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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가장 위대한 작곡가의 한사람인 베토벤은 1827년 3월 26일 간경변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5개월 전 마지막으로 작곡한 곡이 현악 4중주 (Ludwig van Beethoven String quartet No 16. Op.135)였습니다.  베토벤은 이 곡을 1826년 7월에 착수해서 10월에 완성했습니다. 이 곡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작곡을 하지 못하였던 베토벤은 스스로 ’휴식과 평화를 위한 달콤한 노래‘라고 말하였던 것처럼 그는 인생에 대한 끊임없는 갈등이 해결된 평온한 상태에서 작곡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굴곡 많은 삶을 살아온 그가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움과 평온함으로 가득채운 곡입니다. 베토벤은 귓 병으로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없지만 오히려 내면의 고독 속에서 오히려 신의 소리에 가까워지면서 저 깊은 어둠으로 영원히 가라앉아 버릴 듯한 소리의 심연으로부터 한 음씩 떠오르는 음의 상념을 통해 ‘삶의 고백’을 그의 마지막 첼로 鉉에 담았습니다.  실제로 너무나 음울하고 창자를 끊어 낼 듯한 비창함(pathetique) 이 있어, 그 유명한 교향곡 ”운명“ 보다도 훨씬 ”운명“ 의 냄새가 진한 작품이다. 4악장 전체가 각각 특색 있는 음률로 이루어져 있어 한번 듣기 시작하면  헤어 나올 수 없는 미로를 헤매는 심정이 된다.

그런데 베토벤은 이 곡의 4악장 도입부에 특이한 문구를 썼습니다. 바로 Muß es sein? (그래야 하나?) Es muß sein! (그래야 한다)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글자입니다. 무엇을 그래야만 하는지에 대해 후세 사가들은 여러 가지 구구한 해석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누구는 하녀의 월급을 올려줘야 할 것인지 말 것인지란 고민을 썼다는 해석한 사람도 있고  “불멸의 여인 (1995.01.28. 개봉, 감독 버나드 로즈, 출연조한나 터 스티지, 게리 올드만)”이란 영화에서는 죽은 동생의 아들인 칼을 키웠는데 이 조카를 제수씨에게 돌려 주어여 할지 말아야 할지 제수씨와의 필담을 한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하지만 이는 영화의 상상일 뿐입니다. 이 베토벤 조카 칼의 음악선생이 유명한 체르니입니다.
 

