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드론을 아십니까? 조종사가 없이 무선 전파로 하늘을 나는 무인 비행기나 헬리콥터를 말합니다. ‘드론’은 ‘낮게 웅웅거리는 소리’를 뜻하는 단어로 벌이 날아다니며 웅웅대는 소리에 착안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드론은 애초 군사용으로 탄생했지만 이제는 고공영상·사진 촬영과 배달, 기상정보 수집, 농약 살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또 동호인들의 취미생활로도 이용되고 있습니다. 드론의 역사는 100년의 역사로 1916년 군사용무인기로 개발이 시작되어 1930년 드론이란 이름이 명명되었지만 성능이 떨어져 이용가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전자 컴퓨터공학이 발전 되면서 각광을 받게 되었습니다. 드론은 크기에 따라 무게 25g의 초소형 드론에서부터 무게 1만2000kg에 40시간 이상의 체공 성능을 지니는 등 그 값도 몇 십억 원에서 2만 원대로 천차만별입니다. 2013년 도부터 북한의 무인정찰비행기가 휴전선 부근에서 활동하다가 추락하여 우리나라의 안보체계에 큰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무인비행기의 성능은 매우 초보적인 수준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아직 우리나라에 드론의 활용이 많지 않지만 그 기술 수준은 세계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 드론 회사들이 한국에 주문생산하고 있는 정도로 한국의 수준은 세계 최고수준입니다.

 

지난 1월 28일 부산 벡스코 전시장에서 아시아 최대 드론 축제가 개최되었습니다. 국내·외 56개 기업 및 기관이 222개 부스 규모로 참가하는 이번 행사는 한국 드론 산업의 첨단 기술과 제품을 알리고, 수요자와의 교류·협력을 촉진하기 위해 마련되었던 것입니다. 행사 기간에는 전시회, 콘퍼런스를 중심으로 드론 레이싱 대회, 드론 영상제, 드론 사진 공모전, 교육·체험행사 등 다양한 이벤트가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산업부 이관섭 차관은 “기존의 기술개발 중심의 정책을 넘어 비즈니스모델 발굴, 테스트베드 구축 등 산업이 지속해서 발전할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하는 데 주력해 고기능 ‘산업용 드론’을 새로운 국가 성장 동력으로 육성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한편, 정부는 작년 12월 전남 고흥의 규제 프리존을 비롯해 부산 해운대 등 전국 5곳의 드론 전용 공역을 지정하는 등 드론 시험비행을 위한 규제 완화 조처를 한 바 있습니다. 드론 전용 공역은 전남 고흥, 강원 영월, 대구 달성, 부산 해운대, 전북 전주 등으로 정하고 준비중에 있습니다.

 

드론에 영상 촬영기기를 장착하여 하늘에서 촬영하면 바로 지상의 컴퓨터나 헨드폰으로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100미터 또 1만 미터 공중에서 촬영을 하면 사람의 얼굴만 아니라 자동차 번호판 까지도 확연히 볼 수 있습니다. 이미 드론이 하늘에 떠서 고속도로의 과속 차량을 단속하기도 하고 경찰이 범인을 추적하는데 사용하기도 하고 우편물이나 택배를 신속하게 전달하기도 할 것입니다. 이미 드론법이 제정되어 있습니다.

 

