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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8년 1월 21일  주일아침 예배   사 40:27-31   취항(鷲行) 신앙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으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200년 전 영국의 시인 셀리(Percy Bysshe Shelley:1792-1822)라는 시인이 서쪽 바랑의 노래(西風賦)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그는 철저한 자유로움을 주장하다가 심지어 하나님은 없다는 말을 함으로 그가 다니던 옥스퍼드 대학에서 퇴학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방랑 삼천리 김삿갓처럼 온 유럽을 돌아다니며 많은 여자들과 사랑을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19세때 결혼한 첫 번째 부인은 그의 바람기에 절망하여 자살을 하여 죽고 그의 아들과 딸도 가정을 돌보지 않아 병으로 죽었습니다. 그후 그는 세 여자와 결혼을 하였지만 번번히 걷어차듯 하고 또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그는 30세가 되는 때에 바람부는 어느 날 요트를 타고 바다로 나가 익사체로 발견 되었습니다. 그의 시신은 친구 역시 유명한 시인인 바이런이 수습하여 그 바닷가 모래위에서 화장을 하고 한줌의 재가 되었습니다.

푸르니에(Louis Edouard Fournier)가 그린<셸리의 화장>
  (모자를 벗고 있는 이가 바이런임)

참으로 아쉬운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유는 책임과 의무를 따르게 되며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은 결국 스스로의 인생도 부정하여 타락의 길을 가다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자유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요 축복으로 누리게 되는 것이지 인간 스스로 방종하여 제멋대로 사는 것은 자유가 아닌 것입니다.

며칠 전 서포리에서 버스를 타러 가는 중에 황새 가족 10여 마리가 끼륵끼륵 소리를 내며 하늘을 날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한창 고개를 들어 황새가 날아가고 있는 것을 보며 저 새들은 참 자유롭겠구나 하는 생각을 가졌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아니죠 새들도 나름대로 규칙이 있고 하늘을 날아가는 길이 있습니다. 황새는 평생 자기 짝하고만 사는 부부애가 좋은 새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비 황새는 항상 앞장서 날아가면 그 뒤를 새끼 새들이 쫒아가고 어미 새가 뒤 쫒아 날아갑니다.   이처럼 황새의 자유로움은 철저한 보호아래 누리는 자유입니다. 

지난 1월 16일밤 TV를 보다가 뭉처야 산다는 프로를 시청하였습니다. 이 프로는 김성주 정형돈 김용만 안정환 추성훈 등이 아프리카 잠비아와 짐바브웨라는 나라를 여행을 하며 특히 두나라 사이에 있는 빅토리아 폭포여행을 하는 장면을 보여 주었습니다, 108미터나 되는 폭포 그 가장자리에 데빌즈 풀(악마의 수영장)이란 작은 수영장이 있습니다. 이 수영장은 폭포수가 108미터 아래로 떨어지는 그 가장자리로 매우 위험한 곳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무서워 아무도 물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추성훈이 용기를 내어 풍덩 물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자칫 천길만길 폭포아래로 떨어질 위험이 있게 됩니다. 그런데 그는 안심하고 뛰어 들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물에 뛰어 들었을까요? 그것은 알파와 오메가라는 가이드 있어 그가 그 폭포 맨 가장자리에 떡 버티고 앉아 있어서 추성훈이 실족하지 않도록 막아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잠비아와 짐바브웨 사이 빅토리아폭포(108m)
폭포 끝자락 데빌즈 풀장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자유롭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만큼 인생의 고난과 역경을 만나게 됩니다. 물론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고난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더 큰 고난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샤람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생 그 자체가 두렵고 외롭고 불안한 인생입니다. 아무도 이 질고에서 벗어 날수 없습니다. 

인생질고의 굴레, 누가 이 굴레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할 것인가?  사람들은 이 질고에서 자유를 누린다고 하지만 오히려 더 조여져 오는 질고의 고통만 더 받을 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이 질고 속에 진정한 자유를 누립니다. 어떻게 자유를 누릴 것입니까?
 