하여튼 이 문구에 대한 여러 해석들이 오고 갑니다만 저는 이 말이 하나님을 향한 기도라고 해석합니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 온 인생에 가장 어려운 환경에 빠져 있었습니다. 물질적으로도 어렵고 육체적으로도 심각한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마지막 곡을 계속 작곡해야 할 것인지 말아야 할 것인지 망설이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 이 곡을 완성시켜야 합니까? 무스 에스 사인, 그래야 합니까?”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응답이 옵니다. “에스 무스 사인!, 그래야 한다.” 그는 이 마지막 현악사중주를 작곡해 가면서 수없이 무스 에스 사인? 에스 무스 사인!을 되 뇌이며 곡을 마침내 완성시켰다고 그렇게 저는 해석을 합니다.
그리고 이 물음은 제 인생에서도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의 말씀으로 제 마음 안에 되새겨 지는 말이기도 합니다. 제가 어떤 문제로 기도하면서 ‘하나님, 그래야 합니까?’ 라고 물으면 그때마다 하나님은 ‘그래야 한다!’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또 한 번 한 걸음을 앞으로 내 딛게 되었습니다. 제가 여러분과 함께 라온 코이노니아를 시작할 때도 역시 저는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라온 코이노니아를 시작해야 합니까? 무스 에스 사인, 그래야 합니까?’ 하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에스 무스 사인, 그래야 한다!’  몇 달 전 시골로 이사 가려는 생각으로 어느 중개소의 소개로 처음으로 나포면 서포리의 한 농가 주택을 가서 보았습니다. 그 후 개정 성산 옥구 등 여러 집을 다니면서 보았습니다. 좋은 집들도 있고 그렇지 못한 집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를 팔아 그 값으로 살만한 집을 구하려 하니  마땅치 않았습니다. 결국 이사하지 말고 그대로 아파트에 살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자하고 간 집이 처음에 갔던 그 서포리 집이였습니다. 가서 주인을 만나보니 80세가 넘으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사시는 집인데 알고 보니 중동교회 장로님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집을 소개한 부동산 사장이 중동교회 목사님으로 이미 작고하신 저와 퍽 가까웠던 장 목사님의 아들 이였습니다. 집값도 아파트를 판값으로 살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이 집을 사야 합니까? 그래야 합니까? 하나님이 대답해 주시기를 그래야 한다! 그래서 계약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파트가 빨리 매매가 되어야 하는데 여름이라 그런지 집 보러 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래야 한다 하셨으니 그렇게 될 줄 믿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기까지 우리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출생과 죽음 일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이 세상에 출생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영어로 출생을 Birth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생은 죽음으로 삶을 이 땅에서 마무리하게 됩니다. 죽음을 영어로는 Death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출생과 죽음사이에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그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서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 보겠습니다. 영어 알파벳 B와 D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 대답은 쉽습니다. C입니다. 그러면 B와 D 사이에 있는 C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다시 말하면 출생과 죽음사이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 대답을 ‘선택’ 영어로 Choice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To be, or not to be, 사느냐 죽느냐 끊임없는 선택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인생은 곧 선택입니다. 선택이 곧 삶을 만드는 것입니다. 배우자의 선택-얼마나 중요합니까?  수 시번 선을 본 사람이 있습니다. 직업의 선택-얼마나 중요합니까? 수십 군데 직업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아침에 잠에서 깨어난 이후 다시 밤에 잠이 들 때 까지 수없는 선택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디로 갈까? 누구를 만날까? 이럴까 저럴까 그 선택의 결과가 하루의 나의 행복과 불행을 저울질 하게 됩니다. 성공이냐 실패냐가 결정됩니다. 그 모든 선택의 궁극적 선택이 무엇입니까?


신명기 30:29에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
영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섹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년 4월 26일[1]~1616년 4월 23일)의 헴릿이란 책에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 우리는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해야 합니다. 우리는 분명한 대답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살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습니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모든 인간의 긍극적 선택입니다. 사는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다가 아니라 그것이 믿음이다란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룻기 1장을 통하여 믿음의 선택을 하기 위한 몇 가지 원리를 발견하고자 합니다.

 

믿음의 선택을 위한 첫 번째 원리는 우리가 서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분명히 알고 그 자리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한 가정이 등장합니다. 남편의 이름은 엘리멜렉,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입니다. 두 아들이 있었고, 그들이 살던 곳은 베들레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에 흉년이 들자 엘리멜렉 집안은 이방민족인 모압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모압 여인 중에 두 며느리를 맞이합니다. 그런데 그 후 엘리멜렉이 죽게 되었고, 오래가지 않아서 두 아들도 죽게 됩니다. 결국 시어머니인 나오미와 두 며느리만 남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큰 문제입니다. 더 이상 이방의 땅에 살 수가 없었습니다. 나오미는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두 며누리의 고향은 모압입니다. 그래서 두 며누리를 놔두고 나오미 혼자 고향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것은 나오미의 현재 처하여 있는 현실 앞에서 내가 어디에 서야 할 것인가를 다시 회복하는 일입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장면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모세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애급의 왕자로 성장하였고 그대로 있으면 애급의 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인 것을 알고 이스라엘 사람들의 지도자가 됩니다. 무슨 말입니까? 모세는 자기가 서야할 자리를 회복하였다는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의 40년 고난의 행군을 하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는가? 그것은 그곳이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약속받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 어떤 고난이 있다하더라도 반드시 가야할 그리고 회복해야할 땅이기 때문입니다.

