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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21년 1월중 설교

jbhimr by  조회 수:10 2021.02.07 15:03

2021년 신년주일아침예배  마 11:28  영혼의 케렌시아(Querencia)

순천 송광사 승보전 벽화(탱화)10개중한 그림
기우귀가(騎牛歸家,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다)
[출처] 신축년(辛丑年)/흰소/심우도(尋牛圖)|작성자 벽암


오늘은 2021년 신축년(辛丑年) 하얀 소의 해의 첫 주일입니다. 흔히 흰 소는 성실과 신뢰, 여유와 풍요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역사에서 보면 여러 환난이 일어났던 해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특히 1961년 박정희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해가 신축년 입니다.

지난 한해 너무나 어렵고 힘든 세월을 사람들은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2021년엔, 여러분, 모든 코로나19바이러스가 이 땅에서 사라지고, 우리나라 융성의 해가 될 것이며, 경제적으로 흥왕하고, 가정적으로 화평과 개인적으로 평강이 가득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여러분, 새해 하나님이 주시는 만 가지 축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지금 일본에서 코로나가 크게 퍼져나가고 있기 때문에, 일본정부가 국민들에게 강조하는 말이 ‘不要不急 外出自制’ 라고 권고한다고 합니다. ‘불요불급 - 꼭 필요하지 않고 급하지 않은 일'이면 외출을 삼가고 집안에 꼭 있으라(Stay Home!)고 방송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라고 다를 바 없습니다, 마스크 쓰고, 외출을 삼가고, 집안에 꼭 머물러 있으라고 방역당국에서는 입이 닳도록,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하고 있습니다.

바쁜 현대인들에게 휴식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패스트푸드'처럼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빠르고 쉽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패스트 힐링(Fast Healing)'이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매김 하고 있습니다. 패스트 힐링의 대표적인 장소로 '수면카페'가 있습니다. 번 아웃(Burn Out 에너지가 소진되어 버린 상태)된 사원들이, 잠은 안자다고 하더라도, 회사 인근에 있는 커피숍을 나 홀로 찾아가서 짧은 시간이지만 커피한잔 앞에 놓고 조용히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는 직장인들을 보게 됩니다.(회사 일에 지친 어떤 사원은 퇴근길에 가벼운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 며칠 입원해 쉬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을 가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가 벌어져 회사에 나오지 말고 財宅勤務 집에서 일하라는 회사들도 많습니다. 아니, 일거리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집에 박혀 살아가야 할 요즈음입니다. 이제 집에만 있으려니 스트레스가 되어 미칠 지경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집에 좀 머물러 있으라고 방역당국이 반강제로 강요한다 해도,  ‘좋다! 나는 자유인이다. 병에 걸려도 내가 걸린다.’ 좋다고 여행도 다니고, 여기 저기 음식점을 순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교회도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니 나라에 ‘순종하기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예배를 강행하다가 수십 명 교인들이 코로나에 걸리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지난 12월 1일~22일(0시 기준) 대구 교회 관련 확진자는 148명으로, 동구 광진중앙교회 28명, 달성군 영신교회 61명, 중구 새비전교회 37명, 남구 신일교회 20명 등 산발적으로 발생하였습니다.
이 어쩌면 좋겠습니까? 

올 해 첫 주일 설교의 제목을 ‘영혼의 케렌시아(Querencia)’라고 하였습니다. ‘케렌시아’라는 말은 ‘애정, 애착, 귀소 본능, 피난처, 안식처’ 등을 뜻하는 스페인어입니다. 번역하면, “쉼, 쉬는 곳, 쉼터‘를 의미합니다. 스페인은 투우경기로 유명하죠? 경기장에서 나온 투우가 투우사들과 싸우다가 힘이 지쳐서 잠시 쉴 곳을 찾아가 숨을 고르고 휴식을 가지는 장소를 말합니다, 그래서 코로나 시대 요즘 사회적으로 쉴 곳을 찾는 케렌시아 열풍이 불고 있다고 합니다.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가는 피곤한 일상. 가끔은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찾아 쉴 곳 ‘케렌시아(Querencia)’를 찾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요즈음 매일 회사에 출근 하던 남자들이 집에 머물러 있자니 부부간에 투닥투닥 하기도 하고, 아이들하고 보짝보짝 하다 보니 스트레스가 천정 높은지 모르고 올라갑니다. 그런데 어떤 가정에서는 기왕에 집에 머물고 있으니, 이참에 우리 집을 편하게 쉬는 공간으로 재배치하거나 리모델링해보자고 합니다. 최근 TV를 보면, 여러 방송국에서 사람이 편히 쉴 수 있는 집들을 소개하거나, 가구를 재배치하여 편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이런 유행은 우리 집을 ‘케렌시아’ 쉼터로 만들려고 하는 시청자들의 욕구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집안에 연못도 만들고, 햇살 가득히 채워지는 정원을 꾸미기도 합니다. 아파트 구조도 좀 더 편안하고, 가능한 가족들이 즐겁고 편안하게 지날 수 있도록 꾸밉니다. 가정이 다만 밥 먹고 잠자는 곳이 아니라, 편안하고 건강하고 가족들이 즐겁게 숨 쉬는 쉼터 케렌시아로 만들어 이 어려운 코로나 시대를 즐겁게 이겨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부족합니다. 방역당국이 강조하듯, 어쩔 수 없이 불요불급외출자제로 집콕을 할 수밖에 없지만, 이참에 우리 집을 불요불급 외출자제가 아니라 필요필급(必要必急)한 나의 쉼터 케렌시아 되도록 하는 일은 매우 좋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집안을 편하게 꾸미고 아름답게 가꾸어도 케렌시아 쉼터라고 말하기는 한 가지가 부족합니다.
인간의 쉼은 육신적인 평안만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이 평안하다고 진정한 평안이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육신의 쉼을 위해서는 잠시 잠을 청 할 것입니다.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는 잠시 음악을 듣거나 산에 오를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피곤과 불안한 삶은 계속됩니다.

412장 찬송에“내 영혼이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나와 내 영혼을 고이 싸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위에서 내려오네, 그의 사랑이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라고 우린 찬송합니다. 이 찬송을 부를 때에 우리의 영혼이 평안해 지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진정한 쉼은 영혼의 쉼입니다. 영혼이 쉬지 않으면 다른 모든 쉼은 다만 잠시간의 쉼이요, 평안을 주는 앰풀일 뿐입니다. 영국에서는 코로나로 본국에 오지 못하고 해외에 있는 영국인들을 위해 고향 공기를 깡통이나 병에 담아 팔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병속에 고향을 공기를 들여 마시는 동안 고향의 그리움만 더해갈 뿐일 것입니다.

(공기는 500ml 용량 병에 담겨 병당 25파운드, 약 3만7125원에 판매됩니다.)

우리가정이 필요필급 케렌시아 쉼터 되도록 하기 위해선, 우리 집에 하나님이 계시는 집이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평안이 가득한 영혼의 쉼터 케렌시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집의 家長이 하나님 아버지여야 합니다. 우리 집의 主人이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집에 어머니가 성령님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집이 곧 작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당에만 머물고 계시지 않으시고, 바로 주님의 몸 된 성도들이 함께 사는 우리 집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시는 어린 양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정이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우리의 영혼이 편안히 쉬는 케렌시아라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집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수고하고(코피온테스:코피아오의 동분현능호남2복)란 능동적으로 행한 일을 말하고, 무거운 짐(페ㅎ포르티스메노이:포르티조의 동분1완수호남2복)은 수동적으로 감당한 일을 말합니다. 내가 원하여 한 힘든 일이 있고 내가 원하지 않은 어려운 일도 있습니다. 이러나저러나 우리의 삶은 천근만근 무거운 세상일로 가정 사에 지치고, 병마와 싸우고, 질고에 억눌리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에 시달린 모든 사람들, 여기에는 단 예외의 한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이들을 예수님께서 ‘내게 오라(듀테 프로스 메)’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편히 쉬게 하리라(카고 아나파우소:아나파우오의 동직미능1단 휘마스)’고 말씀하십니다. 이 초청에는 Yes할까 No할까하는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왜냐면 No하면 영혼이 죽고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不可不 可입니다. 가하는 것이 필요필급 입니다. 지체할 일도 아닙니다. 조금 있다가,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할 일도 아닙니다. 지금 당장 ‘예“라고 대답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말씀에 한 귀인이 잔치에 초청했는데 온갖 핑계로 오지 않은 자들을 멸하였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응하지 않아서 멸망한 것이 아니라 응하지 않음으로 자기 스스로 영혼이 마귀에게 사로 잡혀져버리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바로 우리 인생의 케렌시아 영혼의 쉼터입니다.

사람들이 오해가 있습니다. 교회당은 교회의 건물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한 모임입니다.  그러므로 들판이나 산골자기에도 그곳에서 예배드리면 주님은 거기 계셔 우리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바로 그곳이 영혼의 케렌시아가 됩니다.  지금 코로나로 교회당이 잠시 문이 닫혀 진 상태에서 우리의 예배 장소는 우리 집이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정이 작은 교회여야 합니다. 언제나 가정은 작은 교회입니다. 주께서 여기 계시니 여기가 바로 우리의 케렌시아 쉼터요, 여러분의 안방이 영혼의 쉼터이고, 거실이 영혼의 쉼터이고, 아이들 방이 영혼의 쉼터여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찬송 부르고, 가능한 한 가정에서 은은하게 찬송 부르거나 기독교 성가곡이 울려 퍼지게 하는 것은 영혼의 향수가 방안에 가득히 채워지게 하는 일입니다. 마귀가 제일 싫어하는 냄새는 마늘냄새도 허브냄새도 아닌 내 영혼의 향수를 맡는 순간에 질색하여 물러갑니다. 찬송은 영혼의 백신입니다,

2021년 이제부터 한 해 동안 교회와 여러분의 가정이 우리의 영혼의 쉼터, 영혼의 케렌시아로 삼을 때에 세상의 모든 무겁고 힘든 일들이 녹아지고 풀어지고 지워지게 되어 능히 언제나 행복하고 평화로운 한해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세초부터 세말까지 여러분과 여러분이 하시는 일과 가족들과 일가친족에 이르기 까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021년 1월 3일 신정예배  마 11:25-30  영혼의 케렌시아(Querencia)


묵  도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찬  송  550장 1, 2절
사도신경
성경말씀과 설교
  마태 11:28(다같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짐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설교    영혼의 케렌시아(Querencia)

