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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6년 8월 21일 주일아침 예배  성경 요 4:1-42    라온코이노니아의 소소한 이야기


요즈음 인터넷 상에 유행하는 광고가 있습니다. 카카오 소소한 이야기 소토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매우 단순하며 중독성 있는 무슨 주문같이 몸을 흔들면서 반복하여 부르는 노래입니다. “소소한 이야기 소소한 이야기 어디에다 하나요 카카오 소토리 소소한 이야기 소소한 이야기...................”

소소하다란 말이 무엇입니까? 찾아 보닌까 다음과 같습니다.
< 小小하다: 작고 대수롭지 아니하다
小少하다: 키가 작고 나이가 어리다, 얼마 되지 아니하다.
昭昭하다: 사리가 밝고 또렷하다.
昭蘇하다: 어둡던 것이 밝아지고 죽었던 것이 소생하다.
炤炤하다: 밝고 환하다.
疏疏하다: 드문드문하고 성기다.
蕭蕭하다: 바람이나 빗소리 따위가 쓸쓸하다.
瀟瀟하다: 비바람 따위가 세차다.
騷騷하다: 부산하고 시끄럽다.>입니다.

 

컴퓨터나 핸드폰의 인터넷을 이용해서 시간이나 장소에 관계없이 다른 사람 또는 여러 사람과 자신의 생각이나 소식을 글이나 그림 사진으로서 주고받는 일을 SNS(Social Network Service)라고 말합니다. 이 SNS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네이버 밴드(가입자 수 약 1500만명), 페이스북(약 1100만명) 인스타그램(약 400~500만명) 트위터(약 140만명) 그 외에 싸이월드, 빙글, 텀블러, 프리첼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SNS는 카톡이라고 부르는 카카오스토리(약 1800~1900만명)를 가장 많이 이용하고 있습니다.
 카카오 소소한 이야기 소토리라는 것은 카카오를 통해서 사람들의 자잘구레한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들을 서로 나누며 행복하게 살아 가자라는 말입니다. 소토리라는 말은 작다는 소 (小) 스토리(story) 이야기를 말합니다.


요즈음 세상이 얼마나 복잡하고 들려오는 소식이라고는 머리 아픈 이야기 신경질 나는 이야기들만 들려옵니다. 그런데 김치를 담구면서 여인들이 호호거리며 나누는 이야기들은 얼마나 재미있는지요.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한번 듣고 함께 한번 웃을 수 있는 이야기들, 우리 라오코이노니아 여러분들이 점심밥을 먹은 후 둘러 앉아 웃고 즐기는 이런 저런 이야기들, 이런 이야기가 소소한 이야기 소토리인 것입니다. 

 