공군을 에어포스(air force)라고 합니다, 그런데 체어포스(chair force) 공군이 있습니다. 비행기를 조종하는 조종사이기는 한데 실제 비행기를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컨테이너 박스 안 의자에 앉아서 무인 비행기를(물론 시뮬레이션이기는 하지만 전투기 안과 똑 같은 상황으로 만들어져 있다)모니터를 바라보며 상관이 명령하는 그대로 이륙과 착륙과 미사일을 발사하는 군인입니다. 얼마 전 무인 비행기를 조종하는 체어포스맨이 양심선언을 하며 그만두었습니다. 학급에서 1등으로 고교를 졸업한 그는 군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일터는 미국 뉴멕시코주의 캐넌 공군기지. 임무는 무인비행체 즉 드론(drone)을 조종하는 파일럿이었습니다. 나름 편하게 군대생활하고 있다고 생였하였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이 일을 그만둬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독일 주간지 슈피겔은 최근 국제적인 논란이 되고 있는 무인비행체 드론 조종 임무를 5년간 맡아오다 전역한 미군 병사의 이야기를 보도하였습니다. 브랜든 브라이언트의 사무실은 컨테이너 형태의 직사각형에 창문 없이 밀폐된 작은 방이었습니다. 사무실의 온도는 늘 섭씨 17도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14대의 대형 모니터와 복잡한 기계는 실제 전투기의 조종석과 똑같이 꾸며져 있었습니다. 조종석에 앉은 2명의 ‘파일럿’이 뉴멕시코의 사무실에서 모니터를 보며 버튼을 누르면, 지구 반대편 중동이나 아프리카의 어느 곳에서 드론이 발사한 미사일이 떨어져 누군가가 죽었습니다.

 

브라이언트가 생생하게 기억하는 그날은 1만㎞ 이상 떨어진 아프가니스탄 하늘로 자신이 조종하는 드론을 날려 보냈습니다. 뉴멕시코 사무실의 모니터에 진흙으로 만든 납작한 지붕이 나타났습니다. 드론에 장착된 카메라가 2∼5초 간격으로 전송해온 현장 사진이었습니다. 발포 명령이 떨어지자, 그는 지붕에 초점을 맞춘 뒤 버튼을 눌렀습니다. 16초 뒤면 드론에 장착된 헬파이어 미사일이 저 지붕 위로 날아갈 것입니다. “미사일 발사 7초 전까지도 분명 그 지붕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그때라도 취소 버튼을 누르면 미사일 폭격을 막을 수 있었어요.” 발사 3초 전, 모니터의 한쪽 귀퉁이에서 아이가 걸어 나왔습니다. 0초까지 가는 그 짧은 시간이 브라이언트에게는 마치 스로우 비디오처럼 느껴졌습니다. 화면에는 먼지가 피어올랐습니다. 집은 무너졌습니다. 먼지가 가라앉은 뒤에도 아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속이 메스꺼웠습니다.

“우리가 지금 꼬마 애를 죽인 거 아냐?” 옆자리 동료에게 물었습니다. “맞아, 꼬마였던 것 같아.” 동료가 대답했습니다. 브라이언트는 모니터 화면의 채팅창에 글씨를 써 넣었습니다. “아이가 있었습니까?” 그러자, 누군가가 화면으로 대답했습니다. 어딘가에 있는 작전 사령부에서 그들의 ‘비행’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니다. 그것은 강아지였다.” 브라이언트와 동료는 폭격 화면을 다시 돌려 보았습니다. 아프간에는 강아지가 두 다리로 걸어 다니는 걸까! 브라이언트가 컨테이너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가자 미국 남서부의 광활한 대지가 지평선 끝까지 펼쳐졌습니다. 캐넌 공군기지의 레이더 탑에선 몇 초에 한 번씩 불빛이 반짝였습니다. 어디에서도 전쟁의 기운은 느낄 수 없었습니다. 캐넌 공군기지의 브라이언트는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드론 파일럿 기간 동안 “여성과 어린이가 죽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며 “차라리 내 눈이 썩어버리길 바랐다”고 말했습니다.