오늘은 2021년 신축년(辛丑年) 하얀 소의 해의 첫 주일입니다. 흔히 흰 소는 성실과 신뢰, 여유와 풍요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역사에서 보면 여러 환난이 신축년에 일어났던 해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지난 한해는 너무나 어렵고 힘든 세월을 사람들이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2021년엔, 여러분, 모든 코로나19바이러스가 이 땅에서 사라지고, 우리나라 융성의 해가 될 것이며, 경제적으로 흥왕하고, 가정적으로 화평과 개인적으로 평강이 가득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여러분, 새해 하나님이 주시는 만 가지 축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올 해 첫 주일 설교의 제목을 ‘케렌시아’라고 하였습니다. ‘케렌시아’라는 말은 번역하면, “쉼, 쉬는 곳, 쉼터‘를 의미합니다. 스페인은 투우경기로 유명하죠? 경기장에서 나온 투우가 투우사들과 싸우다가 힘이 지쳐서 잠시 쉴 곳을 찾아가 숨을 고르고 휴식을 가지는 장소라는 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래서 코로나 시대 요즘 사회적으로 평안히 쉴 곳을 찾는 케렌시아 열풍이 불고 있다고 합니다.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가는 피곤한 일상. 가끔은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그런 시간과 장소에서 쉴 곳 ‘케렌시아’가 필요 하다고 말합니다. `

요즈음 매일 회사에 출근 하던 남자들이 집에 머물러 있자니 부부간에 투닥투닥 하기도 하고, 아이들하고 보짝보짝 하다 보니 스트레스가 천정 높은지 모르고 올라간다고 말들 합니다. 그런데 어떤 슬기로운 부부는 기왕에 집에 머물고 있으니, 이참에 우리 집을 편하게 쉬는 공간으로 재배치하거나 리모델링해보자고 부부간에 마음을 합해 봅니다. 최근 TV를 보면, 여러 방송국에서 사람이 편히 쉴 수 있는 집들을 소개하거나, 가구를 재배치하여 편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이런 유행은 우리 집을 ‘케렌시아’ 쉼터로 만들려고 하는 시청자들의 욕구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집안에 연못도 만들고, 햇살 가득히 채워지는 정원을 꾸미기도 합니다. 아파트 구조도 좀 더 편안하고, 가능한 가족들이 즐겁고 편안하게 지날 수 있도록 꾸밉니다. 가정이 다만 밥 먹고 잠자는 곳이 아니라, 편안하고 건강하고 가족들이 즐겁게 숨 쉬는 쉼터 커렌시아로 만들어 이 어려운 코로나 시대를 즐겁게 이겨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부족합니다. 방역당국이 강조하듯, 어쩔 수 없이 불요불급외출자제로 집에 콕 박혀 있을 수밖에 없지만, 이참에 우리 집을 필요필급(必要必急)한 나의 쉼터 케렌시아가 되도록 해야 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집안을 꾸미고 아름답게 가꾸어도 쉼터 케렌시아라고 말하기는 한 가지가 부족합니다. 인간의 쉼은 다만 육신적인 평안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 또 마음의 평안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평안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쉼을 위해서는 잠시 잠을 잘 것입니다.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는 잠시 음악을 듣거나 산에 오를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피곤과 불안한 삶이 계속될 것입니다, 412장 찬송에 “내 영혼이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나와 내 영혼을 고이 싸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위에서 내려오네, 그의 사랑이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우리의 진정한 쉼은 영혼의 쉼입니다.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집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수고하고’란 능동적으로 행하는 일을 말하고, ‘무거운 짐’은 수동적으로 감당하는 일을 말합니다. 내가 원하여 한 힘든 일이 있고, 내가 원하지 않은 어려운 일도 있습니다. 이러나저러나 우리의 삶은 천근만근 무거운 세상일로 가정 사에 지치고, 병마와 싸우고, 질고에 억눌리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에 시달린 모든 사람들, 여기에는 단 예외의 한사람도 없이 그 무엇으로도 평안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이들을 예수님께서 ‘내게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편히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코로나로 교회당이 잠시 문이 닫혀 진 상태에서 우리가정이 작은 교회여야 합니다. 언제나 교회는 작은 교회입니다. 주께서 여기 계시니 여기가 바로 우리의 쉼터 케렌시아요, 여러분의 안방이 영혼의 쉼터이고, 거실이 영혼의 쉼터이고, 아이들 방이 영혼의 쉼터여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찬송 부르고, 가능한 한 가정 안에 은은하게 찬송가나 기독교 성가곡이 울려 퍼지게 하는 것은 영혼의 향수가 방안에 가득하게 채워지게 하는 일입니다. 마귀가 제일 싫어하는 냄새는 마늘냄새도 허브냄새도 아닌 내 영혼의 향수를 맡게 되면 질색하여 물러갑니다. 기왕에 집안에 머무르게 되는 이 때에 우리 집을 영혼의 쉼터 케렌시아로 찬송이 가득한 가정되게 합시다. 찬송은 영혼의 백신이요 치료약입니다.

2021년 이제부터 한 해 동안 교회와 여러분의 가정이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우리의 영혼의 쉼터 영혼의 케렌시아로 삼을 때에 세상의 모든 무겁고 힘든 일들을 능히 이기고 행복하고 평화로운 한해를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공동기도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새로운 한해로 365일 새로운 날들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라옵기는 아직도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허물 많은 저희를 용서하여 주옵시며, 새해의 밝은 빛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에 남아있는 죄의 습관들을 버리고,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고백하게 하옵소서.
2021년 새해에는 코로나질병이 사라지고 우리 백성들이 고통당하지 않게 하옵시고, 주여, 올 한 해 동안 저희들로 하여금 최선을 다해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우리의 행함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되기를 원하오니, 성령이여, 지금부터 우리와 동행하여 주옵소서, 간절히 구하는 것은 우리 민족이 올 한해 코로나 병으로부터 구원하여 주시고 이 나라에 진정한 평화와 부흥 발전하도록 축복하옵소서.
이 시간 우리 마음을 하나님 앞에 드리며 올 해 첫 번으로 봉헌합니다.  이 예물을 받으시고 저희 가정 가족들을 보살펴주사, 건강하고 편안하며 물질로도 풍성하게 하사 올 한해를 주안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또한 목사님 가정과 성도들의 가정에 평강의 복을 주옵시고, 우리 라온코이노니아 위에 항상 빛 된 주님의 은총을 내려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헌금과 찬송  550장 3. 4절
주기도문으로 신정예배를 마칩니다.

 

 

 

 

 

 

 

 

 

 

 

2021년 1월 10일  주일아침예배   요 4:10-14 영혼의 생수를 마시라.


묵도 :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시138:8)

찬송 : 258(샘물과 같은 보혈은) 1 - 3절

신앙고백 : 사도신경

성경 : 요 4:10-14

설교 : 영혼의 생수를 마시라


작년 환경경영신문(20.07.11)에서 조산한 바에 의하면 물속에 함유된 미네랄이 5.2mg/L이상일 때 건강한 물이라고 합니다. 최고의 건강한물은 에비앙(프랑스에비앙,84.39), 스파클(천안 성남면,28.19), 석수(27.66), 홈플러스샘물(청주 상당구가덕면,27.61), 아이시스평화(연천군 백학면,20.63)등으로 분석되었습니다. 이어서 남양천연수(완주군소양면,14.06), 맑은샘물(청주 미원면,13.29), 강원평창수(평창군봉평면,11.81), 인천의 미추홀참물(남동정수장,11.33), 지리산 맑은샘(산청군삼장면,9.53), 풀무원샘물(포천이동면,9.21), 태백약산(홍천 화촌면,6.23), 광주의 빛여울수(용연정수장,4.38), 피지(피지 비티레부야카라,3.98), 홈플러스 해양(속초외웅치,2.40), 히말라아야샘물(히말라야 랑탕국립공원,1.40) 등입니다.

반면 맛있는 물 지수에서는 가장 맛있게 평가된 휘오제주(-1.45), 삼다수(제주도, -1.55), 농심백산수(길림성 안도현, -3.02), 백두산하늘샘(백산시 장백면, -41.05)등은 건강한 물 지수에서 평가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분석치를 보여주었습니다. 따라서 맛있는 물 지수가 높은 물이 건강지수에서는 낮고 건강지수가 높은 물은 맛있는 물 지수가 낮은 현상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건강하지 못하다고 하여 나쁜 물이거나 위해성 있는 물은 아닙니다. 이들 제품들은 반대급부적으로 맛있는 물에서는 매우 높은 지수를 보여주고 있어 맛과 건강에 대한 선택권은 소비자들에게 있습니다.

요즈음 면역력(immunity, 免疫力)에 대한 관심이 매우 중요하게 생각들하고 있습니다. 그 면역력에 중요한 영양분이 바로 미네랄입니다, 미네랄은 칼슘, 인, 철, 황, 마그네슘 따위의 무기질 영양소로 이 미네랄이 부족할 때에는 여러가지 증상이 나타납니다.
입이 자주 마른다거나, 쉬어도 쉬어도 피곤하고 몸이 아픈 것 같은 느낌이 들고, 기립성 저혈압이 있고,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하고, 손톱이 잘 부러지고 몸이 자주 간지럽기도하고, 손발저림 현상이 있다면 미네랄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루 30분 정도 운동을 하거나, 미네랄이 많이 들어가 있는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미역이나 굴같은 어패류, 생선, 우유, 치즈, 젓갈, 현미, 콩같은 음식물을 섭취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수시로 미네랄 성분이 많은 물을 많이 마시도록 권장하고 있습니다. 수분섭취를 통해 혈액 세포에 있는 노폐물을 실어  신장으로 흘러가서 소변이 돼 배출됩니다. 피부 세포에 도달한 물은 노폐물과 함께 땀으로 배출됩니다. 호흡기로 간 물은 기관지 내 먼지를 ‘물청소’합니다. 물을 자주 마셔서 기관지를 촉촉하게 하면 숨만 쉬어도 기관지가 깨끗해집니다. 미네랄이 들어 있는 물은 각종 영양소로 몸을 건강하게 유지 시켜주는데 도움을 줍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에비앙, 스파클, 석수(27.66), 홈플러스샘물들에 미네랄이 많이 녹아져 있는 물을 마시도록 하는 것도 좋습니다.
에비앙 생수는 알프스산 몽브랑 아래에 있는 작은 도시로, 그 도시 지하 800m아래 거대한 안반호수가 있습니다, 3만년 동안 쌓인 알프스산 빙하가 녹아 지하로 스며들어 하루 1-2cm씩 흘러 15년에 자연 암석필터를 걸쳐 모아진 순도 100% 물입니다, 그리고 하루 200회 이상 검사를 하여 시중에 내놓는 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에비앙도 좋지만 건강한 사람이라면 비록 미네랄 수치는 약하지만 깨끗한 물로 삼다수, 평찬수 등도 마시는 것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텍사스 대학•콜로라도 주립대•플로리다 주립대 공동 연구진이 지난 9년간 2만여명을 상대로 신앙생활과 수명과의 연관성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정기적으로 교회에 가는 등 종교의식에 참여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평균 수명이 10% 정도 길게 나타난 것으로 분석하였습니다.  뉴욕타임스는 식생활과 함께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독실한 신앙이 장수의 한 원인으로 분석해 관심을 끌었습니다. 이처럼 의학 전문가들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장수하는 것에 대하여 신앙생활을 하면서 얻는 마음의 평화가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되고, 교회 안에서 의지할 친구들이 있어서 건강에 좋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로이터 통신은, 100~104살인 장수 노인 100명에게 장수할 수 있는 비결을 묻자 23%가 장수의 진정한 비결은 신앙에서 오는 것으로 유전자나 의료 서비스에 의한 것은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영국 일간 "더 타임스"지는 교회 주일예배에 정기적으로 출석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는 불신자에 비해 7년 이상 장수한다는 기사를 내놓았습니다. 최소한 매주 한 차례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의 평균 수명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7년이나 많았고, 특히 흑인들에게 있어서는 14년이나 차이가 났습니다. 20세 된 사람을 기준으로 예배에 매주 한 차례 나가는 사람들의 예상 평균 수명은 82세,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75세였습니다. <북캐롤라이나주>의 노인 4000명을 대상으로 했으며 최근 6년간 사망한 1777명 중 22.9%가 정기적으로 교회를 다니던 노인이었고 37.4%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며, 캘리포니아대가 21∼65세의 남녀 5000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결과에서도 규칙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향후 28년간 사망할 확률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23%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듀크대>의 <헤럴드 쾨닉>박사는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건강하게 생활하는데다 같은 종교인들끼리 형성하는 안정된 인간관계가 수명을 연장하는 효과를 낸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몸에 미네랄이 풍부한 생수를 마시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의 건강이고 영혼이 건강하다면  영적 미네랄이 충만한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였습니까?

