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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8년 2월 18일 주일아침 예배  마 22:35-40  愛不孤 必有福 愛之家 必有慶

 

 

중국 북경에 가면 349년된 한약방이 있습니다. 퉁런탕이란 한약방입니다(北京市 西城区 西城区前门外大栅栏24号 전화: 010-63030221) 우리말로는 동인당同仁堂이라고 합니다. 1669년 연거푸 과거시험에 낙방하고 고향가기 부끄러워 과거시험장 근처에 러센양(乐显扬)이란 사람이 시작한 약방입니다. 러센양은 과거시험 보는 중 자신의 허약한 마음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진정시켜주기 위해 우황청심환을 만들어 무료로 선비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황청심환이 처음으로 생겨났습니다. 자연스럽게 우황청심환이 전국에 알려지고 퉁런탕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의 약재사업은 청나라 황실에 알려져 황실 지정 약국이 되었습니다. 황실 뿐 아니라 북경에 사는 백성들도 퉁런탕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청나라 때는 황궁 내 빗물이 잘 흘러가도록 황궁 밖으로 도랑을 팠는데, 이 때문에 밤길을 걷다가 도량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퉁런탕이라고 쓰인 등불을 황궁 근처 길에 설치해 밤눈 어두운 사람들의 눈이 되어준 동시에 백성들에게 회사 상호를 깊게 각인시켰습니다. 퉁런탕은 돈만 버는 약방이 아니라 사람들의 미래를 걱정하고 안위를 지켜주는 가게라는 기업 이미지를 만들어냈습니다. 소위 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기업의 사회적 책임) 마케팅과 유사합니다. 이러한 현명한 전략은 사회주의 혁명도 피해갔습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대부분 기업이 국가에 인수됐지만 퉁런탕만은 무사할 수 있었는데 ‘과거 봉건주의 시절에도 퉁런탕은 사회주의 정신과 그 실천이 투철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고 합니다.  현재 26개국에 130개 지점을 두었으며 2014년도 총자산이 127억위안 약 2조2480악원에 달하는 글로벌 기업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퉁런탕이 지난 300여년 동안 발전해온 원칙이 있습니다. 바로 퉁런탕 북경 본점 대청벽에 걸려있는 말로 중국고전이인 맹자의 이인(里仁)편에 나오는 말입니다.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余慶) 
   선행을 쌓는 자는 의외의 좋은 일이 반드시 있다.

 

덕이 있는 사람은 남을 경쟁상대로 여기지 않고 둥지로 여깁니다.  남의 장점을 부추켜 주고 단점을 가려줍니다. 그래서 그와 함께 있으면 행복해지고 의욕이 생기고 보람을 느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주위사람들에게 착한 일을 많이 하여 칭찬을 받게 됩니다. 공자선생이 말하길  "경영을 덕으로써 하면, 비유컨대 북극성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데 모든 별이 그에게로 향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子曰, 爲政以德 譬如北辰居其所) 경영을 덕으로써 하는 것을 爲政以德이라 합니다. 북경의 퉁런탕 한약방은 이로서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약국도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저는 맹자의 이 말을 기독교적으로 재 해석하였습니다,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를

‘애불고 필유천복  愛不孤 必有天福  사랑은 외롭지 않으니 반드시 하늘의 복이 있고,’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余慶)  선행을 쌓는 자는 의외의 좋은 일이 반드시 있다.>를 

‘적애지가 필유경  積愛之家 必有余慶  사랑의 가정은 반드시 의외의 좋은 일이 있다.’러 바꿔 봅니다.

 

맹자에 소개된 덕은 사람들이 세상적으로 마땅히 행하는 선한 행실을 말합니다. 덕이라고 쓴 한문글자 德을 살펴보면(破字) 행한 행변彳 열십자길十 눈目 하나一 마음心 이 합쳐진 글자입니다. 즉 눈을 들어 바라보니 열십자 대로변이라 어디로 갈까 망설이지 말고 오직 처음 마음먹은 그대로 행하라는 그것이 덕이란 의미입니다. 그런데 저는 눈을 들어 십자가를 바로보며 한 마음으로 인생 을 간다라는 말로 의미를 생각하면서 여기서 한 마음이란 곧 사랑을 의미하는 마음을 뜻하는 것으로 봅니다. 기독교적인 덕이란  사랑을 말합니다.

