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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6년 1월 17일 주일아침 예배 설교   고전 10:10-12  라온코이노니아 나는야


미국 우주 비행사들의 우주에서의 각성과 체험이 지구로 돌아온 후 삶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1960 년대 초부터 본격화된 미국의 유인 우주 탐사 계획은 머큐리 계획(1961~1963)에서 아폴로 계획(1968~1972), 스카이랩 계획(1973~1974)에 이르기까지 많은 우주 비행사를 배출해냈습니다. 인류역사상 최초로 지구의 대기권을 벗어나, 우주 공간에서 혹성 지구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이들은 여러 신비 체험을 경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이 체험을 '우주감각(宇宙感覺, Cosmic Sense)'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들이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았을 때 느낀 것은 일종의 정신적 충격인 동시에 신비로운 종교적 고양감(高揚感)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아폴로 I5호 탑승자였던 제임스 어윈(James Irwin)이나, 찰스 듀크(Charles Duke)는, 종교 활동에 투신하여 전도사가 되었고, 또 어떤 사람은 화가나 시인이 되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공해와 지구 오염을 반대하는 환경 운동가로 뛰어다녔습니다.

 

1974년에 우주정거장으로 발사된 스카이랩 4호 선장 이였던 제랄드 카아는 이럼 말을 하였습니다. “인간은 지구에다 거대한 건축물들을 잔뜩 지어놓고, 사람들은 또 그것들에 경탄하며 여기저기 구경을 다니거나 관광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들 어느 것이나 자연이 만든 것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주에서 보면 인간이 만든 것은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조그마합니다. 보이는 것은 바다, 강, 산, 숲, 사막 등 대자연뿐입니다. 자연 내에서 인간이 만든 보잘 것 없음을 보고 있자면, 인간이란 존재가, 우주에서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 이해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지구에서 눈을 돌려 우주 전체의 광활함에 주목하면 이번에는 우주 속에 있는 지구의 존재 역시 인간의 생각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대기권 밖에서 우주를 보면, 지구에서 우주를 보는것의 5~6배나 더 많은 별들이 보입니다. 하늘 모두가 은하처럼 보이며, 은하는 별들로 이루어진 고형물(固形物)처럼 보입니다. 지구는 이 우주에 충만해 있는 무수한 천체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지구를 무슨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단순히 인간의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은 지구 위에서도, 또 지구는 우주에서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구 밖에서 우주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돌연히 인간은 우주에서 너무나 하잘 것 없는 존재라는 것이 인식되었습니다. .... 우주에 있는 무수한 별의 존재와 우주 창조 이후의 시간 흐름을 생각해본다면, 이 우주에는 무수한 생명들이 진화의 단계별로 존재한다는 생각이 가장 타당하다고 봅니다. 지구상의 생명만이 최고의 발전 단계에 있다느니 하는 것은 인간의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주 체험은 나의 신앙을 한층 강화시켜 주었습니다. ”

 

(사진)1972년 12월11일 세계시02시23분 아폴로17호 달착륙 월면차-유진 서넌이 촬영

 

1966년 9월 발사된 제미니 9호, 1969년 5월 18일 아폴로10호 그리고 1972년 12월 11일 달에 착륙한 아폴로 17호의 조종사로 달 땅을 걸었었던  유진 서넌(Eugene Cernan)도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우주에서 얻은 가장 큰 내면의 소득은 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입니다. 나는 우주에서 신이 거기에 계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 우주에서 지구를 볼 때, 그 과도한 아름다움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지구가 우연의 산물로 생겨날 리가 없습니다.(중략) 우주에서 지구를 보았을 때. 그것은 흔들림이 없는 확신이 되었습니다. 우주유영(宇宙遊泳)을 하기 위해 우주선 밖으로 나왔을때, 비로소 자기 앞에 전우주가 있다는 것이 실감이 됩니다. 우주라는 무한한 공간의 한가운데에 자기라는 존재가 거기 내던져져 있는 느낌입니다. 달 위까지 가서 지구를 볼 때 이 우주의 무한한 크기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며칠이나 걸려서 초고속 로켓을 타고 가까스로 달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시간을 들여서 지구에서 벗어나 보아도, 암흑의 우주에 빛나는 별의 어느 것 하나에 한걸음도 다가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멀어진 지구의 크기만 변했을 뿐이지,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무한한 우주 속에서는 인류 역사상 가장 길게 이동한 거리도 무(無)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무한한 우주를 눈앞에 마주하고 있었다고는 해도, 그것은 우리가 볼 수 있는 한계를 넘어 무한하게 펼쳐져 있는 우주의 극히 일부분, 정말 하찮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즉 우리는 무한한 우주 속에 있으면서 그 아주 미소한 부분에 감금돼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것은 아득히 먼 달까지 가서, 달에서 지구를 바라보았을 때 실감이 됩니다. ”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태양과 비교 해 볼 때 축구공 앞에 좁알만 하다고 하겠습니다(직경이 109배, 부피는 130만배, 질량은 38만배) . 그런데 태양 보다 더 큰 시리우스별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리우스 별 앞에 태양은 좁쌀만 하다고 하겠습니다. 이 시리우스 별은 베델제우스 앞에 축구공 앞에 좁쌀만 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VY란 별이 축구공이라면 베델제우스별은 좁쌀만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별이 수천억 개가 넘는다고 하니 우주가 얼마나 넓고 우리 인간은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전자 현미경으로 아주 작은 생명체를 봅니다. 우주각도에서 저 어느 곳에 그 누가 우리를 보려고 한다면 우리 지구는 전자현미경으로도 볼 수 없는 아주 작은 별입니다. 그 작은 별에 70억의 사람들이 매일같이 다투면서 살고 있으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소롭기가 그지없을 것입니다.