1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에도켄 안 소이 휘도르 존)”
13-1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게네세타이 엔 아우토 페게 휘다토스 할로메누 에이스 조엔 아이오니온)”

영원한 샘터에서 솟아 나오는 생수, 이 물보다 더 좋은 물은 온 세계 아니 온 우주 어디에서도 없는 영생수입니다 인생의 가장 강력한 면역력을 높여주는 물은 바로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의 생수입니다. 왜냐하면 이 생수를 마시는 자마다 죄악을 물리치고 마귀를 쫒아내고 죽음을 이기며 영생복락을 누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구약 에스겔예언자 시대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 살던 시대입니다. 그야말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치 마른 뼈같이 다시 살아날 기미란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은 전혀 희망이란 찾아 볼 수 없는 절망과 좌절 속에 살았습니다. 그들의 영혼은 메말라 입술이 타들어가고, 혓바닥은 가뭄에 논바닥 갈라지듯 한 메마른 영혼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마른 뼈 골자기 환상을 보여주며 마른 뼈들 위에 생기를 불어 다시 살아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다는 약속을 받게 됩니다.

겔 37:5-6에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겔 47장에 성전 밑으로 물이 흘러나와 그 물이 이르는 곳마다 새로운 생명이 왕성하게 일어나는 장면이 마치 영화처럼 보여 주고 있습니다. 9절에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12절에 “강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라 말씀하시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수가 먹고 마시며 이르는 곳 마다 풍성한 은혜와 축복이 평강과 기쁨이 넘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는 허약하다 말하지 아니하고 다시는 가난하다고 슬퍼하지 아니하고 다시는 못살겠다고 가슴 치지 아니하고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天父賜福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마른 사슴처럼 그 영이 메말라 결국 나라가 망하는 백성들이 되었습니까? 생수의 근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밤하늘을 보면 은하수가 보입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태양계가 그 은하수 속에 있는 별무리들 중 하나입니다. 태양계는 태양을 중심으로 태양 주변을 도는 행성으로 수성금성지구화성목성토성천왕성해왕성명왕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약160개의 위성과 약3,000개의 소행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명왕성은 2006년 행성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왜소행성(dwarf planet)으로 분류되었습니다.
태양으로 부터 가장 가까운 수성은 5,790만 킬로미터이며, 지구는1억 4,960만 킬로미터이고, 명왕성은 약 60억 킬로미터 떨어져 있습니다. 수성의 표면 온도는 430℃-462℃입니다. 그런데 명왕성의 표면 온도는 영하 218도-영하 240도라고 합니다. 수성은 너무 뜨거워서 생명체가 살수 없고, 명왕성은 너무 추워서 생명체가 살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구는 태양으로부터 적당한 거리에 있어서 수 많운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창조하여 주셨습니다.


명왕성


무엇을 말씀드리려하는 것은,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뜨겁게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믿음은 뜨거워야 합니다. 그러나 불에 타버릴 정도로 뜨거우면 안 됩니다. 즉 하나님과의 적정한 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신비주의자들,  하나님과의 거리를 무시하여 광신자들이 있습니다(하레디 유대교). 그런데 너무 떨어져 있어도 안 됩니다. 그 심령이 메말라 있거나 완전히 얼음덩이가 되어 아무런 생명을 싹틔울 수 없는 명왕성 같은 인생이 됩니다.  광신자도 문제이지만 가장 큰 문제는 영혼이 메말라 있거나 얼어붙어 생명을 찾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에 의지함 없이 자기 의지로 자기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내 주먹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하라 사막 한복판에서 홀로 자기 의지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북극 얼음 한복판에서 스스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지금 적당한 살만한 장소에서 집짓고 밥 먹고 옷 입고 사는 것이 스스로의 의지로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 누구의 도움 없이 집도 밥도 옷도 거저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구가 태양과의 가장 적정한 거리로 떨어져 있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비록 우리가 그것을 느끼고 살거나 못 느끼고 살거나 어떠하든 살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믿던지 안 믿던지 하나님과의 적정한 거리에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사는 것이 가장 안전한 평안한 인생이라 할 것입니다.
바로 그 적정한 거리가 교회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속하여 있다는 것은 인생의 가장 안전한 방법인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 거리를 벗어나 있다면 어떤 사람은 광신적으로 벗어나 있고 어떤 사람은 비 신앙이거나 무신론으로 떨어져 있으므로 그 인생은 심히 어렵고 메마른 영혼의 삶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교회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생수를 받아야 풍성한 인생으로 자라고 열매 맺고 희망과 보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설교에 인용한 예화가 있습니다. 봅 바틀렛이라고 하는 탐험가가 경험한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외국을 여행하는 중에 아주 희귀한 새 몇 마리를 얻었습니다. 이것을 새장에 가두어 가지고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중에 한 마리가 유난히도 시끄럽게 굴면서 새장에 갇혀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새장을 발톱으로 할퀴고 머리를 찧는 등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새장에서 계속 푸덕거리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몸부림을 치니까 결국은 새장 문이 열렸습니다. 새는 도망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몇 시간 후에 이 봅 바틀렛씨는 자기 눈을 의심했습니다. 그렇게 날아올랐던 새들이 다시 배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저들은 자유를 얻었다고 날아올랐는데 망망대해에 발붙일 곳이 없었습니다. 먹을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죽기 살기로 이 배를 향해서 다시 돌아온 겁니다. 더 이상 이 새장은 그들에게 감옥이 아니었습니다. 새장은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끝없는 바다를 건너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이 새장에 있었습니다. 굶주린 배를 채울 수도 있고 편안하게 거할 수 있는 길이 바로 이 새장 안에 있었습니다. 새장은 그들에게 있어서 구원선이었습니다. 교회는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고 의지를 제약하는 곳이 아니라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와 구원의 방주로 우리 주님이 날마다 마시게 하시는 영생의 샘터입니다. 누구든지 이 영생의 샘터에서 그 육신이 살고 그 마음이 힘을 얻고 믿음의 강력으로 세상을 이길 것입니다.

그러면 그 생수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었습니다.
요7:37-39에  “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생수는 믿는자들이 받을 성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영혼의 생수는 성령입니다. 성령이 매마른 사람은 그 영혼이 메마른 사람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확신하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이 영혼이 메마른 사람들에게 성령의 생수를 먹여 주시기 위해서라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은 바로 우리에게 그 생수를 마시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요6:54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이 바로 영혼의 생수입니다. 그 영혼의 생수를 마시기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와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의 능력으로 네가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287장 찬송
예수 앞에 나오면 모든 죄 사하고
 주의 품에 안기어 편히 쉬리라
 우리 주만 믿으면 모두 구원 얻으며
 영생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지난 일 년 동안 우리나라와 온 지구 땅 사람들이 코로나19바이러스로 고통당하여 왔습니다. 이제 백신도 치료약도 만들어 졌다고는 하지만 금년 한해 역시 이 코로나병마와 싸워야할 것입니다. 이로인해 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워 점점 지쳐가고 있습니다. 극장도 음식점도 어떤 여행도 맘대로 가지 못합니다. 점점 기업들이 문을 닫고, 가정 경제가 파탄이 나고 있어 살아가기가 막막한 가운데 어찌 살 것인가? 영하 10도 20도로 내려가는 이 겨울의 추위 보다, 우리 마음이 휭 하게 부는 인생의 찬바람으로 얼어붙고, 우리의 인생이 메말라 어디에서도 생명의 기척을 찾아보기 힘들어가고 있습니다. 에스겔서의 마른뼈 골자기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100여 년 전에도 우리나라에 코로나가 유행하여 수만 명이 죽었습니다. 일제시대에도 전염병이 돌아 수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사람들은 희망을 일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때 교회는 그들의 영혼의 샘터였습니다. 그들 곁에 선교사들과 목사들과 평신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위한 교회의 기도와 위로와 격려가 있었습니다. 6.25전쟁 때는 수백만 명이 죽고 다치고, 우유죽 옥수수죽으로 허기를 달래고, 집이 무너져 깡통집 토막집 판자집에 살았습니다. 그때에도 교회는 그들의 영혼의 샘터였습니다. 그들은 배고프고 목말랐지만 더욱 영혼의 메마름 때문에 교회를 찾아 힘차게 찬송하며 기도하며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음껏 들여 마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대장부가 되어 용기를 내고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은 전쟁의 폐허위에 오늘의 대한민국을 건설하였습니다.
지금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육신의 메마름이 어려움이 아니요, 하나님을 멀리하여 영혼이 얼어붙고, 메마르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이 목말라 하고 있으면서도 알량한 자기 의지를 의지하고 세상이 주는 쾌락을 따르면서 주님의 보혈의 생수를 찾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보배로운 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심으로 목마른 자들의 뱃속에서 생수의 강이 터져 넘쳐흐르게 하심을 여러분, 믿으시길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예수님께서 한바가지 생수를 담아 옆에 서계심을 모르고 목말라 인생을 방황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를 구주로 모시고 성령 받아 내 속에 생수의 강물이 넘쳐나도록 한다면 여러분, 비록 코로나의 기세가 아무리 드세다 할지라도 우리는 염려하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않습니다. 코로나가 무엇입니까? 북한 핵무기도 두려워하지 않는데, 눈에도 보이지 않은 아주 작은 미생물 때문에 온 인류가 두려워한다면 어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라 할 것입니까? 역사상 그 어떤 질병도 인간을 멸망시켜 본적이 없었습니다. 문제는 우리 인간이 보혈의 능력으로 성령충만 하냐?  우리의 인생에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고전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 말씀하시어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지금 거하시니 여러분과 가정에 생수가 넘쳐 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고 성령 충만을 얻으면 성령께서 생수의 강이 되어 우리 속에서 넘쳐 나와서 우리가 죄를 이기고 코로나19바이러스 병을 이기고, 경제적 난관을 극복하고, 가정에 평강과 축복의 열매를 풍성히 얻게 될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평안과 기쁨이 여러분과 가정에 가득하시고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공동기도: 날마다 충만한 은혜를 부어 주심으로 우리의 영혼을 평안케 하시고 몸과 마음에 건강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 주변에 코로나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이들과 그들을 치료하는 의료인들에게 힘주시고 이 악마적인 질병을 물리쳐 주옵소서. 오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혼의 생수를 마시오니 주님의 보혈로 우리의 죄와 허물이 씻어지고, 심령이 깨끗게 하시오며, 모든 질병과 괴로운 일들을 사라지게 하옵소서. 이 시간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을 성별케 하사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하시오며, 예물 드리는 손길을 축복하여 주옵소서. 우리 라온코이노니아를 사랑하사, 목사님 가정, 하순녀집사님 가정, 강부자권사님,이영식집사님의 가정, 윤정은권사님 가정, 김정화권사님 최장식집사님 가정, 전순봉집사님 가정, 김용섭집사님 소재순집사님의 가정, 각 가족들, 자녀 손들의 건강을 지켜 주옵시고, 가정 사에 복을 주사 형통케 하시며, 하나님을 의지 하여 행하는 모든 일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언제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이웃들에게 복을 나누어 주는 저희 모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헌금과 찬송: 258장 4, 5절