이사야 53:4-5에서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그리고 이어 7절-8절에서“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여기서 그는 누구를 말합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에디오피아 간다게 여왕의 신하가 예루살렘에 왔다가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길에 빌립집사를 만났습니다. 당시 이 신하는 이사야서를, 위에서 읽은 말씀을, 때마침 읽고 있었습니다. 이 신하가 빌립집사에게 성경에서 말하는 그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빌립집사는 그 신하에게 그는 곧 예수그리스도를 말함이라고 말하며 복음을 자세히 들려주었습니다. 이 신하는 크게 깨닫고 마차에서 내려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기나라에 돌아가서 예수그리스도를 전하여 모든 백성들이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지금 에티오피아 국교가 에티오피아 기독교입니다.  기독교의 신비가 여기에 있습니다. 환난을 만났지만 환난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를 누립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환난을 대신 짊어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십자가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나의 환난을 대신 짊어지고 계신다는 약속의 증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 아래에서 자유를 누립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우리는 고난 중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은혜를 받게 됩니다. 고난이 없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학교에서 시험을 치루지 않으면 학생들은 자기의 실력이 어떤한지를 잘 알지 못하는 것처럼 인생의 고난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는 시험이라고 할 것입니다.

겨울은 참으로 우리에게 큰 고난을 안겨다 줍니다. 그러나 추위와 눈보라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봄이 얼마나 따뜻한지 알지 못합니다.  남쪽 나라사람들은 추위를 모르니 따뜻함도 모릅니다. 박노해라는 시인이 “겨울 사랑”이란 시를 썼습니다. 그 시 내용은 이러합니다.

 

겨울 사랑 / 박노해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에게 겨울이 없다면
무엇으로 따뜻한 포옹이 가능하겠느냐
무엇으로 우리 서로 깊어질 수 있겠느냐

이 추운 떨림이 없다면
꽃은 무엇으로 피어나고
무슨 기운으로 향기를 낼 수 있겠느냐
나 언 눈 뜨고 그대를 기다릴 수 있겠느냐

눈보라 치는 겨울밤이 없다면
추워 떠는 자의 시린 마음을 무엇으로 헤아리고
내 언 몸을 녹이는 몇 평의 따뜻한 방을 고마워하고
자기를 벗어버린 희망 하나 커 나올 수 있겠느냐

아아 겨울이 온다
추운 겨울이 온다
떨리는 겨울 사랑이 온다

 

겨울 사랑 그렇습니다. 우리는 환난 중에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받습니다. 누가 위로를 받습니까? 인생의 질고 속에 있는 사람들은 외롭습니다. 그래서 우울증에 걸립니다. 요즈음 뉴스를 보면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의 고통과 비극을 듣게 됩니다. 30대 주부가 자신의 4 살배기 아이를 강에 던져 버린 사건이 있습니다. 우울증에 걸린 남편이 부인과 아이들을 살해한 사건도 있습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통계에 따르면 우리 국민 중 4명 가운데 1명이 우울증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직장인 40%가 우울증에 걸려 있다고 합니다. 중증환자만 추려도 70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특히 노인들이 우울증으로 고생하는데 역시 노인 다섯 명 가운데 한명이 우울증에 걸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 우울증을 어떻게 고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울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우울증환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를 돕는 누구로부터 위로를 받는 일입니다. 우울증이란 ‘우’ 옆에 기댈 수 있는 사람 ‘ㅣ’가 있으면 위로의 ‘위’가 됩니다. 그 기댈 수 있는 그 한사람 ㅣ가 누구입니까? 아니 위로를 백명의 사람으로부터 받는다 해도 우울증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요즈음 연예인들 가운데 자살사건이 일어나고, 대마초 마약문제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은데 그들에게 기댈수 있는 사람이 없어 그런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울증은 일종의 영적 문제입니다. 우리의 정신을 사로잡은 마귀와의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로부터 그의 영혼이 자유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위로는 누구에게서 옵니까? 위로부터 옵니다. 위로는 위로부터 내려옵니다. 약1:17에서 “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환난 중에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하는 환난이 크면 클수록 우리에게 더 큰 위로를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더 큰 환난과 더 큰 위로의 경험은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는 데 더 큰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과 큰 믿음의 선배들은 환난이나 시험이 닥칠 때 오히려 즐거워하고 기뻐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5:3-4에서 쓰기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했습니다. 야고보도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견디는 시련은 비슷한 시련을 당할 사람들을 위로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환난을 당할 때 우리가 먼저 위로를 얻을 수 있고 또 우리가 환난 중에 받는 위로가 다른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사도 바울의 환난의 경험과 그로 인한 위로의 깨달음을 우리의 것으로 삼을 수 있다면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하나님의 도구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그 어떤 환난을 겪게 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는 기회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환난을 당할 때마다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환난을 당할 때일수록 위로의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환난을 당할 때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을 위로하는 데 쓰임 받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격과 기쁨과 감사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기독교인의 대화는 위로와 격려와 용기를 주는 말을 주고 받아야 합니다. 이는 살리는 대화입니다. 죽이는 대화 아픔을 주는 대화 저주하는 대화는 기독교인의 대화가 아닙니다.

