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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6년 7월 24일 주일아침 예배   성경: 잠 17:22 16:24   라온코이노니아의 뼈

 

지난 화요일 서울 요양원에 입원 중에 계셨던 장모님이 고관절 수술을 받았습니다. 93세 고령  이시라 수술하기가 어렵다 하였는데 의사선생님의 실력이 좋아 수술을 받아 지금은 회복 중에 계십니다. 장모님의 경우를 보면서 노인들의 낙상으로 인한 골절이 심각한 일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령의 노인들에게 가장 위험한 일은 낙상으로 고관절 골절상입니다. 노인 낙상은 이제 개인적인 삶의 질을 떠나 사회 문제가 되고 습니다. 한국에서 한 해 낙상으로 사망하는 65세 이상 노인은 83만여 명 이상이라 합니다. 교통사고에 이어 노인 사고의 사망 원인 2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전체 사망원인으로는 암에 이어 5위 입니다. 최근 열린 낙상예방심포지엄에서 강성웅 대한노인재활의학회 회장은 "암, 혈압, 당뇨병을 아무리 잘 관리해도 한 번 넘어져 입원하면 멀쩡하던 노인이 불과 몇 달 만에 사망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보면 만성질환보다 더 무섭습니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낙상은 특히 날씨가 추운 겨울에 잘 일어납니다. 그러나 실상은 여름철에 더 많이 일어나나고 합니다. 그 이유는 겨울은 날씨도 춥고 길도 미끄러워 노인들이 조심하고 밖에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름철에는 날씨가 더워 오히려 주의력이 떨어지고 밖으로 나오는 일이 많아 넘어지는 경우가 겨울보다 더 많다는 것입니다.