주기도문

 

 

 

 

 

 

2021년 1월 10일  주일아침예배   요 4:10-14 영혼의 생수를 마시라.


묵도 :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시138:8)

찬송 : 258(샘물과 같은 보혈은) 1 - 3절

신앙고백 : 사도신경

성경 : 요 4:10-14

설교 : 영혼의 생수를 마시라

작년 환경경영신문(20.07.11)에서 조산한 바에 의하면 물속에 함유된 각종 미네랄 성분을 분석해 통상 미네랄이 5.2mg/L이상일 때 건강한 물이라고 합니다. 최고의 건강한물은 에비앙, 스파클, 석수, 홈플러스샘물, 평창수이라고 합니다. 비록 미네랄은 매우작지만 깨끗한 물로는 삼다수, 백산수가 있습니다.
요즈음 면역력에 대한 관심이 매우 중요하게 생각들하고 있습니다. 그 면역력에 중요한 영양분이 바로 미네랄입니다. 물론 운동을 하거나 미네랄이 많이 들어 있는 해조류나 우유 현미 콩같은 음식물을 섭취하는 것이 좋지만, 미네랄이 들어 있는 물을 마심으로 혈액 속에 있는 노폐물을 몸 밖으로 씻어 내보내는 일이 면역력을 높이는데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우리 몸에 미네랄이 풍부한 음식물이나 생수를 마시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의 건강이고, 영혼이 건강하기위해서는 영적 미네랄이 충만한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였습니까?

1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3-1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영원한 샘터에서 솟아 나오는 생수, 이 물보다 더 좋은 물은 온 세계 아니 온 우주 어디에서도 없는 영생수입니다 인생의 가장 강력한 면역력을 높여주는 물은 바로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의 생수입니다. 왜냐하면 이 생수를 마시는 자마다 죄악을 물리치고 마귀를 쫒아내고 죽음을 이기며 영생복락을 누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에 의지함 없이 자기 의지로 자기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내 주먹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하라 사막 한복판에서 홀로 자기 의지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북극 얼음 한복판에서 스스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지금 적당한 살만한 장소에서 집짓고 밥 먹고 옷 입고 사는 것이 스스로의 의지로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 누구의 도움 없이 집도 밥도 옷도 거저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그것을 느끼고 살거나 못 느끼고 살거나 인간은 자연과 이웃 사람들의 도움과 협력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식사를 할 때에 감사기도를 하나님께 하듯이 가장 근본적인 것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하나님이 주시는 영혼의 생수를 마시기기 위한 신앙생활이 인생에게 가장 중요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은 코로나와 잘 싸워왔지만 점점 힘들고 어려워 지쳐가고 있습니다. 극장도 음식점도 어떤 여행도 맘대로 가지 못합니다. 점점 기업들이 문을 닫고, 가정 경제가 파탄이 나고 있어 살아가기가 막막한 가운데 어찌 살 것인가? 영하 10도 20도로 내려가는 이 겨울의 추위 보다, 우리 마음이 휭 하게 부는 인생의 찬바람으로 얼어붙고, 우리의 인생이 메말라 어디에서도 생명의 기척을 찾아보기 힘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육신의 메마름이 어려움이 아니요, 하나님을 멀리하여 영혼이 얼어붙고, 메마르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영혼의 면역력이 떨어지니 믿음이 떨어지고 영혼이 메말라지게 되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상실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자신의 영혼이 목말라 하고 있으면서도 알량한 자기 의지를 의지하고 세상이 주는 쾌락을 따르면서 주님의 보혈의 생수를 찾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보배로운 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심으로 목마른 자들의 뱃속에서 생수의 강이 터져 넘쳐흐르게 하심을 여러분, 믿으시길 바랍니다.
바로 예수를 구주로 모시고 성령 받아 내 속에 생수의 강물이 넘쳐나도록 한다면 여러분, 비록 코로나의 기세가 아무리 드세다 할지라도 우리는 염려하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않습니다. 코로나가 무엇입니까? 북한 핵무기도 두려워하지 않는데, 눈에도 보이지 않은 아주 작은 미생물 때문에 온 인류가 두려워한다면 어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라 할 것입니까? 역사상 그 어떤 질병도 인간을 멸망시켜 본적이 없었습니다. 문제는 우리 인간이 보혈의 능력으로 성령충만 하냐?  우리의 인생에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고전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지금 거하시니 여러분과 가정에 생수가 넘쳐 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고 성령 충만을 얻으면 성령께서 생수의 강이 되어 우리 속에서 넘쳐 나와서 우리가 죄를 이기고 코로나19바이러스 병을 이기고, 경제적 난관을 극복하고, 가정에 평강과 축복의 열매를 풍성히 얻게 될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평안과 기쁨이 여러분과 가정에 가득하시고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공동기도: 날마다 충만한 은혜를 부어 주심으로 우리의 영혼을 평안케 하시고 몸과 마음에 건강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 주변에 코로나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이들과 그들을 치료하는 의료인들에게 힘주시고 이 악마적인 질병을 물리쳐 주옵소서. 오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혼의 생수를 마시오니 주님의 보혈로 우리의 죄와 허물이 씻어지고, 심령이 깨끗게 하시오며, 모든 질병과 괴로운 일들을 사라지게 하옵소서. 이 시간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을 성별케 하사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하시오며, 예물 드리는 손길을 축복하여 주옵소서. 우리 라온코이노니아를 사랑하사, 목사님 가정, 하순녀집사님 가정, 강부자권사님,이영식집사님의 가정, 윤정은권사님 가정, 김정화권사님 최장식집사님 가정, 전순봉집사님 가정, 김용섭집사님 소재순집사님의 가정, 각 가족들, 자녀 손들의 건강을 지켜 주옵시고, 가정 사에 복을 주사 형통케 하시며, 하나님을 의지 하여 행하는 모든 일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언제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이웃들에게 복을 나누어 주는 저희 모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헌금과 찬송: 258장 4, 5절

주기도문

 

 

 

 

 

 

 

 

 

 

 

 

 

2021년 1월 24일 주일아침예배  눅 10:21  아갈리아오ἀγαλλιάω (拍掌大笑)

여러분들 오늘 아침 일어나서 교회 올 때 까지 웃어 본 적이 있습니까? 만일 웃었다 하면 오늘은 행복한 날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부부간에 교회 오면서 부부싸움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오늘 하루는 하나님 앞에 예배드린 것이 아무 의미가 없으며 오늘 하루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배드리기 전에 서로 화해하고 와서 예배드리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웃음이 없는 날은 행복한 날이 아닙니다. 또 건강을 위해 약을 먹었다고 해도 몸이 그 약을 받아주지 못합니다. 몸이 행복하다고 느껴질 때 약을 먹어야 백배의 효과를 볼 것입니다.

어느 농촌에 가을 김장 무를 뽑는데 무가 아주 커다란 것이 남편이 아무리 잡아 다녀도 뽑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남편 뒤 허리를 붙잡고 함께 힘을 써도 뽑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어머니가 며느리 허리를 붙잡고 잡아 다녀도 요지부동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할머니 허리를 붙잡고 다같이 힘을 모아 잡아 다녔는데도 뽑혀지지 않았습니다. 손자가 그 뒤에 손녀가 그리고 마지막 3살 아기 손자까지 나란히 붙잡고 하나 둘 셋하고 힘껏 잡아 다니니 그때야 무가 쑥 빠졌습니다. 온 가족은 그 바람에 모두 뒤로 홀라당 넘어져 엉덩방아를 쪘습니다. 남편이 하하하하고 웃었습니다. 아내가 호호호하고 웃었습니다. 할머니가 후후후하고 웃었습니다. 할아버지가 허허허하고 웃었습니다. 손자가 해해해하고 웃었습니다. 손녀가 희희희하고 웃었습니다. 3살 아기가는 앙앙앙하고 울었습니다. 아기가 울은 것은 앞에 언니가 아기 위로 넘어졌기 때문에 아파서 운 것입니다. 그러나 곧 아기도 울음을 그치고 방긋방긋 웃었습니다.
(으)하하하하 호호호호 후후후후 허허허허 해해해해 희희희희 방긋방긋 이 농부네 가족은 행복한 가정이었습니다.

웃음의 종류는 여러 가지입니다. 몇 가지 말해보면,
간지러워 웃는 웃음이 있습니다.
개그맨들의 모습을 보고 우스워서 웃는 웃음이 있습니다.
실수를 했을 때 남 앞에 겸연쩍은 웃는 웃음이 있습니다.
웃을 이유가 없는데 히죽히죽 웃는 병적인 웃음이 있습니다.
소가 방귀 꿨다고 웃는 웃음이 있습니다.
너털웃음이 있습니다. 
허탈한 웃음이 있습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웃는 새색시의 웃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얕잡아 보며 입술을 한쪽으로 틀어 올리면서 뱉어내는 비웃는 웃음이 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우울하고 괴롭지만 마음을 달래며 웃는 웃음,
간교한 웃음 내시웃음이 있습니다.