 

그런 가소로운 별에 살고 있는  나는 누구입니까? 스카이랩 4호 선장 이였던 제랄드 카아의 말처럼 우주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인간들이 만들어 논 아무리 높은 빌딩이라도 우주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이 작은 존재인 인간들의 세상이 왜 이리 소란스럽고 하루하루 산다는 것이 왜 이리 힘들고 괴로운 일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왜 이 작은 땅덩어리위에 전쟁과 테러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까? 그 모든 근본적이 이유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박대통령도 김무송대표도 문재인대표도 안철수의원도 자신이 누구지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날 백성들은 총선이란 사각 링 위에서 정치인들이 진흙탕 싸움질하고 있는 것을 구경들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可觀政治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 쏘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철학의 기본은 “내가 누구냐”의 질문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깊은 사색에 잠긴 채 길을 걷다가 앞에서 오는 어떤 사람과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화를 버럭 내면서 "당신은 도대체 누군데 앞도 보지 못하고 다니는 거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쇼펜하우어는 멋 적은 표정을 지으며 "내가 누구냐고요? 글쎄올시다. 나도 방금 그걸 생각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라고 말했답니다. 데카르트라는 철학자는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을 하여 유명해 졌습니다. 흔히 아이들에게 “재는 철 들었다”라는 말을 합니다. 여기서 철들었다는 말은 무엇인가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哲은 깨달을 哲입니다.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 질문을 하기 시작하였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은 이처럼 내가 누구인가를 질문할 줄 아는데서 차이가 납니다. 이 지구상에 그 어떤 생물도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질문을 합니다.

 

모든 종교의 출발도 바로 “나는 누구냐”라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불교의 창시자 고다마 싯달타는 나는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 고행을 하고 온갖 수행을 다 하였지만 내가 누구인지를 몰라 고민하던 중 보리수 나무아래에서 홀연히 깨닫기를 “천상천하유아독존”Aggo ’ham asmi lokassa ‘온 우주 간에 오직 나 홀로 존귀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초기불교의 《장아함경》의 ‘대본경(大本經)’에서는 天上天下 唯我爲尊 要度衆生 生老病死 하늘 위나 하늘 아래 오직 내가 존귀하다. 중생의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제도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과연 내가 나를 알고 있는가 입니다. 내가 내몸을 내 몸이라고 알고 있습니까? 나는 내 속에 오장육부가 어떠한지 모르고 있습니다. 내 뇌 속에 형편을 모릅니다. 감기로 코가 막혀 있는데 어찌할 줄 모릅니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어찌 내가 홀로 존귀하다고 말 할 것입니까?