넘어지는 이유로는 바닥이 미끄러워서(25%), 문이나 보도의 턱에 걸려서(17.9%), 어지러워서(17.9%)가 가장 많았습니다. 한양대병원 재활의학과 김미정 교수는 "안방에서 아침 또는 낮잠을 자고 일어날 때 손을 헛짚으면서 넘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하였습니다. 특히 덥다고 샤워하다가 가장 많이 다치는 부위는 무릎 허리 엉덩이(고관절), 어깨 발목, 머리 순입니다. 하지만 어느 부위를 다쳤느냐에 따라 사망으로 이어지는 정도가 달랐습니다. 김교수는 "낙상을 당하더라도 팔, 손목 등 허리 아래(상지부위)가 부러진 정도면 생명에 아무런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하지만 허리아래(하지부위) 쪽이면 상황이 달라진다”고 말했습니다. 사망으로 이어지느냐, 아니냐는 걸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다리가 부러졌을 뿐인데 두세 달 만에 돌아가실 정도로 상태가 악화한다는 사실을 대부분 이해하지 못하지만, 노인은 젊은이와 달리 하루만 누워 있어도 근육 손실이 엄청나다는 것입니다.
70세 이상 노인에게 낙상 후 변화는 한두 달 안에 급속히 진행됩니다. 특히 엉덩이뼈나 고관절이 부러지면 누워 뒤척일 수조차 없어 대부분 사망으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대한노인재활의학회 자료에 따르면 고관절 골절을 당한 65세 이상 노인 3명 중 1명은 1년 내에 사망하였습니다. 80세 이상은 절반이 두 달 내 사망하였습니다. 특히 여성 노인은 낙상을 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대한노인재활의학회 조사 결과 여성이 남성에 비해 낙상 빈도와 골절 빈도가 모두 두 배가량 높았습니다. 고대안산병원 재활의학과 김동휘 교수는 “똑같은 낙상이라도 남성 노인은 멀쩡한데 여성 노인만 뼈가 ‘똑’ 부러지는 사례가 많다”며, “이는 골밀도를 유지시키는 여성호르몬이 50대부터 급격히 저하되기 때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여성에게 많이 생기는 관절염과 빈혈 기립성 저혈압(orthostatic hypotension)으로 인한 어지럼증도 여성 노인의 낙상을 증가시키는 이유라고 합니다. 그러나 고관절이 다쳤다고 모두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환자 중 30% 정도가 생명의 위험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나 회원 여러분들은 조심조심 주의 주의하여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안나회 여러분은 다리가 건강하신지요. 혹 다리가 저리거나 전기 통한 듯 찌릿찌릿하거나 마치 벌레가 기어가듯 스멀스멀하지는 않습니까?  집에서 상비약으로 두는 일반 진통제로는 통증이 가라앉지 않을 정도의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노인들이 의외로 많다고 합니다. 이런 증상은 아마도 하지 불안증후근(Restless legs syndrome) 이란 병이기도 합니다. 그 원인은 철분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전에 제 어머님이 생전에 말씀하시길 다리가 아프고 지랄이 난다고 하시며 다리를 주무라고 늘 말씀하시어 저녁이면 은청 집사가 다리를 주물러드리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리 주무르는 자동전자기계를 사드렸습니다.
노인들이 비타민D를 복용하면 다리와 무릎 근력이 증가하고 운동 동작이 원활해진다는 사실이 입증되었습니다.
가정요법으로 오가피를 데려 먹으면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오가피는 간과 신장의 기운을 보하여 힘줄과 뼈를 튼튼하게 하므로 사지마비, 허리와 무릎의 연약증상, 하지무력감, 골절상, 타박상, 부종 등에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욱 탁월한 효과를 내는 나무가 있습니다. 밀오줌나무(Elder-Tree)라고 합니다. 일명 딱총나무라고도 말합니다. 인터넷에 소개한 말오줌나무 효능에 대해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살을 찌게하고 근육을 단단하게 하는 음식이나 약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뼈를 찌게하고 뼈를 튼튼하게 하는 식품이나 약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칼슘이 뼈에 좋다고 하여 칼슘이 많이 든 음식, 이를테면 멸치나 우유, 미역 따위를 열심히 먹는다고 해서 반드시 뼈가 튼튼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옛 속담에 “시집 밥은 살이 찌고 친정 밥은 뼈가 찐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친정에서 살면 마음과 몸이 모두 편안해서 살과 뼈가 다 같이 튼튼해지지만, 시집살이를 하면 마음고생이 심하여 살이 쪄도 실제로는 찌는 것이 아니라는 스트레스 살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친정 밥처럼 뼈를 찌게 하는 약초가 있을까? 있다면 그것이 어떤 약초일까? 그것은 바로 말오줌나무 입니다. 말오즘나무는 뼈를 강하고 튼튼하게 하는 데 최고의 보약입니다. 말오줌나무를 접골목이라고도 하는데 이름 그대로 뼈를 붙이는 효능이 있는 약나무입니다. 말오줌나무는 뼈가 부러지거나 금이 갔을 때, 타박상으로 멍이 들고 통증이 심할 때, 손발을 삐었을 때 달여 마시고 날것으로 가지를 짓찧어 아픈 부위에 붙이면 통증이 바로 사라지고 부은 것이 내리며 빠른 시간 안에 회복됩니다. 말오줌나무를 달인 물로 목욕을 하면 효과가 더욱 좋습니다. 천연 약초 가운데서 통증을 가장 빨리 멎게 하는 것이 말오줌나무라 할 수 있습니다.
서양의 전설에 의하면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죄로 부끄러워하며 목을 맨 나무가 바로 말오줌나무라고 합니다. 이 시간 특히 이 나무를 소개하는 것은 내일 7월 25일의 탄생화가 말오줌나무꽃이기 때문입니다.