사사기에 삼손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천하무적의 장사였습니다. 그런데 불레셋의 미인계에 걸려 들릴라에게 자신의 비밀을 알려 주었습니다. 자신의 힘은 자기의 미리 털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결국 불레셋 군인들에게 붙잡혀 머리를 깍기고 힘을 상실한 체 노예가 되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자기가 서야할 자리를 이탈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백성들을 구원할 사사로 임명을 받았는데 이방 여인의 유혹에 넘어가 믿음을 상실하게 되니 결국 자기도 망하고 자기 종족인 단 지파도 고향을 떠나는 비극이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는 돼지 우리에서 돼지밥을 먹으며 살다가 자기가 있을 자리가 돼지우리가 아니라 아버지의 집이지를 불연 듯 깨닫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버지는 죽었다가 살아 온 아들이라고 큰 잔치를 열어 아들을 환대 합니다. 탕자는 자기의 본래 자릴 회복하였던 것입니다.

 

나오미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그는 이제라도 자기의 고향 이스라엘의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이것은 장소가 아닌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믿음의 결단인 것입니다. 자기가 지켜야 할 영적 자리를 이제라도 되찾고자 하는 영적 귀향인 것입니다. 나오미아 룻, 두 여인의 조용한 발걸음은 외형적으로는 초라했어도 그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역사를 이루어가는 영광스러운 발걸음이었습니다. 그후 룻은 다윗의 할머니가 되었고 그 후대 가문에서 예수님이 태어 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서야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의의 자리인지 불의의 자리인지 선의 자리인지 악의 자리인지 진실의 자리인지 거짓의 자리인지 흥할 자리인지 망할 자리인지 생명의 자리인지 죽음의 자리인지 천국의 자리인지 지옥의 자리인지 이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잘못된 자리에 있으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리로 회복해야 합니다.
30년 전 제주복음교회에서 목회할 때입니다. 남편은 남선교회 회장이고 부인은 여성교회 회장이고 아들은 학생회 회장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터 교회를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전화를 해도 받아주지 않고 찾아가도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에게 딸린 가족이 없는 홀로된 고모가 있는데 제주시 동부시장에서 기름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고모가 찾아와서 하는 말이 내가 죽으면 아무도 나를 위해 제사지내줄 자손이 없는데 네가 만일 예수를 믿지 않고 나를 위해 제사를 지내 준다고 약속하면 기름집을 너에게 물려주겠다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 기름집을 물려받기 위해 온 가족이 교회를 나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몇 개월 후 그 기름집은 화재가 나 홀랑 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가족은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믿음은 인생이 마땅히 있어야 할 그 자리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그래야 합니까?’ ‘그래야 합니다.!’  살기 위해서입니다.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  자리가 어디입니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생명의 집입니다.


왜 오늘 우리는 이곳에 모였습니까? 이 자리가 우리가 있어야할 회복된 믿음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두가지 생각을 한다면, 오늘 주일에 교회로 갈까? 친구들과 놀러 갈까? 그러면 기도하세요 ‘하나님 친구들과 놀러가고 싶은데 꼭 교회에 가야 합니까? 그래야 합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대답하십니다. ‘그래야 한다.’  그러면 두말없이 교회로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마음에 두 가지 갈등이 일어난다면, 그래서 ‘그래야 합니까?’ 기도하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대답해 주십니다. ‘그래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렇게 하세요.

 

믿음의 선택을 위한 두 번째 원리는 세상적인 문제보다 먼저 영적 유익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돌아오고자 할 때에 크게 두 가지가 마음에 걸립니다.