 

그야말로 드론은 하늘의 눈이라 하겠습니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우리나라를 그리고 우리를 지켜보는 드론의 눈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눈이 우리를 지켜 살펴보시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는 한시라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오늘 봉독한 시 139:1-4절에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하나님의 눈이 한시라도 우리에게서 떠나신 적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잠언 15:3에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욥기 34장 21,22절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는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행악자는 숨을 만한 흑암이나 사망의 그늘이 없느니라 '

 

시편 94편 9절에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렘17: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우리 인간을 보십니다. 살피십니다. 감찰하십니다. 오늘의 설교 제목 ‘메 비디트 데우스 (Me Vidit Deus)’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지금도 우리의 겉 모습만 아니라 우리의 속 마음을 살펴보십니다. 주님의 눈은 불꽃같아서 우리의 속마음을 헤쳐 보십니다. 하나님의 눈은 우리를 살피시고 나를 보십니다. 내 생각과 내 생활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못한 것은 혹시 없습니까? 하나님의 눈이 우리 하나 하나를 지금 보시면서 우리 양심에 말씀하여 주십니다. “너는 지금 잘못 가고 있다. 너는 지금 큰 죄를 짓고 있다. 넌ㄴ 곧 회개하고 나에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에스겔 8장에 보면 환상 중에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어떤 곳으로 인도했는데 가만히 보니까 큰 벽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벽에 조그만 구멍이 나 있었습니다. 그 구멍으로 아무리 들여다보려 해도 잘 보이지 아니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 벽을 헐라! 그래서 에스겔은 그 벽을 헐었습니다. 그랬더니 큰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문을 열라 해서 그 문을 열었습니다. 문을 열고 보니까 방이 하나 있는데 그 방안에는 온갖 더러운 짐승, 벌레, 그리고 그 벽에는 우상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이 깜짝 놀란 것은 이스라엘 장로 70명이 그 우상에게 분향을 하고 서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이 너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의 하는 일을 아느냐? 이 사람들이 입술로는 나를 섬기노라 하지마는 실상 자기 마음 속 깊은 곳에는 더러운 것들이 많고, 실상은 우상을 섬기면서 이 사람들이 내가 이것을 보지 못하는 줄을 알지마는 내가 이렇게 분명히 보고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마음을 담으로 쌓고 문을 꼭 닫은 다음에 내 속을 누가 보겠느냐? 온갖 더러운 죄를 마음 벽에 가득 그려놓고 심지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마음으로는 우상과 미신을 따르고 있습니다. 흔히 속담에는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누가 그 속을 알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의 눈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속을 보십니다. 하나님께 감출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비밀이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골방 속에 꼬기 꼬기 꾸겨 넣은 비밀도 하나님은 한 눈으로 이미 알고 계시니 어찌 하나님의 눈을 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은 그 행한데로 갚으시고 그 행실대로 보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시 139 7.8절에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노아 때의 사람들의 악한 생각과 행동을 보셨습니다. 모세시대 무너진 여리고 성에서 아간이 의복과 금은을 감출 때는 남몰래 감추었습니다. 누구도 몰랐습니다.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하나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을 그를 보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애급 왕에게 자기 아내를 동생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악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에게 행한 죄악을 보셨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이 나봇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고 그의 땅을 빼앗은 것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그대로 갚으셨습니다. 세계 역사도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만행을 보시고 그들을 망하게 하셨습니다. 힛틀러의 무도한 독재를 보시고 그들의 최후가 어떠하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세계 역사에서 포악한 왕과 독재자들을 보시고 그들을 망하게 하셨습니다. 누가 북한의 김정은을 두려워 합니까? 그도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인류 역사에 살인강도가 행복하게 살았다! 도박꾼들이 행복하게 살았다! 사기꾼들이 행복하게 살았다! 알콜 중독자 아편중독자들이 행복하게 살았다! 우상숭배자들, 이단의 교주들이 오래오래 잘 살았다! 이같은 역사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눈에 보여 질 바로 그때가 그들이 망할 운명이 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슨 죄를 짓든지 하나님이 보는 눈앞에서 짓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경찰이 보는 앞에서 도둑질 하는 것 같습니다. 날 잡아주세요 하듯 날 멸망시켜 지옥에 떨어지게 해 주세요 하듯 어리석게도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안과 밖을 꼭 같이 보시기 때문에 우리의 악한 생각을 악한 행동과 꼭 같이 미워하십니다. 그러기에 주님 말씀하시기를 음욕을 품으면 벌써 너희 마음속에 이미 간음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모든 죄 가운데서도 외식하는 죄를 특별히 미워하셨습니다.