황새가 높은 나무위에 둥지를 만들고 알을 낳습니다. 얼마 후 새끼가 깨어납니다. 어미 황새는 새끼 황새를 끔찍이 아끼며 사랑하며 기릅니다. 맛있는 먹이를 수없이 날라다 먹입니다. 비가 오면 날개를 펴서 새끼들이 비가 맞지 않게 합니다. 새끼들이 잘 자랍니다. 이제 성숙하면 잔인하게 합니다. 3일간 먹이를 주지 않습니다. 사람도 3일 금식하기 힘든 데 새끼 새를 3일 간 금식을 시킨다는 것은 정말 잔인한 것입니다. 몸에 살이 쪽 빠집니다.   아주 가벼운 새가 됩니다. 그 때 어미 황새는 둥지를 헐어 버립니다. 그리고 새끼를 높은 나무위에서 사정없이 떨어 뜨립니다. 그리고 어미 새는 새끼 밑으로 가서 떨어져 죽을 것같으면 받을 준비를 합니다. 새끼 황새는 사정없이 떨어지다가 본능적으로 날개를 움직여 봅니다. 자기도 모르게 공중으로 치솟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처음으로 날아보는 순간입니다. 이렇게 하여 성숙한 황새가 됩니다. 황새는 깨닫게 됩니다.  <떨어지다 보니 나에게 날개가 있었네.>
그렇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인생의 고난과 역경 외로움과 슬픔가운데서 고난당하다 보니 나에게 날개가 있었네!  외로움으로 괴로워하다 보니 나에게 날개가 있었네!  우리 기독교인은 나에게 날개가 있음을 발견하는 사람입니다. 무슨 날개 입니까? 오늘 봉독한 이사야 말씀을 보니 그 날개는 크고 우람한 독수리 날개라는 것입니다.

웨인 다이어(Wayne Walter Dyer 심리학교수)는 “이 세상에는 오리형과 독수리형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오리는 하루 종일 하는 일없이 꽥꽥거리며 온갖 시끄러운 소리를 냅니다. 반면에 독수리는 묵묵히 자기 일을 하며 사람들 위로 높이 날아다닙니다. 고객 중심의 직장에서는 독수리 형이 번성합니다. 사장의 만족과 맹종만 지배하는 곳에는 오리형이 증가합니다. 세상 어디에나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대조됩니다. 고고히 자신의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꽥꽥 요란한 소리만 내고 일은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독수리는 새 중의 새입니다. 힘과 위엄의 상징입니다. 자유와 용맹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흔히 육지에서 가장 강한 동물이 무엇이냐고 하면 지역에 따라서 다르다고 합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사자가 강하고 인도에서는 호랑이가 강하다고 합니다. 코끼리도 느린 듯하지만 화가 나면 무서울 정도로 사납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단연 독수리입니다. 다른 새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독수리는 하늘을 평정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맹금류의 대표가 독수리입니다.
전 세계에는 48종의 독수리가 있다고 합니다. 독수리를 나라새 즉 국조로 삼은 나라도 많이 있습니다(미국 인도네시아 북한은 참매). 이제는 독수리가 희귀하기까지 하니 더욱 귀한 존재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독수리는 천연기념물 24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독수리라는 단어가 37번 나옵니다. 성경이 의미하는 독수리의 이미지는 강한 동물이며, 새들의 왕이며, 빠른 새이며, 무서운 동물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신성을 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높은 것의 상징인 독수리로 요한복음을 일컫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독수리복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독수리의 날개는 70~90센티미터라고 합니다. 굉장히 강한 날개의 상징이 독수리 날개입니다. 독수리가 독수리 되게 하는 것이 날개입니다. 다른 모든 것이 사납지만 독수리는 날개가 벌써 힘이 있고 사납게 생겼습니다.
시편 103:5에는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라고 합니다. 독수리는 새롭고 힘이 있고 하늘을 차고 올라가는 용기를 가진 새입니다. 특별히 성경은 ‘독수리 날개’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독수리의 날개가 주는 의미를 음미해 보면서 은혜의 날개, 힘 있는 날개를 지닐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힘을 다시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날개는 무슨 날개 입니까? 날개는 좌 우 두 개가 있습니다.