첫째는 자존심과 체면입니다. 본문 19절에 보면 나오미가 돌아올 때에 베들레헴 온 성읍이 크게 떠들며 이야기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반가워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마도 온 동리 사람들이 쑥떡잔치를 벌렸을 것입니다.  때로는 자존심과 체면 문제가 죽음보다 더 괴롭다고 하기도 합니다. 둘째는 어떤 대책이 준비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겨 둔 것도 없고, 도와주겠다고 약속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가는 것도 어렵지만, 가본들 그 다음 어떻게 살아 가야할지 망막한 현실이 그 앞에 있을 뿐입니다.
아마도 나오미는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 고향땅 베들레헴으로 가고 싶은데, 그래야 합니까?” 하나님이 대답하십니다. “그래야 한다.”
나오미와 룻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일단 가기로 하고 베들레헴을 향해 떠났습니다. 현실의 대책이 없긴 하지만, 영적인 회복이 가장 급선무이기 때문입니다. 깊은 안개 속을 걸어갈 때에 앞이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10m, 100m 밖을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선 내 앞에 보이는 한 걸음부터 걸으면 그 다음은 또 거기서 보일 것입니다. 영적으로 회복한 사람은 그 다음의 길을 하나님이 인도하시리라 확신하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며누리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이스라엘로 가고자 하는 것은 더 어려운 선택입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모압에서 겪는 것보다 훨씬 심한 멸시와 냉대를 받아야 할 것이며, 그나마 재혼할 가능성도 더 없게 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당연히 모압이 편하고, 유리합니다. 그러나 룻이 가고자 하는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16절을 보면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룻의 고백을 듣게 됩니다. 짧은 고백이지만, 모든 것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모압에 있으면 영적으로 위험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도 없는 가운데, 자신이 혼자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거의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부산 남천 중앙교회에서 목회할 때입니다. 여선교회 회장으로 교회 일에 아주 열성 이였습니다. 어느 여름 학생회 여름 수련회를 갔습니다. 여 선교회원 몇 사람이 따라와 식사를 준비해 주었습니다. 여름 날 수십명의 밥을 준비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불앞에 앉아서 땀을 비오듯 흘리고 있던  이 여선교회 회장이 마침내 분통을 터트렸습니다. 그것은 자기는 뙤약볓 아래 불 때고 있는데 다른 여 선교 회원들은 나무 그늘 밑에 앉아서 호호하며 웃고 떠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여 선교 회장이 저를 찾아와 그들을 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회장님, 회장님이 땀 흘려 일하시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귀한 일요 복 받을 일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 일이 힘들다면 회장님도 안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일 하면서 불평하는 일은 오히려 복 받을 일이 아니라 복을 차버리는 일입니다. 저기 있는 저분들에게는 제가 돕도록 말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보니 그 여 선교회 회장님은 불평하는 일이 버릇이 되어있는 듯 매사 부정적이고 불만이 가득하였습니다. 마침내 교회를 떠나 김기동파 교회의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교회 몰래 김기동파 야간 신학교를 다녔던 것입니다. 그리고 몇 달 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의 선택의 기준은 나의 영이 더욱 풍성해지고 확장되어가는 일이 우선이다라는 것입니다. 자칫 열심히 믿음생활 한다는 것이 오히려 자신의 영성을 훼손 시키는 말이나 행동을 할 때가 있습니다. 믿음 자만이 아니라 겸손할 때 영이 풍성해 집니다. 미움 보다 사랑의 말을 하게 될 때 나의 영이 가일층 성장하게 됩니다. 부정적인 말 보다 긍정적인 말을 하게 될 때 능치 못함이 없는 능력의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교회안에서 연합하고 더불어 나눌 때 우리의 영은 확장되어 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무엇을 선택을 하게 될 때 이일이 나의 영에 유익한 것이냐 아니면 손해를 끼치는 것이냐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 원수라도 사랑하라 하시니 꼭 그렇게 해야 합니까?“  ”꼭 그렇게 해야 한다. 원수를 용서하기를 일곱 번씩 일흔 일곱 번이라도 해야 한다.“


믿음의 선택을 위한 세 번째 원리는 나의 만족보다는 사랑의 배려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영적 귀향을 결정하고 나서 두 며느리에게 돌아가라고 말을 합니다. 물론 막막한 나오미로서는 두 며누리가 함께 하는 것이 외롭지도 않을 것이고, 그나마 젊은 사람들이니 무엇인가 해도 도움이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자기의 유익보다는 젊은 며누리들의 입장을 먼저 배려하는 사랑을 보입니다.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본문 16절 이하에 보면 ‘어머니의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다’고 합니다. 머물다는 것은 편안한 잠이 아니라, 불편한 잠자리로 밤을 보낸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어떠한 고난과 불편도 감수하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도 죽을 때까지라고 선언합니다. 시어머니 나오미와 며누리 룻 두 사람의 사랑의 배려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사랑은 배려입니다. 배려의 사전적인 의미는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거나 마음을 써서 보살펴 주다란 말입니다. 한문으로 配慮는 나눌 배配 생각할 려慮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최초의 여인인 이브를 창조하실 때에 아담의 돕는 배필로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하였습니다(창2:18). 여기서 돕는 배필이란 원어로 ‘에제를 네게드’란 말로 “맞은편에서 생각해 주는자”입니다. 이 말은 아담이나 이브가 서로 배려하는 자란 의미입니다.
사랑의 다른 이름이 배려입니다.

