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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6년 7월 17일 주일아침 예배 성경 레 18:1-5   라온 코이노니아의 法

 

1910년부터 35년간 일본의 강압적 통치하에 있었던 우리나라는 1945년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8·15해방을 맞았지만 아직 국가로 인정되지 못하였습니다. 나라는 3.8선이 그어져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고 당분간 남한은 미국의 군정통치를 받게 되었습니다. 1948년 2월 26일 국제연합의 결의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우선 선거가 가능한 38선 남쪽 지역에서만 헌법제정을 위한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이 총선거에서 선출된 198명의 입법의원들로 제헌국회가 구성되었습니다. 제헌국회는 헌법제정에 착수하여 소집 첫날에 헌법기초위원 30명과 전문위원 10명을 선출하였습니다. 헌법기초위원회에서 작성된 헌법안이 6월 23일 제16차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었습니다. 마침내 1948년 7월 12일 '대한민국헌법'이 국회에서 만장일치 결의하여 7월 17일 오전 10시 국회의사당에서 의장 이승만이 서명한 후 공포되었습니다. 이 헌법에 의해서 8월 15일 대한민국이 공식적으로 탄생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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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화 국회의장(앞줄 오른쪽부터)과 양승태 대법원장, 박한철 헌법재판소장, 황교안 총리, 이인복 중앙선거관리위원장,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등이 17일 오전 국회의사당 중앙홀에서 열린 제67주년 제헌절 경축식에서 제헌절 노래를 부르고 있다. 2015.07.17.photo@newsis.com


제헌절의 노래가 있습니다. 정인보선생님이 작사하고 박태준선생님이  작곡한 노래로 일년ㅇ 딱 한번 제헌절 행사 때 한번 부르는 제헌절 노래입니다. 마지막 가사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 대한민국 억만년의 터” 헌법은 우리나라 존립의 근거입니다.

헌법은 국가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선언하고  국가의 나아갈 방향을 정한 신성불가침의 선언과 약속이며 법 중의 법입니다. 그 누국도 어떤 권력도 함부로 훼손하거나 반대하거나 규탄할 수 없는 국가의 버팀목이 헌법입니다. 그래서 대통령이 당선 되면 취임식 때 손을 헌법위에 올려 놓고 선언하기를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주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 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 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라고 국민 앞에 선서하는 중요한 법입니다. 요즈음 국회의원들 간에 개헌 논의가 분분합니다. 그러나 쉽게 결정할 사항이 아닙니다. 몇 년 후 또 바꿀 것이라면 아니 바꾸는 것이 좋습니다. 1987년 까지 우리나라 헌법은 9번이나 개정되었습니다. 이제 개정한지 30년이 된다고 또 개정할 때가 되었다고 한다고 하는데 정당한 명분이 아닙니다. 미국의 헌법은 1787년 제정이래 몇몇 조학을 첨가하거나 삭제하는 일이 있었지만 크게 개정한 일이 없다고 합니다. 미국의 정당은 수백 년에 걸쳐 변함이 없는데 우리나라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당이 바뀌고 있습니다. 이런 정당들이 헌법을 바꾼다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법을 바꾸는 것 보다 법을 준수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헌법을 무시하고 위반하고 무시하는 일들이 정부와 정치권 그리고 백성들 사이에서 비일비재 보여 지고 있음을 보면서 국가의 앞날을 염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05년 6월20일 한국경영자 총연합회의 건의에 따라 당시 이해찬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국무회의에서 '관공서의 휴일에 관한 규정'을 개정하였습니다. 이 규정에 따라 식목일은 2006년부터, 제헌절은 2008년부터 공휴일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경제 논리에 의거해서 제헌절이 국가 지정공휴일로부터도 밀려남으로 국민들 사이에서 헌법의 의미와 역할이 경시되어 버리게 되는 단적인 예라고 하겠습니다. 제헌절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모습이 오히려 이제는 낮 설게 느껴지고 있습니다.