한쪽 날개는   보호하시는 은혜의 날개입니다.

성경에서 독수리의 날개는 보호의 상징입니다. 보호하는 것은 힘이 필요합니다. 힘이 있기에 보호할 수 있습니다. 힘이 없이는 보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신명기 32:10에는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라고 합니다. 특별한 애호를 상징합니다. 자기의 눈동자는 본능적으로 보호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백성을 보호하십니다. 신명기 32:11에는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라고 합니다.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는 것은 새끼를 깨워서 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는 것은 새끼를 물어 공중에서 떨어트려 새끼의 날개를 단련하는 것을 말합니다. 새끼가 날지 못해 떨어지게 되면 어미는 얼른 날개로 받아줍니다. 이것이 독수리의 훈련과 보호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 백성을 훈련하시고 보호하십니다.
출애굽기 19:4에는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고 합니다. 독수리는 새끼를 강하게 훈련할 뿐만 아니라 극진한 모성애로 보호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를 강하게 훈련하십니다. 그리고 극진하게 날개로 업어 보호하십니다.
알바니아에서 사역하던 어느 한국 선교사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1997년 알바니아는 무정부 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사회가 혼란하고 치안이 극도로 위험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집안에서 출입을 할 수 없었습니다. 알바니아에 들어오는 모든 비행기와 선박이 중단되고 사람들은 완전히 고립되었습니다. 앞으로의 상황은 판단이 불가능하였습니다. 알바니아 선교사 연합회 회장이었던 미국 선교사가 무선으로 미국 정부에 외국인의 탈출을 조치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예상할 수 없었습니다. 선교사회 회장은 동요하지 말고 기도하면서 집안에 머물러 기다리자고 하였습니다. 3일 후에 다시 무선 연락이 왔습니다. 한국 선교사는 모두 미국 대사관으로 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미국 대사관에 도착하여 먼저 여권 심사를 받은 뒤에 버스 안에서 하루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며칠 전 묵상하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묵상 시간에 읽은 성경은 출애굽기 19:4이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여”. 이 말씀 가운데 “독수리”라는 단어가 눈에 크게 들어왔습니다. 독수리가 와서 우리를 구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독수리가 와서 날개로 업어 구원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다음날 새벽 5시 미국 군인이 깨웠습니다. 굉음과 함께 헬리콥터 한 대가 대사관 잔디에 앉았습니다. 헬멧과 조끼를 착용하고 선교사의 가족과 팀은 헬리콥터로 달려갔습니다. 헬리콥터에 타는 순간 선교사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헬리콥터의 날개에는 독수리 마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프로펠러 달린 독수리를 보내셔서 선교사의 가족을 업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3:34에는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독수리같이 날개 위에 업고 보호하십니다. 때로는 암탉같이 날개 아래 품고 보호하십니다. 날개는 하나님의 보호의 상징입니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얘기랍니다. 학교에서 도덕시간에 서술형 문제를 냈습니다. “부모님은 우리를 왜 사랑하실까요?” 여러 재미있는 답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아이가 정말 재미있는 답을 썼습니다. 그 아이의 답은 “그러게 말입니다”였습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보호하십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그 외에는 명확한 답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사랑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고로 답이 없습니다. 복음성가에 이런 가사의 찬양이 있습니다. “사랑이 구주를 죽게 했네, 왜 날 사랑하나? 겸손히 십자가 지시었네.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했나, 왜 날 사랑하나” 이유 없는 그 사랑과 보호하심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다른쪽 또 하나의 날개는 하나님께 올라가는 믿음의 날개입니다.

