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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210년 11월중 설교

jbhimr by  조회 수:20 2021.02.07 15:08

2020년 11월 1일  주일아침예배  사26:1-19   빛난 이슬(오로드 탈레카) 百草之甘露


할로윈 데이(Halloween Day)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끼?  어제 10월 31일을 할로윈데이라고 하는데 본래 천주교회의 축일입니다. 그리고 오늘 11월 1일을 만성절이라하고 내일 11월 2일을 만령절이라고 합니다. 천주교를 국가적으로 믿는 나라에서는 공휴일로 제정하였습니다. 그러닌까 할로윈데이는 만성절의 전야제같은 날입니다. 성탄절 전날 저녁을 크리스마스 이브라 하듯이 만성절이브를 할로윈이라고 합니다. 영어로 할로우라는 말은 ‘聖人’을 말하고  'All Hallows’ Even(ing)'가 줄여서  'Halloween'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11월 1일 萬聖節(Allerheiligen) - All Saints' Day(프랑스: Toussaint, 이탈리아: Ognissanti, 스페인: Fiesta de Todes los Santos, 스웨덴: Alla helgons dag) 은 수많은 성인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만성절을 처음 지킨 기록은 609년입니다. 교황 보니화체 4세(Boniface IV)가 포카스(Phocas) 황제로부터 로마의 판테온(Pantheon)을 선물로 받고부터입니다. 로마의 판데온은 세계 모든 나라의 신상들을 모셔둔 곳인데 이 판데온의 모든 우상들을 제거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워 성당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로마의 판데온

천주교회에서는 1만여 명의 성인을 기념하는데, 실상 그 많은 사람들을 다 기념 할 수가 없어 중요한 대표적인 성인들을 정하여 그분들을 기념하고, 그 밖의 성인들은 만성절에 모두어 함께 그분들을 기억하고 기념하게 됩니다. 천주교회에서는 2000년 교회역사에서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한 분들이거나 천주교회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남긴 분들을 Saint 성OOOO라고 부릅니다. 성베드로 성바울 성어거스틴이라고 하여 그분들의 믿음과 헌신을 기억하여 기념하며 그분들의 초상화나 석조상을 만들고 그분들의 뒤를 따를 것을 다짐하는 미사를 드리곤 합니다. 우리 개신교회에서는 그런 성인을 섬기는 일이 우상 숭배라 하여 부인합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의 순교와 헌신을 기리는 일은 소중한 일이라고 보겠습니다. 그러나 같은 개신교인 성공회나 루터교회에서는 종교개혁이전의 성인들에 대해 기념하는 일은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천주교회에서는 만성절 전날 할로윈데이 때는 모든 마귀와 악령들이 지상에서 모두 도망가 버린다고 하여 축제를 버렸는데 이때 온갖 가면들을 쓰고 축제를 벌리는 전통이 생겨났습니다. 이런 축제가 천주교회와는 관계도 없는 나라나 사람들이 덩달아 축제를 벌려 본래의 뜻과는 달이 온갖 부도덕하고 부정한 타락한 날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공산국가인 중국의 젊은이들도 할로윈축제를 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젊은이들이 가면을 쓰고 술을 마시며 온갖 타락의 현상들을 일으켜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성절 다음날 11월 2일 이날은 비록 성인 축에는 들지 못하지만 믿음을 지키며 살았던 수많은 영혼들이 천국에 가 있음을 기억하고 그분들을 기념하는 날이 만령절(All soul's day. Alle Minnesdag)이라고 하여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세상 살다간 그들 그러나 그분들의 믿음이 있기에 오늘날 교회의 역사가 계속이어지고 있음을 생각할 때 그분들을 추모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추석임나 명절에 부모님의 산소를 찾아가듯이, 서양의 많은 사람들이 조상의 묘소를 찾아가 꽃을 놓고 잠시 고인들의 삶과 고인들이 남긴 유훈들을 기억합니다. 흔히 서양 사람들은 조상도 모른다고 말합니다만 이런 만령절에 조상의 묘소를 찾아가 추모하는 일은 우리의 풍속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스웨덴에서는 만령절에 꽃을 놓고 초를 킨다.

우리는 조상들에 대한 추모를 등한히 해서는 안 됩니다. 조상이 있기에 오늘 내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이 날 낳으시고 나를 키우시느냐고 얼마나 당신의 사랑과 희생을 다 바치셨는가를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어찌 부모님 뿐 이겠습니까? 할아버지 할머니, 증조할아버지 할머니, 고조할아버지 할머니, 고증ㅈ할아버지 할머니 5대조 6대조 10대조 그 윗대조 모든 할아버지 함머니 그분들의 삶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여기 살고 있음을 생각할 때 조상들을 기억하고 그분들을 기념하는 일은 종교적 신앙을 떠나 하나님께서 세우신 인간의 도리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수 많은 족보 이야기들이 있음을 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유대인의 직접적이 조상 아브라함대 까지 기로하고 있고 누가복음에서는 인류의 조상 아담까지의 대략적이 족보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육신적으로 육신의 조상이 있는 것처럼 믿음에도 믿음의 조상 영적인 조상이 있습니다. 흔히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1885년 장로교회의 언더우드선교사와 감리교회의 아펜셀러선교사가 우리나라에 최초로 복음을 전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백홍준이란 의주 청년이 있었습니다. 1874년 백홍준이 압록강 건너편에 있는 고려문(高麗門)을 방문하였다가 영국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선교사인 로스(Ross,J., 羅約翰)와 목사 매킨타이어(McIntyre,J., 馬勤泰)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그들의 주재지인 우장(牛莊)으로 동행, 한국어와 한국역사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던 중 1876년 이응찬(李應贊)·이성하(李成夏)·김진기(金鎭基) 등과 함께 세례를 받고 최초의 개신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 뒤에 서상륜(徐相崙)과 함께 이들은 한문성경의 우리말 번역작업에 착수하여 1882년에는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심양(瀋陽)의 문광서원에서 최초로 간행하였습니다.1883년과 1884년에는 「사도행전」·「마가복음」·「마태복음」, 1885년에는 「로마서」·「고린도전·후서」·「갈라디아서」·「에베소서」를 간행하였습니다.1887년에는 『예수셩교젼셔』라는 제목으로 신약성서 전권이 출간되었는데 흔히 ‘로스 번역 성서(Ross version)’라고 부릅니다. 1882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가지고 만주 서간도(西間島)의 한인촌에 전도, 75명의 신자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1883년에는 국내전도를 위하여 잠입, 의주·삭주·강계 등지에서 전도한 끝에 10여 명의 신자를 얻고 주일마다 자기 집에서 예배를 드림으로써 조직교회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최초의 개신교 집회를 만들었습니다. 1884년 서상륜은 자기 고향 황해도 소래에 와서 전도하여 한국 첫 교회당인 소래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므로 서양선교사가 처음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 서상륜등에 이해 복음이 우리나라에 전해직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이분들이 우리나라 개신교회 신앙의 조상이라 할 것입니다.  1887년 9월언더우드(Underwood,H.G., 元杜尤)가 14명의 세례교인을 모아 놓고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창립할 때 백홍준은 서상륜(徐相崙)과 더불어 최초의 장로로 추대되었습니다
이미 소개한 전킨목사님과 드루의사선교사에 의해 1985년 군산에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1896년 7월 20일 송영도 김봉래 이 두 분이 호남지방 최초로 세례를 받았고 10월4일 송영도의 딸 송성장이 호남 최초의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분들이 군산의 신앙의 조상들이 된 것입니다. 전킨선교사와 최초의 군산교인들에 의해서 복음이 퍼저나가 군산을 비롯하여 김제 익산 서천 부여에까지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윌리엄 멕컬리 전킨 선교사


지금 우리는 쉽게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말하지만 지금부터 120여년전 군산을 생각해 볼때에 당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온갖 고난과 희생이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전킨선교사는 군산 땅에서 세아들을 먼저 천국에 보내고 구암에 묻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1904년 전킨선교사도 하늘나라로 가서 구암에 묻혔던 것입니다. 당시 그의 나이 43세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검사였고 할아버지는 유명한 목사님이였습니다. 그 집안이 미국에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는데 28살 젊은 나이에 군산에 와서 복음을 전하고 병원을 세우고 영명학교와 멜본딘여학교를 세웠으면 수많은 지역 교회들을 세웠습니다. 그 과정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겠습니까? 전혀 일지못했던 낮선 나라 항구마을에 와서 당신의 몸이 묻히리라고 예측이나 하였겠습니까? 어느 선교사가 전킨목님에게 선교사의 삶은 희생의 삶이라고 말하니 전킨 목사님이 말하길 희새이 아니라 축복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이 군산땅에 와서 몸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밤잠을 자지 않고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으며 세 아들을 먼저 땅에 묻으면서 까지 자기가 군산에 복음을 전하다는 것이 축복이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전킨선교사님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 군산 곳곳에 뿌려져 오늘날 군산땅에 600개교회와 10만의 성도가 있게 되었고 우리도 여기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찌 우리가 전킨선교사를 잊을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분을 기념하려하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온 이래 수많은 성도들이 순교를 당하고 고난을 겼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는 시자가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이미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수많은 초창기 기독교인들이 순교와 억압과 핍박 그리고 병고로 관을 당하였습니다. 구한말에는 당시 유교도들 불교인들 다른 신흥종교인들에 의해서 학대를 받았으며, 일본식민지시대에는 교회와 많은 교인들이 엄청난 억압을 받았으며, 해방 후엔 북한에 있는 교회와 교인들은 김일성과 공산주의자들에게 핍박과 순교를 당하였고, 6.25전쟁 때도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수많은 목사님들과 교인들이 학살을 당하는 순교의 피를 흘리게 되었습니다. 복음은 순교의 피를 타고 전해진다고 합니다. 오늘날 한국에 기독교가 세계선교 역사에 유래가 없는 1000만 성도의 부흥과 발전하게 된 것은 바로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이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 예수님의 뒤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사야 말씀에 하나님의 빛난 이슬을 말씀하였는데 이 말씀은 마른땅에 생명의 은혜와 능력을 베풀어 주시는 것을 비유적으로 하신 말씀인데, 바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야말로 이 척박한 한잔도 땅에 우리 군산 땅에 내려주신 빛나는 이슬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제 금요일 전킨사엄의원5명과 시청관광과장들 공무원 5명 그리고 시의원 6명과 함께 부산의 이태석신부기념관과 진해에 있는 주기철목사님 순교기념관을 방문해서 기념관에대한 여러 가지를 살펴서 전킨기념관을 세우는데 필요한 자료를 얻기위해 방문하고 돌아 왔습니다.
주기철목사님 순교기념관을 방문한여 그분의 순교행적을 살펴보며 많은 감동과 눈물을 흘렸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1897년 생입니다. 16세였던 1913년에 남강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에서 1915년에 세례를 받고 공개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게됩니다. 특히 오산학교는 기도교학교로서 민족의식이 투철한 여러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하그챴는데 그중에 삼일운동의 민족대표 한분이신 이승훈선생이 교장으로 있었습니다. 또한 기독교 민족운동으로 물산장려운동을 벌린 조만식선생님이 계셨는데 주기철목사님은 이 선생님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오산학교를 주기철 목사님은 당시 최고의 부흥사였던 김익두 목사님의 집회에서 큰 은혜를 경험하고 목회자로의 부르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평양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에 부산 초량교회, 1931년 마산 문창교회를 거쳐 조만식 선생님이 마산에 까지 내려와 간곡하게 청빙을 하여 1936년 드디어 평양 산정현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됩니다. 그런데 당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천황에게 절하는 의식과 일본의 우상종교인 신사에 참배하는 일을 조선백성들에게 강제로 시켰습니다. 만일 따르지 않으면 경찰서로 붙들어가서 온갖 고문으로 일본 정책을 따르라고 억압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이 교회들은 일본의 우상에게 절하는 신사참배를 거절하였습니다. 이로인해 주기철목사님을 위시해서 수많은 목사님들과 교인들을 잡아다가 고문을 하였습니다. 마침내 장로교회 감리교회등 많은 교회들이 일본의 억압에 굴복하는 치욕스런 선언을 하였으니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기철목사님을 위시해서 아직도 많은 목사님들이 죽기로 각오하고 신사참배를 거절하였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분이 주기철목사님이라고 여긴 일본당국자는 특별히 주기철목사님을 집중적으로 온갖 고문을 하고 주목심의 항복을 받아내려 하였습니다. 그리해서 온 몸은 그야말로 ㅁ나신창이가 되어 너덜너덜해진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롭당국자는 주기철목사님이 축게될 겋이라 보고 그대로 옥에 가두어두면 책임을 면치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석방을 하였습니다. 이미 일본총독부는 장로교 총회에 억압을 해서 주목사님의 목사직을 제명하게 하고 경찰들이 몰려와 목사사택에서 가족들을 길바닥으로 몰아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목사님을 존경하는 교인들이 교회를 지키며 목사님으 다시 강단에 모시었습니다. 너덜너덜해진 몸과 옷차림 그대로 옥에서 나오자 마자 교회강단으로 올라가 그의 마지막 유훈 같은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 제목은 “일사각오”였습니다.  옥에 갇혀있을 때에도 “칼날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한, 내가 그 칼날을 향해서 나아가리다. 내 앞에는 오직 ‘일사각오’의 길만이 있을 뿐입니다.”란 말을 하였습니다.