 

지상의 나라에 헌법을 비롯하여 민법 형법 상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성법의 육법전서가 있다면, 하나님 나라에도 법이 있는데 바로 성경으로 구약과 신약성경 입니다.  대한민국 백성은 대한민국의 법을 지켜야 하듯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하나님 나라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는 대한민국의 법하고는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는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일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백성도 아니고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은 철저하게 성경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이단은 바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기독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외국인을 비난하지 않듯이 우리는 불교나 원불교 믿는 사람의 신앙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치 우리나라에서 암약하는 간첩이 있듯이 이단은 기독교 안에 암약하는 사탄세력의 간첩과 같습니다. 기독교인이면서 하나님의 법을 잘 지키지 않는 신앙인들에게 이단들이 접근하여 미혹의 영 곡 죄와 사망의 법을 주입시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백성인 기독교 정통신앙인은 이단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법 곧 성경의 법대로 지켜 살기 때문에 이는 성령의 법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고 하였습니다.(롬8:2)

오늘의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과 가나안으로 대표되는 세상의 풍속과 법규를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 입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많은 민족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들을 지명하여 불러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들이 강해서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뛰어나기 때문에 선택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선택을 받을 정도의 탁월한 영성을 갖춘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과 은혜로 그들을 선택하셨습니다. 세상엔 그들보다 더 강대하고 문명의 발달을 이룬 민족도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많은 민족 중에서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셨습니다.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은혜로 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430년간 애급에서 노예생활하며 고생하는 그들을 고통과 신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그 고난의 자리에서 구해내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건져내어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후 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야 할 법을 가르쳐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차 들어가 살 땅인 가나안 땅은 이미 이방족속들이 성을 쌓고 자기들의 종교를 믿으며 살고 있는 곳입니다. 그런 곳에 가서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이 명령하신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법규들입니다. 우리나라 헌법이 130개 조문으로 되었는데 하나님 나라의 헌법인 십계명은 달랑 10개 조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 반드시 지키지 않으면 아니 되는 신성한 법입니다. 5절에 무엇이라 말씀하였습니까?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와아세 오담 하아담 왛하이 빠헴)”


동리 사람들에게 만득이라고 불리던 지적 장애 2급의 고씨는 1997년 여름 소 중개업자의 손에 이끌려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김씨의 축사에 왔습니다. 축사 주인 김씨 부부는 고씨를 2평짜리 허름한 쪽방에 지내게 하며 6000평이 넘는 규모의 축사에서 젖소와 한우 44마리를 키우는 일을 시켰습니다. 이곳에서 고씨는 자신의 이름조차 잊은 채 '만득이'로 불리며 하루하루 마치 노예처럼 일을 하였습니다. 소에게 먹이를 주는 것은 물론 악취가 진동하는 분변까지 치우는 중노동이었지만 19년동안 임금은 단 한 푼도 받지 못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밥도 굶길 때가 있았다고 전합니다. 몸 곳곳에 상처가 날정도로 주인에게 매를 맞았습니다.