싱거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싱거는 무척 가난한 가정의 남편이었습니다. 그는 고달픈 생활을 이어가던 중  병이 나서 자리에 눕게 되었습니다. 가정 경제가 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그 부인이 용기를 잃지 않고 낮에는 남의 빨래를 해주었고, 밤에는 삯바느질로 남편의 병 수발과 가사를 꾸려 나갔습니다. 병중에서 싱거는 하나님께 어떻게 하면 고생하는 아내를 도울 수 있겠습니까? 매일 울면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어느 날 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디어로 한 기계를 만들었습니다. 기도 가운데 그는 건강을 되찾고 본격적으로 기계를 연구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발명한 것이 미싱 재봉틀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을 붙여 싱거미싱을 대량 생산을 하였습니다. 그는 고난 중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간곡한 신앙으로 이겨 내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믿음의 날개 짓이란 말입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라고 말씀 합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올라갑니다. 어디로 올라갑니까? 여호와께로 올라갑니다. 독수리의 그 날개는 하나님께 올라가는 믿음의 날개입니다. 피곤치 않게 힘을 주시는 날개입니다. 하나님께 올라갈 때까지 지치지 않습니다. 곤비하지 않게 힘을 주십니다. 이것이 독수리의 날개입니다.
날개는 왜 있습니까? 날려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 사람의 창조 이야기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다 만드셨습니다. 동물과 새를 다 만드셨는데 새가 하나님께 불평을 하였습니다. 다른 동물들은 다 싸울 수 있는 무기를 주셨습니다. 사자는 사나운 이빨을 주셨고, 뱀은 독을 주셨고, 말은 뒷발질을 하는 발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자기에게는 아무 것도 주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동물들의 공격을 받게 되면 도망가야 하는데 괜히 날개를 붙여주어서 무겁기만 하고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말씀합니다. “이 어리석은 새야, 날개는 날라고 준 것인데 날지 않으면 무거운 짐일 뿐이지”. 그 말을 듣고 그제야 새가 날아보았다고 합니다. 날지 않으면 날개는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짐입니다. 날지 못하는 날개는 있으나마나 입니다.
하나님께로 날아가지 못한 날개는 거추장스럽고 피곤합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다만 형식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날아 보지 못한 믿음의 날개로 그들은 결국 하나님 나라에까지 날아 올라가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콜로라도 계곡에 서식하는 독수리는 쇠처럼 단단한 나무에서 가지를 물어와 둥지를 만듭니다. 이 나무에 날카로운 가시가 있어 둥지를 지을 때 새끼들이 찔리지 않도록 가지를 잘 포갠 다음에 나뭇잎이나 깃털이나 풀을 쌓아 부드럽게 만듭니다. 새끼들이 독립할 때가 되면 어미 독수리는 본능적으로 그 부드러운 쿠션을 치워 버립니다. 새끼들은 가시에 찔리고 참다못해 둥지 밖으로 기어 나옵니다. 어미는 새끼를 벼랑 끝으로 유인하여 떨어트립니다. 새끼가 나는 것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날개의 힘을 길러주는 것입니다.
이런 독수리의 둥지는 직경이 무려 3미터나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큰 것은 둥지의 무게가 2톤이나 된다고 합니다. 독수리는 이런 훈련을 통하여 먹이를 낚아챌 때 시속 180km로 날아갑니다. 한번 날 때마다 직경 90km의 반경으로 멀리 날아갔다 온다고 합니다. 어미 독수리는 새끼에게 나는 법을 가르치고 날개를 강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독수리의 사는 법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독수리 날개 쳐 올라가듯 날마다 올라가는 삶을 삽니다. 하늘을 향해 비상하는 삶을 삽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믿음의 날개가 튼튼해야 합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 갑니다”는 찬송의 가사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고백입니다. 우리에게는 올라가는 믿음의 날개가 필요합니다. 하늘을 향해 세상을 차고 올라가는 믿음의 힘이 필요합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매일 조금씩 향상되는 삶입니다.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 보다는 내일이 더 나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평범하면서도 신비한 것이 있습니다. 높이 올라가면 작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만 높이 올라가면 멀리 본다는 것입니다. 평범하지만 신비로운 지혜입니다. 올라가면 세상의 사소한 것이 사라집니다. 믿음의 날개가 있으면 세상의 사소한 것은 사소하게 보입니다. 날개가 없이 땅에서 보면 굉장히 커 보이지만 날개를 가지고 올라가서 보면 굉장히 작아 보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날개가 가진 신비입니다.