이 많은 웃음 중에 우리의  몸과 마음에  건강을 실어다 주는 웃음은 어떤 것들일까요? 비웃음을 제외한 웃음은 모두가 우리 몸에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로마 린다 대학 연구팀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웃음은 스트레스 호르몬을 내려가게 하며 혈압도 낮추며 긴장된 근육풀림까지 된다고 보고된바 있습니다. 웃으면 엔돌핀이 치 솟고 얼굴을 찡그리면 엘돌핀이 잦아든다고 합니다. 흔히 걸으면 몸이 건강해 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리가 아파 잘 걷지 못한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대신 웃는 운동을 하면 됩니다. 걷는 일은 외적운동이고, 웃음은 내적 운동입니다. 암 전문으로 유명한 미국의 존스홉킨스 병원에서 환자들에게 배포하는 소책자⟪정신건강⟫에는 웃음은 ‘정신의 조깅(internal jogging)' 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2006년 우리나라의 한 대학병원에서도 웃음이 신체와 정신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했습니다. 환자들을 대상으로 6개월간 웃음간호를 실시한 결과, 웃음이야말로 가장 단기간에 또 가장 확실하게 바이탈(생명) 사인을 변화시키는 요인이었습니다. 바이탈 사인이란 생명 유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네 가지, 즉 호흡, 맥박, 혈압, 체온을 말합니다. 웃음간호를 받으며 신나게 웃고 난 환자는 맥박이 빨라지고 호흡수가 증가했습니다. 마치 운동을 했을 때처럼 심부열(몸속온도는 평균 37도로, 귀는 36.8도, 혀밑은 36.7도, 직장은 37.1도 보통 심부열을 오리는데 고주파온영자극기를 사용합니다.)이 올라가기도 하였습니다. 고혈압이 있는 환자들은 혈압이 내려갔고 저혈압으로 어지러움을 느끼던 환자들은 정상 혈압으로 돌아왔습니다. 웃음은 그 어떤 운동보다 심장과 폐기능을 향상시켰다는 것입니다. 동의보감을 보면 웃음은 심장이 주관하는데 크게 웃으면 심장이 튼튼해진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웃음이 가장 좋은 건강운동으로 기왕 웃을 바에 크게 웃으면 더욱 효과가 크다고 합니다. 큰 웃음이 여러 가지입니다.

홍연대소(哄然大笑) : 프하하 큰웃음을 터트려 웃는 웃음        
가가대소(呵呵大笑) : 큰소리로 껄껄 웃는 웃음  
파안대소(破顔大笑) : 얼굴이 활짝 펴지면서 크게 웃는 웃음 
박장대소(拍掌大笑) : 박수를 치며 크게 웃음
앙천대소(仰天大笑) : 하늘을 우러러 크게 웃음
포복절도(抱腹絶倒) : 배를 안고 넘어질 정도로 뒹굴면 웃는 웃음

5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버스 기사와 역시 그 또래쯤으로 보이는 승객 한 분이 말싸움을 했습니다.그러던 중 승객이 버스기사에게 아주 심한 말 한마디를 해버렸습니다.“넌 평생 버스기사나 해라!”
자존심을 건드리는 한마디에 승객들은 ‘아! 버스기사의 패배구나’라 생각했고 버스 안에는 순식간에 적막이 감돌았습니다.
사람들이 슬슬 버스 기사의 눈치를 보고 있을 때...
순간 버스 기사가 하는 말 “넌 평생 버스나 타고 다녀라.이 자슥아."
당황한 그 승객은 화를 내며 버스 기사에게 “문 열어! 빨리 문 열어!”
그러자 버스운전기사는 못 들은 척 하고 운전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승객은 더 큰소리로 “문 열어! 열라고! 내 말이 안 들려?”
그러자 버스 기사 하는 말 “벨 눌러...짜샤"

핸드폰의 ‘핸’자도 몰랐던 엄마가 최신형 고급 핸드폰을 딸로부터 생신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는 전화만 겨우 받을 뿐 전화 거는 것도 엉성해서 자주 헤매는 모습을 딸이 보고서 엄마에게 여러 작동법에 대해서 자세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문자 보내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엄마는 자판을 열심히 누르시더니 회사에 있는 아빠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딸에게 아빠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아빠 : "아들아 ! 이게 뭔 소리야!!! 니 엄마로부터 문자가 왔다.“
딸   : “그래요? 제가 문자 보내는 것을 아르켜 드렸어요. 무어라고 보내셨는데요?”
아빠 : " 니 엄마 술 먹었냐? 아니... 나에게 '여보 사망해'  !!!!!라고 난데없는 문자메시지를 보냈어“
(***별로 웃지 않으신데 병중에서도 아주 센 병에 걸린 것 같은데요, 웃음결핍증이라고 해요. 매우 심각한 것 같습니다. 1989년 미국 UCLA 대학병원의 프리드 박사는 간질병으로 앓고 있던 16세 어느 소녀를 치료하던 중 웃음을 유발시키는 이른바 '웃음보'를 발견했습니다. 좌측 대뇌 부근에 위치한 이 웃음보를 자극하자 소녀는 우습지도 않은 상황에서도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약하게 자극하면 미소를, 좀 더 강하게 자극하면 폭소를 터뜨렸다. 뇌 속의 웃음보를 자극하면 안면근육 중 웃음과 관여하는 근육들이 움직여 웃음이 시작된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것이다.  이야기를 들으시고 별로 웃지 않는 분들은 아마도 대뇌에 있는 웃음보에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

이태리의 유명한 철학가이며 소설가인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1932. 1. 5-2016. 2. 19)가 1980년에 쓴 ‘장미의 이름’이란 소설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였습니다(우리나라에 1986년번역출판). 이야기는 1327년 11월 이태리 어느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에 대한 연쇄 살인사건이 발생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살인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윌리암이 수도원으로 파견됩니다. 윌리암은 호르헤라는 늙은 맹인 수도사가 저지른 사건이라는 것을 밝혀냅니다. 이 호르헤 수도사가 동료 수도사들을 죽인 사건은 매우 끔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왜 호르헤는 이런 살인 사건을 일으켰을까요?
윌리암은 그것이 수도원 도서관 장서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2’이란 책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이 책은 현재 잃어버린 책이라고 합니다.  이 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웃음이 지닌 가치를 긍정적으로 보았다고 합니다. ‘시학1’에서는 비극을 말하고도 ‘시학2’에서는 희극을 논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세시대의 금욕적이고 경건한 생활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수도원에서 ‘웃음’이란 용어는 매우 금기어가 되어 있었습니다.(중세 카토릭교회는 프라톤주의영향하에 있어) 평생 한 한 번도 웃지 못한 채 인생을 사는 수도사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수도원에서 이 아리스토텔리스 ‘시학2’를 도서관에서 읽은 수도사들을 호르게가 죽인 것입니다. 그것은 신의 명령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웃음은 신을 모독하는 행위이고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장미의 이름’으로 아예 수도사들이 더 이상 웃지 못하도록 살해하였던 것입니다.
이 책에서 우리에게 말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웃음이 불가능할 때 인간은 무엇인가에 의해 억압되어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유로운 사회는 웃음이 허용된 사회입니다. 그런데 이 웃음을 잃어버리면 이처럼 생명을 죽이는 세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첨가한다면 웃음을 상실한 사람은 자기주장을 합리화시켜 다른 사람의 자유와 기쁨을 빼앗는다는 것입니다.

작년(2020년) 12월 30일 북한 노동당 제 8차대회 한 장면이 TV 뉴스에 소개되었는데, 김정일 위원장을 소개하니 일제히 모든 사람들이 일어서서 힘차게 박수를 치며 입을 벌려 와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야말로 대단한 환영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를 끔찍하게 하는 것은 그중에 한 사람도 웃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얼굴은 긴장되어 굳어져 있었습니다. 박수 소리가 작거나 질러대는 소리가 작거나 하면 엄청난 핍박을 당하지나 않을까하는 두려움이 그들의 얼굴에 가득히 덮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혀 즐거운 것 같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북한 사람들의 얼굴에서 웃음을 빼앗아 간 것일까요? 
웃음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평화롭고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입니다. '웃음' 그것은 우리의 무미건조한 삶에 평화와 자유를 부여하는 에너지이고 다투고 분쟁하는 사람들 사이를 따뜻하게 만져주는 봄바람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만일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이런 힘의 근원인 웃음을 제하여 버린다면 이 세상은 그리고 우리 사회와 가정은 어떻게 될까요? 삭막한 광야이거나 북극의 얼음지대 일 것입니다.

백신이 만들어져 미국의 일부 사람들이 백신주사를 맡고 있다고 하지만 그 효과를 보려면 금년 한해가 지나가야 한다고 합니다. 미국은 1.22현재, 누적 24,998,975명이 병에 걸리고 415894명이 죽었습니다. 하루 188.476명 신규 확정자가 생겨나고 현재 961만4365명이 치료받고 있는데, 여기에 조사되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 가운데 여전히 거리두기 마스크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뉴스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의 트럼프 지지자들이 국회에 난입하여 폭동을 일으켜 미국의 민주주의가 땅에 곤두박질치는 모습을 보고 우리는 한탄을 하였는데 ,이는 코로나19바이러스균이 육체뿐 아니라 미국인들의 정신까지 감염시키고 영혼까지 병들게 하여 한마디로 미처 돌아가는 판국(a predicament of the America) 이라고 하겠습니다.