물건은 모두 제 값을 가지고 있습니다. 책에는 이 책이 얼마라는 가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마이크 는 얼마의 돈을 주고 사왔습니다. 내 몸이 존귀하다고 한다면 무엇 때문에 내 몸이 존귀 하다고 할 것입니까? 만일 내 몸이 1억 원이라고 한다면 누가 나를 1억 원에 사갈 것입니까? 아마 1만원에 내놔도 사갈 사람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십니까? 여러분은 어떤 존재이십니까? 여러분의 속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개하기 위하여 명함도 주고받고, 또 필요하다면 이력서와 경력증명서를 제출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명함이 우리를 다 소개할 수 없습니다. 출신지와 나이와 학력과 과거경력과 집안배경, 등을 기록한 이력서나 경력증명서가 우리를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물론 어느 글에 보니까, 지금 우리는 “계량화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예전과 달리 요즘에는 나이가 몇 살이고, 연봉은 얼마이며, 몇 평짜리 아파트에 살고, 자녀는 몇 명이고, 은행에 예금한 돈이 얼마인가를 쉽게 알아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료만 있으면, 누구든지 어느 정도까지는 파악할 수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어느 유명 결혼정보업체에서는 60억원이라는 거액을 들여 “배우자 지수”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신랑감과 신부감의 점수를 매긴 후, 중매할 때 그 기준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 채점표에 따르면 남자는 직업에 따라 최대로 30점, 학벌과 재산과 집안에 따라 각각 최대로 20점, 외모는 최대로 10점인데, 매우 잘 생긴 얼굴에 키 175~180cm, 몸무게 78kg 이하가 될 때, 10점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와 기준이 많이 다릅니다. 남자는 직업과 집안과 재산의 점수 비율이 높은 반면, 여자는 외모의 점수 비율이 높아 최대로 30점이나 됩니다. 그런데 예쁜 용모에 키 163~168cm, 몸무게 55kg 이하가 될 때, 30점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학벌, 집안, 직업에 따라 각각 최대로 20점인데 반해, 재산 상태에 따른 점수는 10점으로, 신부들은 재산보다는 외모와 학벌, 등이 비중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결혼정보업체에서는 총점 100점 중, 각 항목에 따른 점수를 다 합해서, 총점이 65점 미만인 경우에는 아예 중매 접수를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점수가 낮으면 결혼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시대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계량화 작업은 비단 결혼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사회 구석구석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결혼을 하려면 <배우자 점수>를 따지고, 취직을 하려면 <신입사원 채용점수>를 따지고, 승진을 하려면 <인사고과 점수>를 따지고, 은행에서 돈을 빌리려면 <신용 점수>를 따집니다. 그래서 점수에 따라 결혼할 수 있는 배우자가 정해지고, 점수에 따라 직장의 취직이 결정되고, 점수에 따라 연봉과 보너스가 결정되고, 점수에 따라 은행 융자와 그에 따른 이자가 달라집니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겉으로 드러나는 조건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분 전부를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에 대해서 아는 것이란 이름과 주소와 나이와 가족 상황 등입니다. 이것 알고 다 알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극히 일부분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저만 아니라 여러분 자신도 여러분을 다 알고 있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내가 어떠한가를 알려면 먼저 거울을 들여다 봅니다. 거울에 비친 내가 나입니다. 옛날 옛날에 이런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골에 사는 선비 하나가 한양에 과거를 보러갔습니다. 과거시험을 치른 후에 한양 장터를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광물점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참 신기한 것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손거울입니다. 값이 비쌌지만 시골 촌구석에서 고생하는 아내에게는 안성맞춤의 선물이 될 것 같았습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내를 찾았으나 김을 매러 갔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잘 볼 수 있는 벽에 못을 박고 거울을 걸어 놓았습니다. 아내가 얼른 보고 기뻐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선비가 외출을 한 사이에 아내가 집에 돌아와 보니 짐 보따리는 있는데 남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방을 둘러보니 벽에 이상하게 반짝 거리는 것이 걸려 있었습니다. 일어나서 들여다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그 안에 예쁜 색시 하나가 들어있었습니다. 한양에 과거를 보러갔던 남편이 과거에는 관심이 없었고 예쁜 색시 하나를 데려온 것이 분명했습니다. 가슴이 떨렸습니다. 분하고 억울했습니다. 