소소한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얼마 전 이사 갈 서포리 집에 가서 잡초들을 뽑는 일을 하였습니다. 잡초들 뿐 아니라 넝쿨이 대추나무를 온통 감싸고 있었습니다. 저녁때라 하지만 아직 햇볕이 뜨거웠습니다. 손으로 북북 잡초와 넝쿨들을 뽑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후 땀방울이 머리끝에서 부터 줄줄 흘러 마치 물바가지 뒤집어 쓴 것처럼 되었습니다. 몸이 여기 저기 욱신거리며 아프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뽑자 저기까지만 잡초를 제거하자 하면서 조금 더 조금 더 하면서 잡초를 뽑고 나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나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들이 잡초마냥 내 마음 가운데 자라고 있는데, 비록 힘들겠지만 그 잡초들을 뽑아낸다면 행복을 얻게 될 것이라는 소소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마당에 여러 식물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콩 당근 가지 파 우엉 도마도 호박 옥수수 돼지감자 도라지 더덕 마 등이 심겨져 있고, 크고 작은 나무들로는 감나무 대추나무 목련나무 살구나무 포도나무 석류나무 산수유 오가피 헛개나무 잦나무 모과나무 유자나무 매실나무 복분자나무 금송을 비롯한 5m 큰 소나무 키 작은 어린 소나무들 기타 이름 모를 나무들이 심겨져 있습니다. 아주 복잡하게 심겨져 있는데 최근에 날이 더워 이틀에 한 번씩 그동안 물을 주었습니다. 물주는 일도 한 시간 이상 걸렸습니다. 그런데 리모델링하는 중 화장실을 고치기 때문에 지난 일주일 동안 물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잎들이 축 늘어져 있고 일부는 말라 죽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오후는 가서 물을 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하나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수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마심으로 목마른 우리의 심령이 늘 건강하게 될 것인데 세상의 죄악의 열기에 심령이 매 말라 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목마른 인생, 이것이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혹 이런 유행가를 기억하십니까?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지나온 자국마다 눈물 고였다/선창가 고동소리 옛 님이 그리워도/나그네 흐를 길은 한이 없어라” 조경환 작사 이재호 작곡 백년설의‘나그네 설음’입니다. 당시는 1940년 일본의 제국주의가 팽창하던 시전 우리나라 청년들은 할 일없이 가슴 아프고 상처난 마음 민족의 목마름을 어디에다 호소할 길 없어 이 노래를 불렀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국마다 눈물만 고일뿐이요, 자신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 열심히 달려 왔지만, 남들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고, 때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위치에 올라가서 그 보암직스런 과일을 먹어보기도 하지만 여전히 언제나 타는 목마름으로 헐떡거리며 세상을 방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런 소소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 소소한 이야기 하나가 오늘 요한복음 4장에 소개하고 있는 수가성 한 여인과 예수님과의 만남의 이야기입니다. 이 수가성 여인의 이야기는 초대교회 교인들이 아마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소소한 소토리 이야기였다고 하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미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많은 교인들이 심지어 목사님들까지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어 다시 한 번 소개하려고 합니다.

