할 것입니까? 우리 모두 비록 작은 믿음 tinny belief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하나님은 나의 신학적지식을 재어보시고 나의 교리적 행위를 달아보시고 잘한다고 축복하시기 보다는 내안에 있는 큰 신앙 big faith의 가능성을 보시고 불러주시고 축복하시고 사명을 주십니다.

 


순복음 우리교회에 김은우집사님이 있습니다.
그는 1980∼90년대 인기를 누리던 개그맨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프로골퍼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제2회 TBC 개그콘테스트에서 대상을 받으며 개그맨이 된 그는 MBC에서 개그맨 김명덕 씨와 콤비로 활동을 하였지만 개그맨의 인기는 파리 목숨이라 곧 설 곳이 없어지고 매우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집 앞 교회에 갔더니 목사님이 40일 작정 새벽기도회 광고를 하시면서 문을 두드리면 하나님이 열어주신다고 하더라구요. 눈물이 펑펑 나오면서 새벽기도를 가겠다고 고백 했어요” 당시 개국된 SBS로 옮기며 코미디전망대에서 대사 한 줄 뿐인 역을 맡았습니다. 유행어가 나올 수 없는 역할이었지만 새벽기도를 드리던 중 하나님이 주신 영감으로 “누가 나 좀 말려줘요∼”라는 유행어를 탄생시켰습니다. 다시 개그맨의 전성시대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고 신앙생활을 게으리 하였습니다.  “개그맨으로서 인기를 얻고 전성기를 보내면서 하나님을 잊고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살게 됐죠. 그러다보니 프로그램도 다 없어지고 경제적, 가정적인 어려움이 생겼어요. 아픔을 겪고 난 뒤에야 하나님께서 주셨던 은혜의 새벽제단을 잊고 살았구나 깨닫고 눈물로 매일같이 새벽기도를 드렸죠”
김은우 집사는 함께 새벽기도를 드릴 수 있는 배우자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때가 53살이었습니다. 그리고 1년 뒤 17살이나 어린 강민희 집사(사진 왼쪽)를 만나게 됐고 지금은 부부가 함께 새벽예배를 드리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기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김은우 집사는 장애인 복지시설 ‘작은 평화의 집’을 20년째 돕고 있습니다. 평소에도 자선골프를 주선하며 장애우들을 위한 재능기부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2004년 USGTF 티칭프로시험에 합격한 김은우 집사는 인터넷골프방송국 ‘김은우의 아이러브골프TV’를 이끌고 있습니다. 연예인 골프구단까지 창단한 그는 OBS W방송국에서 ‘김은우를 이겨라 1:9’를 진행하고 있고 골프 전문채널 J골프에서 ‘디즈니골프 레이디스 아마추어 챔피언십’의 진행을 맡고 있습니다. 수준급의 골프실력과 재치있는 말솜씨로 국민카드 모두투어 외환카드 행사 등의 사회를 보며 명사회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습니다.
그는 골프관련 행사 사회를 볼 때면 항상 전날 행사장으로 내려가 숙소에 머물며 새벽기도를 드린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의 생활은 15년간 이어졌다. 놀라운 일은 지금까지 수많은 행사를 보면서 비가 온 적이 없다는 것. “골프는 날씨가 가장 중요하니까 날씨 기도를 많이 해요. 폭우로 비행기가 못뜰 때에도 맑은 날씨를 달라고 기도하면 화창한 날씨를 주세요. 그럴 때면 사회를 보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멘트를 하는데 그 때가 참 행복하고 감사해요”
김은우 집사는 태국 아티타야 전속모델, 골프공 파우치 회사 투어윈의 전무이사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된 골프공도 만들었습니다. 김은우 볼의 이름은 ‘KK153’.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베드로가 잡은 153마리의 물고기를 뜻합니다. 문정동에서 디즈니골프웨어 매장까지 직접 운영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김은우 집사는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삶의 우선순위입니다. 그는 “100가지 기도제목을 적었는데 하나님이 다 응답해주셨어요. 예배를 더 적극적으로 드려 우리 삶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싶어요. 하나님이 우리와 가까이 계시면 더 풍성한 은혜를 주실거예요”
(**순복음가족신문 김은우 집사 기사 15.03.16 13:26 글 이미나/ 사진 김용두 / 편집 김성혜 기자 인용)

김은우집사는 작은 믿음 tinny belief를 가지고 있지만 그의 신앙은 Big  Faith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예배에 충실하고 이웃에 봉사하며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소개한 문지영피아니스트나 김은우집사의 경우가 무슨 특별한 예가 아닙니다. 이런 예는 무수히 많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인면 누구나 보편적으로 비록 작은 믿음이지만 큰 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은 그를 통해 큰 영광을 받으시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시대로 어렵고 힘든 시간들을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신앙마저 작아져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때가 은혜 받을만한 때요 구원받을 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결코 우리의 신앙생활이 작아진 모습을 보여드려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 누구나 작은 자tenny belief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큰 신앙big faith을 보여 드린다면 하나님은 그를 높이 들어 당신의 귀한 은혜와 축복을 누리며 살게 하여 주십니다.

기드온이 비로 미천한 가문출신으로 믿음 또한 약하였지만 하나님은 장차 그의 큰 신앙인으로 민족의 지도자가 될 것임을 아시고 부르셨던 것입니다. 기드온 스스로는 알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의 그의 장래를 이미 아시기 때문에 그를 택하셨던 것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을 너무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어느 누구나 큰 신앙인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라온코이노니아는 비록 작은 사람들의 모임이지만 큰 신앙심으로 하나 된 신앙공동체입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나의 큰 신앙을 보여 드릴 수 있는 신앙생활을 하므로 우리의 삶이 축복의 삶이요 우리 가정이 축복의 가정으로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성탄 주간에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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