하루는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율법과 선지자의 모든 말씀의 요지가 이 두 계명 속에 들어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흔히 계명誡命이라 하면 사람을 얽어매 자유를 속박하는 규정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계명은 사랑의 계명이요 우리에게 복주시기 위한 계명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행복으로 계명을 축복으로 바꾸어 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드려라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축복이요, 둘째 축복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행복하게 하라. 이 두 축복은 온 율법과 선지자가 말한 최고의 행복 이니라”

 

그러므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하나님 축복 이웃 축복이라고 하겠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드려야 합니다. 조금 이상한 말처럼 들립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슬퍼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시며 만족하시는 일이 하나님의 행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행복하시는 때가 언제 일까요? 그것은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그 때입니다. 우리의 감사는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다니엘서 6장 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다니엘이 왕의 총애를 받자 다른 신하들이 시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신하들은 어떻게 하면 다니엘을 괴롭힐까 생각하다가 다니엘이 매일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을 알고 왕에게 가서 말하길 앞으로 30일 동안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나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는 법을 공포해달라고 말합니다. 왕은 좋아해서 그렇게 법을 전국에 공포합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이 법이 공포된 것을 알면서도 자기 집으로 돌아와 창문을 열고 지금까지 행하던 그대로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다니엘은 왕이 이미 왕외에 다른 신에게 기도하면 굶주린 사자굴에 던져 죽게 할 것이라는 법이 공포된 것을 알면서도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 다니엘을 보신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하나님은 행복하셨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확실한 행복의 공식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라 이것이 축복계명인 것입니다. 이 계명을 지킬 때에 하나님 행복 나의 행복이 됩니다.


감사의 반대언어는 무엇일까요?  불평, 원망, 등등?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감사의 반대말은 “당연하다”입니다.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사 할 줄 모릅니다. 다람쥐 쳇바퀴를 돌 듯 반복(反復)되던 지루한 일상(日常)은 모든 것이 당연한 것처럼 느껴져 사람들은 감사라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이 감사할 일들을 어떤 사람들은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건강을 잃기 전에 나에게 있는 건강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빛, 공기, 바람 등등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부모님이 나를 키워주시고 돌보아 주시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 각 사람에게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은 당연한 게 하니라 ‘하나님 감사합니다,‘ 입니다.

"지선아 사랑해" 책을 썼던 전신 3 도 화상을 입었던 이지선 씨, 그는 화상을 입어 눈썹이 없었습니다. 눈썹이 없으니 세수하면 물이 눈으로 그냥 흘러 들어왔다고 간증합니다. 전에 눈썹이 있을 때에는 눈썹이 눈으로 오는 물을 막아 주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 각 사람에게 눈썹이 있어서 눈으로 오는 물을 막아 주어서 얼마나 감사합니까? 눈썹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멀쩡한 눈썹을 밀어버리고 영구눈섭을 붙이기도 하니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눈썹을 주신 것에 대해서 저는 감사를 드립니다. 이지선 씨는 화상을 입어 귀 바퀴를 많이 잃어 버렸습니다. 전에 귀 바퀴가 있을 때는 머리를 감을 때 귀속으로 물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귀 바퀴가 충분하지 않아서 머리에서 흐르는 물이 귀속으로 그냥 흘러들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귀 바퀴를 주시어서 머리카락을 감을 때 물이 귀로 들어오지 막아 주는 것 보호해 주는 것 얼마나 감사합니까? 귀 바퀴는 당연 한 것이 아닙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 몸 적절한 장소에 이러저러한 신체를 만들어주신 창조주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두 손으로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행복하셔요.
*두 발로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
*두 눈으로 볼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
*두 귀로 들을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
*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
*편안하게 숨 쉴 수 있고, 물 마실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
*걸음마다 감사하고, 씹을 때마다 감사합니다.    “
*하루 세끼 거르지 않고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
*만나는 사람마다 감사하고, 하는 일마다 감사합니다.          “
*구하지 않았지만 주신 것 감사합니다.             “
*그 모든 것 속에 주님의 깊은 뜻 담겼음을 알기에 감사합니다.  “
*무엇보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범사에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범사(凡事)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감사를 한번 시도해 보세요. 아주 사소한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감사해 보세요 그러면 하나님은 행복해 하시고 그 사소한 감사를 큰 축복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무엇이 감사한가? 감사거리가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아니요, 감사거리가 널려 있습니다. 감사의 지평을 넓혀 보세요. 감사의 깊이를 더해 보세요. 하나님께 감사할 때 하나님은 행복해 하시고 나에게 큰 축복을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행복해 지는 삶의 비밀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행복하지  않다고 여겨진다면 이는 하나님을 행복해 드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凡事感謝 凡事幸福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므로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드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범사에 축복하시니, 여러분, 범사에 행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 축복의 계명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행복하게 하라. 우리는 우리가 행복해 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행복해 지기 위해서 우선 나로 말미암아 우리 이웃이 행복해져야 합니다. 이웃행복 내 행복입니다.
암 치료를 받기 위해 유방절제 수술을 받은 여자가 절망감에 빠져 누워 있습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온전한 인간이 아니라는 두려움 때문에 넋을 잃고 자포자기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평탄치 않은 길을 걸어온 부모님을 떠올렸지요. 그 옛날 두 분은 힘든 상황에 처할 때마다 눈을 반짝이면서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근사하지 않니? 네가 어떻게 그 문제를 헤쳐갈 수 있을 지 기대되는구나.” 그 생각이 들자마자 그녀는 삶을 위협하던 공포와 삭막한 현실을 새로운 눈으로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듀크 대학 병원에서 그녀를 담당한 의사는 ‘러시아 황제처럼 거만하고 육중한 몸에 사자 갈기 같은 머리칼을 휘날리면서 연극배우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병원을 휘젓고 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하얀 가운을 걸친 제자들이 졸졸 따라다니면서 존경 어린 시선으로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받아 적곤 했지요. 그는 너무 무뚝뚝하고 사무적이어서 병실 화분의 꽃들도 긴장할 정도였습니다. 그녀는 우선 의사 앞에서 움츠러드는 것을 극복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생각 끝에 선물 하나를 샀지요. 검정 바탕에 흰 글씨로 ‘미국에서 가장 험상궂은 열 명의 사내들’이라는 문구가 커다랗게 적혀 있는 티셔츠를 말입니다. 듀크 대학에서 가장 권위적인 그 의사는 선물 받은 티셔츠를 쳐다보더니 웃음을 터뜨렸지요. 그리고는 놀랍다는 듯 작은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정말 제게 주려고... 이걸... 샀단 말입니까?” 그 순간 그는 깨달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똑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별 것 아닌 티셔츠 한 장으로 인해 무뚝뚝하고 권위적이기만 하던 의사에게 자신이 내게 소중한 존재라는 걸 일깨워준 것이지요. 이 일이 있은 후 그녀는 시련을 신나는 모험으로 받아들이며 자신감을 갖게 됐고 5년간의 방사선 치료를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그 의사가 유방암 심포지엄에 참석하러 샤를로트에 온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 그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회의장에 들어서는 순간, 연설을 하고 있던 그 의사가 큰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5년이라는 세월이 지났고 5천명도 넘는 환자가 다녀갔을 텐데 그 의사는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행복해야 할 이유는 많다」 케이 알렌보 편, 서현정 옮김, 프리미엄북스 펴냄)