기원전 722년 북 이스라엘이 앗시리아라는 나라에게 멸망을 당합니다. 그리고 북 이스라엘 사람들을 먼 북쪽으로 집단 이주를 시키거나 아니면 다른 나라 여인들과 혼인을 시켜 이스라엘의 순수한 혈통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그래서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의 후손들은 순수한 이스라엘 혈통이 아닌 혼혈민족이 되었습니다. 더욱 기원전 586년 남쪽 유대나라가 바빌론이란 나라에게 멸망을 당하고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무너지고 많은 사람들이 바빌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습니다. 70년 포로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을 새로 건축하고 성전을 다시 세우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훼방을 하고 유대인들을 핍박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되니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한 북쪽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남쪽 유대 사람들은 대를 이어 서로 미워하고 다투고 적대관계에 있어 왔던 것입니다. 남쪽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대인으로 혈통을 지켜왔는데 북쪽은 이스라엘 혈통을 훼손한 혼혈족이라고 대놓고 싫어하였습니다. 그래서 남쪽 유대 사람들이 사마리아를 지나다닌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북쪽 갈리리지방으ㅗ 가려면 사마리아 지방을 거쳐 가는 것이 지름길인데 멀지만 다른 우회 길을 돌아 가곤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인천에서 군산을 오려고 할 때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지 않고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전주로 해서 빙 돌아 군산으로 오는 것처럼, 때때로 예수님도 북쪽 가버나움에서 예루살렘에 올려고 하면 사마리아를 지나지 않고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 요르단 지역으로 건너가서 내려와 다시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로 올라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끔 그런 위험에 개의치 않으시고 사마리아 지역을 두려움 없이 통과하시곤 하였습니다. 이 날도 데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북으로 가는 코스로 사마리아 길을 택하신 것입니다. 하루 종일 걸어 사마리아 입구에 있는 작은 마을 수가성 성문 앞에 이르렀습니다. 마침 그곳에 옛날 야곱이 판 우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물 한 모금 마시려 하였지만 두레박이 없어 무료히 앉아계셨습니다. 제자들은 마침 저녁때가 되어 성안으로 먹을 것을 구하려고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하나 오해한 말씀이 있습니다. 요 4:6에 “때가 여섯시쯤 되었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목사님들과 교인들이 유대인 시계로 이는 낮 12시 정오 때라고 설명을 합니다.(막15:33)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사도가 요한복음을 작성한 배경은 로마의 중요한 도시 중의 하나인 에베소에서 로마 기독교인들을 향해 기록한 복음서입니다. 그러므로 6시는 로마 시간으로 오전 6시거나 오후 6시를 말합니다. 오전 6시일 수 는 없으니 이때는 오후 6시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저녁 6시경 우물가에 앉아 계신데 마침 한 여인이 물을 길러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물을 길어 물좀 마시도록 해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을 들은 이 여인이 당돌하게 유대인 남자가 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우리는 서로 미워하는 사이가 아닙니까? 하고 반문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예수님과 이 여인 간에 소소한 이야기가 오고갑니다. 이제부터 말씀드리는 소소(小小)한 이야기라고 말한 소소(小小)하다는 뜻인 자질구레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말하지 않습니다. 소소하다는 말에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한문으로 밝을 소 昭, 되살아날 소 蘇라는 말로, 그 의미는 ‘땅 밑 집에 숨어 살던 벌레가 땅속에서 밝은 바깥으로 나온다는 뜻으로, 어둡던 것이 밝아지고 죽었던 것이 되살아남을 이르는 말’이라고 한국어대사전에 쓰고 있습니다. 이제  한 기구한 운명으로 외롭게 살던 한 여인이 그 심령이 새로워져 세상을 보람차게 살아가게 되었다는 의미로 소소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말합니다.  “만인 당신에게 물을 달라하는 내가 누구인줄 안다면 나에게 생수를 달라고 하였을 겁니다.” 여인이 말합니다. “이 우물은 야곱의 우물입니다. 이 우물은 깊어 물도 시원합니다. 당신이 무슨 재주로 이 물 보다 더 좋은 생수를 준다고 합니까? ”
“그렇습니까 그러나 이 우물 물은 마신다음에 다시 목마르지 않습니까?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은 다시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주는 물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그러면 그 물을 나에게 주세요. 제가 다시 물 길러 오지 않아도 될테닌까요.” 아직 이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여인의 외롭고 아픈 마음의 정곡을 찌르는 말씀을 하십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시오” 이 여인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합니다.“저는 남편이라고 말할 그런 사람 없습니다.” 예수님은 직설적으로 말씀합니다,“당신이 솔직하게 말하고 있군요. 그렇죠, 당신의 남편이 다섯이 있었는데 지금 있는 그 사람도 남편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또 오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동안 많은 목사님들이 이 대목을 설명할 때 이 여인은 남편 다섯을 갈아치운 아주 못된 부정한 여인으로 소개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여인은 불행한 여인이지만 부정한 여인은 아닙니다. 아주 불상한 여인이고 한마디로 박복한 여인입니다. 당시 혼인법에 의하면 한 여인이 여섯 형제의 맏아들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죽으면 그 다음 둘째 아들의 아내가 됩니다. 그 다음 둘째도 죽으면 셋째 아들의 아내가 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서 자식을 낳아 유업을 이어 가게 합니다. 이제 다섯째 아들도 죽었고 막내 여섯 째 아들의 아내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섯째  아들은 아직 어린 아이라 혼인생활 할 처지가 못 됩니다. 따라서 남편은 남편인데 아직 남편이 아닌 그런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은 얼마나 불행한 여인입니까? 역사의 기록에 보면 사마리아 사람들이 오랫동안 로마와 독립투쟁을 벌려 수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역사적을 실상 몇 년 전에도 사마리아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빌라도 총독이 로마군으로 무자비하게 반란을 진압하면서 사마리아 남자 3,000명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역사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수가성 여인도 그런 반란사건으로 남편들을 잃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은 얼마나 큰 심적 타격이 있었겠습니까? 2000년이 지난 오늘날 목사님들이 그 사정도 모르고 이 여인에게 부정한 여인이라고 올가미를 씌우고 있으니 더욱 가슴 아픈 일이라 하겠습니다. 이 여인은 깊은 우울증으로 괴로워하는 가운데 대인 기피증세(Social Phobia)가 있게 되었습니다. 오직 외로움 그것만이 그의 위안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여인들이 새벽에 우물에 물을 길러 오는데 그 시간을 피해서 다 저녁때 이 여인은 우물물을 길러 왔던 것입니다. 인생에 목말라하던 이 여인이 이제 예수님을 만나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의 소소(昭蘇)한 이야기에 끌려 말을 하게 된 것부터 놀라운 일입니다. 
 