세계적인 심리치료사인 리처드 칼슨(Richard Carlson)이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강미경옮김 창작시대간 2011년)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세상의 모든 것은 사소한 것이라고 합니다.
하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쓸데없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고 삽니다. 그런데 날개가 있어 올라가는 사람은 사소한데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올라가는 사람만이 사소한 것을 보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은 “네 여정을 막는 사소한 일에 너무 신경을 쓰거나 꾸물거리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삶의 굳건한 터전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사소한 일들이 쌓이고 쌓여 네가 가는 길에서 영원히 끌어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권합니다.

믿음은 자라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키를 제보면 어떠할까요? 어린 손자들이 집에 오면 벽 기둥에 세워 키를 재었습니다. 나날이 키가 자라 이제는 더 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이제는 키가 훌쩍 커버렦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날마다 자라야 합니다. 그래야 그 믿음의 날개로 더 높이 날개되고 e 멀리 날아가 마침내 하나님 나라에까지 날아가 닿게 됩니다.
에베소서 4:15에는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금년 여러분의 믿음이 지금까지 자란 것에 만족하지 마시고 더 자라서 믿음의 날개 쳐 훨훨 하나님의 은혜로 축복의 세상을 날아다닐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취항(鷲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제가 만든 말입니다. 본래는 안항(雁行)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말은 안雁은 한문으로 기러기 안입니다. 기러기들이 날아 갈 때 V자 형으로 줄을 맞추어 날아가는 것을 안항이라고 합니다. 앞선 기러기들이 날개를 칠 때마다 만들어지는 상승기류는 뒤따르는 기러기들이 혼자 날 때보다 71% 정도나 쉽게 날 수 있게 도와줍니다. 가끔 알 수 없는 이유로 V자 대형에서 이탈하는 기러기가 나타나지만, 곧 공기의 저항을 느끼고 원래 대형으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만일 앞에서 인도하는 대장 기러기가 지치면 스스로 대형 뒤로 물러서고, 그 뒤를 따르던 기러기들이 앞으로 나와 V자 대형과 속도를 유지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설교제목으로 기러기 안雁자 대신에 독수리 취鷲자를 써서 취항鷲行이라고 한 것 입니다. 이는 우리가 고난과 역경 외로움과 슬픈 겨울 인생에서 마치 독수리 날개 치며 날아가듯 예수님이 앞장서 날아가시고 우리는 뒤따라 날개 치며 날아갈 때 어떠 고난도 이길 수 있고 어떤 외로움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6:26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고 말씀 하였습니다. 그러면 공중에서 나는 새를 보세요. 그 새들이 가만히 있습니까? 날개 짓을 부지런히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무 가지에 앉아있는 새를 보라고 하지 아니했습니다. 새가 날려면 일분간에도 수 없이 반복되는 날개 짓을 해야 합니다. 꿀벌 벌새 Bee Hummingbird (Mellisuga helenae)중 작은 것은 1초에 15-80번을 한다고 합니다. 믿음의 날개는 항상 날개 짓을 해야 합니다. 날개는 접어놓으면 퇴보합니다. 그러기에 믿음의 사람들은 항상 부지런해야 합니다.
옛날 제 아버님 교회에 길거리에서 풀빵장사하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풀빵을 만들어 팔면서는  흥얼흥얼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분은 집사님으로 제 중등부교사 였습니다. 나중에 그분은 장로가 되었고 호텔사장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날개를 펴면 힘이 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아무리 하찮은 일을 하면서도 독수리의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 입니다. 같은 일을 해도 믿음의 날개를 펴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좌절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생활에 결코 게을러지지 않습니다. 만일 믿는 사람들이 게으르면 유혹이 찾아들게 마련입니다. 죄의 유혹이 바쁘고 가난할 때가 아닙니다. 한가할 때 찾아옵니다. 날개 짓을 하지 않으면 몸은 무거워 땅으로 내려앉게 마련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의 날개로 사회 모든 분야에서 앞서가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날을 수 있는 <믿음>입니다.