대니 메이어(Danny Meyer)는 유니언스퀘어 호스피탤리티 그룹(Union Square Hospitality Group)의 CEO입니다. 그의 회사는 출장부페를 포함하여 다양한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회사인데, 세계적 외식 전문지 ‘자갓 서베이’가 3년 연속 뉴욕 최고의 레스토랑 1,2위로 선정한 그래머시 태번과 유니언스퀘어 카페를 비롯 11개 음식점 운영 중입니다. 그는 Setting the Table (세팅 더 테이블)이란 책을 썼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와 닿았던 부분은 '배려의 우선순위'라는 개념입니다. 배려가 음식점 사업에 성공의 지름길이란 말입니다. 음식점 사장은 종업원을 배려하는 것이 우선이어야 하고 종업원은 손님을 향한 최선의 배려가 우선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택의 기준도 사랑의 배려라고 하겠습니다. 배려심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고 믿음도 아닙니다.

 

이수영 목사님의 설교(2014년 12월 30일 설교)에서 소개된 내용입니다. 어느 집 며느리가 쓴 시어머니 이야기인데 실화입니다.
아래로 여동생이 하나 있는 이 며느리는 열한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전업 주부였던 그녀의 어머니는 그때부터 생계를 책임지셔야 했습니다. 자연히 여유롭지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한지 2년 만에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한 지 만1년 만에 친정어머니가 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어머니 건강도 걱정이었지만, 수술비와 입원비 걱정부터 해야 했습니다. 남편에게 얘기했더니 남편은 걱정하지 말라며 내일 돈을 융통해 볼 터이니 오늘은 푹 자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다음 날, 친정어머니를 입원시키려 친정에 갔지만 그 어머니는 선뜻 나서질 못했습니다.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몇 개 있으니 4일 후에 입원하자 했습니다. 집에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때 그녀의 시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지은아(그 며느리의 이름입니다), 너 울어? 울지 말고 내일 3시간만 시간 내 다오.”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날, 그녀는 시어머니와의 약속 장소에 나갔습니다. 시어머니는 무작정 한의원으로 며느리를 데려갔습니다. 미리 전화예약을 했는지 원장님은 “간병하셔야 한다고요?” 하고 물으며 맥을 짚어보고 몸에 좋은 약을 한 제 지어주었습니다. 시어머니는 또 며느리를 백화점에 데려가서 트레이닝복과 간편복 네 벌을 사주었고 선식도 사주었습니다. 솔직히 속으로 좀 답답해하고 있던 며느리에게 시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와서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환자보다 간병하는 사람이 더 힘들어. 병원에만 있다고 아무렇게나 먹지 말고 아무렇게나 입고 있지 마라.” 그리고는 봉투를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엄마 병원비 보태 써라. 네가 시집온 지 얼마나 됐다고 돈이 있겠니. 그리고 이건 죽을 때까지 너랑 나랑 비밀로 하자. 네 남편이 병원비 구해오면 그것도 보태 써. 내 아들이지만, 남자들 유치하고 애 같은 구석이 있어서 부부싸움 할 때는 꼭 친정으로 돈 들어간 거 한 번씩은 얘기하게 되어 있어. 그러니까 우리 둘만 알자.” 며느리는 마다했지만 시어머니는 끝끝내 그 봉투를 손에 꼭 쥐어주었습니다. 며느리는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시어머니에게 기대어 엉엉 울고 있었습니다. 2천만원이었습니다. 친정어머니는 그 도움으로 수술을 받고 치료도 받았지만 이듬 해 봄에 돌아가셨습니다. 병원에서 오늘이 고비라고 했을 때 남편에게 전화한 그녀는 갑자기 시어머니 생각이 나서 자기도 모르게 울면서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드렸습니다. 시어머니는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에 남편보다도 빨리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의식이 없는 친정어머니의 귀에 대고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우리 어머니 오셨어요. 엄마, 작년에 엄마 수술비 어머님이 해주셨어. 엄마 얼굴 하루라도 더 볼 수 있으라고...” 