영국의 촬스 왕세자비인 다이애나(Lady Diana Frances Spencer)비가 1997년 8월31일 새벽 4시 12분 파리의 한 지하도로에서 그의 이집트 연인 도디 알-파예드가 운전하던 차를 타고 가다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다이애나의 외도에 대해 비난하지 않고 다만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였습니다. 그 까닭은 어린 시절부터 그는 고독한 인생을 살았고 비록 영국의 왕세자비이지만 왕실의 왕따로 우울증에 시달렸으면 늘 외로움 으로 목말라하였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이애나는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사치스런 생활을 하였습니다. 머리 손질에만 5천 4백 달러를 썼고 몸매 관리와 의상 구입에만 년 간 87만 달러(약 9억 원)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한 마음의 공간을 달래지 못해 5번의 자살기도와 거식증에 시달리며 계속해서 애인을 바꾸었습니다. 영락없는 우리 시대의 사마리아 여인이 아닙니까? 이처럼 목마름으로 방황하다가 비극적 인생의 종말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만난 수가성 여인과 다이애나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수사성의 여인은 마침내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만났다는데 그 차이가 있습니다. 다이애나는 목말랐을 때 예수님의 생수를 찾지 않고 계속 세상의 우물들만 찾아 다녔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소소한 이야기를 통해 마침내 수가성으로 뛰어 들어가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두테 이데테...메티 후토스 에스틴 호 크리스토스)“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외로운 인생이 아니라 홀연히 예수님과 연결되고 또한 온 세상과 연결되었으니, 그때와 2000년이 지난 오늘 우리와도 연결된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상처를 넘어서서 자기 이웃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인생으로 변했습니다. 더 이상 그녀는 목마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소소(昭蘇)한 말씀따라 영원한 생수를 마신 것입니다.
이런 小小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변한 여자”라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여우같은 여자에서 여유 있는 여자로/화난 여자에서 환한 여자로/따지는 여자에서 따뜻한 여자로/착각하는 여자에서 자각하는 여자로/색기있는 여자에서 색깔있는 여자로/밝히는 여자에서 밝은 여자로/남들에게 애 먹이는 여자에서 남들의 어려움을 보고  애 태우는 여자로/답답한 여자에서 답을 아는 여자로/빗이 많던 여자에서 빛을 발하는 여자로”변한 여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수가성 여인을 만나신 것이 아닙니다. 아주 우연한 만남입니다. 그러나 그 우연한 만남을 통해 그리고 예수님과 소소(昭蘇)한 이야기를 나눔으로 목마른 자신의 인생을 저주스럽게 살던 한 여인이 변하여 빛을 발하는 여인으로 소생(蘇生)을 하였습니다. 그 목마름이 가시자 온 몸에 생기가 솟구처 올랐습니다. 그래서 성안으로 뛰어가 “여기 그리스도가 있다. 내갸가오늘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외쳐댔습니다.