미국만이 아니라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지금 코로나19바이러스 시대가 1년 넘게 지나고 보니 사람들이 점점 짜증스러워지고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사회가 '웃음을 잃어버린 세상lost its laugh '이 되어가는 듯합니다. 여기저기 심심치 않게 시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일부이지만 교회들, 목사님들부터가 신경질 적이 되어 정부의 방역대책을 비난하고 심지어 방역당국을 고발하는 목사님들도 있습니다. 거리두기 마스크 쓰기, 이는 누구를 위한 대책이 아니라 나를 위한, 국민들을 위한 어쩔 수 없는 대책인데, 부산의 어느 교회 목사는 우리교회는 그딴 것 안 지킨다고 목사가 설교하였다고 합니다. 어떤 선교단체 목사는 우린 마스크 안 쓰고 거리두기 안 해도 바이러스마귀가 도망간다고 설교하니 모두가 아멘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단체 수 백 명이 바이러스에 걸려버리고 그들의 가족 이웃들이 감염이 되었습니다.
바이러스가 몸만 병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영혼까지도 병들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살기가 힘들어지는 것도 문제지만 더더욱 마음이 강퍅해지고 영혼이 병들어가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이런 코로나 상황이 절박할수록,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을 때일수록 우리 기독교인들은 더 너그러운 얼굴로 웃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미소와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에겐 반드시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임하게 됩니다.
기독교인들은 어렵고 힘들 때 일수록 기쁨을 잃지 않고 웃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왜요? 영혼이 건강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건강한 사람은 그 어떤 위험이나 칼이나 질병이나 가난이나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이 있다 하더라도 얼굴 찡그리지 않고 얼굴에 웃음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Grimace 찡그린 웃음은 없습니다. 환난 중에 기뻐하며 고난 중에 희망을 잃지 않음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 욥기에서 욥의 고통을 봅니다. 친구들이 찾아와서 나름대로 위로한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더 고통만 안겨줍니다. 그러나 욥은 말합니다. 욥기서 29장을 보면, 2절에서 “나는 지난 세월과 하나님이 보호하시기 전 때가 다시 오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그 날이 다시 올 것이라고 확신하는 말입니다. 24절 말씀을 보면, ”그들이 의지 없을 때에, 내가 미소하면 그들이 나의 얼굴빛을 무색하게 아니하였느니라.(에스하크 알레헴 로 야아미누  웨오르 파나이 로 얖필룬) “ 무슨 말인지 아리송합니다. 개역성경은 더 아리송합니다. ”그들이 의지 없을 때에 내가 함소하여 동정하면 그들이 나의 얼굴빛을 무색하게 아니 하였느니라“ 무슨 말씀인지 요령부득입니다. 그런데 쉬운 성경은 ”저들이 용기를 잃었을 때 내가 그들을 향해 욱어주면 , 저들은 내 얼굴의 광채를 귀하게 여겼지.“새 번역 성경에 “내가 미소를 지으면 그들은 새로운 확신을 얻고, 내가 웃는 얼굴을 하면 그들은 새로운 용기를 얻었다.”라고 번역하니 아-그런 말씀이구나라고 이해하게 됩니다. 
(***참고로 1981년공동번역 “내가 웃기만 해도 그들은 어리둥절하였고, 내기 미소만 지어도 으쓱해 하였는데”, 205년 공동번역 개정판에는 21-25이 생략되었습니다. 두란노서원 하용조편찬 우리말 성경에는 “내가 그들에게 웃어 보이면 그들은 어리둥절했고 내 낯빛을 이그러지게 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헬라어 70인역에는 “•ἐὰν γελάσω πρὸς αὐτούς, οὐ μὴ πιστεύσωσι, καὶ φῶς τοῦ προσώπου μου οὐκ ἀπέπιπτεν. (Septuagint, Liber Iob 29:24)”이라 하였습니다. 영어 성경을 비교해봅니다.  "I smiled on them when they did not believe, And the light of my face they did not cast down. (NASB)
If I mocked at them, they did not believe it, And the light of my countenance they did not cast down. (NKJV)
When I smiled at them, they scarcely believed it; the light of my face was precious to them. (NIV)
If I smiled at them, it was too good to be true, they watched my face for the least sign of favour. (NJB)
When they were discouraged, I smiled at them. My look of approval was precious to them. (NLT)
I smiled on them when they had no confidence; and the light of my countenance they did not extinguish.(NRSV)
When I smiled on them, they took heart; when my face lit up, they lost their gloomy look (REB)
 [설명]
1) 욥이 지난 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면서 행했던 일에 대한 회상이다. 여기서 <그들이 의지 없을 때 내가 미소하면> <그들이 나의 얼굴빛을 무색하게 했다>는 말을 보라. 번역마다 꽤 많이 다르다.
2) “그들이 의지 없을 때에 내가 미소하면”을 보라.
욥은 기댈 데 없는 사회적 약자들을 향해 미소를 보냈다는 말이다.(NASB, NRSV,.... NLT, REB 도 그런 느낌이다.)
하지만 NIV, NJB, NKJV 는 다르다.
NIV, NJB는 욥이 가련한 자들에게 미소를 보내면 그들은 거의 믿지 못할 정도였다...(당시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기에)
특히 NKJV는 많이 다르다. 내가 그들을 업신여기면 그들은 그 사실을 믿지 않았다는 말인데,,,,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 번역이다...
3) “그들이 나의 얼굴빛을 무색하게 아니했다”를 보라.
NASB,NKJV,NRSV ...욥의 이런 행동 때문에 가난한 자들이 욥을 잘 받아들였다는 말이다. (욥의 얼굴을 낯설어하지 않았다..)
REB, NIV,NLT ... 주어를 아예 욥의 얼굴로 보았다.
욥이 얼굴을 들면 그들의 얼굴에서 근심이 사라졌다... 욥의 얼굴이 그들에게 귀한 것이 되다...
NJB ... 그들은 욥의 얼굴에서 (언제나 최소한의) 은혜의 표지를 찾았다... 욥은 언제나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자였다..
 4) 문맥을 볼 때, 욥이 사회적 약자들의 형편을 보살펴 주었던 일을 회상한 내용이다. “그들이 의지할 데 없을 때 욥은 웃음을 주어 용기를 북돋았고, 이러한 일 때문에 그들은 욥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길 원했다” 정도다. 평화교회 한상국목사 해설 참고)

더 쉽게 이해하면 이런 뜻입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면 그들은 힘을 얻었고, 나의 환한 얼굴만 바라보아도 그들은  용기를 얻었다”란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욥이 자신의 이 힘들고 괴로워 찡그리고 고통스러운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인다면 그를 본 사람들이 역시 절망과 괴로움을 가지게 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미소로 대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함께 아파하고 어렵고 힘들어하며 살아가지만, 그런 사람들 가운데서 그들에게 기쁨과 용기를 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절망감과 고통을 안겨 준다면 이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이런 바이러스 대 유행시대가 오히려 가장 선교할 최상의 시대로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데, 오히려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부담감을 주고 비난을 받고 걱정과 괴로움을 안겨 주고 있다면 이는 마귀의 역사에 빠져 있음을 의미합니다. 통계에 의하면 일부 몰지각한 기독교인들 때문에 기독교인 수가 100만 명 이상이 줄었다고 합니다. 비록 코로나바이러스로 어려운 시대에 함ㄴ께 살고 있지만 오히려 기독교인들이 기쁨으로 지내고 웃으면서 살면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 하는 일이며 마귀를 이기는 방법이요 전도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이기는 가장 위대한 믿음은 ‘아갈리아스데 웃어라’입니다. 웃어도 크게 웃어라입니다. 바울 사도는 항상 기뻐하나 환난 중에도 기뻐하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롬5:3. 카우코메다 엔 타이스 드맆세신: 환난-드맆시스는 좁은 길-들립보에서 유래된말입니다.cf 마7:13,14.). 영을 건강하게 하고 마귀를 이기는 비결은 환난 중에도 좁은 길을 가더라도 기쁨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크게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마5:12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카이레테 카이 아갈리아스데)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말씀에서 ‘즐거워하라 아갈리라스데’는 원어로 ‘아갈리아오’의 명령형으로 너무나 기뻐 날 뛰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다른 말로 보면 너무나 기뻐하여 박장대소 포보절도하며 웃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너무나 기쁜데 입 다물고 엄숙한 표정을 질 것입니까? 앙천대소 큰 소리로 아하하하 하늘이 울리라고 웃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아갈리아오 입니다.

사도행전 2:25-28은 베드로가 설교 중에 시16:8이하의 말씀을 인용하셨는데 특히 26절에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에갈리오사토 헤 글롯사 무 :시16:9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와야겔 케보디))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이 말씀에서 베드로가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는 “내 입을 크게 벌리어 큰 소리로 웃었으며”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빌2:11에 ‘파사 글롯사’를 ‘모드 입’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기뻐한다는 것은 마음으로 기뻐하는 수동적인 행위입니다. 그런데 즐거워하라는 말씀은 겉으로 나타나는 외적인 행동입니다. 즉 너무 즐거워 앙천대소 박장대소 포복절도하며 크게 웃으며 살아야 합니다. 이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웃음을 생활화해야 합니다. ‘웃어라 아갈리아스데’ 이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코로나 바이러스 시대에 그러지 않아도 아프고 괴롭고 답답한데 마귀에게 져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함께 기쁨과 행복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유월절 만찬 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다음, 여러 말씀하신 가운에, 제자들에게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15:11)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아마도 이 말씀하신 다음 예수님은 앙천대소 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도 아갈리아오 크게 웃어라 그래서 제자들도 와하하하 박장대소 하였을 것입니다. 
마귀는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지만,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는 웃으면서 방역당국의 말에 협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하나님은 방역당국을 통해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주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삶을 살지 못한 채 거리두기도 거절하고 마스크도 쓰지 않게 하는 마귀의 계략에 빠져 살아가고 있다면 기독교인답지 않습니다. 코로나로 몸이 병드는 것보다 영혼이 망하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하늘의 예비 된 상까지 잃게 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고 말씀하신 것을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꼭 생각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웃음을 잃어버릴 때 하늘의 상금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한 가지 근심한다면 하늘에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예비해 주신 금덩어리 하나를 마귀가 훔쳐 간다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두 번째로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면 금덩어리 두 개를 도적맞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평생 근심 걱정에 살아 기쁨도 없이 웃음도 없이 살고 있다면 나를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모든 하늘의 상금을 몽땅 마귀가 훔쳐 갈 것이니 이 어쩌면 좋겠습니까? 다시 찾아 와야죠. 아직 늦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기뻐하고 웃으며 살면 잃었던 상금 몽땅 다 마귀로부터 도로 찾아 올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살다보면, 기뻐할 수 있는 상황보다 불안하거나 슬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더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웃을 때보다 짜증이 나고 화를 내야 할 때가 많습니다. 아마 여러분, 지금도 기쁜 일 보다는 마음 괴롭고, 웃고 싶은 사정보다는 울고 싶은 일들이 더 많이 가진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도대체 웃을 일이 없습니다. 하루 종일 한 번도 웃을 일이 없습니다. 웃을 일이 있어야 웃죠. 다만 TV를 보며 한번 웃고 말 일이 있을 뿐입니다. 요즈음 뭉쳐야찬다는 축구연예프로를 보며 웃을 일이 있거나, 유재석이 나오는 유키즈프로를 보며 한번 웃고 말 일이 있을 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직 인간만이 웃을 줄 안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왜 인간에게만 웃을 줄 알도록 창조하셨을까요? 죄악세상 마귀가 공중의 권세를 잡고 있는 땅위에 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웃음을 주시어 마귀를 이기도록 하신 것입니다, 맹수의 왕 호랑이가 아무리 강해도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왜요? 호랑이는 웃지 못합니다. 