그러나 어머니는 미동도 없었습니다. 그때 시어머니가 지갑에서 주섬주섬 무얼 꺼내서 친정어머니 손에 쥐어주었습니다. 며느리와 아들의 결혼사진이었습니다. 시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사부인, 저예요. 지은이 걱정 말고 사돈처녀 정은이도 걱정 말아요. 지은이는 이미 제 딸이고요 사돈처녀도 내가 혼수 잘해서 시집 보내줄 게요. 걱정 마시고 편히 가세요.” 그때 거짓말처럼 친정어머니가 의식 없는 채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다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족들이 다 왔고 어머니는 2시간을 넘기지 못한 채 그대로 눈을 감았습니다. 망연자실 눈물만 흘리고 있는 며느리를 붙잡고 시어머니도 함께 울어주었습니다. 시어머니는 그만 집에 들어가시라는 데도 3일 내내 빈소를 함께 지켜주었습니다. 며느리에게는 친척도 없었습니다. 사는 게 벅차서였는지 어머니는 따로 연락 주고받은 친구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빈소가 썰렁하면 가시는 길이 외로워.” 하신 시어머니 덕분에 어머니의 빈소는 3일 내내 시끌벅적했습니다.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동생까지 잘 챙겨주었습니다. 가족끼리 외식하거나, 여행 갈 땐 꼭 며느리의 동생도 챙겨주었습니다. 그 동생이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또 다시 봉투를 내밀었습니다. 며느리는 “어머님, 남편이랑 따로 정은이 결혼 자금 마련해놨어요. 마음만 감사히 받을 게요.” 하며 도망치듯 돈을 받지 않고 나왔습니다. 버스정류장에 다달았을 때 문자가 왔습니다. 며느리의 통장으로 3천만원이 입금된 것입니다. 며느리는 그 길로 다시 시어머니에게 달려갔습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너무 죄송해서 울면서 짜증도 부렸습니다. 안 받겠다고. 시어머니가 함께 울면서 말했습니다: “지은아, 너 기억 안나? 친정 엄마 돌아가실 때 내가 약속 드렸잖아. 혼수해서 시집 잘 보내주겠다고. 나 이거 안하면 나중에 네 엄마를 무슨 낯으로 뵙겠어.” 시어머니는 친정어머니에게 혼자 하신 약속을 지켜준 것입니다. 며느리는 그 날도 또 엉엉 울었습니다. 시어머니는 말하시기를 “순둥이, 착해 빠져가지고 어디에 쓸꼬. 젤 불쌍한 사람이 도움을 주지도 받을 줄도 모르는 사람이야. 그리고 힘들면 힘들다고 얘기하고 울고 싶을 땐 목 놓아 울어버려.” 했습니다. 동생의 결혼을 앞두고 제부 될 사람이 그녀의 시어머니에게 따로 인사드리고 싶다 해서 시부모님과 며느리 부부와 동생네가 함께 만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 때 시아버지가 입을 열었습니다: “초면에 이런 얘기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사돈처녀 혼주자리에 우리가 앉으면 좋겠는데...” 언니는 사실 동생 결혼식 혼주자리에 자기 부부가 앉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녀의 시아버지가 다시 말했습니다: “다 알고 결혼하는 것이지만, 그 쪽도 모든 사람들에게 다 친정 부모님 안 계시다고 말씀 안 드렸을 텐데... 다른 사람들 보는 눈도 있고....” 며느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시부모는 헤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동생네는 너무나 감사하다며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동생은 언니 시아버지의 손을 잡고 신부입장을 했습니다. 동생 부부는 언니 부부 이상으로 언니 시댁에 잘 해주었습니다.
그토록 며느리를 배려하며 많이 사랑해주셨던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49제를 드리고 돌아온 날 그녀는 10년 전 시어머니와 했던 비밀 약속을 남편에게 털어 놓았습니다. “그 때 친정엄마 병원비 어머니께서 해주신 거”라고. 부부는 서로 부둥켜안고 어머니 그리움에 엉엉 울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지금 아들이 둘 있습니다. 그녀는 생활비를 쪼개서 적금을 들고 있습니다. 시어머니가 자기에게 해준 것처럼, 자기도 나중에 며느리들에게 돌려주고 싶어서입니다. 그녀의 휴대폰 단축번호 1번은 아직도 시어머니입니다. 항상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준 시어머니를 생각하며 그녀는 오늘도 이렇게 다짐합니다: “어머님, 우리 어머님, 너무 감사합니다. 어머니 가르침 덕분에 제가 바로 설 수 있었어요. 힘들 시간 잘 이겨낼 수 있었고요. 어머님, 너무나 사랑합니다. 그립습니다. 제가 꼭 어머니께 받은 은혜,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고 사랑하고 나누며 살겠습니다. 너무 보고 싶어요.”