주 목사님의 설교에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철저한 신앙이 드러나 있습니다. 그는 결국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과 섭리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었고, 오직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과 공의대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그의 하나님의 주권사상에 대한 철저한 신앙은 8순의 노모와 처와 자식들과 교인들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는 그의 간절한 기도와 설교 속에서 너무나도 확연하게 드러났습니다.
"나는 80이 넘은 어머님이 계시고, 병든 아내가 있고, 어린 자식들이 있습니다. 아들로서의 의무도 지중하고, 가장으로서 아비 된 책임도 무겁습니다.... 당신 어머님을 요한에게 부탁하신 주님께 내 어머님도 부탁합니다. 불효한 이 자식의 봉양보다 무소불능하신 주님께 내 어머님을 부탁하고, 나는 주님 자취를 따라 가렵니다....나의 병든 아내도 주님의 손에 부탁하는 것이 이 못난 사람의 도움보다 좋을 줄 압니다. 나의 어린 자식들을 자비하신 주님의 품에 두는 것이 변변치 못한 아비의 손으로 기르는 것보다 복될 줄로 믿습니다. 나의 양떼도 선한 목자 주님께 부탁합니다.....나의 늙으신 어머님과 나의 병든 아내를 주님께 부탁하고 나의 어린 자식들과 나의 사랑하는 양떼들을 자비하신 주님께 부탁합니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으로 이 산정현 강단을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따라, 주님을 따라 주님의 피 자취를 따라가려 합니다...'"

그리고 1944년 4월 21일 밤 9시 경, 목사님은 서서히 몸을 일으켜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들고 "내 영혼의 하나님이여, 나를 붙드시옵소서!"라고 외치고는 이 땅에서의 생을 마치고 신사참배의 강요도 없고 친일하는 무리들도 없는 하나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그의 나이 47세였습니다. 전킨선교사는 43세에 소천 하였고 주기철목사님은 47세 아직도 젊은 나이에 천국엘 갔습니다. 주목사님은 하나님께서 갈라진 마른땅 같은 이 땅을 적셔 주신 빛의 이슬 이였습니다. 그 이슬이 이땅에 믿음의 샘이되었고 강을 이루어 한국교회가 부흥 발전하여 온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기도와 피 흘리신 순교의 믿음이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맥박에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교회에서는 그분을 기념하는 기념관을 크게 세워 많은 교인들이 방문하여  주목사님의 십자가의 길에 동참하려하는 다짐을 하곤 합니다. 

찬 336정  “ 환난과 핍박 중에도 ”은 우리는 잘 부르고 있습니다.
1.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지켰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2.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얻었네
우리도 고난받으면 죽어도 영광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이 찬송은 프레데릭 페이버(Frederick William Faber, 1814-1863) 신부가 작사한 찬송으로서 런던에서 출판된 그의 찬송집《예수와 마리아; 가창과 낭독용 가톨릭 성가》 'Jesus and Mary, or Catholic Hymns for Singing and Reading, 1849'에 처음 발표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임스 월튼(James G. Walton)이 후렴을 붙이고 가사를 수정하여 헨리 헤미(Henri F. Hemy, 1818-1888)의 곡조를 편곡하여 발표하여 오늘 개신교와 천주교회가 함께 부르는 찬송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영어로 돤 찬송가 사가 더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Faith of Our Fathers 우리의 믿음선조들의 신앙

1. Faith of our fathers, living still,        우리 선조님들의 신앙, 아직도 살아있네
In spite of dungeon, fire and sword;      지하 감옥, 화형, 무력에도 불구하고...
O how our hearts beat high with joy      오 우리들 가슴이 기쁨으로 크게 뛰도다.
Whenever we hear that glorious Word!    그 영광스러운 말씀을 들을 때마다!

Refrain : 후렴 :
Faith of our fathers, holy faith!            우리 선조님들의 믿음, 거룩한 믿음!
We will be true to thee till death.          우리는 죽을 때까지 당신께 충실 하겠네.


2. Our fathers chained in prions dark,     우리 선조님들은 캄캄한 옥에서 사슬로 묶였                                               지만
Were still in heart and conscience free;     마음과 양심은 자유로웠네.
How sweet would be their children's fate,   선조님들의 자녀들의 죽음이 얼마나 멋질까
If they, like them, could die for thee !      선조님들처럼 당신을 위해 죽을 수 있다면!

Refrain : 후렴 :
Faith of our fathers, holy faith!             우리 선조님들의 신앙, 거룩한 신앙!
We will be true to thee till death            우리는 죽을 때까지 당신께 충실 하겠네.

 

우리나라와 그리고 군산에 훌륭한 선조들이 계시어 오늘 우리들에게 참다운 믿음의 길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 것을 생각할 때에 얼마나 감사한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믿음의 선조분들께 고마운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꼭 기억할 것은 우리들의 신앙의 선조들은 이렇게 이름이 알려지고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분들이 밌는 반면에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믿음생활 하시다가 천국에 가신 수많은 성도들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분들은 평ㅅ 세상에 계실 때에 얼마나 열심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었는지를 기억합니다. 그분들이 세상에 게실 때에 얼마나 교호와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였는지를 기억합니다, 때로는 금식을 해가면서 어떤 때는 토굴에서 찬마루 바닥에서 밤이 새도록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위해서 목사님을 위해서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였음을 기억합니다. 사업이 부도나고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병고로 몸이 편하지 않은데도 교회에 나와 열심히 기도하며 봉사하던 성도들을 기억합니다.  하나님께  그분들은 부모님과 남편과 아내를 위해서 형제와 일가친척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식 잘되게 해주시기를 엎드려 간곡하게 기도하였음을 기억합니다, 그분들은 나라와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도 쉬임없이 기도하였음을 기억합니다. 먼 나라 가난한 나라 어린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북한의 굶어 죽어가는 북한동포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였음을 기억합니다. 그분들은 때로는 감사헌금을 십일조로 특별헌금을 아낌없이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 분들은 교회의 봉사할 일이 있으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충성하고 헌신 봉사하였음을 기억합니다. 그래요, 한국 교회가 부흥과 성장하고 존재하게 된 그 배후에는 이처럼 헌신 봉사 충성한 평신도들 누가 기억해 주지 않아도 주님이 맡겨주신 직분을 충실히 가당하여 하늘의 별처럼 빛의 이슬 같은 성도들이 되었음을 기억합니다. 저는 50년 목회를 하면서 제가 이제 그분들의 이름도 기억 속에 가물가물하지만 천국의 생명책에 다 기록되어 있어 하나님 보좌 앞에서 하늘의 잔치에 참여하고 있음을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자 알고 계시며 돌보시며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그래서 마침내 빛의 이슬을 내리시어 죽음의 골자기에서 벗어나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게 하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선조들처럼 주님께 의지하는 사람들은 늘 한결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어야 합니다. 오늘 이사야 26:3에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자(心志堅定者)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主賜平康) 지키시리니(主必守護)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因主信賴).” 그러므로 이어서 42절에서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일다.”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오늘날 새상사람들이 방황하고 불안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심지가 견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19로 믿음의 심지가 흔들리면 일제 시대나 6.25전쟁시대 같은 때에 우리의 선조들처럼 믿음 지킬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빛의 이슬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메마른 땅에 시들어 죽어가는 잡풀인생이 될 뿐이 아니겠습니까?  평강에 평강으로 이르도록 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완전한 평화(perfect peace)를 말씀하십니다. 이 평강에는 세상의 쓰나미가 밀려오지 못합니다. 세상의 마귀역사가 넘나들지 못합니다. 아무리 고난이 닥쳐와도 오직 우리는 평강에 평강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며칠전 페루여행을 한 사람을 다큐멘터라를 TV에서 보았는데 페루의 어부들이 볏집으로 꼬아 만들 사람한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한 작은 보트를 타고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를 헤펴가며 고기를 잡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볏 집으로 만들 배입니다. 너무나 작아 파도에 금방 뒤집혀 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파도를 헤쳐 나가 고기 잡는데 아무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일사각오 자신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주기철목사님처럼 일사각오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금방 무너질 것 같은 인생으로 보일지라도 아니요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심지를 굳게 하십시오. 우리의 신앙선조들이 모두 그런 믿음으로 그 환나을 이기어 오늘 우리 후손들에게 그 믿음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 믿음을 우리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 손들이 여러분의 믿음을 이어받아 환난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복 받으며 퍼펙트 피스 평화롭게 살아가도록 허락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만성절이고 내일은 만령절이라고 천주교에서는 성인들과 일반 죽은 성도들을 기념을 하는데, 우리는 우리 신앙의 조상들과 교화와 나라와 가정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던 엣 신앙성도들을 기억하고 그분들의 믿음을 따라 하나님의 빛의 이슬의 축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올 여름 긴 장마와 폭풍우 그리 아직도 식을 줄 모르는  코로나19바이러스의 열풍이 부는 마스크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아직도 큰 교회는 거리두기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격변의 시대라 할지라도 우리 신앙선조들의 믿음을 회복하여 오늘에 그 믿음으로 여전히 충성하며 살아간다면  위기가 기회가 되고 천화위복의 은혜를 주실 것이니 분명히 오늘 이사야26:1절에 “죽은자들은 살아나리라(이흐유 메데이카)”고 말씀하였는데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은 하나님의 빛의 이슬이 촉촉이 내리어 주실 것이라. 우리 라온 코이노니아 성도들을 이 새대의 빛의 이슬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2020년 11월 8일 주일아침예배 설교 욥7:1-21  하나님의 사랑