 

제가 26사단 사단사령부에서 군대생활 할 때입니다. 어느 날 참모총장이 우리 사단을 방문한다고 하니 며칠 전 부터 부대 안 밖을 깨끗이 청소를 하고, 부대 내무반 구석구석을 깨끗이 정리정도하고, 화장실에 가득 차 있던 분뇨까지 깨끗이 퍼내어 냄새라고는 나지 않았습니다. 소독약도 뿌려 파리 한 마리 모기 한 마리도 구경할 수도 없었습니다. 참모총장님이 방문하는 날, 아침 9시부터 연병장에 정렬하여 서서 꼼짝도 않고 참모총장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참모총장님은 그날 오후 2시에 방문하여 잠시 우리 부대원들을 사열한 후 30분간 사단장 실에 있다가 부대를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참모총장님 보다 높으시고 대통령보다 높으신 분 아닙니까? 그리고 하나님은 잠시 왔다가 가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평생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을 어떤 모습으로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맞이하고 있는 내 마음의 방은 여전히 죄악으로 지저분하고 온갖 더럽고 추한 모습이라면 하나님은 우리를 어찌 보실 것입니까? 하나님을 모시는 마음은 정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겉으로만 깨끗한 척 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마음 속 깊이까지 언제나 깨끗해야 합니다. 메 비디트 데우스.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십니다.

 

눅 11; 39-42절에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약 4:8에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왜 마음을 깨끗게 해야 합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메 비디트 데우스.하나님은 나를 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나를 벌주시기 위해 심판하려 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눈에는 인자하시고 긍휼하심이 가득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깊은 속마음까지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모든 감정의 변화를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나의 모든 생각을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삶은 마치 방과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나의 영적인 방안 구석구석을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때때로 내 마음 속에 생겨나는 짜증스런 마음, 부정적인 감정, 그리고 내가 무엇을 분개하고 있는 지를 내가 어떤 잘못된 생각을 하고 못된 생각을 하고 틀어진 생각을 하는지 나의 모든 생각의 그 근본 원인까지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이 확 펼쳐 열려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한 하나님께서 나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눈은 온 땅을 두루 살펴보시며 하나님을 진심으로 의지하는 사람을 찾아서 그를 지켜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필요한 모든 축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눈은 우리의 외로운 사정을 보십니다. 우리의 억울한 사정도 보십니다. 우리의 배고픈 사정도 보십니다. 우리의 눈물도 보십니다. 우리의 간절한 소원도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사정과 형편을 살펴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우리는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아이가 친구 생일잔치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심한 눈보라가 몰아쳐 앞이 보이지 안을 정도입니다. 너무 위험할 것 같아서 아버지가 가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울면서 졸라댑니다. 다른 아이들은 다 온다고 했는데, 다른 아버지들은 다 허락하는데 아버지는 뭐냐 이겁니다. 하도 그래서 아버지는 결국 허락합니다. 아이는 좋아라고 눈보라를 헤치며 친구 집으로 갑니다. 힘들지만 겨우 겨우 도착합니다. 그 집의 초인종을 누르면서 무심코 뒤를 돌아다봅니다. 그때 눈보라 사이로 사라지는 그림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그 아버지였습니다. 그 아이가 안전하게 도착할 때까지 눈보라를 헤치며 살금살금 아들의 뒤를 따라왔던 것입니다. 이게 아버지의 사랑이요, 보호하는 시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결코 낙심할 수 없습니다. 메 비디트 데우스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메 비디트 데우스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결코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메 비디트 데우스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보시고 그 모든 어려움에서 단련하신 후에 더 좋은 인생으로 축복해 주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심을 믿고 날마다 행복하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다같이 복음성가 “나의 등뒤에서”를 부르겠습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