며느리에게 이런 사랑 한 번 주어보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설 생각들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아들 잘난 줄만 알지 남의 딸 귀한 줄은 모르고 며느리를 압박하고 핍박하고 구박하고 쪽박 깨는 무지한 시부모들 되지 말아야 합니다. 금지옥엽같이 자란 남의 집 딸 데려다가 종처럼 부려먹으며 툭하면 흉보고 욕하고 때리고 내쫓을 권리를 누가 부여했습니까? 자녀들이 정말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저 함께 행복하게 잘 살기만을 바라야지 혼수 때문에 평생 며느리 미워하고 아들 힘들게 하며 살아서 되겠습니까? 혼수 타령하는 것은 자기 아들을 내다팔 물건으로 전락시키는 짓에 불과합니다. 그러지들 맙시다. 며느리 둔 부모님들은 언젠가 며느리를 위해 요긴하게 쓸 사랑의 예금통장 지금부터 아들 숫자만큼 하나씩 마련하시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얼마 살지 모르는 세상, 하나님께서 부르시기 전에 여한 없이 실컷 사랑하다 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기에도 너무나 짧은 세월을 미워하고 헐뜯고 비방하고 싸우며 사는 것은 믿음의 삶이 아닙니다. 우리 서로 사랑하며 배려합시다. 내 식으로, 일방적으로 하지 말고 상대방을 배려하며 사랑하는 우리가 됩시다. 사랑의 배려는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을 더 행복하게 합니다. 사랑의 배려는 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기쁨과 이 세상 살 가치를 느끼게 합니다. 사랑의 배려는 사람을 위대하게 합니다. 사랑의 배려는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의 배려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장 하나님을 닮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도 하나님의 사라의 배려이시며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피 흘리심도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배려가 바로 우리를 선택하심입니다. 즉 우리는 누구를 위한 하나님의 배려로 살아가는 일이 곧 우리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나는 누구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를 나타내 보일 것인가? 가족뿐 아니라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런 사람들 저 외국에 있는 어느 가난한 나라 사람들에게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를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무스 에스 사인? 꼭 그래야만 합니까? 에스 무스 사인! 그래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무슨 일이 일이 있든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망설이게 될 때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무스 에스 사인 그래야만 합니까?’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에스 무스 사인 그래야 한다.’라는 하나님의 대답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라온 코이노니아는 우리가 바로 서야할 회복의 자리임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라온코이노니아와 더불어 믿음생활을 해야 합니다. 무스 에스 사인 그래야만 합니까? 에스 무스 사인 그래야 합니다.
우리 라온코이노니아에 속한 우리는 언제나 영적유익을 먼저 구해야 합니다. 무스 에스 사인 그래야만 합니까? 에스 무스 사인 그래야 합니다.
우리 라온코이노니아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는 서로 사랑의 배려로 하나가 되며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가되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무스 에스 사인 그래야만 합니까? 에스 무스 사인 그래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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