2020년  삼백열하루가 지난 312번째 날입니다. 그러닌까 금년 53일이 남았습니다, 세월이 이렇게 화살처럼 빨리지나가고 있는 것 같아요. 흔히 눈 깜짝 할 사이라는 말을 하는데 2020년 들어와 눈 한번 깜짝한 것 같은데 벌써 삼백열하루가 후딱 지나갔습니다. 서강대 박영재교수(불교도)가 “벽암록(碧巖錄조선 세조 11년, 1465년에 간행된 불교 서적)”에 있는 글을 소개하였는데, <「마조(馬祖. 709-778) 스님이 병이 깊어 세상을 떠나려고 할 무렵 그 절의 원주 스님이 문병(問病)하러 와서 "스님!  요즈음 병세가 어떠하십니까?" 하고 물었는데 스님께서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불명경(佛名經 북위(北魏)시대에 보리유지(菩提流支, Bodhiruci)가 520년에서 524년 사이에 번역한 부터님의 설법책)》에서 이르기를, 일면불의 수명은 천팔백 세이고 월면불의 수명은 하루 낮 하룻밤이라고 합니다. 즉 인생을 천년을 살거나 하룻밤을 살거나 순식간에 지나갈 뿐이라는 것입니다.  톨스토이도 "인간의 수십 년 일생은 150억 년인 우주의 나이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지만 하루살이의 일생에 비하면 꽤 긴 세월이다.> 라고 말함바가 있습니다.  박교수는 세 할머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 하였습니다.  < 인생을 정리할 나이인 80세 무렵의 할머니 세 분이 시의 세계에 입문해 오년 동안 시인으로 멋진 인생을 사시다가 85세 무렵 거의 비슷한 시기에 귀천(歸天)하셨다는 것입니다. 특히 시집 가운데 백태희 할머니께서 남기신 '속수무책(束手無策)'이라는 제목의 다음과 같은 유작 시는 우리로 하여금 조사어록이 아닌 시집을 통해서도 쏜살같이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시간'의 소중함을 새롭게 깨우쳐 주고 있네요.
 "달리는 차창 밖으로 세상이 휙휙 지나간다. / 한 치 앞의 미래가 금방 현재가 되고 /
뒤미처 과거가 되어 멀어져간다. / 거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
시작도 없고 끝도 없던 에덴동산에 / 신이 내린  가장 가혹한 형벌. / 시간.“ >

눈 깜짝 할 사이 세월이 지나가버린다는 것은 이에서 백태희 할머니가 신이 내린 가혹한 형벌이라고 하였는데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송대관 가수의 노래 중에 “세월이 약이 겠지요”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 세월이 약이겠지요. 당신의 슬픔을 괴롭다 하지말고, 서럽다 울지를 마오. 세월이 흐르면 사랑의 슬픔도 잊어버린다. 이 슬픔 모두가 세월이 약이겠지요. 세월이 약이겠지요”
세월이 지나가면 모든 슬픔 근신을 잊어버리기에 세월도 약일수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세월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욥은 고난 중에 마침내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욥기서 7장에 욥은 인생이 베틀의 북보다 빠르게 지나간다고 말합니다, 7절에 한낱 바람 같다고 말합니다, 9절에 구름이 사라져 없어집 같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16절에 “네가 생명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니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것(헤벨 아민)이 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아프고 괴로웠으면 그렇게 말할 것입니까?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보호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욥 7:19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침을 삼킬 동안(아드 삐르에이 둑키)”이란, 내가 침 삼키는 동안이라도 나를 향해 눈을 돌이키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십니다. 시간이 베틀 북보다 빠르게 지나간다지만 그 순간순간 하나님의 눈은 우리를 향해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 주십니다. 우리가 힘들고 위험한 일을 만날 때 그리고 외롭고 슬픈 가슴 아픈 일을 당할 때 우리를 지키시고 위로와 능력의 손길을 펼쳐 주십니다.

"미국에 한 중년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내의 시력이 너무 나빠서 눈 수술을 했는데, 그만 실명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일 후 남편은 매일 같이 아내의 직장까지 아내를 출퇴근 시켜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아내에게 서로 직장이 너무 머니 혼자 출근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에 아내는 남편에게 너무 섭섭했습니다. 또한 그런 말에 배신감까지 느꼈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지팡이를 의지하여 많이 넘어지기도 하면서, 버스를 타고 혼자 출퇴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정도 익숙해진 2년이 지난 어느 날 버스 운전기사님이 부인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부인은 복도 많소. 매일 남편이 버스에 함께 앉아 있어 주고 부인이 직장 건물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지켜보다가 등뒤에서 손을 흔들어주는 보이지 않는 격려를 해주니까요."
버스 운전기사의 말에 부인의 마음은 눈 녹듯이 녹아내리면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아내가 버스에서 더듬거리다 넘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을 그 심정과 일으켜 주고 싶었을 순간적인 강한 충동과 사랑하는 아내가  혼자 슬퍼 울며 자신을 원망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던 남편의 심정은 어땠을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나를 돌아보지 않으신다고, 하나님이 나를 떠나셨거나 나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신다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원망을 들으시면서도 하나님은 나를 향한 당신의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버스 뒷좌석에 않아 부인의 원망과 고통을 바라보며 사랑의 마음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는 남편처럼, 우리를 여전히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죄를 짓거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는 못된 일을 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교만하고 시기하고 미워하고 다투고 게으르고 탐욕과 정욕과 환락에 빠져 있을 때를 하나님은 보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나를 보실 때에 얼마나 마음이 아파하실까요? 당신의 자녀가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릴 때 얼마나 슬퍼하실 까요? 그렇다고 부자간의 인연을 끊을 것입니까? 사람은 그럴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더욱 침 삼킬 동안도 놓치지 않으시고 사랑을 보여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의 매도 있고 질책도 하시지만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보고 계시며 사랑을 하신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징벌은 곧 날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오늘날 코로나19바이러스로 인해 非對面이 생활화되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간의 접촉을 가능한 한 제한을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가족 간의 결혼식이나 장례식에도 참석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사회적 거리두기를 무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가족과 이웃에게 자신도 모르게 코로나바이러스를 전염시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비대면이기 때문에 거리두기로 인해 사랑이 사라지는 사회가 되었다고 안타까워하시는 목사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니요? 오히려 더 깊은 사랑을 얼마든지 나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실제의 거리가 아니라 마음의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더 보고 싶고 그래서 편지로 인터넷 전화로 서로 애틋한 사랑을 나누게 됩니다. 이젠 학생들도 비대면 화상교육을 ffEo 공부를 더 절하게 되고,  회사원들도 재택근무를 할 때 일을 더 잘하게 된다는 통계도 나오고 있습니다. 문제는 마음입니다. 정신입니다. 이제 세상은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바로 물질세계가 아니라 정신세계 영적세계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새로운 세상이 오고 있는데 여기에 적응을 못하는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우울증에 걸리거나 여러 가지 심적인 병을 앓게 됩니다. 이런 정신세계의 문제를 의학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로봇이라면 뜯어 고칠 수 있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문제는 인간이 해결하지 못하고 창조주 하나님만이 해결할 수 있는 일입니다. 자동차가 고장이 났으면 자동차 정비사가 고치게 됩니다. 우주비행기가 공장나면 인공위성 기술자들이 고치게 됩니다. 인간에게 문제가 생기면 물론 육체적인 병은 의사들에게 만 아니라 정신적인문제 영적인 문제들을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의사들에게 환자를 사랑하라는 요구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의사는 사람을 사랑하는 직업이 아니라 사람의 병을 고치고 돈을 버는 직업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사들은 환자를 볼모로 파업을 할 수 있습니다. 직업인은 전문적 기능인으로 그 기능을 팔아 수익을 얻어 살아갑니다. 장사꾼에게 사랑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사람에 대한 장사꾼입니다. 장사꾼이 손님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돈을 벌기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백화점에 들어가면 어엿뿐 아가씨가 문 앞에 서서 허리를 굽히고 상냥한 목소리로 어서오세요하고 인사를 합니다. 그 아가씨가 손님을 환영하기 위한일이 아니요 그 일은 그가 맡은 직업이요 그 일로 월급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이란 자기유익을 구하기 위한 상대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진정한 사랑을 찾을 수 없고 이 진정한 사랑이 메마라 버린 현대 사회에 사람들의 정신적인 영적인 오류가 발생하여 문제가 생겨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소년들이 방황하고 사회인들이 타락의 길을 걸어 종당에 죄의 폭탄을 안고 살다가 팡 자신의 인생을 파멸해버립니다. 여전히 성추행사건이 일어나고 있고, 여전히 어린이유치원에서 아동학대가 일어나고, 여전히 음주운전으로 교통사고를 일으키고, 여전히 마약장사가 돈을 벌고, 여전히 보이스피싱을 하는 사람들, 여전히 종교사기꾼 이단자들이 사람들을 미혹하고, 왜 이런 사람들이 여전히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병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많은 어렵고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生老病死 가 파도처럼 미려오고 물러가고 하는 인생을 산다는 것이 고생바가지요 苦海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생은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great joy to all people ’입니다. 눅 2:10.11에서 천사가 말하였습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Don't be afraid! I bring you good news that will bring great joy to all people. The Savior-yes, the Messiah, the Lord-has been born today in Bethlehem, the city of David!).”
예수그리스도가 우리 인생의 큰 기쁨이 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람하사 동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자 마다 실망치 않고, 괴로움이나 고통을 당하거나 멸망치 않고, 기쁨을 얻게 되고, 소망을 얻게 되고, 위로를 얻게 되고, 용기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한량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바는 사람이다. 꿀꺽 침 삼킬 동안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절망이 없습니다. 좌절이 없습니다. 불안이 없습니다. 걱정 근심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눈동자같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지켜주신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에 주님을 멀리 할 수 없습니다. 날마다 주님께 가까이 더 나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말하십시오.  “여보시오, 그렇게 육체적으로 골골하고, 정신적으로 벌벌떨며, 영적으로 흔들리면서 인생을 바람 따라 살다가 어디로 가려고 하십니까?” 라고 말하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주안에서 항상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받아 기뻐하며 감사하며 살다가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하십시오. 
하나님은 환란이나 시험 중에도 우리와 함께하시고, 밤이나 낮이나 어떤 위험을 만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광야 같은 이 험한 세상을 걸어갈 때 나 혼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나의 지식이나 재산이나 내 능력이 대단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우리의 인생을 이끌어 주십니다.