원래 고씨는 오창읍과 멀지 않은 흥덕구 오송읍에서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니고 그와 함께 살던 어머니(77)와 누나(51)도 지적 장애 2급입니다. 지적장애 2급은 7살 정도의 지적능력을 가진 것입니다.  매달 나오는 50만∼60만원의 기초생활수급비가 생활비의 전부였습니다. 비록 가난했지만 서로를 믿고 기댈 수 있는 가족이 있었기에 세 식구는 행복했습니다. 성년이 된 고씨는 실종되기 전 2∼3년간 지인이 소개해 준 충남 천안의 한 축사에서 일을 배웠습니다. 그곳에서 숙식하며 번 돈은 가족이 생활하는데 큰 보탬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대신해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톡톡히 하였습니다. 명절 때는 오송 집으로 와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가끔 천안 축사로 어머니가 찾아오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행복도 잠시, 1997년 여름 고씨가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당시 천안 축사 관계자는 경찰에 고씨가 사라진 사실을 알렸지만 그의 행적은 묘연습니다. 고씨 어머니도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사라진 아들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의 든든한 버팀목이 된 아들의 실종은 어머니에게 크나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칠순을 넘긴 노모의 가슴에 고씨의 실종은 응어리가 됐고, 한이 되었습니다. 지적 장애라 표현은 못했을 뿐 믿음직한 아들을 잃은 어미의 아픔은 일반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행방불명된 지 19년이 됐지만 여태껏 주민등록 말소도, 사망신고도 하지 않고 호적을 지켜낸 것은 어디에서든 살아만 있으라는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이었기 때문입니다. 고씨가 사라진 뒤 어머니와 누나는 기초생활수급비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지만 얼마 뒤 위기를 맞았습니다. 2008년 무렵 주 생계 수단인 기초생활수급비가 끊겼습니다. 오송 지역 개발로 아버지가 남긴 텃밭 땅값이 치솟자, 이게 소득으로 잡히면서 수급 대상에서 제외된 것입니다. 별 볼 일 없던 땅의 가치가 올라갔으니 당연히 기뻐해야 할 일이지만, 당장 수중에 돈 한 푼 없는 이들 모녀는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일반인이라면 땅을 팔았겠지만 두 모녀는 불행히도 그런 판단을 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딱히 경제 활동을 할 처지도 못 돼 고씨 어머니의 노령연금 20만원과 친척이나 동네 사람들의 도움으로 근근이 버텼습니다. 곤궁했던 생활을 하던 모녀는 3년 전쯤 친척의 도움을 받아 겨우 땅을 팔았습니다. 이 돈으로 생활이 안정되자 고씨 어머니는 사라진 아들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습니다.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는 믿음을 어머니는 팔순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놓지 않았습니다. 그런 고씨 어머니 앞에 지난 7월 14일 밤 금쪽같은 아들이 돌아왔던 것입니다.

지난 1일 축사 인근 공장에서 사설 경비업체 경보기가 울렸습니 지구대 경찰이 조사하러 나와서 보니 고씨였습니다. 고씨는 "주인이 무서워 도망 나왔다"고 진술하였습니다. 경찰이 수소문하여 마침내 어머니를 찾아 데려 왔던 것입니다.

발견 당시 고씨는 남루한 옷차림에 바짝 마른 상태였다. 한 눈에도 먹는 게 풍족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 행색이었다.

고씨에게 강제노역을 시킨 김씨 부부에 대한 경찰 조사가 시작되면서 비로소 19년 만에 꿈 같은 가족 상봉이 이뤄진 것입니다.
간절하게 아들의 귀향을 갈구했던 어머니는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어디 갔다 이제 왔느냐. 많이 찾아다녔다"며 고씨를 끌어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19년간 누구보다 힘들었을 고씨도 감정 표현은 서툴렀지만 "나도 알아, 알아"라고 말하며 꿈에 그리던 어머니와의 재회를 반겼습니다.(2016년 7월16일 연합뉴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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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사노예’ 19년 만에 어머니 만난 지적장애인 고모씨