 

음식을 할 때, 단맛을 아무리 내도 더 이상 단맛이 나지 않을 때와 짠맛을 아무리 내도 더 이상 짠맛이 나지 않을 때가 있지요. 그럴 때에는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단맛을 더 내고 싶을 때는 설탕을 더 넣어야 할 것 같지만 사실을 간장을 조금 넣으면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단맛이 더 강해진다고 하네요. 그렇다면 짠맛을 더 내고 싶을 때에는 어떻게 할까요? 간장을 더 넣는 것이 아니라 설탕을 아주 조금 넣어보면 짠맛이 짙어진 것을 느낄 수가 있다고 합니다. 같은 것이 아니라 반대의 것으로 오히려 맛을 더 강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들의 삶이 2%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요. 좀 더 행복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은 남들보다 더 많은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쏟습니다. 그런데 그때 과연 행복할까요? 사실 부유한 사람이나 높은 명예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스스로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이 점은 부유한 나라보다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더 높다는 사실만 보아도 우리는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즉,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것 같은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은 오히려 나를 행복과 더욱 더 멀어지게 만들 뿐입니다. (조명언신부. 그들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할 수 있다 )

 

그렇다면 나를 더욱 더 행복해지게 만드는 것을 과연 무엇일까요? 다른 사람은 먼저 행복하게 해 주는 일입니다. 물론 이웃들에게 큰 행복감을 갖게 해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단맛을 더 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설탕이 아닌 약간의 간장만 있으면 되는 것처럼, 또한 짠맛을 더 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간장이 아닌 약간의 설탕만 있으면 되는 것처럼, 내가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약간의 남을 위한 행복의 실천만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예로 소개한 한 암환자가 근엄한 의사에게 샤스하나를 선물함으로 수년 동안 그 의사는 행복할 수 있었던 것 처럼말입니다.