사랑은 영원하고 아름답고 위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그 큰 사랑의 능력이 우리가 무엇을 하던지 어디를 가던지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의 사랑받고 사는 사람은 예수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승리할 것입니다.
롬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 승리의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비록 비대면 거리두기 세상이라 해도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 언제나 둘로 나누지 않고 하나로 만듭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를 하나로 만들고 나와 너를 하나로 만들고 심지어 원수된자와도 하나도 만듭니다.  가족 간에 하나 되고, 이웃 간에 하나되고, 정치인들이 하나되고, 백성들이 하나 되는 우리 사이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사랑의 능력이 언제나 우리를 묶어 하나 되게 해줍니다.
우리가 분명히 믿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에는 성령충만하여  은혜가 있고 능력이 있어 어려움도 잘 이기고 행복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노르웨이의 탐험가 난센이 1893년 6월 북극을 탐허하러 가던 중에 한번은 북극 인근의 바다 깊이를 재려고 긴 동아줄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 끝이 바다 밑바닥인 해저에 닿지 못했습니다. 그는 "바다가 이 동아줄보다 더 깊음" 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다음날 더 긴 줄을 가져다가 깊이를 재 보았으나 역시 해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같은 작업을 며칠 계속하였지만 북극의 깊은 바다의 깊이를 잴 수가 없었습니다(가장 깊은 곳은 4665m). 결국 난센은 그의 일기에 이런 메모를 남겼습니다. "이 근방 바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같다. 끝없이 깊은 바다이다. "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감히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이해가 부족하여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따라서 세월 베틀의 북처럼 빨리 가고 눈깜짝할 사이 여름이 지나 가을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도 한없이 깊어짐을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부르는 찬송이 있지요?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작사자 레만(Frederick Martin Lehman, 1868-1953) 목사는 지방의 작은 교회에서 목회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교회 너무 어려워 직장을 얻어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1917년 어느 날, 직장에서 일하다가 잠깐의 짬을 내어 아내가 준 도시락을 쌌던 신문을 펼쳐 들었습니다. 그 신문에 기가 막히게 좋은 히브리 시가 있었습니다. 레만목사는 레몬상자에 걸터앉아 벽에 기대어, 몽당연필로 첫째 연과 둘째 연과 후렴을 작사하고, 셋째 연은 히브리 시를 운을 맞춰 고처 썼습니다. 바로 이때 쓴 가사가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시를 썼던 방은 정신병원 병동으로서 환자가 죽어 나간 방이었습니다.
(***오소운 목사에 의하면, 레만목사가 신문에서 본 히브리 시는 독일 봄스(Worms)에 있는 유대인 회당의 찬양대 지휘자, 마이르 벤 이사크 느호라이(Meir Ben Isaac Nehorai)가 아랍어로 1050년에 쓴 유대교 찬양시「하다무트(서곡)」'Haddamut(Prelude)'에서 번안한 것인데, 18개국어 이상으로 번역된 것이다. 「하다무트」'Haddamut' 는 히브리 명절 칠칠절(샤부오트, Shavuot) 첫날에, 십계명을 읽기 직전에 부르는 찬송으로서, 십계명의 서곡에 해당된다. 이 찬송의 주제는 창조주의 능력의 놀라움과, 기다리는 새 세계의 광채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의 찬란함을 노래하는 것이다. 이 시는 난해한 아랍문학으로 씌어있어 그 함축된 뜻을 영어로 번역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 뜻은 대강 이렇게 번역된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하늘 전체를 양피지로 삼고, 땅위의 모든 초목을 펜으로 삼아, 온 세상의 물을 다 잉크로 하여, 온 인류가 필기사가 되어 죽을 때까지 써도 다 쓸 수 없다. )

영어 가사 / 영어번역 / 우리말 찬송
1.
The love of God is greater far Than tongue or pen can ever tell;
하나님의 사랑은 혀와 펜이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크심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It goes beyond the highest star, And reaches to the lowest hell;
그 사랑은 가장 높은 별보다 더 높고, 가장 낮은 지옥에까지 미칩니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The guilty pair, bowed down with care, God gave His Son to win;
근심으로 짓눌린 죄 많은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은 승리하도록 그의 아들을 주셨습니다;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His erring child He reconciled, And pardoned from his sin.
하나님의 죄만은 자녀들과 화목하시어, 그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 하셨네

후렴:
Oh, love of God, how rich and pure! How measureless and strong!
오.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풍성하고 순수한가! 얼마나 무한하고 강한가!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It shall forevermore endure The saints’ and angels’ song.
그 사랑은 영원히 계속되리라고 성도들과 천사들의 찬송부릅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 하세

2.
When hoary time shall pass away, And earthly thrones and kingdoms fall,
나이 늙어 백발의 시절이 지나가고, 땅에서 왕처럼 지나던 때가 지나가,
괴로운 시절 지나가고 땅 위의 영화 쇠할 때

When men who here refuse to pray, on rocks and hills and mountains call,
여기서 기도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이, 바위와 언덕과 산들에서 (하나님을)부를 때,
주 믿지 않던 영혼 들은 큰 소리 외쳐 울어도

God’s love so sure, shall still endure, All measureless and strong;
하나님의 사랑은 확실하게 계속되리니 측량할 길 없어요 강력하십니다.
주 믿는 성도들에게 큰 사랑 베푸사

Redeeming grace to Adam’s race The saints’ and angels’ song.
세상 모든 인류를 구원하심을 하늘의 성도들과 천사들이 찬송 부릅니다. 
우리의 죄 사했으니 그 은혜 잊을까

3.(유대교찬송그대로)
Could we with ink the ocean fill, And were the skies of parchment made,
우리가 잉크로서 바다를 채우고, 하늘을 두루마리로 마를 수 있어도,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Were every stalk on earth a quill, And every man a scribe by trade;
땅에 있는 모든 줄기가 펜촉이 되고 모든 사람이 서기관이 되어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To write the love of God above Would drain the ocean dry;
높은 하나님의 사랑을 쓸려면 (잉크의)바다가 말라 없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Nor could the scroll contain the whole, Though stretched from sky to sky.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펼치더라도. 두루마리에 (하나님의) 모든 사랑을 담지 못합니다.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네.


우리 라온코이노니아는 날마다 일마다 침 삼킬 동안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는 성도들의 신앙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라온코이노니아를 통하여 우리를 더욱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의 품안에서 큰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지금 세상이 코로나19바이러스로 온통 오염된 비대면 거리두기 세상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더욱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으로 앞으로 남은 52일, 남은 한해를 승리하며 살아가기를 우릴 사랑하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0년 11월 15일 주수감사절아침예배  롬 9:19-29  하나님의 관용


11월 16일은 유네스코 창설 71주년 기념일이자, 세계 관용의 날이기도 합니다. 세계관용의 날(International Day of Tolerance)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50주년, 유엔 창설 50주년, 유네스코 헌장 채택 50주년을 맞던 1995년 11월 16일 제28차 총회에서 제정되었습니다. 당시 총회에서 '관용의 원칙에 관한 선언'을 채택하고, 이 날을 '세계관용의 날'로 정하였습니다.

관용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관용에 대해 우리 국어사전은 남의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유네스코에서 발표한  <관용의 원칙에 관한 선언(1995)>에서는 ‘관용이란 우리 세계의 문화와 우리의 표현 형태, 인간 존재의 방식 등의 풍부한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며, 수용이며, 이해이다. 그것은 지식, 개방성, 커뮤니케이션, 사상과 양심과 신념의 자유에 의해 증진된다. 관용은 차이 속의 조화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관용의 실천은 사회의 불의를 용인한다든지, 또는 자기의 확신을 포기하거나 약화시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그것은 한 사람이 자유롭게 자기의 확신을 지키고, 동시에 다른 사람이 그들의 확신을 지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뜻한다."관용을 프랑스말로 '똘레랑스(Tolerance)'라고 합니다,(***이하 인터넷 2007. 6. 25.백두대간. 그 스물두번째(하늘재~차갓재)이야기 참조)   '홍세화(洪世和, 1947년 12월 10일 ~ 서울대 외교학과졸업, 진보적운동가)'라는 사람이 쓴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라는 책에서 프랑스의 똘레랑스를 소개하였습니다. 그는 엄혹한 군사정권 시절 프랑스로 망명하여 빠리에서 택시기사로 일했고 그 경험을 책으로 남겼습니다. 그 책 속에 프랑스의 톨레랑스 정신에 대해서 설명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 정서는 '정(情)'이라하면 프랑스는 '똘레랑스'가 프랑스 사람들의 마음가운데 자리 잡고 있습니다. 프랑스 공원의 잔디밭에는 "출입금지" 팻말 대신 "존중하시오, 그리하여 존중하게 하시오"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고 합니다. 잔디밭에 들어가지 말라는 금지의 말보다는 잔디밭을 존중함으로써 스스로 존중받으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프랑스 사회 전반에 내재되어 있는 똘레랑스는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 및 다른 사람의 정치적, 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尊重)'을 뜻합니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나와 다른 것에 대한 적극적인 용인(容認)의 자세'가 바로 똘레랑스라 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 코로나19바이러스로 인해 이런 관용의 정신이 희미해지고 있는 프랑스를 보고 있어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는 흔히 '다르다'란 말과 '틀리다'란 말을 혼동하여 쓰곤 합니다. 누군가 나와 다른 의견과 사상을 가지고 있으면, "당신은 나와 틀려!"라고 말하곤 합니다. "당신은 나와 생각이 달라."라고 표현해야 하는 데도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나와 생각이 틀린 사람은 금세 죽일 놈이 되어 버리고 타도되어야 할 대상이 되어 버립니다.
대통령 후보 될 사람들이 TV에 나와 토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토론은 기본적으로 상대방 의견의 경청(傾聽)이 우선입니다. 먼저 상대의 의견을 경청한 후 내 의견을 발표하고 논리적 공방을 거친 후 결론에 접근하는 것이 토론의 과정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경청이 아니라 무조건 공박하고 무시하고 거친 말로 상대를 비난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뮬론 우리나라 정치에서 관용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런 관용 없는 정치인들에 의해서 오늘날 우리나라는 대단히 혼탁하고 오염된 죄악의 사회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타인과의 차이를 받아들이는 것. 칼빈과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종교에 대한 자유 개념에서 관용이 처음 시작되었으며, 이후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관용은 피부 색, 신체, 종교, 사상, 성별 등의 여러 차이에 대해서 차별하거나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이 아닌 서로 다른 점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관용사상은 형제에게 화를 내지 않는데서 부터 시작합니다.
마태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 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예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라는 말씀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이라는 말과 같은 동등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 말씀대로 우리는 순종해야합니다.
헬라어에서 '화를 낸다'는 표현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두모스'라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오르게'라는 말입니다. '두모스'는 가랑잎이 활활 타다가도 금방 꺼지는 것처럼... 기분이 나쁠 때 감정이 폭발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불끈 화를 냈다가 스르르... 하고 그 화가 식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르게' 라는 말은 어떤 사람에 대해서 한번 화를 냈다 하면 그 화를 두고두고 마음에 담아 두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대할 때 좋은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삐딱하게 봅니다. 말끝에 비아냥하거나 조롱하는 말을 하게 됩니다. 그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리고 기회를 엿보다가 저수지의 둑이 터지듯 분노를 쏟아냅니다. 그러다가 정말 살인하는 겨우도 있습니다. 
'라가'라는 말도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라가'라는 말은 "이 놈, 이 자식, 멍청이 같은 놈,  이 상놈의 새끼“ 그런 무시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들은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무시를 당한 사람은 마음속에 있는 분노의 창고에 담아둡니다. 