19년간 남의 축사에서 노예처럼 일하며 살아온 지적장애인 고모(47)씨가 20여년만인 지난 14일 청주 오송에 사는 어머니를 만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제 만득씨가 앞으로 대한민국 백성으로 다시는 악의 종살이를 당하지 아니하고 자유롭게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소식을 접한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마음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의 법을 지키라고 하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허물과 죄로 멸망에 처한 마귀나라에서 종살이 하던 존재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모른 채 마귀의 종이 되어서 하나님께 대적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릴 진노를 내리시지 아니하고 도리어 은혜를 베풀어 우리를 묶고 있던 죄와 사망의 사슬을 끊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는 마귀의 종살이를 하지 아니하고 자유롭게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법을 우리에게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법은 우리를 구속하고 억압하는 법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자유와 생명을 주는 법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이유가  기독교가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고 억압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라에 법이 있는 것은 백성들을 구속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와 안전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어릴 때에는 부모들이 규칙을 정하고 자녀들에게 그것을 지키도록 합니다. 귀가시간도 정하고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도 정합니다. 컴퓨터 사용시간, 텔레비전 시청시간의 한계를 정합니다. 공부시간을 정합니다. 집안일도 얼마간 해야 할 일을 정해 줍니다.  그렇게 다양한 규칙을 정하고 그것들을 지키도록 합니다. 이렇게 자녀들에게 규칙과 일정한 제한을 준 것은 자녀들을 억압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이 보다 안전하게 건강하게 행복하게 자라도록 돕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성숙하지 못한 자녀들은 부모의 이런 사랑의 규칙을 잔소리로 알고 자기들을 구속한다고 불평합니다. 미숙한 자녀의 입장에서는 아버지나 부모님들이 정해놓은 법이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왜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하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법에서 떠나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그런 한 사람을 예수님에게서 듣습니다. 바로 탕자입니다. 탕자는 도시에 나가 제멋대로 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나 참담했습니다. 그는 빈 털털이가 되고 어느 집 돼지치기 종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아버지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은 용기 였습니다. 그러나 그 용기가 그를 다시 자유와 행복을 맛보게 하였습니다.

법에 대해 오해하는 사람들은 법을 지키는 것이 자유를 제한한다는 생각을 하는데 법은 자유와 생명과 행복을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물론 선한 법을 말합니다. 인간의 자유와 인권을 억압하는 악법은 법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명기 10:12-13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법을 주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보호 아래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며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첫 사람 아담에게 준 법은 단 한 가지었습니다. 모든 과실은 다 먹을 수 있지만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 나무과실은 먹지 말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창2:17)는 법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이브는 이 한 가지 법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면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애급의 노예에서 구원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 법을 내리셨습니다. 크게 하나님을 향한 계명과 사람을 향한 계명 두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계명은  (1)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2) 우상을 만들지 말라. (3)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4) 안식일을 지키라 입니다. 사람을 향한 계명은  (5) 부모를 공경하라.  (6) 살인하지 말라.  (7) 간음하지 말라.  (8) 도적질하지 말라. (9) 거짓 증거하지 말라. (10)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입니다. "..하라"는 계명은 2개이고, 나머지 8개는 전부 하지 말라는 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안식을을 거룩히 지키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라는 계명은 사람들이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아 죄를 범함으로 주신 법입니다.  성경에 하라는 계명을 지키지 않아 나타난 죄의 가짓수가 248가지로 이 수는 사람의 뼈마디 숫자와 동일합니다. 사람이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행하므로 범한 허물에 대하여 하지 말라고 하는 계명으로, 이 계명을 지키지 않아 성경에 나타난 허물의 가짓수가 365가지로 1년의 날수와 같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하나님의 열 가지 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여 나라가 망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 십계명 법을 온전히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성전에 기도하는 한 바리새인의 기도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이 바리새인은 자랑이나 하듯이 큰 소리로 기도하기를 자기는 율법의 계명을 잘 지키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속마음을 다 들여다보시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그 마음이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였습니다. 어쩌면 이런 기도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 열 가지 법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로 줄여 주십시오 그러면 지키겠습니다.” 십계명을 하나로 줄이면 지킬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줄여 주셨습니다. 그 계명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마22:37-40) 예수님의 법은 사랑입니다. 기독교의 법은 돌비(石碑 엔 프락신 리디나이스)에 새겨지지 아니하고 마음(心碑 엔 프락시 카르디아이스)에 새겨진 법입니다.