내가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내 이웃을 행복하게 해 주는 일입니다. 말 한마디라도 아주 작은 선물 하나라도 이웃을 행복하게 해주면 곧 내가 행복하게 됩니다. 우리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기를 원합니다. 그럴려면 아내가 먼저 나를 행복해 주기를 바라지 말고 내가 먼저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말 한마디라도 아내를 섭섭하게 하거나 아내의 눈에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아내의 웃는 모습을 보는 일이 얼마나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시어머니에게 싫은 말을 들었다 해도 남편에겐 웃는 모습을 보인다면 남편은 해복해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설날 명절을 지내면서 여러분, 행복하셨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되셨습니까? 설날은 행복한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충분한 행복을 누렸어야 합니다. 그런데 말을 들으면 명절 증후군이란 병이 있다고 합니다. 너무나 피곤하고 스트레스로 앓는 병을 말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범사에 행복해야 하고 매일이 행복한 날이어야 합니다. 티브이에 나오는 드라마를 보면 어떤 가족들은 항상 밥 먹을 때 가족 간에 티각태각 말다툼을 하고 심지어 밥상을 걷어차는 일도 있습니다. 얼마나 불행한 가정입니까? 우리의 밥상을 다만 밥을 먹는 상이 아니라 행복을 먹는 행복상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서로 존중하고 양보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감싸 안고 따뜻한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찬밥을 먹어도 뜨끈뜨끈한 밥을 먹듯 마음이 따뜻하면 뱃속도 따뜻합니다.  


문제인 대통령이  설날 대국민 인사말로 “가족이 행복해야 나라가 행복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흔히 가족의 보살핌을 받기보다 가족을 위해 무엇인가 섬기도록 하였을 때 우리의 가족은 행복할 것이고 나도 행복하고 나라도 행복해 질 것입니다. 이웃을 위한 배려가 부매랑 처럼 내게로 돌아올 것입니다.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 내 아내를 행복하게 하고 내 남편을 행복하게 하고 내 자녀를 행복하게 하고 내 부모님을 행복하게 하고 내 형제들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 나 자신이 더 많은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불행하게 하고 자신이 행복해지는 법은 없습니다. 부인이 불행한데 남편만 행복해질 수 없듯이 이웃이 불행한데 나만 행복해지는 법은 없습니다. 옆 사람이 함께 행복해져야 나도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행복은 비싼 가구, 좋은 음식, 고급 자동차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물론 잠시 행복해질 수 있다고는 하겠죠. 그러나 그런 행복은 낮은 행복이요 잠시 동안 만의 행복에 불과합니다.


행복은 저 멀리에 있지 않습니다. 먼 훗날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가까운 현장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행복해야 합니다. 여기가 행복한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거기서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저는 아침에 사모가 멀리 있는 아들들에게 해 뜨는 것도 사진 찍어 보내주고 성경말씀도 문자로 보내주면 또 아들들에게 답신의 문자를 받아 보는 아내의 행복한 얼굴을 바라보면 왠지 저 자신도 행복해 지는 것 같습니다. 친절한 전화 한 통화나 짧은 문자를 보냄으로도 행복을 전해 줄 수 있습니다. 이웃을 향하는 선한 말이 꿀송이 같다고 하였습니다. 작은 섬김이 하늘에 상이 크다고 하였습니다. 가족이 행복해야 나라가 교회가 행복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인생이 행복한 인생이 됩니다.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그럴려면 여러분의 가정을 행복한 가정되게 하시고 여러분의 이웃을 행복하게 해주시면 어느새 내가 행복해질 것이다.

 

이번주일부터 사순절 기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골고다로 오르시기 전 40일간을 기억하면 경건한 시간을 가지는 기간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목회에서 이 40일간을 경건하게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가능하면 가무오락을 삼가고 놀이 여행 등을 삼가며 근신하는 생활을 하도록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발상을 전환하기로 하였습니다. 물론 경건함은 기독교인의 생활의 기본이기에 더 강조하지 않지만 예수님의 40일간의 길은 바로 우리들에게 행복을 주시기 위한 힘찬 걸음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40일간은 여러분, everyday happyday 매일매일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따름이 어찌 행복한 일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의 행복을 마귀에게 빼앗기지 마십시오. 불평불만 짜증 탄식 그 무엇으로 여러분의 행복을 마귀에게 빼앗기지 마십시오. 미워하고 다투고 싫은 소리로 나의 행복을 잃지 말고 가족의 행복을 소멸치 말고 이웃 간의 행복이 마귀로 인하여 훼방 받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 또한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둘째 축복의 계명이라 하겠습니다.

 

愛不孤 必有福 愛之家 必有慶(하나님 행복 이웃 행복)
하나님께 감사하므로 축복을 받아 행복해 지고 이웃을 행복하게 하여 축복을 받아 행복한 인생을 살아갑시다. 
우리 라온코이노니아는 즐거운 공동체 해피 홈 행복한 교회입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 이 시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축복주시니 행복하시길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은혜와 축복을 저와 우리 모두에게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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