우리 주님은 이 분노 화내는 자체가 살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형제를 향해서 마음속에 분노를 갖고 있는 그 자체가 살인하는 행위요, 형제를 향해서 말속에 분노를 담는 것도 살인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칼을 들고 사람을 찔러서 피를 흘려야 살인인줄 알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손에 칼을 들기 전에 벌써 분을 품고 마음속에 칼을 갈고 있는 사람도 살인한 자와 똑같이 보신다는 말입니다.

살인하지말라는 말씀은 십계명 제 6계명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살인이 아닌 다만 화火내고 분憤내고 노怒하였을 뿐이니 자기는 전혀 6계명을 어기는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신다고 했습니다. 역대상 28:9절에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윤석렬 검찰총장은 마음에 칼을 갈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조국 전 법무장광도 마음에 칼을 품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STOP! 해야 합니다. 여기 더 나아가면 정말 칼부림 날 것입니다. 옛날 당파 싸움처럼 칼부림나면 죽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아니 국민들이 다치게 됩니다.
요일 3:15에 사람에 대한 증오를 마음에 품는 것은 곧 살인하는 죄를 짓는 것이라 말씀하였습니다. 또한 요일 4:20에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결코 여호와를 사랑 할 수 없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억울한 일을 당하여도 결코 상대방을 미워하거나 증오심을 품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눅6:27. 28에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아가파테 엨흐드루스 휘몬) 너희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칼로스 포이에이테 토이스  미수신 휘마스)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율로게이테 투스카타로메누스)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푸로슈ㅎ케스데 페리 톤 에페레아조톤 휘마스).”고 하셨습니다. 원수를 선대하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기독교인입니다. 누구는 싫고 누구는 좋고 구별하고 나누고 분리하여 사람을 만나는 것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관영이라 쓰고 양행이라 읽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옛날 중국의 장자라는 분의 글(제물론)에 是以聖人和之以是非  而休乎天均  是之謂兩行(시이성인화지이시비  이휴호천균  시지위양행)이란 말이 있습니다. “성인은 옳다 그르다하는 편견을 무너뜨리고 편안히 천균에 머문다. 이를 양행이라 한다”란 말입니다. 자연 상태에서 유지되는 균형감각을 지닌 조화로운 마음을 가진다면 천균에 머물게 되니, 옳다 그르다는 지식의 작용을 그치고 저절로 그러한 자연의 경지에서 마음을 쉬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시비는 사라지고 마음은 지극히 조화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일컬어 양행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천균이란 자연의 조화를 말하고 양행이란 옳고 그름을 다 포용하는 통전적 사고를 말합니다. 그런데 과연이 장자의 말처럼 천균양행을 성취한 사람이 역사상 누구냐라는 것입니다. 이 장자의 말을 기독교적으로 해석하면 편견을 무너뜨리고 내편 네편을 가리지 않는 것이 양행을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관용이라 하겠습니다, 이 관용을 원수의 장벽을 허물어 하나 되게 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和睦으로 장자의 천균양행을 이루시었다라 할 것입니다.

20세기 초 미국의 최대 갑부였든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가 뉴욕의 마블교회에서 신앙 간증을 했습니다. 그때 마블교회의 온 회중들이 카네기의 간증을 들으며 큰 깨달음과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어릴 때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는 울먹이며 어릴 때의 기억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미주리 주의 농촌에서 몹시 가난한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저녁 잠자리에 들 때 반드시 그의 곁에 와서 "하나님이 너를 돌보아 주신다."라는 말을 잠들 때까지 반복했다고 합니다. 그는 "사실 저녁 식사를 굶고 잠자리에 들어간 밤은 한 번도 없었는데, 그 한 조각의 빵 속에는 어머니가 계셨고 하나님이 계셨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곳이든 계십니다. 우리가 일하고 있는 일터나, 가정 안에서나, 잠든 곳에서도,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이 분의 성공비결은 진실한 인간관계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인간관계의 중심에는 평생 관용(寬容)을 인생의 기반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용의 마음을 가지게 된 배경에는 청년 때의 소중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거액의 공금(公金)이 든 가방을 가지고 기차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좌석이 없어 승강구 통로 바닥에 앉았는데, 깜빡 조는 사이 가방이 기차 밖으로 튕겨나갔던 것입니다. 다급해진 그는 기관사에게 뛰어가 호소를 했습니다. 다행히 이해심 많던 기관사는 매우 어려운 일인데도 열차를 후진시켜 주었습니다. 이 때문에 카네기는 개울가에 떨어져 있던 거금의 가방을 찾았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개울가에서 돈 가방뿐 아니라 소중한 인생의 보물도 함께 찾았던 것입니다. 그 보물은 포용과 관용이었다. 의도적으로 저지르지 않는 한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의 실수는 품어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이후 그런 각오가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주었고, 경영에 성공을 불러온 것이다.

하나님은 관용의 하나님이십니다. 태초에 아담과 이브가 범죄하였을 때에 하나님이 관용을 베풀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당장에 죽었을 것입니다.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관용ㅇ,로 이어진 역사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관용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도생성자 예수님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관용하시니 누구든지 주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관용을 받아 죄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시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바로 하나님의 관요하심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은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관요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관으로 구원 받은 우리도 역시 관용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빌 4:5에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관용의 사람이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디모데전서 3장 3절에서 바울은 장로들에게 관이 필요함을 말씀하십니다. 장로뿐 아니라 모든 교인들의 관용으로 세워진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과연 기독교인들에게서 관용의 마음을 얼마나 보여주고 있는가? 우리사회가 이처럼 어지럽고 어두운 세상이 된 이면에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할 기도교인들이 주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 간에 서로 미워하고 싫어하고 원수 맺고 다투는 일들이 교회마다 차고 넘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관용을 잃어버렸습니다. 왜 잃어버렸습니까? 감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는 물론 사람관계에서도 서로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은 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너가 있음으로 내가 존재합니다. 사랑은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너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원수라도 사랑하라고 사셨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에 원수란 없다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사전에 원수 항목이 없습니다. 만일 나의 생명의 책에 아무게는 나의 원수라고 적혀 있다면 나는 결코 천국에 가지 못합니다. 원수 없는 사람만 천국백성 자격이 있습니다. 천국에는 미워하는 사람은 전혀 없습니다. 모두 관용하고 포용하고 사랑을 나눌 뿐입니다. 그러므로 미움이 없고 다툼이 없고 실어하는 사람이 없어야 천국백성이 됩니다. 천국 문 앞에서 마일 하나님이 아무게를 미워하는냐? 우리의 속마음을 다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이 길로 지옥엘 가겠느냐 아니면 세상에 다시 가서 그 사람을 사람하고 다시 오겠느냐고 물으신ㄷ가면 무엇이라 말할 것입니까? 우리는 모든 사람을 향해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감사의 마음을 가지면 관용하게 됩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든지 사랑하고 포용하고 영서하고 함께 하나님을 향한 천국 길을 가게 됩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그리고 내일 16일은 유네스코가 제정한 세계관용의 날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그를 위해서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필 흘려 그의 죄까지 대속하시었음을 믿어, 모든 사람에게 여러분의 관용을 보여 주십시오. 오늘부터 나에게는 미워하는 사람 없다. 싫어하는 사람도 없다. 마음상할 사람은 전혀 없다, 나는 그들을 사랑한다고 다짐하십시오. 아! 우리 정치하는 사람이 이런 관용의 정치를 한다면 우리나라는 3년 안에 세계 강국이 되도록 하나님이 축복하실 터인데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우리 라온코이노니아는 하나님의 관용하심으로 구원받은 천국백성 관용공동체입니다. 가정에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관용을 보여주심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축복을 받아 땅에서 잘되고 영생복락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2020년 11월 22일  주일아침 예배  먼 1: 1-25 빌레몬과 오네시모


빌레몬은 골로새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빌레몬의 집에서 골로새교회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빌레몬이 아들과 함께 사업차 에베소에 갔다가 사도 바울의 3차 전도 여행 때 에베소에서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추정됩니다.(행19:10,26) 그리고 에베소에서 여러 날 바울로부터 교육을 받은 그는 골로새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 골로새 사람들에게 전도하여 자기 집에 모아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골4:7,9,15,16) 그리하여 골로새교회가 탄생이 됩니다. 이때 바울은 제자인 에바브라를 보내 골로새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게 하였습니다.(골1:7 에바브라는 골로새교회만 나니라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서도 활동을 하였고 한때 바울과함께 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몬 1:23 ) 골로새교회는 바울의 제자인 에바브라의 지도를 받으며 부흥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네 집에 있는 교회(테 캍 오이콘 수 엨클레시아: 가족 눅9:61 가족이 살고 있는 집)’라는 말씀을 하였습니다.

1절에서 바울은 빌레몬을 가리켜,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ㅎ필레모니 토 아가페토)’라 칭하였습니다. 로마 옥중에 있는 바울이 빌레몬을 가리켜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라 그리고 동역자(쉬네르고)라고 부르고 그의 부인과 아들을 기억할 때마다 기쁨과 위로를 받으므로 항상 위하여 기도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는 것을 보면, 바울이 빌레몬을 신임하고 그의 믿음이 얼마나 훌륭한가를 인정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제가 50년 동안 목회하면서 부산 전주 제주 군산에서 목회를 하였는데 수많은 교인들을 만나 그들로부터 기쁨과 위로를 받았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이름을 기억하는 분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합니다. 지금까지 그 믿음을 기억하고 사랑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 그리고 위하여 축복을 기도하게 되는 이름들은 열 손가락에 채워지지 않습니다. 말씀 드린대로 당시 그 성도들을 위하여서 얼마나 기도하였고 때로는 눈물로 간구하며 하나님께 밤낮으로 기도하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분들의 얼국마저 까마득합니다. 그러나 몇 사람들은 아직도 그 이름을 기억하고 그들의 사랑과 위로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하고 축북을 비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제게 주신 큰 은총입니다.
제가 나이 70이 되어 은퇴하던 마지막 주일 설교할 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20년이 넘도록 매일같이 하루도 빠짐없이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며 여러분의 건강하기를 기도하였고, 여러분의 가족들이 평안하기를 기도하였고, 여러분의 사업이 잘 되기 위해 이 강대상의자에 엎드려 기도하였는데, 이제 오늘로 그 기도가 마지막입니다. 여러분을 위한 저의 기도는 오늘로 끝났습니다. 다시는 여러분의 이름을 들어 기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여러분을 위한 기도는 다음 후임목사님이 기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후임자에 대한 전임자의 의무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몇 사람 여기 계시는 바로 여러분을 위한 제 기도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멈추어지지 않고 제가 세상에 끝 날까지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할 것이요, 이는 아직도 여러분이 저에게 기쁨과 위로를 주고 있기 때문이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그래서 여러분을 위한 저의 축복의 기도는 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게 아직도 위하여 기도할 여러분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제게 주시는 큰 복이라 하겠습니다.

바울 사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세계를 다니며 전도하며 믿음과 사랑을 나누는 성도는 참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서신에 기억하여 나오는 수는 많지 않습니다. 그렇게 기억되는 성도란 그만큼 바울의 마음에 잊을 수 없는 귀한 성도였던 것입니다.

빌레몬은 예수님을 믿은 후 자기 집을 교회로 사용하였습니다. 자기가 골로새의 첫 번째 교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지역 전도를 하였습니다. 이는 마치 예루살렘 교회가 마가 의 다락방에서 시작되었고, 빌립보 교회가 루디아의 집에서, 고린도 교회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의 가정집에서부터 시작된 것과 같습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복음을 듣고는 자기의 집을 예배 처소로 제공하는 것에서부터 신앙생활을 실천하였습니다.