잠 3:3에서는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 판에 새기라.(까스렘 까르께로데카 카드벰 알 루아흐 립베카)” ‘목에 매라(카사르)’는 말씀의 의미는 숨을 쉬듯 하라 입니다. 사랑을 숨을 한시도 쉬지 않으면 죽을 것처럼 숨 쉬듯 하고, 사랑을 마음에 깊게 스며들게 하여 마음이 곧 사랑이게 하라 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상징이 무엇입니까? 붉은 하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인 사랑이 나의 신념이 되고 사상이 되고 나의 인생의 바탕이 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요13:34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카도스 에가페사 휘마스 히나 카이 휘메이스 아가파테 알레루스)” 이 말씀을 목에 메고 마음에 새겨 놓으십시오.
이 사랑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카도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 처럼이란 바로 십자가를 지신 것 처럼 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 사랑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의 법은 십계명 법이요, 신약의 예수님의 법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의 법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법은 십자가 사랑 법입니다.
갈6:2에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후토스 아나플레로세테 톤 노몬 투 크리스투)”고 말씀하였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성취할 수 있습니까?

그 사랑의 법을 성취할 유일할 방법이 있습니다. 사랑의 법을 알기 전에 먼저 미워하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미워하는 법을 모르면 십자가 사랑의 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기독교가 사랑의 법이라고 하닌까 뭐든지 사랑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97:10에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오하베이 야훼 시느우 라)”
롬 12:9에 “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히라(아포스튀군테스 토 포네론, 콜로메노이 토 아가도)”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 이전에 미움의 종교입니다. 미워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하지도 못하는 사람입니다. 왜 사람들은 십자가 지기를 주저하고 두려워합니까? 미워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철저하게 미워하는 사람이 철저하게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기 전에 먼저 미워할 것부터 찾아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미워할 것들을 찾아보십시오.  미워할 대상을 잘 알아 미워해야 합니다. 십자가 사랑을 알고 성령충만 받았다고 하면서 미워하지 못한다면 성령은 그에게서 떠날 것이고 그는 가룟유다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미워합니까?

잠 6:16-19 “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 ”
잠언 8: 13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의 법을 이루기 위해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 강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사울 왕의 왕권을 정지 시켰습니까? 그에게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 흐려졌기 때문입니다. 왜 다윗은 우리야 장군의 아내를 범했습니까?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엘리사의 제자인 게하시는 왜 문등병에 걸렸습니까? 탐욕을 미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쳤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 패역한 입을 미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서 사람들은 마땅히 미워해야 할 죄를 미워하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것이 죄며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 죄며  선한 일을 행할 줄 알고 행치 않는 것이 죄인 것입니다. 거짓을 미워하지 않으니 죄요 의를 행하지 않으니 죄요 이기심과 시기와 질투와 분쟁과 다툼을 일으키니 죄요 육신의 욕망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빠져 있으니 죄요 보암직스럽고 먹음직스럽고 탐스러운 것에 유혹을 당하는 것이 죄요 이 같은 죄를 미워하지 않으니 삽자가 사랑을 성취하지 못하니 이 또한 큰 죄입니다. 십자가 사랑을 이루지 못하게 됨으로 죄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을 이기지 못하니 그는 여전히 지금 사망의 법에 묶여 사는 마귀의 노예로 살며, 지금 그의 영혼이 죽어 지옥 불구덩이로 떨어져 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를 미워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모두 죄를 미워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잠 8: 36에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라온 코이노니아의 법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의 법입니다. 라온 코이노니아 성도들은 예수님의 사랑의 법대로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그러기 위해 철저히 미움의 법도 지켜야 합니다. 죄악을 미워하는 마음의 법이 십자가 사랑의 법입니다. 악을 악인지 모르는 사람은 십자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악이 얼마나 나쁜 것인 것을 알고 악을 대적하는 마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는 십자가의 사랑의 법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영이 사는 일이요 하나님 나라에 영원히 사는 일입니다. 

오늘은 우리나라 헌법이 공포된 68주년 되는 날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헌법을 잘 준수하는 애국의 국민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라온 코이노니아 가족 여러분은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와아세 오담 하아담 왛하이 빠헴)고 하였으니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하나님의 법 십계명을 순종하여 행하므로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아 살며,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의 법을 성취하므로 영생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땅의 축복과 하늘의 축복을 다 받게 되는 축복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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