어제가 절기상 대한입니다. 대한에는 시레기된장국에 찰밥에 백김치를 먹는 다고 합니다. 그리고 2주 후에 입춘입니다.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으리라고 하였는데 대한이 오니 입춘도 멀지 않습니다. 여러분 세상이 아무리 위험하고 고난이 우리 앞에 있다 할지라도 아무리 막다른 절벽위에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겨울 인생이라 할지라도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으리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은혜의 날개로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또한 열심히 믿음의 날개 짓으로 앞으로 남은 344일 어떤 세상이 우리 앞에 가로막고 우리를 두렵게 하는 세상이 펼쳐진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믿음의 날개로 훨훨 독수리 날개치듯 날아올라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존경 받는 지성인으로 이어령박사님이 있습니다. 이 분이 2018년 새해들어와 소원시라는 것을 발표 하였습니다. 그 시를 소개하겠습니다.

 

소원시 / 이어령

 

벼랑 끝에서 새해를 맞습니다.
덕담대신 날개를 주소서

어덯게 여기까지 온 사람들입니까

험난한 기아의 고개에서도
부모의 손을 뿌리친 적 없고

아무리 위험한 전란의 들판이라도
등에 업은 자식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앉아 있을 때 걷고
그들이 걸으면 뛰었습니다

숨 가쁘게 달려와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눈앞인데
그냥 추락할 수는 없습니다

벼랑인 줄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어쩌다가
북한이 핵을 만들어도 놀라지 않고
수출액이 오천억 달러를 넘어서도
웃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거짓 선지자들을 믿은 죄입니까?

남의 눈치 보다 길을 잘못 든 탓입니까?

정치의 기둥이 조금만 더 기울어도
시장경제의 지붕에 구멍 하나만 더 나도
법과 안보의 울타리보다 겁 없는 자들의 키가 한 치만 더 높아져도
그때는 천인단애(千仞斷崖)의 나락입니다

비상(非常)은 비상(飛翔)이기도 합니다

싸움밖에 모르는 정치인들에게는
비둘기의 날개를 주시고

살기에 지친 서민에게는
독수리의 날개를 주십시오

주눅 들린 기업인들에게는
갈매기의 비행을 가르쳐 주시고

진흙 바닥의 지식인들에게는
구름보다 높이 나는 종달새의
날개를 보여주소서
날게 하소서...

뒤쳐진 자에게는
제비의 날개를

설빔을 입지 못한 사람에게는
공작의 날개를

홀로 사는 노인에게는
학과 같은 날개를 주소서

그리고 남남처럼 되어 가는 가족에게는
원앙새의 깃털을 내려주소서

이 사회가 갈등으로 더 이상 찢기기 전에
기러기처럼 나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소리를 내어 서로 격려하고
선두의 자리를 바꾸어 가며
대열을 이끌어 간다는
저 신비한 기러기처럼
우리 모두를 날게 하소서


라온코이노니아 우리와 우리 자녀 손들이, 취항 예수님을 따라 독수리 날개 치듯 2018년 세상을 힘차게 날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도 이어령박사의 소원의 시의 마지막 기도처럼

소리를 내어 서로 격려하고
선두의 자리를 바꾸어 가며
대열을 이끌어 간다는
저 신비한 기러기처럼
우리 모두를 날게 하소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여러분의 가정과 생업에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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