남편 뒷바라지 하느라 온갖 고생 다했는데 남편은 자기를 배신하고 다른 색시를 데려왔으니 지난 세월이 너무 억울했습니다. 방바닥에 주저앉아 통곡을 합니다. 그때 시어머니가 들어와 울고 있는 며느리의 얘기를 듣고 놀랐습니다. 어떤 색시를 데려왔나 싶어 거울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예쁜 색시는커녕 바짝 늙은 할멈이 있었습니다. 아니 이 녀석이 할망구하고 바람이 났다니! 아들이 한심했습니다. 첩을 데려오려면 젊고 예쁜 색시를 데려와야지 다 늙은 여자를 데려다 어디에 쓰려고 하나? 한심한 아들을 둔 시어머니가 속이 상해 퍼질러 앉아 웁니다. 집안에서 통곡소리가 난다는 얘기를 듣고 들에 있던 시아버지가 헐레벌떡 들어왔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시아버지가 확인도 할 겸 거울을 들여다봤습니다. 거울 안을 들여다본 시아버지가 갑자기 넙죽이 절을 하더니 “아버님, 안녕하셨습니까?” 인사를 여쭙더랍니다. 거울 속의 자기 모습이 돌아가신 자기 아버지와 꼭 닮았던 모양입니다. 거울이 없던 시대의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거울에 비춘 나는 온전한 내가 아닙니다. 내 속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들여다 보는 거울은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확실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을 통해서 내 속사람을 보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찌 나를 평가하고 말하고 있는지 그것이 나의 속사람의 일부 모습입니다. 만일 누가 나에 대해서 말하기를 “전 병호 목사는 마음이 참 좋은 사람이야”라고 한다면 내 속 마음에 착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 병호 목사는 어리석은 사람이야”라고 말한다면 내 속 마음에 어리석음이란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혹 다른 사람이 날 칭찬한고해도 좋아 할 것 아닌 것은 장미꽃을 아름답다고 칭찬한다고 장미꽃이 우쭐 거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나를 비난한다면 분노할 것이 아니라 내 속사람에게 아직도 머물고 있는 죄가 있음을 알고 마음을 정결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내 얼굴에 검은 때가 앉아 있다고 누가 말한다면 얼른 닦아내면 그뿐이지 그 말하는 사람을 원수같이 볼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 참 나를 스스로 볼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자기 것을 다 내려놓고 자기를 다 비우면 스스로 자기를 볼 수 있다고 하지만 과연 이 불교도 가운데 그래서 참 나를 발견한 사람은 누가 있습니까? 어떤 고승은 참 나를 찾기 위해 깊은 산골 동굴속에서 참 나를 보려고 하지만 그렇게 해서 찾은 참 나는 동굴 암자에서만 살고 있을 뿐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참 나를 발견하기 위한 방법은 참 이웃을 먼저 발견해야 합니다. 참 이웃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시여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참 이웃입니다. 그 참이웃인 예수님이 나의 더럽고 추한 나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아들로 삼게 하셨으니 그래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 밖에서는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상에 가장 못나고 바보이고 어리석고 철닥서니 없고 멍청한 나를 이 처럼 사랑하사 나의 모든 죄와 허물을 십자가의 보혈로 정결케 하시고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라 부르게 하시니 비로서 나는 누구인가를 찾았습니다. 나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아들 전병호, 이 몸과 마음과 내 영혼 전부 하나님의 것인 나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우주에서 가장 존귀한 천상천하유안독존이 된 것입니다.  돌단위에 가부좌 틀고 앉아서 된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의 피 값으로 이루어진 나의 존귀함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내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다시는 죄짓지 않고 악에 물들지 않도록 내 몸과 마음과 영혼을 온전히 지켜나가는 것이 곧 성령충만한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고난당하시고 죽으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내가 누구인가를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런데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사람은 지금까지의 자신의 참 내가 아닌, 나를 나 아닌 사람으로 만든 죄악을 다 제거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 악한 감정과 세상에 속한 모든 욕심도 십자가에 목 박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는 정욕과 탐심에 대해서 죽었습니까? 예수 믿고 우리는 얼마나 변했습니까? 가끔 드는 회의인데 우리는 수많은 설교를 듣고, 또 하나님 말씀을 읽는데 과연 나는 얼마나 변화되었나 하는 생각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나이는 먹었는데 나는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누가 조금만 내 감정을 건드려도 우리는 참지 못하고 분노합니다. 누가 나를 알아주거나 대접해주지 않아도 곧 섭섭해 합니다. 여전히 인색하고 자기 이기적으로 행동합니다.