김제 주산면 대창리를 번드리라고도 불렀는데, 끝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평야에 햇빛이 비추면 논이 빛에 반사되어 번들번들 빛난다고 해서 번드리 마을이라고 불렀습니다. 117년 전, 1903년 초 이 마을에 최윤중 최학삼 최학성 최태산 최씨 문중의 여러 사람들이 전킨선교사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4월10일 최윤중의 집에서 예배를 시작하여 이름을 번드리교회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 교회가 부흥하여 대창교회라 불렀습니다. 최윤중씨는 그 교회 장로가 되었고, 최학삼씨는 신학교에 들어가 목사가 되어 인근 여러 마을에 교회를 개척하기도 하였습니다.
지난번에도 소개하였습니다만, 대야면 지경을 100년 전엔 만자산 마을이라고 불렀습니다, 1896년 4월 초이 마을에 살던 최흥서 최관보 강채오 이양화 정백현 정치선 삭녕최씨등 일곱 사람이 수덕산에 서양선교사가 와서 예수를 전한다는 말을 듣고 서양사람 구경 가자고 집을 떠났습니다. 만자산에서 통사리를 지나 발산리를 거처 운회리를 지나고 아동리를 지나 조촌 궁말 경포강을 건너 서래장터에서 국밥을 사먹고 째보선창을 지나 마침내 수덕산 선교사집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들은 전킨선교사를 만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여 매 주일 지경에서 수덕산까지 30리길을 걸어 예배를 드리러 왕복하였습니다. 그리고 2개월 후 6월 14일, 최흥서의 집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만자산교회, 지금의 지경교회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4년 후 1900년 정식으로 예배당을 지어 봉헌예배를 드리고 교회이름 간판을 붙였습니다.  올해 지경교회는 120주년 기념주일 예배를 드리고 기념성경을 제작하였습니다. 최흥서씨는 후에 장로가 되었고 그의 아들들이 의사가 되고, 이양화씨의 아들은 전북도지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120년 전 전킨 선교사에 의해서 전도 받은, 군산, 익산, 김제, 서천, 부여에 사람들이 예수 믿기 시작하면서, 모두 자기 집에서부터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여 교회가 출발하고 오늘에까지 성장하여 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처음 교회들이 가정집에서부터 시작하였습니까? 바울선생님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이런 섬김과 헌신, 희생과 봉사의 삶으로 우리 집이 하나의 작은 교회가 되어  우리들과 가정과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바울시대 유대인들의 계층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유대인의 계층의 맨 위는 제사장이 있고, 그 아래로 레위인들과 일반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다음부터 부정한 일로 인해서 제사장 직분을 수행할 수 없는 제사장 계층, 개종자들, 자유한 노예들, 사생아들, 기브온 사람들,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고아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를 알지 못하는 고아들입니다. 이렇게 유대인의 공동체 안에 열 가지의 계층들이 있다고 해서 이들 모두가 유대인으로서의 대우를 동등하게 받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만 보더라도 제사장, 레위인, 일반 이스라엘 사람들은 서로 간에 통혼을 할 수 있지만 비록 유대인들의 공동체 안에 함께 거주하고 있으나, 다른 그룹의 사람들과 결혼하게 되면, 그 자녀들은 사생아의 취급을 받습니다. 다른 그룹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살고 있지만 유대인 공동체의 10가지 계층 부분 안에 조차도 들지도 못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노예”들입니다. 이방인 노예가 유대인에게 팔릴 때에 여자 노예는 정결례를 통해서 유대교로 개종시키고, 남자 노예는 할례를 시켜서 유대교로 개종시키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팔려온 노예들이 민족적으로 유대인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노예는 그저 재산일 뿐입니다. 노예는 어떤 한 재산도 소유할 수 없었고, 노예들의 노동의 소득은 주인의 것이었습니다. 노예에게 속한 것은 전부 주인의 것이었어요. 심지어는 노예의 자녀들까지도 말이지요. 노예를 소유한 주인들은 노예를 선물로 누군가에게 주거나 팔 수 있었고 자신의 자녀들에게 상속할 수도 있었습니다. 재산에 불과한 노예들이 주인들로부터 가혹한 체벌과 학대를 받은 들,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땅의 대부분의 노예들은 (유대인이 아닌 이상)두로와 아라비아에 있었던 노예시장을 거쳐 들어왔습니다. 3BCE 팔레스타인 땅에서 노예가 매매 되었다는 파피루스의 기록이 가장 오래된 노예에 대한 성서 이외의 기록이고, 제2차 성전시대의 유다 문헌에서도 노예들을 세워놓고 가격을 매기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런 노예들이 꿈꾸는 최고의 목표는 “자유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더 당시 로마의 노예제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대 로마는 노예의 노동력 위에 지탱되던 제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로마 제국 내에만 약 6,000만 명의 노예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건 자유인들보다 노예들이 훨씬 더 많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당시의 인구 밀도를 고려할 때, 그 숫자는 참으로 어마어마한 숫자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 그 많은 노예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무서운 국법이 아니고서는 안 되었습니다. 따라서 노예들의 인권은 전혀 고려되지 아니했습니다. 그들은 그저 말을 하는 재산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주인은 그에게 체벌은 물론이고 고문이나 사형까지도 마음대로 가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주인으로부터 도망을 친 노예가 있다면, 그들은 전문적인 인간 사냥꾼들에게 추적될 것이고, 그렇게 붙잡혀 온 노예들은 이마에 도망자를 상징하는 Fugitivus(영, Fugitive)의 머리글자인 F자를 인두로 새겨 넣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나마도 우호적인 주인일 경우이고, 대게는 십자가에 매달려 천천히 말라죽은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도망갔다 잡힌 노예에 대한 처우에 대해서 유대문헌에서 찾을 수 없지만, 일반적인 노예의 상황이 그럴진대, 도망갔다 잡혀온 노예가 온전할 리는 없을 것입니다.

빌레몬의 집에 오네시모라는 노예가 있었습니다. 오네시모라는 젊은 노예가 귀중품을 훔쳐 달아났습니다. 당시 주인집 물건을 훔쳐 달아난 노예는 잡히자마자 즉결처분으로 죽게 됩니다.  그러나 빌레몬은 노예가 도망갔다고 신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오네시모는 도망 중에 또 다른 범죄를 범하여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오네시모는 자신이 도망 친 노예라는 사실을 감추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인지 그 오네시모가 붙잡혀 바울이 갇혀있는 감방에 오게 된 것입니다. 로마 감옥에 들어온 오네시모에게 바울이 복음을 전하려고 하니, 오네시모는 자신의 신상을 털어놓으면서, 골로새교회 빌레몬의 집에서 노예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만일 자신이 도망친 노예라는 것이 발각되면 곧장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빌레몬 집에 있었을 때에 바울선생님에 대해 익히 들었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바울은 이런 오네시모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게 하였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바울은 마치 복음의 가정교사가 되어 성경에 대해서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서, 십자가와 구속의 은총,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복음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이제는 어였한 기독교인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오네시모를 바울은 복음으로 변화시키고 무척 사랑하고 신뢰하였습니다. 그래서 12절에 “나의 심복(에마 스플랑ㅎ크나)”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심복이란 말은 “나의 심장, 나의 창자”란 말입니다. 비록 도망친 노예였지만 바울은 그를 가리켜 10절에서는 “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혼 에게네사 엔 토이스 데스모이스)” 감옥에서 낳았다라고 까지 말 합니다. 이제 오네시모는 과거의 노예 오네시모가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 거듭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11절에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아ㅎ크레스토:아+크레스토스 유익하지 않은, 쓸모없는)”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한(유크리스톤::유+크레스토스 아주 유익한, 대단히 쓸모있는)”사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오네시모라는 이름의 뜻과 관계가 있습니다. ‘오네시는 희랍어 Onesimos에서 왔는데 그 뜻은 '유익한 사람(오네시스 :이익에서 온 말)'이란 말입니다.

빌레몬이란 이름의 의미는 ‘사랑을 간직한 자’ 라는 뜻입니다. 부인 압비아라는 이름의 의미는 ‘풍부’라는 뜻이고, 아들 아킵보는 ‘마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름 그대로 빌레몬은 사랑으로 온 교회를 섬기었고, 부인 압비아는 교인들을 잘 접대하며 풍성한 은혜를 나누었고 ,아들 아킵보는 마부처럼 열심히 교회를 위해 헌신하였고, 바울을 따라 전도활동을 다니다가 바울이 옥에 갇히자 바울의 명에 따라 골로새로 돌아왔습니다. 후에 옥중에 있는 바울로부터 “주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는 권면을 받는데, 골4:17의 직분은 헬라어 '디아코니안'으로 '설교사역'을 암시합니다(Lightfoot, Merklein). 바울이 골로새서를 쓰던 당시 아킵보가 골로새 교회를 목양하고 있었음을 알수있습니다(O'Brien).

이름값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름값의 사전적 의미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상태나 정도에 맞는 노릇이나 됨됨이'입니다. 어느 도시던 길목에 "아기 이름 잘 지어요."라는 철학관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름도 태어날 때 부모님이 철학관에서 지은 이름도 있을 것입니다. 누구나 이름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름을 지을 때 아주 신경을 많이 쓰고 이름의 뜻을 잘 알고 잘 지어서 복을 많이 받으라고 유명한 작명가에게 의뢰하는 일은 부모의 자식사랑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름도 잘 지어야 하지만 이름값도 잘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禮記曰 玉不琢 不成器 人不學 不知義 예기왈 옥불탁 불성기 인불학 부지의
"예기"에 말하기를, "옥은 다듬지 않으면 그릇이 되지 못하고,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의(義)를 알지 못하느니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이름이라 해도 그 인무의 됨됨이가 信과 義로 다듬어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때에야 제 이름값을 한다고 하겠습니다.
앞서 소개한 빌레몬 압비아 아킵보 그리고 오네시모 이름들의 의미는 모두 좋은 의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복음으로 심령이 깨끗하게 되고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되지 않았다면 그냥 남들이 부르는 호칭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로서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영생에 참예하는 이름일 뿐만 아니라, 이름 그대로 복을 받아 주님을 위해 쓰임 받는 이름으로 2000년이 지난 오늘 우리에게도 하늘에 별처럼 빛나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지 않습니까? 