 

뼈는 유기질이 35% 무기질이 45% 수분이 20%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뼈 안에 무기질은 칼슘과 인이 각각 45%가 있고 그밖에 마그네슘 나트륨 수산화탄산 불소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뼈가 약해진다는 것은 위장기능이나 갑상선 기능이 약해져서 칼쓤의 양이 부족하게 되어 뼈가 약해집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문제는 면역력이 약해져서 뼈가 약해집니다. 언뜻 생각해 보면 칼슘과 면역력이 무슨 상관인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관계가 많이 있습니다. 면역력이 떨어지면 사람들은 신경이 예민해 집니다. 피곤하면 신경질적인 되는 것처럼 면역력이 약해지면 근육과 신경이 긴장을 하게 됩니다. 신경이 예민해지면 자그마한 자극에도 민감하게 반응을 하게 됩니다. 이런 반응이 있음은 신경전달이 이루어지기 때문이고 이때 칼슘이 사용됩니다. 결국 예민한 상태는 지속적으로 칼슘이 소비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면역력이 부족하면 스트레스가 심해지고 신경이 예민해 짐으로 칼슘소비가 많아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뼈가 약해지고 골다공증에 걸리거나 쉽게 뼈가 부러지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스트ㅔ스가 있거나 신경이 예민한 분들은 면역력이 약해지기 때문에 낙상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면연력을 강하게 시킬 수 있는가 그 비결이 무엇인가?
오늘 잠언에서 말씀하시듯이 마음의 즐거움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근심하면 뼈가 쇠약해진다고 하였습니다.(心樂身爽 心憂骨枯)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각가지 원한 분노 불평 슬픔 등 각가지 인생의 고통의 문제로 스트레스가 쌓이고 마음이 편할 날이 없습니다. 산야에 온갖 꽃들이 만발하지만 내 마음에 가시넝쿨이 쳐져 있고 잡초 같은 근심초들이 어지러히 자라고 있다면 어찌 인생을 산다는 것이 괴롭지 않겠습니까?

천년전 중국 송나라시절 소동파(蘇東坡1037~1101)가 지은 후적벽부(後赤壁賦)의 글귀가 생각이 납니다.

山鳴谷應(산명곡응)하니  [산이 울림에 골짜기가 울리니]                                
風起水涌(풍기수용)하네  [바람이 일고 물이 솟구치네]
                              
予亦悄然而悲(여역초연이비)하고 [내 또한 근심이 일고 슬퍼지고]
肅然而恐(숙연이공)하여 [이내 숙연하고 두려워져 ]
凜乎其不可留也(늠호기불가유야)라 [등골이 오싹하여 더 머무를 수가 없네]

(**涌(샘솟을용=湧), 悄(근심초), 悄然(초연:근심하는 모양), 悲(슬플비), 肅(엄숙할숙),
肅然(숙연:삼가고 두려워하는 모양),  凜(찰름), 凜乎(늠호:위태로워 두려워하는 모양),
留(머물유)
송나라 원풍(元豊, 송의 연호) 5년(1082) 가을 7월 16일의 달 밝은 밤에 소동파가 적벽에서 뱃놀이를 하며 삼국의 영웅인 조조(曹操)와 주유(周瑜)의 풍류에 비겨 자신의 덧없는 인생을 생각하고, 결국은 저들이나 자신이 다 무한한 생명 앞에서는 모두 덧없는 존재라는 것과, 무한한 본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만물이 다 같은 것임을 깨닫고 시름을 잊는다는 내용을 술회한 명문입니다.)