(안성복거마을에 호랑이가 살던 마을이라 하여 담벼락에 호랑이 그림들을 그리고 웃는 호랑이 상을 만들어 지붕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찡그리고 웃는 사람 없습니다. 험상 굽게 웃는 사람 없습니다. 찡그리고 웃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웃으려면 얼굴의 근육을 다 펴고 환하게 웃어야  합니다. 웃는 사람 얼굴은 너무나 행복한 얼굴입니다.

언젠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위원장과 대화하며 웃는 사진을 보았는데 김정은의 웃는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가 웃는 것 같아보였습니다. 그러나 이 웃음은 너무나 허망한 웃음입니다.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웃는다 해도 그 뒤끝은 허망하고 씁쓸한 여운을 남길 때가 있습니다. 웃기는 개그맨들의 모습을 보면 웃지만 웃지 않는 웃고 난 다음 뭔지 모를 슬퍼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아갈리아오”는 그런 씁쓸한 뒤끝이 남는 웃음이 아니라 하늘의 상금이 예비 되는 웃음입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 1:2,3) 여러분, 시험이 다가와도 기뻐해야 하고, 여러 가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기뻐해야 하는 이유를 아십니까? 그 시험이 우리를 인내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역경이 우리를 성장시켜 주고 성숙시켜주기 때문입니다. 또 로마서 8장 28절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모든 상황들을 우리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고 계십니다. 견디기 힘든 어려운 시험과 고통의 시간들도 결국에는 우리에게 유익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이 와도 기뻐해야 합니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얼굴 찡그리지 말고 웃어보십시오.
어떻게 역경 속에서도 웃을 수 있을까요? 이것이 기독교인의 특권입니다. 일반 사람은 모르는 신비함입니다.

오늘 아침 읽은 본문 말씀 눅 10:21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테 호라 에갈리아사토 엔 토 프뉴마티)”이 말씀도 ‘아갈리아사토’ 크게 웃으셨는데, 성령충만한 가운데 웃으셨다는 것입니다. 성려충만한 사람은 아갈리아오 크게 웃습니다. 왜 크게 웃습니까?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갈리아오 웃음은 오직 성령충만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성령의 희락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희락은사를 받은 사람은 인생을 기쁘게 즐겁게 웃으며 삽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성령으로 성령 안에서 성령의 돌보심으로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웃으며 살아야 합니다. 세상이 힘들고 어렵다고 우울하게 살며 웃음을 읽어버린 사람이라면 성령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바로 성령의 돌보심이 없기 때문에 즉각적으로 마귀의 공략 대상이 되어 버립니다. 
건강하게 살아가려면 억지로라도 웃어라, 웃는 시늉이라도 하라고 권면하는 의학박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억지로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심령가운데서 샘솟듯 하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웃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이웃들도 함께 웃고 더불어 기쁘게 살아가는 세상이 됩니다. 내가 웃으면 가족이 웃고 이웃이 웃고 가까운 사람 먼데 있는 사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웃는 아갈리아오 세상이 됩니다.(저는 세계 모든 사람이 동참하는 웃음 릴레이 대회라도 열었으며 합니다.)

한 달 만에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니 절말 너무 기쁘고 즐겁습니다. 아갈리아오, 저는 아침에 너무 기뻐 큰 소리로 웃었습니다. 이렇게 대면예배 드리니 너무 좋습니다.

이제 금년 한 해 동안 여러분에게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랍니다. 즐겁고 기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아갈리아오 한바탕 크게 웃을 수 있는 생활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보시고 기뻐하시며 웃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함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갈리아오(김은지작사 백하슬기교수가 작곡)’ 복음성가를 함께 부르겠습니다. 

“아갈리아오 주를 기뻐하라 나팔을 불며 신나게 찬양하라
아갈리아오 주님 우리를 바라보며 웃으신다
기뻐하라 주님의 살아계심 찬양하라 주를 높이는 노래
기뻐하라 온 맘과 정성 다해 찬양하라
주님 우리를 바라보며 하하 호호 웃으신다
우린 신나는 리듬에 맞춰 붐치기붐치기 붐붐 치기치기
찬양하리 주를 찬양 찬양

아갈리아오 주를 기뻐하라 소고를 치며 신나게 찬양하라
아갈리아오 주님 우리를 바라보며 웃으신다
기뻐하라 주님의 살아계심 찬양하라 주를 높이는 노래
기뻐하라 온 맘과 정성 다해 찬양하라
주님 우리를 바라보며 하하 호호 웃으신다

우린 신나는 리듬에 맞춰 붐치기붐치기 붐붐 치기치기
찬양하리 주님 우리를 바라보며 하하 호호 웃으신다
우린 신나는 리듬에 맞춰 붐치기붐치기 붐붐 치기치기
찬양하리 주를 찬양 찬양
붐치기붐치기 붐붐 치기치기
붐치기붐치기 붐붐 치기치기

아갈리아오! “

 

 

 

 

 

 

2021년 1월31일  주일아침예배    사 65:1  我在此(내가 여기 있노라.)


터키의 혁명 시인인 히크메트(Nazim Hikmet, 1902-1963)의 유명한 시로 “진정한 여행”이란 시가 있습니다. 그 시에서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여 지지 않았다. /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 지지 않았다......어느 길로 가야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 그때가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라고 말 하였습니다. 저는 이 시를 차용해서 “가장 훌륭한 설교는 아직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신 말씀이다“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히크메트는 “하나님과의 인터뷰”란 글에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간에게서 가장 놀라운 점이 무엇인가요?" 신이 대답했다. 어린 시절이 지루하다고 서둘러 어른이 되는 것. 그리고는 다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기를 갈망하는 것.  ​돈을 벌기 위해 건강을 잃어버리는 것 그리고는 건강을 찾기 위해 돈을 다 잃는 것. 미래를 염려하느라 현재를 놓쳐버리는 것. 그리하여 결국 현재에도 미래에도 살지 못하는 것. 결코 죽지 않을 것처럼 사는 것 그리고는 결코 살아본 적이 없는 듯 무의미하게 죽는 것“등 하나님과 여러 대화를 나눈 후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밖에 또 들려주실 말씀은요? 내가 겸손하게 여쭙자, 하나님은 미소 지으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늘 명심하여라.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언제까지나...모든 방식으로...Just know that I am here. Always. All ways."
하나님은 언제나 모든 방식으로 여기에 계십니다. 이 말씀을 이미 2500년 전 제3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은 말씀하시었습니다. “내가 여기 있노라,(힌네니 אמרתי הנני הנני 거의 모든 영어성경에는 Behold Me!로 번역. 본래 원어는, ‘여기에, 이쪽으로, 보라!, 자!’ 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개역개정판 성경의 번역이 더 적절한 번역이라고 봅니다.)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여기서 여기란 다만 공간적인 장소의미만 아닙니다. 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하나님은 계십니다. 내가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던지, 하나님은 내 옆에 계시고 내 앞에서 나를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나 지금 내 옆에 계신 하나님을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계신 하나님, 내 머릿속에 계신 하나님, 나의 생각 속에 계신 하나님을 말씀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 있노라.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객관화시켜 나와 다른 차원의 존재로 여기거나 내가 바라보며 그분을 판단할 대상으로 생각들 합니다, 그래서 때론 나와 상관없는 분으로, 전혀 그분을 의식하지 않고 내 생각 마음가는대로 살아갑니다. 누구는 그것이 신으로부터의 자유, 독립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하나님을 전혀 의식한지 않고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 하나님을 찾거나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찾기 전에도 그리고 바라보기 전에도 하나님은 그와 함께 계셨고 그의 생각 속에 계셨습니다. 단즉 그가 자기 생각 속에 계신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오늘의 설교의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든 안 하든 하나님은 우리 생각 속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존재하십니다. 무신론자에게는 무신론적 방법으로 그의 생각 속에 계십니다. 신이 죽었다고 외친 니체의 생각 속에 이미 하나님은 존재하여 계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아도, 하나님을 비난하고 죽었다고 말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그들의 뇌 속에, 세포 속에, 심령 속에, 생각 속에 살아 계십니다. 내 삶의 전체 통전적인 존재로 내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여기 있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을 믿을 수 있고 하나님의 열정적인 사도도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있고, 김익두가 있고 수많은 무신론자들이 기독교인들이 되는 이유가 그들 생각 속에 이미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바이러스 이후에 세계는 어떻게 변할 것이고 인간의 현상은 어떻게 바뀔 것인가에 대해 많은 말들이 오고가고 있습니다. 최근에 나의 친구로부터 카톡으로 보내온 글에 ‘UN보고서’라는 글을 보내 왔는데, 2030년 까지 20억 개의 일자리가 소멸 되고 현재 사람들의 일자리가 80%가 사라진다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운전기사, 주유소, 보험사, 학교교사 대학교수, 부동사중개업, 인쇄업, 백화점이나 마트, 판검사  변호사 등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살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이런 추측이 과장되지만은 아닌 것은 지금 우리의 과학기술의 발달과 인류사회의 변화는 너무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류역사를 보면 인류의 발전은 또한 멸망의 지름길로 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칼싸움하고 창으로 찔러 적을 물리쳤지만 지금은 핵폭탄 하나만 터트려도 수십만이 죽습니다. 아니 아직 알려지지 않은 더 무서운 바이러스만 유행시키면 몇 천 만, 몇 억이 죽게 됩니다. 인간 기술은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멸망을 낳습니다. 왜 인간 기술의 발달이 인간 멸망의 지름길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술 한 잔이 건강에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뇌는 술 한 잔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행복은 자신의 만족을 채울 때라고 각인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술 한 잔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특히 한국인은 일차 이차 노래방 그리고 3차까지 가야 만족합니다. 그리고 호기롭게 운전을 하고 고속도로를 달려가야 기분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망합니다. 자신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합니다.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욕망을 만족시키며, 결국 망하는 길로 가는 것은 아닙니다.
기술의 발전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능력의 행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하나님 보다 조금 못하게 창조하시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생각 속에 계시니 인간은 언제나 지금보다 더 좋은, 더 발전된 기술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창조 역사의 일부분입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그 기술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가, 하나님의 도덕률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교만해 졌습니다. 마치 기술의 발전이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 이루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필요 없다 내 힘과 지혜로 이루리라 하면서 바벨탑을 쌓고 있습니다. 깨닫지 못합니다. 지금 지구상에 일어나고 있는 자연재해와 각종 재앙들, 공기와 수질 오염이나 온갖 질병의 유행이 다 바벨탑을 쌓고 있는 인간의 어리석음 때문임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흔히 나이 70이 넘으면 잘사는 사람이나 못사는 사람이나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다 똑같다는 자조 섞인 말을 하는데,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 가운데 성별이나 지위의 높고 낮음, 지식이 많고 적음이나 재물의 유무, 종교지도자나 평신도에 관계없이 똑같이 부동산투기, 음주운전, 성적추행, 가정폭력, 사리사욕 등 온갖 불법과 부정 불의로 똑 같이 범죄에 걸려 있습니다. 부동산 투기법을 제정한 사람이 부동산 투기를 하고, 어린아이를 잘 보호하고 키워야 할 엄마가 아이를 학대하여 죽이고,  음주운전을 단속하는 경찰이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치고, 여당의 성범죄에 대해 추상같은 비난을 퍼 붓던 한 야당대표가 성범죄로 출당되는 모양새를 국민들은 허탈한 심정으로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어 복음을 전해야 할 일부 교회목사와 교인들 특히 선교사를 양성하는 단체들이 방역법을 부정하여 수백 명이 집단 코로나에 걸리게 되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교회를 비난 받게 하는 불편한 진실 앞에 우리는 아연실색하게 됩니다.  왜 이런 악한 행위들이 세상에 만연되어 있는 것입니까?  그 원인은 우리 생각 속에 계시어서 우리로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심령을 하나님의 무덤으로 만들어 버리고 할레루我를 외치며 자기만족 자기영광을 누리려 하기 때문입니다. 과학이 발전하고 기술이 발달이 사람들의 죄와 악을 증강시키는 지름길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21세기 금세기 중에 인류가 스스로 망하리라는 이야기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과학자들이 이구동성 외치고 있습니다.     