 

어떤 사람이 수술을 하러 수술실에 들어갔습니다. 마취제를 놓고는 좀 있다가 무언가로 꾹 찌르더랍니다. 마취가 완전히 되지 않았던지 ‘아야!’ 하고 소리를 냈다고 합니다. 그러자 의사가 하는 말이 ‘아직 안 죽었네’ 하더랍니다. 죽은 사람은 감각이 없습니다. 내 감정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내 욕심이 살아 있는 것을 보니 우리는 여전히 죽지 않은 사람들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전에는 사람을 죽이던 증오와 폭력의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섰고,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며 멀리는 다메섹까지 가서 사람들을 잡아들이던 폭력적이고 매우 율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믿자 증오는 이제 사랑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손해를 보고 해함을 당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고...”로 이어지는 고린도전서 13장은 과거의 옛사람은 죽고 새로 거듭난 사람임을 잘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빌3:7-8)라고 하였는데 우리는 사도 바울이 배설물, 곧 똥처럼 여기던 것들을 마치 신주단지 끌어안듯이 안고 있습니다.

 

인터넷 상에 떠도는 우루과이 한 성당 벽에 적혀 있다는 ‘반성하는 주기도문’은 우리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이라 하지 마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하지 마라. 너 혼자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라고 하지 마라. 아들과 딸로 살지도 않으면서.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 하지 마라. 너의 이름을 빛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하지 마라. 물질만능의 나라가 오기를 학수고대하면서.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지 마라. 온 천지가 네 뜻대로 되기를 갈망하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하지 마라. 죽을 때까지 먹을 양식을 잔뜩 쌓아두려 하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하지 마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원한과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하지 마라. 호시탐탐(虎視眈眈) 죄 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하지 마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하지 마라. 그 모든 것들이 온통 네 것이 되기를 염원하면서.
“아멘”이라고 하지 마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너의 기도로 드리지 않으면서.

 

한 때 사오정시리즈라는 유머가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사오정시리즈 중에서 '백팔마왕의 얘기'를 언제인가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백팔마왕이 나타나서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사오정이 무장을 하고 백팔마왕을 쳐부수기 위하여 백팔마왕이 살고 있는 108 계단 밑으로 갔습니다. 백팔마왕이 108 계단 아래 있는 사오정을 겁주기 위하여 사오정을 향하여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하하, 난 백팔마왕이다." 그런데 백팔마왕의 고함소리를 못 알아들었는지 사오정이 도망을 가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는 것이었습니다. 백팔마왕은 사오정이 못 알아들은 것 같으니까 한 계단을 내려와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하하, 난 백팔마왕이다." 그래도 사오정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또 한 계단 내려와서 소리를 질렀지만, 역시 사오정이 못 알아들으니까, 또 한 계단, 이런 식으로 108 계단을 하나씩 내려오며 '하하하, 난 108 마왕이다.'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급기야 백팔마왕은 108 계단을 모두 내려온 뒤 기진맥진하여 사오정 앞에 섰습니다. 그러자 사오정은 자기 앞에 서있는 백팔마왕의 힘없는 눈을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넌, 누구냐?"

 

여러분은 누구이십니까? 무엇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요 15:15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휘마스 데 에이레카 필루스)” 어떤 친구인가요. 요13:1 “ ...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세상 친구는 배신할 때도 있고, 나 역시 배반할 때도 있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신실하신 친구가 진짜 친구가 되십니다.
그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의 친구를 보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들이 나를 알려면 나의 참 친구인 예수그리스도를 볼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친구인 우리는 그럼으로 예수님의 친구 다웁게 살아야 합니다.


나토족이란 말 들어보았습니까?  나토족이란 No Action Talk Only, 이른바 행동은 없고 말만 무성한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아 예수님의 친구가 되었지만 예수님 친구답게 살지 못하고 있다면 아직도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진짜 친구입니다. 십자가의 피 값을 치루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참 친구로 우리 곁에 계십니다.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 말씀을 KJV 영어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For ye are bought with a price: therefore glorify God in your body and in your spirit, which are God's.” 여기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in your body" 와 "in your spirit"입니다. "in your body"는 ‘몸으로’라는 뜻이고, “in your spirit"는 ‘영혼으로’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참 나를 아는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뿐만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우리의 영혼까지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일에 전 인간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방탕하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자기의 몸을 함부로 자해해서도 안 됩니다. 아무거나 먹어서도 안 됩니다. 아무렇게나 입어서도 안 됩니다. 시도 때도 없이 굶어서도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는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도 아무렇게나 사용해서도 안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시간을 아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니다. 학생은 출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공부해야 합니다. 직장인은 직장에서 진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직장생활에 충실해야 합니다. 사업가는 돈 많이 벌어 남부럽지 않게 떵떵거리며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에게 맡겨진 사업장을 충실하게 돌보아야 합니다. 가정주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녀를 돌보고 가사 일을 해야 합니다. 결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합니다. 외로움과 고독감을 해소하기 위기 위한 결혼이 아니라, 결혼을 통하여 남녀가 한 가정을 이루고 그 가정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결혼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인생의 최고의 목적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참 나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예수님의 친구답게 살아갑니다.

 

라온 코이노니아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나의 참 나는 누구 입니까?  이 드넓은 우주가운데 좁쌀만 한 나이지만 아니요 나는야 예수 그리스도의 참 친구입니다. 나는야 천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하나님의 친구입니다.

우리 인생은 광야와 같습니다. 때로는 외롭고 때로는 힘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는 참 좋은 친구가 있습니다! 예수님입니다! 이 예수님 놓치지 마십시오! 나토족이 아닌 항상 참 나를 잃어버리지 말고 일 평생 참 친구인신 예수님을 친구로 모시고 행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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