 

予亦悄然而悲(여역초연이비)하다는 말처럼 세상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누구누구 할 것 없이  온갖 근심으로 우울증을 앓고 있고 스트레스를 풀고자 운동도 하고 여행도 하고 영화도 보고 술도 마시고 도박도 하지만 凜乎其不可留也(늠호기불가유야)라 등골이 오싹하여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 덧 없고 힘들다고 하겠습니다. 어제 뉴스에 보닌까 이건희 삼성 회장이 성매매 의혹 동영상과 추문기사가 났습니다. 우리나라 가장 돈 많은 부자인데 어찌 그런 망칙한 일을 하였던 것입니까? 돈은 많았지만 그의 인생은 고통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잘나가던 야구선수가 도박을 하다가 팀에서 쫒겨 났습니다. 왜 그런 일을 하였습니까? 인생의 괴로움을 도박으로 해결해 보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상에는 수많은 심령의 뼈들이 골절되고 부러져 괴로워하는 인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한의학의 치료에 보사(補瀉)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보(補)란 그 기능이 부족한 것을 더해주는 것이고, 사(瀉)란 그 기능이 넘치는 것을 덜어내 주는 것입니다. 침을 놀 때도 보사 방법으로 침을 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한의사들은 그런 것 없이 마구 찔러댑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약을 쓸 때도 보사관계를 따저 약을 대리도록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위장이 냉하고 신장과 방광에 열이 많은 소음인(少陰人)인을 치료할 경우 열이 부족한 위장은 보해 주고 열이 넘치는 신장과 방광은 사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에너지 균형을 맞추어가면서 치료를 하는 것이 제대로 치료하는 방법입니다.

 

잠16: 24을 보면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추프 데바쉬 이므레이 노암 마도크 라네페쉬 우마렢페 라아쎔  즐거운 말은 벌통의 꿀이다. 뼈를 치유한다 良言如蜂房之蜜 甘如心 益如身)”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선“선한 말”에 선하다는 말은 히브리어 원어로 ‘노암’이란 말로 ‘즐거운 기쁨’이란 뜻과 아울러 ‘은총’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시편 90:17에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라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의 은총이 바로 노암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말’은 ‘은총의 말‘입니다. 그리고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라는 말씀은 벌통에 가득 찬 벌꿀을 보고 입안에 달콤한 맛이 돌 듯이 마음에 기쁨이 가득 차게 된다는 것입니다. 잠 17:22을 보면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선한 말 곧 은총의 말이 우리 마음을 보(補)해 주어서 건강하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뼈에 양약(게하, 치유)이 되느니라”는 말씀은 우리 뼈를 튼튼하게 치료해 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뼈는 우리 몸을 말하지만 영적으로 우리의 심령을 의미합니다.
선한 말 곧 은총의 말이 우리의 심령의 뼈를 치료하여 불안, 염려, 두려움을 사(瀉)해주고 마음의 평안 보(補)해줍니다. 그래서 우리 몸의 스트레스를 완화해서 우리의 심령을 건강하게 해 줍니다. 그러니 이 보다 좋은 보약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인은 선한 말 곧 은총의 말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선한 말 곧 은총의 말을 한다면 마음이 근심이 사라지고 우리의 심령의 뼈가 튼튼해 져서 그 어떤 환난이나 곤고나 근심이나 염려가 있다하더라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선한 말 곧 은총의 말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말일까요?

 

첫 번째로 우리가 용서의 말을  할 때에 우리의 심령의 뼈가 튼튼해집니다. 그래서 용서의 말은 선한 말 곧 은총의 말입니다.