우리 중에 인생의 목마름으로 괴로워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이 시간 예수님의 소소(昭蘇)한 말씀을 통해 영원 생수를 받아 마시기를 바랍니다. 영혼의 목마름이 가셔지면 인생이 어두운 굴에서 벗어나듯 아름답고 빛난 세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아! 이처럼 세상이 아름다웠던가 하고 하나님께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불교의 유명한 스님으로 법정 스님이 2010년 3월 11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법정스님은 종교를 초월하여 사람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특히 그의 무소유 사상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기 전에 “미리 쓴 유서”라는 것을 썼습니다. 이 유서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누구를 부를까? 유서에는 흔히 누구를 부르던데? 아무도 없다. 철저하게 혼자였으니까. 설사 지금껏 귀의해 섬겨 온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그는 결국 타인이다. 이 세상에 올 때도 혼자서 왔고 갈 때도 나 혼자서 갈 수밖에 없다. 내 그림자만을 이끌고 휘적휘적 삶의 지평을 걸어왔고 또 그렇게 걸어갈 테니 부를 만한 이웃이 있을 리 없다.”
이 유서에서 법정 스님의 외롭고 쓸쓸하였던 그의 긴 목마름을 느끼게 됩니다. 철저하게 홀로 고독한 수행자로 살아간 법정스님의 그 외로운 발자국이 그 유서에 찍혀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진리를 찾아 정진하는 자는 끝없이 진리를 찾아 세계 끝까지를 아니 삼라만상 상천하지 온데를 바라춤 추며 찾아다닙니다. 그런데 외롭고 절망스런 가슴 한 복판으로 어느 날 갑자기 화살 박히듯 진리가 날아 와 콱 박히는 때가 있으니 이때를 기독교에서는 은혜 받은 때라고 말합니다. 내가 피 눈물 흘리면서 진리를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필요한 진리를 거저 주시니 이것이 은혜입니다. 
수가성 여인은 단지 외로운 인생길 어찌할 수 없이 살아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으로부터 인생의 소소(昭蘇)한 진리가 그의 심령 속에 꽉 채워지니 그는 변화된 것입니다.  나의 힘으로 사랑하고, 나의 힘으로 선행을 베푸는 삶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힘으로 성화의 삶, 사랑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이 길은 외로운 길이 아닙니다. 여기에 나홀로 나만이 나대로 나뿐이야 라는 것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주님 주시는 평안이 내안 가득하며 다시는 내 영혼이 목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샘에서 소소(昭蘇)한 생수가 콸콸 나의 영혼을 적셔주시니 마치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았듯이 온 산야를 껑충껑충 뛰어 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1889년 4월6일 같은 날에 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는 오스트리아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그 부부는 사촌남매관계였기 때문에 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잘못 만난 부부였습니다. 아기의 아버지는 세무직원으로 성미가 무척 급했고, 어머니는 가정을 돌보기보다 밖으로 나돌아 다니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는 그 아이를 알콜 중독자인 숙모에게 맡기고 달아나 버렸습니다. 숙모 손에서 자라난 그 아이는 16세가 되었을 때, 학교를 중퇴하고 숙모 집을 떠나 가출해버렸습니다. 화가가 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자, 여러 직업을 전전한 끝에 독일 군대에 입대했습니다. 그 후 정치에 발을 들여놓고 극렬행동대원이 되었다가, 반란 음모가 발각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더 이상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서약을 하고 석방되었지만, 여전히 정치활동을 계속했습니다. 결국 어지러운 나라 정세 속에서 1933년 수상에 취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에 의해서 독일과 전 세계는 전쟁에 휘말리고 말았습니다. 죄 없는 유태인 600만 명을 비롯한 수천만 명이 죽어갔습니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고아, 불구자, 과부를 만들어낸 인류의 가장 큰 범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독일의 독재자‘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입니다.
또 다른 아이는 미국 텍사스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는 아이를 데리고 캔사스로 이사를 갔습니다. 도시에서 농촌으로의 이사였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아이를 신앙으로 교육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가훈 하에 아버지는 그 아들을 가르쳤습니다. 온 가족은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였습니다. 소년은 청년이 될 때까지 어머니와 손을 잡고 매일 저녁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는 군대에 흥미를 느껴 육사에 입학한 후 졸업을 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2차 세계대전의 연합군 사령관이 되어 독일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이어 1953년 제 34대 미국의 대통령에 올랐습니다. 그는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입니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태어난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와 미국의 아이젠하워 두 사람은 전장에서 만났습니다. 한 사람은 전쟁을 일으킨 주범이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연합군 사령관이 되어 11개월 동안 치열한 싸움을 했습니다. 마침내 히틀러는 1945년 4월30일 방공 지하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전 세계는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1969년 3월 28일, 80세 나이로 평화롭게 눈을 감았을 때, 전 세계가 그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히틀러와 아이젠하워의 인생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한사람은 자신의 목마름을 채워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전쟁의 수많은 사람들이 흘린 피로 자신의 목마름을 채우려 하였으며, 또 한 사람은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삶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십자가의 보혈의 소소(昭蘇)한 생명수를 공급받고 미국인들 뿐 아니라 온 세계 사람들에게 그 소소(昭蘇)한 생명수를 나누어 준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시기 직전 예수님이 ‘딮소!’라고 신음하시듯 말씀하신 소리입니다.(요19:28) ‘딮소!’란 ‘내가 목마르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려고 십자가에서 목마름을 체험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딮소(Dipso)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심은.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기도하는 동안 눈물과 피와 땀을 빗방울 흘러내리듯이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채찍을 맞으심으로 여기저기 살갗이 찢겨 많은 피를 흘리셨습니다. 머리에 가시 채를 쓰심으로 얼굴에도 피 범벅이 되었습니다. 손과 발에 대못이 박히고 가슴에 로만군인의 창에 찔림을 받아 여기에 흘린 피가 십자가 아래 땅을 붉게 물 드렸습니다. 골고다 산 그 높은 하늘로부터 햇볕이 뜨겁게 내려 쬐였습니다. 예수님의 벌거벗은 몸에서는 이미 피와 물이 다 빠져 나갔습니다. 그래서 극도의 목마름 속에서 “딮소! 내가 목마르다”라고 외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목마름은 지금도 우리를 행해 “딮소! 내가 목마르다”하시니 그것은 목말라 죽어가는 우리 인생들에게 당신의 피와 물을 다 부어 주시기 위함이니, 우리로 소생의 기쁨을 체험케 하시는 예수님의 소소(昭蘇)한 외침이십니다. 그래서 요 6:35에서 주님은 “...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피스튜온 에이스 메 우 메 딮세세이 포포테)”고 밝을 소 昭, 되살아날 소,  소소(昭蘇)한 말씀을 하시였습니다.