미국'선 마이크시스템사'의 대표 과학자인 빌 조이(William Nelson Joy, 1954.11.8.일-)의 다음의 경고는 급박하게 들립니다.'우리가 살아남을 것인가, 기술이 살아남을 것인가, 제동을 걸 마지막 기회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 그러면서 빌 조이는 인류에게 다소 진부한 듯 하지만 형제애 사랑 자비심이 새롭게 유효하다고 말합니다. (녹색평론 11.12월호.통권 제55호. 부산일보 2021.1.29.)


21세기는 인간이 현생 인류를 일컫는 '호모 사피엔스'로서 살아가는 마지막 세기가 될까? 이스라엘 히브리대 사학과 교수 유발 하라리(40)는 "그렇다"고 단언합니다. 하라리는 "인공지능 알파고가 '인간이 우위를 지키는 절대 영역'으로 여겨진 바둑에서 인간 최강 이세돌 9단을 꺾은 것이 신호탄"이라며, "이제 인간은 유일하게 타고난 두 능력, 즉 육체와 지능 면에서 모두 기계에 뒤처졌으며 조만간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할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라리는 "21세기 후반의 신인류는 생명을 창조하고, 정신을 통해 가상·증강현실에 접속하며, 신체를 계속 재생해 사실상 불멸에 이른다"며 "아마 2100년에 가장 활발히 거래되는 상품은 다른 무엇도 아닌 건강한 뇌, 피, 신체기관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였습니다. 참으로 소름 끼치는 소리라고 하겠습니다.(조선일보 박승혁 기자입력 2016.03.12 03:11)

문재인대통령이 대통령 되던 때 오늘날의 코로나18버이러스로 경제가 곤두박질 칠것이라 예측한 사람은 이 지구상에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어쩐 유명한 경제학자도 과학자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끔직한 질병의 먹구름이 지구에 꽉 들어차 있는 것처럼 누가 무서운 미래가 곧 우리 앞에 올 것이라 예측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곧 사람들은 그 무서운 미래를 맞닥뜨리게 될 것입니다.
어째든 과학자들이 인류의 미래에 대해서 끔직스럽게 예측하는 말이 그대로 맞을 런지 알 수 없으나, 그러나 우리는 이대로 인류사회가 흘러간다면, 반드시 인간세계는 100년도 못가서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들의 사랑스런 자녀들 그리고 손자손녀들의 시대, 아주 가까운 미래에 그들이 살아갈 미래는 망하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과학기술로 망하는 것이 아니라, 엄청나게 발전된 죄악의 만연으로, 지구에 온갖 화산이 폭발 되고, 백두산이 폭발되고, 후지산이 폭발되고, 북극 남극의 얼음이 녹아 바다가 상승되어 일본이 태평양 바다에 가라앉게 되고, 우리나라 해안선에 바다 물이 들이차 김제 평야까지 바닷물이 출렁일 것이며, 얼음물이 녹아 바다의 염도가 낮아지니 수많은 어류들이 죽어 바다 위를 둥둥 떠 돌 것이고, 유전자 조작으로 만들어진 음식물을 먹게 되니 온갖 유행병이 연달아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스런 아들딸의 후손들이 100년 안에 마지막 한국인이 될 런지도 오릅니다. 이런 날이 올 것을 그냥 기다릴 것입니까? 우리 시대는 아직 아니라고 안심하고 여기 이대로 내 마음대로 살겠다고 할 것입니까? 우리의 죄와 제 멋대로 생각하고 이기주의와 사리사욕과 온갖 죄가 덕지덕지 묻은 이 더러운 발걸음으로 우리 후손들에게 망하는 길로 이어가게 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잊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들려오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힌네니! 힌네니! ” 오늘 이사야 65장의 말씀은 유대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방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왜 유대인들에 주신 말씀이 아닙니까?
이사야65:2-5에 유대인들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데,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곧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 그들이 무덤 사이에 앉으며 은밀한 처소에서 밤을 지내며 돼지고기를 먹으며 가증한 것들의 국을 그릇에 담으면서 사람에게 이르기를 너는 네 자리에 서 있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라 하나니 이런 자들은 내 코의 연기요 종일 타는 불이로다.“

이런 패역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12절에 “내가 너희를 칼에 붙일 것인즉 다 구푸리고 죽임을 당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하며 내가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고 나의 눈에 악을 행하였으며 내가 즐겨하지 아니하는 일을 택하였음이라.” 결국 유대인들은 망한 나라 망한 백성이 되어, 2500년 동안 지구 온 나라로 유랑민으로 떠돌아다니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에 대해 차라리 이방인들을 향해 하나님은 “내가 여기 있노라 여기 있노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 그리고 21절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25절 결론적으로 말씀하시기를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결국 미래 이 말씀 그대로 이루어 질 것이라 우리는 믿습니다. 

미케란제로의 그림 중에 가장 유명한 그림 중에 하나가 바로 천지창조 그림입니다.

이 그림을 보면 하나님이 손을 뻗어 검지손가락을 아담에게 보냅니다. 아담이 비스듬히 누어 왼손을 하나님의 검지손가락 쪽으로 뻗는 데, 어찌 그 모양이 시큰둥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왼손을 내미셨으니 오른 손을 내밀어야 마땅한데 그것도 힘 있게 내미는 것이 아니라 마지못해 왼 손을 무릎위에 올려 내 밀 듯 손목을 아래로 꺽은 채입니다.  이 그림에서 하나님의 의욕적인 모습에 아담의 소극적인 모습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 속에 계시어 하나님의 뜻을 펼치기를 바라십니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영생토록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의지가 우리를 일으켜 주십니다. 방역에 종사하는 의사와 간호사가 자기들을 위해 그 험한 일을 그토록 열심히 하는 것입니까? 월급을 더 받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이분들은 환자들을 살리고 이 유행병을 자기의 몸으로 막아보려는 선한 의지로 방호복속에 땀이 물 흐르듯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 속에 계시는 것은 우리를 로봇으로 사용하고자함이 아닙니다. 우리를 망하는 세상에서 구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애가 많으신 일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주님을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조차 이것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아니 믿는다고는 말하지만 시큰둥하게 믿습니다. 억지로 믿는 듯 자기 생각 따라 믿습니다.
주님을 믿는다하면 주님의 생각을 내 생각으로 삼아야 합니다. 나의 생각은 이렇고, 하나님의 생각은 저렇다하면 이런 내 생각을 버리고 저런 하나님의 생각을 품어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명기 28장 복 받는 사람들의 순종입니다. 자! 내 생각은 이러한대 하나님은 어떤 생각을 하실 것인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이기적인 내 상각의 반대입니다. 나는 이렇게 하길 원한다하면 ‘... 의 반대’가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비록 나에게 손해가 있고 사람들에게 바보소리를 듣는다 해도, ‘하나님의 생각이 옳습니다.’ 하고 하나님의 생각대로 살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여기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기 계시는데 내 마음대로 할 것입니까?
지금 전염병이 유행하고 있으니 방역당국에 협조하고 그 방역 당국의 지침을 따르자와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이 지켜주시니 거리두기 할 것 없이 예배드리자 할렐루我합니다. 아주 믿음이 좋은 사람 같지만 그 뒤에는 목사의 자만과 자기유익을 구함이 있습니다. 자기마음대로 자기만 생각하는 자기만주의가 있습니다. 남 생각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닙니다. 방역당국에 협조하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이웃을 생각하는 이웃을 살리는 일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나만주의가 아니라 남만주의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나 사랑이 아니라 남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하나님 사랑이고 나를 살리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신앙은 公共信仰 Public Faith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비 신앙인들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 믿음의 표본 같은 바리새인들과 같이 하지 않으시고 죄인과 세리와 병자와 가난한자들 중에 계시는 예수님의 사랑은 공공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생각 속에는 오직 하나님 생각만 가득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후토스 가르 에가페센 호 데오스 톤 코스몬) 여기서 세상 코스모스는 나만 있는 세상이 아닙니다. 우리만 있는 세상도 아닙니다. 온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 그 뿐 아니라 지구 하는 땅 그 아래에 살고 있는 모든 피조물, 저 먼 우주 끝에 이르기 까지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생각 안에, 내가 여기 있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생각을 품은 나의 생각의 범위가 얼마나한 가를 가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겨우 우리의 작은 뇌 속에 갇혀진 나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생각을 판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소로운 일입니까?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나의 생각으로 부터 자유 이것이 구원의 길입니다.  그럼으로 바울선생님은 육을 죽이고 영으로 살라고 하신 말씀이 하나님의 영적생각으로 살아가라는 의미입니다.

아직 코로나 시대 그러나 이럴 때 일수록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내 생각은 겨우 내 뇌 속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차원의 사고 일뿐이요, 하나님의 생각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는 그 넓이와 높이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큰 공공의 생각입니다. 지금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여기 있노라.” 한문으로 我在此 ,영어로 I'm Here, 히브리어로 ‘힌내니 힌내니’. 하나님 여기 계시는데 딴 생각 말고, 엉뚱한 죄지을 생각 말고, 하나님과 어긋장 나는 생각 말고, 하나님 생각 그 뜻하심대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이 복된 인생이요,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생각을 나의 생각으로 삼을 때 코로나를 이기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위로하심이 우리와 코로나로 고통당하는 모든 세계 사람들 위에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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