“어느 여학교 교장 선생님인데 심한 관절염으로 굉장히 고통으로 밤잠을 못자고 몸을 잘 움직이지 못해요. 온갖 치료를 다 받고 약이라는 약은 다 먹어도 아무 효과가 없이 점점 관절염은 나빠집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 나가서는 목사님하고 상담을 했습니다.
목사님이 “혹시 마음속에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미워하는 사람 있습니까?” 고개를 숙이더니 끄덕끄덕 했습니다. “누구를 미워합니까?” “우리 남편을 미워합니다.” “얼마나 미워합니까?” “죽이고 싶도록 미워합니다.” “남편하고 같이 삽니까?” “아니요. 10년 전에 이혼했습니다.” “그런데 법적으로는 이혼했는데 마음으로는 이혼을 안 하고 있어요.” 남편은 이혼해서 다른 여자하고 결혼해서 잘 살고 희희낙낙 하는데, 자기 혼자서 아직 남편을 놓아주지 못하고 마음에 품고 “이 죽일 놈아! 이 나쁜 놈아!” 항상 저주하고 욕을 하고 있는데 그 남편은 아무 고통도 안 당하는데 이 부인은 관절염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빨리 이혼을 하세요.” “아니 법적으로 했는데요?” “법적으로는 이혼했는데 마음으로 안했잖아요. 마음에 아침, 저녁으로 늘 품고 있잖아요 남편을… 오늘 그 남편을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회개하고 돌려보내세요. 바이 바이 하세요. 그래야 법적으로 이혼하는 것과 동시에 마음으로도 완전히 떠나보내야 되는 것입니다. 미워하지 말고 용서해서 가서 잘 살아라! 할렐루야 하고 보내세요.” “못해요. 나는 못살아야지 잘사는 꼴 못 봐요.” “그런다고 해서 못살 것 아닙니다. 당신이 못살게 돼요. 그 미움을 가지면 그 독이 당신의 심신을 괴롭히고 관절염을 괴롭히고 결국 당신이 못살게 되고 말아요. 그러므로 용서해 주세요.” 그 목사님의 설득을 듣고서 엎드려서 “하나님, 우리 10년 전에 이혼한 남편을 내 마음에서 용서하고 떠나보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씻어 주시고 가서 잘 살게 해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미워하는 것을 회개합니다.” 그 기도를 하고 난 다음부터 마음에 평안을 얻고 그 길로부터 관절염이 낫기 시작하여 얼마 있지 않다가 관절염이 다 사라지고 깨끗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읽어 본 것입니다. 백약이 무효이던 것이 용서하는 마음을 갖자 치료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3절로 14절에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인터넷 인용) ” 그래서 용서의 말은 선한 말 곧 은총의 말입니다.

 

한 때 받은 상처가 핵심감정이 되면 그 감정은 그 사람을 움켜잡고, 평생을 불행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사는 가격보다 그 유지비가 훨씬 더 많이 드는 물건입니다. 인간 영혼에 가장 강력한 독소로 작용하여 자신을 괴롭히고 인간관계에 불화와 갈등을 조장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의 쓴 뿌리는 심령을 오염시켜 마음의 괴로움만 더 가지게 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일생동안 과거의 끈에서 자유함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용서하는 삶은 자신의 육체와 인격을 건강하게 할 뿐만 아니라, 불면증, 변비, 소화불량, 두통, 면역력 저하, 세포재생산 능력의 감소, 암 등 질병등을 치유(마렢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용서의 말은 선한말 곧 은총의 말입니다.

용서하지 못한 마음은 상처를 만들어 내고 분노와 적개심, 복수심을 증가할 뿐 아니라 가장 피해를 보는 사람은 용서하지 못하는 당사자입니다. 용서는 힘이 있습니다. 심리적 치유효과가 있습니다. 정서적 고통을 완화해 주고, 우울과 불안을 감소시켜주며, 개인의 자존감을 회복시켜주며, 분노의 폭발을 막아주며, 분노와 죄의식으로부터 개인을 자유롭게 해 주며, 해를 준 사람으로 말미암은 증오심으로부터 해방시켜 줍니다. 용서는 신체적 치유 효과가 있습니다. 건강을 촉진시켜주고, 혈압을 낮추며, 분노로 인한 고혈압과 같은 신체적 증상을 완화해 줍니다. 용서는 개인의 심리적 건강과 안녕의 회복을 가져올 뿐 아니라,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줍니다. 용서는 강력한 치료적 체계로서 개인의 변화와 성장을 증진시키고 창조성과 활력을 강화하며 진정한 자유를 얻게 합니다. 그러므로 용서의 말은 은총의 말입니다.