일제시대 유명한 이용도(1901~1933)목사님이 계셨는데 그분의 서간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모시고 다니는 나귀가 되면, 우리의 값은 주님께서 계심에 있고, 우리의 영광은 주님께서 타심에 있다” 이용도 목사님의 호가 시무언(是無言)이라 하였습니다. 이에 설명하기를 “나의 별명(호)을 시무언 이라 함은, 말이 없음이 옳고, 메시야가 오기를 기다리며, 일생을 성전에 지내다가 마침내 주님을 만나서 즐거워하던 시(므)온을 그리워함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이름이 예수그리스도와 관련되어질 때 이름값을 제대로 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용도 목사님은 살아 계실 때 이름값을 톡톡히 하셨고 세상 떠나 그리워하였던 시온성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셨으니, 이용도 이름은 참으로 하나님께 충성한 귀한 이름으로 오늘날 많은 후배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제 이름 전병호(全炳昊)는 아주 평범한 이름입니다.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수백 명 그 이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컴퓨터 인터넷에 제 이름을 처 보면 몇 사람 안 됩니다. 그중에 야구선수도 있고 시인도 있고 북한에 원로 최고위 정치인도 있습니다. 그리고 저 말고 젊은 목사 한분이 전병호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에 대해서는 수많이 소개와 뉴스들을 기록한 것을 찾아보게 됩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그리고 목사로 쓰임 받지 않았다면 아무도 저 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어찌 알 것입니까? 제 이름을 아버님이 지어 주셨는데 빛날炳,  하늘 昊입니다. ‘병호’라는 이름은 많지만 ‘하늘昊’를 쓴 이름은 거의 없습니다. ‘하늘을 빛나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아버님께서 제 이름을 지으실 때 저를 목사 되게 하려고 그런 의미로 이름을 지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으로, 하나님을 빛나게 하는 직분자로 저를 세우시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게 하시고 몇몇 교회를 섬기는 자로 저의 이름값을 가지게 하셨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름을 잘 지었고, 부모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이름을 지어 주셨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천지창조주 되신 하나님을 믿고 주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총으로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았다면, 우리의 이름이 지옥 가는 명부에 기록되어 있을 것이지만, 천국의 생명책에 우리 이름이 기록되는 축복을 받았으니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이름값이라고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이름값은 하나님이 알아주는 높은 가치가 있는 이름인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스페인 출신의 유명한 화가 중에 피카소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워낙 유명한 사람이라 그가 그린 그림 한 점은 우리 돈으로 수백억 원을 하는데, 그가 그린 ‘꿈’이란 그림은 1626억2천만원이라고 합니다. 엄청난 금액입니다.

몇 년 전 피카소의 미공개 작품 한 점이 런던의 한 경매장에서 경매되었는데, 자그마치 293억 원에 팔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작품은 1943년에 만든 ‘황소머리’라는 조형물이 입니다. 하지만, 그토록 비싼 가격에 비해 그 재료는 정말 형편없는 것입니다. 기가 막힌 작품입니다, 잘 만들어서 기가 막힌 것이 아니라 어처구니가 없어 기가 막힙니다. 1943년 길을 가던 피카소가 우연히 버려진 자전거 한 대를 발견하고는 그 자전거에서 안장과 핸들을 떼어냈습니다. 그리고 그 안장에다가 핸들을 거꾸로 붙였습니다. 그게 다였습니다. 버려진 자전거 안장에 손잡이. 그리고 그 이름을 황소머리라고 붙인 것입니다. 그런데, 버려졌던 그 자전거,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그 자전거가 피카소의 손을 거치는 그 순간 293억이란 초고가 미술품으로 탈바꿈을 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길가에 버려진 부서지고 망가진 그 누구도 주어가지도 않는 고물 자전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볼품도 없이 녹이 쓸고 진흙과 먼지로 더럽혀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자전거가 피카소의 손에 의해 작품?으로 만들어 졌을 때는 더 이상 고물상에 버려질 물건이 아니라 엄청나게 값비싼 작품이 되었습니다.
39세에 세상을 떠난 이중섭(1916-1956)이란 화가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유명한 화가입니다. 그분이 6.25때 피난 가서 그림그릴 종이가 없어 담배 갑 속에 있는 은박지에 못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지금 그 그림 값이 수억 수십억 원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어떤 것이든 그것의 가치는 누구에 손에 의해 만들어 졌느냐가 결정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저 버려진 보잘 것 없는 것이지만 피카소의 예술적이고 창조적인 손에 의해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없는 만큼 훌륭한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담배 은박지에 못으로 긁적인 그림이 이중섭이란 화가의 혼이 담겨져 있음으로 그 가치는 어마어마한 것이 되었습니다.

거울에 비췬 나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얼마의 가치를 가진 존재일까? 생각해 봅니다. 언제 부터인가 거울 속에  호물때기 늙은이가 보였습니다. 딱 길가에 버려진 늙은이 모습입니다. 아무 쓸모없는 폐품과 같은 늙은이입니다. 그런 나를 지금도 하나님께서 취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손에 의해 아직도 새롭게 만들어 주고 계십니다. 피카소의 예술적인 손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손이 나를 새롭게 만드시고 있습니다. 우리들 모습가운데 하나님의 형언할 수 없는 솜씨가 있고 그분의 사랑이 담겨 있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 우리보다 더 값나가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보다 더 소중한 존재는 이 우주안에 없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저와 여러분입니다.

오네시모. 도망친 노예,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사람, 죽든 말든 신경써주는 사람 하나 없는 버려진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바울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자, 그는 위대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무익했던 자가 유익한 자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 도망친 노예가 후에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빌레몬과 오네시모는 다 순교자가 되어 우리 기독교 역사의 귀중한 한 사람들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바울의 신앙지도를 받은 빌레몬의 관용의 믿음이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주안에서 형제로 받아들임으로(1:16,17)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내 주변의 그 어느 누구와 주 안에서 한 믿음으로 함께 사랑과 소망을 나눈다면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내 삶의 가치 그리고 그의 삶의 가치를 드높이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세상가운데 복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 라온코이노니아 우리는 세상에서 믿음의 값을 높이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들의 신앙공동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코로나 병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가정을 이 어두운 세상 혼란한 사회가운데 지켜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0년 11월 29일  롬 5:1-11 Godact시대

흔히 이 시대를 언택트(un-contact) 시대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사람간의 접촉을 피하고 거리두기를 하는 시대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온택트(on-contact) 시대라고도 합니다. 온택트란  디지털기기-컴퓨터나 핸드폰으로 서로 연결하여 만나는 콘택트 관계를 맺는 시대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설교제목을 갓덱트(Godact)시대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 God-contact시대라는 말입니다. 또 이러한 코로나환난의 시대야 말로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때이다.’라는 의미로도 God-act시대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자 뿐 아니라, 믿는 자에게도 동일하게 코로나19바이러스 병에 걸려 고생을 하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외국에는 더 많이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 세계적으로 질병이 유행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난 경우가 많았습니다. 흑사병(BlackDeath, 페스트)을 비롯하여 한센씨병, 결핵, 발진티푸스, 매독, 콜레라, 장티푸스, 천연두, 홍역 마라리아, 뇌염, 독감 등 등 수많은 전염병에 의해서, 인류 역사상 수억의 사람들이,  전쟁이나 천재지변에 의해서 죽는 숫자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역사적으로 보면 수 백번 전염병이 돌아 수백만 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먼저 우리나라 역병 최초 기록만 하더라도 기원전 15년(bc15년) 백제 온조왕4년부터 시작됩니다. 그런
전염병이 조산시대에 매우 창궐하였으니 이는 전 세계적인 전염병의 여파가 우리나라까지 영향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79차례나 되고, 그 중 10만 명 이상 죽은 경우가 6차례나 있었습니다. 심할 때는 50만 명 이상이 죽었다고 기록되었으니 전체인구의 5%가 역병으로 죽기도 한 것입니다. 1392년부터 1891년까지 500년 동안 전염병이 발생한 햇수는 무려 160년이나 됩니다. 평균적으로 10년에 3번 이상 전염병이 유행한 셈입니다. 전염병이 가장 많이 발생한 시기는 1592년부터 1791년까지로 200년 동안 91회나 발생했습니다. 상대적으로 조선 초기 100년과 1792년부터 1891년 시기에는 각기 22년, 15년으로 발생 횟수가 적은 편입니다. 조선 중기에 있었던 지구의 기온 저하로 세계적으로  많은 전염병을 유행되었는데 그 영향이었던 것입니다. 1749년 44만 3천명, 1750년 60만 명이 전염병으로 죽었습니다. 1699년에도 25만 명이 전염병에 희생되었습니다. 400년전 현종 때, 임진왜란 전 1,200백만 조선의 인구는 6~700백만 까지 줄었고, 1750년 영조 26년에만 해도 전염병으로 22만3578명이 죽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영/정조 때 간신히 800백만을 유지하다가 1807년 (순조7년) <증보문헌비고>에 나오는 조선의 인구는 7,561,463명이었는데, 1835년의 인구는 6,615,407명으로 28년간 100만에 가까운 인구가 전염병으로 줄었던 것입니다. 1890년엔 일본 한국 만주지방에 코레라 병으로 5만 명 이상이 죽었고, 1895년 서울에서 5.000명이상, 1896년 두 달 동안 서울에서만 6,000명이상이 코레라 병으로 죽었습니다. 이 당시 전킨선교사가 서울 서대문밖에 진료소를 차려 많은 사람들을 치료하였습니다. 그래서 고종황제로부터 감사의 선물을 받은바 있습니다. 일제시대에도 그리고 6,26전쟁시대에도 코로라와 각종 전염병으로 수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쩌면 인류역사는 전염병과의 치열한 전쟁을 치르며 생존해 왔다고 하겠습니다. 역사상 코로나라는 병이 바이러스 폭탄을 퍼부으며 인간과 전쟁을 치르어 왔습니다. 결국 수많은 희생자를 냈습니다만 인간이 이겼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고통을 받고 힘들게 코로나아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 코로나병 뿐이겠습니까? 며칠 전 서울대학교분당병원에 가서 보니 각종진료실마다 진료 받으러 온 사람들이 마치 동대문시장 바닥처럼 그렇게 많았습니다. 그 큰 병원의 병실마다 빈틈없이 환자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수많은 병원마다 이처럼 환자들이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땅을 좀 더 가지기 위해 자원을 좀더 확보하기 위해 이념을 주장하기 위해 서로 전쟁을 하였습니다. 지금도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서로 세력다툼을 벌리며 싸우고 있습니다. 참으로 가소롭고 한심한 일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가장 큰 적은 바로 각종 병들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서로 손을 맞잡고 수망상조守望相助하여 인간의 불구대천 원수인 이 코로나 적과 싸워야 하는데 마치 동네 어린아이들 싸우듯 티각태각하는 모습을 코로나가 본다면(조선시대 당파싸움을 보았듯이) 허허 웃으며 인간들이 가소롭다 할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분명히 영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은, 병은 세상의 권세 잡은 자인 마귀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무기 중에 가장 강력한 무기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그가 가지고 있는 이 강력한 무기인 병으로 인간을 겁박하고 자신에게 얽어 메어 지배하여 왔습니다. 부적을 붙인다거나 무당을 통해 병 고친다고 굿을 하지만, 이것은 마귀에게 더 얽어 메는 일로 온전히 마귀의 종이 되게 하는 일입니다.

 

(코로나 쫒아내기위해 지안에 붙였던 부적)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에 가운데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네 죄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죄는 마귀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게 되자 마귀는 자기의 강력한 무기를 써먹을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억울해서 발악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코로나19바이러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러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마귀의 본질인 죄로부터 인간을 구원하러 오시었기 때문에, 우리는 비록 마귀가 그 강력한 무기인 병으로 우리를 얽어 묶으려하지만,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병 때문에 마귀의 종이 될 수 없는 일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비록 우리가 환난을 당하지만 환난에지지 않고 환난에서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환난을 당했다고 무서워하고 겁을 내어 슬퍼하며 운다면 이는 마귀에게 지는 일이요, 비록 환난 당하지만 담대히 환난과 싸워 즐거워하며 기뻐한다면 이는 마귀를 이기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라는 환난을 당하셨지만 승리하시었습니다. Godact 하나님과 더욱 가까이 합시다(약4:8). God-act환난 때에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이기십니다.