 

라온 코이노니아 성도 여러분, 여름은 산천초목이 목말라하는 계절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심히 목말라 하는 때입니다. 여러분, 살아가는 일이 힘드시죠? 때로 외로워지기도 하죠? 뭔가 허전하고 공허하여 갈증을 느끼지 않으십니까? 오늘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소소(昭蘇)한 이야기처럼 우리의 영혼도 예수님을 만나 소생의 기쁨을 새롭게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전에 샘물이 솟아 나왔는데 지금은 말라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이 우물가이든, 아파트 베란다이든, 식탁에서든, 길거리에서든, 직장 일터이든 바로 그곳에서 예수님과 기도로 소소(昭蘇)한 이야기를 나누십시오. 그러면 그 자리에서 영생하는 생수가 흘러넘치게 될 것입니다 

 

소소(昭蘇)한 이야기 소소(昭蘇)한 이야기 누구에게 할까요?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 카카오 小토리가 아니라 라온코이노니아 소(昭)토리, 어둠의 터널에서 벗어나 너무나 환한 새 인생의 세상을 맛보는 우리 라온코이노니아는 언제나 소소(昭蘇)한 이야기 소(耶蘇)토리를 나누는 여러분의 생명수 샘터가 되어 지길 바랍니다.   그래서 언제나 이곳에서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한 생수가 솟아나 우리의 영혼이 참 자유와 참 기쁨 속에서 밝고 활기찬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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