 

용서는 영적 힘이 있습니다. 용서를 통해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가지게 하고 진정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합니다. 용서란 망각이 아닙니다. 망각은 상처가 치유되고 용서가 이루어질 때 가능하지만, 그것은 용서의 부산물이지 필수적인 결과물은 아닙니다. 상처를 정확히 기억하고 직면하고 이해함으로서 그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며, 타인의 행동을 묵인하거나 무관심해 버리는 것이 아니며, 시간이 흘러서 상처로 인해 생긴 분노가 줄어드는 것도 아닙니다. 용서는 능동적인 행동이며 노력이 많이 소요되는 과정입니다. 계속적인 발걸음으로 시간이 필요합니다. 용서는 행동이며 선택입니다. 사람은 어떻게 느끼는지는 느낌은 어쩔수 없어 통제할 수 없으나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하여서는 통제할 수 있습니다. 과거는 한 조각도 변화시킬 수 없지만 상처라는 것이 어차피 인생의 한 부분임을 인정하고 그 해결에 힘을 기울이는 것이 용서입니다. 거세게 굽이치는 기억의 지류를 멈추게 하는 유일한 힘은 용서입니다. 그래서 용서의 말은 선한 말 곧  은총의 말입니다.

용서는 고통스러운 상처를 지워 없애는 것이 아니라 상처의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하며 과거에 개의치 않고 앞으로 발을 내딛는 것으로 평화와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용서는 화해가 아닙니다. 용서는 개인적인 반응로로서 개인 내적인 해방인 반면 화해는 두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행동적으로 결합하는 것입니다. 용서란 가해자에 대한 복수를 의도하지 않고 상대를 용서할 수 있으나 가해자의 행동이 바뀌지 않는 한 화해란 어려운 것입니다. 화해는 용서의 결과일 뿐입니다. 용서는 사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면은 법적인 행동으로서 처벌 당사자에게 처벌을 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는 무조건적인 것으로 다른 사람의 잘못을 덮어주겠다는 의도적인 결정이며, 잘못으로 인해 악한 감정을 갖는 다든지 관계를 단절하지 않겠다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용서의 말은 선한 말 곧 은총의 말입니다.

 

“나는 그것 못합니다. 나는 성자도 아니고 천사도 아니니 그것 못합니다.” 못하면 그것이 내게 암초가 되어서 고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용서하면 내 마음에 평안을 얻게 되고 이웃을 축복하고 사랑하게 되면 내가 축복을 받고 사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용서가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한 용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수와 앙갚음의 빚을 마음을 속에 갖고 살면 그 빚단련을 마음속에 늘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엡4: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그래서 용서의 말은 선한 말 곧 은총의 말입니다.

 