‘카이레테 니코멘 - 기뻐하십시오. 우리는 승리자들입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전 490년 지중해의 패권을 쥔 페르시아의 대군이 아테네를 치기 위해 마라톤평원에 서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연합군이 페르시아군대와 싸워 이기었던 제2차 페르시아전쟁이 있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아테네 군이 페르시아 군을 격파하자, 이 승전보를 알리려고 페이디피데스(필립피데스)라는 아테네 군의 한 병사가 마라톤 벌판에서 아테네까지 약 42.195킬로미터의 거리를 쉬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그는 장거리를 종주한 뒤 “카이레테 니코멘 "라고 외친 후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이 아데네 사람들에게는 ‘유앙겔리온 - 복음’이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기념하여 마라톤 경주가 시작되었습니다.

4세기 이후 동로마시대(비잔틴문화) 예수님을 상징하는 문자(christogram)로 ‘IS XS NIKA’(이에수스 크리스토스 니카)는 말로 ‘예수 그리스도 승리자’란 뜻입니다. 비잔틴 문화의 큰 특징은 프레스코(fresco)화법과 모자이크(mosaic)로 그린, 심지어 동전에 새긴 복음서를 껴안으신 예수님과 아이콘에 ‘예수 그리스도 승리자’ 또는 ‘예수 그리스도 만왕의 왕’이라고 쓴 크리스토그램에 있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기었다. 마귀권세를 깨트리고 승리하셨다”는 말은 바로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유앙겔리온-복음이 되었습니다.

요6:33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엔 토 코스모 에흐케테 드맆신, 알라 다르세이테,  에고 네니케카 톤 코스몬).”라고 말씀하시었던 것입니다.  바울도 골로새서 2장 15절에서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계시록 5장 5절에도 “울지 말라. 유대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라고 말씀 하였습니다. 따라서 기독교 복음은 음부의 권세, 사망의 권세, 사탄의 권세, 세상의 권세를 이기시고 예수님이 승리자가 되셨다는 승전소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들이 마라돈 전쟁의 승리를 외쳤던 페이피데스로, “카이레테, 이에수스 크리토스 니카 - 기뻐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승리자이십니다.” 라고 외치십시오.

그러므로 이 환난의 때에 우리는 무서워하고 두려워 떨 것이 아니라, Godact 예수께서 승리하셨다고 기뻐하는 때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코로나로 겁주는 마귀를 진정 이기는 비결입니다.

어떠하든 인류 역사에서 수억의 사람들을 죽인 코로나는 참 무서운 전염병입니다. 지금 유행하고 이는 코로나19바이러스는 아직까지 치료약도 없고 예방약도 없습니다. 개발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저 지금 우리는 이 환난에서 숨고 도망치기 바쁩니다. 마스크도 쓰고, 거리두기도하고, 주먹악수도 하고, 음식점이나 여행도 올 스톱하고, 그저 방콕 해야 합니다. 엄청난 환난의 때입니다. 밖에 다니려면 상당히 눈치를 보며 주변을 살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환난'의 헬라어는 '들맆세신'(θλιψεσιν)인데, 이 말은 포도즙 틀에서 포도즙을 짜내는 듯한 수고와 슬픔과 고통들을 의미합니다. 해산의 고통을 말합니다. '즐거워하나니'의 헬라어는 '카우코메다'(καυχωμεθα)인데 이 말은 의기양양하여 날뛰는 것을 말합니다. 엄청난 환난으로 고통 중에 있지만, 아니요 우리 기독교인은 오히려 의기양양하여 춤을 추며 기뻐해야 한다고 바울사도께서 말씀하시었습니다.

우리가 질병이나 인생의 어떤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 어떻게 맞이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두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반응(reaction)과 응답(response 저는 感應이란 말을 더 좋아 합니다)입니다. 어느 음식점에서 밥을 먹으려 하던 한 숙녀가 갑자기 악하고 소리 쳤습니다. 밥상위에 바퀴벌레가 유유히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숙녀는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은 간데없고 얼굴이 파랗게 질려 어쩔 줄 모르고 소리 소리를 쳤습니다. 옆에 이던 신사분이 그 바퀴벌레를 손으로 탁 쳤습니다. 그랬더니 그 바퀴벌레는 다른 밥상으로 날아가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그 밥상에 있던 또 다른 숙녀분이 깜짝 놀라 소리를 치며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무슨 일인가 웨이터가 와서 보더니 그 바퀴벌레를 엄지와 검지로 가만히 쥐더니 조용히 문밖으로 나가 발로 밟아 죽였습니다. 숙녀 분들은 바퀴벌레에 반응을 보인 것이고, 웨이터는 응답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남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어려운 사람을 보면 불상한 마음을 가지기는 하지만, 정작 도움의 손길을 펼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음에 반응은 왔지만 정작 행동으로 응답은 하지 않았다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두 가지 상 반대 태도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불레셋 골리앗장군이 처 들어 왔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들은 전쟁터에 나가 숨어 나오질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린 다윗은 물맷돌을 들고 골리앗 앞에 나갔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들은 무섭다는 반응을 하지만 응답을 못하였고, 다윗은 비록 위기 앞이지만 담대히 응답을 하여 골리앗을 물리쳤습니다.

환난을 만나면 대부분 사람들은 당황하고 두려워하고 어쩔 줄 몰라 합니다. 마치 범불안장애 (汎不安障碍 Generalized Anxiety Disorder) 증상을 보이듯 합니다. 불안감과 긴장이 지속되는 것이 주로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지나친 걱정과 근심으로 매사를 두려워하며 불안해합니다. 우유부단해지며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일에도 지나친 염려를 하여 주의가 산만해지고, 작업에 집중하지 못하며, 초조함과 불면증이 나타나게 됩니다. 신체적으로 눈꺼풀이 떨리거나 얼굴을 찌푸리고 있고, 안절부절 못하고 잘 놀라곤 합니다. 발한, 가슴 두근거림, 손발이 저리거나 얼굴이나 가슴이 화끈거리고, 설사, 구토, 위장 불쾌감, 목에 무엇이 걸린 느낌, 호흡이 빨라지고 얼굴이 창백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생활의 모든 부분에서 조바심과 안달을 느낍니다. 지진이나 핵전쟁 같은 재앙적인 사건을 지레 걱정합니다.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고 완벽하게 마치지 못한다고 불안 해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분노하고 불평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인간의 나약한 당연한 반응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바로 마귀가 이 인간의 나약성을 집중 공격하므로 있게 되는 반응입니다. 욥기서를 보면, 마귀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욥이 하나님의 축복을 주므로 인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지, 그 축복을 뺏어버리면 하나님을 떠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러면 시험해보라고 말씀합니다. 하루아침에 욥은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온 몸에 피부병이 생겨 기왓장으로 긁어도 시원하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깊은 환난에 빠져버렸습니다.  욥의 부인은 욥에게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으라고 악담을 퍼붓습니다. 이것이 욥의 부인의 환난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러나 욥은 주신분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분도 하나님이시라 하면서 입으로 범죄 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욥의 응답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환난을 만나면 어떠할 것입니까? 많은 기독교인들이 역시 나약한 인간이라 욥의 부인처럼 환난을 만나면 불안해하고 좌절하고 믿음이 떨어지고 교회를 멀리합니다. 믿음이 사라지니 범불안증세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환난에 반응을 한다는 것은 마귀의 시험에 빠지는 일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환난에 반응하지 않고 응답을 해야 합니다. 갓덱트Godact, 하나님과 접촉해야 삽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환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으니, 갓 엑트 God-act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가만히 지켜보며 기다리며 인내해야 합니다.
시37:7,8에서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참아 기다리면 믿음이 연단되어 강화됩니다.  더욱 강한 믿음을 가지게 되어 환난을 만나지만 두려워하거나 불안해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강한 믿음의 소유자는 하나님은 환난 끝에 큰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환난을 참으셨습니다. 왜 참으셨을까요? 십자가 다음에 부활의 영광이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들이 환난 중에 두려워하는 반응을 가지게 되는 것은 그리고 불안해하고 좌절하고 믿음을 잃어버리는 이유는 환난가운데 길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환난가운데 길이 있음을 봅니다. 길이 환히 뚫려 있음을 봅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안 보이지만 믿음의 눈으로는 보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구주이심을 보지 못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이시고 나의 하나님이시란 응답을 합니다.  이 눈을 가진 사람은 환난 중에 길을 보며 기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귀를 이기시고 죄를 멸하시고 죽음으로 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심을 믿는 사람은 그래서 환난 중에 응답하기를, “기뻐하라 주님이 환난을 이기셨도다”라고 외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환난에지지 말고 환난을 이기십시오. Godact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라고 크게 찬송하십시오.

357장 “주 믿는 사람 일어나”란 찬송이 있지요.“ 저는 2절을 몇 번씩 부르곤 합니다.
2절 온 인류마귀 궤휼로 큰 죄에 빠지니(코로나에 걸리니) 진리로 띠를
    띠고서 늘 기도 드리세 참 믿고 의지하면서
    겁없이 나갈 때 주 예수 믿는 힘으로 온 세상(코로나)이기네
후렴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코로나)이기네

야고보서 1장 2~4절에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환난과 시련에 대해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응답의 믿음으로 이기는 모습을 보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응답하면, 환난은 우리를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환난에 대해 응답하면, 우리는 환난의 피해자(被害者)가 되는 것이 아니라, Godact 환난의 수혜자(受惠者)가 됩니다.

로마서 8장 37절에서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알 엔 투토이스 파신 휘페르니코멘 디아 투 아가페산토스 헤마스“고 말씀하셨습니다.
‘휘페르니코멘 HYPERNIKOMEN’(-휘페르+니카오 동직현능1복)은 “엄청나게 승리를 거둔다”는 뜻으로, 바울은 ‘기뻐하십시오, 우리는 승리자입니다.‘는 승전소식이자 복음인 ‘카이레테 니코멘’에서 ‘니코멘’ 앞에 접두사 ‘휘페르’(hyper)를 덧붙여 ‘휘페르니코멘’(hypernikomen) 곧 바울 선생은 “우리는 엄청나게 승리한사람들입니다.”라고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권면한, ‘기뻐하라 카이레테’와 로마서에서 선언한 ‘휘페르니코멘’을 조합하면, ‘카이레테 휘페르니코멘’(chairete hypernikomen)이 되고, 이것을 번역하면, “기뻐하십시오. 우리는 엄청나게 승리한 사람들입니다.”가 됩니다.

여러분 이 코로나 환난의 시대에 ‘엄청나게 기쁘게 살고 있습니까?“
시편 31:7절에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 할 것은 나의 고난을 보시고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으며” ...그러므로 23.24절에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자를 보호하시고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히즈쿠 웨야아메츠)”고 하신 말씀을 이 한난의 때에 꼭 기억하십시오.

우리 라온코이노니아 성도 여러분,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셨으니 갓덱트Godact 하나님과 더욱 가까이하시고,  갓 엑트God-act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하여 활동하시니 그러므로 여러분, 강하고 담대하십시오,. 그리고 Godact 이 코로나 환난을 넉넉히 이김으로 날마다 기뻐하며 즐겁게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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