우리가 용서한다는 선한 말을 한다면 내 마음의 근심이 사라지고 나의 심령의 뼈가 튼튼하게 되어 어떤 마귀의 시험도 능히 이기게 될 줄 믿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의 심령의 뼈가 튼튼해 지는 선한말 곧 은총의 말은 배려配慮하는 말입니다. 
선한 말 곧 은총의 말이란 우선 상대방을 배려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배는 한문으로 짝 배配, 려는 생각할 려慮입니다. 배려라는 말은 상대방을 생각해준다 곧 “여러 모로 자상하게 마음을 쓴다.”는 뜻입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어린이 놀이터에서 깨진 유리 조각을 줍는 페스탈로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스위스 쮜리히의 스타인츠 거리에 늘 땅만 바라보며 걷던 노인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경찰관이 이 노인을 유심히 지켜보니 무엇인가 길거리에서 주워서 주머니에 넣고 있었습니다. 경찰관이 돈이나 분실물을 주워서 주머니에 넣는 것이라 생각해서 노인에게 말했습니다. “습득물은 경찰서에 신고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계시겠지요?” 노인이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습니다.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냥 가시지요” 경찰이 강제로 노인의 주머니를 뒤졌습니다. 그런데 노인의 주머니에는 온통 유리조각 뿐이었습니다. 노인이 경찰에게 말했습니다. “아이들이 유리조각을 밟아 다치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페스탈로찌는 어린이들을 향한 지극한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어린이에 대한 은총의 마음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어린이 놀이터는 고사하고 자기 상점 앞에 깨진 유리 조각이 널려 있어도 주울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봅니다. 간혹 휴지조각 과자봉지 쥬스 깡통들이 있어도 치울 생각을 안 합니다. 왜 그럴까요? 배려 은총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면 여러 가지 마음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중에 다른 사람들이나 사물을 보는 시각에 변화가 생깁니다. 특히 다른 사람들의 아픔이 보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상처가 보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어려운 점이 보입니다. 헐벗은 산도 보이고 말라죽어가는 나무도 보입니다. 강물에 둥둥 떠 죽어 있는 물고기도 보입니다. 왜 이런 것이 보입니까? 이는 선한 마음 은총의 마음이 그의 마음에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눅 19장을 보면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주님을 만난 뒤에 제일 처음 그가 보인 반응이 8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전에는 자기배만 보았던 사람이 이제는 가난한 사람의 굶주린 배도 보게 되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만난 이후 비로소 삭개오의 마음에 선한 말 곧 은총의 배려하는 마음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말 한마디라도 격려해주고 위로해 주고 붙들어 주는 말이 선한 말 은총의 말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 자상하게 마음을 쓸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이 마음으로 입을 열어 하게 되는 말이 선한 말 곧 은총의 말인 배려의 말을 하여야 합니다.

 

옛날 중국 진晉 나라에 목공이란 왕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가 매우 애지중지하던 말이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군사들을 풀어 말을 찾아 보니 시골 사람들 300명이 왕의 말을 잡아먹었다는 것입니다. 군인들이 시골사람들을 잡아와 다 목을 잘라 죽이려 하였습니다. 이때 목공 왕은 그들이 배고파 그런 것이니 그들을 죽이지 말라하고  “말고기를 먹었으면 술을 마시지 않으면 몸에 해로울 수 있다”고 하면서 그들을 용서해줄 뿐만 아니라 잘 접대해 주고 먹을 양식도 더 주어 보냈습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이웃 나라 진秦라와 싸우다가 목공왕이 사로잡히게 될 위기에 있을 때 어디선가 300명 사람들이 달려 나와 목공왕을 보호하고 오히려 다른 나라 왕까지 사로잡았습니다. 그 300명 용사들은 전에 말을 잡아먹었던 시골 사람들이였던 것입니다. 목공왕이 자기의 말을 잡아먹은 백성들에게 선한 말 곧 은총의 말로 배려해줌으로 먼 훗날 자신의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배려의 말 한 마디는 사람들의 마음에 큰 위로와 용기를 주는 선한 말 곧 은총의 말입니다. 그리고 나의 마음에도 평안을 얻게 해 줍니다. 따뜻한 배려의 선한 말 곧 은총의 말 한 마디, 그 말이 상대방에게 더할 수 없는 보약이 될 뿐만 아니라 내 심령의 뼈를 치유하는 보약이라 하겠습니다. 육신의 뼈가 아파 괴로워하십니까? 심령의 뼈가 근심으로 위태롭습니까? 선한 말 곧 은총의 말인 배려의 말을 서로 하므로 치유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내 심령의 뼈에 양약이 되는 선한 말 곧 은총의 말은 축복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축복이란 하나님의 복이 함께 하기를 기원하는 말입니다. 창 49장을 보면 야곱이 열두 아들을 일일이 축복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유다의 경우를 살펴보면, 8절 이하에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유다는 야곱의 넷째 아들입니다. 특별할 것이 없는 아들이요 지파였습니다. 그런데 이 축복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자손 가운데 다윗 왕이 나왔습니다. 그 후손 가운데 메시야가 오셨습니다. 나아가 지금 유대교나 유대인이라는 말도 바로 이 유다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축복은 이렇듯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뒷받침되어 큰 역사를 나타는 선한 말 은총의 말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이 예수를 믿게 되면서 변하는 또 하나 변화는 다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복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 33:29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사람이로다(아스레이카 이스라엘)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네 영광의 칼 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모세가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유언처럼 남긴 말씀입니다.

사실 모세는 지난 40년 동안 저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큰 고생을 했습니다. 끝없는 원망과 불평, 불순종속에 감당키 힘든 짐을 져왔습니다. 게다가 그들을 인도하여 왔으나 정작 자기 자신은 그토록 가고 싶었던  가나안 땅에는 한 발자국도 들어 가보지 못하고 느보산에 올라가 멀리 바라보고 죽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긋지긋하였을 것입니다.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자기의 눈으로 볼 때는 원망스런 그들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지극히 불쌍하고 사랑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한 말 곧 은총의 축복의 말을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서로 축복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그를 사랑하고 있는지 그를 사랑하고 복 주시는 하나님의 눈을 우리가 본다면 우리 또한 그를 향해 축복의 눈을 떠서 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흘기는 눈을 가진 사람에게는 절대로 복을 주시지 않으시고 복을 주는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에게 복을 내리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축복의 눈이 떠져야 비로소 선한 말 곧 은총의 축복의 말을 하게 됩니다.

 

미국의 미시간 주 성 요셉 고아원에 문제 소년 하나가 들어왔습니다. 이 소년은 고아원에서도 계속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베라다 선생님이 인내심을 가지고 이 아이를 돌봤습니다. 그리고 늘 축복했습니다.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고 축복하신다. 그래서 나도 너를 축복한다. 하나님 안에서 큰 꿈을 가져라” 그러나 소년의 행동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고아원에서 이 소년을 더 이상 돌볼 수가 없었습니다. 베라다 선생님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 소년이 고아원을 나온 뒤에 베라다 선생님의 그 큰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선생님의 축복을 마음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피자 가게에 취직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피자 한 개를 11초에 반죽하는 탁월한 솜씨를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년은 후에 자신의 피자가게를 내게 되었습니다. 너무 잘 되었습니다. 큰 피자회사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현재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피자회사인 도미노 피자입니다. 그리고 그 소년의 이름이 토마스 모나한입니다.
토마스 모나한은 피자 사업으로 번 돈을 미국 프로야구의 명문구단이 디트로이트를 운영하고 수많은 청소년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방황하는 청소년들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축복 하십니다. 큰 꿈을 가지십시오.”
이 토마스 모나한은 베라다 선생님의 선한 말 곧 은총의 축복의 말 때문에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되었음을 잊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기도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말 곧 은총의 축복의 말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축복은 너무도 훌륭한 심령의 뼈를 치유하는 보약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의 통로가 되고 그 복을 전하는 선한 말 곧 은총의 축복의 말을 할 때 우리의 심령의 뼈가 튼튼해지고 우리의 인생이 행복 하게 되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함께 복음성가를 부르겠습니다.

"축복합니다. 주님의 일믐으로......."

 


심령에 근심이 있습니까? 살아가는 일들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까? 우리의 심령이 흔들리고 연약하여 심령상 골절 상태에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말씀에 마음의 즐거움이 양약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선한 말 곧 은총의 축복의 말을 하므로 우리의 심령의 뼈가 튼튼해 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라온 코이노니아 여러분의 뼈는 이상이 없습니까? 여러분의 심령의 뼈는 건강하십니까?  우리 라온 코이노니어의 뼈의 양약(마렢패 라아쳄)은 선한 말 곧 은총의 말인 용서하는 말 배려하는 말 축복의 말입니다.

우리 라온 코이노니아 여러분 이 여름철에 건강하시고 낙상하는 일이 없도록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고 심령상 건강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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